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한

덤프버전 :


조선 정승

영조 ~ 정조


[ 좌의정 ]


제225대

이광좌

제226대

류봉휘

제227대

조태억

제228대

정호

제229대

민진원

제230대

이관명

제231·232대

홍치중

제233대

조태억

제234대

홍치중

제235대

이태좌

제236대

이집

제237대

조문명

제238·239대

서명균

제240·241대

김재로

제242대

송인명

제243대

정석오

제244대

조현명

제245대

김약로

제246대

조현명

제247대

이종성

제248·249대

이천보

제250대

김상로

제251대

신만

제252대

김상로

제253대

신만

제254대

이후

제255대

홍봉한

제256대

정휘량

제257대

홍봉한

제258·259대

윤동도

제260대

김상복

제261대

김치인

제262대

윤동도

제263대

김치인

제264대

한익모

제265대

김양택

제266대

한익모

제267대

김양택

제268대

김상복

제269대

한익모

제270대

신회

제271대

이은

제272대

김상철

제273대

이은

제274대

김상철

제275대

이은

제276대

김상철

제277대

이은

제278대

이사관

제279대

홍인한


제280대

이사관

제281대

이은

제282대

신회



제283대

김상철

제284대

정존겸

제285대

서명선

제286대

홍낙순

제287대

이은

제288대

서명선

제289대

홍낙성

제290대

이복원

제291대

홍낙성

제292대

이복원

제293대

홍낙성

제294대

이복원

제295대

이재협

제296대

이성원

제297대

이재협

제298대

채제공

제299대

김종수

제300·301대

김이소

제302대

유언호

제303대

채제공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 우의정 ]


제258대

류봉휘

제259대

조태억

제260대

정호

제261대

민진원

제262대

이관명

제263대

홍치중

제264대

조도빈

제265대

이의현

제266대

홍치중

제267대

심수현

제268대

오명항

제269대

이태좌

제270대

이집

제271대

조문명

제272대

서명균

제273대

김흥경

제274대

송인명

제275대

유척기

제276대

송인명

제277·278대

조현명

제279대

정석오

제280대

민응수

제281대

김약로

제282대

정우량

제283대

이천보

제284대

김상로

제285대

조재호

제286대

신만

제287대

이후

제288대

신만

제289대

이후

제290대

민백상

제291대

홍봉한

제292대

정휘량

제293대

윤동도

제294대

김상복

제295대

김치인

제296대

서지수

제297대

김치인

제298대

김양택

제299대

김상철

제300대

이창의

제301대

김상철

제302대

이은

제303대

신회

제304대

이사관

제305대

원인손

제306대

이사관

제307대

원인손

제308대

이사관

제309대

원인손

제310대

이사관

제311대

홍인한

제312대

이사관

제313대

이은



제314대

정존겸

제315대

서명선

제316대

정홍순

제317대

홍낙순

제318·319대

이휘지

제320대

이복원

제321대

김익

제322대

이복원

제323·324대

김익

제325대

조경

제326대

유언호

제327대

이성원

제328대

채제공

제329·330대

김종수

제331대

박종악

제332대

김이소

제333대

김희

제334대

이병모

제335대

채제공

제336대

윤시동






조선 정승
홍인한
洪麟漢

출생
1722년(경종 2)
한성부
사망
1776년 8월 18일 이후
(음력 정조 즉위년 7월 5일 이후)
전라도 강진현[1] 고금도
(現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사사형
본관
풍산 홍씨

정여(定汝)
붕당
노론, 북당, 탕평당
가족
아버지 홍현보 / 어머니 풍천 임씨
친어머니 성주 이씨
형제 홍봉한(이복형), 여동생 외 3명
아내 평산부부인 신씨
자녀 7명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풍산 홍씨 가문 출신으로 이복형 홍봉한을 배신하지 않는 선에서 정후겸과 손을 잡아 영조 마지막 3년 동안 세도를 잡았으나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다 결국 사사되었다.


2. 생애[편집]


1722년 홍현보와 그 후처(첩이 아니다)인 성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주 이씨였다. 첫 관직인 통덕랑은 음서를 통해 합격했으나 재직 중인 1753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풍산 홍씨라는 명문가 출신에다가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숙부라는 든든한 뒷배를 무기삼아 승승장구하여 급제한 1753년에 가주서와 정언, 1754년에 교리로 있다가 파직되었다.[2]

홍인한이 감사(監司)로 있을 때 언제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끝날 즈음이 되면 기생의 잘못을 트집 잡아 곤장을 쳐서 피를 본 뒤에야 통쾌해하였다. 그래서 음악을 연주할 때면 뜰 한쪽에 반드시 형구를 마련해 놓고 기다렸으니, 이는 석수(石邃)가 미녀들을 치장하여 잔치를 즐기고는 결국 삶아 먹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체로 여자에게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남자에게 재주가 있는 것과 같으니, 하늘이 쓸데없이 그들을 낸 것이 아닌데 포악하게 대한다면 어찌 천도를 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재능 있는 사람을 무시하면서 잘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유독 기생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더구나 일부러 곤장을 쳐서 통쾌해하는 것은 시랑보다 더 포악한짓이니, 그가 역적으로 몰려서 패망한 것은 당연하다. 《청성잡기


홍봉한정순왕후 김씨의 친정인 김귀주를 비롯한 경주 김씨의 힘이 커지자 동맹을 제안하려 했으나 파직되었으며 김귀주 등 청명당의 공격이 더욱 강해지면서 은언군은신군을 후원했다는 이유로 삭출되었다. 그러다가 1년 뒤 당색으로 인사를 행했다는 이유로 김종수, 김치인 등이 유배되었고 최종적으로 홍봉한이 승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귀주의 경주 김씨 가문 위주의 청명당과 홍봉한의 일부 탕평당의 세가 약화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세손인 정조가 홍봉한을 비롯한 풍산 홍씨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눈치와 수완이 좋았던 홍인한은 영조의 딸 화완옹주양자이자 떠오르는 실세인 정후겸에게 접근했다. 신예였던 정후겸 역시 홍인한의 정보력과 인맥 등이 필요했기에 둘의 동맹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렇게 이복형 홍봉한을 대신해 정후겸과 연합을 맺고 조정의 권력을 잡았으나 딱히 홍봉한을 배신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홍인한이 홍봉한을 제치고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둘의 사이가 나빴다고 해석이 되지만 딱히 형제간의 의견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3] 오히려 공공의 적이였던 김귀주김관주의 경주 김씨가 몰락했다. 다만, 홍봉한은 이때 고령에다가 실각하면서 조정 내에서의 존재감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영조 시대 마지막 3년은 사실상 홍인한과 정후겸 두 사람이 주물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조가 너무 늙어서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고 할때 반발하며 세손을 감시하고 가짜 뉴스와 익명서까지 넣으며 방해했다. 특히 홍인한은 영조가 대리청정의 명령을 내리자 극구 반대하며 나섰고 영조가 전교를 쓰라는 명령을 내리자 승지 앞을 막아서며 어명을 듣지 못하게 하는 등 문자 그대로 처절하리만치 정조의 승계를 방해했다. 정조가 세손시기 쓴 존현각 일기에는 홍인한에 대한 적대감과 그의 패악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다.# 심지어 세손이었던 정조가 대리청정에 준하는 명을 사양하겠다는 소를 올리며 도움 요청 및 부탁을 했지만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심상운(沈翔雲)이라는 자파 인물에게 상소까지 올리게 하며 저지하려 했지만 막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조가 승하하면서 정조는 수순대로 즉위했다. 그토록 방해했던 정조의 즉위 이후 홍인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

정조는 척신 척결 작전을 시작했으나 그들 중 정후겸만이 유배형을 받았고 화완옹주는 이미 사저에 나갔다며 딱히 큰 벌을 받지 않았다. 대간은 홍인한에 대해 쉬쉬했으나 정조가 강한 입장을 보이자 토죄 상소가 몇 건 올라왔고 결국 홍인한은 위리안치된다. 이후 윤약연 등이 홍인한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상황은 더 악화되었고 다른 신하들이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결국 홍인한은 고금도에서 1776년 7월 5일에 사사된다. 처형당할 당시 영조가 승하한지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4] 죄목은 홍국영을 해치고 역모에 가까운 죄를 저지른 혐의였다.

1832년에 손자 홍백영(洪百榮)[5]이 할아버지인 홍인한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오히려 처벌하자는 주장이 나왔으나 순조가 무마시켰다.[6] 그러나 1855년 철종이 혐의가 뚜렷하지 않다며 복권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삼사의 반대를 받았고 명은 취소되었으나 1858년 10월 25일 원자가 태어난 분위기 때 다시 복권되었다.[7]


3. 가족관계[편집]


  • 조부 : 홍중기(洪重箕)
    • 부 : 홍현보(洪鉉輔, 1680 ∼ 1740)
    • 모 : 풍천 임씨[8]
    • 생모 : 성주 이씨[10]
      • 이복 형 : 홍봉한
      • 본인 홍인한
      • 친동생 : 홍준한(1731 ~ ?)
      • 친동생 : 홍용한(1734 ~ 1809)
      • 여동생 : 풍산 홍씨
      • 부인 : 평산부부인 신씨[9]
      • 장남 : 홍낙원(洪樂源)
        • 손자 : 홍경모(洪敬謨)
      • 차남 : 홍낙술(洪樂述)
      • 삼남 : 홍낙진(洪樂進)
      • 사남 : 홍낙손(洪樂遜)
      • 오남 : 홍낙준(洪樂浚)
      • 딸 : 풍산 홍씨
  • 8촌형 홍창한
  • 9촌조카 홍낙춘
  • 10촌 종손 홍국영

집안이 아주 빵빵한데, 영조 말기에 들어서 권세를 부렸던 홍봉한이 형이고, 당연히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가 조카이며, 5대조홍주원[11]의 아들 대에서 갈라진 홍국영이 있다.


4. 둘러보기[편집]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역대 집권자 · 집권 붕당

[ 펼치기 · 접기 ]
조선의 역대 권력자
태조조
정종조
태종조
세종조 / 문종조
정도전
이방원
하륜, 조영무정사공신
황희, 맹사성
관학파종친
단종조
세조조
예종조
성종조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과 안평대군
수양대군정난공신
훈구파
성종조
연산군조
중종조
대신 vs 대간
대신
궁중
3
반정공신
조광조사림파
남곤, 심정, 이행, 이항 등 반 김안로 세력
김안로, 허항 등 김안로계
인종조
명종조
선조조
윤임 등 대윤
윤원형 소윤
윤원형 vs. 이량
사림파
동인 vs. 서인
서인
동인
선조조
광해군조
인조조
서인/남인 연립
북인
탁소북
청소북대북
이이첨대북
이귀, 김류 등 반정공신 및 서인
공서
낙당/원당(서인)
효종조
현종조
숙종조
송시열산당 (서인)
서인 vs. 남인
남인
김석주와 일부 서인
송시열서인
탁남
숙종조
경종조
영조조
소론
노론
소론
노론
온건 소론
노론
영조조
정조조
순조조
탕평
홍봉한 vs.
청명당 vs.
홍인한정후겸
홍인한정후겸
홍국영외척
서명선소론
노론 벽파, 시파(일부 노론, 소론, 남인) 등 탕평
심환지벽파
김조순시파
순조조
헌종조
철종조
안동 김씨
안동 김씨/풍양 조씨
고종조
흥선대원군 중심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남인, 소론, 북인 연합
여흥 민씨 중심 개화파
흥선대원군
여흥 민씨 중심 온건 개화파
고종조
순종조
급진 개화파
여흥 민씨
김홍집 중심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근왕파
친일파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6 20:10:38에 나무위키 홍인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완도군은 1896년에 생겨난 행정구역이다.[2] 조영순(趙榮順)이란 자를 변호하려다 물러났다 한다.[3] 홍봉한 역시 정조가 즉위한 이후 자신의 이복동생인 홍인한을 살리려고 애썼는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4] 그 의미는 홍인한이 정조가 즉위한지 3개월도 안 돼서 제거당했다는 것이다. 사실 승하하기 직전 당시 영조의 나이는 역대 조선 국왕들 중에서 후에 즉위하는 국왕들을 다 합쳐도 최장수+최장기 집권이었기에 언제 죽을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후계자인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큰 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홍인한의 행위는 매우 무례하여 반역이나 다름없기에 정조의 원한을 크게 살만했다.[5]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6]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1.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2.[7] 이 때는 의외로 신 안동 김씨를 비롯한 신하들의 반대가 거의 없었다.[8] 임방의 딸[9] 신방의 딸[10] 이세황의 딸[11] 선조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와 혼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