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분식 장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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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인사(3공) · 인사(4공) · 통일주체국민회의
여당
민주공화당
연립여당
유신정우회
정책 및 방향
제1-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중화학공업화 · 수출주도산업화 · 녹화사업 · 그린벨트 · 새마을운동 ·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 · 국민교육헌장 · 중·고교 평준화 · 한강의 기적 · 한일수교 · 베트남 파병 · 혼분식 장려 운동 · 통일미 · 율곡사업 · 핵무장 · 향토예비군 · 주민등록증 · 재형저축 · 한글전용 · 부가가치세 · 백지계획 · 강남 개발 · 금지곡 · 방위세 · 방위병
평가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정치 · 사회·문화 · 안보·국방 · 외교 · 경제) · 논란이 있는 평가
타임라인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년
5.16 군사정변 · 국가재건최고회의 설립 · 혁명재판 · 전국 18개 학군단 창설 · 수도방위사령부 창설 · 농어촌고리채법 · 은행국유화(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 · 경제기획원 설립 · 중앙정보부 창설 · 한국전력주식회사 창설 · 농업협동조합 창설 ·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 · 연호에 관한 법률 개정
1962년
서력기원 사용 · 문화재보호법 제정 ·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주민등록법 제정 · 화폐개혁 · 4대 의혹 사건 · 마포아파트 준공 · 김종필-오히라 메모 · 대한항공공사 설립 · 5차 개헌 공포 · 제1차 국민투표
1963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족 · 민주공화당 창당 · 3.16 성명 · 감사원 개원 · 의정부역-능곡역 구간 교외선 개통 · 서울 대확장 · 부산 직할시 승격 · 박정희 의장 예편 후 민주공화당 입당 · 삼양라면 출시 · 서울가정법원 개원 · 제5대 대통령 선거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 구로공단 조성 · 황태성 사건 · 의료보험법 제정
대한민국 제3공화국
1963년
국가안전보장회의 설치 · 파독 근로자 파견
1964년
미터법 실시 · 삼분폭리사건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보완계획안 발표 · 울산정유공장 준공 ·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 6.3 항쟁 · 베트남 전쟁 파병안 통과 ·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 · 무즙 파동 · 서독 공식 방문 · 국가기술자격 시행
1965년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 · 독도 밀약 · 수출제일주의 표방 · 제2한강교 준공 · 춘천댐 준공 · 광복회 발족 · F-5 20대 도입 · 원충연 반혁명 사건 · 한일기본조약 조인 · 전매청 신탄진공장 준공 · 야당 불참 속 한일협정 비준 및 베트남 전쟁 파병 동의안 가결 · 베트남 전쟁 1개 전투사단 파병 · 이승만 대통령 서거 · 한국해외개발공사 발족 · 농어촌 전화 사업 추진
1966년
KIST 설립 · 국세청 발족 · 장면 별세 · 태릉선수촌 설립 · 한미행정협정 조인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 국회 오물 투척 사건 · 사카린 밀수 사건
1967년
산림청 개청 ·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 한국외환은행 발족 · 대도시 그린벨트 설정 · 짜빈동 전투 · GATT 가입 · 과학기술처 신설 · 제6대 대통령 선거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 동백림 사건 · 한국수자원개발공사 설립 ·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 정부종합청사 착공
1968년
1.21 사태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 684부대 창설 · 서울사범대학 독서회 사건 ·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설립 · 향토예비군 창설 · 주민등록법 개정 · 통일혁명당 사건 · 만화 검열제 · 육군3사관학교 창설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 주민등록증 발급 실시 · 국민교육헌장 발표 ·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오산 구간 개통 · 경인고속도로 개통
1969년
교련 과목 개설 · 한국도로공사 발족 · 가정의례준칙 · 서울 중학교 무시험 제도 · 금화시민아파트 준공 · 경부고속도로 오산-천안-대전 구간 개통 · 호남정유 여수공장 준공 ·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 MBC 개국 · 3선 개헌 · 제2차 국민투표 · 제3한강교 개통 · 울산고속도로 개통 · 경부고속도로 대구-부산 구간 개통
1970년
정인숙 살해사건 ·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포항종합제철소 착공 · 새마을운동 제창 · 우편번호제 도입 · 경부고속도로 대전-대구 구간 개통 (완공) · 호남고속도로 대전-전주 구간 개통 · 백원 주화 발행 ·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 병무청 설립 · 모산 수학여행 참사 · 전태일 분신 사건 · 번개사업 · 남영호 침몰사고 · 4대강유역 종합개발 계획 확정 · 정부종합청사 개청
1971년
전국 중입시험 폐지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 · 고리 원자력 발전소 기공 · KAIS 설립 · 주한미군 7사단 철수 · 제7대 대통령 선거 · 진산 파동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 광주대단지 사건 · 브레튼우즈 체제 종료 · 실미도 사건 · 국토종합계획 발표 · 통일로 개통 · 영동고속도로 신갈-새말 구간 개통 · 대연각호텔 화재
1972년
정병섭군 자살사건 · 경주고도개발 10개년 계획 확정 · 7.4 남북 공동 성명 · 통일미 개발 · 8.3 사채 동결 조치 · 제1차 남북 적십자 회담 · 10월 유신 · 울산석유화학단지 준공 · 제3차 국민투표 · 통일주체국민회의 발족 · 제7차 개헌 ·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대한민국 제4공화국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 ·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추진 · 남서울아파트 분양 ·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 · 승압사업 개시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 KBS 설립 · 베트남 전쟁 종전 · 유신정우회 창립 · 윤필용 사건 ·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 서울어린이대공원 개장 · 1973 서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 화전민정리 5개년 계획 수립 · 포항종합제철소 준공 · 대덕연구단지 착공 · 불국사 복원공사 준공 ·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 · 김대중 납치 사건 · 소양강댐 준공 · 제1차 오일쇼크 ·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 태백선 고한-황지 구간 개통(완공) · 호남고속도로 전주-순천 구간, 담양지선 개통(완공) · 남해고속도로 개통 · 친아랍 성명 4개 조항 발표
1974년
율곡사업 추진 · 긴급조치 1·2호 선포 · 긴급조치 3호 · 현대울산조선소 제1호선 진수 · YTL30호 침몰 사건 · 서울/부산 고등학교 평준화 첫 실시 · 창원국가산업단지 조성 · 민청학련 사건 · 긴급조치 4호 선포 · 팔당댐 준공 · 속초해전 ·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 ·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 · 새마을호 운행 시작 · 긴급조치 1·4호 해제 · 대왕코너 화재사고 · 주안국가산업단지 준공 ·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
1975년
제4차 국민투표 · 한강 이북지역 택지개발금지조치 · 핵확산금지조약 비준 · 민방위 결성 · 긴급조치 7호 선포 ·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사형 집행 · 김상진 할복 사건 · 종합무역상사 제도 실시 · 여의도 국회의사당 준공 · 영동고속도로 새말-강릉 구간 개통(완공) · 동해고속도로 개통 · 여천석유화학단지 기공 ·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개장 · 1975 서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1976년
포항 석유 발견 사건 ·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 한독맥주 사건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 서울 UFO 격추미수 사건 ·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 한국수출입은행 발족 · 잠수교 개통 · 국산자동차 현대 포니 첫 수출 · 코리아게이트 · 안동댐 준공 · 함평 고구마 사건 · 직업훈련기본법 제정
1977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백지계획 발표 · 박흥숙 살인사건 · 월성 원자력 발전소 기공 · 고리 원자력 발전소 1호기 가동 · 의료보험 시행 · 부가가치세 시행 · 남해화학 여수공장 완공 ·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 구마고속도로 개통 · 이리역 폭발사고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발족 ·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 여천석유화학단지 준공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 제9대 대통령 선거 · 8.8 조치 시행 · 백곰 미사일 발사 성공 · 자연보호헌장 선포 ·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1979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착공 · 정부 제2청사 착공 · 보문관광단지 개장 · 고리 원자력 발전소 3.4호기 착공 · 2차 오일 쇼크 · YH 사건 · 성수대교 개통 ·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 김형욱 실종 사건 · 부마항쟁 · 삽교천방조제 준공 · 10.26 사태 ·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 · 서울의 봄 ·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12.12 군사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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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내용: '장려'가 아니라 '강요'
4. 결과
5. 폐해
6. 영양학적 관점에서 본 혼분식 운동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혼분식 장려 운동()은 1960~70년대 대한민국에서 시행한 정책으로, 식사에서 주식인 쌀의 소비량을 줄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혼식(混食)은 이외의 여러 잡곡을 섞어먹는 것, 분식(粉食)은 밀가루 음식을 뜻한다.


2. 배경[편집]


이 정책이 펼쳐진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주식인 쌀 생산량의 부족이었다. 베이비붐 등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으나 쌀의 생산량은 이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였고, 이는 쌀 부족 현상 및 쌀값 상승을 불러일으켰다. 정부에서는 토지 개간 및 간척, 신 품종 개량 및 농법 개선 등을 시행했지만 이는 중장기적인 대책이라서 단기적인 부족 현상을 해결하긴 힘들었다. 이를 위해 정부에서는 쌀 소비를 줄이는 방안 또한 찾아야 했다. 마침 미국에서 밀가루옥수수를 대량 원조하였기에 그것들을 이용했다.

두 번째는 당시 박정희 정부의 경제 계획이다. 박정희 정부는 수출 지향의 공업화와 저임금 정책을 폈다. 저임금을 통해 수출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 저임금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선 노동자들이 저임금으로도 생활이 가능해야 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값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다. 따라서 쌀 소비를 줄여서 쌀값을 낮추고 이를 통해 저임금 기조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했다.

이것저것 다 따져봐도 결국 쌀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박정희 정부는 비교적 공급량이 많던 보리를 비롯한 잡곡, 그리고 미국의 지원으로 많이 풀려있던 을 쌀의 대안으로 국민들에게 제시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군사정권답게 이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혼분식 소비 증가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3. 내용: '장려'가 아니라 '강요'[편집]


혼분식 장려 운동은 '장려'였지만 실제로는 강제적인 방법이 다수 동원되었다.

  • 식당의 음식 판매 제한
1969년부터 1977년까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오전 11시~오후 5시)에는 쌀로 만든 음식을 판매할 수 없었는데, 이 날을 쌀이 없는 날인 무미일(無米日)이라고 불렀다. 쌀 대신 밀가루로 만든 국수수제비 등의 음식을 판매해야만 했었으며, 또한 설렁탕 등의 음식에는 일정 비율의 밀가루 국수를 사용하도록 강제했는데, 일부 식당에서 설렁탕이나 돼지국밥을 시키면 국수가 같이 말아져 나오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흔적이다. 당시 무미일이라는 지침을 어겼을 경우 사복을 입은 단속요원이 불시에 단속하였으며, 무미일을 지키지 않은 식당에는 최단 1개월에서 최장 6개월 동안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다. 무미일을 지키지 않은 가게를 신고한 사람에게는 5,000원이라는 거액의 포상금을 주었으며,[1] 이 무미일은 당시 신품종 벼였던 통일미의 보급으로 쌀 자급이 이뤄지자 1977년에 폐지되었다. 또한 식당에서 볼 수 있는 규격화된 공깃밥도 이 때 도입된 것이다. 이만기가 씨름선수 시절 원래 공깃밥을 두세 공기만 먹으면 될 양을 이때부터 공기 규격을 줄이는 바람에 최대 아홉 공기까지도 먹어봤다고 회고했다.

지침을 내려서 학생들의 도시락에 일정 비율 이상의 잡곡을 쓰도록 단속하였다. 그 당시 학생들의 도시락 검사를 해서 순수 백미밥이 담긴 도시락이 걸리면 그 학생을 혼내는 건 물론, 도덕이나 태도 점수 감점 등의 불이익을 주고, 심지어 체벌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검사를 나눠 담당하는 반장이나 부반장의 경우, 쌀이 전혀 섞이지 않은 완전 보리밥으로 타의 모범을 보이라는 강요를 받는 것도 흔한 경우였다. 그래서 일종의 꼼수로 아이에게 쌀밥을 먹이고 싶었던 부모들은 위에는 꽁보리밥, 밑에는 쌀밥을 까는 2층밥을 싸줬고, 교사들도 이를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에 엄격한 교사들은 밥을 뒤집어보게 한 경우도 있었다.

  • 쌀을 이용한 술 제조 금지
가정에서 쌀을 이용한 술의 제조를 전면 금지시켰다. 막걸리증류식 소주가 좋은 예이다. 대신 쌀을 쓰지 않고 고구마카사바 등으로 만든 희석식 소주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막걸리 등의 다른 술도 밀가루와 같이 쌀을 사용하지 않는 제조법으로 바뀌었다. 아예 곡주 대신 과일주를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그게 바로 최초의 국산 포도주 마주앙이다.

  • 혼/분식의 이점을 주장하는 홍보 활동도 펼쳤는데, 정부가 정책적 차원에서 잡곡 및 분식의 영양분이 쌀과 비교해서 우수하다는 점을 국민을 상대로 홍보했다. "흰쌀 편식은 체질의 산성화를 초래하고 대뇌 변질증을 일으켜 판단력이 흐려지고 지능이 저하될 우려가 높다"라는 해괴한 주장까지 무리할 정도로 강조하였다. 이건 1975년 국민학교 실과 교사용 지도에 버젓이 나와 있는 내용이다.

심지어 당시 TV에 방송되던 상업 광고에도 국책 관련 자막이 표시될 때 그 자막 패턴 중 하나로 혼분식 권장 메세지가 삽입되기도 하였으며, 대부분 식품 관련 광고에서 출력되었다고 한다.

4. 결과[편집]


이 장려 운동의 효과로 쌀 소비량이 줄면서 쌀 가격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 또한 밀가루 소비량이 크게 증가하면서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라면, 식빵, 튀김 등과 같은 분식이 쌀밥과 함께 식생활의 주류를 차지하였다.[2]

쌀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지면서 1980년대 이후에는 강제적인 혼분식 장려도 서서히 사라졌다. 이후에는 혼분식은 개개인의 취향으로 자리잡았다. 다만 분식 장려 정책은 그 이전까지 쌀밥과 채소 위주의 식생활에만 익숙했던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식생활의 서구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근거: 조선일보 2015-07-09 "도시락에 잡곡 안 섞으면 야단 맞던 시절… 혼분식 장려, 한국인 입맛까지 바꿔"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서구화된 식습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쌀소비량이 줄어 들었다. 농어촌 인구는 1960년대 말부터 지속적으로 감소세에 있고 특히 1990년대에는 농어촌 인구가 전체 인구의 10% 아래로 떨어지며 말 그대로 노인들과 외국인들만 가득한 곳이 되어버렸지만 농업기술의 발전과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생산성 자체는 증가했기 때문에 농어촌 인구의 감소에도 재고량이 엄청나지게 된 것이다. 사실 수출을 하려고 해도 훨씬 인건비가 값싼 중국인도라는 최종보스가 있고,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서 2기작이 된다는 점을 이용해 해외로 쌀을 대량수출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아 수출이 여의치 않은것이 현실이다. 일본도 쌀소비량이 감소하자, 해외로 쌀 수출을 도모하려고 했지만 수요 자체가 인디카에 몰려있는데다가 가격도 비쌌기 때문에 별로 신통치 않았다.

덧붙여, 설렁탕이나 국밥집에서 업소에 따라 국그릇에 당면이나 소면을 끼워넣는 것도 혼분식 장려운동 영향의 흔적이라고 한다.


5. 폐해[편집]


이 운동의 문제점은, 운동의 이름에 명시된 '장려'가 이름과 달리 순전히 '강요'였다는 점이다. 당시 학교에 백미밥 도시락을 가져왔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혼이 났다는 경험담은 수두룩하다. 오히려 이렇다보니 어떻게든 자식에게 쌀밥을 먹이고 싶어서 쌀밥 위에 보리밥이나 콩밥을 덮은 도시락을 싸줬다는 일화도 있다. 나중에 혼식 기준이 많이 완화되어 쌀밥을 싸와도 된다고 했는데도 솔선수범하여 잡곡밥을 가져오면 교사가 칭찬을 하며 선도 점수(요즘의 태도 점수) 가산점을 주고 반 전원이 박수를 쳐주는 학교도 꽤 있었다고 한다.

식객에서도 언급되지만 당시 쌀을 이용한 술 제조가 전면 금지되면서 각 가정에서 만드는 술은 물론 전통주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으며[3] 희석식 소주의 보급으로 술맛은 안 보고 그냥 죽도록 마시고 취하는 음주 문화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6. 영양학적 관점에서 본 혼분식 운동[편집]


다만 분식은 그렇다치고 혼식은 확실히 식생활에 더 좋긴 하다. 저 당시 강조하던 것처럼 쌀밥만 먹는다고 몸에 해로울 정도인 건 아니지만, , 보리, 등 기타 잡곡들을 넣어 지은 밥을 주로 먹는 게 건강에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건 당연하다.[4] 어디까지나 혼식만을 강제해서 식품 선택에 대한 자유를 침해했다는 점이 문제. 선진국으로 들어선 이후의 한국은 그때와는 반대로 혼식이 훨씬 비싸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생각하여보면 당연한 것으로 당시에는 백미를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백미의 수요가 높았으니 백미가 잡곡보다 가격이 비쌌다. 게다가 백미를 만들 때는 도정 과정까지 들어가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웰빙 열풍에 따라 잡곡의 수요가 높아지니 잡곡이 백미보다 더 비싸진 것이다.

21세기 기준에서 백미밥 자체는, 지양해야 할 정도로 나쁜 건 아니다. '몸에 덜 좋은' 것과 '몸에 나쁜'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현대에도 '백미만 먹는 것은 성인병의 지름길'로 인식하는 사례가 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백미, 자주 먹을 때의 이야기다. 백미 그 자체가 일종의 정제당이라 당뇨병의 원인이 되기는 하고 인디카 쌀에 비해 한국에서 인기가 좋은 자포니카 쌀이 이런 위험이 더 크긴 하나, 우리가 식사를 할 때엔 밥과 반찬을 같이 먹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완이 된다. 밥을 먹을 때 밥보다 반찬을 많이 먹고 적당히 신경 써서 종종 잡곡밥을 먹어주는 것 정도로 충분하니 굳이 백미밥을 배척할 필요는 없다. 더 자세한 건 백미 문서로.

세계 최고의 장수 국가인 일본의 경우 혼식 문화가 아예 없다.[5] 물론 과거에는 보리밥이나 콩밥을 먹었고 극심한 흉년으로 기근이 발생했을때에는 풀뿌리, 나무뿌리를 벗겨먹었기도 했지만, 경제력의 발달이 한국보다 빨랐기 때문에 혼식 문화가 일찍 사라진것이다. 물론 무기토로라고 참마를 갈아넣은 보리밥은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드물게 먹는 별미 취급. 예상대로 후술하는 것처럼 각기병 사례가 1970년대에도 한국보다 빈번했다. 일본 원문 소스를 보면 전형적인 일본식 인스턴트 식품의 편식 부작용으로 보인다. 저 시기의 일본 인스턴트 식품은 지금의 햄버거 같은 걸 생각하면 안되고, 백미에 후리카케를 뿌려먹는 수준이므로 실질적으로는 백미만 먹은 것으로 봐야 한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60~70년대 당시에는 각기병의 위험성 자체가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정부의 홍보가 잘 먹혔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백미 말고 반찬을 영양적으로 균형있게 먹을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국가는 아니였고, 반찬이 부실한 상태에서 백미만 먹으면 위험하다는 사실 정도는 꽤 알려져 있었다. 고기 반찬을 먹기엔 가난했고, 감자보리같은걸 먹으면 딱 정부의 의도와 일치했다. 실제로 각기병이 가장 유행하던 일본이나 동남아의 상황을 보면 서민들도 백미를 접하긴 쉬웠으나 반찬이 부실한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60년대에는 동남아시아도 각기병이 자주 발생하던 상황이었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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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8년에는 짜장면 1그릇의 가격이 50원이었다.[2] 참고로 분식의 '분()'은 '가루 분'으로 한국에선 밀가루를 의미한다. 분식이란 단어 자체가 박정희 정권 시대에 생겨난 신조어이다.[3] 사실 이것보단 일제강점기민족말살정책이나 6.25 전쟁북한군이 저지른 학살이 더 타격이 컸다. 집안 고유의 전통주 기술을 가진 가문은 상당수가 부유층이었고, 인민재판으로 이들의 다수가 살해당했기 때문이다.[4] 실제로 60~70년대 한국 경제사정에서 어정쩡하게 백미만 먹었다간 각기병 때문에 의료비가 낭비되었을 상황이었다. 각기병은 한번 걸리면 합성 티아민+합병증으로 인해 치료비가 많이 깨진다.[5] 참고로 일본은 한국 다음가는 당뇨병 환자의 비율이 높은 나라다. 하지만 당뇨를 앓는 사람들도 소식을 할 지언정 대체로 백미밥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