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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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홍영식.jpg

이름
홍영식(洪英植)
출생
1856년(철종 6) 2월 5일[1]
사망
1884년(고종 21) 12월 7일[2] (28세)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4. 여담



1. 개요[편집]


조선 말기의 문신, 외교관, 시인.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서울특별시 종로 출신. 구한말 개화파 정치인이며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한국우편우표 제도의 선각자이다. 개화파의 중진으로서 신설된 우정총국의 총판(總辦)이 되어 낙성식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2. 생애[편집]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홍순목(洪淳穆)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唐洪系) 남양군파(南陽君派)로 잘 알려져 있다.[3] 1881년 일본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도일했다. 담당 파트는 일본 육군성으로 이 때 <일본육군총제>, <일본육군조전> 등을 작성했다. 담당 파트인 육군성 이외에도 그는 우편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일본 우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에지마를 만나 여러 가지를 문의한 후 조선에도 빨리 우정국을 설치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하여 귀국 후 통리기무아문의 군무사부경리사(軍務司副經理事)가 되고 민영익과 초무국을 담당하였다. 1882년 홍문관 부제학, 규장각 직제학에도 임명되고 임오군란 당시에는 종4품 부호군[4]이 되어서 수습하였다.

1883년 미국보빙사로 참여해 민영익의 부관으로 참여한다. 보빙사는 7월 15일 출항하여 일본에 들렀는데 보빙사의 인원들로만 보내기는 불안했던지 주일 미국 공사의 주선으로 당시 일본에 있던 퍼시벌 로웰과 비서 미야오카가 동행하게 되었고 조선 정부는 정식으로 로웰에게 보빙사 서기관 겸 고문이라는 관직을 내려 주었다. 당시 태평양 횡단에는 샌프란시스코요코하마 정기선을 이용하여야 했으며 로웰은 보빙사 일원 중 홍영식과 친해지게 된다. 그 후 홍영식은 뉴욕의 우체국과 전신국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이 때의 경험으로 1884년 4월 22일 우정국을 설치하여 초대 총판으로 임명됐다. 다만 민영익과 함께 유럽으로 가지 않고 바로 귀국했으며 이 시기에 종2품 병조참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홍영식은 로웰의 노고를 고종에게 보고했으며 고종은 로웰을 국빈으로 초대하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왕실의 초대에 힘입어 로웰은 12월 20일 다시 조선을 방문하였다. 이후 개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홍영식은 개화 운동을 적극 주도한다.

1884년 11월 4일 동문이었던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홍영식에게 찾아와 갑신정변을 모의하고 이 소식을 들은 홍영식은 매우 주저하고 고민하였으나 결국 승인하였다. 1884년 11월 18일 우정총국을 정식 개국하여 본격적으로 서울-인천 간 우편 업무가 시작됐다. 12월 4일 홍영식은 우정국에서 축하 피로연을 열었고 이 때 갑신정변이 벌어지게 된다. 갑신정변에서 제일 먼저 습격당한 민영익을 독일인 묄렌도르프와 함께 미국인 알렌의 집으로 옮기는 것을 도와준다.[5] 갑신정변 이후 홍영식은 임시로 우의정 자리에 오르게 된다.[6]

그러나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고 갑신정변 일파들이 모두 후일을 기약하며 망명하려고 하는 중 고종이 "경들은 이제 와서 나를 두고 어딜 가는가?"라고 말한 것에 마음이 흔들려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와 함께 고종을 끝까지 호위했다. 하지만 곧이어 오조유가 이끈 청나라군이 도착했고 오조유가 고종을 데려가려 하자 만류했는데 이를 본 조선군들이 느닷없이 공격해오는 바람에 박영교를 비롯해 생도 7명과 함께 살해당했으며 당시 한국 나이로 불과 30세였다. 아버지 홍순목은 "늙은 신하가 역적을 키웠으니 나라에 큰 죄를 지었다"라고 한탄하고는 손자와 함께 독약을 먹고 자결하고 아내는 강에 몸을 던졌으며 일가 20여 명은 홍순목의 명령으로 역시 자결한다. 그의 형인 홍만식은 자결에 실패하고 옥에 갇혔다가 10년 후인 1894년 갑오개혁 때 동생과 함께 복관되었고 이후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하였다. 동생 홍정식은 항렬자 '식'을 '표'로 바꾸고 겨우 살아남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갑신정변 주역의 가족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길길이 날뛰면서 조선을 야만국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전제 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족보에서 빼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7], 서광범(달성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달성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 1973년 개봉한 영화 <삼일천하>에서는 배우 이예성이 연기했다.
  • 1981년 KBS '횃불'에서는 배우 백윤식이 연기했다.
  • 1982년 KBS 대하드라마 <풍운>에서는 배우 김영철이 연기했다.
  • 1982년 KBS 한미수교 100주년 특집극 <맥토>에서는 배우 한진희가 연기했다.[8]
  •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에서는 성우 이성이 연기했다.
  • 1995년 KBS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배우 이세창이 연기했다.
  • 2001년 KBS 특별기획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배우 이원희가 연기했다.
  • 2010년 SBS 대기획 <제중원>에서는 배우 김승욱이 연기했다.


4. 여담[편집]


  • 1963년 11월 16일 김의창, 최재호, 김영빈, 김봉렬, 김헌 씨 등이 '대한체우회'를 만들고 1964년 우정 80년 기념 사업으로 홍영식의 동상을 만들면서 일부 유족들을 수습했다.중앙일보 기사

  • 홍영식과 친했던 로웰은 조선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갑신정변의 내역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조선의 쿠데타(A Korean Coup d'Etat)'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글은 당시 평론지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 1886년 11월호에 게재되었다. 이후 일본에서 지내면서 동양 관련 저술가로 활동해 [9]을 출판하고 조선 관련 사진첩도 내고 일본 관련 서적도 여럿 써내며 이름을 날리게 된다. 로웰은 홍영식의 가족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왼쪽부터 홍만식의 아들, 형 홍만식, 홍영식의 아들을 품에 안고 있는 아버지 홍순목, 홍영식, 동생 홍정식 순.

  • 성격은 대인배[10]로 모든 사람들이 홍영식의 인품을 칭찬하고 존경하였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홍영식의 인품은 인정받아 남을 칭찬하기를 꺼리는 걸로 유명한 박영효도 "형님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11]라고 말하며 김옥균도 후일 "홍영식 군은 교우 관계도 원만하고 인품도 좋은데다 원세개와 안면도 두텁고 민영익과도 함께 해외를 여행한 사이이니 금석[12]이 목숨은 건질줄 알았다."라고 말할 정도.

  • 말단부터 시작해서 결국 규장각의 으뜸이 되었고 군부의 고위직이었으며 대한민국 우편 시스템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충무로 1가(회현동 방향)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너편에 있는 서울중앙우체국과 서울지방우정청 앞에 2012년 11월 14일 동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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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55년 음력 12월 29일.[2] 1884년 음력 10월 20일.[3] 남양군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던 홍순목, 사대당을 제거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홍영식,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홍만식 등이 남양군파 벌족이었다.[4] 문관직이 아닌 무관직이다. 조선 시대에는 문관들을 종종 무관직에 임명하였다.[5] 살생부에 민영익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도 친한 사이였고 관직 생활 초기부터 함께한데다가 해외 유람에도 함께 했던 민영익을 차마 죽일 수 없었던 듯하다.[6] 영의정에는 명분상 고종의 사촌 형인 이재원이 되었으니 홍영식이 사실상 갑신정변 패밀리 중 가장 높은 셈이 된다. 사실 조선시대 영의정은 신료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명분 외에 힘이 들어가는 위치가 아니였다.[7] 그러므로 홍영식과 100년 뒤에 태어난 홍준표는 서로 같은 항렬이다. 심지어 홍영표, 홍장표, 홍익표, 홍문표, 홍일표까지 대부분 정치인이다.[8] 출처: 1982년 5월 29일(제49호) 컬러화보 파트.[9] 조선 기행기로 서문에 홍영식에 대한 추모글이 있다.[10] 오랜 교분이 있던 민영익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고종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려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죽었다는 이들도 모두 자결이고 형은 감옥에서 갇혔다고는 하지만 이후에도 살아있는 등 사실 조선의 반역자 처벌을 고려하면 홍영식의 연좌제 처벌 내역은 상당히 가벼운 편. 홍영식의 시신도 정식으로 수습되어서 가족들에 의해서 매장되었는데 이런 것은 고종의 특별한 지시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단적으로 김옥균은 죽은 이후에도 오체분시당하고 효수되었다.[11] 허나 박영효는 서광범을 두고 "서광범은 능력은 있는데 몸이 병약해서 큰일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다."라고 깐다.[12] 홍영식의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