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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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희
洪英姬 | Hong Young hee


파일:홍영희.jpg

출생
1955년 9월 15일
개성시
국적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현직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
학력
운흥중학교
주요 서훈
공훈배우, 인민배우, 국기훈장 제1급, 김정일상
활동
1972년 –

1. 개요
2. 생애
3. 출연작




1. 개요[편집]


북한의 영화배우.
이른바 북한의 여배우 중 70~80년대에 가장 왕성히 활동했던 3대 여배우 중 한명으로, 현재까지 대외적으로 비교적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2. 생애[편집]


파일:홍89.jpg
1989년 '심장에 남는 사람'에서(34세)
1955년 개성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량강도 운흥군에서 자랐으며 1971년 운흥중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운반공으로 있다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 양성반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대학에 진학하지도 않은 양성반 학생에게 5대 혁명가극이라 일컫어지는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 자리가 돌아갔고, 1972년 이 영화가 비교적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며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으며 만 17세에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1]

그해 평양연극영화대학 배우학부에 진학했고 1976년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가 되었다.
이후 여러 작품에 출연했고 1980년 열네번째 겨울이라는 영화가 인생의 두번째 전환점이 된다.

1980년 가을에 '열네번째 겨울'을 김정일에게 올려보내고 어느날인가 김정일에 의해 영화 창작성원들이 불려간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김정일은 홍영희에게 영화의 주제가인 '봄을 먼저 알리는 꽃이 되리라'를 불러보라고 했는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음정 박자를 다 잘못 불러서 연주가들이 전부 당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일은 오히려 저렇게 부르는게 더 철학적이고 깊이있다고 하면서 원래 4/4박자였던 곡을 홍영희가 부른 6/8박자로 고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또한 이 영화가 성공해 인민배우 칭호를 받고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 대표로 추천되어 당대회에 참가했다.

1981년에는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7차 대회에 대표로 참가했다.

80년대에도 우리는 묘향산에서 다시 만났다(1982), 은비녀(1985), 심장에 남는 사람(1989) 등에서 주인공을 맡았고 특히나 조총련 30주년 기념 영화인 '은비녀' 촬영을 위해 일본에 방문했던 인연으로 조총련 65주년 축하 영상에 출연하기도 했다.

1990년 남북영화제에 엄길선, 오미란 등과 함께 북한 영화인 대표단원으로 참석했으며 KBS와도 인터뷰를 가졌다.
소설가 홍국택과 6촌 관계라고 한다.

2009년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방북했을때 순안공항에서 꽃다발을 전달하고 악수했다.

2013년 리익승과 함께 영화배우로선 최초로 김정일상을 받았으며 2014년 중국 연변라지오TV방송국 음력설 야회 방송에 출연했다.

2014년 9차 전국예술인대회에 참가했고 참가자들을 위한 모란봉악단 공연을 관람했다.
2020년 조선중앙TV의 음악소개편집물 <선군길에 새겨진 잊을수 없는 노래>에 출연해 열네번째 겨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었다.
2021년 조선신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2022년 52차 전국예술인체육대회 참가 인터뷰에서 1972년 2차 대회부터 참가했다고 한다.


3. 출연작[편집]


  • 꽃파는 처녀(1972) - 꽃분이 역[2]
  •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일(1978)
  • 열네번째 겨울(1980) - 유설경 역
  • 우리는 묘향산에서 다시 만났다(1982) - 정아 역
  • 한 지대장의 이야기(1983) - 심혜영 역
  • 은비녀(1985) - 수향 역
  • 당원증(1988) - 라현심 역
  • 심장에 남는 사람(1989) - 정남혜 역
  • 처녀 운전수(1989) - 윤화 역
  • 민족과 운명
  • 위훈의 길(1996) - 봉숙 역
  • 아들은 돌아왔다(2000) - 담임교원 역
  • 할아버지의 수기(2003) - 송영관 처 역
  • 오늘의 10명 당원(2004) - 림씨 역
  • 백두의 봇나무(2009) - 강좌장 역
  • 설풍경(2010) - 경옥 역
  • 제9련대 - 연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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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대까지는 북한 영화가 동독 영화제에서 상을 타오는 일이 꽤 있었고, 신상옥 감독 납북 이후 모스크바 영화제에까지 진출했다. 또한 중국이 문화대혁명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영화, 가극이 굉장한 인기를 자랑하던 시기였다.[2] 주제가를 부른 최삼숙에게도 데뷔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