호조 도키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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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 초대 싯켄
호조 도키마사
北条時政

파일:호조도키마사.jpg
생몰년도
1138년 ~ 1215년 2월 6일 (향년 77세)
재임기간
초대 싯켄
1203년 ~ 1205년

1. 개요
2. 생애
2.1. 작은 호족에서 쇼군의 장인으로
2.2. 막부의 권력을 장악하다
2.3. 최후
3. 여담



1. 개요[편집]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싯켄으로 무가 정권 시대를 연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장인이다.

2. 생애[편집]



2.1. 작은 호족에서 쇼군의 장인으로[편집]


계보로 치면 겐지보다는 타이라노 기요모리로 대표되는 간무 헤이시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가계가 정확하진 않다. 원래대로라면 이즈국(伊豆国)[1]의 지역 호족 정도로 일생을 보낼 운명이었지만 1159년 일어난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서 타이라노 기요모리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를 죽이고 승리하면서 호조 도키마사의 운명도 바뀌게 된다.

기요모리가 요시토모와 그의 첫째, 둘째 아들을 모두 죽였지만 계모의 부탁으로 요시토모의 셋째 아들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죽이지 않고 이즈국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 관리를 호조 도키마사가 맡게 되었는데 그와중에 장녀인 호조 마사코가 요리토모와 눈이 맞아 결혼을 하게되버린 것. 마치 역적이 사위가 되어버린것과 같은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기요모리의 견제는 사실상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2]

이와중에 기요모리의 헤이시 정권엔 고시라카와 법황 및 공경 세력과의 갈등, 그리고 지나친 권력 독점 시도[3]에 따른 각 지역의 민심 이반으로 점점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고, 모치히토 왕자의 반란을 계기로 전국의 겐지가 봉기해 겐페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 도키마사와 호조 가문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따르게 되었고 끝내 단노우라 해전에서 겐지가 승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가마쿠라 막부를 열고 쇼군에 올랐다. 당연히 도키마사는 쇼군의 장인어른이 된 셈.

하지만 쇼군의 장인으로서 존중을 받을 뿐 좀처럼 권력의 중심부에 다가갈 기회가 열리지 않았는데, 외려 쇼군 자리에 오른 요리토모와 갈등을 하게 되자 이에 반발하여 자신의 본거지인 이즈국으로 항의성 낙향을 하기도 했다.

그 이후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시작으로 요리토모가 겐지 친족을 향한 숙청을 시작했고, 그 틈에 도키마사와 호조 가문에도 다시 길이 열리게 된다. 요시츠네를 대신해 교토 조정과의 교섭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아 요리토모의 신뢰를 되찾았고 도키마사는 교토슈고(京都守護) 자리에 올랐다.

2.2. 막부의 권력을 장악하다[편집]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권력이 영원할 듯했지만 1199년, 예상밖 낙마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요리토모의 차남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2대 쇼군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아버지만한 정치력을 발휘하지는 못했고 외려 유력 고케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중심에 도키마사와 호조 일족이 있었다.

도키마사와 호조 일족은 요리이에의 독주에 반대하며 13인의 합의제(十三人の合議制)를 시스템화해 견제했다. 물론 요리이에는 이에 반발해 친위세력을 키우려 했지만 외려 측근이었던 카지와라 카게토키가 반역의 누명을 쓰고 죽었고 외척이었던 히키 가문 역시 도키마사와 호조 가문이 자신들을 따르는 고케닌들을 규합해 제압하면서 수족을 모두 잃어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다.[4]

결국 요리이에는 1203년 쇼군 자리에서 쫓겨났다 죽음을 맞이했고, 호조 가문은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쇼군으로 올리고 도키마사 본인이 싯켄에 오르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이즈의 호족이었던 그가 무사들을 지배하는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

이후 막강한 권력을 누린 것으로 보이는데, 1205년 6월에는 유력 고케닌 중 한 명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重忠) 부자를 사위[5] 히라가 도모마사의 참소만 믿고 단독으로 모반죄를 걸어 참살해버리기도 했다. 이때 아들인 호조 요시토키와 딸이자 초대 쇼군의 아내인 호조 마사코가 강력하게 말렸지만 이를 무시하면서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2.3. 최후[편집]


하지만 지나치게 욕심을 내다 화를 불렀다. 독단적으로 자신의 후처와 공모해 사네토모까지 살해하고 사위 히라가 도모마사를 쇼군 자리에 올리려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하다가 딸 호조 마사코와 아들 호조 요시토키에게 걸리고 만 것.

감히 쇼군을 살해하려고 했던데다가, 이미 자식들과의 사이가 크게 벌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반역죄로 죽음을 맞았어도 할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요시토키와 마사코가 자기 아버지인 도키마사를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권력을 놓고 이즈국의 장원에 사실상 유폐당하는 선에서 그쳤다.

워낙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인만큼 당대 및 후대에 여러가지 해석이 나왔는데 가마쿠라 초기에 작성된 《육대승사기(六代勝事記)》[6]에는 도키마사가 모든 계획을 짜고 실행하려 했다고 적혀있는 반면,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에 가까운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는 도키마사가 나이가 많아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후처의 선동에 놀아나서 무리한 시도를 했다고 적혀있다.

이후 권력은 후임 싯켄에 오른 요시토키가 장악하게 되었고, 본인은 계속 유폐당해 있다가 1215년, 종기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3. 여담[편집]


생애에서 볼 수 있다시피 지방 호족에서 일약 무가의 최고 실권자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정작 당대에도 평은 좋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만년의 노욕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것이라는 말의 반면교사인셈.

특히 호조 도키마사 본인의 손자이자 3대 싯켄인 호조 야스토키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무가법(武家法)인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 ごせいばいしきもく)를 제정하면서 막부의 권력을 절대화한 인물로 유명한데 막부의 최고권력자로서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그 부인 호조 마사코, 자신의 아버지 호조 요시토키를 막부의 조묘로 삼아 자주 참배하고 여러차례 예를 올렸지만 도키마사에 대해서는 반역자로 평가하며 사실상 존재를 부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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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 시즈오카현에 속해있다.[2] 이때 기요모리는 내부결속을 다지면서 조정하고의 관계를 강화하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걸로 보이며 기요모리의 삼남 무네모리는 호조와 요리토모가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반발했지만 묻힌 것 같다. 아마도 당시 기요모리와 장남 시게모리, 차남 모토모리는 이것이 별일 아니라고 판단한걸로 보인다 당시 호조는 그저 동쪽의 변두리 지방 호족일뿐 영향력은 없었다고 생각했을수도 있다.[3] "헤이시(타이라씨)가 아닌 자는 사람도 아니다(平氏にあらずんば人にあらず)"라는 말로 유명하다.[4] 요리토모의 지나친 친족 숙청으로 요리이에를 지켜줄 친위세력이 마땅치 않았던 영향이 크다.[5] 시게타다 역시 이나게 시게나리등과 함께 그의 사위중 한명이었다.[6] 다만 조큐의 난 직후 공가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상황파악이 좀 더 부정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