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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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洪啓迪, 1680년(숙종 6) ~ 1722년(경종 2)
조선 후기 노론계 문신. 자 혜백(惠伯), 호 수허재(守虛齋), 시호 의간(毅簡), 충간(忠簡).


2. 생애[편집]


본관은 남양으로 아버지는 이조참판 홍우석(洪禹錫)이다.

1702년(숙종 28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입격하였다. 이듬해 성균관 유생 180명과 함께 주자사서(朱子四書)를 고쳤다는 이유로 박세당을 성토하는 소를 올렸고 이로 인해 이경석의 손자인 이하성으로부터 소척(疏斥)받았다. 1703년(숙종 29년) 태학생으로서 송시열을 헐뜯는다는 이유를 들어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과 이경석의 신도비문을 없애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관철시켰다. 그 뒤 윤선거의 문집에 대해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1708년(숙종 3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는 것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궁중의 주악·유희가 지나친 것을 상소하여 숙종으로부터 호피를 상으로 받았고 1717년(숙종 33년) 전라좌도어사가 되어 무능한 지방관리들을 파직시켰다. 같은해 응교가 되었고, 세자(경종)에게 거경진학지요(居敬進學之要)를 가르쳤다. 1719년(숙종 35년) 경상 감사에 임명되었다. 세수 부실에 대한 문책을 받아 파직당했으나 곧 대사성으로 복직한다.

1721년(경종 1년) 5월에 대사헌이 되어 노론의 선봉에 서서 소론과 대립했다. 경종이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노론 4대신과 함께 세제 책봉에 앞장섰고 같은해 9월에 도승지가 되어 조성복이 상소한 세제의 대리청정을 밀어붙였다. 이때 도승지의 신분을 이용해 경종의 눈과 귀를 가렸다.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라가지 못하게 막았고 대리청정에 반대한 우의정 조태구의 알현 또한 막았다. 여기에 조태구는 세제 책봉에 반대한 유봉휘를 옹호한 인물이라며 처벌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내관과 나인들에 의해 알현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노론 4대신은 급히 입궐하여 대리청정 문제를 무마하려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같은해 10월 부제학이 되었을 때 노론의 죄를 물을 것을 주장한 이정신의 소를 배척하였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722년(경종 2년) 목호룡의 고변으로 삼수의 옥이 터지게 되면서 노론 신하 60여명이 죽거나 귀향을 가게된다. 이때 홍계적은 노론 4대신과 함께 노론의 핵심 인물로써 국문을 당하다가 옥사한다. 이 일련의 일들이 축년(1721년,경종 1년)에서 인년(1722년,경종 2년) 사이에 벌어졌다고 해서 신임옥사라고 한다.

영조가 즉위한 후 자신을 옹호해준 신임옥사 관련자들을 신원하면서 신원되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의간(毅簡) 시호를 받았으나 뒤에 충간(忠簡)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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