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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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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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洪蘭坡


파일:/storage/upload/2009/06/11/63419820_1244334209.jpg

본명
홍영후(洪永厚)[1]
자 / 호
석조(錫祚) / 난파(蘭坡)
본관
남양 홍씨 토홍계[2]
출생
1897년 4월 10일[3]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
(현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4]
사망
1941년 8월 30일 (향년 44세)
경기도 경성부 휘경정 경성요양원
(現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삼육서울병원)
학력
사립 영신소학교 (졸업)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 (중학부 / 졸업)
조선정악전습소 (성악과 2회 / 졸업)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 / 졸업)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2학년 / 중퇴)
관립 도쿄음악학교 (예과 / 수료)
도쿄고등음악학원 (본과[5] / 졸업)
셔우드 음악학교 (연극과 / 졸업)
종교
기독교(개신교, 장로회)

1. 개요
2. 작품
2.1. 동요
2.2. 가곡
3. 생애
4. 친일 행적 논란
5.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

일제강점기에 널리 애창되었던 가곡 봉선화와 동요 고향의 봄의 작곡가이기도 하며, 일제강점기 하의 한국 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다만 후술할 친일 논란 때문에 그 명과 암이 뚜렷하게 갈리는 인물.

2. 작품[편집]



2.1. 동요[편집]




2.2. 가곡[편집]


  • 금강에 살으리랏다
  • 봄처녀
  • 봉선화
  • 성불사의 밤

3. 생애[편집]


1897년 4월 10일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現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아버지 홍준(洪埻, 1858. 9. 11 ~ 1917. 2. 8)과 어머니 전주 이씨(1858. 8. 27 ~ 1908. 3. 22) 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홍준은 1900년 5월 20일 통신사 전화과 주사(通信司電話課主事)에 임명되었다가 이튿날인 5월 21일 의원면직했다.

홍난파는 3세 때 상경해 한성부 서서 황화방 군기시계 대정동(現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6]에 거주하면서 새문안교회에 출석했고, 어릴 적부터 교회음악을 비롯한 서양음악에 입문할 수 있었다. 소년 시절에는 집안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사립 영신소학교에 다녔다. 14살 되던 1910년 9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 중학부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14년 3월 졸업했다. 그 사이 1912년부터는 근대 이후에 설립된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성악과에 입학해 1913년 4월 2회로 졸업했고, 1913년 다시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에 입학해 1년 동안 김인식(金仁湜)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1914년 졸업 후 이듬해인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에 임용되었다.

이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1년간 수학했으나 이내 중퇴하고 1918년 4월 관립 도쿄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해 이듬해인 1919년 3월 수료했다. 1919년 2월부터 문학, 미술, 음악의 3가지 분야를 다루는 잡지 『삼광(三光)』을 창간해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고, 1922년 9월에는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하고 연악회의 기관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하는 등 문예활동에 주력했다.

1926년 3월 도쿄고등음악학원(現 쿠니타치음악대학) 선과(選科)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해 본과에 진학했고, 1929년 3월 졸업했다. 귀국 후 그해 9월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교유(敎諭)로 채용되었다가 1931년 9월 미국 시카고에 있던 셔우드 음악학교 연극과에 입학했고, 그해 12월 흥사단에 가입했다. 1932년 6월 셔우드 음악학교 졸업 후 귀국해 1933년 4월 경성보육학교 음악과 주임 교유로 부임했고, 1935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출강하기도 했다.

그러던 1937년, 미국 유학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고, 72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전향 협박을 받았다. 결국 건강악화 끝에 그는 공개적으로 전향서를 쓰고 기소유예로 풀려나게 된다. 이듬해 6월 18일, 홍난파는 직전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던 이묘묵(李卯默)을 비롯하여 정영도(鄭英道)·김여제(金與濟)·김여식(金麗植)·전영택(田榮澤)·류형기(柳瀅基)·이명혁(李明赫)·박태화(朴泰華)·차상달(車相達)·하경덕(河敬德)·갈홍기·현제명 등 12인의 흥사단원과 김기승(金基昇)·김노겸(金魯謙)·노진설·이기윤(李基潤)·최봉칙(崔鳳則) 등 5인의 동우회원 등 17인과 함께 공식적으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단체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에 가입하였으며, 8월 18일 위 사람들과 함께 흥사단에서 출단 처분을 받았다.#

또한 '모리카와 준(森川潤)'으로 창씨개명하고 일제에 아첨하는 음악을 여럿 작곡했다.[7] 1941년 1월 11일 친일단체 조선음악협회의 결성대회에서 평의원에 선출되었고, 1월 29일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1941년 8월 30일 경기도 경성부 휘경정 경성요양원(現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삼육서울병원)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별세했다.


4. 친일 행적 논란[편집]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2009년 11월 그의 행적에 대해 수록했으나, 대통령 직속 산하기관인 친일진상규명위에서는 '홍난파가 자의적으로 했는지 타의적으로 했는지 좀 더 따져야 한다.'면서 보류처리를 했다. 하지만 2010년 11월 홍난파의 후손이 '홍난파를 친일인사 명단에서 제외해달라'며 낸 소송을 돌연 취하함에 따라, 결국 등재되었다.

이와 같이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 왈가왈부가 있다. 보수적인 양악계에서는 "친일을 하지 않았으면 작품 활동은 물론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며 옹호론을 펼치기도 한다.[8] 물론 이에 대해선 생활고와 각종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굽히지 않은 예술가들을 반례로 들며 반박하는 의견 또한 강하다.

이러한 논란과는 별개로 홍난파의 친일 행적에 대해선 이미 1993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파 99인>과 같은 여러 친일파 고발 책자에서 음악가 대표로 크게 소개되었기에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5. 여담[편집]


친일 논란 외에도 지나치게 서양음악에 대하여 빠져있었다고 지적되곤 한다. 특히 조선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비교하며 쓴 논설에서는, 전통음악을 구닥다리라고 찍어누르고 서양음악이 우월하다고 자뻑하는 내용이 있을 정도.1936년 신동아 칼럼 이 때문에 국악인들 가운데에는 홍난파의 친일 행위와 상관없이 "사대주의 성향의 음악가였다"고 비판적으로 평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홍난파의 작품들에는 그 곡이 친일용 곡이었던 아니건 간에 대부분 (일본을 거쳐 걸러 들어온) 서양음악의 요소가 너무 짙게 배어 있는데, 어느 정도 민요 등 전통음악 요소를 접붙이기 해보려고 했던 안기영이나 채동선, 김성태, 김순남 등의 작품들과 비교해도 그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9]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도 있다. 홍난파는 윤치호에게 250원이나 지원을 받았음에도 또 편지로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더 달라"고 부탁했고, 윤치호는 "내 아들이라도 그런 요구는 승낙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자 홍난파는 편지로 "조선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들과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정당한 약탈자들이다"라고 강변했다. 또한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올 거다"라는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이때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공부하라고 돈을 보내줬더니 바이올린이나 켜고 있으면서, 돈을 더 보내주지 않는다고 나를 욕하는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홍난파를 씹었다. 단 윤치호는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다 싫어했다.

홍옥임(洪玉姙, ? ~ 1931. 4. 8)이라는 조카[10]가 있었는데, 옥임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재학 중이던 1931년 4월 8일 친구이자 동성연애의 연인이었던 김용주(金龍珠, ? ~ 1931. 4. 8)와 동반자살을 하여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바 있다.[11] 옥임과 용주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훗날 콩칠팔 새삼륙이라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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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흉상은 1968년에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번지 남산 KBS 사옥 앞에 세워졌다가 1976년에 사옥이 영등포구 여의도동으로 이전할 때 현재의 KBS홀 자리 맞은편으로 같이 옮겨졌으나 2003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홍난파의 친일 경력을 문제삼자 KBS 측에서 자진 철수하여 2004년부터 종로구 홍파동 2-16번지에 있는 홍난파가옥[12]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87년 독립기념관 광복의 동산에 세워진 '홍난파 선생과 감나무'란 비석도 있었으나, 2015년에 같은 이유로 철거되어 단죄문이 설치됐다.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에 '난파음악관'이 있다.

또한 그가 만든 곡이지만 잘 알려져있지 않은 <피리>는 옛 부산 도시철도의 하행선 진입 음악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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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양홍씨세보 3권 143쪽에는 일명으로 洪厚가 기재되어 있다.[2]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24세 후(厚) 항렬.[3] 남양홍씨세보 3권 143쪽에는 1898년 3월 19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4] 인근의 남양리·시리·안석리와 함께 남양 홍씨 집성촌이다.[5] 바이올린 전공[6] 지금의 예원학교 자리[7] 주로 문학인 이광수 등이 작사한 것을 작곡해 지휘·연주하거나, 방송국에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지휘, 연주했다거나 하는것 등이었다.[8] 홍난파 뿐만 아니라 조두남, 안익태, 현제명, 이흥렬, 김성태, 김동진, 윤극영 등을 일제강점기의 음악가들 상당수가 친일행위를 했다. 90년대 월간 <객석>이란 클래식 음악잡지에서는 이들을 옹호하면서 "채동선은 부자라서 친일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9] 그리고 창가 등을 위시한 일본음악의 영향력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는데, 가령 가장 유명한 노래 중 하나인 고향의 봄의 선율 구조는 도(C) 음을 기음으로 하는 요나누키 음계로 구성되어 있다.[10] 형 홍석후(洪錫厚, 1883. 4. 9 ~ 1940. 2. 17)의 장녀. 홍석후는 에비슨의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1기생 7명 중 하나인데, 박서양, 김마리아(1번)의 숙부인 김필순이 동기이다. 그리고, 그 에비슨은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회장한테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를 해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다. 사실 한반도의 근대 방역 전문가가 에비슨이었고, 스페인 독감을 제대로 경험했을 유일한이 할 선택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면, 여기의 인연도 좀 더 빠를 일. 여담으로 유일한은 위의 윤치호와도 인연이 있다.[11]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 영등포리(現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영등포역에서 부천군 소사면 오류리(現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 오류동역 방면으로 2km 120m 정도 떨어진 경인선 철로에서 경기도 인천부를 떠나 영등포역으로 들어오던 제428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한다. 이때 동아일보 기사에 나온 묘사가 진국인데 "두 여인의 몸은 쇳덩이에 부딪혀 갈가리 찢겨나갔지만 두 손만은 꼭 잡고 있었다."라고 썼다.[12] 해당 집터가 항일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자택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