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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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유년시절
2.2. 청년기
2.3. 국어학자의 길
2.4. 해방 이후
2.5. 북한에서의 삶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5.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국어학자, 정치인.

자는 백경(伯經). 호는 대산(袋山).

2. 생애[편집]



2.1. 유년시절[편집]


1903년 9월 23일, 홍명희와 민순영의 2남 3녀 중 중 장남으로 서울 안국동에서 태어났다. 홍명희가 괴산 출신이었기 때문에 괴산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서울시 출신임이 밝혀졌고 북한에서도 그렇게 밝히고 있다. 아명은 오증(五曾)이었고, 1918년에 관례를 치르면서 항렬자를 따른 이름인 기문으로 개명했다. 홍명희가 조혼으로 일찍 결혼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고작 15세, 할아버지와도 고작 32세 차이 났으며 이 때문에 아버지와 친구 같은 부자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세간에 매우 유명했다. 홍명희가 일본 유학을 떠난 후에도 일가의 본산인 괴산에 내려가지 않고 증조부 홍승목이 곁에 두고 키웠다. 다만 어릴 때는 부자관계가 좀 기묘하였는데 일단 홍명희가 요즘 나이로 보면 철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한 10대의 젊은 젊은 청소년이었고 집안에는 어르신들이 너무 많아서 홍명희가 아들을 마냥 귀여워하기 어려워서 집안의 다른 아이와 홍기문이 싸우면 무조건 홍기문을 혼냈고 홍명희 방에 알록달록한 책이 많아 홍기문이 들어가면 뒷덜미를 잡아서 끌어내곤 했다고 한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조부 홍범식이 금산군수로 재직하다가 목을 매어 자결했고 이 사건은 홍기문에게 큰 충격을 주어 민족주의 의식을 각성시켰다. 홍명희도 이미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한 참이었고 일가는 서울에서 괴산으로 낙향하게 된다. 홍명희는 삼년상이 끝난 1912년 가을에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고 홍기문은 아버지와 달리 신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증조부 홍승목의 지도 하에 집에서 한문과 역사를 배웠다. 1918년에 홍명희가 귀국하면서 일본어로 된 많은 신식 책을 가지고 왔는데 홍기문이 일본어도 모르면서 이를 자꾸 만지작거리자 홍명희는 일본말도 모르면서 왜 보냐고 짐짓 꾸짖으면서도 홍기문이 학문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기뻐했다고 한다.

한동안 아버지 밑에서 신학문을 배우던 홍기문 일가에 또 시련이 찾아오는 1919년 3월 19일, 홍명희가 괴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것이다. 홍기문은 당시 독립운동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은 있었으나 집안 종손이라는 이유로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지당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홍씨 가문은 이미 가세가 기울고 있었는데 3.1운동으로 홍명희 뿐만 아니라 집안 장정들이 죄다 투옥되면서 그해 5월에 괴산 인산리에 있던 홍씨 대저택을 처분하고 제월리의 묘막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 홍기문은 알퐁스 도데마지막 수업을 읽고 '국어는 그 나라의 열쇠다'라는 관념을 가지게 되어 국어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3년간 홍기문은 주시경, 김두봉의 책을 읽으며 국어연구에 매진했고 언어학 이론을 깨치기 위해서 일본어로 된 언어학 이론서들을 닳도록 읽으며 공부했다. 신교육을 받지 않아서 서너번을 읽어도 한페이지에서 반을 이해할락말락할 정도로 고생했지만 근성으로 공부를 계속했다. 한편 홍기문도 고조모 신씨가 현손을 보고 직고 싶다고 열살만 되면 장가를 보내라고 하도 성화여서 조혼을 할 뻔 했지만 경술국치, 3.1운동 등 큰 일들이 겹치면서 1920년 8월에야 덕수 이씨 집안의 이계순과 혼인했다.

1921년에 홍기문 일가는 다시 서울로 이주했으나 홍명희의 약간의 수입으로는 대가족을 먹여살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정인보, 이관용 등을 소개받아서 한학과 신학문을 두루 배우게 되었다. 이때 그는 장차 조선어연구총서를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2.2. 청년기[편집]


1922년 1월, 홍기문은 아마도 외가 친척 민영달의 후원을 얻어 중국 유학을 가게 되었다. 원래는 독일로 가려고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않아 만주어, 몽골어 등과 조선어를 비교해보기 위해서 중국 유학을 선택한 것인데 홍기문이 유학지로 선택한 상하이는 몽골어나 만주어를 배우기는 영 좋지 않은 곳이었고 기껏해야 항주 도서관에서 중국음운과 베트남, 광동, 복건의 한자음에 대한 자료를 수집한 것 외에는 큰 소득을 얻지 못했다.

처음에 홍기문은 중국에서 쑨원과 중국 국민당을 지지했으나 차차 마르크스주의에 빠져들어 쑨원조차도 '하찮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민영달이 사망하고 홍승목이 위독해지자 1924년에 홍기문은 학업을 중잔하고 귀국했다. 1925년 2월 10일에 홍승목이 사망했고 홍기문은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후원을 받아 일본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학력이 없었던 홍기문은 대학에 편입하는데 실패했고 거기에 이런저런 학생모임에만 불려다니고 도서관에서 책만 보다가 결국 소득없이 귀국했다. 홍기문이 니혼대학 졸업이니 뭐니하는 정보들이 있는데 전부 오류이며 홍기문은 자기소개에서도 일본에선 자습만 했다고 쓰고 있다.

한편 홍기문은 사회주의 단체인 일월회, 도쿄무산청년동맹회 등에 가입했고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26년 여름에 홍기문은 일시귀국을 결정했으나 다시 도쿄로 돌아오지 못하고 서울에 남는다. 이때 홍기문은 카프에도 가입했으며 정우회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보인다. 이후 홍기문은 1927년부터 조선공산당 기관지 조선지광에 여러 글을 발표했으며 당대에 이미 중견문인이었던 염상섭과 키배를 뜨기도 했다. 홍기문이 염상섭을 부르주아 문학 옹호론자라고 강하게 공격해서 염상섭은 홍기문이 자신의 글을 공정하게 파악하지않고 왜곡 중상했다면서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성깔이 있는게 보이는데 화요회 회원인 부친 홍명희에게도 편지를 보내서 그의 사상을 공격했다고 한다. 신간회 결성 때도 자치론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도 과감하게 제휴해야 한다는 일월회의 주장을 너무 공격적으로 옹호하다가 사회주의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홍양명은 홍기문이 "물의를 일으키게 한 것은 군의 가장 큰 오점의 하나이면 너무나 사려 없는 경거라고밖에 볼수 없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이관용도 홍기문이 너무 격정적이라고 꾸짖었다.

1927년 2월에 신간회가 결성되자 홍기문도 여기에 참여, 6월에 설립된 경성지회 간사가 되었다. 1927년 12월, 신간회 경성지회장 한용운이 사임함에 따라 유진태가 신임회장에, 홍기문이 선전부 상무간사가 되었다. 1929년 7월, 신간회 경성지회 중앙검사위원회 상무검사위원에 선출되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홍기문도 검거되었고 얼마 후 방면된다. 1931년 5월, 홍기문은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신간회는 해소파가 장악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소가 구체화되지 못하고 신간회 해체로 이어졌다. 홍기문은 개인은 아버지 홍명희가 참가하기도 한 신간회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이나 대세가 해소파라서 대세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28년에 조선일보에 입사했다가 병환으로 인해 1930년에 퇴사했다.

또한 이 시기에 조혼으로 결혼한 이계순을 버리고 신여성 심은숙과 연애결혼을 했고 아들 홍석부를 낳았다. 하지만 심은숙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김경재의 애인이었고 홍기문 역시 명문 양반가 사람이라서 상당히 큰 물의를 불러일으켰고 홍명희는 격노하여 홍기문과 심은숙이 집안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다. 이후 홍석태, 홍석형, 홍석중 등 4남 1녀를 낳았다. 허나 이계순은 이혼에 응하지 않아 호적정리는 끝내 하지 못했다.

2.3. 국어학자의 길[편집]


신간회 해소 이후 고문후유증을 앓고 있던 홍기문은 생활고까지 겹쳐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1932년 10월에도 조선 좌익계의 요주의 인물로 찍힌 탓에 적위대 사건으로 검거되었으나 불기소 처분되기도 했다. 지친 홍기문은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에 거리를 두고 다시 국어연구에 매진하였다. 1932년 말에는 조선일보에 다시 입사, 아버지의 <임꺽정> 연재를 도왔으며 1940년 8월,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일보가 폐간될때까지 재직했다. 이는 당시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가 조선일보가 서북파 기관지라는 말을 듣자 서울 사람인 홍명희, 홍기문을 끌어들여서 경영을 원활케 하려고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홍기문은 조선일보 편집부에서 일했으며 1935년 1월, 학예부장에 취임하여 1939년 3월까지 재임했다. 1938년 3월에는 사업부장도 겸하였고 이 직위는 1940년 8월까지 계속 맡았다. 또한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사설을 집필하였고 문자보급운동에 참여, 한글교재 편찬을 주도했다. 또한 1938년 조선 향토문화 조사사업에 조사위원으로 참가하는 등 조선의 민족문화 보전에 앞장섰다. 하지만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일제의 탄압이 거세어져 신문기자 활동에 갖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하였고 홍기문은 방응모의 조광사에 남길 거부하였다. 이미 그는 일제의 탄압을 의식하여 1939년 말에 서울에서 경기도 양주군 창동으로 이사한 후였다. 그는 퇴직금 3100원을 받았으며 이후로도 방응모로부터 도움을 받긴 했으나 일제 말기에 몹시도 궁핍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1939년에는 장녀 홍석분, 1941년에는 막내 홍석중이 태어났고 1944년에는 막내딸 홍석운이 태어났다. 무려 8식구가 북닥거리는데 사는 곳은 낡은 초가집이었고 홍기문은 이때 몹시도 마르고 창백하고 기운 없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매일 창동에서 전차를 타고 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예비검속 때마다 검거되는 등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사회적 접촉도 줄이고 사실상 은둔하게 된다.

그럼에도 홍기문은 정음발달사 집필을 시작했으며 1941년에 완성했으나 1946년에야 발표하게 된다. 이때 홍기문은 훈민정음 반포가 세종 28년이라는 주류설에 대해서 이는 훈민정음 해례본 완성일이라고 보고 훈민정음은 세종 25년에 창제되어 즉시 발표된 것이 맞다는 수정주의를 내놓았는데 홍기문이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자 이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전형필이 먼저 사버렸고 가까스로 모사본을 구해서 이것을 바탕으로 정음발달사를 썼다고 한다. 또한 역사 연구도 하여서 고려사 및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공부했다. 당시 경성제대에서 조선왕조실록 영인본을 만들어낸 상황이라서 홍기문도 이왕직도서관 산하 창덕궁 장서각을 들락이며 공부했다.

2.4. 해방 이후[편집]


그러다가 1945년 8.15 해방이 이루어지자 8월 22일, 건준 중앙위원회 선전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홍기문은 불참했고 9월 4일 건준 1회 확대중앙위원회에서 홍기문은 제외되었다. 당시 홍기문은 순국 의열사 봉공회, 임시정부 영수 환국 전국 환영회, 우국동지회, 이준 열사 추념준비회, 조소 문화협회, 민족문화연구소, 에스페란토 조선학회, 사서연역회 등 온갖 단체에 초빙되었다. 이때 홍기문은 사서연역회 위원장으로 조선왕조실록 대량 간행에 참여했으며 1946년 2월에 국어문화보급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언어학회 발기인이 되었으며 1947년 3월, 이극로 등과 함께 조선방언학회도 세웠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인수하여 세운 서울신문 편집국장, 고문, 주필 등도 역임했다.

하지만 홍기문은 적극적으로 정치적 활동하기보다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교와 대학원 강사로 일하면서생계를 꾸리는 데 더 집중하였다. 그리고 다시 서울 종로구 경운동으로 이사하였고 1948년에 돈암동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국대안 파동에 실망하면서 1947년부터 김일성대학 조선어문학과 강의를 하였다. 김두봉이 총장이고 백남운 등이 적극 초빙을 하니 홍기문은 김일성대가 연구를 하기 더 좋은 환경이라고 여겼는 듯 하며 1948년 4월, 홍명희가 남북연석회의 참석 차 북에 갔다가 잔류하자 그 자신도 월북했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1948년 5월에 월북했다고 하는데 1977년에 홍기문이 조선신보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1948년 8월 중순에 월북했다고 한다.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2.5. 북한에서의 삶[편집]


월북 직후 1949년 김일성대 부교수, 1959년에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이 되었으며 1963년 사회과학원 부원장에 임명, 죽을 때까지 재임하였다. 1971년 5월, 박문규 장의위원, 1974년 1월, 박열 장의위원장,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 1977년 6월, 강장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상설회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 9월 21일,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허정숙과 함께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으로 재선되었다.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1년, 리조실록 번역의 공을 인정받아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다시 상설회의 부의장에 재선되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 1985년 2월, 량광일 장의위원, 1989년 11월, 최덕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연구 활동을 계속했으며 북한에서 역사학자로서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조선대백과사전 24권 홍기문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일찍부터 민족어를 사랑하고 고수발전시키려는 지향이 컸으며 조선력사를 귀중히 여겼던 그는 8.15 전에 벌써 론문 <리두연구>를 발표하였고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력사를 소개하는 글 <조선력사>를 <서울신보>에 련재하였다. 광복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의 한문교과서들을 집필하는 한편 모국어연구를 더욱 심화시켜 <조선어문법연구>(1946년), <정음발달사>(1947년), <향가해석>(1956년), <조선고가요집>(1958년), <조선어사연구>(1959년), <조선사화연구>(1960년), <조선력사문법>(1962년) 등 가치있는 연구론문들과 력사일화 <락랑벌의 사냥>(1964년)을 발표하였으며 <대동야승>(1권, 1957년)을 비롯한 민족고전도서들을 여러권 번역하였다. 과학자로서의 그의 실력과 공적은 방대한 규모의 <리조실록>과 <팔만대장경> 번역에서 발휘되였다, <김일성훈장>(1973년)과 조국통일상(1990년), 국기훈장 제1급을 비롯한 많은 훈장과 메달들을 받았다. 원사(1962년), 교수(1961년), 박사(1961년)이다. 묘는 애국렬사릉에 있다.


1992년 7월 3일에 사망했으며 사후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여담[편집]


  • 말년에 남한의 강영주 교수가 홍명희의 글과 임꺽정 관련 자료를 모아서 <벽초 홍명희 <임꺽정>의 재조명>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북한까지 흘러들어가 홍기문의 손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에 홍기문이 책을 쓰다듬으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 가르친 제자 중에는 김길선이 있다.

  • 아들로는 홍석형이 있는데, 비서국 비서 겸 계획재정부장이 되고서 북한의 경제 관련 정책 관련해서 열심히 활약을 하려고 했을때 갑자기 직무조정을 이유로 모든 직책에서 해임당한뒤로 현재까지도 행방이 불분명하다.

5. 참고문헌[편집]


  • 강영주 (2004). [특별연구]국학자 홍기문 연구. 역사비평.
  • 강영주 (2010). 국학자 홍기문 연구 2. 역사비평.
  • 강영주 (2011). 국학자 홍기문 연구 3. 역사비평.
  • 강영주 (2013). 국학자 홍기문 연구 4. 역사비평.
  • 조선대백과 사전 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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