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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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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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9대 법무부 장관
대한민국 제19대 내무부 장관
홍진기
洪璡基 | Hong Jin-ki


파일:20180423_2_14003.jpg

출생
1917년 3월 13일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
(現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
사망
1986년 7월 13일 (향년 69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대저택
본관
남양 홍씨 당홍계[1]

유민(維民)
재임기간
제7대 법무부 차관
1954년 2월 17일 ~ 1955년 10월 5일
제2대 해무청장
1955년 10월 5일 ~ 1958년 2월 20일
제9대 법무부 장관
1958년 2월 20일 ~ 1960년 3월 23일
제19대 내무부 장관[2]
1960년 3월 23일 ~ 1960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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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홍성우, 어머니 이문익
형제자매
남동생 홍은기
배우자
김윤남
자녀
장녀 홍라희
장남 홍석현
차남 홍석조
삼남 홍석준
사남 홍석규
차녀 홍라영
친인척
사위 이건희
외손자 이재용
진외손자 이지호
진외손녀 이원주
종교
원불교 (법명: 인천(仁天))
학력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을류 /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 학사)
경력
고등문관시험 합격
전주지방법원 판사
제7대 법무부 차관
제2대 해무청장
제9대 내무부 장관
제19대 내무부 장관
중앙라디오방송주식회사 사장
중앙일보 대표이사
한국신문회관 이사장

서훈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금관문화훈장 추서

1. 개요
2. 생애
2.1. 일제강점기
2.2. 해방 이후
2.3. 언론인 시절
2.4. 말년
3. 가문 조상
5. 기타
6. 관련 사건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법조인 출신 정치인. 사돈 이병철, 사위 이건희와 협력하여 현재의 중앙그룹의 모체가 되는 중앙일보를 창립하였다.

동시에,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4.19 혁명 당시 내무부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을 내려, 학살의 직접적 책임자로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2.1. 일제강점기[편집]


1917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아주 잘했는데 그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는 해에 아버지가 금광사업에 실패하면서 가게까지 남의 손에 넘어가는 등 온 가족이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경성제일고보에서도 탁월한 성적을 거두며 193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제11회, 문과을류[3])에 입학했다. 이 때 그의 어머니가 학교 근처인 청량리[4]로 이사하여 거기서 하숙을 치면서 길거리 채소장사를 하여 홍진기의 학비를 댔다고 한다.

1937년 대학예과를 수료하고 법문학부로 진학한 홍진기는 1940년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그의 모친은 어려운 살림 와중에도 홍진기의 경성제대 동문이자 평양의 갑부집 아들로서 청량리에서 하숙했었던 김봉관의 집에서 돈을 빌려 홍진기의 졸업식을 위해 새 교복을 해 입혔다고 한다. 홍라희의 회고에 따르면 홍진기의 모친은 "우리 아들에게 낡은 교복을 입혀서 내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빚을 얻어서 새 교복을 장만한 거다."라고 했다고 한다.

모교 교수가 꿈이었던 홍진기는 학부 졸업 후 1940년 4월부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수로 임명되어 사법연구실에서 상법을 연구했다. 오늘날 대학과 달리, 강좌제를 근간으로 하던 일본제국제국대학에서 조수는 정규 교직원이자 당대 직장인 봉급 이상의 월급(월60원 이상)이 지급되는 등 신분과 지위가 보장되는 예비 교수요원으로서, 강좌 담임교수가 휘하 조수의 연구를 지도하며 강의를 맡겨 강사를 시켜본 후, 조교수로 승진하는 코스였기 때문에 대학 교수를 꿈꿨던 유진오를 비롯한 당대의 최고 엘리트들은 학부 졸업 후 모교 조수로 남았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조선인이 제국대학에 조수로 남는 것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고 한다.[5] 경성제대 조수 명단이 등재되는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따르면 1940년 당시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조수는 총 15명, 그 중에서 조선인은 6명에 불과했고, 6명 중에서도 모교 졸업생은 2명[6]을 제외한 단 4명(홍진기, 윤동직[7], 최재희[8], 배호[9])뿐이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홍진기는 학부를 졸업하고 조수에 임명된 1940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최종 합격하였음에도, 임용 원서를 내지 않고 2년 동안 계속 모교 조수직에 있으면서 계속 교수의 꿈을 키웠다. 특히 1942년 그가 쓴 논문 그가 쓴 논문 "주식회사의 합병에서의 교부금(株式會社の合併における交付金)"이 경성제국대학 《법학회논집》 제13책 1호에 게재되면서 그 꿈이 이뤄지는 듯 했다. 다른 논문은 모두 경성제대 법학과의 쟁쟁한 교수들이 쓴 것이었고 교수/조교수가 아닌 저자는 홍진기가 유일했다. 경성제대 제1회 수석이자 역시 법문학부 졸업 후 형법연구실과 법철학연구실에서 조수를 지낸, 홍진기의 대선배인 유진오는 "유민(홍진기)이 경성제대가 낳은 준재라는 내가 처음 안 것은 1942년 그의 대학 조수 시대의 처녀 논문이 경성제대 《법학회논집》에 발표되었을 때의 일"이라고 하면서, "《법학회논집》이라는 것은 법문학부 교수들을 위한 연구 발표집이므로 교수 이외의 사람의 논문이 그곳에 등재된다는 것은 이례에 속한다. 비슷한 예를 도쿄제대 법학부에서 본다면 이 대학의 《법학협회잡지》에 조수의 논문이 등재된다는 것은 그가 곧 조교수로 등용될 것이란 사실의 예보로 보아야 하는 것이 당시의 상례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대학의 전문 연구지에 신인의 논고가 발표되는 것은 말하자면 한 사람의 신인 학자의 공식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조수 시대의, 그런 식으로 발표된 논문이 그 학자의 일생을 통해 최고의 논문이 된 사례도 없지 않은 사실로 보아 논문의 수준과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모교 교수의 길에 다가가고 있던 홍진기는 태평양전쟁 개전 후 전시동원체제로 돌입하며 법문계 고등교육기관을 축소시키던 일본제국에서 법문학부 조수를 감원하고 조선인을 추가 임용하지 않는 등 여러 사정에 부딪혀 부득이 꿈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조수 임기 2년을 마친 후 재임용이 좌절되자 고등문관시험 합격자로서 유자격자인 홍진기는 조선총독부에 원서를 내고 1942년 4월 경성지방법원 사법관시보로 임관하였다. 그러나 상아탑을 나와서도 그의 연구성과는 학계의 주목을 받아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의 다나카 교수가 홍진기가 쓴 논문의 주요 부분을 인용해 해설하는 글을 도쿄제대 학보에 게재했다. 그렇게 학계의 반향이 커지자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의 다케다(竹田省) 교수가 1942년 12월 《민상법잡지(民商法雜誌)》에 홍진기의 논문을 비판하는 논문을 싣고 홍진기는 이에 대해 이듬해인 1943년 1월 반박 논문을 게재하는 등 경성제대 조수 출신의 일개 사법관시보임에도 제국대학 교수와 학문적 논쟁을 벌이는 등 홍진기의 명성은 상법 학계에 널리 알려졌을 정도였다.

1943년 사법관시보를 떼고 전주지방법원 판사로 발령받았다. 이후 광복 때까지 전주에서 법관 생활을 하며 여유를 즐겼다.


2.2. 해방 이후[편집]


8.15 광복 이후 홍진기는 서울로 올라와 대학에 시간강사로 출강했을 정도로 이루지 못했던 모교 교수에 대한 미련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제국의 학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미군정에서는 그가 제출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수 직급을 전문학교의 '조교수' 직급보다 낮은 것으로 인식했고, 미국식 대학의 조교 경력으로 오해하여 터무니 없이 낮은 직급을 제의하여 끝내 홍진기는 대학 교수의 꿈을 접게 되었다.

이후 홍진기는 선배 유진오의 일을 도왔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에서 법무부 소속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53년 한일 회담에서 대표로 참석하여 그 유명한 구보타 망언[10]을 듣고 반박, 해명 요구를 하였다.

1958년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법무부에 재직하면서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을 강제로 폐간조치하고, 이승만의 라이벌이었던 죽산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서 처형하기도 하였다.[11]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내무부장관까지 지냈지만 1960년, 장관 재임 중 4.19 혁명을 맞았다. 이 때 시위대에 서슴지 않고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5.16 군사정변 이후 재판을 받아[12]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다 나중에 감형되었고, 시간이 더 지나선 특사로 석방되었다.[13]

발포 명령 자체는 빼도박도 못하는 본인 흑역사로 잘못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때 엄청 데여서였는지, 이후 그는 정권에 비판적인 모습으로 변한 듯 하다.[14]


2.3. 언론인 시절[편집]


1964년 중앙라디오방송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언론인이 되었으며, 1965년 중앙일보의 창간을 진두지휘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일보 핵심 기자들을 대거 빼오는 바람에 한국일보는 그 뒤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의 사이가 지금도 별로 좋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거다. 그리고 홍진기는 경향신문도 폐간시킨 전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경향신문과 중앙일보 역시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1968년에는 중앙일보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고, 1971년에는 주식회사 동양방송의 회장까지 겸임해 매스컴센터 변모에 힘썼고, 1974년에는 두 언론사를 통합하여 '(주)중앙일보·동양방송'으로 출범시켜 신문부문을 총괄했다가 1980년에 신문부문을 이종기 전무에게 승계하고 회장으로 승진하였으나, 그 해 언론통폐합으로 동양방송을 내놓아야 했다. 이후 1986년 타계할 때까지 중앙일보 회장으로 재직하였다.


2.4. 말년[편집]


그 외에도 1980~81년까지 한국신문회관 이사장, 1982년에는 국제신문발행인협회 집행위원회 이사 등을 지냈다. 1983년에는 TV브라운관 생산업체 (주)보광을 세우기도 하였다.

1986년, 뇌졸중 증세로 인해 성북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1년 뒤 사돈 이병철폐암으로 작고하였다.


3. 가문 조상[편집]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唐洪系) 남양군파(南陽君派)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남양군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던 홍순목, 사대당을 제거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홍영식,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홍만식 등이 바로 남양군파 벌족이었다.


4.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중앙일보/오너 일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기타[편집]


  • 1999년에 그를 기리기 위해 '유민문화재단'이 세워졌고, 2003년 서울대는 새로 단장한 법학동 로비(15동 1층)를 '유민홀'이라 명명했는데, 물론 여기서 '유민'은 홍진기의 호다.[15] 이 건물 5층에는 '조영래홀'도 있는데, 서로 상반되는 삶의 궤적을 살아온 두 인물의 이름이 한 건물 안에 명명되어 있어서 묘한 대조를 이룬다.

  • 휘닉스 제주 섭지코지에 있는 유민미술관의 이름은 홍진기의 호를 딴 것이다. 함께 있는 글라스 하우스와 함께 안도 다다오(Ando Tadao)가 설계한 건축물로도 유명하며 예전에는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라고 불렸다. 원래는 명상센터로 지은 것인데 2017년에 홍진기의 유리 공예품 컬렉션을 상설 전시하면서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다."라고 자주 이야기하였으며, 그에 맞는 독서토론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녀들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평소 책읽기를 많이 시켰으며, 정치나 사회 이슈를 주제로 자유로운 토론을 자주 하였다고 전해진다.[16] 이것은 사위였던 이건희 회장에게까지 이어졌고, 후에 이건희는 자신의 인생 스승은 아버지 이병철과 장인 홍진기 두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17]


  • 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 옥살이를 하던 당시, 엄청난 양의 책을 반입해서 읽고 난 후 동료들과 토론하고, 동료들과 각자가 아는 분야를 서로 강의했다고 한다. 당시 홍진기가 집에 보냈던 편지의 책 반입요구 리스트에는 영어, 불어, 독어로 예술, 철학, 고전소설 그리고 로켓추진이나 핵물리학 같은 과학 및 공학서적등이 있는데, 이를 로테이션으로 들여오고 빼가는 식으로 책을 바꿔가며 읽었다. 이 때 옆방의 다른 죄수들도 이승만 정권 관련 거물들이 많았던 터라 후에 회고록을 출판한 이들이 몇 있었는데, 여기에도 홍진기와 동료들이 벽 너머로 심오한 철학과 상대성 이론 등에 대해 하루종일 토론을 하고 있어서 어렵긴 해도 심심할 때 이따금 듣곤 했다는 대목이 있다.


6. 관련 사건[편집]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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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양군파 36세손 ○기(基) 항렬.[2] 수석국무위원 겸임. (1960년 3월 24일 ~ 1960년 4월 24일)[3] 구제고등학교의 대학예과(고등과)는 문과/이과로 나뉘어지고 각 과는 또다시 제1외국어에 따라 영어=갑류, 독일어=을류, 프랑스어=병류로 분반되었다. 즉 문과을류는 독일어를 제1외국어로 하고 영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는 문과반이다.[4] 경성제대 예과 캠퍼스는 지금의 청량리 미주아파트 부지에 있었다.[5]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박사를 받고 돌아온 최호진 교수는 조수 직급에 대해 "대학에서 우수한 사람을 뽑아 길러낸다는 개념으로 조수를 선발했다. 조수에서 강사, 조교수로 올라가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조선인이 조수가 되는 것은 아주 어려웠다. 일본의 대학에서뿐만 아니라 경성제대도 마찬가지다. 나 같은 경우는 지도 교수를 잘 만나 운 좋게도 조수가 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6] 장홍식의 아들로서 1929년부터 줄곧 규장각 관리를 맡아 조수로 봉직해온 장지태(張之兌), 그리고 출신을 알 수 없으나 경성제대 입학생/졸업생 명단에 없는 이범수(李釩洙) 등.[7] 동래고등보통학교 출신으로 예과 9회 입학, 법문학부 법학과 졸업.[8] 대구고등보통학교 출신으로 경성제대 예과 10회 입학, 법문학부 철학철학사전공 졸업.[9]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출신으로 경성제대 예과 10회 입학, 법문학부 지나어문학전공 졸업.[10] 일본측 대표로 나온 구보타 간이치로가 일제가 오히려 조선을 발전 시켜줬으니까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발언.[11] 이 때 창랑 장택상조봉암의 석방을 위한 구명운동을 폈고, 홍진기를 찾아가 도움을 약속 받았으며, 법정에서 조봉암을 변호하기도 했는데, 결국 조봉암이 처형되자 홍진기에게 대단히 분개했다는 뒷이야기가 존재한다.[12] 의아할 수도 있지만, 당시 군부 쿠데타 세력은 엄연히 4.19 혁명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입장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13] 3.15 부정선거의 실행, 선거 당일의 마산 시위에 대한 경찰 발포 등의 혐의로 함께 기소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던 홍진기의 전임내무장관 최인규4.19 혁명시 경찰을 지휘하여 시위대에게 발포를 명령한 현재 대통령경호처장 격인 경무대경찰서장 곽영주는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던걸 보면 운도 좋았다고 할 수 있다.[14] 바로 전임자인 최인규가 실제로 사형을 집행받은 것을 보고 수감 시절 본인은 언제 사형당할지 공포에 떨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홍진기의 죄목까지 다 덤터기 씌워져 사형당한 것에 가깝다. 정작 홍진기 본인은 본인을 사형시킬 뻔한 박정희와 본인에게서 동양방송을 뺏어간 전두환 치세 때 가장 호의호식했다. 정부와의 악연 때문에 서로 불편한 관계였지만 든든한 빽인 사돈 이병철이 있어서 홍진기는 그렇다고 한경오 같이 박정희-전두환 정부에 대놓고 비판적이지는 않았고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15] 홍진기의 차남인 홍석조BGF그룹 회장의 지원으로 조성되었기 때문. 리모델링 전에는 강의실이 있었다. 홍진기가 좋지 않은 전력이 있는 인물이다 보니, 일각에서는 그의 호로 명명하는 데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다.## [16] 미국존 F. 케네디 대통령 일가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17] 다만 장인 홍진기와는 달리, 선친 이병철 초대 회장은 현장에서의 실재, 경험이 갖는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 점에서 이건희 회장은 장인과 선친으로부터 각각 기업 경영의 문과 무를 배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