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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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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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 ~ 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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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 국조 ~ 문종 · 선종 ~ 공양왕
왕녀 : 태조 ~ 문종 · 선종 ~ 공양왕
※ 작호가 있거나 성년까지 생존한 사람만 기재







고려 추존 대왕
안종 | 安宗

출생
936년~943년 추정
고려
사망
996년 7월 7일(음), 7월 24일(양) (향년 53~60세)
고려 경상도 사수현
(現 경상남도 사천시)
능묘
효릉(孝陵) → 건릉(乾陵) → 무릉(武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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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욱(郁)[1]
부모
부왕 태조
모후 신성왕후
형제자매
25남 10녀 중 8남
배우자
정실부인[2]
헌정왕후 (사통)[3]
자녀
1남 1녀 [ 펼치기 · 접기 ]
딸 - 성목장공주(成穆長公主)[1]
아들 - 현종[2]

종교
불교
묘호
안종(安宗)
시호
헌경영문효의대왕
(憲景英文孝懿大王)
성덕헌경효의대왕
(聖德憲景孝懿大王)


1. 개요
2. 생애
2.1. 고려사 기록
2.2. 현화사비 기록
3. 최종 승리자?
4. 가족관계
5. 기타
5.1. 홍경사
5.2. 시호
5.3. 능호
6.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고려 왕조의 추존 왕. 휘는 욱(郁). 태조 왕건과 그의 다섯째 왕후 신성왕태후 김씨 소생의 아들이며 현종의 아버지.

사서에는 태조의 아들들 중 8번째 순서로 등장하나, 정확히 몇 번째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1]

모후인 신성왕태후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백부인 김억렴의 딸이었으니 안종도 고려신라 왕실의 혈통을 동시에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명예로는 뒤지지 않을지라도 패서호족 계열 가문들의 세력이 기세등등한 상황이었고 형들이 많아 서열상으로도 왕위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왕족이었다.

안종은 혜종, 정종, 광종, 대종의 이복동생인 동시에 경종, 성종, 천추태후로 알려진 헌애왕후, 헌정왕후의 작은아버지이다. 목종에게는 작은할아버지가 된다.

고려사에 의하면 글을 잘 쓰고 고려 지리에 해박했다고 한다. 실제로 본인이 직접 지은 시 한 수가 전해져 오고 아들도 아버지를 닮았는지 보위에 오르기 전 절에 머물던 시절에 시를 여러 편 썼다고 한다.

그의 생애는 고려사, 현화사비에 남겨져 있다.


2. 생애[편집]


안종 왕욱이 언제 태어났는지 알려져 있진 않지만, 최소 936년에서 943년 사이로 추정된다. 태조가 935년 신라고려에 귀부한 다음해에 신성왕후 김씨와 혼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종이 헌정왕후와 만났던 시점의 나이가 최소 40대 후반~50대 초반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당시 헌정왕후의 나이가 20대 후반~30대 초반으로 추정되니 대략 20살 정도 차이가 난 셈이다.

신성왕태후 김씨의 아들이지만 일부 기록에서는 이정언(李正言)의 딸 대량원부인 이씨(大良院夫人 李氏)의 아들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오기라고 보는 경우가 많지만, 이원(李元)의 딸 후대량원부인 이씨(後大良院夫人 李氏)를 볼 때 대량원부인은 실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종이 신명순성왕태후의 아들이지만 신주원부인 강씨(信州院夫人 康氏)에게 양육되었던 것처럼 안종 또한 어떠한 이유로 대량원부인 이씨-후대량원부인 이씨에게서 양육되어 대량원(大良院)을 상속받아 오인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안종의 아들인 현종의 왕자 시절 명칭이 대량원군(大良院君)이었는데, 고려 초기 작호명을 보면 실제로 사저를 물려받아 책봉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2.1. 고려사 기록[편집]


왕욱은 임금이 된 형들을 제외한 왕건 소생의 다른 왕자들과 마찬가지로 사서에 남은 기록이 별로 없다. 하지만 조카인 헌정왕후와 사통함으로써 그 이름을 후대에 남기게 된다.

헌정왕후는 태조의 친손녀이자 경종의 후비로 경종 사후 궁에서 나와 절에서 지냈다. 마침 왕욱 역시 개경 왕륜사 남쪽 부근에서 살고 있었는데 서로 왕래하면서 눈이 맞아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러다 992년 7월 사통의 죄를 묻게 될까 겁이 난 헌정왕후의 가인(家人)들이 왕욱의 집에 불을 지르는 소란을 일으킨다. 이에 당시 임금 성종이 7월 임진일에 왕욱을 사수현(沙水縣)[2]으로 유배를 보냈다. 자세한 이야기는 헌정왕후 문서 참조.

유배된 왕욱은 헌정왕후를 잊지 못해 자신을 호송한 관리에게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지어 헌정왕후에게 보냈다.

與君同日出皇畿

君已先歸我未歸

旅檻自嗟猿似鏁

離亭還羨馬如飛

帝城春色魂交夢

海國風光泪滿衣

聖主一言應不改

可能終使老漁磯

'그대와 함께 같은 날 황기(皇畿, 개경)를 나왔건만

그대는 먼저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여함(旅檻, 가마)에서는 스스로 원숭이가 사슬에 묶인 듯 탄식하고,

헤어지는 정자에서 돌아보며 나는 듯 하는 말을 부러워하네.

제성(帝城, 개경)의 봄빛에 혼이 되어 꿈속에서 오가고,

나라의 풍광에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다.

성주(聖主, 성종)의 한 말씀 응당 바뀌지 않으리니,

끝내 물고기 잡는 갯가에서 나이 들게 해주시오.'

고려사 열전 태조 왕자 안종 왕욱(王郁) 중.


이후 유배지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 994년 헌정왕후가 사망하자 성종이 왕순을 아버지인 왕욱과 함께 살도록 해주면서 왕욱과 왕순은 2년여간이나마 같이 살게 된다.

왕욱은 결국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996년 7월 24일 지금의 사천시 정동면에 있었던 절인 와룡산 배방사(排房寺)에서 승하했다. 현종이 이곳에서 뱀을 보고 지었다는 시가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현종 문서 참조.

고려사에 따르면 유언으로 자신을 성황당 뒤쪽[3]에 묻되 시신을 뒤집어서 묻으라고 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아들인 왕순이 왕이 되기를 바란 뜻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

훗날 아들이 즉위한 후 묘호 안종(安宗)과 시호 성덕헌경효의대왕(聖德憲景孝懿大王)을 올려 종묘에 제사 지내고 현화사에 진영을 걸어두었다.


2.2. 현화사비 기록[편집]


현화사(玄化寺)는 현종이 재위 12년(1021년)에 부모를 위해 지은 원찰이다. 현종은 현화사비(玄化寺碑)를 세워 부모의 일대기 등을 적어두었는데, 고려사에 나와있지 않은 내용도 상당히 있어 역사학자들의 이목을 끈다.

문제는 현화사비에 기록된 왕욱의 일대기가 미화와 왜곡이 상당히 되어있다는 것이다. 현화사비엔 거란이 무도해 아무 죄도 없는 고려를 공격했을 때라고 나온다. 이때 고려거란에 명목상 사대를 하고 있으면서도 대놓고 거란을 나쁜 놈이라고 비난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1019년 제3차 여요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으니 크게 꿀릴 게 없었던 듯 보인다.

거란의 공격에 성종이 직접 장수를 이끌고 출진했는데, 성종이 작은 아버지인 왕욱을 아끼는 마음에 하인과 재산을 주면서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니 가족을 데리고 남쪽에 피신하라고 하여 왕욱이 사주로 내려간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고려사와 반대로 적혀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때 고려사에 의하면 당시 궁궐인 만월대에서 지내던 갓난아기였던 현종[5]이 아버지인 왕욱을 부축하며 귀양지로 내려오는 걸 도왔다고 나온다.(...) 또 비석엔 왕욱이 사주에 내려와 7월 7일에 갑자기 병에 걸려 죽은 것으로 적혀 있다.

사실 현종의 입장을 고려하면 이런 미화를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니다. 현종의 입장에서야 어찌됐든 부모의 명예가 회복되길 바랬을 것이다. 이는 사생아라는 본인의 입지 및 임금으로서의 정통성과도 연관되어 생각보다 꽤 중차대한 문제였다.

물론 혈통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왕위에 오를 자격이 충분했지만 문제는 서자도 아닌 사통으로 인해 태어난 사생아라는 것이 혈통이 지닌 가치를 모조리 깎아 버렸다는 것이다. 당연히 서자보다도 임금으로서의 정통성이 훨씬 떨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현화사라는 절 자체가 현종이 부모인 안종 효의대왕과 효숙인혜왕태후를 위해 지은 사찰이니 자신의 부모님을 치켜세우는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이는 조선시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한 나머지 사초에서 사도세자의 부정적인 행적을 지워달라고 영조에게 간청한 것과 비슷한 행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정조의 경우 열한 살까지는 사도세자와 함께 살았기에 어머니와는 아기때 헤어지고, 아버지와는 네 살때까지 2년여 정도밖에 같이 지내지 못했던 현종과는 조금 달랐을 것이다.

참고로 비석엔 고려사에 나오지 않는 현종의 황자(皇姊, 황제의 누나)인 성목장공주(成穆長公主)도 등장한다. 헌정왕후는 현종만 낳고 죽었으니 성목장공주는 왕욱이 헌정왕후와 사통하기 전 정실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즉 현종의 배다른 누나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목장공주는 시호이므로 동생인 현종이 태어난 992년 이전에 태어나 비석이 세워진 1021년 이전에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이 외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 헌정왕후의 사후 기록도 있는데 그 내용은 기타 항목 참조.


3. 최종 승리자?[편집]


안종의 형제인 혜종, 정종, 광종은 모두 대가 끊겼고, 그의 아들인 현종의 계보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까지 이어져 훗날 고려 왕조의 중시조가 되었다. 태조 → 안종 → 현종 → 문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신종 → ... → 공양왕. 중간에 신종의 형인 명종의 자손들이 강종에서 창왕까지 왕위를 잇기는 했지만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신종의 후손이다.

결국 태조 사후 옥좌를 둘러싸고 벌어진 왕실의 골육상쟁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승자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본인은 유배지에서 죽었으니 그게 무슨 큰 소용이랴만은 그래도 본인의 시신을 거꾸로 뒤집어 매장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이유가 아들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본인의 유언은 이뤄진 셈이긴 하다.


4. 가족관계[편집]


  • 정실부인: 미상. 이름과 시호는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 성목장공주(成穆長公主): 현화사비 비문에 나온다. 이를 통해 고려 중기에도 중국의 장공주,[6] 대장공주[7]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공주라는 시호를 받은 것으로 보아 현종 즉위 때까지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헌정왕후 황보씨 - 대종의 딸, 안종에게는 조카딸[8]


5. 기타[편집]



5.1. 홍경사[편집]



고려의 왕립 사찰
·
보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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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륜사
·
신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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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화사
·
중흥사
·
안화사
·
국청사
·
천수사
·
홍경사
·
대봉은사
·
제석원
·
흥국사
·
개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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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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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사
·
진관사중수
·
전등사중수
·
중수


현종은 현화사 말고도 안종 한 사람만을 위한 사찰을 세우고자 했는데 이 절이 바로 왕립사찰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이다.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가 남아있어 홍경사의 기원을 알 수 있다.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홍경사는 서북면 군단 부원수였던 강민첨이 주도하여 지어졌고 절은 약 200여 칸으로 안에 약 80여 칸 크기의 휴게소가 있어 이름을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했다고 한다.

비석에는 안종을 선황(先皇)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또한 현종을 성상(聖上)이라 높히고 현종의 명령을 선지(宣旨)라 기록되어 있다. '성상이 나라를 다스린지 18년째 되는 해(聖上御國之十八載)'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비석을 세운 날짜를 북송의 연호보다 현종의 재위기간을 먼저 적어 자주성을 드러냈다.


5.2. 시호[편집]


고려사와 현화사비의 시호가 조금 다르다. 고려사에선 현종이 즉위한 후 아버지 왕욱을 왕으로 추존해 묘호를 안종(安宗)이라 하고 시호를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했다. 후에 효목을 효의로 고치고 시호를 추가해 최종 시호는 '성덕헌경효의대왕(聖德憲景孝懿大王)'이다.

현화사비에는 성덕이 빠지고 고려사에는 없는 새로운 시호가 추가돼 '헌경영문효의대왕(憲景英文孝懿大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봉선홍경사비에서는 시호는 같지만 순서가 다른데, 안종(安宗) 헌경효의영문대왕(憲景孝懿英文大王)으로 나온다.

안종의 대표시호는 효의대왕(孝懿大王)이고 현종이 다시 올린 헌정왕후의 시호는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이다. 두 사람은 효(孝) 자 돌림 시호를 받게 되었다.

이는 현종이 은근슬쩍 안종과 헌정왕후를 정식 부부로 올려놓기 위한 작업으로 보인다. 고려 왕조는 국왕과 왕후의 시호를 맞추는 전통이 있어 '헌'정왕후는 경종 '헌'화대왕과 맞춰졌다. 이걸 안종과 효(孝) 자로 바꿔버리면서 둘을 정식 부부로 만든 것이다.


5.3. 능호[편집]


능호가 두 번이나 바뀌었다. 현화사비의 기록엔 안종의 능호는 처음 사주에 묻혔을 때 효릉(孝陵), 이후 현종이 개경 금신산에 이장한 뒤 개칭한 것은 건릉(乾陵)이다. 고려사엔 추가로 건릉에서 다시 무릉(武陵)으로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효릉은 안종의 대표시호와 겹치는데다가 능묘를 이장했으니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건(乾) 자의 뜻이 '하늘'이란 뜻이라 엄청난 우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다시 적당한(?) 우대를 의미하는 무(武) 자로 바꾼 듯 하다.


6. 대중매체[편집]


방영된 천추태후,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두 드라마 모두 고증보다는 극적인 각색이 많이 들어가 있어 실제와는 차이가 크다.
  • 2009년 KBS 사극 천추태후에서는[9] 김호진[10]이 맡았다. 경종과 천추태후의 숙부이자 고려 조정의 원로격이지만 정치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으며 강감찬과 친밀한 관계로 묘사된다. 최후는 비극성을 강조하려는 것인지 김치양 세력의 위협을 받아 아들 왕순을 맡긴 뒤 자결하는 것으로 역사와 다르게 연출되었다.

  • 2016년 SBS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는 남주혁이 맡았다. 강하늘이 연기한 8황자 왕욱은 태조의 제4황후 신정왕태후 황보씨의 아들로 성종과 천추태후로 알려진 헌애왕후, 헌정왕후의 아버지이다. 이름의 훈음이 같아 헷갈림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안종은 13황자 '백아'란 명칭으로 불렸다. 극중에서는 20대 초반의 어엿한 청년으로 나오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왕건이 살아있었을 당시 왕욱은 미취학아동 수준의 어린아이였고 이복형인 광종이 즉위했을 당시에도 많아야 10대 초반 정도의 나이에 불과했다. 극 초반에는 선의왕후가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이는 해씨부인을 짝사랑한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이후, 후백제 출신으로 금강의 딸로 설정된 우희와 인연을 맺어 최종적으론 그녀와 혼인까지 약조한다. 하지만 우희는 남은 후백제의 유민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로 인해 정치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피로 얼룩진 황가의 권력 다툼 속에서 타락하지 않고 인간성을 지킨 드문 인물로 묘사된다. 극 말미엔 이복형인 왕욱의 집에 들렀다가 우희와 닮은 그의 딸을 만나게 되는데, 훗날의 인연을 생각한다면 꽤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헌정왕후라고 확실히 언급되진 않았지만 분위기를 보아 그녀가 헌정왕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1] 고려사의 왕후 열전은 혼인 순서가 상관없이 신분이 높으면 우선적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자녀들도 왕후 열전에 등재된 순서에 맞춰 기록되었기 때문에, 등장 순서가 곧 혼인 순서나 출생 순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충렬왕 이후 원나라 출신 여인들이 혼인 순서가 늦어도 우선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 예이다.[2]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 현화사비에는 사주(泗州)로 기록되어 있다.[3] 지금의 사천 구룡산 밑[4] 사실 대놓고 왕이 되기를 노렸다고 나오진 않는다. 그러나 고려사에 지리에 능하다는 언급과 유언을 아들에게 몰래 남겼다는 점. 유언에 따라 왕욱에게서 금을 받은 술사가 현종에게 무엇이 그리 조급하시냐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직접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을 뿐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묘터를 대놓고 명시한 것을 보면 풍수지리에 가까워보이는데 풍수지리는 삼국시대에 시작되어 후삼국시대부터 크게 유행하였다.[5] 사실 시기가 꽤나 비슷한 것이 현종의 출생이 992년 8월 1일인데 제1차 여요전쟁은 993년 10월로 그리 많이 차이나지 않는다. 현종이 안종에게 보내진 것도 태어나서 1년이 지난 후였으니 꽤나 그럴싸하다.[6] 임금의 누이[7] 임금의 고모[8] 정식으로 혼인한 사이가 아니였다.[9] 실제 역사에서는 중년의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2009년 기준 40세이지만 동안인 김호진이 배역을 맡아 미스캐스팅 논란이 많았다.[10] 경종 역을 맡은 최철호보다 한 살 위이고, 천추태후 역을 맡은 채시라보다 1세 연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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