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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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 싱어송라이터이자 방송인.
2. 생애[편집]
1958년 12월 7일에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참고로 부모는 다 이북 출신이다. 양친만 피난 와서, 친척들과 전혀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충암고등학교를 졸업 후 건국대학교 농대에 재학 중 2학년때 팀 '옥슨79'를 창설하면서 멤버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1980년에는 건국대학교 캠퍼스 밴드 '옥슨80'을 결성하여 리더를 맡게 되었는데, 같은 해 TBC 젊은이의 가요제에 불놀이야[2] 라는 곡으로 출전, 금상을 수상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예능이나 방송에서 종합예술인이란 타이틀로 나오면서 개그스러운 모습때문에 가려지기 쉽지만 대단한 가창력을 갖춘 가수이자 작곡가이기도 하다. 한국 록 음악에서 절대 빼 놓을수 없는 곡인 불놀이야를 작곡한 것은 물론이며, 대한민국 최초의 랩 음악인 김삿갓[3] 을 비롯해 가난한 연인들의 기도, 내 사랑 투유, 구인광고등 시대를 거쳐간 곡들이 모두 그의 작품들이다.
1984년, 홍서범의 전역 후 2집을 발표한 옥슨80은 '가난한 연인들의 기도'와 '걷잡을 수 없어요' 등으로 KBS 음악대상 '가사대상'에서 그룹 부문을 수상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3집(1985년)의 '당신은 왜'가 공안정국에 연루되며[4] 빛을 보지 못했고, 결국 1987년 밴드는 해체하게 됐다.
1989년 솔로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솔로 가수로 데뷔한 뒤에는 '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요'가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구인광고, 한국 최초의 랩송인 김삿갓을#발표하며 화제를 모았다. 한국 힙합가수가 퓰리처상을 받는다면 홍서범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나이트클럽에서 Run D.M.C의 곡을 듣고 이거다 싶어서 만든 곡이었다고 한다.[5]
90년대 초반 '구인광고'를 부르던 시절 예능에 출연, 각종 콩트에서 군대를 갓 전역한 FM군인 캐릭터를 실감나게 연기한 적이 있는데 이 당시에 히트친 유행어가 바로 "뭘 보나? 경제를 살리자는데?".
그러던 중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대학가요제 출신인 조갑경과 함께 1990년에 듀엣으로 발표한 '내 사랑 투유.' 사실 이 곡은 원래 장필순과의 듀엣곡으로 녹음까지 마친 곡이었으나 조갑경에게 반한 홍서범이 조갑경과 곡을 재녹음하여 발표한 것이라고 한다.
조갑경과 결혼 후에는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6] 과 TV 방송에 출연하였다. 특히, 홍서범은 다재다능한 예능 감각으로 인하여[7] '종합예술인'이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했다.
학업에도 몰두하여 2005년 "《7080콘서트》의 의미구조와 신화연구 : 문화의 소비유형 패턴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지도교수는 신문방송학과 백선기 교수. 이 논문에는 7080 노래들의 신화적 해석도 들어가 있다. 이 논문 때문에 홍서범은 다른 교수들을 제치고 성균관대 학술정보관 홈페이지 인기검색어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3. 결혼[편집]
후배 가수인 조갑경 '내사랑 투유'를 발매한 이후 1994년 진짜로 결혼에 골인했고 지금은 연예인 부부로 유명해지게 된다. 더욱이 홍서범은 결혼 당시 35세 노총각이었고 조갑경과의 나이차도 9살이나 나서 여러모로 화제가 된 결혼이었다.
실제로도 홍서범은 조갑경을 보자마자 미모에 반해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시작했지만 조갑경이 몇차례 거절했었다고 한다. 결혼 전,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해서 열애설을 부정하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는데 이때 조갑경 말이 "저도 눈이 있는데 이런 아저씨랑 결혼하겠어요?" 그런데 바로 옆에서 듣고있던 홍서범은 시종일관 흐뭇한 미소를 짓고있어서 보는 사람들을 모두 헷갈리게 만들었다. 결혼 발표 후에 한 인터뷰에선 이때 이미 거의 결혼을 허락한거나 마찬가지 상태였다고. 즉, 자길 디스하는 소릴 듣고도 "우리 자기 연기 잘하네"라며 흐뭇해 했던 것이라고...
2014년에는 축구부로 활동했던 큰아들 홍석준은 축구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건국대학교에 입학하여 동문이 되었다. 현재 부천 FC 1995에 입단해 2군에서 뛰고 있다. 막내딸 홍석주는 박남정의 딸이자 STAYC 멤버로 알려진 시은과 함께 고양예고를 졸업했다고 한다.
4. 학력[편집]
- 1971년 서울덕수초등학교 졸업[8]
- 1974년 서울양정중학교(60회) 졸업
- 1977년 충암고등학교(6회) 졸업[9]
- 1984년 건국대학교 농축산학 학사
- 1988년 건국대학교 대학원 농업공학 석사
- 2006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영상학 석사
5. 경력[편집]
6. 출연 작품[편집]
6.1. 방송[편집]
6.2. 라디오[편집]
6.3. 영화[편집]
6.4. CF[편집]
- 롯데칠성음료 홍대추 (홍록기, 홍진경과 함께 출연)
- 롯데제과 포동포동 - 홍서범편 (1993)
- 농심 조청유과
- 국제약품 고프레 - 홍서범부부 (1994)
- 비락 마파밥짜장밥 -밥통편 (1995)
- 대추음료 홍대추 (1996)
- 데이콤 국제전화 002 (1998)
- LG유플러스 국제전화 002 (전원주와 함께 출연)
- LG생활건강 랑데뷰알파샴푸
- 한국가스안전공사
- 동성제약 세븐에이트
- 태화 고무장갑
- 두크펌프 (조갑경과 함께 출연)
7. 음반 활동[편집]
7.1. 옥슨80[편집]
그룹 활동에 대한 내용은 옥슨80 문서를 참조.
7.2. 정규[편집]
7.3. 비정규[편집]
7.4. 듀엣[편집]
조갑경 2집(내사랑 투유)(1990)
7.5. 참여[편집]
8. 공연[편집]
9.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편집]
복면가왕 123차 경연에서 오늘 가왕석까지 교통 상황 원활합니다 강변북로 라는 가명으로 참가해서 3라운드까지 진출했다. 2라운드까지 자신의 정체를 판정단들에게 완벽하게 숨겼으며 3라운드에서 아내의 대표곡 <바보같은 미소>를 선곡하여 훈훈한 반전을 주었다.
10. 여담[편집]
- 옥슨 밴드그룹은 다른 학교들의 캠퍼스 밴드와 마찬가지로 후배들이 계속 이어서 활동하는 밴드다. 11기에 해당하는 옥슨89가 1989년 MBC 강변가요제에 참가해 '청개구리'라는 곡으로 금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밴드를 이끈 사람이 마지막 승부의 주제곡을 부른 김민교다.[11]
- 애니메이션 주제가도 불렀는데 바로 사무라이 자이언츠 더빙 방영판 주제가로 창작곡이었다. 헌데, 왜색이 너무 강해 갑자기 끝나버려 묻혀졌고 같이 방영하던 내일의 죠는 김종서가 부른 번안곡 주제가가 지금도 추억의 애니 노래로 나오는 거랑 달리 대조적이다.
- 방송활동 뿐 아니라 CM경력도 여러번 되는데 그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라면 데이콤(LG유플러스 전신) 국제전화 관련 광고. 요금환급제 관련인데 돈 하면 생각되는게 세종대왕이라서... 순수 곤룡포를 입고 임금님 코스프레를 하는데 방정맞은 목소리로 CM송을 부르는게 압박이다.
공공이↗를 누르시면↗ 누른만큼 돌려드려요
- 장녀인 석희에게 애인이 생겼는데 자신에게는 무뚝뚝한 석희가 애인에게는 애교를 부리는 등 다른 모습을 보이자 서운해 했다.
- 이수만을 "수만이 형"이라고 부른다. 나이 차이가 큰 것도 아니고 친분도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 2006년, 대한 남성과학회와 한국릴리는 홍서범, 조갑경 부부는 국내 첫 발기부전 홍보대사에 위촉되었다. 그동안 미국에서는 영화배우 폴 뉴먼, 브라질의 축구스타 펠레등이 발기부전 치료제의 홍보대사에 나선적이 있으나 국내에서는 처음이다.국내 첫 발기부전 인식전환 홍보대사에 홍서범, 조갑경 부부 선정
- 2016년 EBS 시대공감
저 하늘로 떠난 불꽃을 보며 힘껏 소리치며 우리 소원 빌어봐”
- 곡 ‘불놀이야’ 중
현재까지 모교의 응원가로 불리는 이 노래는 80년대 청춘들의 심장에 정확히 불을 지폈다. 시대적 상황과 맞물린 가사가 인기의 첫 번째 이유였지만, 당시 캠퍼스 그룹사운드에선 쉽게 발견할 수 없는 펑키(funky)함을 전면에 내세우며 청자들을 자극한 것이 한몫을 했다. 또한 뮤지션 홍서범의 작곡 능력이 드러난 첫 결과물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는데, 이후 그는 옥슨80의 1집(1981)에서 전곡을 창작하며 그 재능을 꽃피우게 된다. ‘불놀이야’의 연장선에 있는 곡 ‘그대’나,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와 같은 작풍의 ‘날개’에서 발견되는 음악적 정체성은 현재 대중이 인식하고 있는 홍서범이란 인물과는 확연히 다른 로커로서의 DNA였다.
- EBS 시대공감
11. 관련 문서[편집]
[1] 석사 학위 논문 : <7080콘서트>의 의미구조와 신화연구 : 문화의 소비유형 패턴을 중심으로.[2] 홍서범은 "당시 부모님들은 공부를 안 하고 기타치고 노래하면 혼을 내서, 대학생들이 몰래 노래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가요제 대상을 수상하면서 놀란 부모님들이 노래를 부르라 허락했다"고 했다.[3] 참고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보다 3년 먼저 출시되었다. 데뷔 후 홍서범의 라디오에 출연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홍서범에게 이 노래를 듣고 랩을 시작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초의 한국어 랩을 아시나요? 김완선이 대한민국 최초로 '그건 너'(이장희 노래 리메이크 트랙)라는 비타이틀 트랙을 랩 노래 부분 가사로 열창하였던 이후로는 처음인 데다가 단순히 음이 없고 말이 빠른 수준이 아니라 원시적이지만 라임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곡이다. 초기 힙합 음악처럼 디스코 펑크에 빠른 랩을 얹은 형식을 한국화한 초창기 힙합 음악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발매 당시에는 한국 가요계에 힙합은 물론 랩이란 개념 자체도 없던 시절이라 발매하자마자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홍서범이 심의실에 가서 이유를 물었더니 그 이유가 음정 불안이었다고.[4] 홍서범이 건대항쟁 현장을 격려방문하고 귀가하는 길에 탄 택시에서 전두환 정권의 학생운동 유혈진압을 비판했는데, 재수없게도 택시기사가 뼛속까지 극우보수 성향이어서 홍서범을 왕십리경찰서 대공과에 넘겼다고 한다.[5] 1년 전인 1988년 칠수와 만수의 OST에 수록된 김수철의 '무엇이 변했나'에도 랩이 들어가있긴 하지만, 빠른 템포의 곡에 랩이 짤막하게 들어가 있는 형태라 랩송이라 칭하기에는 애매했다. 김수철이 최초의 랩을 시도한 것은 맞지만 '랩송'으로 온전한 구성을 보여준건 홍서범의 김삿갓이 최초.[6] KBS 라디오 프로그램 홍서범의 뮤직쇼를 진행하였고, 2003년에는 SBS로 옮겨 라디오 프로그램 홍방불패 DJ를 진행하였다. 2년뒤에는 또다시 WBS로 옮겨 라디오 홍서범의 가요 TOP 10 DJ를 진행하였다.[7] 심지어 일요일은 즐거워의 캠퍼스 영상가요는 비공식 영상가요 대학 PV의 감독 전담이었다. 시작전에 대놓고 'Directed by Hong-Seo-Pum'이라고 매번 나온다.[8] 임백천, 주병진과 동기다. 임백천 1살 연상[9] 김영식 육군 대장과 동기다. 제1야전군사령관 취임식에 홍서범이 참석했다.# 2년후배가 무려 제20대 대통령 윤석열.[10] 현재까지 발기부전 홍보대사를 맡고 잇는 것 같다. 여담 참조.[11] 김민교가 옥슨 밴드 가입테스트를 볼 때 홍서범은 "건국대학교 제2의 교가인 불놀이야를 불러보라"고 주문했다고 한다.[12] 홍서범 78학번, 김성갑 81학번[13] 홍서범은 충암고등학교, 주병진은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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