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흔/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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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산 베어스 1기(1999-2008)
2. 롯데 자이언츠 시절(2009-2012)
2.1. 2009 시즌
2.3. 2011 시즌
2.4. 2012 시즌
2.5. 롯데 시절 총평
3. 두산 베어스 2기(2013-2016)
4. 국가대표 경력
5. 은퇴식과 은퇴 후



1. 두산 베어스 1기(1999-2008)[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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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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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의 주장이였던 2006년~2007년 당시

서울공릉초,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 체육학과(1995학번) 졸업 시즌이던 1998년에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제3의 포수로서 금메달을 땄다.[1] 이듬해인 1999년 1차 지명을 받아 두산 베어스에서 데뷔, 그 해 역대 포수로서는 두 번째로 신인왕을 수상하며[2] 김태형, 진갑용 등과의 주전경쟁에서 승리, 2007시즌까지 두산의 주전 포수로 자리잡으며 2008시즌까지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포수지만 준수한 타격으로 대표적인 공격형 포수로 꼽혔다. 또한 평균 이상의 수비력과 파이팅 넘치는 모습, 그리고 잘생긴 얼굴로 인해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2003년 부상을 당하며 포수 수비 능력이 떨어지기 시작, 2003, 2004 시즌에는 지명타자 출전 빈도가 상대적으로 높았고 동시에 김동주 역시 그 시즌에 잔부상이 있어서 지명타자를 두 선수가 번갈아 소화하였다. 자연스럽게 포수 내구력 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랐으나 그래도 2006년까지는 수비 능력에 아주 큰 금이 가지는 않았고, 정상적으로 주전 포수를 소화했다. 이 과정에서 2004년에는 정규 시즌 133경기 전 경기에 출장하여 165안타로 최다안타 타이틀을 수상, 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다. [3] 2006년 올스타전에서 미스터 올스타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4] 2007년 개막전을 포함하여 시즌 초반까지는 채상병과 번갈아가면서 포수를 소화를 하였으나, 2007년 초 김주찬의 타구가 영 좋지 않은 곳에 맞아 고간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주전으로 출전하지 못하게 되고,[5]# 이때 이대호에게 도루를 허용할 정도로 포수능력이 떨어지고[6][7] 그 이후 데드암 증세가 온 것으로 추측된다. 정상적으로 2루에 송구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8] 결국 채상병에게 밀려 주전 포수 자리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지명타자로 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김경문 감독은 포수로서의 홍성흔은 부상 이후 예전의 기량을 되찾지 못한다고 판단, 포수에서 지명타자1루수로 전향하여 타격능력을 살리겠다고 말했으나[9] 포수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홍성흔이 이에 반발한다.[10] 이후 트레이드설까지 제기되었고[11] 행선지를 놓고 온갖 설이 나돌았다. 이 때 꽤 진지하게 홍성흔을 원하는 팀이 나왔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두산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다는 보도[12]가 나오면서 당시 야구팬들 사이에는 '염치가 없고 뻔뻔하다'의 동의어로 '두산스럽다.'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결국 홍성흔 스스로 지명타자로 전환하여 3할 3푼 8홈런 63타점이라는 뛰어난 타격을 보이며 두산이 2위자리에 오르는데 큰 보탬이 되었다. 그것도 초반에 훈련을 제대로 못해 거의 한 달을 날렸음에도 말이다. 시즌 중반에 채상병이 부상으로 잠시 이탈했을 때 몇 경기 잠깐 포수 마스크를 쓴 적도 있었지만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13]

그 뒤론 예전처럼 포수로 복귀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한 적이 없었는데, 아마 부상으로 인해 약해진 허벅지와 그 동안의 공백으로 인해 더이상 실전에서 포수를 보긴 어렵다고 본인도 느낀 듯하다. 근데 포수를 포기한 이후 타자로서의 성적을 보면 오히려 포수자리에 대한 미련을 좀 더 빨리 버렸더라면 두산 타선은 정말 후덜덜해졌을 듯도 하다. 2009년이나 2010년 기준의 김현수-김동주-홍성흔이라면.[14] 하지만 어쩌면 이후 포텐이 터져버린 최준석이나 이성열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신인 시절 주전이었던 김태형을 은퇴시키고 진갑용삼성 라이온즈로 보냈으며 이도형마저 한화 이글스로 보낸 장본인이다. 자기도 결국 롯데 자이언츠로 갔다 만약 진갑용과 이도형이 두산의 주전 포수로 자리잡았더라면 프로야구판의 전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15]. 다만 최기문은 홍성흔과 관련이 없다. 최기문은 1998 시즌 종료 뒤에 차명주와 트레이드로 이적했는데, 이때는 홍성흔이 입단하기 전. 물론 당시에도 포수 자원이 넘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적했다고 볼 수 있다. 최기문을 밀어냈더니 홍성흔이 나타났다

이후 2015년 1월, 딸하고 출연한 해피투게더에서 블래스 신드롬 때문에 포수를 관두고 타자로 전향했었다고 밝혔다. #


2. 롯데 자이언츠 시절(2009-2012)[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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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시즌이 끝난 후 FA를 선언한 후 가장 마지막에 롯데 자이언츠와 4년간 최대 30억원, 두산 시절보다 50% 인상된 연봉 2억 7,900만 원에 계약했다.[16] 두산에선 '당연히 남을 줄 알았는데 당황스럽다' 라고 말했지만 홍성흔과의 계약 문제로 인한 기사가 없었던 점을 보면 잡을 팀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싸게 계약하려다 놓쳐버렸다. [17] 또 다른 프랜차이즈 선수 안경현과 더불어 홍성흔마저 사라지자 분노한 두산팬들이 대거 달까(김경문 안티)로 돌아섰다. 안 그래도 김경문 감독과의 불화설을 비롯하여 각종 음모론이 나돌던 판에 의혹을 증폭시킬만한 사태가 터진 셈. 물론 두산 베어스 갤러리에서는 2011년 현재 홍성흔 김경문 모두 배신의 아이콘으로 등극하여 둘 다 까고 있다.[18] 그리고 또 하나는 홍성흔이 팀 분위기메이커여서 선수들이 김경문보다 홍성흔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김경문이 내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롯데에서는 합류 전부터 팬들이 응원가까지 새로 만들어주며[19] 큰 환영을 받았다.(당시 응원가 #)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김주찬임을 감안할 때 홍성흔 이적의 일등공신은 김주찬일지도...(응?)그리고 둘은 롯데를 떠날때도 같이 떠났다.

2.1. 2009 시즌[편집]


09 시즌 롯데에서의 시작은 생각한 것처럼 뛰어난 활약을 못해줬다. 그 원인은 제리 로이스터의 노피어 정신에 따른 큰 궤적의 홈런 스윙시도. 원래 똑딱거리던 양반을 보고 큰 스윙을 하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20] 거기다 잘 맞은 타구는 계속 야수 정면으로 날아가는 등 불운이 겹쳐셔 마음이 급해지자 근성있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등으로 어떻게든 커버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나친 근성플레이로 허벅지에 부상을 당한 이후에 잠시 엔트리에서 빠져야 했다.

그러나 다시 복귀한 이후로는 다시 예전처럼 똑딱거리면서 어느 사이엔가 다시 3할 타율을 찍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2009년 8월에는 타율 1위까지 올라왔다. 롯빠들은 이번 FA는 대성공이라면서 좋아하고 있다. 현재까지 KBO 역사상 가장 성공한 타자 FA [21][22]

이후에도 활약은 계속 이어져 8월말까지 3할 8푼대의 경이적인 성적을 내며 드디어 또다시 4할 타자가 나오는 것 아닌가 하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마찬가지로 3할 8푼 타율을 찍은 LG 트윈스박용택 선수와의 타격왕 경쟁이 불붙으며 시즌 후반의 점입가경이었다. 허나….

2009 정규시즌은 타율 0.371(리그 2위), 홈런 12, 타점 64 (근데 이타점이 어느 미친페이스를 달리던팀의 규정타석 타율꼴지인 포수보다 1타점이 더 적다. 심지어 둘의 홈런갯수는 같다.), OPS 0.968(리그 7위)로 데뷔 후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고,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도 수상.


2.2. 2010 시즌[편집]


윤석민의 사구로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타점 부문에서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워낙에 페이스가 좋았다. 심지어 역대 타점 최고 기록인 이승엽의 144타점(당시기준)에도 도전할 만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나머지 기록도 홈런갯수를 제외하면 이대호와 꾸준하게 타이틀 경쟁을 해왔다.

해당 문서 참조.


2.3. 2011 시즌[편집]


2011시즌부터 조성환의 뒤를 이어 롯데 자이언츠의 주장을 맡았다.#

이대호의 발목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이유로 이대호가 지명에 들어갈 경우가 생김에 따라 좌익수로의 출장도 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고 2월 15일 두산과의 연습경기에 첫 좌익수 출장 예정이었다.관련기사 ...이었으나 시범경기 전 교통사고가 났었다. 자세한건 롯데 자이언츠/사건사고 문서의 홍성흔 교통사고 문단 참조.

시범 경기에서는 좌익수로 선발 출장하여서도 전혀 녹슬지 않은 타격감을 선보였다. 시범경기 타율 0.514(1위), 타점 11(1위), 안타 19(1위), 출루율 0.550(1위), 장타율 0.676(1위)으로 시범경기이긴 하지만 5관왕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벤트전에서 1위를 하는것은 의 전통

거기다 왠지 모르게 김주찬이나 손아섭보다 더 나은 수비를 보여주기도 했다.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된거 마무리 투수도 한번 시켜보는게 어떻겠냐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개막이후 수비에서 약점이 확연히 드러났는데 실책만 없을 뿐 그냥 잡기 어려울거 같으면 바운드 처리하는 등, 큰 실책만 없다 뿐이지 외야의 폭탄이 될 소지는 아주 컸다. 더군다나 당시 김주찬이라는 외야진의 폭탄이 있는데 양사이드에 폭탄을 달고 있는 셈이었기에 다시 외야로 돌아간 전준우만 이리뛰고 저리뛰고 개고생했다.

거기다 문제는 애초에 시즌 시작 전 양승호 감독은 주전이 아니라 간간이 백업 수준으로 나올 것이라고 했는데 현실은 주전 좌익수로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탓인지는 몰라도 10시즌 때와 다르게 장타율이 급감하였다. 실제로 좌익수로 뛴 11시즌 들어서 체중이 8kg 정도 빠졌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5월 17일에서야 첫 홈런을 쳐냈다. 게다가 장타율은 0.340. 장타율이 급격히 올라간건 롯데로 이적한 이후라고는 하나 그래도 두산에서 있을때도 장타율이 4할을 넘었다는걸 생각하면....

다행이도 손아섭이 복귀하면서 좌익수는 안 갈수 있겠거니 했는데 이번에는 김주찬이 다치는 바람에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할 듯.

롯데 vs. LG 경기가 있었던 네이버 중계댓글에서 롯데팬들이 이병규가 좌익수 수비보면서 라면수비한다고 공격을 했으나, 되레 "홍성흔 좌익 수비하는거 보다가 이병규가 수비하는 걸 보니 "니네가 할 소리가 아니지", 눈이 정화된다고 역공당했다.이병규는 수비를 잘한다

5월 17일, 문학 SK 전에서 전준호의 직구를 받아쳐서 시즌 첫 홈런을 드디어 신고했다! 그라운드를 돈 직후 홍성흔은 어찌나 감격스러웠으면 덕아웃에 들어가 김무관 코치와 포옹을 했다. 이날은 박종윤이 만루홈런을 친 날이기도 했다.

6월 9일 삼성전에서 이우선의 공을 받아쳐서 그랜드슬램을 기록했다. 결국 롯데는 이날 장원삼이우선을 털어버리면서 13:7로 이겼다.

시즌이 지나면서 조금씩 살아나는지 슬금슬금 3할 타율 가까이 올라갔지만 장타율은 완벽히 망하고 말았다.

7월 23일 타율 0.301, 홈런 4, 타점 38, OPS 0.754을 기록하여 드디어 3할대 타율로 복귀했다. 아마추어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데도 참 많이 걸렸다.

김주찬과 손아섭이 조원우 외야수비코치의 조련덕분에 수비가 일취월장한 터라 이제 남은 건 홍성흔 차례라고 칭찬을 들었다. 근데 홍성흔은 성흔스키에서 탈출하기 힘들지도

2011시즌 타율 .306을 기록, 4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19타수 7안타 3볼넷 2도루 1타점 3득점 타율 .368, 장타율 .474, 출루율 .455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떨어졌다.


2.4. 2012 시즌[편집]


3월 17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새로운 타법을 보였다.

그리고 3월 31일 SK 와이번스 전에서 드디어 4번 타자로서의 첫 홈런을 쳤다! 하지만 롯데는 스코어 2:3으로 패배해 버리고 말았다.

시즌전 이대호라는 핵우산이 사라진 것[23]4번 타자로의 부담을 떨칠수 있겠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시즌이 개막되자 그런 거 없다를 보여주며 맹타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후 미친듯한 삽질로 강민호한테 4번타자 자리를 내주고 5번타자로 밀려나게 되었다.

6월 9일 미세골절 부상으로 문규현과 함께 1군에서 말소되었다.

7월 5일, 7월 6일 연속으로 우천으로 결장되었다. 대신 7일에는 3타점으로 MVP가 되었다. 4일날에는 황재균에게 우천 세레머니를 시키고 선수들을 피신, 호탕하게 홍낄낄거리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7월 24일 화요일. 한밭 야구장에서 한화 이글스와의 주중 3연전 첫경기에서 류현진에게 4타석 연속 삼진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8월 21일 대구구장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5월 27일 잠실 두산전 이후로 오랜만에 장원삼을 상대로 4회초 솔로 홈런과 8회초 만루 홈런을 때려내며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팀은 5:3으로 승리.

9월 8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솔로홈런 포함 2득점으로 전준우와 함께 이날 롯데 자이언츠 60승의 주역이 되었다. 결과는 0:3으로 승리.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이후 두산 베어스와의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1차전 때 강민호가 부상으로 입원하면서, 남은 포수 자원이 용덕한밖에 없는 상황이라 급하게 백업 포수로 뛸 준비를 하게 되었다.홍성흔, 4년 만에 포수 마스크 쓴다 다행히도 준플레이오프에서 홍성흔이 포수로 출장할 일은 없었고 홍성흔은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전 경기에서 선발 지명타자 겸 4번타자로 출장하여 15타수 6안타 1득점 1도루 3볼넷, 타율, 장타율 .400, 출루율 .50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홍성흔은 SK 와이번스와의 2012년 플레이오프 전 경기에서 선발 지명타자 겸 4번타자로 출장하여 18타수 4안타 2홈런 3볼넷 3타점 3득점, 타율 .222, 장타율 .556, 출루율 .333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홍성흔은 2012년 포스트시즌에서 33타수 10안타 2홈런 6볼넷 1도루 3타점 4득점, 타율 .303, 장타율 .485, 출루율 .410을 기록했다.


2.5. 롯데 시절 총평[편집]


홍성흔의 롯데 시절은 길게 말할거 없이 대박 그 자체이다. FA로 팀을 이적해서 4시즌 중 3번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고 4년 모두 포스트시즌에 오른 선수가 또 있겠는가. 2009년에 개인 최고 타율 0.371을 기록하며 두산시절인 2008시즌에 이어 2년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2010년에 리그 WAR 순위에서 개인 커리어에서 가장 높은 6위를 기록했고[24] 처음으로 OPS 1을 넘겼으며[25] 116타점을 쓸어담았고 처음으로 20홈런 이상을 때려냈다. 2004년에 버금가거나 뛰어넘는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내며 3년 연속이자 롯데에서 뛴 2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 2011년에는 의문의 좌익수 변신으로 타격 수치가 감소했으나 여전히 3할 100안타 60타점의 준수한 스탯을 찍으며 개인 4년 연속이자 롯데에서 뛴 3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3. 두산 베어스 2기(2013-2016)[편집]


냉정히 말해 홍성흔의 두산으로의 리턴은 본인으로서나, 팀에게나, 팬들에게나 큰 실수였다고 보면 된다. 아라이 타카히로 새드엔딩 버전

성적으로만 놓고 봐도, 롯데에서는 마지막 시즌인 2012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지명타자 부문 KBO 골든글러브를 싹쓸이 했던 것에 비해근데 2010년을 빼면 나머지 시즌들은 모두 논란이 많은 수상이라는게 함정 두산으로 돌아온 뒤엔 아무런 상도 수상하지 못했다. 그나마 2014년 시즌은 송일수 종신감독 만들기 위한 비갈임무커리어하이를 찍었으나 팀 성적이 바닥이었던지라 별 의미가 없었고, 두산이 한국시리즈 2연패를 달성한 2015년과 2016년 시즌은 홍성흔의 활약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롯데가 홍성흔에게 3년 계약을 제시한 이유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점점 노쇠화가 뚜렷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홍성흔이 두산으로 돌아온 뒤 그나마 제 몫을 한 시즌이 2013~2014년 첫 두 시즌뿐이었고, 나머지 두 시즌은 먹튀급 성적을 찍은 것을 감안한다면 롯데의 선택이 옳았던 셈. 결국 부전드임을 자신이 입증한 셈이다.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했다. 구단은 최종 3년 25억 원(보장 22억 원, 옵션 3억 원)을 제시한 반면, 홍성흔은 4년에 34억 원을 원하여 협상이 결렬. 홍성흔이 4번타자로 분발하긴 했으나 역할을 다했는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고, 나이를 생각해보면 4년 계약 만료시 2016시즌 홍성흔은 40세가 된다.

거기다 정현욱을 영입한 LG, 김주찬을 영입한 KIA 등은 물론이고 선수 영입이 없었던 한화나 SK, 삼성 등의 구단도 시장 시작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모두 FA 영입 종료를 사실상 선언했고 NC 역시 이호준을 영입해서 홍성흔의 자리가 마땅찮아졌다. 지난 시즌 무리한 넥센은 당연히 영입할 리가 없고 막상 시장에는 나왔는데 갈 곳은 하필 두산밖에 없는 상황. 롯데 팬들은 홍성흔이 두산에 가든 다시 돌아와서 헐값으로 계약하든 차라리 잘 됐다는 의견인 반면, 두산 팬들은 김태룡 단장이 홍성흔 영입에 뛰어든 것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4년간 총액 31억원의 계약으로 두산에 복귀하였다. 김진욱 감독은 타선의 구심점이 될 선수가 필요했다고 하면서, 홍성흔을 주장에 임명하겠다 밝혔다. 김동주는 어쩌고...[26]

홍성흔의 보상 선수로는 김승회가 지명되었으며, 김승회는 2016년 윤길현의 보상선수로 SK로 간 뒤에 2017년 두산으로 다시 돌아와 2019년에서야 우승반지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윤길현은 롯데의 금지어가 되었다[27]


3.1. 2013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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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홍성흔/201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2014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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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홍성흔/201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 2015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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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우타자 최초 2000안타를 달성한 후 두산팬들에게 인사하는 장면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홍성흔/2015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 2016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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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홍성흔/2016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국가대표 경력[편집]



4.1. 1998 방콕 아시안 게임[편집]


당시 경희대학교 4학년이던 홍성흔은 아마추어 신분으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다. 당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사상 처음으로 프로야구 선수들이 출전한 1기 드림팀이었다.

이 대회에서 홍성흔은 이미 프로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조인성, 진갑용에 밀려 별 다른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본 대회에서 사상 첫 금메달 획득에 성공하며 병역특례 혜택을 받았다.

4.2. 2000 시드니 올림픽[편집]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으로 이미 A대표팀을 경험한 홍성흔은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팀의 주전포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당시 박경완과의 주전경쟁에서 승리하며 대표팀이 치룬 9경기중 8경기에 출전했다.

당시 공격형 포수로서 홍성흔이 승부처마다 때린 안타들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사상 첫 올림픽 메달 획득에 큰 기여로 작용했다.

4.3. 2002 부산 아시안 게임[편집]


추가바람

4.4.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편집]


이미 한국 최고의 공격형 포수이자 KBO리그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한 홍성흔은 야구 유일의 메이저 국제대회인 WBC에 역시 참가했다. 비록 이 대회에서 조인성, 진갑용에 밀려 백업 포수로서 활약했지만 대한민국이 최종 3위를 기록하며 영광을 함께했다.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대회 첫 경기인 대만전은 홍성흔이 가장 눈에 띈 활약을 한 경기였다. 이 날 홍성흔은 6번타자 겸 포수로 선발출전하여 3타수 2안타(2루타), 1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3년전 올림픽 아시아예선에서 대만 진 빚을 완벽히 갚아주는 순간이었다.

대만전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홍성흔은 이후 경기들에서 중용받지 못했다. 대만과 달리 일본, 멕시코, 미국 등의 팀들이 대한민국보다 수준이 높은 팀이었기에 수비력이 더 안정적인 진갑용, 조인성이 더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홍성흔은 1라운드 3차전 일본전 경기 중간에 교체로 투입되어 1타수 0안타를 기록했고, 일본과 다시 만난 4강전 대수비로서 경기를 뛴 이후 대회를 마무리했다.


5. 은퇴식과 은퇴 후[편집]


박찬호의 소개로 2017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 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루키 팀의 인턴 코치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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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데뷔시절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은퇴식을 치르는 장면

두산 측에서 선뜻 성대한 은퇴식을 마련해주었다.
홍성흔 본인으로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두산에서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며, 솔직히 껄끄러울 수도 있는 상황인데 더더욱이 이렇게 롯데와 같이 경기를 하는 시기에 은퇴식을 마련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 솔직히 은퇴식은 하지 못할 걸로 생각했다고한다.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은 적도 있기에 그런 부분이 인정받지 못 할 거란 생각도 했었다고. 그런데 두산에서 뛰면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뤘던 부분 등에 대해 내 기여를 더 인정해 주셨던 것 같아 감사한 마음뿐이다라며 두산 구단과 두산 베어스 팬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파일:홍퇴식2.png

은퇴식을 위해 일시 귀국, 2017년 4월 30일 잠실구장에서 2009 시즌부터 4년 간 몸담았던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 전에 공식 은퇴식을 치렀다.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딸 화리, 아들 화철이 각각 시구와 시타를 담당하고, 본인은 시포를 했다. 하지만 두산 베어스는 롯데 자이언츠에게 6:0으로 패했다. 또한, 이날 은퇴식의 일환으로 홍성흔이 카퍼레이드를 하였다. 1루 두산 홈 관중석 쪽 부터 시작하여 3루 롯데 관중석쪽으로 한 바퀴 돌았다. 두 팀 팬 모두 팀 명만 다른 똑같은 응원가를 각자의 응원석측으로 갈 때 불러 주었으며 [28] 몇몇 팬들은 기립해 박수를 보내기도 하며 역시 양팀 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선수 중 한명임을 알 수 있었다. 영상

[1] 홍성흔은 당시 국가대표로 뽑혔던 야수들 중에서는 신명철이나 강봉규에 비해 살짝은 낮은 평가를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이 둘보다 월등한 커리어를 쌓았다. 한편 신명철과 강봉규는 오랫동안 유망주 딱지가 붙어있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뒤늦게 만개하는 듯 했으나 사실 이 두명의 20-20은 1년 반짝 수준이었고 결국 백업행과 방출행.[2] 첫번째 신인왕 포수는 1990년 김동수.[3] 사실상 이 시즌만 홍성흔이 포수로서 순수 성적으로 그나마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시즌이라고 보는 게 옳다. 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던 나머지 시즌은 절대 받아서는 안 됬어야할 시즌들이었고 2004년 시즌마저도 홈런 1위에 OPS가 10할을 넘긴 박경완이 받았어야 했다는 시선이 아주 많다. 나머지 시즌은 논란이 굉장히 심하고, 특히 2001년은 역대급 막장 수상으로 아직도 회자되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보통 홍성흔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경우 골든글러브 수상횟수는 2010년 단 한번 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성적으로 보자면 그게 맞고.[4] 이 시즌에는 타고투저 시즌 속 최고의 타격 능력을 지녔던 박경완이 크게 부진하는 바람에 포수로서는 클래식, 세이버 성적이 가장 뛰어났으나 삼성의 우승 프리미엄으로 골든글러브는 수상하지 못했다.[5] 그래도 기능에 손상은 없었던 모양인지 이 부상 이후에 화철이를 가지게 됐다고. 참고로 이전 버전에서는 화리여신으로 기재되어 있었으나, 2005년생이다. 따라서 화철이라고 해야 정답.[6] 물론 단독 도루는 아니고 풀카운트 상황에서의 히트&런 작전이었던 상황에서 잡지 못한 것이었는데, 공이 안 좋게 왔고 타자가 스윙하면서 방해했다곤 해도 홍성흔 자신도 충분히 주자를 잡을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황당해 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긴 했다.[7] 영상. 2회부터 보면 된다.[8] 이후 방송에 출연해서 블래스 신드롬이 있었다고 고백했다.[9] 사실 김경문 감독 부임 이후부터 제기되었던 문제이다. 김경문 감독의 부임 첫해인 2004년, 홍성흔은 2003년에 당했던 부상 후유증으로 경기의 절반 가량은 지명타자로 나서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당시 본인의 커리어 하이를 찍게 되고 3년 만에 포수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다. 하지만 이후 포수로서 경기 출장 시간이 늘어나면서 고질적인 발목 부상으로 고생하고 2006년 시즌 후에는 발목수술을 받았다. 주전 포수가 경기에 꾸준히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하고 홍성흔의 타격 재능이 부상에 발목잡히는 것이 안타까웠던 김경문 감독은 홍성흔에게 지명타자 전향을 제의한다. 구체적인 제안은 2006년에 이미 있었으나 홍성흔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10] 실제로 홍성흔은 2008년에 다시 포수 복귀를 타진하였고, 결국 이 문제로 김경문과의 관계가 많이 틀어지고 말았다. 이 문제는 결국 홍성흔이 롯데로 이적하는 빌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11] 이 때문에 전지훈련도 못 가서 학교 등지에서 홀로 연습을 했다고 한다.[12] 이미 포수로 전성기가 끝난 홍성흔을 주면서 10승 투수를 원했다는 카더라가 무성했다.[13] 포수로 복귀 첫 경기 상대가 당시 정근우를 비롯해 달리는 야구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던 SK였는데 도루 저지를 두번이나 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말도 나왔지만 그 경기 다음부턴 역시나(…) 도루 5개를 허용했다. 그 중 2번이 발이 빠르지도 않은 이범호...[14] 2009 시즌 이 세 타자는 모두 3할5푼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15] 물론 반론도 있다. 병살타로 악명높았던 이도형은 그 후로도 공인된 뜬금포였고 진갑용은 두산에서 내쳐질때만해도 수비 잘하는 포수가 아니었다. 지금의 강민호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전부 젊은 시절 진갑용이 지적받았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진갑용은 삼성으로 이적하고 이듬해인 2000년 이후 조뱀을 만나 만개했다. 진갑용은 두산을 떠나면서 이악물고약빨고 훈련에 매진해 지금의 경지에 오른 것인데 만약 두산에 계속 남았다면?[16] 엄밀히 말하면 표면상의 액수. FA 제도가 이상한 덕분에 벌어지는 촌극인데 절대로 저 연봉일리가 없다.[17] 정황상 홍성흔이 배신을 했다기보다는 그 당시 FA 시장에서 과하게 짠손으로 통했던 두산의 계약조건이 너무 낮았다는게 중평[18] 롯데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구단측과 마찰이 있었고, 김경문 당시 감독, 김현수를 깎아내리는 태도로 인해 두산 베어스 팬들은 이적 후 홍성흔을 흑역사 취급 중. 그리고 다시 두산으로 돌아온 뒤 까임의 강도는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우승을 해도 욕을 쳐먹으니. 우리흔[19] 영입 확정한 그날 새벽에 열혈롯빠가 작곡하고 미디찍고 보컬넣어서 완성해서 올렸다 -_-;;;; 롯데의 홍성흔 오오오오~ 홍성흔 오오오오~ 라는 가사. 경기장에서 다 같이 부르기에는 좀 빨라서 응원단장이 <What's Up>에 입힌 홍~성~흔~ 홍~성~흔~ 화이팅! 롯데의 홍성흔!으로 바뀌었다.[20] 결국 10 시즌에는 장타 포텐셜까지 터트린다.[21] 물론 타자 FA로서 성공한 케이스는 정성훈. 이진영, 최준석 등도 있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홍성흔만큼의 임팩트는 보여주지 못했고, 홍성흔과 달리 골든글러브도 수상하지 못했다.[22] 2017년 시즌에 KIA 타이거즈김주찬이 데뷔 후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면서 홍성흔에 이은 2호 이적생 FA출신 골든글러브를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긴 했으나, 홍성흔과 달리 김주찬은 KIA 이적 후 부상을 하도 많이 당해 영양가가 별로 없었다는걸 감안하면 홍성흔이 아직까지도 이적생 타자 FA로는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있다.[23] 반대로 최형우최진행은 적절한 핵우산을 얻었다.[24] WAR 5.15[25] OPS 1.028[26] 다만 김동주가 은퇴하면서 팀케미 관련 구설수를 남기면서, 이 영입은 재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팀의 구심점을 다지기 위해서는 필요했던 선택이였다는 평이 대다수. 두산 역사를 보아도 항명 파동을 일으켰지만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던 불사조 박철순이나, 여러 팀을 전전했지만 두산에서 주장 완장을 찬 임재철을 보면 이해가 쉽다.[27] 홍성흔이 4년 30억으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는데 윤길현이 4년 38억으로 커리어로우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2019년 윤길현이 방출되고 홍성흔은 부전드 그 자체가 되었으며 김승회는 우승반지를 끼우게 되었다.[28] 사실 두산 복귀 후 롯데시절 응원가를 가지고 온거라 롯데 ←→ 두산 단어만 바꾸면 나머지 가사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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