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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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초대 의장
베트남 민주 공화국 초대 대통령
베트남 민주 공화국 임시 혁명 정부 초대 통령
호찌민
胡志明(호지명) | Hồ Chí Minh


본명
응우옌신꿍
(Nguyễn Sinh Cung, 阮生恭, 완생공)
국적
[[베트남|
파일:베트남 국기.svg
베트남
]][[틀:국기|
]][[틀:국기|
]]

출생
1890년 5월 19일
인도차이나 연방 응에안 주 남단 구역 안츄마을[1]
사망
1969년 9월 2일 (향년 79세)
베트남 민주 공화국 하노이
배우자
없음[2]
학력
프랑스-베트남 학교 (중퇴)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
국제레닌학교 (졸업)
신장
165㎝
직업
공산주의 혁명가, 독립운동가, 정치인
종교
무종교(무신론)
정당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SFIO
]] (1919 ~ 1921)

(1921 ~ 1925)

[[베트남 공산당|
]]
(1925 ~ 1969)
약력
초대 베트남 민주 공화국 대통령 (1945년 9월 2일 ~ 1969년 9월 2일)
초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정부 통령 (1945년 9월 2일 ~ 1955년 9월 20일)
초대 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의장 (1956년 11월 1일 ~ 1960년 9월 10일)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Ho_Chi_Minh_Signature.svg.png

1. 개요
2. 일생
2.1. 내력과 출생
2.2. 독립운동의 시작
2.3. 애국(愛國)
2.4. 1년의 투옥과 미국 OSS와의 협력관계 구축
2.5. 항명의 성공, 독립 정부의 수립
2.6. 혼란기와 프랑스의 축출
2.7. 베트남의 분단과 북베트남의 사회주의 건설
2.8. 대외 활동과 베트남 전쟁
2.9. 구정 공세와 최후
2.10. 기타
3. 성격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4.2. 부정적 평가
4.2.1. 사상에 대한 과대평가
4.2.3. 정치적 탄압
4.2.4. 북베트남 및 베트콩 진영의 학살 책임 의혹
4.2.5. 베트남 전쟁의 성격에 대한 쟁점
4.2.6. 지역 패권주의
5. 어록
6. 여담
7. 관련 서적
8. 매체에서
9. 참고 문헌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Không có gì quý hơn độc lập, tự do.

독립과 자유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cùng ở, cùng ăn, cùng làm

꿍어(함께 산다), 꿍안(함께 먹는다), 꿍람(함께 일한다)


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자 혁명가, 독립운동가.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다. 베트민을 조직하여 프랑스와 일본에 의해 지배 받던 식민지 베트남의 독립을 이루었으며, 이후 베트남 전쟁을 통해 분단 베트남의 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20대 초반부터 노년 시절까지 반평생을 반(反)식민지 해방 투쟁을 전개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반면 보트피플로 탈출한 베트남계 미국인들이나 비슷한 반공주의자들에게는 "베트남 공산당이 벌인 반대파 탄압,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본명은 응우옌 신 꿍(Nguyễn Sinh Cung). 별명은 떳 타인(Tất Thành). 호찌민은 그가 썼던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이며[3]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은 박 호(Bác Hồ, 伯胡, 호 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과거에는 ‘호치민’이라고 표기했으나 2004년 외래어 표기법베트남어 표기에 관한 세칙이 추가된 후에는 ‘호찌민’이라고 표기한다. 그러나 현재도 호찌민이라는 표기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아니라서 영화나, 다큐멘터리, 관련 서적과 같은 곳에서 호치민이라는 표기도 간간히 볼 수 있다. 그리고 과거 자료 중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어 발음인 ‘후즈밍’도 가끔 보인다. 1980년대 후반에 KBS에서 더빙 방영한 플래툰 더빙판에서도 베트콩을 쏴 죽이면서 "덤벼라, 이 후즈밍의 개들아!"라는 한국어 더빙이 나온 바 있다.


2. 일생[편집]



2.1. 내력과 출생[편집]




EBS - 베트남 국민을 사랑했던 혁명가, 호찌민
호찌민은 1890년 베트남 응에안(Nghệ An, 乂安) 주 낌리엔에 있는 호앙쭈(Hoàng Trù)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4] 그의 아버지 응우옌 신 삭은 농민 출신으로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는 서당 훈장의 딸이었다. 그의 가계가 객가(客家)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5] 그의 아버지가 관직에 오른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응우옌 왕조의 관리가 되어 수도 후에로 가족을 데려올 수 있었으나, 자신의 일이 식민지 경영의 주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절망했고 결국 불복종을 이유로 해직된다. 현실에 실망한 그는 이후 후에를 떠나 시골에서 약제사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6]


2.2. 독립운동의 시작[편집]



파일:NguyenAiQuoc2.jpg

1911년 사이공 항구를 떠나는 호찌민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호찌민은 물론 누나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때문에 호찌민의 형과 누나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당해 수감된다. 호찌민 본인도 프랑스-베트남 학교인 국학 재학 시절인 1908년 징세 반대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만다.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판보이쩌우의 도움을 받아 잠시 민족주의자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었다. 1910년 초 판티엣에서 한문과 국어(베트남어) 교사로 일했는데, 학생들의 기억에 따르면 매우 인기 있는 교사였다고 한다. 당시 학생이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체벌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학생들을 항상 존중했고, 다른 교사들에게도 때리거나 윽박지르지 말라고 충고했으며, 당시 유행하던 하얀 파자마와 나무 샌들 차림으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게 했다고.[7] 독립을 위해서는 세계를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1911년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 해운회사에 견습 요리사로 취직[8],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를 타고 프랑스로 간다. 이후 호찌민은 소련 저널리스트인 이오시프 만델스탐과 이야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열세 살쯤 되었을 때 나는 자유, 평등, 우애라는 프랑스의 말을 처음 들었어요. 나는 백인들은 모두 프랑스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요. 프랑스 사람들이 그 말을 썼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프랑스 문명을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호찌민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저널리스트 애너 루이즈 스트롱에게도 했었다.

우리 아버지를 포함하여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가 프랑스의 굴레를 벗는데 누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하곤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 어떤 사람들은 영국, 어떤 사람들은 미국이라고 말햇지요.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해외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난 뒤에, 돌아와 우리 동포를 도울 생각이었지요.


그 과정에서 그는 세네갈에 있는 다카르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데도 프랑스인들의 명령에 따라 배까지 헤엄쳐 가던 아프리카인 몇 명이 죽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서구 제국주의가 추구하는 식민주의의 잔혹성이 국제적으로 만연했음을 알게 됐으며, 그리고 영국, 미국을 비롯한 여러나라를 떠돌면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사진 수정자, 화부 (火夫) 등으로 일했다. 미국에 있을 당시 보스턴에 있는 빵집에서 일도 했고, 흑인인권운동에도 참여했다 한다.

당시 호찌민은 흑인인권운동을 전개했던 마커스 가비에 대해 알게 됐으며, 미국의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가 벌이는 린치 행위도 직접 목격했다. 버나드 폴이 정리한 <호찌민 베트남 혁명론>을 보면, 당시 그가 KKK와 그들이 벌이는 잔인무도한 린치에 대해 비판한 글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직접 목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링크 듀이커에 따르면 대략 1913년쯤 미국을 떠났을 것으로 추정되며, 영국의 수도 런던으로 갔다.

그 밖에도 영국, 미국 등을 전전하면서 신문물과 사상 등을 배우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들 덕분에 영어, 중국어의 여러 방언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태국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도 능통했다.


2.3. 애국(愛國)[편집]


1917년 호찌민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뒤 1918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미영프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파리강화회의에 우국지사들과 응우옌아이꾸옥(Nguyễn Ái Quốc, 阮愛國)이란 이름으로 참가해 베트남인의 자유·민주·평등권을 요구했다. 이 시점에서의 호찌민은 프랑스로부터의 완전 독립보다는 프랑스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베트남인의 인권 보장을 추구했다. 물론 최종 목표는 독립이었다. 그리고 한국신한청년당에서 독립 청원서를 발표한 것과 비슷하게 이 가명을 사용해 '안남 민족의 요구'라는 8개 조항을 베르사유 회의에 제출하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젊은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운동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고, 향후 27년간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9] 베르사유 회의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서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우드로 윌슨을 만나 베트남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지만 애초에 민족 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 패전국들을 해체하기 위한 의도가 컸고, 미국도 당시 구 제국주의 열강으로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북마리아나 제도, 니카라과[10]식민지들을 보유하며 수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승전국 프랑스의 식민지인 베트남의 독립 운동을 지지해줄 명분이나 이유가 하등 없었으므로 호찌민의 호소는 무시된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는 그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호찌민은 서양식 턱시도와 중산모를 빌려 착용한 채 베트남 독립 청원서를 가지고 회의장으로 윌슨과 미국 대표단을 찾아갔다.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한 대부분의 비서구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호찌민도 해방은 식민 통치 세력의 선심이 아니라 무장 투쟁을 통해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이광일 역,『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p.88

1920년에 호찌민은 프랑스 공산당에 창당 관여 및 가입을 하여 활동했다. 당시 식민지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러시아 혁명의 여파를 받았듯이 호찌민 또한 사회주의에 입문하게 됐고, 그 시기 자본론이나 공산당 선언, 러시아 혁명사를 비롯한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을 읽었다. 특히나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레닌이 발표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태제’가 서구 열강 식민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지를 받았듯이 젊은 시절 호찌민에게도 이는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922년에는 <르 파리아(Le paria)>를 창간하여 편집인이자 중요한 기고자로 활동했고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낱낱이 비판했다. 때문에 프랑스 당국의 감시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에서 활동할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들과 만나 교류하고 서로 협조한 사실이 2018년 문서로 확인되었다. 당시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파리의 정보 경찰 장(Jean)이라는 인물의 기록에 따르면, "호찌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 호찌민과 파리의 임정 인사들 간 교류가 굉장히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호찌민은 임시정부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의 압제에 신음하던 한국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됐고, 호찌민은 프랑스 일간지 르 포퓔레르에 1919년 '인도차이나와 한국'이라는 글을 투고, 일본과 프랑스의 식민 정책을 비교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프랑스를 몰아낸 일본을 보고 환호하는 베트남인들에게 호치민은 분노하면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조선인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던가? 프랑스나 일본이나 차이가 없음을 알라!" 라면서 엄하게 꾸짖었다.

1923년에 개최된 제2차 프랑스 공산당 대회에서 대회 참가단 주석 자격으로 참가했다. 또한 그해 호찌민은 프랑스 당국의 탄압을 피하고 사회주의를 배우기 위해 각국 식민지 농민 대표 자격으로 소련에 건너가 한동안 코민테른에서 일했다.[11] 소련 유학 시절 그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레닌은 1924년에 사망해서 만나지는 못했지만, 코민테른에서 일하면서 후에 스탈린의 심복이 될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 그리고 레프 트로츠키 등과 만나 교우했다.[12] 1924년 12월 그는 중국 광저우로 갔는데, 당시 이름을 다시 리투이(Li Thuy, 李瑞, 이서)로 바꿨다.[13] 여기서 그는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를 창립했다. 이후 소련으로 건너가 공산당원 중 최고급 당원만 유학한다는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한다. 이때 박헌영을 만났다는 일각의 얘기가 있지만, 역사학자 정병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박헌영과 호찌민이 만났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다만 해방 정국에서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던 몽양 여운형과는 만난 적이 있었다. 1926년 1월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중국 국민당 2전대회에 참가했을 당시, 조선과 베트남 그리고 인도 대표가 아시아인 대표로 연단에 올랐는데, 그때 베트남 대표가 바로 호찌민이었다고 한다. 대회 첫 번째 연설이 호찌민이었고, 두 번째 연설이 여운형이었다고.

이 당시 호찌민은 엄연히 코민테른 요원으로, 소련 내에서는 일종의 피압박 민족의 투사로서의 모델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과 베트남으로 파견되었을 때에는 혁명 조직을 형성하고 통합시키는 데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여, 베트남 청년단, 안남 공산당, 베트남 공산당, 인도차이나 공산당 등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각지에서 만난 뛰어난 인재들을 소련으로 보내 교육시키는 등, 조직과 인재를 통해 혁명의 근간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잠시 태국에 머물 때조차 그곳에 있는 베트남 이주자들과 원주민들을 통합해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기도 하는 먼치킨의 능력을 보였다. 그리하여 1930년 호찌민은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1930년 2월 베트남 공산당은 영국령 홍콩에서 창당됐다. 베트남 공산당 창당은 세 개의 분파[14]를 통합하고 새로운 혁명적 단계의 규정 및 노선 설정에 있어서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이에 반대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모스크바 유학파인 쩐푸가 그러했다. 쩐푸는 베트남 공산당 결성이 당시 코민테른의 노선을 크게 일탈했다고 판단했으며, 실제로 호치민에 대해 이론이 빈약하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 공산당을 코민테른의 노선에 충실한 당으올 변혁시키려고 했었다. 1930년 10월 제1차 중앙위원회에서 쩐푸가 서기장으로 선출되어 당의 지도권을 장악했으며, 쩐푸는 당명을 베트남 공산당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변경했다. 그렇게 해서 오랜 기간 동안 베트남 공산당의 당명은 인도차이나 공산당이기도 했다. "호찌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베트남 공산당 창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930년 2월 새로운 정당의 결성과 더불어 응우옌 아이 꾸옥은 베트남 혁명의 다음 단계로 이행할 준비가 되었다. 그가 눌랑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듯이, 이 정당은 입헌당, 인도차이나 공산주의자 연맹(곧 해체되어 그 조직원들 대부분은 베트남 공산당에 입당한다), 하노이에 기반을 둔 베트남 국민당, 이제 기능이 정지된 혁명청년회 등을 포함하는 몇 개의 정당과 분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꾸옥은 공산당이 비록 아직 어리고 작았지만, “그 모든 조직들 가운데 가장 잘 조직되고 가장 활동적”이라고 단언했다. 이제 두 개의 주요한 공산주의 분파 사이의 싸움이 끝났기 때문에, 베트남 공산당은 정확한 정책과 새로운 내적 통일로 무장하고 급속하게 성장할 터였다. 마침내 응우옌 아이 꾸옥은 15세기의 애국자 레 로이가 외적으로부터 동포를 해방하기 위해 사용했던 무기인 마법의 검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찌민 평전』, 푸른숲, 2003, p.268

1930년 호찌민과 그의 동료들이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했을 시기, 베트남의 통킹과 안남지역을 중심으로 프랑스 식민지배에 맞서 베트남 국민당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주도 아래 노동자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응에 안 소비에트 봉기'라 알려진 이 봉기는 통킹과 안남 지역으로 베트남의 또다른 독립운동 단체인 베트남국민당의 주도로 신속하게 번졌다. 시작은 베트남 국민당이 주도했지만, 응에안 하틴 성 소비에트 봉기로 대표되는 공산당의 투쟁은 초기 적잖은 성과를 달성했다.[15] 이들은 봉기를 통한 집권 몇달 동안 과하게 부과된 정부의 세금을 철폐하고, 노동 시간을 단축했으며, 지주로 부터 몰수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했고, 문맹퇴치운동도 전개했으며, 따라서 단기간 동안 정의를 실현했다.[16] 인도차이나 공산당도 적극적으로 참가했지만,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던 프랑스는 이 봉기를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아주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그해 10월 호찌민은 공산당 내에서 큰 비판을 받았고, 1931년 6월 호찌민은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32년 12월에 석방된 호찌민은 1933년 1월 중국공산당의 도움으로 홍콩을 탈출했다. 호찌민은 1934년 소련의 모스크바로 갔고 레닌 대학에 입학했다. 1935년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스탈린 대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 호찌민은 교사로 있으면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좌익 소아병>을 베트남어로 번역했다. 무튼 스탈린의 대숙청이 한참이던 1935~37년 그는 소련에서 지내면서 대숙청의 광풍을 잘 피해갔고, 1938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중국 팔로군 지역본부에서 기자 일을 하면서 보건 담당 간부로 일하기도 했다. 1940년부터는 중국 쿤밍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다가[17] 1941년 2월 호찌민은 30년만에 고국인 베트남으로 귀국하였다.

2.4. 1년의 투옥과 미국 OSS와의 협력관계 구축[편집]


1942년 8월 호찌민(Ho Chi Minh)이라는 개명한 이름[18]을 가지고 활동하다가 중국 국경에서 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에 잡혀 1년 간 투옥되기도 했다. 1년 간의 감옥생활을 하며 그는 <옥중일기>를 집필했다. 1943년 9월 감옥에서 석방된 호찌민은 중국 남부에 혁명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끝나가던 1944년 12월 보응우옌지압의 지휘하는 베트남해방군이 창설됐다. 해외 생활 도중 미국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미국의 OSS는 호찌민이 말라리아로 쓰러지자 키니네를 구해주기도 했으며, 앞서 장제스가 체포한 호찌민을 OSS가 구해주기도 했다. 1944년 11월에는 미군 전투기가 베트남 상공에서 떨어져 공군조종사 한 명을 살려줌으로써 미국과의 접촉을 시도했다.[19] 또한 종전 직전인 1945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호찌민의 주선으로 OSS에 들어가 여러 훈련을 받기도 했다.[20]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던 1945년 4월 30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중국 운남성에서 미국 OSS의 아키메데스 패티 소령과 호치민이 만남을 가졌다. 패티 소령은 노인 한 사람이 귀퉁이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찻집을 나가려 했는데, 어서 오시오, 친구!라고 노인이 영어로 첫 인사를 건냈고, 대화를 통해 호치민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호치민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던 패티는 훗날 TV 인터뷰에서 이날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우리 둘이 처음 만난 것은 1945년 4월 30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미군이 베트남을 떠난 날짜가 30년이 지난 1975년 4월 30일이었고요. 그 동안에 나를 따라서 280만 명의 미군이 베트남 땅을 밟았는데, 그 중에서 약 5만 7,000명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30년이 넘도록 이 조용한 나라에서 벌어진 의문투성이의 전쟁에서 200만 명이 넘는 베트남인들도 희생되었습니다.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22

1945년 4월 30일 중국 운남성에서 아키메데스 패티 소령과 접촉했던 호치민은 6월 30일 패티에게 무전을 쳐, 미국인들로 구성된 팀을 받아들이겠으니 도착 날짜를 알려달라고 요청했으며, 7월 16일 OSS로부터 베트민과 접촉하라는 임무를 받은 디어팀의 지휘관 앨리슨 토머스 소령은 소규모의 부대원들과 함께 낙하산을 타고 탄짜오에 도착했다. 토머스 소령은 베트민의 반일작전을 지원하라는 임무를 받았으며, 노획한 다양한 무기로 무장한 200명의 베트민 게릴라는 토머스 소령의 대원 두 명을 땅에 내려준 뒤 그들을 환영하는 경례를 했다고 한다. 호치민은 이 미군들을 영어로 환영하며 따뜻하게 맞이해주었고, 식사도 아주 풍요롭게 대접했으며, 숙소까지 안내해주었다고 한다. 토머스는 이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어 나는 호위를 받으며 베트민의 고위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호 씨에게 갔다. 그는 뛰어난 영어를 구사했으나, 징시로부터 걸어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신체적으로는 매우 허약했다. 그는 우리를 아주 따뜻하게 맞이했다. 이어 우리는 숙소로 안내되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특별히 대나무 숙소를 지어주었는데, 지면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대나무로 바닥을 깔았고, 위에는 야자 잎으로 지붕을 덮어놓았다. 이어 우리는 맥주, 밥, 죽순, 구은 스테이크로 저녁을 먹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소까지 잡아주었던 것이다.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찌민 평전』, 푸른숲, 2003, p.449

이처럼 호치민은 미국인 손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으며, 토머스 소령은 베트민 무장 세력의 질을 높이 평가했다. 토머스 소령은 쿤밍의 승인을 얻어 지역 부대원들에게 M-1 개런드 소총, 카빈 소총, 바주카포 등의 사용법과 게릴라 전술을 가르쳤다. 호치민의 최고의 무장대원 가운데 100명이 선발되어 탄짜오 마을에서 3km 떨어진 곳에서 미군이 지휘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당시 디어 팀의 부대원이던 헨리 프루니어에 따르면 그들이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고.[21] 미국OSS로 부터 훈련을 받은 사슴팀과 베트민 부대는 보 구엔 지압의 지휘 아래 몇 개의 일본군 외각 초소를 공격하여, 미국과의 공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22] 이 훈련 경험은 훗날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또한 호찌민은 이때 도움을 준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여러 차례 메시지를 보내지만 당시 미국은 유럽과 일본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 했고, 유럽에서는 특히 프랑스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그 결과는...2차세계대전 당시 OSS 요원으로서 베트민과의 공동작전을 펼쳤던, 아르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Patti) 소령은 자신이 쓴 저서 <알바트로스의 서곡 왜 베트남인가?:Why Viet Nam?: Prelude to America's Albatross>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23]

"우리들 중 몇 사람은 우리가 제공한 무기와 훈련이 언젠가는 프랑스 사람들과 싸울 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상대가 미국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36

마이클 매클리어는 이에 대해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돌이켜보면, OSS는 불과 1개월 동안 약 200여 명을 선발하여 미래의 베트민 지도자로 양성한 셈이었다. 얼마 후 베트민군 사령관이 된 잡은 ‘사슴팀’이 자신들을 도와 점령한 마을을 탄짜오라고 명명했다. 그 뒤 호치민이 이 마을에 임시정부를 설립함에 따라 탄짜오는 베트남의 역사적인 명소가 되었다. OSS는 이후에도 계속 호치민의 군대를 훈련, 무장시킨 다음 함께 전투를 펼쳤다. 이와 같은 일은 훗날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를 살펴볼 때, 아리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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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호찌민


2.5. 항명의 성공, 독립 정부의 수립[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호치민은 베트민을 통한 전국적인 총봉기를 준비했고, 일제 패망에 맞춰 봉기를 감행했다. 1945년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의장으로 선출되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 혁명은 베트남 북부와 중부 남부에서 신속히 진행됐다. 북부에서는 하노이. 중부에서는 후에, 남부에서는 사이공에서 베트민이 주도한 대규모의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에 전국적으로 총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8월 19일 하노이 봉기에서만 총 10만 명이 봉기에 참여하여 일본군 철수와 프랑스 식민 통치 종결 그리고 바오다이 황제 폐위를 요구했다. 이 8월 혁명에 대해 베트남의 역사학자 응우옌 칵 비언(Nguyễn Khắc Viện)은 “1945년 당시 8월 혁명은 80년간의 프랑스 식민통치를 종결시켰고, 군주제를 폐지시켰으며, 베트남을 독립국가로 재건했다.”고 <베트남 오래된 역사, Vietnam A Long History>에서 주장했다.[24]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는 당시 베트민과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호치민은 이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베트남 전체 차원의 유일한 정치조직으로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호치민은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베트남의 유일한 전시 지도자였으며, 1945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일본을 타도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창설하고, 진주하는 연합군을 위해 환영식을 개최하면서 베트남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충성을 얻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1945년 9월의 몇 주 동안, 베트남은 근대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호치민의 지도하에 남에서 북까지 통일됐다.

이른바 8월 혁명은 일본이 항복하기 4일 전인 8월 11일부터 8월 24일까지 대략 13일 동안 진행됐고, 또 완료됐다. 8월 25일 남부 도시 사이공에서도 시민 8만 여 명이 거리를 가득 메우자, 일본 괴뢰 정부는 완전히 물러났으며, 따라서 베트남은 연합군이 진주하기 전에 완전한 자주독립 정권을 수립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호치민의 경우 시기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과 기회를 놓치지 않는 치밀성을 담보했으며, 갑작스레 해방공간을 맞았던 우리와는 비교가 된다. 호치민은 8월 25일 비밀리에 하노이로 돌아왔으며, 남쪽으로 300km 정도 떨어진 고향 낌리엔의 조그만 초가집을 떠난 지 무려 40년 만에 하노이 땅을 처음 밟았다.[25]

그리고 이 때부터 정식으로 자신을 호찌민으로 소개하며[26], 9월 2일, 호찌민은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해 봉건 군주제를 종식시켰다. 호찌민이 선포한 독립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그러한 권리이다."

이 불멸의 선언은 1776년 미합중국의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넓은 의미에서 이런 뜻입니다. 지상의 모든 민족들은 날 때부터 평등하며, 모든 민족은 생존의 권리, 행복과 자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1791년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문에는 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이 자유와 평등의 권리는 평생 유지되어야 한다."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찌민 평전』, 푸른숲, 2003, p.483~484


같은 날 일본의 요코하마에서는 정박한 미국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이 공식 항복 문서에 서명했지만, 베트남의 하노이에선 호치민의 베트남 독립 선언으로 베트남 전역을 아우르는 국가 베트남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1945년 9월 2일 그날 하노이 시는 붉은 깃발로 뒤덮었고, 베트남어, 프랑스어, 영어, 중국어 그리고 러시아어로 쓴 슬로건을 적은 현수막이 길거리마다 내걸렸다.[27] 호치민의 독립 선언이 지니는 또 다른 의미는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 이후 최초로 자신의 힘으로 공산당 정권을 세운 것이고, 더욱이 한 세기에 걸친 혹독한 착취를 당해온 약소민족이 어떤 외세의 도움도 없이 완전히 자력으로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침략 세력을 추방하고, 인민의 압박과 착취, 성차별이 없는 자유롭고 풍요롭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세계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는 점과 실질적으로 초기에 그러한 측면들이 부각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를 외세는 용납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베트남의 가치는 결국 프랑스 제국주의가 다시 식민지 지배를 하려는 야욕과 충돌하게 됐다.

2.6. 혼란기와 프랑스의 축출[편집]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하노이 대중 앞에 섰다. 수도에 처음 온 것이었음에도, 수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알고 있었다. 호찌민은 "국민 여러분, 제 말이 들립니까? 제 말이 여러분에게 와닿습니까?"하고 물었다. 그의 연설이 있기 몇 주 전, 떤 짜오(Tan Trao)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새로운 베트남을 위한 의제가 제시되었다. 호찌민은 "민족해방위원회와 모든 대표단의 목적은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쟁취해 우리 아이들이 충분히 먹고 입으며 학교에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혁명의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노이에 모였던, 그리고 베트남 전역의 민중은 호찌민의 말을 듣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했다. 호찌민의 슬로건은 식량, 의복, 그리고 교육이었다.

한 국가의 인구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려면, 그만큼의 자원이 필요하다. 베트남 혁명은 더 이상 베트남의 사회적 부가 프랑스와 서구 사회로 유출되지 못함을 의미했다.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정부는 이러한 부를 활용해 수 세기 동안 베트남 농민이 겪은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바로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베트남의 노동력은 베트남의 전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구 자본가, 특히 프랑스 부르주아지에게 잉여가치를 제공하는 데 쓰여야 했다. 베트남 국민의 우선 과제가 베트남의 발전이어서는 안 되었으며, 프랑스와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세력이 확대되도록 하는 것이 우선 과제여야 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베트남 왕조와 그들의 수하들과 공모해 베트남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베트남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전쟁 후에도 미국은 1975년 패전할 때까지 계속 전쟁을 조장했다.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옮김, 『워싱턴 불렛』, 두번째테제, 2022, p.23~24


호치민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을 했을까, 아니면 그의 행동들은 하노이가 전쟁을 위한 적절한 준비를 갖출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을까? 이 두 가지 결론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4세기 중국의 병법가 손자의 가름치에 따라, 호는 최고의 승리는 무력을 이용하지 않고 얻어내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폭력 없이 목적을 달성하려 할 경우 가장 효과적인 방법들은 역시 손자의 말에 따르면 외교와 선전을 이용하여 적을 분열시키고 그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어쨌든 12월 19일, 호와 그의 동료들은 더 이상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문제는 전장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588


1946년 12월 19일 오후 8시 하노이가 공격당했습니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행동이 우리 조국에 대한 침략을 목쵸로 한다는 것은 명백하며 부인할 수 없습니다. 베트남인들은 이제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해 있습니다. 손을 묶이고 머리를 숙인 채 다시 노예로 머무느냐, 혹은 자유와 독립을 되찾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느냐 입니다. 베트남 인민들은 또 다시 프랑스인들에 의해 강요되는 외국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베트남 인민들은 다시 노예가 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유와 독립을 잃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1946년 12월 호찌민의 호소

2차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에는 북위 16도선을 기점으로 북에는 중국의 국민당군과 남에는 영국군이 들어왔고, 영국군이 들어오는 동시에 프랑스 또한 같이 들어왔다. 이후 호찌민은 중국을 경계하여 권토중래를 노리는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하고자 했고, 호찌민은 "프랑스 연방의 일원이 되어야한다"는 프랑스의 요구에 응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퐁텐블로 협상이다. 1946년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민 지도 세력들은 프랑스 퐁텐블로에서 회담을 가졌었다. 퐁텐블로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그 결과 호찌민은 별다른 성과없이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호찌민은 내심 미국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프랑스편이었던 미국은 이를 무시했다.[28] 프랑스는 호찌민이 폐위시킨 바오다이[29]를 지도자로 내세운 괴뢰 정부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움으로 베트남을 계속 식민지배하겠다는 속내음을 드러냈고 협상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46년 11월 프랑스가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하여 민간인 6,000명이 학살당하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30] 하이퐁 포격 이후 프랑스군은 북베트남에 상륙했으며, 12월에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도였던 하노이에 진입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반기인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12,000명의 공수부대를 포함한 병력을 동원하여 비엣 박을 공격하고, 신속하게 베트민의 본부를 찾아냈다. 당시 호치민은 프랑스군에게 체포될 뻔하기도 했으나, 호찌민과 그의 수하들은 무사히 탈출하였다.[31]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은 침략자 프랑스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수많은 베트남인이 베트민에 가담했다. <세계게릴라전사>를 쓴 로버트 에스프레이는 베트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독랍(Độc lập)'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호치민 아저씨(Bác Hồ)의 말대로 인민에 의해 성취된다.

베트민 공작원들의 선전에 귀를 기울이는 노동자, 농민 등 인민에 의해 성취된다.

베트민은 인민의 정당이었다.

베트민은 인민전쟁을 위해 신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옮김, 『세계게릴라전사 3』, 일월서각, 1989, p.54

항불전쟁 당시 베트민의 젊은 장교였다가 이후 초대 유엔 대사로 근무한 하반라우(Ha Van Lau)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기도 했다.

궁핍은 베트민을 자극했고, 농민들은 베트민을 지원했다.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60

이어서 하반라우의 증언이다.

베트민은 물 속의 물고기와도 같았다. 인민들과 함께 한다는 정신은 우리들의 슬로건이었다. 우리 전사들은 물고기가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것처럼 인민들 속에서 활동했다.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63

따라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침략한 프랑스군은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비정규전에 훨씬 많이 직면했고, 이에 따라 프랑스군은 베트민을 도와준 촌락에 보복 공격을 가해 인민들을 완전히 소개시켜 버렸다. 결국 이와같은 프랑스군의 무자비한 민중탄압 정책과 학살은 주민들에게 저항감을 자극하여 이들이 베트민을 지지하도록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통해, 베트민은 여러 전투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 세력의 성격이 훨씬 강한 집단이었다. 당시 베트민으로 참여했던 소설가 쑤언부(Xuan Vu)의 회상을 보면, 항불전쟁 시기 베트남 민중들이 어떠한 정치집단을 선택했는가를 알 수 있다.

도시에는 프랑스군이 있었으며, 그 밖에는 베트민 게릴라가 있었다. 나의 마을과 다른 모든 마을들은 베트민의 통제 하에 있었다. 마을 주민들의 마음과 영혼은 베트민에 속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운동의 한 부분이었으며, 그 운동을 지지했다.

윤충로, 「베트남 혁명과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p.138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대륙 통일을 이룩하자 중국 공산당은 베트민을 지원했고, 1950년에는 마오쩌둥의 중국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이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해줬다. 반면에 미국은 매카시즘이 격화되면서, 식민지 지배자인 프랑스와 그 하수인인 바오다이 정부를 지원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점에 미국은 바오다이 정권의 수도 사이공에 소수의 미군사고문단을 보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정권을 위해 1,000만 달러를 지원하기에 이른다.

1950년 9월 보 응우옌 잡이 지휘하는 베트민 부대들은 중월국경 전체에 걸쳐 프랑스의 취약 시설에 대한 일련의 기습을 게시했고, 특히나 중월국경지대에서 발생한 동케 전투에서는 베트민군이 최소 300명 이상의 프랑스군을 사살했다.[32] 10월 말에는 베트민이 홍강 삼각주 인근까지 프랑스군을 몰아낸다. 화력에서 우세한 프랑스였고 뒤에서 미국이 빵빵하게 지원했지만 모든 베트남 국민들은 독립을 원했고 호찌민은 베트남 국민들의 영웅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한국전쟁이 시작되던 시점과 비슷한데, 당시부터 호치민은 미국의 개입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대화는 어떤 기자와 호치민의 대화다.

기자: 호치민 각하, 미제국주의자의 인도차이나 개입 정책의 현상황은 어떻습니까?

호치민: 미제국주의자들은 최근 인도차이나 사건에 공공연하게 개입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자금과 무기로, 그리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제국주의자들은 프랑스 식민주의자를 밀어내고 인도차이나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그들의 책략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군사, 정치, 경제 전분야에 걸쳐 직접적인 개입을 극도로 배가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미제국주의자와 프랑스 식민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갈수록 첨예해져 가고 있는 것도 또한 그 때문인 것입니다.

기자: 이러한 개입이 인도차이나 인민에게 어떤 영향을 주리라 보십니까?

호치민: 미제국주의자들은 인도차이나 인민을 몰살하기 위해 그들의 정치적 충복인 괴뢰정권에게 군장비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지역의 수공업 발전을 방해하기 위해 자기들의 상품을 인도차이나에 퍼붓고 있습니다. 그들의 도색문화는 그들의 영향력하에 있는 지역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민중을 매수하고, 속이고, 분열시키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부 사악한 국민을 그들의 도구로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우리 조국을 공격하게 합니다.

기자: 우리는 그들에 대항하여 어떤 수단을 강구해야 합니까?

호치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 인도차이나 인민은 우리의 주적인 프랑스 식민주의자를 격퇴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미제국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싸워야 합니다. 그들의 개입이 심화될수록 우리의 단결심과 투쟁은 강고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민, 특히 미제국주의자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의 인민들 앞에 그들의 책략을 낱낱이 까발리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미제국주의자에 빌붙어서 우리 인민을 억압하고 기만하고 분열시키는 모든 앞잡이들을 폭로할 것입니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인민 간의 강고한 결속은 프랑스 식민주의자와 미제국주의자들을 격퇴시킬 수 있는 세력입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중국에서 실패했고 인도차이나에서도 굴복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심각한 곤경에 시달리고 있지만 승리는 반드시 우리것이 될 것입니다.

미국의 인도차이나 개입에 대한 언론의 질문에 대한 답변 1950년 7월 25일

그리고 호찌민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를 통해 프랑스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자세한 것은 디엔비엔푸 전투 문서를 참고해도 좋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8년 동안 프랑스는 총 8만 명 이상이나 되는 병력을 전투에서 잃었다. 1954년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총 2,000명에서 3,000명 정도가 전사하고 10,000명 이상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33]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 지휘관 카스트리를 포함하여, 디엔비엔푸에 있던 사실상 프랑스군의 전 병력이 베트민에게 항복한 셈이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베트남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100년 동안의 식민지 통치를 종결시켰다는 의의와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식민지 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64년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승전 10주년을 맞아서 쓴 글의 내용처럼, 제국주의자들이 당황하고 낙담한 반면, 우리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전 세계의 진보적인 인민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디엔비엔푸에서 거둔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는 억압받던 인민들의 자랑거리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알고 있던 국가 해방을 위한 세계적인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34] 아래는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설명한 항불전쟁 승리 이유다.

베트남인민의 해방전쟁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완전한 해방을 맞은 북베트남에서 제국주의 원수들은 쫓겨갔으며 지주들은 계급으로서 제거되고 국민들은 사회주의 건설의 길에 굳건한 발걸음을 내딛으며 전진함으로써 북쪽을 나라의 재통일을 위한 활동의 견고한 기지로 만들고자 했다. 베트남인민이 해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까닭은 나라와 민족의 정당한 이익을 위하여 자주와 통일을 이루려 한 정당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며, 바로 이러한 사실이 전체 인민으로 하여금 저항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동시에 승리를 위하여 모든 희생을 바치게 한 것이다. 베트남인민의 해방전쟁이 이처럼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은 인민의 혁명무장대 즉, 영웅적인 베트남인민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의 정치노선에 따라 창설된 이 군대는 불굴의 투지에 넘쳤으며 끈기있는 정치사업에 익숙해 있었다. 군대는 또한 인민전쟁의 전략과 전술을 채택했다. 그것은 무에서부터, 대중적 애국단체들로부터 일어난 노동자, 농민, 혁명적 지식인과 학생들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부류들을 규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인민으로부터 탄생하였으므로 인민을 위해서 싸웠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당이 이끄는 군대였다. 베트남인민의 해방전쟁이 승리한 것은 모든 혁명적 계급과, 베트남 땅에 사는 모든 민족들과, 모든 애국지사들로 이루어져 광범위하고 견고한 민족연합전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선은 당의 영도하에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기초로 이루어졌다.

러셀 스테들러, 류영래 역, 『인민전쟁 군사예술론』, 참한사상, 1990, p.101~102

결과적으로 8년에 걸친 항불전쟁은 호치민과 공산당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베트민 군대와 이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대중들에 의한 승리였다. 베트민은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이후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게끔 하여 프랑스군을 베트남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내고 프랑스 식민통치 종결, 베트남 독립. 1954년 10월에는 전투 지역으로부터 수도 하노이로 개선했다. 호치민은 제네바 회담에서 결정에 수긍하는 쪽을 선택했다. 듀이커가 쓴 책의 내용을 보자.

호치민은 당의 정확한 지도와 세계 여러 민족의 지지를 바탕으로 완전한 독립과 민족 통일이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다짐했다. 호치민은 저우언라이의 충고를 따라, 당의 동료들에게 완전한 승리에 비하면 훨씬 불만족스러운 타협적 해결책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을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며칠 전 류저우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그런 방법을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 그러나 호가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타협적인 평화안을 수용한 것은 이전에도 여러 번 드러났던 그의 태도, 특히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 그가 보여주었던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은 혼자서 잘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변화의 맥락 속에서 달성해야 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676~677

또한 호치민은 1954년 7월 15일부터 베트남노동당 제2기 제6차 중앙위원회 총회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를 했다.

지금 프랑스는 우리와 교섭하고 있고, 미국 제국주의가 주요한 직접적인 적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 공격의 화살은 미국 제국주의에 집중되어야 한다. 현재의 새로운 정세를 앞에 두고 우리는 옛 노선을 지킬 수만은 없다. 이전 우리의 구호는 철저한 항전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정세에 의해 평화, 통일, 독립, 민주의 새로운 구호를 내세워야 한다. 우리는 미국 제국주의가 직접 간섭하여 인도차이나 전쟁을 장기화하고 확대하지 못하도록 평화의 깃발을 꽉 잡고 있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의 정책도 변화해야 한다.

후루타 모토오, 이정희(역),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학고방, 2021, p.171



2.7. 베트남의 분단과 북베트남의 사회주의 건설[편집]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철군했고, 제네바 협약에 따라 1954년 베트남은 17도선을 기점으로 분단됐다. 남북베트남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선거를 해야했으나, 북베트남의 압승이 예상되었기에 미국과 남베트남은 총선거를 거부하고 단독으로 베트남 공화국을 세운다.[35][36] 그러나 남베트남에서 미국의 지원으로 권력을 잡은 응오딘지엠의 권력 기반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남베트남 정부 수립에 공을 세운 종교파 군벌 찐민테 등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친인척들을 주요 요직에 앉혔으며 이것은 결국 각종 부정부패로 이어짐에 따라 남베트남을 혼란으로 이끈다. 한편 호치민은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베트남 개입을 경계하며 다음과 같을 말을 했다.

현재 상황이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도 바뀌고 있고, 이에 따라 정책과 슬로건도 바뀝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을 일소하는 데 온힘을 집중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프랑스인들과의 대화가 가능해진 반면, 미제국주의자들이 우리의 주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공격의 초점을 후자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평화를 되찾을 때까지 프랑스와의 전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 민족 모두가 미국에 대한 공격에 집중해야 합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 전쟁을 확신하여 국제화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싸우며 미국의 전쟁 정책에 반대합니다.

호치민 지음, 월든 벨로 서문, 배기현 옮김,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프레시안북, 2009, p.209~210


한편 호찌민과 북베트남 정부는 1954년 독립 이후부터 토지개혁, 식량배급제 등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사실 토지개혁은 항불전쟁 말기에 베트민에 의해 진행됐는데, 초기 토지개혁의 단행은 아래로부터의 지지에 의해 수행됐다. 즉,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계급행동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프랑스에 맞서던 베트민 혁명세력은 농민들의 참여와 지지에 의해 통일전선 내에 포함되어 있던 지주와 부농의 반발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마지막 시점까지 급진적인 농지개혁을 수행한 지역을 중심으로 농민들은 자신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북부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건설과정의 기본적인 추진력으로 작용하기에 이른다.[37] 그러나 토지개혁의 경우 시행하는 과정에서 농지를 소유하던 농민들을 북베트남 정부 측에서 가혹하게 죽이거나 탄압하며 농지들을 강압적으로 국유화시키는 일이 벌어졌고, 토지개혁의 시정을 요구하는 농민과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이 일어나 이로 인해 군경의 시위 무력진압으로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들이 발생하면서 호찌민 본인이 스스로 자아비판하고 토지개혁을 주도했던 책임자 쯔엉찐이 해임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1956년에 접어들면서 호찌민의 토지개혁이 일단 마무리 되었다. 정권 쪽 입장에서는 토지개혁 정책을 성공으로 볼 수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2백만 에이커(80만 헥타르) 이상의 토지가 2백만 이상의 농민 가족에게 분배되었다. 마을에서 토지를 독점했던 향신 계급의 오랜 지배 체제는 붕괴되었고, 빈농과 중농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도력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토지개혁을 시행한 방법은 쓰라린 유산을 남겼다. 이 운동 기간에 처형된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는 격론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토지개혁에 공감하는 사람들조차도 최소 3천 명에서 5천 명은 죽었을 것이라고 인정하는데, 이들은 보통 지역 재판소에서 판결을 받은 직후 총살대에게 처형당했다. 1만 2천 명에서 1만 5천 명에 이르는 사람이 방해 활동이나 다른 방식의 반혁명 활동 지원이라는 엉터리 혐의로 부당하게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38] 어찌됐든 정권 입장에서 토지개혁은 성공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봉건적 토지 문제의 잔재가 청산되었다는 점은 분명 고무적인 성과였다.[39]

토지개혁 당시 지주로 판정받은 북베트남 농민은 모두 6만 3,113호였지만, 실제는 그보다 약 절반 정도인 3만 6,269호에 불과했다고 한다. 항불전쟁 당시 항전을 지탱하든 사람들까지 악랄한 토호라는 딱지가 붙여져서 체포 및 감금된 사태가 발생했고, 일부에선 인민재판으로 처형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악랄한 토호로 규탄의 대상이 된 사람은 1만 4,909명이고 토지개혁 과정에서 체포 및 감금되어 1957년이 되어서야 석방된 사람은 대략 2만 3,748명이라고 한다. 어찌됐든 이에 대해선 1995년 베트남에서 출판된 마르크스·레닌주의·호찌민사상연구소 간행의 공식 공산당사에서도 항불전쟁 과정에서 지주계급 세력은 약화하였고, 7할 이상의 경지가 농민의 소유가 된 당시의 상황에서 대중동원으로 지주를 타도하는 형태로 실시된 토지혁명은 불필요했다고 총괄할 정도이니,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40]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의 토지개혁과는 달리 호치민의 경쟁자였던 응오딘지엠은 토지개혁에 있어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엠의 남베트남 정부는 베트남공화국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의 요구를 파악하지 못했다. 사이공 정권은 미국의 재촉에 따라 토지 소유의 엄청난 불평등(인구의 약 1%가 경작 가능한 농지의 반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가난한 농민이 부재 지주에게 연간 수확량의 1/3을 바치는 경우도 많았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그 나름의 토지개혁을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의 부유한 지주나 부르주아지는 사이공 정권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라는 모순이 심각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불리한 토지개혁에 반대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결과 토지개혁 법안은 지주들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으며, 토지개혁이 몇 년 동안 실시된 후에도 자격을 갖춘 소작인들 가운데 실제로 토지를 받은 사람은 10% 정도에 불과했다. 이전에 베트민이 장악했던 지역에 사는 농민은 프랑스-베트민 전쟁 동안 받았던 토지를 전 주인에게 돌려주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런 농민이나 전국의 다른 많은 농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응오딘지엠 정권은 식민지 시대의 프랑스 정권보다 나을 것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41]

따라서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부의 토지개혁은 근본적으로 과거 프랑스 정부에 부역한 이들을 대상으로 다시 토지를 돌려주고 기존에 베트민에 의해 혜택을 본 농민들을 무토지 농민들로 전환시키는 역효과를 불러왔기에, 당연히 남부 베트남 사람들은 이에 항의했다. 근본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토지개혁이었으며, 민중 대다수를 무시한 식민주의적 성격이 뚜렷한 정책이었다.[42] 응오딘지엠 정권의 토지개혁 문제점은 아래 미국의 역사학자 마릴린 B. 영의 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10/59법과 같은 정부의 테러행위는 남베트남 농촌지역에서 또 다른 문제들을 악화시켰다. 지주들에게 이미 분배가 끝난 땅을 다시 되돌려줌으로써, 농민들은 프랑스 식민지 통치시절 처럼 다시 한 번 무토지 소유자나 빈농이 됐다. 강제노동을 포함한 과거 베트민 시절 폐지된 세금이 다시 부활했고, 각급 관료조직들의 공공연한 부정부패가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지방 민병대를 징집하여 강탈과 자의적인 체포를 일삼았다.

Marilyn B. Young, 『The Vietnam Wars 1945-1990』, Harper Prennial, 1991, p.62

한편 북베트남에서의 사화주의 건설은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윤충로의 석사논문에 따르면, 남베트남의 반혁명적 시도가 남부 인민들의 광범위한 민심이반을 가져온 반면, 북베트남의 개혁조치들은 인민의 의사에 기반한 것이었고 인민들의 전격적인 지지속에서 행해졌다. 1954년 제네바 회담 전후로 적잖은 북부의 가톨릭 세력들이 프랑스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월남하였기에 개혁에 대한 정치적 저항도 적었으며, 오히려 이것인 북베트남 지역의 급진적인 변혁을 가능하게 했으며, 변혁이 진행됨에 따라 북베트남이 사회주의 체제를 지닌 독립 국가로 성장해 갔다는 것이 윤충로의 주장이다.[43]

북베트남의 경제개발은 다른 지역의 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공업화를 최우선 과제로 했으며, 주로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경제의 회복에 역점을 두면서 공업화를 추진했다. 집권 초기에 프랑스인이 소유하고 있던 산업시설의 국유화를 추진했고, 프랑스인들이 경영하던 150개 가량의 대기업이 국유화되었으며, 국가기관의 체계적 관리 하에 들어갔다. 당시의 북베트남은 프랑스 자본가들이 철수한 상황에서 이를 인수 및 경영할 자본가계급이 북베트남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몰수도 친프랑스적 대자본가에게만 해당되었지, 소규모 민족자본가들의 생산수단은 몰수당하지 않았다. 호치민 집권기의 중공업 우선 정책의 결과는 서방의 입장에서 본다면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다른 개발도상국과 비교한다면 상당한 성과였다. 1960년 초까지 산업 생산고의 실질적 가치는 매년 15%씩 상승했으며, 자본재적 상품의 산출고는 매년 20%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1957년에서 1958년 사이에 전기, 석탄, 시멘트 등의 생산은 300%에서 1,000%로 증가했고 소비재의 산출고도 극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인민의 생활수준도 상승했으며, 노동자와 직원들에게는 1일 8시간 노동, 1년에 15일의 유급휴가가 주어지고 있었으며, 남녀의 임금도 동일노동 동일임금제가 적용되었고, 의료비는 무상으로 국가가 부담했다. 또한 신해방구에서의 실업문제 또한 점차 해결되고 있었으며, 1955년 5월 하노이만 하더라도 최소 45,000명에게 직장을 얻게 해주었다.[44]

또한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농업 분야에서 쌀 산출량은 360만 톤에서 520만 톤으로 증가했다. 산업 분야에서는 1955년에 단지 17개 공장이 있었으나 1959년에는 107개 국영공장이 건설되었으며, 하층 농업협동조합에는 농민 가계의 43.9%가 포함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작업 교대조에 합류했다. 직인 53%가 협동조합조직에 가입했으며, 문화 영역에서는 우선 문맹을 퇴치했다. 1955년과 비교하여 일반 학교 학생 수는 두 배로, 중등 직업학교 학생 수는 여섯 배로, 대학생 수는 일곱 배로 증가했다. 또한 의사의 수도 80%나 증가했다.[45] 다소 유혈이 있었던 토지개혁이 끝난 이후 호치민 정부는 1958년에 들어 농촌지역에서 또 다른 토지개혁운동을 착수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적', '반(半)사회주의적' 협동조합의 형성이었다. 농업생산을 재조직하기 위한 전략적 목표는 자발적이고 공동적인 이익, 그리고 민주적 관리 등 3가지의 기본원리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이러한 협동조합의 건설과 확장은 북베트남의 농업생산력을 크게 증가시켰다. 1954년 이전에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집단 관개공사를 위한 조직적인 재원이 확보되었으며, 농업발전에 필요한 도로, 수로 제방 등이 정비되었다. 소규모 농경지의 소유로 인한 전근대적 농경방식은 협동조합이 도입됨에 따라 근대적 농경방식으로 바뀌어 갔으며, 기계를 사용한 농경도 이루어졌다. 1958년부터 1960년 사이에 북베트남의 단위 농장 중 85%, 토지 75%가 집산화되었으며, 1959년까지 집단화된 토지 중에서 694,800헥타르가 반(半)사회주의적 협동조합에 속해 있었으며, 39,600헥타르가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의 크기는 꾸준히 증가하여 1968년 경에는 대부분의 농민이 이에 속하게 되었다.[46]

호치민의 북베트남 사회주의 건설 또한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전후재건처럼 자주적인 측면을 강조함과 동시에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았다. 우선 북베트남에 대한 소련의 경제원조는 1954년에서 1964년에 이르기까지 총 3억 5천만 달러였으며, 1965년에는 7,480만 달러에 달했다. 1965년에 북베트남은 5억 5천 5백만 달러에 달하는 군사원조도 받았으며, 1966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의 결과 소련과 동유럽 동맹국들은 북베트남에 약 10억 달러 정도의 상품과 용역을 제공하기로 악쇽했는데, 그 중 8억 달러를 소련이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회주의권의 경제적·군사적 원조가 북베트남의 독자성은 해치는 것은 아니었으며,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권의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이 그리 큰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호치민의 북베트남은 민족경제의 측면에서도,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독자성을 확보했다.[47]

2.8. 대외 활동과 베트남 전쟁[편집]


우리는 다음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국가 기구, 군대, 부르주아 계급의 보안대가 여전히 막강한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무장 투쟁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베트남 민족은 평화적 수단으로 조국을 통일할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주적은 여전히 조국의 반을 점령하고 있는 미제국주의자들과 그들의 대리인들이며, 그들은 열심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의 깃발을 높이 들면서도 동시에 경계심을 강화해야 합니다.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721~722

한편 호찌민은 1957~58년 사이에 중국, 북한, 동독,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여러 국가들을 방문하며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다.[48] 북한 방문의 경우 1957년 7월 7일부터 12일까지였던 것으로 확인되며, 북한·북베트남 연대를 강화하자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호치민은 북한과 북베트남의 분단문제에서 미국의 책임을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단결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49][50]

미 제국은 조선 및 베트남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군사기지를 늘리며 긴장상태를 일으키고 있고 사회주의 진영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미제국의 전쟁도발 음모에 당변했기에, 선두에 선 소련과 중국, 그리고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은 인류의 평화문제와 사회주의 업적에 책임을 인식하여 단결심을 강화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서로 협력을 증진해야 합니다.

도미엔, 『붉은혈맹』,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p.65~66

1958년 여름 호치민은 중국 베이다허에 있는 마오쩌둥의 여름별장에서 마오쩌둥과 함께 베트남을 통일시키는 투쟁의 진행방향을 논의하기도 했다. 마오쩌둥은 현재 현재 가장 긴급한 과제는 북부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51] 1959년 1월 북베트남 정부는 제15차 전체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남부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즉, 새로운형세의 변화를 마주하고 남베트남에서의 혁명을 촉진하기 위해 호치민 주석은 당 중앙 제15차 확대회의를 주관했고, 남베트남 혁명의 임무와 남베트남에 대한 북베트남의 해방 사업, 그리고 베트남을 통일하기 위한 사업으로 비롯되는 여러가지 상황을 토론했으며, 새로운 남부 혁명 노선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52]

남방(남베트남)을 해방시켜 제국주의와 봉건적 통치에서 벗어나게 하여 민족의 독립을 실현하고, 경작자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남방 인민의 민주 민족 혁명을 완성시켜 평화, 통일, 민주의 부강한 베트남을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임무이다.

임진호 옮김, 『호찌민 주석 생평』, 지성인, 2022, p.174

남베트남은 애당초 제네바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총선을 거부해서 남베트남 내에서조차 반 정부 세력이 대부분이었고, 응오딘지엠 정부는 과거 항불전쟁 시기 독립운동을 했던 세력들을 마구잡이로 구금하고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가브리엘 콜코에 따르면, 1955년에서 1957년 사이에 응오딘지엠이 처형한 정치적 반대 세력만 12,000명을 넘겼으며, 4만 명 이상이 1958년 기준으로 감옥에 구금된 상태였다.[53] 이것은 결국 1960년 남베트남 안에서 남부인들 출신들로 구성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 응오딘지엠 독재정권 타토라는 목표하에 창설되기에 이른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창설되어 미국과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선 투쟁을 전개할 당시, 북베트남을 이러한 투쟁 사업의 후방으로 삼기 위해 북방의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했다. 호치민은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인재 육성의 중요성과 작용을 강조했으며, 반드시 사회주의 사상과 풍격, 국가의 주인 의식과 사회주의 집단정신, 그리고 내가 군중이며, 군중이다라는 의식과 건국을 위해 근검하고 절약하는 정신을 갖춘 공산주의 도덕적 인품을 구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1년 7월 22일 당 중앙집행위원회 제5차 회의(제3회의)에서 농업 발전에 대한 임무에 관해 토론하였는데, 이때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54]

우리는 농업을 발전시키는 사업을 신속하고 안정되게 실시해야 한다. 농업은 공업 발전에 양식과 원료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사회주의 공업화를 담보한다.

임진호 옮김, 『호찌민 주석 생평』, 지성인, 2022, p.176


당시 남베트남인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창설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그러니까 베트콩은 대중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이유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가 자신들의 지지세력이 태생적으로 될 수 없거나 되기 힘든 빈농 계급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하고 학살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남베트남 정부는 농촌에 있는 토지를 다시 식민지 시절 프랑스에 협력했던 악질적인 지주들에게 되돌려주고자 했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남베트남에서는 과거 항불전쟁 시기 프랑스 침략에 맞서 싸웠던 베트민과 공산주의자들이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남베트남의 민중들이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호치민 정부에게 지지를 보냈던 이유는 아래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정부의 테러 행위는 혁명운동측 보다 훨씬 심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베트민 출신에 대한 소탕작전, '공산주의 마을'에 대한 포격 및 지상공격, 그리고 '공산주의 동조자들'에 대한 검거 등이 그것이다. 1960년에서 1965년까지 롱안(Long An)에서의 혁명운동이 계속 강화되었던 것은 바로 정부측의 이러한 테러전략 때문이었다.

Jeffrey Race, 『War Comes to Long An』, University California, 1971, p.197

호치민 또한 남베트남의 상황을 걱정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미제국주의와 응오딘지엠 괴뢰 정권을 우리 남방에서 아직 축출하지 못하여 남방이 미제국주의자들의 잔혹하고 포악한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라 우리 인민은 여전히 밥을 맛있게 먹을 수도, 잠을 편히 잘 수도 없는 상황이다.

임진호 옮김, 『호찌민 주석 생평』, 지성인, 2022, p.178

제프리 레이스가 말한 바와 같이 남베트남 정부는 근본적으로 대다수 빈농 및 농민 계급을 적으로 돌린 세력이었고, 미국은 이러한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4년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한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린 주범이었던 미국은 도미노 이론에 따라 1950년대부터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남베트남 정권을 지원했다. 남베트남에 파견된 미군사고문단의 구성원들은 과거 한국전쟁에서 경험을 쌓은 이들도 제법 존재했으며, 이들은 남베트남에서 독립운동 출신 세력들을 탄압하는 역할을 했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정부는 남베트남에 군사 고문단의 숫자를 점진적으로 증강했으며, 1961년 당시 900명 안팎이던 고문단의 숫자는 1963년에 이르러 16,000명을 돌파했다. 그러나 미국의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1963년 1월 압박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해 6월에는 틱광둑이라는 고승이 소신공양하는 사건이 일어나, 남베트남 정부는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암살하고, 새로운 남베트남 반공정부를 세웠지만, 남베트남은 쿠데타가 지속해서 일어나는 막장 상황에 빠졌고, 베트콩들은 남베트남에서 해방구를 확대해나갔다.

결국 미국은 1964년 8월 미국의 매독스호가 북베트남 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 본격적인 베트남 침략을 노골적으로 시작했다. 미 대통령 린든 존슨이 통킹만 결의안을 발표하여 사실상 선전포고을 하고, 베트콩과 남베트남군의 내전에서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절대적으로 친미반공국가였던 대한민국, 필리핀, 태국, 호주, 뉴질랜드가 미국을 따라 이 부도덕한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1965년 3월 미해병대 3,500명이 다낭항에 상륙하고, 미국 항공기들이 북베트남에 대한 융단폭격을 시작하면서 미국의 베트남 침략이 가시화 되었다.

한국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미군의 무차별 북폭이 게시되자, 북베트남 또한 남베트남과 더불어 시설이 초토화되고 그에 따른 심각한 인명피해가 뒤따랐지만, 이러한 최신식 무차별 폭격과 미국의 폭력은 베트남 민중의 저항의지를 꺾지 못했다. 미국 정부의 공식적 입장에 따르면, 북폭은 북베트남의 군사시설만 타격하는 것 처럼 보도됐지만, 그 실상은 군사적 시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병원, 학교, 시골, 주택 등에 무자비하게 투하됐다. 미군들이 펼친 군가작전에 의해 학살된 인원들 대부분이 평범한 마을 주민이거나 농민들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B-52 폭격기의 무차별 폭격과 미군의 베트콩 소탕작전으로 인해 자신의 마을로부터 강제로 축출되었으며, 미군의 이와 같은 활동은 오로지 군사적 파괴전략에 치중되고 있었으며 남부 인민에 대한 정책적 배려는 전혀 없었다. 즉, 베트남 전쟁은 이처럼 참혹한 전쟁이었으며, 미군의 이러한 행위는 베트남 민중의 극심한 반발을 샀다.

1966년 7월 호찌민은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라는 지금도 전 인류에게 회자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역사적인 명 구절은 북베트남인들의 통일전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 주제, 구호가 되었다. 1966년 7월 호치민은 옛 친구이자 적인 프랑스의 장 생트니가 하노이에 방문하자, 전쟁을 둘러싸고 회담을 가졌는데, 아래 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호치민은 1966년 7월 옛 친구이자 적인 장 생트니가 프랑스의 중재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도 강경한 입장을 전달했다. 오랫동안 인도차이나 전문가 노릇을 했던 생트니는 프랑스의 대통령 샤를 드골과 마찬가지로 워싱턴이 남베트남에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은 협상에 의한 합의를 통해 사이공에 중립 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호치민은 생트니와 만난 자리에서 미국이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모든 도시를 부수어버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와 그의 동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끝까지 싸울 각오가 되어 있으며, 최종 승리를 얻기 전에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호치민은 미국이 체면을 구기지 않고 철수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용의가 있지만, 결국 유일한 해결책은 미국이 물러나는 것뿐이며,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윌리엄 J.듀이커, 정영목(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801~802


2.9. 구정 공세와 최후[편집]


구정 공세가 일어나기 한달 전인 1967년 12월 호찌민은 당 지도부가 계획한 '총 공격과 봉기'를 최종적으로 승인 했고, 그의 최종적인 승인이 떨어짐에 따라 1968년 1월 31일에 시작되었다. 구정 공세 결과 북베트남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남베트남의 응우옌 반 티에우 정권은 무너지지 않았고, 전투의 결과만 놓고 보았을때 구정 공세는 베트콩에게 있어 치명적인 피해를 안겨 주었다. 그나마 눈에 띄었던 건 수도 사이공에서 미대사관 1층을 잠시나마 점령했던 것과, 대략 1달 간 후에를 점령했던 것 그리고 77일 동안 케산에 있는 미군기지를 포위하여 제2의 디엔비엔푸 전투를 연상시켰던 것 정도다. 하지만 생중계로 구정 공세를 지켜본 미국인들의 반전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었고, 이는 베트남 전쟁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1968년 3월 구정 공세로 인한 반전 운동으로 미국이 고민에 빠져있을 당시 호찌민은 베이징에서 구정 공세의 결과를 보고받았고, 베트남 정치국 국원인 레둑토가 "구정 공세 이후의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곧 남부로 출장을 갈 것"이라고 얘기하자, 호찌민 또한 함께 내려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고 한다.

구정 대공세로 자국 내에서 일어나는 반전운동과 5월을 시작으로 미국과 서유럽 등으로 번진 68혁명의 여파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더 이상 이끌어가기 어려워졌다.[55] 서방 세계가 이른바 68혁명이라는 또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됐으며, 당연히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도 급속히 악화됐다. 결국 1968년 11월 미국은 3년전에 시작한 무차별 공습인 롤링썬더 작전을 중단했고,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회담도 시작됐다. 미국의 린든 B. 존슨은 재선하지 못했고, 리처드 닉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기에 이르렀으며, 미국 또한 1969년을 시점으로 베트남화 정책을 발표하여 남베트남 내에서의 단계적인 철수과정을 밟기에 이른다.

호치민은 구정 공세를 보고 받은 이후 당 내에서 활동을 하긴 했지만, 베트남 전쟁 시기 건강상 문제가 생긴 상태였다. 따라서 호찌민은 요양 차원에서 중국을 자주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었기에 직접 남부로 내려가 활동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1969년 9월 2일 9시 47분, 염원이었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심장병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56] 향년 79세.

8월 중순 어느 날 호치민은 상태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폐에 심한 울혈이 생겼다. 의사들은 페니실린을 처방했지만, 호치민은 다음 날 가슴에 통증을 느낀다고 말했다. 28일에는 맥박이 불규칙해졌다. 정치국원들이 남부의 상황을 보고하러 왔을 때, 호치민은 몸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이틀 뒤 호치민은 그를 만나러 온 팜반동에게 9월 2일로 예정된 독립기념일 행사 준비가 끝났느냐고 물었다. 호치민은 다음 날 아침 일어나 죽 한 그릇을 먹고 참전용사들을 만났다. 그리고 9월 2일 오전 9시 45분, 베트남의 독립 24돌을 기념하는 날 호치민의 심장은 멈추었다.

윌리엄 J.듀이커, 정영목(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815~816

당시 외신기자로서 베트남 하노이에서 호찌민의 장례식을 지켜본 유일한 서양인 기자이자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남겼다.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비탄과 감동, 혼란이 함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이 행동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정치 지도자를 잃고 애도하는 그런 슬픔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을 꾹 참고 견디는 모습이었다. 호찌민의 인민들은 ‘호 아저씨’가 부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들이었다.”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444


그가 죽고 3년 후인 1972년 부활절 휴가 기간, 남베트남에 미군이 5만명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노이 정부는 새로운 군사작전을 다시한번 개시했다. 1973년 1월 베트남은 파리 평화 협정을 통해서 미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75년 3월 "남부를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4월 30일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마무리지으며 베트남통일을 이룬다. 공교롭게도 호찌민이 사망한 날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세운 날인 9월 2일이었다.[57]


2.10. 기타[편집]


사망 전 유언으로 화장 후 재를 3등분하여 베트남의 북·중·남부에 한 줌씩 뿌려 줄 것을 요구했으나, 베트남 정부는 호찌민의 유언을 단번에 무시하고 하노이 바딘(Ba Dinh) 광장 앞에 대규모 능을 짓고 호찌민의 시신을 방부 처리한 뒤 안치하여 참배객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58] 이렇게 해서 레닌 이후 시신이 미라로 보존되고 있는 두 번째 공산권 지도자가 되었다. 호찌민의 유언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유언 중 하나가 전쟁에서 승리 시 남베트남 사람들을 탄압하지 말라는 유언도 있었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시키고, 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한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을 이룰 것이다.


그가 사망한 것에 관계없이 베트남전은 3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1975년에 북베트남이 승리함으로써 그의 숙원인 베트남의 통일을 이룬다. 그리고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을 그의 이름을 따서 호찌민으로 개명하였으며, 통일 수도는 하노이가 되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나 중국에 머물던 시절에 중국 여자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이후 혁명동지이자 애인이었던 응우옌 티 민 카이하고 결혼하려 했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호찌민이 체포되면서 이들 역시 실종되었고, 북베트남 주석이 된 이후 호찌민이 이들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다.


3. 성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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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는 호찌민

유능한 지휘관이지만 툭하면 부하를 때리는 장군이 있었다. 호 아저씨는 그 장군을 주석 집무실로 불러 며칠을 같이 지내면서 복잡한 나랏일을 항상 침착하고 온화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갑자기 장군의 뺨을 때렸다. 장군은 얼떨결에 당하고 어쩔 줄 몰랐다. 이렇게 맞는 심정이 어떠냐고. 이어서 호 아저씨는 부드럽게 당부했다. 부대에 돌아가거든 부하를 때리지 말고 사랑하라고.

출처: '왜 호찌민인가?' p.8

남들에게도 매우 친절하였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호찌민이 친척의 집에 갔을 때 친척들이 나중에 그가 유명한 호찌민이라는 것을 알아서 어찌할 줄 모르자 그는 "그냥 평소대로 해주세요."라고 했다.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했는데 낡은 옷을 기워서 입기가 일쑤였고, 폐타이어를 잘라 신발을 만들어 신었을 정도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하노이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고가 귀중품은커녕 고물 라디오 한 대와 책 몇 권이 있는 게 전부였다고 하니 이는 그가 얼마나 검소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3찬 만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왜 3찬 만을 드시냐고 물으니 "'내가 반찬 하나를 더 먹을 때마다 우리 국민 하나가 더 죽는다.'"라고 했다고 한다.[59]

이렇듯 무욕하다 못해 해탈한 듯 보이지만 실은 그도 사람인지라 화려하고 풍족하게 살고픈 욕망이 없던 건 아니였다. 친구에게 털어놓은 고백을 보면 "나도 마음껏 먹고 싶은 걸 먹고 편하게 살고 싶다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욕망을 끝까지 참고 절제하며 살았다.[60] 일화에 따르면 딱 하나 자신이 사치라고 부르던 것을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영국제 담배 555였다. 이것만은 차마 양보 못 하겠다고.[61] 이 담배외에도 살렘, 말보로, 켄트도 좋아했고 누가 양담배를 구해주면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가는 곳을 경호원들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이는 갈 곳을 알리면 그 곳에 있는 주민들이 귀찮아지기 때문에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노이에는 호찌민이 기거했던 옛 주석부가 있는데, 이곳은 본래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총독부였다. 당연히 상당히 호화로운 곳이지만, 호찌민은 정작 이 옛 총독부 관저를 쓰지 않고, 주석부 안의 연못 옆에 작고 허름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와서 수염을 당기면서 '파파 호호'라는 애칭으로 불러주면 미소 지으면서 손수 베트남 고유악기를 치면서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불러주며 같이 놀아주곤 했다. 하루는 아랫사람이 아이들이 마구 뛰어놀면서 시끄럽다고 화내자,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처럼 활기찬 곳은 없다면서 놔두라고 했단다. 그 시절 그를 돌보던 가정 도우미는 그가 화를 내거나 불평불만을 낸 걸 좀처럼 볼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62]

이렇게 베트남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호찌민 덕에 베트남 내 극심했던 소수민족 문제도 상당부분 봉합되었다.[63] 이전 응우옌 왕조에서 힌두교나 무슬림 참족들을 극심하게 탄압했던 것과는 정 반대로, 호찌민도 생전에 소수민족도 우리의 동포라면서 그들의 풍습에 맞는 집에도 거주하였다고 한다.[64] 호찌민은 가는 곳마다 소수민족을 설득하여 베트남 독립운동에 동참하라고 권했고 그들을 위한 간단한 신문을 만들었으며 문맹자들을 위해 외우기 쉬운 노래를 만들어 가르쳤다. 이들 중 공부를 좀 하는 젊은 학생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중국이나 소련에 유학보내기도 했다. 그 결과 몇년 후 북쪽 지역 대부분 소수민족들이 베트민이 되었고 소수민족의 협조는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이 승리하는데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65]

아무튼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의 정신적 지주이자 서민적인 모습으로 다가갔던 그를 기리기 위해 사이공을 호찌민으로 개명했다.[66] 그의 사망일은 공교롭게도 독립선언과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9월 2일과 일치하는데[67],이 날은 베트남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다.


4. 평가[편집]


베트남국부로, 베트남에서는 당연히 긍정적인 평가가 압도적이지만 외국에서는 평가가 갈린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일생의 베트남의 자주독립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개인적인 삶을 모조리 내버린 채, 평생을 헌신해 온 투사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실리주의적인 행보, 냉철하면서 치밀한 정치적 행보와 계산, 공산주의 이념에 치중하지 않고,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절묘한 외교를 통해서 크게 적을 만들지 않는 그의 능력은 오롯이 베트남 독립에 투사되었다. 인류 역사상, 그리고 특히 당시의 전세계 국가들이 이념을 등에 업고 광기어린 막장 짓을 일삼는 독재자들이 넘치는 시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는 보기 드물 정도로 자기 혼자만 권력을 독점하는 것에 집착하거나, 혹은 부정부패 등으로 본인의 신념을 타락시키는 행보와 거리가 멀었다는 점만으로도 존경 받을 부분이 많은 정치가이기도 하다.[68] 하물며 당장 바로 옆나라 캄보디아에서 막장 중의 개막장인 폴 포트 같은 인물이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은 경우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러나, 동시에 그는 동시에 소름끼칠 정도로 냉혹한 판단 하에 정적이나 반대세력을 차도살인지계로 제거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거리낌 없이 어제의 동지들의 통수를 날려버리는 한편, 하나로 뭉쳐서 강대해진 인도차이나, 그리고 그 인도차이나 반도를 이끄는 베트남이라는 밑그림을 그린, 다른 한편으로 동남아시아의 미국이나 소련으로서 베트남을 만든다는 패권주의에 사로잡힌 냉혹무도한 정치괴물이기도 했다. 즉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식민지 침탈과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인민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민족주의자적 면모를 보였으나, 토지개혁의 실패와 같은 과실과, 한때 가장 강력한 정치/군사적 우방이었던 베트콩들을 구정 공세로 지옥에 몰아넣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마당에도 흘릴 수밖에 없는 피였다는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일삼는 독재자였다는 사실 또한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하고 학살하는 등 독재행각을 벌인 인물임은 분명하지만 나름대로 집단지도체제를 확립시키고 소수민족들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사회주의체제에 흡수시킨 공도 분명한만큼 1인 독재와 각종 실책으로 수천만명의 아사자를 발생시킨 스탈린이나 마오쩌둥과는 궤를 달리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69] 무엇보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하나된 국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고, 외세로부터 분리된 자주국가, 그 안에서 스스로 오롯이 자국의 이름 하에 뭉쳐서 분열되지 않고 성장동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당대는 물론이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역사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근현대사의 이름난 독재자들과 같은 항렬에서 놓일 수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4.1. 긍정적 평가[편집]


1952년 정상 사이에 회담이 열렸을 때 스탈린은 회의실의 의자 두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스탈린: 호찌민 동지, 여기 의자 두 개가 있소. 하나는 민족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요. 동지는 어디에 앉고 싶소?

호찌민: 스탈린 동지, 나는 두 의자에 다 앉고 싶습니다.

출처: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2003 p.620~621[70]


공산주의자들이 사이공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베트남노동당의 지도자 레주언과 그의 노련한 동료들의 결의와 뛰어난 능력 덕분이었다. 또한 북베트남 군대와 베트콩 게릴라들(한 세대 동안 남베트남의 정글과 늪에서 혁명적 대의를 위해 싸우다 죽어간 평범한 보 도이 병사들)도 그들 못지않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한 인간의 비전과 의지와 지도력의 유산이었다. 그는 베트남공산당의 창건자이고, 혁명 운동이 지고자이고, 종전 6년 전인 1969년에 사망할 때까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주석을 지낸 호치민이다.

호치민 평전 p.14


호치민은 자신의 안녕과 목숨까지도 희생하면서 외세로부터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해방하시키고 가족도 갖지 않은 채 전적으로 헌신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베트남 인민들에게 큰 희생입니다. 왜냐하면 베트남 사람들은 가족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PBS 베트남 전쟁 1화 즈엉반마이 엘리엇와의 인터뷰[71]


호찌민에 관한 논란 중 하나는 과연 호찌민이 민족주의자인지 아니면 공산주의자인지 여부였다. 실제로 한 동료에게 호찌민이 고백하기를 자신이 공산주의가 된 이유는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자신을 도와준 자들이 프랑스인 공산주의자들 뿐이어서 였다고 한다. 당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프랑스 좌파들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반대했고 해외 식민지 출신의 타민족을 배척하는 행동에 반대했다. 프랑스에 막 도착한 젊은 호찌민 입장에서는 먼저 손을 내미는 프랑스 좌파들의 도움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코민테른 요원이기까지 했으니 호찌민은 일단 공산주의자이긴 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 제3세계의 식민국가들의 독립을 도와준 유일한 세력은 소련이었다. 당연히 찬 밥 뜨거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닌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호찌민은 좀더 민족주의적인 측면을 인정하고 신경제정책 등을 펼치기도 했던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지자였고 많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심지어는 같은 동지들에게서도) 공산주의의 이론적인 이해가 떨어진다는 평을 들었을 정도다. 게다가 밑의 명언에서도 나오는 "나를 이끈 원동력은 공산주의가 아닌 애국심이었다."라는 말이나 일평생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신한 만큼 호찌민은 꼭 공산주의자이다 민족주의자이다 나누기 보다는 민족주의가 좀 더 중식적이었던 민족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로 바라보는 게 더 바람직할 것 같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찌민을 반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반은 블라디미르 레닌이라 정의하며 "그가 민족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하는 논쟁은 그 다지 의미가 없다."라고 했다.

공산주의민족주의를 적절히 버무린 점, 그리고 제2세계 국가에서 비교적 민주적인 운영 시도를 한 점에서 유고슬라비아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사상과 비교되기도 한다.

1956년 스탈린 격하 운동을 진행했던 니키다 흐루쇼프는 호치민에 대해 공산주의의 살아 있는 성인이라고 평가했다. 아래의 인용문은 전문이다.

정치 경력을 쌓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사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인상을 남긴 사람은 없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사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호치민의 삶의 방식과 그가 동료들에게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면, 그는 확실히 '신성한 사도들'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었다. 혁명의 사도 말이다. 그의 눈에서 번득이는 순수함과 진실함의 빛줄기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의 원칙과 행동에서 부패하지 않는 공산주의자의 진실함을 보았고, 대의에 헌신하는 자의 순수함을 느꼈다.


호찌민은 실용주의자기도 했는데, 이는 일생 줄곧 도덕적인 면모를 지켜나가면서도 혁명을 위해서라면 여러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든지, 그런 와중에서도 되도록이면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든지, 혹은 베트남민주공화국에서 공산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사적 소유를 크게 제한하지 않으며 신성한 권리라고 언급하는 등 여러모로 실용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는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을 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볼 수도 있지만, 유명한 공산주의자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호찌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과 겹쳐서 생각해본다면 이는 공산주의에 구애받지 않고 호찌민이 베트남 민족 모두를 포용한 정부를 세우려 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교계의 그랜드슬래머였다. 일본 제국을 몰아내기 위해 미국과 손을 잡고, 중국의 야욕을 견제하기 위해 (비록 걷어찼지만) 국치의 적인 프랑스에 손을 내밀고, 미국에게 호의 섞인 제스쳐를 보내기도 하며[72], 감정이 악화된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적당히 줄타기를 하며 어느 한 나라와도 크게 적을 만들지 않았다.

호찌민 사후 공산당이 베트남을 급격히 공산화시키며 나타난 경제적인 폐해와, 팽창주의와 급격히 친소련으로 기욺에 따라 일어나게 된 중월전쟁까지, 호찌민이라는 지도자 하나가 사망함으로써 일어난 베트남의 변화는 결코 좋은 것이라 말하기 힘들다. 이후 베트남의 개혁주의자들이 괜히 '호 아저씨라면 오히려 좀 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을 것이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비록 말년에 외교 분야를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많은 실권을 잃어버렸지만, 베트남의 국부로서 미국인들의 조지 워싱턴과 같은 이미지로 베트남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인물로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윗동네의 같은 공산주의자였던 마오쩌둥은 오늘날 중국에서조차 부분적인 비판은 받고 있지만[73] 호찌민은 베트남에서 그야말로 국부 급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에 가거나 베트남인이 있는 곳에서 호찌민을 까내리는 것은 반드시 삼가도록 하자.[74] 실제로 베트남 국민들중에서는 중국의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국민들을 여럿 죽이거나 탄압했던 것에 비하면 차라리 호아저씨가 다스리는게 더 나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정도이다.[75]

베트남으로 여행을 가든 출장을 가든, 베트남 공항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온 거리 온 건물 동서남북 어디에 있건 온통 호찌민의 초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지겹도록 보게 된다. 베트남의 따스한 아침햇살을 맞이함과 동시에 당신은 언제나 호찌민 초상화를 보며 상쾌한 하루를 시작할 것이고 호찌민 초상화를 보며 집으로 들어올 것이다. 예외는 없다. 진정한 국민적 스타가 호찌민이다. 이는 베트남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큰 정신적 자산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현대 베트남의 경제적, 정치적 난맥이 극단적 이상주의자인 호찌민의 무조건적인 공산화 경제정책과 친중전략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호찌민의 친중은 공산주의자인 호찌민 입장으로선 프랑스, 미국 등과 싸우기 위해 필연적인 측면도 있었으며,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프랑스와 중국[76]을 견제하기 위한 측면에서라도 호찌민이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호찌민이 미국의 힘을 잘못 평가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시당초 호찌민 자체도 전술했듯이 극단적 공산주의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으며, 베트남의 경제정책 실패를 호찌민의 잘못된 이상주의 탓이라 주장하는 것은 베트남의 주석이 타 공산국가와 같은 독재자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전제로부터 기인된다. 주석으로서 호찌민의 역할은 주로 외교분야와 대외적 이미지 담당의 측면이 강했으며, 주요 정책들은 쯔엉찐이나 레주언과 같은 공산당 서기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주석인 호찌민을 무시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호찌민의 지시를 받는 위치는 아니었으며[77] 이들이 꼭 호찌민의 측근인 것도 아니었고, 특히 급격한 공산주의화 정책을 펼친 레주언은 자신을 호찌민에 맞먹는 이미지로 만들며 독재 체제를 강화하려 하다 실패하였다.

오늘날 베트남의 경제적, 정치적 난맥에 호찌민의 책임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베트남 주석과 공산당의 분리 없이 호찌민의 이상주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호찌민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라 할 수 있다. 한국인 입장에서 공산권을 공부 할 때 마다 강조되는 항목이지만, 공산독재 국가들 중에서도 북한 김씨 왕조가 유달리 막장이다.[78] 일반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정은 당의 독재를 원칙으로 하고, 이는 개인의 독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천하의 그 블라디미르 레닌도 막상 정치국 내에서는 죽을 때까지 마음대로 다른 정치국위원들을 마음대로 찍어누르거나 하지 못했고[79], 스탈린도 완전한 권력 장악까지 일정 부분 당내 민주주의를 실행해야 했으며,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한 뒤 소련은 다시 과두 정치, 집단 지도체제로 돌아갔다. 북베트남은 이 와중에서도 솔직히 하노이 정권이 단단하게 자리 잡았을 시점인 1950년대, 60년대에 들어서는 호찌민도 노인이었기 때문에 상징적 국가 원수 역할이 더 강했지, 실무 통치는 쯔엉찐, 레주언, 레둑토 같은 정치국의 고위 관료들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돌아갔고, 산하 조직인 베트콩의 경우 쩐반짜, 응웬치짠, 팜반둥 같은 인민혁명당 중앙 행정 위원회(미국측 자료에서는 그냥 남베트남 중앙 위원회, 줄여서 COSVN으로 일컬는다.) 지도부가 하노이 정치국의 지령을 받아가며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하지만 구 남베트남 출신으로 북베트남에 동화되지 않고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다.[80] 미국과 프랑스 등지에 사는 베트남계 이민자들이 대부분 구 남베트남 출신으로, 베트남전 전후로 도망쳐 나오거나, 이후 보트피플로 탈출한 사람들의 후예이기 때문. 실제로 1999년 한 젊은 베트남인이 미국의 베트남계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리틀 사이공에 있는 그의 비디오 가게에 호찌민의 사진을 걸었다가 베트남계 이민자들의 거의 테러에 가까운 분노가 섞인 항의를 받았을 정도.###[81] 한국 지상파 뉴스에서도 해외토픽 부분에 당시 상황이 나왔는데, 중장년 베트남계 이민자가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경찰이 출동하면서 말리자 "호찌민의 사진을 철거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라고 절규하는 모습이 나왔다. 미국이나 프랑스 같이 규모가 큰 베트남계 이민자 사회가 형성된 곳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보트 피플로서 망명해 온 구세대 이민자들과 90년대에 서방과 베트남의 관계가 정상화된 이후 유학이든, 사업이든 정상적으로 이민을 온 전후 세대 이민자들 사이의 갈등이 크다. 전자의 경우 당연히 통일 베트남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 나온거니 호찌민을 좋게 생각 할 수가 없으나, 국교 정상화 이후 떳떳하게 해외로 나온, 북베트남이나 통일 베트남의 교육을 받은 베트남인들에게 있어 호찌민은 당연히 국부이기 때문이다.[82]

1960년대 부터 베트남 전쟁을 연구해온 리영희호찌민을 매우 존경했다 한다.

문재인은 대통령 재임 중이던 2018년 3월 23일 베트남의 호찌민 주석릉을 방문하면서 전 인류를 통틀어서 위대하다는 소감을 밝힌 바 있다.


4.2. 부정적 평가[편집]



4.2.1. 사상에 대한 과대평가[편집]


허나 일각에서는 호찌민에 대해 시대를 잘못 예측한 이상주의자 또는 인품이 훌륭했어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 독재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마오쩌둥이 그렇듯, 68혁명 여파로 서구권에서 히피들에 의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보다 외부적으로나, 베트남 내부적으로나 뭔가 뜬구름 잡는 훌륭한 민족지도자로서 존경만 받지, 제대로 연구된 적이 별로 없다고 주장한다.[83]

당장 이 항목만 봐도 호찌민이 이만큼 훌륭한 인물이었다, 피상적인 60년대 신좌파의 낭만적인 미화적인 시선이 지배적인데,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사생활이 굉장히 깔끔담백한 검소 그 자체였던 건 레닌스탈린도 마찬가지고, 공산주의는 부분적으로 빌리기만 하되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더 중점을 둔 건 편협한 반공 자체만을 위한 반공적 시각이 아니고선 전혀 그 자체로는 딱히 긍정적인 사실도 아니다! 사실 사회주의권의 많은 폭군들은 '사상적으로 순수한'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거리가 먼 정치를 한 반면 조국과 민족 타령은 입만 열면 해댔고, 마오쩌둥이 주장한 마오이즘 역시 이론적인 차원에선 소련의 원형과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애초에 마르크스-엥겔스 듀오 본인들이 아예 이론뿐만 아니라 진짜 혁명을 일으켜 사회주의 국가를 세워서 자신들의 이론을 그대로 실천한 적이 없었던 만큼, 이리 보듯이 현실 정치의 역사에서 사실 순수한 오리지널 공산주의 국가의 원형을 찾는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상 허상에 가깝다. 반공 가치관의 영향인지 한국의 미디어물이나 인터넷, 서적, 지식인들과 논객들 사이 평론을 보면 "빨갱이들 중에서는 그나마 덜 빨갱이스러웠다"라는 어조로 티토나 호찌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위 문단에서 설명했듯이 현실 정치사에서 순수한 공산주의 국가[84]라는 물건 자체가 존재한 적이 없고, 해당 지도자들이 다른 공산권 독재자들에 비해 긍정적으로 평가 받는다면 그건 그들이 저질렀던 학살과 정치적 탄압이 다른 공산권 국가들에 비해 여러가지 이유로 덜 부각됐기 때문이지,[85] 사상적으로 더 순수하거나 덜 순수해서 긍정적으로 평가 받는게 아니다.[86]

베트남의 경우 친소적이고 베트남 내부에서만 떠들어대지 밖으로는 무슨 정확한 사상 체계인 양 흉내도 안내고, 아무도 그리 봐주지 않는 '호찌민사상'이란 물건만 제외하면 딱히 자신들만의 요상한 사회주의 브랜드를 주장한 적이 없는데, 이건 말 그대로 사상적인 차원에서 보면 굉장히 유연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호찌민에 대한 구체적인 정치인으로서 평가가 아닌, 그냥 대충 훌륭했던 사람이란 식의 두루뭉실한 인식은 사실 다음과 같이 호찌민을 상대했던 다양한 입장들의 인식이 맞물리고 증폭되어 형성된 점이 크다.

1. 프랑스 입장에서 19세기 알제리의 압드 알 카데르 같은 자신들을 더럽게 애먹인, 악질 반란 분자지만 능력 하나만은 뛰어난 초월자 (혹은 프랑스의 위신을 위해 뛰어나야만 하는)
2. 미국 입장에선 자신들이 최초로 패배한 전쟁에서 적군을 지휘한 적이지만 위대한 천재 지략가 (역시 미국의 위신을 위해 위대해야만 하는)
3. 언론, 학계에서 영향력이 강하며, 베트남 반전 운동에서 큰 영향을 받은 리버럴 진영에선 저 멀리 떨어진 가난한 탈식민지 동남아인들보다 훨씬 더 가깝고 얄미운 숙적인 미국 내 군부와 정치인들이 대표하는 보수 우익의 가랑이를 대신 걷어 차 준, 직접적으로 언급하긴 뭣 하지만 어쨌든 고마운 양반
4. 특히 여기에 낑겨 어쩌다가 어중간한 비중으로 참전했던 한국인 입장에선 유교권 국가의 민족주의 지도자이며, 실제로 박헌영과 레닌 학교 동문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교류한 경험이 있는 등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었기에 생기는 호감

대미 항전, 대불 항전을 벗어나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젊은 혁명가로서 살아간 호찌민이나, 초기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행적과 발전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지금까지 알려진 붕 뜬 성자와 같은 두루뭉술하고 막연하게 긍정적인 이미지는 호찌민 본인과 베트남 공산당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형성한 이미지일 수 있으며, 실제로는 남의 힘(주로 프랑스 식민 총독부)을 빌려 적을 제거하는데 능숙했으며, 필요에 따라 자신은 공산주의자라 했다가 민족주의자라 했다가 왔다갔다 하며 공산권, 서방 양쪽 상대로 말을 잘 바꾸었던, 아주 영악하고 노련한 희대의 협상가이자 당대의 진정한 정치인에 가깝다.


4.2.2. 토지개혁 관련[편집]


호찌민에 대해 또 다른 논란의 대상은 그 유명한 토지개혁이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후인 1954년에서 1956년 동안 북베트남에서 토지 개혁을 무리하게 이끌다가 농민과 노동자들이 반발하여 파업, 시위까지 일으킨 이들을 철저하게 진압하였다.[87]

사실 이 문제는 좀 복잡하다.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호찌민의 베트민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중국의 도움을 받았었다. 따라서 베트남에는 중국 고문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문제는 이 때 중국은 대약진 운동 기간인데다 이 양반들이 마오주의에 물든 스페인 이단심문관급 인물들이었다는 것. 전쟁의 원조로 목소리가 높아진 것을 이용해 베트남에도 중국식 토지개혁과 사상개혁을 요구하고, 이를 소리높여 거부하기 힘든 호찌민 등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일. 당시 베트남 공산당 지도자이던 쯔엉찐(Trường Chinh, 長征, 장정)의 지도 하에 이게 일어나게 된다.[88]

그러나 결과는 북베트남에 오랫동안 공헌해온 베트민 고참 퇴역병부터 베트민에 꾸준히 협력해온 지주들까지 전부 쓸어버린 말 그대로의 중국식 개혁이었다. 과거 중국에서 벌였던 것처럼 공산당 내부에서 지정한 수치를 들먹이며 지주는커녕 중농이라고도 볼 수도 없는 사람들을 지주로 몰아 죽이거나 고문하거나 투옥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이 과정에서 의욕 넘치는 개혁요원들이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반동으로 몰아 가혹하게 고문하였다. 해묵은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여기저기 밀고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 여파는 21세기인 현재까지 이어져서 아직까지도 베트남 북부 농촌에서는 토지개혁 문제로 철천지원수가 되어 어떠한 일로도 교류하지 않는 집안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당황한 호찌민과 북베트남 지도부는 2만명 이상의 억울한 피해자들을 석방하는 한편 조사를 통해[89] 과잉을 인정하고 피해보상 대책 등을 제시했으나 이미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달아서 결국 대규모 농민시위와 노동자 파업이 벌어져 정권이 흔들리는 수준의 소요가 있었으며 진압 및 토지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1만~5만 가량이 사망하거나 수용소로 연행되거나 파업과 시위를 주도했던 노동자, 농민 지도자들이 총살되었다.

참고로 이 월맹 정권의 토지 개혁은 마침 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남북간 인구 교환 직전에 터진 사건이라 당시부터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마냥 월맹 정권을 미화하던 좌파 언론에 의해 가려져 있다가 새로 밝혀진 사실이 전혀 아니다. 처음에 토지 개혁 과정 중 10만 사망드립을 친건 프랑스인 공산주의자로서 처음에는 오히려 조국의 군대와 국가에 맞서 베트민에게 협조하다가 책이 아니라 몸으로 공산주의를 배우고 전향한 제라르 통가스(Gerard Tongas)로, 이를 이어 받아 당시 열혈 종군기자로 이름 높았던 버나드 폴이 5만을 주장하다가, 전쟁 중에 전향한 베트콩 호앙 반 끼가 갑자기 난데없이 자신의 저서에서 30만명설을 주장하던게 당시 미국 당국자들의 입맛에 맞아 100만명설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역풍으로 반전 성향의 학자, 언론인인 게레스 포터가 1972년에 북베트남 당국의 결정을 옹호하는 어조로 겨우 1,500명 희생자를 주장했으나 이건 역으로 지나치게 적은 계산이다.[90] 학계 내에서는 이미 2000년대 후반에 당시 노동당 내에서 대충 천명당 지주 한명씩 죽여라라고 명시한 내부 문서와 이 주제만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에드윈 모이즈의 15,000명 추산이 맞아 떨어지면서, 당시 신생 정권의 통계적 부정확함, 통계에 잡히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례 등을 감안해 2만명 가량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91] 호치민 평전의 저자인 윌리엄 J 듀이커도 대략 15,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따라서 10만 명 사망설은 매우 과장되었다는 것.

허나 이 토지개혁의 참상은 베트남 지도부들이 토지개혁을 경제개혁만이 아니라 반대파 축출로써의 기능을 이용하려다 역효과가 일어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자기나라에선 오히려 이런 참상을 보고 반동 척결한다고 박수치던 근성 어디 안간 중국인 고문들은 이것을 진정시킬 생각은 않고 오히려 이를 선동 부채질하며 문제를 악화시켰다. 심지어는 호찌민도 반대파 축출로써의 이 기능을 일부 인정하기도 했다. 때마침 1956년 모스크바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쇼프의 주도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시작됨에 따라 스탈린식 토지개혁의 당위성도 사라져버리고 중국도 더 이상 토지개혁을 하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이 일은 중단되었다. 호찌민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총서기 쯔엉찐을 비롯한 베트남 총지도부 4명을 해임했고[92] 호찌민 자신조차도 자신이 민주주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자아비판을 직접 할 정도로 참혹한 실패로 끝나 호찌민의 위신은 이때 큰 손상을 입었다.

이를 두고 호찌민은 실권이 없었다, 반대를 했었다 운운하는 옹호도 있으나, 호찌민이 스탈린과 회동하는 와중 직접 이를 언급했을 만큼 적어도 큰 계획 만큼은 호찌민이 알고 있었다는 점은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애초에 토지개혁과 관련된 정치적 폭력이 호찌민과 베트남 당국이 주장하는 만큼 '순진한 실수'였는지 자체가 의문이다. 막말로 자아 비판은 일단 저지른 다음에 나중에 그냥 한번 하고 치우면 될 일이고, 그나마 호찌민만큼의 양심이나 수치심도 없었던 다른 공산권 독재자들은 그런 최소한의 반성하는 모습도 보여준 적이 없는게 차이인데, 진짜 순수한 의도로 진행하다 생긴 '재난'치고는 당시 서방 상대로는 공산주의는 표면이고 자신은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했던 것과는 반대로 당시 소련, 중국에게는 자신의 공산주의자로서 순수성을 증명할 필요라는 그럴듯한 외부적 여건도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그렇게 호찌민이 정치적 탄압을 가하는걸 꺼렸던 성자였다면 30, 40년대에 그리 이를 악물고 VNQDD와 같은 다른 민족주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힘을 썼을까? 이리 순진함에서 비롯된 실수라고 보기에는 토지 개혁을 강행하며 원하는 향촌 자치를 억누르고 전통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했던 농촌들을 정권의 통제에 편입 시키는등, 베트남 노동당이 토지 개혁을 통해 얻은 점이 너무 많다. 일각에서는따라서 토지 개혁에 관련한 일련의 위기 사태에 호찌민이 보였던 행보 전체를 쇼로 취급하고, 토지 개혁이 터진 시점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분수령이었음에 주목하여 의도적인 전시 공산주의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93]


4.2.3. 정치적 탄압[편집]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북베트남 내에서도 정치적 반대파들에 대한 탄압은 존재하였다. 이 와중에서 전 세계 공산권의 역사에서 거의 항상 발견되는 패턴인 좌파 내 지분 독점성 숙청도 여전했다. 주로 트로츠키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상대로 자행 되었다. 현대 베트남에서이런 주제는 당연히 연구하기 힘든 지극히 민감한 주제이고, 외국 학자들도 주로 관심이 대미전쟁기에 집중 되다 보니 거의 연구 되지 않은 주제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인도차이나 출신 유학파 반불 급진 독립 운동가들은 딱 소련 다음으로 19-20세기 급진 좌파의 역사에서 중요하다 할 만한 프랑스의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과 직접 연결돼 있었고, 이 와중에 트로츠키주의나 아나키즘 또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40년대 중후반, 외부적으론 프랑스와 전쟁하며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는 동안 호찌민과 베트민 정권은 1945년 독립 이후 하노이에서 프랑스 유학파 트로츠키주의자 서클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따 투 터우(Tạ Thu Thâu, 謝秋收)를 암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꾸준한 테러, 정치적 박해를 통해 '해방'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상당히 다채로웠던 인도차이나 반제국주의 급진 민족주의 세력을 일당 독재적 지도 아래 통합했다.[94] 이 와중에서 호찌민은 상술한 따 뚜 떠우 암살 사건만 하더라도 당시 베트민 정치범 석방 운동을 하던 프랑스 출신의 스페인 아나키스트 CNT 소속혁명가, 저널리스트였던 다니엘 게렝에게 자신과 상관 없는 공산당 평당원들이 저지른 우발적 테러라 주장하며 "그는 훌륭한 애국자지만 근본적으로 잘못된 노선 위에 있었다. 어쨌든 그리 죽은 건 애석한 일이다"라 말하는 기만적인 눈가리고 아웅하는 모습을 보였다.[95]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같은 좌익 세력도 호찌민에게 배신을 당하는 마당에 반공 민족주의 세력이 무사했을 리는 없었고, 베트남 국민당으로 대표되는 북쪽 베트남 기반의 세속-반공주의 세력들 역시 호치민과 공산주의자들의 배신과 폭력에 시달렸다. 엔 바이 봉기 이후 중국 국민당에 얹혀살던 망명정당 신세였던 국민당은[96] 공산당의 매국행위의 가장 큰 피해자들 중 하나였다. 2차대전 종전 이후 본거지였던 북베트남으로 돌아왔으나, 수백명의 당원이 베트민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이하고 만다.[97] 국민당과 대월당을 비롯한 반공주의 세력은 계속 베트민에게 맞서 싸웠으나, 윗동네 중국이 공산화되는 등 악재가 계속되면서 공산당에게 밀렸고, 결국 남쪽에 반공주의 베트남이 등장하자 남쪽으로 이주한다. 즉, 같은 좌익진영 내의 정적 탄압이나, 국민당이나 대월당 등을 배신한 사례는 호찌민이 순수한 정신의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였다는 신화를 제대로 반박하는 사례이다.

호찌민 이전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던 독립운동 지도자인 판 보이 짜우의 체포에 호찌민이 어디까지 연관되어 있었는가는 아직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짜우 본인은 Nguyễn Thượng Huyền을 의심했으나, 애당초 이 인물은 짜우 본인의 회고를 제외하면 정말 언급이 드문 인물이고, 이미 프랑스인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던 마당이었던 짜우가 과연 밀고자가 누구였는지 알 수 있었는지 모를 노릇. 직접적인 밀고자는 베트남 공산당의 전신 조직의 일원이었던 Lâm Đức Thụ라는 인물이라는 것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98] 문제는 Thụ와 호찌민이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었냐는 것인데, 소피 퀸-저지 같은 학자는 Thụ 본인의 리포트만으로도 짜우의 행동을 하나하나 감시가 가능했을 거라면서 호찌민과의 연계를 부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 주장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과,[99] 짜우 밀고의 배후가 호찌민이나 기타 공산당 수뇌부라고 가정해 볼 때 그 행동원리가 다른 내셔널리스트 독립운동가들을 프랑스 식민당국에 팔아치우고 돈을 챙긴 만행들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진실을 확정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하튼 확실한 건, 사례가 불확실한 짜우의 경우를 제외하고서라도, 레주언이나 보응우옌잡 등이 타 진영 독립운동가들을 배신하고 팔아치운 매국 행위를 자랑스럽게 회고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호찌민은 분명 1955년 이전에는 공산당의 확고한 최고 지도자로써 영향력을 행사했으니만큼 책임을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기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또한, 짜우의 체포의 배후에 대한 근거라고 보긴 힘드나, 2008년에는 베트남 공산당 정부에서 검열하는 역사 사전에서 "호찌민(Lý Thụy)이 판 보이 짜우를 팔아넘겼다"는 서술을 대놓고 아주 상세하게 저술해서 망신거리가 되기도 했다.[100] 저자랑 검열자들 전부 코렁탕 한사발씩은 먹었을듯

가톨릭 교도들을 탄압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미 베트남의 가톨릭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단순히 '친불매국노'로만 볼 수 없는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었지만[101] 북베트남 정부는 가톨릭 교도들이 매국노라는 선입견 하에 그들을 매우 박해하고 차별했다.[102] 순전히 편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게 된 가톨릭 교도들은 크게 분노했고 카톨릭 농민 반란이 일어나 2500명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결국엔 북베트남의 150만명의 가톨릭 교도들 중에서 60만명 이상이 월남하였다.[103] 이 토지개혁-카톨릭 탄압 콤보를 본 미국은 북베트남을 전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고 미해군과 CIA는 군사작전으로 천주교 월남을 적극 도우면서 이를 프로파간다로 써먹었다. 응오딘지엠도 신앙의 자유도 없는 너네랑 어떻게 자유 선거를 하냐?란 식으로 총선거를 거부하게 된다.

호찌민 스스로는 인자하고 관대한 성품을 가졌지만, 한참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던 시절 부하들의 난폭하고 무자비한 행동에는 별다른 터치가 없었다고 한다. 사실 이는 역사상 많은 독재자,학살자들이 가진 의외의 일면이기도 하기 때문에 결국 호찌민 스스로는 착했다 해봐야 널리고 널린 독재자 타입중 하나에 불과하다. 도조 히데키도 개인적으로는 검소하고 부하들에게 인자한 인물이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근거로 도조의 거대한 전쟁범죄를 변호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북베트남 정권의 학살은 북베트남 지도부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현재도 남베트남인과 북베트남인 간의 갈등은 꽤 심하다. 북베트남인들은 남베트남인들을 보면서 저 돈만 아는 박쥐같은 앞잡이놈들이라고 하고, 남베트남인들은 북베트남인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으니 하면서 서로 경멸한다. 남베트남이 적화통일되면서 대대적인 학살과 보복을 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 당장 지금 베트남 여행만 가도 관광코스에 매우 높은 확률로 보트피플 견학이 들어간다.

호찌민은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인물으로 인식되고 실제로 그런 모습도 보였지만, 권력 장악 과정에서 걸리적거리는 인물에게는 냉혹하게 대했다. 연립정부 수립 제안에서 응오딘지엠이 자신의 제안을 거부하자 호찌민은 응오딘지엠의 큰형을 살해하고 응오딘지엠을 납치하여 감금하기도 했다.[104] 이때 호찌민은 응오딘지엠을 해치면 민족주의 세력 포섭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응오딘지엠을 석방하지만 원래도 사상으로 충돌하던 응오딘지엠과 월맹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응오딘지엠이 성명을 통해 프랑스는 물론 월맹과도 협력하지 않겠다고 천명하자 호찌민은 응오딘지엠에 대한 암살지령을 내렸다.


4.2.4. 북베트남 및 베트콩 진영의 학살 책임 의혹[편집]


베트남에서 프랑스가 완전히 철수하고 남북분단이 된 이후, 호치민의 사주를 받아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던 베트콩들은 전쟁 기간 내내 엄청난 규모와 잔혹성을 가진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이 만행은 민간인 군인을 가리지 않고, 단순히 적 정권에 협력적이거나 호의적인 양민들만 죽이는 게 아니라, 별 정치적인 의도가 없더라도 그게 남베트남의 체제에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매우 잔혹하게 방해하고 탄압했다. 심지어 단순히 투표를 하러 가는 행위라든지 교육받으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도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베트콩은 경고랍시고 아이들에게조차 야만적인 폭력을 저질렀는데, 피해자들은 죽거나 살아남더라도 신체 정신 양쪽으로 엄청난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다음은 1969년 미국 의회 기록의 일부로, 애리조나 출신의 한 사람이, 미국의 히피 같은 반전운동가들이 미국인들을 아동학살자, 전쟁범죄자 등으로 몰아가면서 정작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고 있다고 탄원하면서 인용하는 글이다. 매우 잔혹한 내용이 많기 때문에, 비위가 강한 사람도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는 것이 좋다.

[ 잔혹함 주의 ]


특히나 악질인 점은, 단순히 아이들까지 가리지 않고 학살과 탄압 대상에 무조건적으로 포함시키는 것도 충분히 악질적이지만, 베트콩은 그걸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아이들을 주 타겟으로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교육 체계에 대한 사보타주에서 잘 드러나는 점은 이러한 테러리즘이 단순히 남베트남 정부의 폭정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우발적인 현상 같은 게 아니라, 철저하게 남베트남 체제를 약화시키기 위한 공작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즉, 베트콩과 그에 대한 지령을 내리는 북베트남 정부의 전쟁범죄는 전쟁이 복잡해지면서 나오는 우발적인 사태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추축국의 전쟁범죄와 마찬가지로 계획과 효율주의로 점철된 학살, 테러리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련의 사태에서 호치민에게서 책임을 돌리고 하부 조직들에게 대신 책임을 물리려는 시도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호치민은 죽을 때까지 북베트남의 공식적인 국가 원수였으며, 미군 개입기 동안 실질적인 북베트남의 지도자였다는 레주언이 월북한 건 1957년의 일이고, 공식적인 2인자 자리에 앉은 것도 60년의 일이다. 그 와중에도 베트콩은 끊임없이 남베트남의 민간인과 아이들에 대한 만행을 자행했다. 또한, 실질적인 지시를 내린 것이 부하들이라 한들, 최고 지도자로써 그것을 의도적으로 제지하지 않아놓고 책임을 피해갈 수 있는 국가원수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105]

결론적으로, 호치민은 추축국과 마찬가지로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전쟁범죄와 폭압, 학살을 자행한 집단의 지도자로써 그 책임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으며, 오히려 베트남 공산당이 학살한 39만명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이다.


4.2.5. 베트남 전쟁의 성격에 대한 쟁점[편집]


베트남 전쟁이 호찌민과 북베트남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106]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먼저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처음 충돌은 베트남 내전[107]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과 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 군부들의 쿠데타로 인하여 남베트남이 불리해지는 와중에 통킹만 사건이 터지자 북베트남을 침략한건 엄연히 미국이었다. 사건 당시 사상자는 한명도 없었는데 전쟁에 참여하면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돌프 럼멜의 통계를 들이대며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1954년 부터 1975년 까지 최소 13만, 최대 30만으로 추산되는 민간인학살을 벌였으며,[108] 북베트남의 최고지도자 호찌민도 그 책임을 피할수 없다. ...라고 하며 베트남 전쟁을 북베트남과 호찌민이 일으킨 것으로 보는 일각의 시선이 있는 모양인데, 분단 한국의 상황을 분단 베트남에게 일대일로 대입시키는거 자체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역사적 관심 자체보다 일차원적인 정치적 이용에 더 관심이 쏠린 노골적인 시각이다.[109]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성격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당시 남한 내 좌익의 사회적 영향력과는 별개로 어쨋든 소련군정이든, 김일성 정권 아래든 공산 정권 아래 살아 본 경험 자체가 없고, 따라서 북한의 남침은 일방적인 침략 행위로 국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당시 사회적 분위기나 인식 되었다.

반면 베트남의 경우 질적으로 뿌리 자체가 다르다. 월맹 정부가 프랑스와의 협약으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낸 1954년 제네바 협정 당시, 훗날 남베트남의 영토가 되는 베트남국 영토의 까오다이를 비롯한 무장 종교 교단 세력이 먹은 곳 빼고 60에서 90%가 프랑스 식민 당국 자체의추산으로 월맹의 통치 아래 있었고, 무엇보다 1950년 6월 25일이라는 뚜렷하고 구체적인 시간에맞추어 공개적인 침략 전쟁을 시작했던 북한과달리, 베트남전 당시 월맹군의 직접 개입은 일러도 1972년 '부활절 공세'라 불리오는 춘계 공세다.[110] 이 이전까지 베트콩과의 전쟁은 실제로 베트콩 내부에 북부에서 파견하여 내려온 조직원의 비중이 작았다 하면 그것도 뻔한 거짓말이지만, 원칙적으로 닉슨 행정부의 베트남화 정책 이전 베트남전은 남베트남 내부의 자생적인 게릴라 조직을 토벌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그리고 베트콩 문서에도 들어가보면 나와 있는 내용이지만, 사이공 정부에 대한 무력 투쟁은 월맹 정부가 아니라 월남 내 잔존해 있던 베트민 세력으로 인해 시작됐다.[111] 물론, 이들은 곧바로 북베트남 정부의 의지 아래에서 활동했으며 그들의 의도에 따라 남베트남 민중들에게 여러 만행을 저질렀으므로 큰 의미는 없다. 애초에 남베트남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그것이 남베트남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나 최소한 묵인 같은 걸 받았다는 증거가 되지도 않고 말이다.

네오콘 성향의 정치학자이자 어용학자 루돌프 럼멜의 근거 출처가 불확실한 통계를 들고와서 침략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3만~30만의 학살을 벌였다고 주장하는데, 각잡고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 책임여부를 상세하게 따지자면 저게 전부 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직접 저질렀다는 증거는 어딨는가?[112] 베트콩이 큰 지휘 체계로 따지면 하노이에 있는 노동당의 지시를 따른건 맞지만, 베트콩 문서에 나와 있듯이 대규모 작전이 아닌일상적인 차원에서 게릴라전은 현지 지도부 재량으로 움직였고, 월맹에서 남파된 인원이 많았다 한들 애초에 중부 고원지대와 사이공 외곽은 프랑스 식민시절 부터 독립 공산 세력의 안마당 같은지방이라서 그 남파된 인원도 막상 따지고 보면 남베트남인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이 호찌민이 전쟁책임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비슷한 사례가 쿠바에 있는데, 바로 쿠바계 이민자들이 미군의 원조를 받아 벌인 피그만 침공이다. 피그만 침공이 쿠바계 이민자들이 했으니 미국에게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애초에, 적지에 대해 잘 아는 적국 출신 변절자를 첩보원으로 기용하는 건 매우 흔한 일이다. 남베트남과 미국 연합군도 월남한 전직 북베트남군 장교들을 첩보원으로 다시 북파시키고는 했는데, 이걸 가지고 남베트남의 북파 공작원들이 남베트남과는 큰 연관이 없는 독립적인 조직이었다고 말할 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결국 베트콩에 남쪽 출신 인물이 재남파된 인물이 많다는 걸 근거로 이들이 반쯤 독립적인 조직이며 베트남 공산당과 그 우두머리 호치민이 베트콩의 침략행위 및 만행에 책임이 없다는 건 끼워맞추기조차 되지 않는 주장이다.

이미 베트콩의 공식적인 결성일인 1960년보다 3년 이른 1957년, 각 시골 지역의 인물들에 대한 각종 테러가 자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RAND 연구소에서 1970년에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지금의 DARPA)를 위해 연구해 제출한 보고서에 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 당시의 테러리즘은 주로 마을 촌장,입법 위원회의 위원장, 일반 경비원이나 시골 지역의 전 명사 등에 집중되었다고 한다. 아직까지는 시골의 권력층에 집중된 것이며, 1960년부터 시작되는 베트남 일반 양민들에 대한 전면적인 폭력과 학살 수준까지는 발전하지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이들 목표들의 대부분이 민간인이라는 점에서 이미 그 불순하기 짝이 없는 의도를 볼 수 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종교 탄압 등의 실정에 대한 저항이 목적이라면 어디까지나 사이공의 중앙 정부 인사들이나 가톨릭 인사들에게 집중되었어야 할 테러가 오히려 아무 상관 없는 시골 인사들에게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이 테러리즘 행위는 남베트남 체제 그 자체를 붕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더러운 선제공격이 북베트남 쪽의 지령에 의해서건 아니면 남베트남의 자생적 공산주의 및 다른 반정부 인사들의 자체적인 공작이건, 북베트남 및 호치민 옹호파가 주장하는 '58년까지 조용히 있다가 응오딘지엠 정권의 탄압에 분개해서 들고일어난 저항세력'이라는 전제는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다.

같은 보고서에서의 한 RAND 쪽 첩보원이 1958년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당시 베트민의[113] 테러리즘은 더 이상 대 프랑스전쟁 당시의 지방 행정관에 대한 협박에 그치지 않고 시골 현지의 경찰 간부나 경비원들, 마을 재무담당자나 청년지도자들 등에 대한 테러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게 최종적으로 누구에 의한 결정이건간에, 남베트남 정권 핵심 인사도 아닌 각 시골마을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대한, 즉 남베트남 체제 자체에 대한 테러리즘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에 대한 항전의식으로 뭉친 저항세력이고, 곧 미래에 나타날 베트콩의 정체라는 주장의 기본 전제부터가 붕괴된다. 물론 미국과 남베트남 쪽이 총선거를 거부한 것 자체는 명분이 없는 짓이 맞지만,그 거부의 원인이었던 공산주의자들과 반체제 인사들이 온갖 더러운 짓으로 남베트남 사회를 교란하리라는 불안은 아주 제대로 맞아떨어진 셈이다.

베트콩이 했던 만행 중 가장 유명한 만행인 후에 대학살의 경우, 매우 명백하게 베트콩이 자행했던 학살들의 성격이 우발적이거나 착각, 또는 현지 지휘관의 감정 통제 실패로 일어난 학살이 아닌, 철저하게 상부로부터 꾸며진 계획적이고 주도면밀한 추축국 스타일의 학살임을 드러낸다. 남베트남이 후에를 재탈환한 뒤 공식적으로 발표한 학살 희생자 통계가 4,062명인데, 이때 베트콩한테 납치되거나 시신이 영구히 유기되면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다. 베트콩 및 호치민 옹호론자들은 남베트남이 보복 부대를 만들어서 베트콩들을 척살했다는 서술을 근거로[114] 상당수가 오히려 남베트남 쪽의 짓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베트콩과 북베트남이 저지른 후에 학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목격자들과 발굴자들의 증언으로 상당수는 정립이 끝난 상태다. 가렛 포터가 조작 인용했던 알예 베네마 교수의 경우 지아 호이 지역에서만 2397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추산해서, 이미 남베트남 정부 공식 통계의 반을 넘어간다.[115] 이 희생자들은 이미 베네마 교수가 생존자들에게서 인민재판으로 처형된 사람들이라는 증언을 받아 기록한 상태라 남베트남이 어쩌구 할 여지 자체가 없다. 다 마이 개천에서 발견된 500명 역시 마찬가지. 애당초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4062명만 해도 이미 다 신원확인이 끝난 마당에 남베트남 보복 부대의 책임이 크다는 주장이 어디에 끼어들어갈 여지가 있을까?

베트콩 및 호치민 옹호론자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의 전직 베트민 인원들에 대한 대규모 정치적 탄압과 투옥 등의 행태 때문에 당시 월맹(뒷날의 베트콩)들이 과격화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우지만, 이런 논리는 상술한 57년부터 베트민 인원들이 응오딘지엠 중앙정권이 아닌 각 시골의 유지들 그리고 조금 뒤에는 시골의 일반 양민들까지 타겟으로 무차별적인 대규모 테러리즘을 벌였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논리로 전락했다. 응오딘지엠이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그 때문에 저항세력이 만들어졌다면 당연히 응오딘지엠의 정권 주축에 해당하는 인사들을 상대로 테러리즘이 벌어져야지, 시골 사람들이 가장 먼저 타겟이 되었다는 건 두 가지 의미 중 하나다. 하나, 이들 베트민 인사들이 애초부터 응오딘지엠의 판단대로 죄 없는 민간인들을 상대로 테러리즘을 벌일 위험분자였던지, 아니면 55년 이후로 이들의 행동원리가 이미 북베트남 정권에게 종속된 뒤든지.

1968년 구정 공세 때 북베트남과 베트콩측이 기대한 일제 봉기가 없었고,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기대와는 달리 응우옌반티에우 정권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서 마치 수정주의적 시각이 학술적으로 옳은 내용인 마냥 과대해석 하는데, 구정 공세의 실패는 공산군이 68년 2월이라는 구체적인 순간에 자신들이 생각했던 만큼 민심이 일방적으로 하노이측으로 기울어진건 아니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있어도, 십만 단위의 게릴라 반정부 단체가 국가 내 국가를 만들어[116] 10년 동안 그걸 유지하다 겁대가리도 없게 이걸기반으로 남베트남정부와 이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54만9천명이나 되는 세계 초강대국의 군대[117]에게 전면전을 걸을 만큼 성장했다는 문맥 자체는 싹 빼두고 이게 마치 남베트남이 국민일반의 지지를 받는 정상 국가의 증거였다는 양 제시하는 건 얄팍하고도 단편적인 관점이다.

10만 단위의 베트콩이 유지되었다는 건 남베트남의 폭정 때문에 남베트남 안에 자체적인 저항세력이 온존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베트콩이 꾸준히 북베트남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단순히 테트 공세에서 남베트남인들의 봉기가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은가? 애당초 이 십만 단위의 베트콩들이 내내 벌여된 인민재판, 신체절단 등의 가혹한 폭력행위, 학살 등으로 인해 남베트남 민중들의 민심은 베트콩에게서 아주 단단히 떠나 있었고, 그 증거가 바로 미군이 본격적으로 민병대 육성에 자원을 투자하기 시작한 1965년부터 수만 단위에 불과했던 민병대가 몇 년 안되어 70만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것이다.[118] 또한, 테트 공세 이후인 68년 중반에는 인민 자기방어군이라는 더 낮은 단계의 민병대까지[119] 백만 단위로 생겨났는데, 한 마디로 인구가 2천만에다 주 산업이 농업인 남베트남에서, 전시동원상태도 아니었던 상황에서 이 정도 숫자의 사람들이 가족들과 이웃들,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겠다고 형편없는 제반조건과 위험한 환경 아래에서도 자원해서 총을 들고 나선 것이다. 베트콩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민심이 매우 험악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즉 남베트남인들은 무능의 끝을 달리는 남베트남 정권을 지지하지는 않을지언정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싫어하고 저항했다는 뜻이다.[120]

다시 50년대로 돌아와서, 이런 식으로 57년부터 민간인들을 살해하며 날뛰던 남쪽 베트민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해주기 시작하면서 시비를 걸었던 건 분명히 총선거 거부 가지고는 명분을 만들어 낼 수 없는 명백한 도발행위가 분명하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자국 내부의 베트민 인사를 탄압했을지언정 북베트남처럼 이런 상대국 내부의 막나가는 테러리스트를 대규모로 지원하면서 아예 교육받는 아이들까지 공격하라는 개막장 지령을 내린 적은 없다. 남북 베트남 자국 각자의 내부 문제를 넘어서 상대국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던 것은 분명히 북베트남이 먼저이며, 그 방식까지 추축국에 비견될 만한 악질이었던 점에서 북베트남 정권 그 자체와 당시까지 분명히 명목상으로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그 최고 지도자였던 호치민이 책임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분명히, 호치민, 쯔엉찐 등의 북베트남 수뇌부는 대규모 기습 전면전으로 길고 참혹한 전쟁을 만들어 낸 김일성이나 박헌영 같은 자들과 동급의 전범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따져보더라도 북베트남 정권은 분명히 50년대 후반부터 이미 악질 테러범들을 지원하고 지령까지 내리는 테러지원국 위치에 있었으며, 북베트남이 어느 정도 명분을 가지고 있었어도 그따위 방식의 더러운 수법이 정당화될 만큼은 절대 아니었다.[121] 결국 호치민은 김일성이나 히틀러 같은 인간들과 동급 전범만 아닐 뿐이지 분명히 전범으로 취급되어야 할 인물들이다.


4.2.6. 지역 패권주의[편집]


베트남 민족주의자로서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 지도부는 전근대 베트남의 패권주의적 발상 또한 모순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라오스, 미얀마를 포함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의 독립(을 이룩하고 베트남의 패권 아래에 두는 것)이었다. 또한 베트남 공산주의 행동강령에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일찍이 하였다. 얼핏 봐도 라오스, 캄보디아 민족과 베트남 민족은 전혀 딴판이고 국민감정도 매우 나쁜데, 호찌민 입장에서는 동일하게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아왔으니 베트남이 큰 형으로서 같이 도와줘서 독립해서 함께 잘 살자(그러니 내 말 들어)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프랑스와 미국을 무찌르고 내친김에 중국까지 따끔하게 혼내준 베트남은 위풍당당해져서 단숨에 인도차이나 반도의 깡패 패권국가가 되었다. 한마디로 호랑이가 없어진 동굴에서는 여우가 왕이 되어버린 셈. 전 세계적으론 베트남 전쟁 당시 압도적인 미국의 국력에 의한 피해자 기믹으로 부각되어서 그렇지 원래 베트남은 양쯔강 유역에서 대거 남진하여 동남아에 최초로 국가를 세운 이후로 중세와 근세에 걸쳐 심심하면 크메르, 란쌍 같은 주변국들을 침략하고 땅을 뺏으며 태국, 인도네시아, 버마와 함께 동남아시아의 팽창주의적 지역 열강이었고, 호찌민을 비롯한 허울이나 좋아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이지, 실질적으로 베트남인들이 다 해먹었던 지도부의 인식도 여기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전근대 왕조 시절처럼 대놓고 봉신화, 속국화가 아니라 냉전기 소련이 잘 하던 것처럼 겉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연대', '민족 해방 중 큰 형' 따위 표면적 평등 아래 누가 대빵인지 확실하게 말해주는 공산권 특유의 수사법을 구사하며 라오스, 캄보디아 '동지'들에게 자신들의 '자리'를 알려주려고 했을 뿐.

또한 호찌민 사후에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점령해서 90년대까지 수년간 캄보디아에 주둔하게 된다. 이는 현 캄보디아의 불안정한 정치상황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게 되었고 이는 서방 세계로부터 큰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캄보디아 침공에 대해서는 제국주의 논리로만 따질 수는 없는 것이, 당시 캄보디아의 상황과 캄보디아의 선제공격과 베트남인 학살이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공격했던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122] 폴 포트킬링필드막장성누구나 인정하기 때문에,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부정적인 결과를 남기고 갔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어도 모든 책임을 베트남에게만 돌리기는 힘들다.[123] 그리고 그 와중에 미국은 진영논리에 따라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고 있었으니 이뭐병...


5. 어록[편집]


나를 이끈 원동력은 공산주의가 아닌 애국심이었다.


어려운 것이란 없다. 단지 흔들리는 마음이 두려울 뿐. 산을 파고 바다를 메울 수 있다. 마음을 굳게 먹는다면 할 수 있다.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우리가 당신들을 1명 죽일 때 당신들은 우리 10명을 죽일 것이다. 하지만 먼저 지치는 쪽은 당신들이 될 것이다.[124]


내 안의 변하지 않는 한 가지로 세상의 만 가지 변화에 대처한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코끼리와 호랑이의 싸움이 될 것 입니다. 만일 호랑이가 가만히 서 있는다면 코끼리가 그 막강한 엄니로 호랑이를 짓누르겠지요. 그러나 호랑이는 가만히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는 낮에는 밀림에 숨어 있고 밤에 나타납니다. 호랑이는 코끼리의 등에 뛰어올라 코끼리의 가죽을 찢어놓고 다시 어두운 밀림으로 뛰어들어 갑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천천히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이것이 인도차이나의 전쟁이 될 것입니다.

1946년 9월 11일, <뉴욕타임스> 통신원 쇼에브런과 한 인터뷰에서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통해 자신을 부양하고, 자신을 방어하고, 여러분과 싸우는데, 여러 동지들은 왜 식민지를 무시합니까?

1924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여러분이 이 작은 그룹 내에서도 단결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조국으로 돌아간 뒤에 어떻게 대중을 단결시켜 식민주의자들과 싸우게 하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나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왜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를 문명화한다고 하기 전에 자기 동포들부터 문명화하지 않는 거지?

1911년 7월 6일 프랑스의 마르세유 항구에 입항한 이후 프랑스의 모습을 보면서 남긴 말.[125]


정부가 어려워서 너희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지만, 너희들은 지금 전쟁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인민들에게 크나큰 빚을 지는 것이다.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은 분명하지만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조국의 많은 인재들이 희생될 것이고 너희들의 부모형제들도 죽어갈 것이다. 조국을 대신해서 이 할아버지가 너희들에게 받아두어야 할 약속이 꼭 하나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희들은 학업을 마치기 전에는 돌아와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승리한 다음, 너희들이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의 강산을 과거보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아름답게 재건해야 한다. 너희들은 공부하는 것이 전투다.

1965년 미국의 참전으로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자 몇몇 장학생들을 해외로 유학보내며 유학생들에게 남긴 명언


우리의 강,

우리의 산,

우리 인민들은

그대로일 것이다.

양키가 패전하면

우리는 이 나라를

열 배 이상

아름답게 재건할 것이다.

호찌민의 자작시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45


베트남 인민들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미제 침략자들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

베트남 전쟁 항미전쟁의 종결 p.373[126]


당신들 미제국주의는 응오딘지엠 정권을 유지하고자 막대한 자금을 쓰고 있소..... 역사에서 인민들이 과도하게 억압받으면, 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남베트남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지엠 정권에 의해 과도하게 억압받고 있소이다. 장제스이승만 그리고 바티스타처럼, 지엠 또한 몰락할 것이오... 미국이 지금 지엠 정부를 위해 쏟아붓는 돈은 전부 밑빠진 독에 물 붙기에 불과하오.

1961년 5월 22일, 영국 일간지 더 가디언에 실린 인터뷰


미국 전투기를 더 많이 격추하시오. 그러면 건강 상태가 최고일 것 같습니다.

-

베트남 전쟁 당시 방공 시찰 하던 중 했던 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은 세계 혁명 공통의 스승들이다. 모택동 동지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이데올로기를 훌륭히 '중국화', 중국의 실천적 상황에 올바르게 적용했으며, 그럼으로써 중국 혁명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었다. 중국 혁명은 지리적, 역사적, 경제적, 문화적 제조건으로 인하여 베트남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베트남 혁명은 그로부터 많은 경험을 배워야 했으며 또 실제로 배웠다.


레닌은 우리의 아버지이자 스승이고, 동지이자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밝게 비춰준 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과업 속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1924년 1월 27일 레닌과 식민지 민족



6. 여담[편집]


호찌민이 유럽이나 미국을 일하며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의외의 곳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미국 보스턴의 유서깊은 호텔인 Omni Parker House(옴니 파커 하우스)는 호찌민이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제빵사로 일했던 사실로 유명하다.[127]

#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앉아있는 사람이 박헌영이다. 뒷줄 맨 오른쪽이 호찌민.(최근에는 이 사진이 1921년에 촬영되었고 뒷줄 맨 오른쪽의 사람은 호찌민이 아니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출처- 정병준,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2015)

호찌민이 1929년 소련에서 국제레닌대학교에 유학했을 시절에 박헌영과 만나 교류했고 친분관계를 쌓았다. 박헌영은 호찌민에게 목민심서를 선물로 주었다는 일화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그가 목민심서를 읽고 감명받았다는 일화가 있으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한 가지 알아둘 점은, 호치민은 목민심서를 읽은 적이 없다. 심지어 목민심서가 호찌민시신의 머리맡에 놓여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며, 박물관에 있다는 말[128]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90년대 KBS-1에서 베트남 현지 취재를 가서 촬영한 영상에 의하면 호찌민의 서재에 목민심서 책이 있었던 걸 보여준 적이 있으며, 서재 담당이 호찌민이 즐겨봤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2006년 호찌민 관련 유품이 12만점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목민심서가 없다는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프랑스에서 활동할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들과 만나 교류하고 서로 협조한 사실이 2018년 문서로 확인되었다. 당시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파리의 정보경찰 장(Jean)이라는 인물의 기록에 따르면, "호찌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 호찌민과 파리의 임정 인사들간의 교류가 굉장히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바딘 광장에 있는 호찌민 주석릉은 하절기에는 07:30~10:30, 동절기에는 08:00~11:00에만 출입이 가능하며 및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휴관한다. 그리고 매년 10월부터 12월까지는 호찌민시신의 방부 처리를 위해 폐관한다.[129] 호찌민 주석릉 구내에서는 사진 촬영뿐만 아니라 전자 기기의 휴대 및 사용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만일 호찌민 주석릉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휴대전화를 제외한 모든 전자·통신 기기를 내놓고 들어가야 한다.[130] 호찌민 주석릉에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있는데, 일반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바딘 광장의 모습과는 달리 줄을 서야 하며, 줄을 서는 와중에 촬영하려 하면 지키고 있던 군인이 막기도 하며 모자를 쓰고 있으면 군인이 와서 모자를 벗으라고 지시한다. 호찌민 주석릉에는 흰색 제복을 입은 경비병이 4인 1조로 시신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입구 및 출구에 경비 근무를 서는 경비병을 볼 수 있다. 호찌민 주석릉 내부에서는 휴대전화는 진동 혹은 무음으로 전환해야 하고 절대로 큰 소리로 대화할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참배 시에 유의하자.[131] 참배를 마치고 반대편으로 나오면 입구에서 맡겨 두었던 전자·통신 기기를 찾아갈 수 있다. 사실은 호찌민의 유언에 따라 북부, 동부, 남부의 화장되어 나눠지고 방문록 정도를 적을수 있고 나무를 심을 수 있게 해 후일 베트남의 도움이 되어야 했으나, 베트남 국민들은 유언에 따르지 않고 전국에서 온갖 재려를 모아 지었다 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호찌민 박물관과 일주사, 그리고 집무실이 있다. 호찌민 박물관은 어른 40,000동 어린이는 무료 입장이며, 들어갈 때 짐을 사물함에 넣거나 공항에서 볼 수 있는 x-ray를 통과해야 한다.

여담으로 호찌민이 이오시프 스탈린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는 사회주의 조국의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며 친필 사인을 요청했는데 그가 사인을 받아들고 돌아간 뒤 스탈린은 갑자기 "그 작자, 태도가 수상해."라면서 NKVD에게 자기 사인을 도로 훔쳐오도록 시켰다. 이후 사인이 없어진 것을 알고 호찌민은 소지품을 모두 뒤지며 매우 당황했다고 하는데 라브렌티 베리야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스탈린은 굉장히 기뻐했다고 전한다.

삼국지, 수호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네이버캐스트 호찌민

호찌민은 중국에 방문했을당시 공자 생가를 방문하며 "나는 공자를 존경해왔다."라고 얘기했다 한다.[132]

칠레의 대통령 아옌데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1년 전인 1969년에 북한과 북베트남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호치민에게 감명받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에 따르면, " 아옌데는 당시 호치민이 스페인어로 자기 일행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눈 사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호치민은 젊은 시절 프랑스로 유학 가는 길에 이용했던 아르헨티나 증기선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면서 스페인어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치민의 그 시절의 실력을 발휘해, 베트남 인민들에게 연대를 표하기 위해 멀리까지 찾아와준 아옌데 일행에 감사 인사를 건냈다"고 한다.[133]

파일:kimilsung1958.jpg

김일성1958년 11월 방월 당시 호찌민 주석과 건배를 하는 모습.
호찌민과 김일성 간의 일화로, 베트남 전쟁이 한창 진행 중에 같은 사회주의 동지로 호찌민이 파병 요청을 하지만 김일성은 난색을 표하고 다만 간접적이나마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이후 김일성이 '청와대 침투 계획', 즉 1.21사태를 주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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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서적[편집]


<호치민 평전>(윌리엄 J. 듀이커 지음/정영목 역, 푸른숲 출간)
파일:호치민 평전.jpg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했던 듀이커가 호찌민이라는 인물에 매료되어 30년간 중국, 베트남, 프랑스, 러시아에 있는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비교하여 쓴 호치민 평전이다. 신화로서의 호찌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호찌민을 재조명 했다. 특히 호찌민의 초기 성장과정부터 독립운동 투신 그리고 베트남 독립 선언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까지의 내용이 매우 탄탄하다. 다만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호찌민에 대해선 깊게 다루지 않는다. 책 서문에 저자가 왜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호찌민 행적을 깊게 다루지 않았는지 나온다. 저자에 따르면 1960년대 호찌민의 일과는 사실상 병가로 인한 중국에서의 요양이 대부분이었기에, 깊게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알고 싶다면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기 전 이 사실을 참고하자.[134] 976페이지[135]라는 엄청난 분량이 압도적이기는하나 호찌민을 아는데 있어서 매우 유용하다.

<호치민 평전>(찰스스펜 지음/김기태 역, 자인 출간)
파일:ho chi minh biography.jpg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 OSS로 근무하며 호찌민을 직접 만났던 찰스 스펜이 쓴 호치민 평전이다. 30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의 호치민 평전이기에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이 읽기 버거우면 이 책을 읽는것도 나쁘지 않다. 책 저자가 호찌민을 직접 만나봤던 사람이기에 호찌민을 만났던 미국인이 호찌민에 대해 어떤관점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왜 호찌민인가?>(송필경 지음, 에녹스 출간)
파일:why ho chi minh.jpg
치과의사이자 대구환경연합 집행위원장이자 한베평화재단 이사역을 맡고 있는 저자 송필경이 쓴 책이다. 베트남 여행을 통해서 저자가 알게 된 호찌민과 베트남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국군 문제에 대해 알 수 있다. 사실상 저자의 여행기이도 하다. 책을 통해서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가 의외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과 호찌민을 직접만났던 베트남 사람들[136]에 대한 스토리를 알 수 있다.[137] 다만 저자가 사회활동가임을 인지하면서 읽는 것이 좋다. 현재 국내에선 절판된 상황이었으나, 2020년 베트남 국영출판사에서 베트남어로 번역해 출판했다.관련 기사 아마 한국인이 쓴 호치민 관련 책 중에는 유일하게 베트남어로 번역된 책일 것이다.

<옥중일기>(호찌민 지음/안경환 역, 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간)
파일:옥중일기.jpg
1942년 호찌민이 감옥에 있을 당시 감옥에서 쓴 옥중일기 라고 하지만 4행시 형태의 시집이다. 호찌민 주석이 비참하고도 혹독한 수감 생활과 베트남 독립을 염원하는 그의 심정을 알 수 있는 시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집이기에 읽는데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는다.[138]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김태완(글)/주경훈(그림)/손영운(기획),주니어김영사 출간)
파일:ho chi minh and vietnam war.jpg
어린이 위인전이다. 2012년 12월 28일 초판을 발행했다. 어린이용 도서이긴 한데 호찌민에 대한 내용과 베트남 전쟁 관련한 내용이 굉장히 탄탄하다. 호찌민의 일대기와 베트남 전쟁 관련해서 있을 내용은 거의다 있다. 심지어 호찌민의 최대 실책이라 할 수 있는 토지개혁도 응오딘지엠의 탄압과 더불어 이 책에서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다산 어린이에서 출간한 Who? 시리즈의 호찌민 위인전[139]에 비해 역사에 대한 설명과 고증 면에서 매우 탄탄하다. 평전 자체가 부담스럽다면 입문격으로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식민주의를 타도하라>(호찌민 지음, 윌든 벨로 (엮음)/배기현 (옮긴이), 프레시안북 출간)
파일:식민주의를 타도하라.jpg
호찌민이 살아생전에 남긴 글과 편지 그리고 연설들을 묶은 책이다. 1920년 투르 회의에서 했던 호찌민의 연설부터 1969년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까지 다루고 있으며, 그의 연설과 글을 통해 많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자료들 대다수는 예를 들면 여기 나무위키에 상술된 호찌민의 어록들 대다수가 이책에도 나온다고 보면 된다. 아쉽게도 현재는 절판된 상황이다.


8. 매체에서[편집]


  • 창작물에서는 80년대 중후반[140]에 쓰여진 어떤 동화에서는 악인은 아니지만 "공산국가 지도자"였다는 이유로 악역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 밖에도 1988~1990년까지 월간 보물섬에 연재된 이우정 만화 맹코상사에선 은빛여우 민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베트콩 지도자가 영락없이 호찌민이다. 이 만화에선 그냥 악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하튼 이 시절까지 호찌민에 대하여 한국에선 무조건 부정적이었었다.

  • '메이드 인 베트남'이라는 소설에서는 베트남의 운동화 공장의 노동자들[141]이 "호찌민 아저씨도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길거야!"라며 파업을 준비한다

  • 한대수가 2002년 11월 14일에 발매한 앨범 '고민'에 수록된 곡 중에 같은 이름(호찌민)을 가진 곡이 있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호찌민이라는 사람을 알려주는 형식. 한대수의 독특한 랩과 강렬한 전주가 들어볼만한 곡이다.

파일:화이트 솔져 베트남 묵시록 20181026-175308_Gallery.jpg
  • 화이트 솔져 베트남 묵시록(Soldat Blanc)이라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배경으로한 프랑스 영화에서 잠깐 등장한다. 영화 주인공인 카리우가 그를 엄호하는 모습이 나온다.

  • 김종필은 회고록 <소이부답>을 통해 1968년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독대한 자리에서 프랑코가 "월맹의 호찌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 질문하자 "비록 공산주의자지만 호찌민은 존경할 만한 지도자입니다.시종일관 꿋꿋한 의지를 가지고 싸워 프랑스를 물리치고, 미국과도 강하게 맞서고 있지 않습니까. 대단한 사람입니다."라 호평했고, 프랑코 역시 동의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밝혔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비록 공산주의자이긴 하지만 프랑스를 상대로 자주독립을 쟁취한 호찌민을 암암리에 높게 평가하는 여론이 강했던 모양이다.


9. 참고 문헌[편집]


  •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푸른숲(2003)
  • 호치민 평전, 찰스 스펜, 자인(2010)
  •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에녹스(2013)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1999)
  • 호치민 혁명과 애국의 길에서, 다니엘 에므리, 시공사(1998)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을유문화사(2002)
  •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책갈피(2004)
  •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 손영운 / 김태완, 주니어김영사(2012)
  • 베트남 전쟁, 박태균, 한겨레출판(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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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現) 베트남 응에안성 남단 카운티 안츄마을[2] 다만 누나와 누나의 자녀 등 조카들은 있었다. 자신은 사람이 아니라 국가와 결혼했다고 한다.[3] 호찌민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민족주의자란 이유로 수배되어 세계를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호찌민을 포함 대략 196개의 가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썼던 대표적인 이름은 그가 태어날 때 부모가 지어준 응우옌 신 꿍, 10살이 되던 해 아버지께서 다시 지어주신 응우옌 떳 타인, 1919년 베트남 독립을 청원할 때부터 쓴 응우옌 아이 꾸옥 그리고 1940년 중국 사람으로 위장하기 위해 썼던 가명이 호찌민이다.[4] 그의 아버지 고향과 어머니 고향은 거리로 따지자면 사실상 옆동네 수준이다.[5] 박노자의 서적에는 그가 지주 출신이라고 나온다.[6] THE MAN WHO MADE A NATION HO CHI MINH.(CRPH) 2000년.[7]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78[8] 이때 그가 사용한 가명은 '바'다.[9]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자신이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창설한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의 연설을 듣기 전 광장에 있던 대다수 민중은 그가 애국자 응우옌아이꾸옥인줄 몰랐다고 한다.[10] 니카라과에는 1912년부터 1933년까지 미 해병대 수천명이 주둔했고,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가 이끄는 부대를 섬멸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11] 당시 호찌민은 소련의 국부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1923년 당시 레닌은 사실상 쓰러져 있는 상태였고, 1924년 1월 레닌이 사망하면서 끝내 호찌민은 살아생전의 레닌을 만나지 못했다. 젊은 시절의 호찌민은 레닌을 꽤나 좋아했는지, 그의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한다.[12] 듀이커의 호찌민 평전을 보면 호찌민이 레닌을 얼마나 존경하고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1924년 1월의 모스크바는 지금과는 달리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를 보였지만, 호찌민은 이탈리아 공산당 측 동지인 조반니 제르 마테노에게 "나는 베트남 사람으로 이름이 응우옌아이꾸옥(Nguyen Ai Quoc)인데, 노동조합 건물로 가서 레닌을 전송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제르 마테노는 그에게 "밖이 그렇게 추운데 그렇게 얇게 입고 나가면 안되니, 나중에 따뜻한 옷을 구해주겠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호찌민은 자리에 앉아 제르 마테노의 동료들과 차를 마시다 자기 방으로 돌아갈 줄 알았지만, 밤 10시쯤 귀, 코, 손가락까지 얼어 있는 상태로 제르 마테노를 만났는데, 알고보니 죽은 레닌을 보고 온 것이었다. 제르 마테노가 전하는 말에 따르면 "호찌민은 도저히 그 다음날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식민지 민족들의 가장 훌륭한 벗에게 경의를 표하고 왔다"고 자신에게 설명했다고 한다. 즉 호찌민에게 있어서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은 그만큼 존경의 대상이었다는 얘기.[13] 1923년 6월 모스크바로 건너간 호찌민이 소련에서 근무하던 곳은 코민테른 극동국이다.[14] 공산당 결성파, 안남 공산당 그리고 신월혁명당[15] 사실상 호치민이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봉기가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16] Marilyn B. Young, 『The Vietnam Wars 1945-1990』, Harper Prennial, 1991, p.5[17] 중국 쿤밍에서 후에 전설의 명장이 될 보응우옌잡과 팜 반동을 만났다. 그들의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18] 앞의 리투이나 호찌민의 이름은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가명이었다. 이 당시까지도 호찌민은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호찌민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건 1940년부터다.[19] 1944년에 중월국경지대에 비상착륙하게 된 미군 조종사의 이름은 루돌프 쇼 중위였는데. 그는 한달간의 여정 끝에 호찌민과 접촉할 수 있었고, 영어로 말하는 호찌민의 목소리를 듣자 그를 끌어 안았다고 한다.[20] 당시 미국의 OSS는 호찌민에게 리볼버 권총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21]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찌민 평전』, 푸른숲, 2003, p.450[22]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36[23] 마이클 메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아르키메데스 패티 소령이 호찌민을 처음 만난 것이 1945년 4월 30일이었고(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날이기도 하다.), 북베트남군의 탱크가 사이공 대통령궁을 점령하여 통일을 이룩한 날 또한 1975년 4월 30일이로서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한 기간이 총 10000일이 된다고 한다.[24] Nguyen Khac Vien, 『Vietnam a long history』, The Gioi Publishers, 2015, p.217[25] 송필경, 『왜 호찌민인가?』, 에녹스, 2013, p.235~236[26] 자신이 그 유명한 독립운동가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서, 단지 베트남의 오랜 독립운동가로만 소개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호찌민의 신비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27] 송필경, 왜 호찌민인가?, 에녹스, 2013, p.237[28] 참고로 프랑스의 샤를 드골은 "만약 미국이 베트남을 돕는다면 우리 프랑스는 소련의 동맹국이 되겠다."고 협박했다.근데 정작 소련은 베트남을 편 들었지.[29] 그런데 정작 호찌민은 자신이 폐위시킨 이 황제를 존중해 주었다. 그가 폐위된 후에도 언제나 폐하라 부르며 존대를 했으며 많은 돈을 생활비로 계속 지급해주기도 했다. 폭군은 아니지만 불쌍하다느니 하며 가엾게 볼 수만은 없다... 막부시대 일본 천황이나 다름없이 젊은 시절을 보내고 좌절감에 빠진 비운의 군주이긴 하다.[30] 참고로 하이퐁 포격으로 인한 베트남 민간인 부상자는 25,000명이다. Marilyn B. Young, 『The Vietnam Wars 1945-1990』, Harper Prennial, 1991 을 참고[31] 역사학자 버나드 폴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은 오두막의 책상에서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들과 호치민의 서명만 남겨놓은 편지를 발견했다고 한다.[32] 이 시점부터 베트민은 게릴라전을 넘어 프랑스 정규군을 상대로한 전면전까지 구사하는 군대로 거듭났다. 1950년 중월 국경지대에서 치른 전투에서만 프랑스군은 베트민의 전면 공세로 7,000에서 8,000에 달하는 병력 손실을 입었다. 특히나 1951년 10월에서 1952년 2월까지 전개된 호아빈 전투에서는 1만 여 명의 사상자를 냈음에도 프랑스군 대규모 병력을 물리치는 쾌거를 이룩했다. 따라서 1950년부터는 베트민도 정규전에 능한 군대로 탈바꿈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련 논문인 정재현,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요새의 함락과 프랑스 식민지 제국의 해체」, 『프랑스사 연구』 48, 한국프랑스사학회, 2023, p.143을 참고함.[33]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p.71 그리고 p.95[34] 보 응우옌 잡, 강범두 역, 『디엔비엔푸』, 길찾기, 2019, p.501[35] 단순히 '민주적이며 정통성 있는 북베트남'이 민심을 통해 압승을 거둔다는 이상주의적 전망이 아니라 일당독재와 반대파 탄압으로 북베트남을 장악한 공산당이 부정선거로 이긴다는 예상이었다. 총선거를 감독하기로 예정되어있던 프랑스가 아예 베트남에서 손털고 떠나면서 선거가 민주적으로 치뤄질 가능성이 아예 사라진데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소련에 점령당한 동유럽 국가들 역시 이런 식으로 공산화된 전적이 있다. 무엇보다 당시 남베트남 여론을 주도하던 근로인위혁명당, 베트남 국민당, 까오다이교, 호아하오교 같은 종교파 군벌들 모두 공산당의 폭력과 배신에 이를 갈고 있었고 남베트남이라는 나라 자체가 수많은 세력들이 반공/반베트민이라는 기치 아래 집결해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제네바 합의와 남북총선거는 공산주의자들의 비열한 획책이라는게 당시 이들의 인식이었다.[36] 하지만 앞서 언급한 주장들은 극소수 반공 민족주의파들이 과거 프랑스 식민주의와의 협력을 무시하는 주장이며, 베트민이 항불전쟁을 통해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얻은 사실을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문제가 있다. 예를들어 이 시기 프랑스 '르몽드(Le Monde)'지의 로버트 길랭(Robert Guilain)은 기사에서 호치민이 항불전쟁 및 독립운동을 통해 얻은 인기와 영향력을 강조하며, 선거가 열린다면 호치민이라는 이름은 북베트남에서 80~90%의 득표율을 보장할 것이며, 남베트남에서도 최소 과반수 정도의 지지를 획득할 것이라고 1954년 제네바 회담 시기에 전망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친불성향의 인사(심지어 앞의 르몽드 기자는 남베트남에 반공 보루를 만들자고 했던 사람이다.)가 예측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소 과반수 이상의 남베트남인들이 호치민을 지지할 것이라 전망했다는 사실과 이를 바탕으로 프랑스 측은 남베트남이라도 반공 라인을 구축해야한다고 역설했다는 사실이다. 서양사 논문인 이재원,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전투’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인식과 기억의 변화」, 『서양사론』102, 한국서양사학회, 2009, p.267~268을 참조.[37] 윤충로, 「베트남 혁명과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p.139~140[38]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714 참조[39] 이는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도 인정하며, 그 또한 1950년대 후반에는 토지개혁으로 인한 불협화음은 거의 없었다고 썼다.[40] 후루타 모토오, 이정희(역),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학고방, 2021, p.158[41]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744~745 참조[42] 거기다 남베트남의 군부는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협력한 민족반역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즉, 그런 과정에서 자신들의 식민지적 협력을 가리거나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미국 중심의 반공주의였던 것이다.[43] 윤충로, 「베트남 혁명과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p.157~158[44] 윤충로, 「베트남 혁명과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p.160~161[45] 호치민 지음, 월든 벨로 서문, 배기현 옮김,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프레시안북, 2009, p.250[46] 윤충로, 「베트남 혁명과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p.164[47] 윤충로, 「베트남 혁명과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p.161[48] 1950년대나 1960년대 북한이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진영과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동구권 국가들 뿐만 아니라 제3세계 진영을 아우르는 반미진영과의 외교 및 협력관계를 넓혀나간 것을 생각하면 된다. 호치민의 북베트남 정부도 그러한 상황에서 제3세계 국가들까지 자신들의 진영을 넓힌 것.[49] 도미엔, 『붉은혈맹』,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p.65[50] 관련 연구자 도미엔에 따르면, 북한과 북베트남의 연대는 1950년 한국전쟁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거기서 형성된 연대의식이 베트남 전쟁에서도 이어졌던 것.[51] 윌리엄 J.듀이커, 정영목(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752[52] 임진호 옮김, 『호찌민 주석 생평』, 지성인, 2022, p.174[53] Gabriel Kolko, 『Anatomy of War』, The New Press, 1994, p.89[54] 임진호 옮김, 『호찌민 주석 생평』, 지성인, 2022, p.176[55] 2008년 독일에서 개봉했던 영화 '바더 마인호프'를 보면, 구정 공세가 한참이던 1968년 2월 당시, 서독의 아나키스트 루디 두치께가 국제 베트남 회의에서 미국의 베트남 침략과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호! 호! 호치민!을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구정 대공세로 심화된 서구 사회에서의 반전운동으로 베트남의 호치민은 쿠바의 체게바라, 중국의 마오쩌둥과 더불어 젊은이들의 우상으로서 찬양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56]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시기 호찌민이 한 일은 요양차 중국을 방문하며 요양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한다.[57] 그러나 그의 사망 소식은 하루뒤에 발표됐다. 2018 AG 이후 박항서 감독이 축구대표팀과 함께 개선한 날도 호찌민의 기일이다.[58] 1960년대 말 호찌민은 유언을 자주 고쳤지만, 어느 유언장에나 화장을 해달라는 유언은 꼭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출처: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2003 p814.[59] 프랑스의 허수아비이던 바오다이나 라이벌(?) 응오딘지엠와 비교가 된다. 바오다이는 금빛 잔으로 술을 즐겨마시며 프랑스가 물러나자 "이제 짐의 시대가 왔다!"고 말한 인물이다. 물론 허수아비로서 좌절하며 한 말이기도 하지만...응오딘지엠을 총리로 내세우지만 되려 그에게 퇴위당해 프랑스로 망명해 그동안 숨겨둔 돈으로 마음껏 살면서 1997년까지 84살 천수를 누렸다. 물론 바오다이 항목을 보면 그도 그럴 이유가 있긴 했지만 결론은 암군으로서 욕을 먹고 있다.[60] 참고 서적 '호찌민과 시클로-이지상 베트남 여행기'.[61] 555는 일반 담배는 아니고 담배 중에선 고급에 속하는 담배이며, 무엇보다도 베트남에서 생산하지 않는 양담배다. 이것을 사치라고 불렀던 것은 오직 국내 물건만 쓰던 그에게 유일한 외국 물건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물론 살면서 술이나 담배만을 사치로 즐기는 것으로 절제하는 것도 현대 사회에선 거의 성인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아무리 그 당시 담배가 비싸다고 해도 웬만한 중, 하층 단계의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62] 실제로 호찌민은 개인적으로 프랑스인이나 미국인들 역시 친절하게 잘 대해주었다. 그래도 어떤 프랑스 관료가 인도차이나 전쟁 직전 프랑스와의 관계가 몹시 악화될 당시 베트남에서 자꾸 미적거리자, 나는 프랑스인을 꽤나 좋게 생각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그를 용납하지 못할 것이라고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실제로 프랑스인 중에도 친구가 있다. 그리고 미국인들의 경우에는 아닌 게 아니라 당시 북베트남/베트콩 정보부가 아직 기밀 해제된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미국·유럽 현지의 대학가 중심 반전 운동 세력과 접촉을 하며 반전 여론 강화에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는 게 거의 확실한 사실에 가깝기 때문에 도의적으로 '우리의 투쟁의 상대는 일반 미국 인민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이다'라는 식으로 유화적인 선전을 했다. 애초에 북베트남 당국과 민족 해방전선은 문화적으로 선비와 글로 된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가 짙은 곳이고, 공산측 지도부도 국제 동향에 빠삭한 엘리트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폭력 투쟁을 할 땐 하더라도 대외 선전에서 깔끔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큰 노력을 했다. 호찌민부터가 선비 집안 출신이고, 그도 유학을 공부하던 선비였다.[63] 소수민족 탄압 포퓰리즘으로 악명 높았던 미얀마의 네 윈과는 정 반대되는 행보였다.[64] 이러한 호찌민의 노력으로 인해 베트남은 중국 및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겪는 소수민족 문제가 거의 없다. 특히 윗동네인 중국이 일대일로를 비롯한 소수민족 탄압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티베트와 위구르 문제로 지금까지도 골머리를 썩는걸 생각해보면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확실히 마오쩌둥보다 한 수 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65] :'왜 호찌민인가' p378~379[66] 하지만 현지 시민들은 이 개명에 불만을 갖고있는 사람이 많다. 정확히는 사이공과 지아딘을 통합시킨 후 통합된 도시 이름을 호찌민으로 정한 것.[67] 그러나 북베트남 정부는 그의 사망 소식을 하루 뒤에 발표했고 따라서 공식적인 사망일은 9월 3일이 되었다.[68] 특히 호찌민은 베트남에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식의 개인 숭배와 1인 독재가 뿌리내리는걸 매우 경계하여 공산당 내에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하였는데 이로 인해 베트남에는 독재자가 나타나지도 않았고 공산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와 권력분배가 생각보다 견고하게 뿌리내려있는 편이다. 당장 당 총비서나 국가주석이 부정부패 혐의로 당대회에서 비판을 받고 실각한 사례도 꽤 잦을 정도이니 나름대로 민주적인 정치 풍토가 잘 확립되어있는 셈이다.[69] 물론 북베트남 내에서는 중국에서 벌어졌던 강제적인 토지 몰수와 인민재판 등이 벌어지긴 했으나 마오쩌둥 식의 대약진 운동, 집단농장과는 거리가 멀었다.[70]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의 경우 호찌민의 정체성을 반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반은 블라디미르 레닌으로 평가했다. 즉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찌민을 민족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로 정의한 것이다.[71] 놀랍게도 즈엉반마이 엘리엇은 베트남계 미국인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 RAND 연구소에서 일했고, 미국인과 결혼했으며, 베트남 전쟁 종전 시점에 보트피플로서 미국에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식민지 시절 프랑스에 협력한 친불 매국노였지만, 그의 언니와 형부는 베트민 지지자였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시기에 아버지는 미국 지지자였고, 언니와 형부는 북베트남군이었다. 이후 베트콩을 연구하면서, 그들의 동기를 심적으로 이해하게 됐으며, 도이모이 이후 헤어졌던 언니와 만나기도 했다. 이후 <The Sacred Willow: Four Generations in the Life of a Vietnamese Family(거룩한 버드나무: 베트남의 한 가족의 4세대에 걸친 삶)>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그 외에도 베트남 역사 관련 여러 연구들을 진행한 인물이기도하다.[72] 물론 서유럽에서 프랑스와의 연대를 꿈꾸던 미국에 의해 산뜻히 씹혔다.[73] 공칠과삼이라고 해서 중국에서도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과 같은 마오쩌둥의 실정을 인정할 정도이다.[74] 괜히 아래 나오는 비판 항목을 참고해 이러이러한 점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 라고 아는 척을 하다간 좋은 대접은 절대 못받을 것이다. 과대평가 부분이야 애시당초 외부의 평가와 그에 대한 재평가니 베트남인들에게는 상관없으며, 그외의 정책이나 전쟁에서의 문제는 호찌민 본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책임의 문제에 가깝기에 그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요소가 못된다. 베트남에서는 호찌민이 이뤄낸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과 호아저씨라 불리는 친근한 모습을, 국가수장으로서의 모습보다 더 크게 보기에 호찌민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경우가 매우 적다. 아래의 비판 항목들도 호찌민에 대한 외부입장에서의 연구가 주류가 되지 정작 베트남인들은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이제와서 그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굳이 문제를 일으킬 이유도 없다.[75] 사실 비교 자체도 안된다. 일단 호찌민은 농지 개혁 정책을 펼칠 당시 농민 시위를 무력 진압하던 일이 있었지만 적어도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베트남의 국가 체계를 구축/정비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참변이라 아예 대놓고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으로 중국의 국력을 약화시켜버리며 본인의 무능력함을 드러내버린 마오쩌둥에 비해서 조금이라도 정상참작할만한 여지는 있다. 실제로 한 국내의 위인전기 전집 서적에서는 호찌민의 이야기는 위인전으로 포함/수록됐는데 비해 마오쩌둥은 포함되지 않았다.[76] 물론 베트남 독립 당시에는 중국 국민당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국공 내전으로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를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을 수립한 중국 공산당 역시 베트남에게는 충분히 위협으로 다가왔다. 호찌민 생전에야 프랑스, 미국과 전쟁 중이기도 하고 해서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1969년에 호찌민이 죽고, 뒤이어 1979년 중월전쟁이 벌어진 이후에는 중월관계는 완전히 적대관계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런 호찌민도 미국, 프랑스 등 서양 강대국들도 찝찝하지만, 중국은 더 받아들일 수 없는 나라라며 반중감정을 보인 바가 있었다. 근대에 서양 열강이 침입해오기 이전에는 시종일관 중국이 베트남을 침략했기 때문이다.[77]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쯔엉찐의 토지개혁이 그렇다.[78] 사실 북한은 입으로만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지 북한의 정치체제에 사전적으로 가장 부합하는 형태는 왕정이다.[79]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시키려고 해도 방법이 없어서 유언장에다가 악담을 쏟아붓는 방법을 썼다(...). 레닌이 팔팔할 때도 적어도 당내 민주주의는 활발하게 작동돼서 트로츠키러시아 혁명사를 보면 다른 이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소련을 비롯한 공산 독재 정권의 척추라 할 수 있는 정보 기관, 정치 경찰들의 대부격인 체카의 수장인 펠릭스 제르진스키만 하더라도 공석에서 대놓고 레닌더러 "댁 바보 아니요?" 같은 상당히 험악한 반론을 종종 펼쳤다.[80] 물론 이것도 파가 갈린다. 왜냐 하면 보트피플이 일어난 건 바로 호찌민 사후의 일인데, 이 점을 명심하는 이들은 국부인 호찌민은 존경하지만 북베트남을 증오하기도 한다.[81] 이 유튜브 영상을 보면 수많은 베트남계 미국인들이 남베트남 깃발을 들고 시위를 하며 호찌민 사진을 발로 밟고 찢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입장에서는 사실상 원수나 다름없는 듯 하다.[82] 90년대 이후 많은 수의 베트남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 원래 이민자들의 도시이며 베트남계 이민자 공동체도 큰 뉴욕에 정착하였으나, 이런 저런 문제로 이전부터 뉴욕에 정착해 있었던 기존 이민자 사회의 텃세 때문에 위치적으로 가까운 필라델피아로 내려가서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걸쳐 필라델피아에는 상당한 규모의 베트남계 공동체가 생겼다. 물론 이것도 사람마다 달라서 "베트남계 이민자들은 보트피플 출신들이니 호찌민 싫어하겠지?"라고 생각해서 호찌민 비판하다가 중장년 베트남계 이민자에게 멱살 잡히는 경우도 있다. 어느 근현대사 전쟁의 기억이 걸려 있는 이민자 커뮤니티라고 안그러겠냐만, 이쪽도 사실 따지고 보면 빨갱이는 싫지만 호 아저씨가 베트남의 자존심을 세워준 건 기분 좋다라는 식의 떠나온 자국의 역사적 유산에 대해 대단히 복잡미묘한 감정을 가진 경우도 많은지라...애초에 베트남 공산당이 남베트남 유민들을 탄압하지 말라는 호찌민의 유언을 무시했으니 호찌민을 존경하면서도 베트남 공산당을 싫어하는 베트남인들은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게다가 상대가 전문 연구자 같은 확실한 외부적 권위도 없으면서 다른 나라 사람이 자국의 역사적 경험이나 정치, 문화 사회에 대해 이리 저리 품평하고 멋대로 단정짓는 거 자체가 어디 가서든, 어느 관점에서든 그 당사자들에게는 기분나쁠 수도 있다. 반대로 후에같이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학살에 직격당했던 지역의 주민과 그 후손들은 지금도 남베트남의 해방이라는 테제에 대한 조롱이나 반감이 암암리에 나오는 곳인데 이쪽 사람들에게는 또 찬양 함부로 하다가 성난 눈길 받을 수도 있다. 그냥 만나면 괜히 어줍잖게 입 놀리지 말고 조심하자.[83] 아래 서적 문서에 나온 '호치민 평전'을 집필한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찌민을 연구한 인물로서 유명하다. 그는 30년간 호찌민을 연구했고 30년간의 노고 끝에 호치민 평전을 만들 수 있었다.[84] '공산주의 국가'라는 표현은 사실 그 개념 자체가 마르크스주의 이론 내에서 존재할 수 없는 모순이다. 공산주의는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생산 수단의 사적 독점 체계가 끝장 나면서 국가와 민족의 억압이 사라진 하나의 상태이기 때문이다.[85] 실질적으로, 사실상 소련이 세워준 공산 지도자가 아니라 스스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서 권좌에 오른 지도자 중에 대규모 양민학살이나 혹독한 인권탄압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지도자는 담딘 수흐바타르처럼 권좌에 오르지도 않고 죽은 케이스를 제외하곤 거의 없다. 끔찍한 만행들이 하술된 호치민 외에도 티토 역시 매우 잔혹한 통치를 했다.[86] 그리고 사실 "사상적으로 덜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란 평가는 마오쩌둥 같으면 몰라도, 티토의 경우는 당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땅이었던 크로아티아 출생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제정 러시아군에게 전쟁 포로로 잡혀 있던 와중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여기 가담하면서 공산주의 혁명가로 재탄생한, 공산주의 혁명가로서 경력은 바로 그 레닌보다 좀 짦으며 최초의 공산 혁명을 직접 목격하며 전간기 코민테른에서 활약하면서 두각을 낸 세대다. 본인이 남긴 집필물을 봐도 일단 전문 지식인이 아닌 군인이자 현실 정치 지도자란 점을 감안하면 딱히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사상적 이해나 충성이 비교할만한 동시대인들에 비해 떨어진다고 주장할 근거도 없다. 티토의 경우 그냥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국가 대 국가 정책에서 반소 노선을 취했다라고 평가해야지, (사상적인 측면에서) "덜 공산주의적이었다"라고 말하는건 합당하지 않다. 오히려 냉전 시기 국가간 진영 논리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역사상 사회주의권의 비교 평가가 가능한 현대에 들어와선 역사학자, 좌파 운동가들 사이 티토 치하 구 유고 연방의 노동자 자주 관리 체제야 말로 스탈린 시절부터 국가 자본주의로 변질되었던 소련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에 반대되는 대안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활발하다. 사실 21세기에 와서 이념에 대해 얼마나 순수하냐 정통이냐 이런거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87] 그래도 호찌민의 경우 자아비판을 하긴 했다.[88] 쯔엉찐의 이름 자체가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에 매료되어 자신의 이름을 '장정'으로 고친 것이다. 그가 얼마나 친중주의자였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나무위키 호찌민 생애 문서에 업로드 되어 있는 1966년 호찌민 관련 다큐에서도 쯔엉찐이라는 이름이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것이 언급된다.[89] 조사 결과 북베트남 정부에서 지주로 분류한 농가 6만 호 중 3만 호 이상이 지주가 아님이 사실로 드러났다.[90] 애초에 이 포터란 작자는 믿을 수가 없는 인간이다. 후에 학살에 대한 글에서는 더글라스 파이크를 "무지한 미디어 선동꾼"이라고 욕하면서 그와 남베트남 정부의 통계가 10배나 과장되었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쓰면서 당시 후에에 있던 의사 알예 베네마 박사의 글을 인용했는데 정작 나중에 실제로 출판된 베네마 교수의 책은 정 반대로 남베트남 정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임이 드러나면서 오히려 포터 자신이 "무지한 미디어 선동꾼"임이 드러났다.[91] 출처: https://web.archive.org/web/20110420044800/http://www.lib.washington.edu/southeastasia/vsg/elist_2007/Newly%20released%20documents%20on%20the%20land%20reform%20.html, 마이클 린드, 2002, Vietnam: The Necessary War[92] 쯔엉찐은 이후에 다시 복직하여 호찌민 사후 베트남의 국가 주석이 되었다.[93] 상술한 내용 다수는 Journal of Vietnamese Studies 2015년 판 10권 1호에 개재 된 "Nguyễn Thị Năm and the Land Reform in North Vietnam, 1953"이란 논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94] 듀이커가 쓴 평전에 따르면 트로츠키주의자 따 뚜 떠우를 암살한 이후 호찌민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95] 출처: https://www.marxists.org/history/etol/revhist/backiss/vol3/no2/thau.html#n23[96]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고, 중국 국민당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97] Hammer (1955), p. 139.[98] 이 인물은 1947년에 이중간첩이라는 혐의로 숙청된다.[99] 퀸-저지는 호찌민이 '베트남 국민당의 좋은 아이디어를 스스로 받아들였고', 짜우가 호찌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 등을 들어 호찌민이 짜우를 제거할 만한 동기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인과관계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국민당 등의 내셔널리스트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서 짜우 같은 유력한 내셔널리스트를 제거할 동기가 없었다면 그 이후 국민당을 철저하게 숙청하려고 든 이유는 대체 무엇이며, 짜우가 호찌민을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았더라도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로 성립할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중요한 반박거리는 아니나, 퀸-저지는 날짜 계산도 틀리게 했다. 퀸- 저지는 짜우가 회고록에서 자신이 6월에 체포되었다고 회고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 회고록에 쓰였던 날짜인 1925년 5월 11일은 양력으로 환산하면 7월 1일이다.[100] 영어 중역 내용: 1925년, 판 보이 짜우는 Lý Thụy와 Lâm Đức Thụ의 말에 따라 "Toàn thế giới bị áp bức nhược tiểu dân tộc"라는 조직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Lý Thụy와 동지들은 판 보이 짜우를 체포해서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게 넘길 음모를 꾸몄다. 그 이유는 1. 조직 운영을 위해 자금을 받기 위해 2. 전국적으로 애국 프로파간다의 큰 영향력을 얻기 위해.[101] 실제로 친불 부역을 한 집단도 있는데 응오딘지엠처럼 독립운동을 한 쪽도 엄연히 존재하고 베트남 카톨릭은 오랜 세월 박해를 받아 베트남 쪽과 감정이 매우 나빴기 때문에 베트남 근왕주의자들도 프랑스인들을 위해 일하는 베트남인을 보고 격노하다가 상대가 카톨릭이라는 걸 알면 아 그런갑다 하고 수그러들 정도였다. 그걸 떠나 19세기 의화단의 난도 아니고 20세기 중반의 사회주의의 기치 아래 현대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나섰던 양반들이 신앙의 자유 같은 기본적인 인권 탄압한 걸 옹호하기란 구차한 일이다. 물론 가톨릭 계열 중에 친불반역세력이 없었다고는 할 수는 없겠으나, 북베트남의 베트민을 지지하던 세력들 중에선 가톨릭 세력도 있었고 이들 중에는 베트민과 같이 대불항전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102] 애초에 공산주의 자체가 유물론 입장으로 종교 차별을 기본적으로 수반한다.[103] 그 외에 토지개혁의 혼란을 피해 같이 남하한 불교도와 민중들을 합친다면 80만명 선이다. 이들은 응오딘지엠의 핵심 지지계층이 된다. 반대로 지엠 정권 아래 점차 조여오던 전직 베트민 참전 용사들에 대한 박해, 백색 테러 때문에 월북한 남베트남인들도 10~15만 가량이 있었는데, 이들 또한 60년대 들어 반사이공, 반미 무장 투쟁이 본격화 되면서 대거 재월남 하여 베트콩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토지개혁시기 북베트남에 있던 가톨릭들이 탄압받았던 건 사실이지만 북베트남 정부가 신앙의 자유를 금하지는 않았다. 당시 북베트남에 있던 150만명의 가톨릭교도들 중에 90만명의 가톨릭교도가 북베트남에 남았다. 북베트남 정부와 호찌민은 그들에게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겠다."고 가톨릭교도들 앞에서 종교의 자유를 약속했다. 그 결과 가톨릭 교도들로 새로운 친정부 연락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월남한 주교들을 대체할 새로운 주교들이 임명되었으며 1954년 말에는 가톨릭 사제를 양성할 신학교까지 문을 열었다. 1955년 6월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교회 내부 문제에 대하여 바티칸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정부의 포고까지 나왔다. 다만 북베트남 정부는 가톨릭교도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선전물을 배포하는 것을 금지했다.(출처: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2003 p.712)[104] 훗날에야 응오딘지엠은 부패한 독재자로 비판받지만 1945년 시점까지만 해도 매우 존경받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1930년대 공산주의와 연대한 반불 성향의 농민 봉기를 프랑스와 함께 진압했던 흑역사가 존재한다.[105] 애초에 이딴 식으로 논리를 좀만 비약하면, 처음 정책을 시행한 의도는 분명 농업 증진이긴 했으나 아랫사람들과 외국에 대한 지도자로써의 '체면' 문제로 수많은 잘못된 정책으로 사람이 굶어죽어나감에도 이를 방기했던 사건인 대약진운동도 마오쩌둥이 아니라 아랫것들 잘못이라고 둘러댈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마오쩌둥 빠가 아닌 이상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다. 호치민 옹호론자들은 오로지 호치민에게만 매우 너그러운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다.[106] 당연히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북베트남을 침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07] 이때 북베트남이 대놓고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했기 때문에 전쟁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미국의 탓으로만 돌리기는 무리가 있긴 하다.[108] Rudolph Joseph Rummel의 추정치이다. Rudolph Joseph Rummel는 하와이대학교의 정치학 교수로, 공산권의 집단학살을 주로 연구했다. 특히 집단학살(democide)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것으로 굉장히 유명하다....라고 하며 일각에서는 굉장히 학문의 중립성이 보장되는 냥 얘기하고 하는데 루돌프 럼멜은 전형적인 미국의 극우반공주의자로서도 유명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수많은 미국 민중들이 전쟁을 반대하고 반전운동에 나섰을 당시 교수 럼멜은 베트남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이라 주장하여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로 부터 배척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민주평화론에 입각하여 부시가 선포한 테러와의 전쟁과 미국의 일방적인 침략전쟁인 이라크 전쟁을 '중동의 민주화'라는 아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즉 진보성향을 띄는 인물들 하고는 생각하는 구조가 다르다. 쉽게 말해 현재 미국의 네오콘이 가지고 있는 사상은 럼멜이 만든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 뉴스기사에서도 나오는 이상우 교수(이명박 정권 시기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과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인물로서 루돌프 럼멜의 저서를 번역하기도 했고, 학창시절 루돌프 럼멜의 그의 지도교수였다.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에 이상우씨)처럼 럼멜이 가르쳤던 제자들 대부분은 네오콘에 가까운 정치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작성한 통계자료가 진위여부를 떠나서 학계에서 비판이나 관심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자료는 작성한 사람이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을 적극 지지했던 네오콘 성향이 인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자면 어느정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볼 필요가 있다. 관련 기사루돌프 럼멜 위키피디아 계획적으로 민간인들과 약자들에게 선제공격을 가했던 베트콩 및 북베트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무리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나 베트남 전쟁 때 북베트남 같은 공업 저개발국들이 민간인 구역과 군사공업 구역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고는 해도, 민간인 오폭에 대한 고려를 씹고 무차별 폭격을 해댄 것은 미군의 큰 잘못이다. 이전 태평양 전쟁에서도 제기된 문제. 태평양 전쟁에서는 없던 문제 하나가 고엽제였는데, 이걸 베트콩들이 드나드는 정글에만 뿌린 게 아니라 남/북 베트남 양쪽의 민간인 거주 농촌에도 뿌려대서 농업을 심각하게 파괴하기도 했다. 특히 남베트남 농촌에 대한 고엽제 살포는 베트콩이 기르는 작물인 줄 알고 뿌려댔는데 알고 보니 민간인 거였다(...) 같은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면서 남베트남 쪽의 국력을 깎아먹기도 했으므로 도덕적인 문제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심각한 실책이었다. 일각에서는 후에 학살과 같은 베트콩과 북베트남측의 학살을 얘기하며 베트남 전쟁애 대한 반제국주의적인 성격을 희석시키고 자신들의 반공적인 프로파간다를 선전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관점또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봐야한다. 베트남 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은 비단 베트콩만의 문제는 아닐 뿐더러 연합군측의 학살 또한 적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만 보더라도 수백만톤의 폭탄과 엄청난 고엽제를 투하해서 수백만의 민간인에게 죽거나 다치게 만들었다. 정작 반공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학살만 문제삼는 사람들은 미국과 연합국이 저지른 베트남 전쟁에서의 만행은 당연하다는 듯이 두루뭉실 넘긴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 당시 양민학살과 테러의 문제를 단순히 베트콩과 공산측의 문제로만 넘기는 것은 단순하고 편협하기 짝이 없는 관점이다. 당연히 공식 문서 상으로는 미군도 흔히 세간에서 생각하는것처럼 무차별 융단폭격이 아니라 타겟을 구별하는 전술적 정밀 폭격이 교리였다지만 일단 당시 남북베트남 양쪽 모두 도농인구 비율을 고려해보면 하노이만 석기시대로 돌려보내지 않는다가 저어어얼대 양민 피해가 없다와 같지 않았다. 베트남전 당시에도 그랬고 현대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악순환되는 구도지만 저런 미국의 적들이 자행한 만행은 책임 소재가 분명한 '학살'로 명시 되는 반면 미국측이 하이테크 병기로 멀리서 초래한 대량 인명 피해는 '부수적 피해 (collateral damage)' 따위 시니컬하게 기계적인 용어로 퉁치고 넘어가려고 한다.[109] 몇몇 사람들이 자유 월남 (베트남) 패망의 교훈이라는 영상물을 틀어주면서 빨갱이가 득실거려서 국민들이 선동당해 망했다. 허구헌날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데모나 해서 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10] 당연히 북베트남측은 59년부터 직접적으로 베트콩에 대한 전폭적 물적, 인적 지원을 했고 이름만 베트콩이지 실체는 북베트남 정규군인 부대들이 미군, 남베트남군과 교전한 경우도 수없이 많으며, 이아드랑 전투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어쨋든 공식적인 하노이 정부의 전면적 '참전'은 1972년이고, 애초에 윌리엄J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비롯한 밀도 있는 해당 2차 사료들은 60년대 이후 호찌민의 일과는 사실상 병가로 인한 중국에서의 요양과 가끔씩 당내에서 연설 한번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게 베트남 공산당이란 집단도 아니고 호찌민 개인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거 자체가 확대 해석에 가깝다.[111] 출처는 바로 미 국방부 그 자체의 1차 사료인 Pentagon Papers의 그레이블 상원 의원판 1권 5장, "Origins of the Insurgency in South Vietnam, 1954-1960"이다.[112] 물론 학살의 증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구정 공세 당시 베트콩이 후에(Hue)에 들어와 1달동안 3~4천명이나 되는 포로와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10만~22만이나 되는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설사 그런 증거가 있었다 하더라도 현대 베트남 당국이 절대 공개할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확실한건 구정 공세 이후 미군-남베트남군이 후에를 탈환 했을 때 수천명의 암매장 된 시체가 나왔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문서에도 나와있는 내용이지만, 베트콩은 1960년대 초반(미군 개입 이전이다.) 남부 촌락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들을 죽였다. 베트남을 국빈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월남전 당시 일부 주월한국군의 잔학 행위를 사과하며 진상조사가 필요할 경우 이에 협조하겠다고 했을 때, 베트남측이 영 떨떠름해하며 어차피 우리가 승전국이므로 별로 개의치 않으며, 경제협력 얘기나 하자고 한 것은 외국군 못지않게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잔학 행위도 상당했기 때문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있다. 만일 과거사에 대한 진상 조사가 이뤄질 경우 필연적으로 미군 남베트남군 한국군의 학살과 같이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의 학살이 수면 위에 오르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즉 월맹과 베트콩을 계승한 현 정부 입장에서는 영 좋지 못한 흑역사이므로 그 문제를 아예 다 묻고 가자고 한 것이다. 물론 주정규군이었으면서 무차별 폭격을 행하고 고엽제를 뿌려 죄없는 민간인들은 물론이며 베트남의 후대인들한테까지 피해를 끼쳤던 미군에 비하면 덜 캥기긴 하더라도 말이다. 1966년 3월 3일 로버트 맥나마라의 증언과 The True nature of Vietnam's(미국정책배경), 4~5면에 따르면 1960년 베트콩이 지방관리와 민간인을 2천명 이상 살해하거나 납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1965년 한해동안 관리, 정부요원과는 별도로 민간인 1665명이 살해되었다 한다. 1970년대 미 육군 법무관 사무실 자료에 따르면 1957~1972년까지 베트콩은 총 36,725명 이상을 학살하고, 58,499명을 납치했다고 한다. 미국이 인정한 공식문서다. 물론 잘한일은 절대로 아니고 학살 자체는 수치와 상관없이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미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수치를 생각해봤을때 럼멜의 통계는 다소 과장이 되었을 가능성을 완벽히 배제할 수는 없다.(참고자료는 전환시대의 논리 p.413과 한겨레 출판에서 출판된 베트남 전쟁 p.105와 Guenter Lewy, America in Vietnam,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p.272~273이다.) 물론 미국측 문서가 정확한 것은 아닐 수도 있으나, 극우주의자 루돌프 렘멜이라는 학자가 제시한 자료의 신빙성이나 중립성은 알아서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베트콩 사령관이었던 호앙 반 타이의 경우 포로 학대와 민간인 학살, 강간을 포함한 전쟁 범죄를 원칙적으로 철저히 금했다고 하지만, 의회 보고서에 나오는 실질적인 결과물을 볼 때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이 사실이라고 쳐도 그것이 제대로 이행되었다고는 도저히 보기 어려울뿐더러, 애당초 교육 종사자들이나 학생들, 투표하러 가는 사람들 같은 남베트남 정부와 직접 연관이 없는데도 결과적으로는 남베트남 체제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까지 억울하게 죽임당한 것을 보면 그런 지시의 신빙성 자체가 의심되는 상황이다. 반면 윤충로 교수눈 자기 박사 논문에서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에 따르면 베트콩과 같은 세력들이 용의주도한 대량학살작전을 써서 상당수의 비무장 민간인을 죽였다는 확증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주장하기는 했다.(출처: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 형성사 p.550) 실제로 위에 상술된 후에 전투만 보더라도,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중엔 북베트남군 장교가 자기측 군대가 학살하는 것을 막는 것을 목격했다고도 한다.(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377)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미군포로들 증언 중엔 가혹처사 관련한 것도 있고, 총알이 왔다갔다 하는 전쟁터에서 그것이 얼마나 잘 지켜질지는 알아서 생각해보길 바란다. 참고자료: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War in Vietnam[113] 베트콩은 아직 공식적으로 결성되기 전이었으므로[114] 영문 위키피디아의 경우, 출처를 두 곳으로 적고 있다. 오버도퍼(Oberdorfer)의 책과 윌뱅크스(Willbanks)의 책들이 그것들이다. 이들 중 윌뱅크스의 책은 저자 스스로가 주장한 게 아니라, 보복 부대가 죽인 사람 수가 오버도퍼의 주장보다 훨씬 많다고 주장한 가렛 포터의 글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가렛 포터는 그가 인용했다는 베네마 교수의 글이 그의 주장과 전혀 다른 것으로 밝혀지면서 사실상 사기꾼으로 드러난지라, 포터의 주장은 사실상 가치가 사라진 상태다.[115] https://gall.dcinside.com/m/war/1313728 [116] 심지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남베트남 안에 또 다른 국가를 만드는 것도 모자라 중국, 소련, 쿠바,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는 물론 대사급 외교관계까지 형성했다. 그것도 구정공세 이후인 1969년에 말이다.[117] 구정 공세 시기 남베트남에 주둔해 있던 미군이 50만을 넘었다.[118] 65년 이전까지는 남베트남 정부가 지원을 매우 부족하게 해주고 이들의 훈련을 담당한 남베트남군의 능력 역시 형편없어서 사정이 열악했다.[119] 지방군이나 시민군과 달리 실질적인 전투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고 주로 이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120] 그리고 각종 공산주의 국가들과 베트콩이 자체적으로 외교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베트콩의 독립성에 대해 아무런 시사점도 없는 일이다. 원래 적성국을 견제하기 위해 자립능력이 없는 괴뢰국임이 뻔한 집단을 승인하고 외교 관계를 맺는 건 현대사회에서 가끔 있는 일이다. 남오세티야가 베네수엘라 같은 반서방 국가들 몇개로부터 승인받았다거나, 남오세티야와 도네츠크가 서로를 승인했다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물론 남오세티야와 도네츠크 모두 러시아의 지원이 없다면 절대로 자립할 수 없는 괴뢰국가 이상이 아닌 것이 이다.[121] 애당초 아무리 집권 정당성이 있는 집단이라도 죄 없는 민간인들, 특히 여자들과 어린애들 같은 약자들을 계획적으로 괴롭히고 참살한다는 건 용납되는 일이 절대 아니다. 연산군은 집권 정당성이 없어서 쫒겨났는가? 반대로 조선 세조가 부정적으로 재평가 받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단순히 집권 정당성이 없어서 그런 거라기보다 군주로서 각종 문제가 재조명된 점이 크다. 베트민은 이미 57년부터 독립운동으로 얻었던 정당성은 모조리 내팽개쳐버린 뒤였던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이승만 또한 독립운동가 출신인 데다가 집권 초기에 나름대로 업적을 남겼지만 결국 종신독재로 그러한 정통성을 날아가버렸다.[122] 이건 굉장히 중요한 논점인 게, 캄보디아가 국내의 베트남인을 학살하고 베트남을 선제공격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선제공격한 쪽이 캄보디아이니 무슨 짓을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말할 일은 아니지만. 일각에서는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베트남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며, 베트남을 폴 포트와 더불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데, 이는 타당한 논리가 아니다. 베트남은 폴 포트의 킬링필드를 지원한 적도 없을 뿐더러, 1979년 캄보디아가 선빵을 갈기자 그 정권을 전복시켰기 때문이다.[123] 그리고 사실 베트남군의 주둔이 캄보디아의 정국을 혼란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든 것이, 크메르 루주폴 포트정권이 무너진 계기가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공이었다. 적어도 사람 죽어나가는 점만 보면 이건 차라리 캄보디아 해방이라 말하는게 옳을 정도. 물론 크메르 루주의 만행이 베트남의 패권주의적 행태를 전적으로 옹호할 근거는 되지 못하겠으나, 폴 포트 정권을 몰아낸 건 정말 백번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문제는 현대 베트남 정권 당국이 진짜로 이렇게 스스로 "우린 캄보디아 인민을 셀프 제노사이드 정권에서 부터 해방시켜줬다" 자화자찬하며 베트남 군 점령기와 지금까지도 캄보디아 상대로 갑질 부리는 행태를 감추려고 한다.[124] 베트남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소장인 장생트니에게 했던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정말 현실이 되었다. 20년 뒤인 1966년 7월 호찌민은 미국과의 전쟁을 중재하러 수도 하노이에 온 한때 적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장생트니를 다시 만났는데 미국과의 전쟁을 중재하기 위해 프랑스 대표로 온 장생트니에게 호찌민은 미국이 베트남의 모든 도시들을 초토화 시킬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미군이 철수하지 않는 한 베트남 민족은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얘기했다.[125] 참고로 젊은 시절 호찌민은 프랑스에 사는 프랑스 인들은 베트남에 사는 프랑스인들보다 친절하다고 말했다.[126] 2009년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번역한 베트남측 전쟁사 서적이다.[127] 지금도 꽤나 고급진 호텔이다. 이 호텔은 현재 보스턴 Parker Street(파커 스트리트)역 근처에 있다.물론 호찌민이 일 했다는 흔적을 보여주진 않는다.[128] 출처 : 박헌영 평전[129] 7월에도 폐관할 때가 있다.[130] 휴대폰 보조 배터리 정도는 들고가는 것을 허용해준다.[131] 이때문에 능에 입장하기전 앞에 있는 군인들이 정숙하라고 지시한다.[132] 출처: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2003 p806[133]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p.161[134] 베트남 전쟁에 대한 책으로서는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이 좋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을 체계적으로 다룬 명저중 하나다.[135] 각주를 빼면 844페이지. 그래도 많다.[136] 예를 들면 1960년대 호찌민의 추천으로 해외 유학의 길에 올랐던 베트남 유학생들[137] 참고로 이 책 초반부에 영화 풀 메탈 자켓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138]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된 옥중일기는 한글 번역본과 한자 베트남에가 같이 있기에 비교해가며 읽을 수 있다.[139] Who? 시리즈 중 하나인 호찌민 위인전은 특히 미국과의 전쟁을 다룬 베트남 전쟁을 다룬 내용이 매우 부실하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1963년 틱광둑 스님이 소신 공양 했다는 소식을 호찌민과 북베트남 공산당 관료들이 듣고 난 뒤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해 비판하는 장면이 나오다 통킹만 사건 한번 언급하고 갑자기 미군이 기습 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시간을 거슬러 호찌민이 기침하다 사망하는 장면이 나오고 그 뒤 바로 1975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진격하는 장면과 동시에 어느 병사가 눈물을 흘리며 호 주석님 보이십니까라고 얘기하는 장면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설명이 끝난다. 즉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전개됐고 미군은 왜 철수했으며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은 왜 무너졌는지에 대한 맥락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든 셈이다.[140] 초판에서 "읍니다"를 쓰던 시절이니 적어도 89년 이전. 냉전 끝물이다.[141] 전부 미성년자. 거기다 작업 환경은 노동자법 생기기 이전의 유럽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