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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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북한의 전 정무원 부총리.

2. 생애[편집]


1926년 9월 15일에 출생했다. 청진시 당위원장을 거쳐 1968년 평안북도 책임비서에 임명되었고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남한에서 파악한 바로는 이 시기에 강원도 책임비서를 지냈다고 한다. 나중에 주체세계를 빛내이시며에 수록된 글이 1970년대 김정일의 강원도 현지지도 관련된 것을 보아서는 사실로 보인다. 김정일이 강원도는 전연도이니 특히 유일사상으로 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고, 강원도의 선전사업을 비판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정치선전그루빠가 내려와 강원도를 들쑤셨고 강원도의 선전능력이 더욱 강화됐다 카더라. 그런가 하면 1974년에 김정일이 국제여관에 있는 외국어 안내판이 주체없는 행위라는 황당한 트집을 잡아서 철거하라고 비판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 강원도 책임비서로 있으면서 금강산에 각종 김일성, 김정일, 주체사상 선전문구를 새겨넣은 것이 다름아닌 홍시학이었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예산심의위원장 겸 중앙인민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 비서국 비서로 선출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예산심의위원장을 지내다가 1981년 4월 24일,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82년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 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고,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에선 탈락했으나 부총리에는 유임되었다. 1985년 루마니아, 1988년 동독을 방문하였다.

1986년 2월 4일, 정무원 부총리 겸 채취공업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2월 5일부터 8일까지 진행된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공진태, 홍성룡, 안승학이 숙청되면서 홍성남과 함께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1987년 1월, 조선로동당 함경북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다가 1988년에 강성산이 총리에서 해임되면서 함북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으로 이임, 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가 출범하면서 중앙인민위원에 재선출되었다. 10월 30일에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무원 부총리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1991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2차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에서는 해임되었다.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12월 1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이 발표됨에 따라 부총리에서 해임되었다. 이때 연형묵 내각이 경제부진으로 붕괴하고 강성산 내각으로 교체되었는데 경제문제의 실패를 추궁당한 것으로 보인다. 1992년 12월 조선지식인대회 참가가 마지막 공식행보였다. 1992년 12월, 6기 20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소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30년이나 소식이 없었으며 다만 1999년에 출판된 김정일 우상화 문건인 주체세계를 빛내이시며 2권에 홍시학의 글이 수록된 것이 전부였다.[1]그러다가 뜬금포로 2020년 12월에야 애국렬사릉에 시신이 안치된 것을 보아서 북한에서 복권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앙통신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각별한 사랑과 믿음속에 유능한 일군들로 성장한 전 외무성 부상 전희정동지와 단천지구광업총국 참사였던 홍시학동지는 당의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어 보답의 한길만을 변함없이 걸어왔다."라고 홍시학을 좋게 말해주기는 했는데.... 보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단천지구광업총국 참사라고 직책을 보도하고 있는데 부총리 해임 이후 저 자리로 하방된 것으로 보인다.

묘비 사진에 따르면 2019년 7월 10일에 향년 9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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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나마도 글 자체는 1976년 2월에 작성된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