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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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1.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치안붕괴와 사회분열


1. 개요[편집]


홍콩은 대체로 치안이 상당히 우수한 지역 중 하나이다.

민생치안이 우수한 덕에 침사추이 소재 충킹맨션이나 미라도 맨션, 조던역 부근 지역 등 일부 구룡반도 내 낙후 위험지역을 제외하면 경찰의 영향력이 막강하여 여행자조차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다. 물론 이 구룡반도는 상대적 낙후지역이라 침사추이의 충킹맨션, 몽콕(旺角, Mong Kok)이나 야우마테이(油麻地, Yau Ma Tei)-조던(佐敦, Jordan)) 지역[1] 등 일부 치안이 좋지 않은 지역이 있지만, 이런 지역조차 혼자 다녀도 나쁜 일 당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면 된다. 또 이런 지역에는 경찰이 정말 많다. 최근 시위방지를 위해 시내 곳곳에 경찰들이 증강되어 되려 역설적으로 민생치안은 더욱 좋아졌다.

삼합회의 전성기이던 1960년대~1980년대에는 범죄가 진짜로 상당히 많아서 1985년~1996년까지 홍콩 RTHK 방송국이 홍콩 경찰과 합작, 공개수배 사건25시의 원조격에 해당되는 繩之於法이란 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방송 영상.

그러나 염정공서의 출범. 영중공동선언[2] 체결, 부패방지 3륜법, 대테러부대인 SDU 소대 창설 등으로 1980년부터 삼합회가 물을 먹고 더 나아가 1979년을 기점으로 홍콩이 완전히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자 먹고 살만 해져 민생범죄도 줄기 시작했고, 1998년부터는 중국 정부가 광둥성 선전에 육전대를 포함해 인민해방군 해군을 대거 주둔시키며 범죄자들을 중국본토의 경찰력과 해군육전대 등으로 쓸어 버리겠다고 하자 잡범과 삼합회 둘 다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물론 홍콩 특별행정구 경무처도 반환 직후 대대적 범죄소탕에 나선다.

그리고 우범지역인 구룡성채 역시 없어지고 상당 수의 난개발지역이 사라지고 나머지도 재개발되어 우범지대 자체가 현재는 사라졌다. 과거에는 우범지대가 꽤 많았는데 대개 구룡성채를 낀 구룡성구 쪽이 으슥했다.

홍콩에서는 경찰에서 직접 TV를 통해서 범죄에 대한 모방 영상을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서 범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직접 보여주면서 범죄 예방을 위해 제작한[3] 프로그램인 경신(警訊)이 있다. 방송 전에 모방영상(模擬片段)이라는 문구 달랑 보여주는 게 전부다. 그럼에도 범죄율이 낮다는 것 자체가 충공깽.

홍콩의 치안유지는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와는 별도의 조직인 홍콩 경찰(Hong Kong Police, 香港警察)이 담당하고 있다. 홍콩 경찰은 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손꼽힐 만큼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후술된 내용과 홍콩 경무처 참조. 관광객이 길 찾을 때 경찰에게 물어봐주면 능숙한 영어와 함께 잘 도와준다.[4] 아니, 이 동네의 웬만한 제복 입은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들은 죄다 잘 도와준다. 최소 불친절한 미국 경찰이나 강압적인 중국 경찰 소속 본토 경찰들보단 훨씬 낫다. 물론 다들 지리는 잘 모르는지(...) 무전기로 물어보곤 한다. 그래도 영어표준중국어 까지는 구사 가능하고[5], 광동어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모국어이므로 이 중 한 가지 언어를 알면 도움 받는것 자체는 쉽다. 소리라도 지르면 순찰 중이던 경찰들이 죄다 달려 온다.

홍콩 경찰을 총괄하는 기관은 경무처다. 이 경무처 형사보안국(CID)의 예하에는 삼합회 등을 수사하는 중안조가 있는 조직범죄및삼합회수사부(OCTB) 및 마약사건을 다루는 마약조사부 등이 있어 미국의 FBI, DEA를 방불케 한다. 홍콩 경찰은 영미법계로 영국식 경찰제도를 택해서 수사권은 경찰이 전담하며 부정사건만 염정공서가 담당한다. 율정사 소속 검사는 공소유지 및 기소만 할 뿐이다.

소방업무인 화재 진압, 긴급구조 및 구급차 업무는 홍콩 소방처가 맡는다. 신고전화는 999번으로 경찰과 같은 번호다. 문서 참조.


2.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관련[편집]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및 이에 따른 홍콩 경찰의 시위진압 투입으로 일시적 치안부재 상태가 되었으나 2020년에 들어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홍콩 국가보안법, 홍콩 국가법의 3연타로 홍콩 시위는 사실상 실패로 끝나버렸고 중국 정부는 중국군 투입 없이 시위를 진압해버려 최종 승자가 되었다.

이제는 대한민국 총영사관도 시위 대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과 새로 도입된 홍콩 국가보안법 관련 안전 및 유의공지를 하는 판이다. 홍콩 국가보안법에선 외국인의 홍콩 내 정치 참여를 금지한다. 즉 시위에 참가하거나 홍콩 독립운동 그룹에 가담할 경우 외국 국적 비거주자도 처벌 대상이 되며[6] 홍콩 밖의 외국인은 입국 거부 조치되고 중국본토 방문 비자도 거부대상이 되어 사실상 외국이 홍콩 시위대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사라졌다.[7] 그러기에 이와 관련된 유의사항을 공지하는 것이며, 코로나 19 방역조치는 현재진행형으로 단계적으론 완화 추세이지만 아직까지는 제약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시위 원인이 된 범죄인 인도법은 2019년 9월 초 철회되었으나 이번엔 홍콩 경찰의 무력진압과 긴급법 적용 시도 등으로 10-11월 한달 동안 클라이막스를 찍으며 시위가 제일 격렬해졌다. 그리고 2019년 11월 24일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에서 민주파본토파라는 범민주파가 초압승했다. 이로써 시위대에 힘이 실렸고 되려 이 덕분에 절박함이 사라지자 폭력시위가 서서히 사라지며 12월 11일 민간인권전선 주최 대규모 평화시위에서 또 한번 세계적인 감동을 주었다. 애초 폭력시위 자체가 절박함에서 온 것인지라 정치적으로 우군이 대거 형성되지 굳이 민주파 정치인들이 반대하는 폭력시위를 하여 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이유 따위는 없었다. 홍콩 독립운동을 추구하는 쪽만 과격시위를 벌이며 민주파 주류와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물론 이때도 홍콩 경찰은 강경 진압을 택해 또한번 욕을 먹었다.

한편 이 시위는 미국 의회에서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이 최종 발효되면서 미국중국 간 충돌로 격화했다. 기사

처음에는 선거 결과에 따라 홍콩 경찰이 시위 진압을 자제했으나, 2019년 12월 들어서 홍콩 경찰이 다시 강경 진압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2019년 12월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자 점차 시위는 사그라져 갔으며 2020년 들어서는 이미 이슈는 시위에서 바이러스와 이란-미국 간 무력충돌 사태, 호주 산불 등으로 바뀌어 있었고 1월 말로 가면서 바이러스 공포가 휩쓸게 되었다.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를 앞두고 이것이 미중 간 알력다툼으로 진화했는데 도널드 트럼프 미합중국 대통령내(트럼프)가 중국에 연락하지 않았으면 홍콩은 14분 만에 없어졌을 것이라고 말하며 중국을 자극한 바 있다. 이 때 11월 28일 발효된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 여파에 따라 중국 국방장관이 "홍콩에 인민해방군 투입 준비가 완료됐다고 선포하면서 군사 개입 가능성이 높은 상태라는 관측도 있었다. 이미 2019년 11월 18일 홍콩 기본법을 무시하고[8] 중국 인민해방군 주홍콩부대가 홍콩 거리로 나와서 군사 개입을 시도한 바 있었다. 기사. 이러한 움직임에 심지어 중국군 투입 임박이라는 설까지 한때 나돌았으나 홍콩 당국은 중국군 병영 앞에서 이루어진 자발적 활동으로 홍콩 경찰이 호위까지 했고 비무장이었음을 강조하며 의미를 축소했다.

그러니까 미중 갈등이 심한 마당에서 중국군이 위협 제스처를 하여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고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에 중국이 개입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중국군 병영 앞이라는 핑계로 중국 군인들을 직접 비무장이나마 언론에 일부러 노출시켜 친중파를 뽑지 않으면 무력 개입하겠단 위협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그 이후 치뤄진 구의회 선거는 중국의 위협도 안 통하고 친중파가 대거 썰려나갔고 민주파가 초 압승해 역풍을 맞았으며 이후 중국은 다시는 중국군 개입을 언급조차 못 하게 되었다. 결국 시진핑은 잘못된 정보보고로 역풍을 맞게 한 홍콩마카오판공실장을 교체했다. 결론적으로 중국 공산당은 얻은 거 없이 손해만 잔뜩 본 셈이다.

그리고 막상 시위가 가장 격화된 홍콩이공대학 공방전에선 코 앞에 중국 육군부대와 군 병원이 있음에도 중국군은 코빼기도 안 보였고 되려 홍콩 경찰이 SDU 경찰특공대를 풀어 고립 포위시켜 중국군 없이 자체적으로 시위를 진압해 버렸다.

결국 중국군 개입은 구의회 선거를 앞둔 위협 제스처에 불과했음이 입증되었다. 물론 중국은 군대까지 풀고도 전혀 이익을 못 보고 민주파/본토파가 압승하는 바람에 되려 역풍을 단단히 맞았으며 이 사건 이후 다시는 홍콩에 대한 군사개입을 언급조차 못하게 되었다.[9]

이후 2020년으로 접어들자 중국본토 후베이성 우한에서 발원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폭격을 맞으며 제 코가 석자가 된 중국 공산당은 결국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새해 연설을 통해 일국양제 지속을 다시금 강조해야 했다.

2019년 11월 당시 주 홍콩 대한민국 총영사관과 대한민국 외교부에서는 홍콩의 민주화 조치가 전면 수용되어 중국의 홍콩 개입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홍콩 전역에 내려진 여행경보를 내리지 않을 것임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구의회 선거를 둘러싼 정정불안이 심각했다는 얘기다.

결국 2020년 1월 구의회 선거가 외부의 우려와 달리 성공적으로 끝나고 중국이 홍콩에 개입할 명분을 잃어버려 예견한 대로 정정불안이 해소되었다고 판단해 여행경보를 한 단계 내렸다.

그러나 그 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오염지역으로 중국 영토 전역이 지정되어 특별검역지역에 들어가면서 다시금 2단계 여행경보가 일시 발령되었다. 이번에는 순전히 바이러스 유입 방지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바이러스 감염사태가 진정되어도 2003년 사스를 겪은 홍콩인들이 이미 대규모 집회를 기피하는데다[10] 중국 공산당이 까딱하다 넘어지게 생겨서 어쨌든 다시금 지난해 같은 정정불안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주 홍콩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발행한 유의사항이다. 현재는 시위가 사라졌으나 간헐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격리수용지 반대시위가 벌어지는 신계 지역에서는 아래 유의사항을 꼭 참고하자.

2. 홍콩에 체류하시거나 방문하시는 우리 국민들께서는 아래 시위계획을 참고하셔서 시위 장소 방문을 피하시고, 부득이하게 시위장소 인근을 방문하셔야 할 경우 아래 사항을 참고하여 신변 안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복장) 검은 옷에 마스크를 착용하는 경우 검문검색을 받거나 시위대로 오인되어 경찰에 체포될 수도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또한, 복면금지법에 따라 경찰이 마스크를 벗으라고 요구하는 경우 반드시 이에 따라야 하며, 불응할 경우 체포되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사진촬영) 시위 장면을 촬영하는 경우 시위대로부터 사복경찰로 오인받을 수 있으므로 절대 휴대전화 등으로 시위대를 촬영하지 마십시오. 외국 관광객이나 홍콩인이 시위대를 촬영하다 폭행을 당한 사례가 있습니다.

 

○ (언행) 시위대가 있는 곳에서 시위를 비난하거나 시위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표시하지 마십시오. 한국어를 이해하는 홍콩사람들이 의외로 많으며 이로 인해 시위대와 충돌이 발생하여 예기치 않은 피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 (교통) 시위로 인해 지하철(MTR) 운행이 중단되거나 시위장소 인근 도로가 차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적지로 향하기 전에 교통소통 상황을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공항) 항공 결항이나 지연 운항이 발생할 수 있으며, 공항으로 향하는 공항철도 운행이 전면 또는 조기에 중단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충분한 여유를 두고 공항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 (영업중단) 시위가 발생할 경우 시위장소 인근 주요 관광지나 상점이 문을 닫는 경우가 빈번하여 불편을 겪을 수 있습니다.

- 대한민국 외교부 주 홍콩 대한민국 총영사관. 출처


위 주의사항 중 홍콩 국제공항의 경우 점거금지명령으로 출입 금지조치가 내려져서 더이상 점거될 염려는 없다. 공항으로 통하는 대중교통도 기습시위에 대비해 홍콩 경찰이 엄격히 경계하고 있으며 공항청사에서 거동수상자는 100% 체포된다.

그리고 위 주의사항에서 복면금지법도 홍콩 종심법원에서 위헌크리를 맞은데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때문에 사실상 흐지부지됐다.

이제는 격리수용지 반대 시위나 윈롱역 백색테러인 소위 7.21 사건 기념집회 등만 산발적으로 열리는 신계만 좀 조심하면 될 수준이다. 되려 2020년 3월 말에는 홍콩 정부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감염 방지조치로 4인 이상 집결을 14일 간 금지해 집회 자체가 불가능해졌으며 이후에도 2003년 SARS를 겪은 홍콩인들이 집결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가장 시위가 심했던 시기로 뽑히는 중국 국경절인 2019년 10월 1일은 전쟁터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 날 경찰이 시위대에 실탄을 발사해 10대 학생이 중태에 빠졌다. 이후 복면금지법 발효로 대규모의 저항이 있어서 홍콩 지하철은 역과 전동차가 파손되는 등 피해를 겪고 10월 첫주 주말에 내내 불통이었다가 간신히 복구되었으며 이 시위는 결국 10월 첫째 주말 홍콩 경찰이 진압해 모든 걸 정상화시켰다.

이후 시위는 소강상태로 숨고르기에 들어갔는데 긴급법 추가적용을 의식해서였다.

그리고 11월 9일, 정관오 지역에서 시위에 참가한 홍콩과기대학 학생 차우즈록 군이 최루탄 공격을 피하려다 그만 3m 아래로 추락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고, 다시금 시위가 불붙어, 11월 11일부터 15일까지 여명행동 4.0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규모로 출근길 교통방해 시위가 벌어졌다.

이때 11월 11-13일 3일 간 다시금 홍콩 지하철이 일시적으로 운행에 차질을 빚었으나, 14일부터는 홍콩 경찰이 전략을 짜면서 지하철 마비시도를 모두 무력화하고 막힌 도로도 모두 뚫었으며 11월 16일 토요일에 과격 시위대인 일명 용무파들을 홍콩이공대학에 토끼몰이해 감금해 버렸다.

이때 대학 캠퍼스가 새로운 충돌지점이 되어서 대학 학기가 조기종강하고, 캠퍼스 폐쇄로 유학생들은 전원 학교에서 쫓겨나 귀국하거나 귀국하지 못했을 경우 홍콩 내 친구집 등에서 임시로 머물고 있는 실정이 되었다.

똑같은 캠퍼스 점거시위 무대였던 홍콩중문대학은 1주일만에 시위대가 자진 철수했으나 이공대학은 화염병과 투석, 심지어 까지 쏘며 극렬 저항했고, 결국 홍콩 경찰의 새 경무처장 크리스 탕은 강철주먹이라는 별명답게 테러진압 특공대인 SDU 저격수들을 근처 고층건물에 배치, 투석기, 활, 화염병 소지자 전원을 테러리스트로 분류해 발견 즉시 사살을 지시했으며 SDU는 섬광탄을 터뜨리며 지금까지 시위대가 마주쳐 온 PTU 기동대와는 격이 다름을 선보였다.[11] 고립 및 포위작전으로 전기, 수도공급과 물자공급 등이 차단되고, 캠퍼스 밖으로 나가는 통로도 모두 막혀버리며 졸지에 감금되어 버린 시위대는 유서까지 쓰며 극렬히 버텼으나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열악한 위생환경[12], 그리고 며칠 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경찰 침입 우려로 잠도 못 잔 학생들은 하나둘씩 탈진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대부분 자진 투항하였고 일부는 하수구 등으로 빠져나갈려다 걸려서 전원 체포됐다.

이 와중에 12명 정도는 믿기지 않는 탈출에 성공했다.

어쨌든 이공대학 시위는 11월 22일 사실상 이공대학이 뚫리고 시위대 대다수가 자진 투항하여 진압됐고, 과격시위를 이끌어 온 용무파들도 이정도의 강경대응은 예측 못했는지 당혹스러워 했으며 결국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고 이후 거짓말처럼 홍콩 거리에서 최루탄과 화염병이 사라져 버렸다. 경찰은 이공대학 학생들을 구하러 거리 점거시위에 나선 몽콕과 야우마테이, 침사추이 일대 거리 시위까지 모두 진압했고 거리 시위대 역시 PTU가 실탄을 장전한 자동소총을 들고 나타나고, 섬광탄과 함께 정예 특공부대 SDU가 등장하자 겁 먹고 다신 행동에 못 나서게 되었다.

이후 11월 24일 구의회 선거가 외부 우려와 달리 중국군 개입 없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며 민주파의 대승으로 시위에 참가하던 시민들이 승리감을 느끼게 되면서 울분과 절박함이 사라졌고, 여기에 경찰의 강공으로 용무파라 불리는 과격 시위대 그룹은 완전히 무력화되면서 폭력 역시 급속도로 퇴출됐다.

그리고 바이러스 공포가 이슈가 된 2020년이 되자 거리에 시위는커녕 사람 자체가 사라졌다.[13]

이제 더 이상 대중교통 마비 시위도 없어졌고 홍콩이공대학에 남은 학생 30명에 대해서는 선거에서 이긴 야권 정치인들이 경찰에 불체포를 요청할 테니 빨리 나오라고 설득했으며 결국 다 나왔다.

2019년 하반기 시위와 관련한 현지 상황은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일자별 경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바이러스 패닉이 휩쓴 2020년 1월이 되자 시위는 어느덧 서서히 사라졌으며 현재는 신계구룡반도 외곽의 검역소 및 격리수용소 예정지에서 주민들의 반대시위가 벌어졌다가 역시 사그라들었다.

2020년 3월 홍콩 정부가 14일 간 4인 이상 집결금지 조치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감염방지를 이유로 명령했으며 이제는 시위는 켜녕 거리에 사람 자체가 사라졌다.

관광객은 시위 여파로 줄어서 시위 기간, 특히 7-8월 매일마다 지난 10월 1일 국경절 수준 충돌이 일어나던 동안, 시위가 없는 구역 기준으로 돌아다니는 관광객도 여전히 있었지만 관광객 전체 수는 크게 감소했다. 특히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감소한 여파가 컸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홍콩경제 살리기 프로젝트로 다시 대륙인 유커들이 정책적으로 대거 들어오며 관광수지는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시위가 조용해지자 곧바로 터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폭격으로 중국 국경이 봉쇄되고 유커들의 단체관광도 막히면서 홍콩의 관광업계는 빈사상태에 이르게 됐고 정부가 긴급 지원에 나선다.

현재 홍콩 국가법, 홍콩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어찌 보면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보다 더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이젠 지난 2014년 시위를 조직한 데모시스토, 2019년 1년 간 광복홍콩이라는 이름으로 기나긴 시위를 조직한 홍콩 독립운동 세력들까지 모두 활동중단 및 자진해산, 영국이나 대만 등지로의 망명을 선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홍콩 독립운동은 사실상 궤멸 수순을 걷고 있다. 시위 상징구호[14]들 역시 죄다 금지먹고 홍콩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2.1.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치안붕괴와 사회분열[편집]


지난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은 한때 홍콩 사회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폭격을 맞은 다음 해인 2020년에 결국 코로나19의 판데믹과 국가보안법 통과로 시위 자체가 동력이 꺼져버렸다. 이제는 여기서 언제 그렇게 혼란이 벌어졌나 싶을 정도로 모든 흔적이 싹 사라졌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휩쓸고 홍콩 국가보안법으로 시위 자체가 사실상 어려워져 동력 자체가 꺼져버린 2020년에는 평범한 사람들은 영국이고 중국이고 좋으니 제발 먹고 살자며 피로감을 호소하여 잠잠해진 추세이고 돈 좀 있는 사람들인 기업가 등이나 스와이어, HSBC[15] 같은 홍콩 내 주요 다국적 기업은 되려 국가보안법을 지지하는 판이다.[16]

지난해에는 한때 시위로 인해 커플이 되는 규칙조차 바뀌었다. 2019년 12월 14일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로 나온 기사에 따르면 기존에는 외모, 성격, 이 커플의 기준이었다면, 2019년에는 시위로 인해 친중파민주파본토파, 즉 정치 성향이 최우선 기준으로 바뀌었다. 기사 다만 지금은 홍콩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경찰에 쫓기던 최전선 시위 참가자 대부분이 영국, 대만 등지로 망명을 택하고 홍콩을 이미 떠난 지 오래라 그 현상이 사라지는 중이다.[17]

그리고 지난 2019년 후반기에는 시위의 장기화로 인해 가정과 지역 공동체 내에서도 민주파와 친중파가 갈려서 심지어 부모와 자식, 이웃 사이에도 칼부림이 일어나는 등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라는 범세계적 재난을 겪으며 시위가 사그라들어 갈등은 잠잠해졌다.

또한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 이후로 본토파 즉 독립파가 세를 얻었다는 게 입증[18]되자 2019년 12월 들어서 민주파본토파(독립파)의 분열도 촉진되었다. 애초 민주파는 홍콩 독립운동에 반대하며 폭력시위도 반대한다. 폭력시위가 홍콩 정부에게 진압 명분을 주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토파는 강경파인지라 스스로 용무파라 부르며 폭력시위를 선호해 왔고 이에 염증을 느낀 온건 민주파 지지자들이 시위 전선에서 하나둘씩 이탈하면서 결국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2019년 말 절반의 성공, 사실상 실패로 끝난 원인이 되었다. 특히 홍콩 국제공항 점거시도와 11월 여명행동 4.0 등의 과격 투쟁이 염증과 현실적 불편함을 초래하였던데가 결과적으로 코로나19+국가보안법 통과와 코로나 판데믹에 따른 세계적인 각자도생 분위기[19]로 가면서 결국 2019년 시위는 그 어떤 시위보다 더 참담하게 실패한 건 물론 홍콩에서 시위 이미지 자체가 인위적으로 삭제되었다.

이러한 민주파의 분열과 홍콩 경찰의 강경진압,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폭격에 현실적인 어려움들로 인한 지지층 이탈까지 더해져[20]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도 동력을 잃고 결국 홍콩 국가보안법으로 비참한 결말을 맞으며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란 세계적 재난을 맞이하며 이제는 지난 2019년의 사회분열 아픔에서 서서히 벗어나 일단 초당파적으로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협력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국가보안법 통과 후 시위 상징구호 등이 빛의 속도로 삭제되어 인위적으로 시위 이미지를 지워버렸다. 이제는 인터넷상으로도 언제든 경찰이 감시할 수 있어 다들 몸 사리는 판이다.

한편 시위가 격화됐을 당시엔 전례없는 치안공백이 벌어져 홍콩 경찰은 민생치안을 버렸다며 거센 질타를 받았다. 2019년 12월 2일에는 홍콩 경찰이 대부분 인원을 시위 진압에 투입해 시위 진압하러 나가 있는 상황에서 구룡반도에 있는 보석상에 강도가 들었는데 경찰은 신고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 보석상은 같은 날 오후에 한 번 더 털렸다. 더구나 12월 6일에는 홍콩 섬 내의 아파트 3곳에 도둑이 들었다. 역시나 경찰은 신고를 받고도 오지 않아서 피해를 키웠다. 기사. 그 뒤 2019년 12월 14일에도 홍콩 경찰이 시위 진압하러 나간 사이 몽콕 일대의 시계점에 강도가 들었다. 이렇게 2019년 한 해 내내 홍콩 경찰이 시위 진압에만 신경쓰고 홍콩 내부 치안 단속을 안 한다며 한인 사업가들 등이 불만을 표시했고 절도강도 등 잡범들이나 창궐하는 등 일시적으로 치안이 급격히 불안했다. 비즈니스 관광객이 홍콩 관광객의 대부분인 이상 시위 장기화에 따른 치안 붕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위의 사례들은 그만큼 경찰이 시위진압에만 정신 팔려있었단 소리다. 실제로 홍콩 경찰이 2020년 3월 이후 시위진압에 투입한 순찰대와 형사들을 전원 원대복귀시키고 PTU도 야간 순찰활동 등을 재개하자 치안이 급속도로 원상복구되었다. 그리고 순찰대와 형사대를 원대복귀시킨 자리에는 보조경찰로 전환한 징교서 기동대[21], 이민국 특수기동대, 세관 특수기동대 등 사실상 잉여병력화된 각종 특수부대를 대신 투입해 주요시설 경비에 투입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 이후 시위 피로감[22]에 코로나 사태로 인한 집결금지까지 더해져 시위가 사그라들어 2020년 3월 1일 이후 홍콩 경찰의 시위진압용 투입 경찰관 전원이 민생치안 관련 업무로 원대복귀하였다. 경찰 범죄 해결률 37%, 19년래 최저 수준, 3월부터 시위 진압 경찰관 본업으로 재배치 예정

홍콩의 입법권은 홍콩 정부와 시민들만 가지고 있으며 대규모 시위로 인해 선거에서 민주파가 압승하게 했고 '송환법'은 완전 철회했지만, 중국이 홍콩기본법의 해석권을 가지고 있다는 꼼수로 2020년 7월 1일 홍콩 국가보안법을 발효했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은 그 다음 해 그 어떤 소요보다 더 비참한 결말을 맞았으며 이제는 지난 2019년 수준의 대규모 시위는 더이상 불가능해져서 이러한 사회분열이나 치안붕괴도 역사 속 일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외국인의 시위 참여도 금지되었고 시위 지지를 선언하거나 홍콩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외국인은 홍콩에 못 들어오는 건 물론 체포되거나 중국 비자도 블랙리스트로 거부대상이 된다. 그래서 현재 시위 지지관련 SNS 포스팅들을 지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며 기업들은 이미 시위에 가담한 직원은 외국인이라도 전원 해고 조치했다.[23]

홍콩의 시위 이미지는 이미 2월 코로나19 판데믹을 기점으로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국가보안법은 여기에 결정타를 안겨서 그나마 남아 있던 레논 월 등도 싸그리 사라지게 했을 뿐이다. 이미 2월 초로 넘어가며 이슈 자체가 코로나19와 우한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국가보안법 통과 후 잠시 국가보안법 발효 전 마지막으로 시위 동력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고 되려 7월에 홍콩의 코로나19 2차 유행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어 버렸다.[24]

중국 정부가 국가보안법에 관한 내용을 홍콩의 교육 과정에 넣는다. 이는 6세 유아부터 국가전복과 테러, 분리독립, 외국 세력과의 결탁이 무엇이며 왜 죄가 되는지를 배우게 된다는 내용이다.# # 또한 통식(리버럴 아츠)이라는 비판적 사고와 토론 과목을 대체할 과목이 상술한 국가 보안법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과목명은 아직 의논 중이라고 한다. 기사

그리고 중국계 홍콩인들이 복수국적을 소유하는 것은 허용해도 홍콩 내에서 외국 국적을 행사할 수 없다는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의 외국 국적 불이행 서약의 내용과 비슷하게 복수국적은 허용해도 본국에서는 본국 국적만 인정하고 외국 국적은 행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홍콩인들 대부분이 영국 국적도 보유하고 있음으로 이는 예전부터 있었던 법률이다. 하지만 이 법률을 캐나다, 미국등의 다른 국적은 딱히 건들지 않았던 것을 엄격하게 적용하기 시작할 방침이다. 기사 원래 홍콩 땅에서는 홍콩기본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살인을 제외한 나머지 죄목에 대해서는 보석 석방이 가능했는데,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된 지미 라이의 보석 석방이 거부되었으며 이에 대해 더 자세히 판단할 판사들이 모두 비외국계 홍콩인이라고 한다. 기사

2021년 02월 09일, 홍콩증권거래소에서 역대 처음으로 외국 국적[25]의 홍콩 영주권자 사령탑 총재를 임명했다. 중국 정부가 홍콩 국가보안법을 시행한 이후 많은 홍콩인들과 외국인들이 헥시트[26]를 시도하는 것에 대해 우려되어서 임명했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기사 또한, 홍콩금융관리국 총재는 홍콩이 홍콩 국가보안법을 시행한 후에 자금 유출이 있다는 설에 대해서 부정했다.기사 홍콩법정변호사회 신임 회장이 홍콩의 국가보안법을 비판해왔는데, 최근 그가 영국 시의원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큰 풍파가 일고 있다. 기사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이 취임하고 시진핑과 연락하지 않았는데, 미국 현지 시각 2월 10일 서로 첫 통화를 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첫 통화부터 홍콩, 대만, 위구르, 신장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며 중국을 압박했다. 시진핑은 내정 간섭이라고 반발했다. 기사 이 외 더 자세한 내용은 홍콩 국가보안법 문서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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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던-야우마테이를 가로지르는 상하이 스트리트(上海街, Shanghai Street)는 매춘으로 악명이 높다! 실제로 그쪽을 밤에 돌아다니면 마사지를 빙자한 매춘업소를 많이 보게 된다.[2] 흔히 홍콩반환협정이라 부르는 그거다.[3] 참고로 제작은 홍콩 라디오 텔레비전과 합동 제작.[4] 중국 반환을 앞둔 1994년부터 표준중국어 실력을 경찰 선발기준에 넣었고(이 때부터 영국계 백인이 경찰에 입직하는 경우는 완전히 사라졌다.), 홍콩 태생 대륙인 2세들이 슬슬 사회에 나오는 시기가 되자 영어 실력이 예전 같지 않다(대륙인 2세들은 광동어로 수업하는 공립을 주로 다닌다). 경찰에게 길을 물어 보았는데, 정말 친절하게 알려주고자 노력하는데 영어가 잘 안 되어서 땀 흘리는 모습을 몇 번 봤다. 물론 간부급은 영어 및 보통화는 기본이니 잘한다. 그리고 구룡반도홍콩 섬 간에도 격차가 있다. 위의 사례는 구룡반도 사례인 듯. 반대 사례로 홍콩 섬 완차이 및 센트럴/셩완의 경우 경찰들의 영어가 아주 능숙하다.[5] 일부는 일본어 또는 한국어도 구사가능하다.[6] 즉 전 세계인이 대상이라는 말. 국제법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다.[7] 기업 등에서 채용시 해외여행에 결격이 없는 사람 이라는 조건 중에 중국 여행에 큰 제약이 생긴 셈이 되어 채용이 불가능해진다. 이미 홍콩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들은 시위 참가 직원이나 시위대를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직원들을 전원 해고 조치하고 침묵하거나 국가보안법 지지성명을 냈다. 중국 공산당에게 영혼을 판 거 같지만 이미 커질대로 커져버련 13억 인구의 내수시장을 가진 중국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다국적 기업들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8] 홍콩 기본법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홍콩에 들어오려면 홍콩 행정장관이 직접 중국 인민해방군 주홍콩부대중화인민공화국 주석한테 인민해방군 출병 요청을 하고 전인대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2019년 11월 18일에는 구룡반도 북부 까우룽통 병영 앞에 인민해방군이 홍콩 정부의 요청 없이 거리로 나온 바 있다. 물론 병영 앞이었던 건 사실이었는지라 중국군 당국은 병영 앞 군사도로 청소활동을 핑계 삼았다.[9] 당연한 말이지만 협박 따위에 굴하지 않은 홍콩인 유권자들이 민주파에 몰표를 줘서 역풍을 맞은 거다.[10] 다만 2003년 친중파 위주의 홍콩 입법회를 통한 국가보안법 도입 시도 당시 50만 명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인 바 있다.[11] 소위 말하는 어린 세대에 홍콩 독립운동 지지 세력이 주축인 용무파들도 SDU를 마주치자 공포를 느끼고 교내에 숨어버렸다. 전날 양궁까지 꺼내와 활을 쏘며 저항했던 건 상대가 일반 경찰이나 PTU여서 쉽게 본 것인데 그 다음날 진짜로 크리스 탕 새 경무처장이 저격수를 배치하여 자신들의 머리통을 날릴 준비를 하자 살해 위협을 느끼곤 숨어버렸다. 그리고 이때 아직 어린 나이인데다 혹독하게 고생해본 적도 없는 학생들은 PTSD 증세까지 보이게 되었고 내부 분열까지 일어나 패배감이 만연해 하나둘씩 자진투항 혹은 탈출을 시작했다.[12] 이공대학 캠퍼스 내에는 청소차가 못 들어와 쓰레기가 수북히 쌓여있고, 해충 등이 창궐할 가능성이 높으며 시위 학생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13] 2003년 사스 악몽을 겪은지라 바이러스 사태가 진정되어도 한동안 대규모 집회를 기피할 가능성이 높다.[14] 광복홍콩 시대혁명, Be Water, Fight For Freedom 등이나 영광이 다시 오길 등의 민중가요들이 해당한다.[15] 렁춘잉 전 행정장관은 중국은행 등이 HSBC를 대체할 수 있다며 지지를 강요한 바 있다#.[16] HSBC는 홍콩 국가보안법 지지 선언 후 미국에서 까였으나 중국이 아닌 영국계 회사이고 임원진도 엄연히 영국인이라 미국이 제재를 먹이지도 못하는 판이다. 영국계 기업에 제재를 먹이면 미영관계가 금이 갈 것이며 HSBC는 자꾸 브렉시트 이후 홍콩으로 거점을 옮길려고 하여 영국 입장에서도 크게 손해를 보는지라 언터쳐블이다. 물론 도의적 비난은 예전부터 마약 카르텔, 알 카에다, 소말리아 해적 등의 자금세탁 지원으로 많이 받아왔다.[17] 홍콩의 사회 지도층과 재벌은 대부분 친중파다. 빈과일보 사주인 지미 라이가 특이한 인물이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리카싱(다만 리카싱은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당시 세로드립을 통해 홍콩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을 비판하기도 했다.)이나 2020년 작고한 스탠리 호도 친중파로 특히 스탠리 호는 2019년 홍콩 시위로 경제가 타격을 받자 홍콩에 대거 투자해주기도 했다. 사실 외국인이 홍콩에서 하는 비즈니스는 내수시장이 없는 홍콩시장이 목적이 아닌 어디까지나 중국으로 들어갈 교두보인지라 외국계 기업 입장에선 아무래도 싫어도 사회 지도층이고 돈줄을 쥔 친중파와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18]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에서 본토파로 구분되는 정당은 신민주동맹, 클라우디아 모아이들, 열혈공민, 무소속 당선자 중 30여명 등 무려 80명 가까이 된다. 본토파는 이번 구의회 선거에서 거의 대부분 처음 당선됐다.[19] 여기에 해를 넘기면서 호주 산불이나 카를로스 곤 닛산 전 회장 탈출사건, 미-이란 전쟁위기 등 다른 이슈들이 자꾸 이슈를 덮으면서 국제사회에서도 아무도 홍콩에서 뭘 하든 신경도 안 쓰는 분위기로 갔다. 코로나19가 여기에 결정타였다.[20] 홍콩 경제는 반환 이후 중국에 종속된 지 오래고 금융계는 큰 손이 중국본토 재벌들과 중국 국영기업이라 반중 구호나 홍콩 독립운동은 재계에서는 아주 달갑지 않은 것들이다. 더구나 코로나 사태로 세계경제가 붕괴되어 버리자 이젠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부터 걱정하는 판이라 평범한 사람들은 영국이고 중국이고 먹고나 살게 해줘라며 학을 뗀다.[21] 교도소 폭동진압용 특수기동대로 교도소 폭동이 날 일 없는 홍콩에선 사실상 신속대응군에 더 가깝다.[22] PTSD를 보이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로 극단 시위가 심했다.[23] 2019년 영국계 홍콩 국적기 캐세이퍼시픽이 시위에 참가한 파일럿과 승무원을 전원 해고하였다. 중국 민항총국이 시위 참여 조종사가 조종하는 항공기의 중국 영공 진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후 모기업인 스와이어 그룹은 홍콩 시위에 긍정적이던 부사장까지 자르고 친중파로 분류되는 홍콩인을 그 자리에 앉혔으며 홍콩 국가보안법 지지선언을 하게 된다. 그리고 HSBC, 블리자드, 나이키 등도 그 뒤를 따라 중국 입장을 따르게 된다.[24] 확진자 수가 7월 1일 마지막 시위 이후 급증했는데 이 때 감염원이 불분명한 감염사례가 대다수였으며 그 중 몇몇의 동선이 시위 현장인 코즈웨이베이 일대와 겹쳐서 시위에 참가했단 사실을 못 말하는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옮겼다는 추측이 있다. 처음 시작은 6월 중순 미국에서 귀국한 가족이 있는 샤틴의 어느 중년 여성과 필리핀, 파키스탄 등 고위험 지역들에서 들어온 14일 격리가 면제되던 교대선원들이었다.[25] 아르헨티나 국적의 백인.[26] 자유민주주의 선진국가로 이민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