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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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elong.gov.cn/
중국어 간체: 和龙
한어병음: Hélóng
중국조선어: 화룡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 속하는 현급시이며, 면적은 5,068.71km2, 인구는 117,087명이다. 두만강 상류로, 백두산의 동쪽에 인접해 있는 도시이다. 시(市)의 남쪽은 북한의 함경북도 및 량강도, 서쪽과 북쪽은 안도현, 동쪽은 용정시에 접해 있다. 과거 발해의 대도시이자 부수도였던 중경현덕부가 위치해있던 것으로 유력시된다.
화룡시는 두만강 접경지역으로 예부터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현재도 조선족이 시 인구의 60% 정도를 차지한다. '화룡(和龍)'이란 지명은 지형이 용이 어우러진 형상이라 하여 근세에 조선인들이 지어 붙인 이름이다. "산골짜기" 를 의미하는 만주어라는 설도 있다.
화룡 인근에 공항이 들어서고 있다. 백두산 공항과 다른 공항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지금의 화룡시 동성진(東城鎭) 흥성촌(興城村), 서성진(西城鎭) 고성촌(古城村), 남평진(南坪鎭) 용연촌(龍淵村) 등지에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산말갈의 영토였으며 고구려의 영역에 들었다.
698년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뒤 중경현덕부의 관할에 편입되었고, 982년 요나라가 이 지역에 요동동초토사(東招討司)를 설치할 때 백산말갈의 후신인 백산 여진족 솔빈부의 관할이 되었다. 1115년 금나라가 건국되자 해란로총관부(海蘭路總管府)에 편입되었다. 1233년에는 원나라 요양성(遼陽省) 개원로(開元路)의 관할이 되었다.
1611년 누르하치가 토문강 유역을 정복한 뒤 후금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1677년 지금의 화룡시 전역이 백두산 봉금구역에 포함되었다. 1714년에는 혼춘협령(琿春協領)에 편입되었다. 1881년 봉금정책이 해제되자, 비로소 간국(墾局)이 설치되어 지금의 화룡시 일대는 남강초간국(南崗招墾局)의 관할에 편입되었다. 1884년에는 청나라 정부가 화룡욕(和龍峪)[1] 에 통상국(通商局)을 설치하고 혼춘부도통(琿春副都統)의 관할에 편입시켰다. 1902년 12월에는 청나라 정부가 화룡욕에 분방청(分防廳)을 설치하고 연길청(延吉廳)의 관할에 편입시켰다.
1910년 4월 청나라 정부가 화룡욕의 분방청을 화룡현(和龍縣)으로 고친 뒤 길림성 동남로(東南路) 분순병비도(分巡兵備道)의 관할에 넣었다.
1914년 6월 동남로가 철폐되고 연길도(延吉道)를 설치해 화룡현은 연길도 관할이 되었다. 1932년 3월 만주국이 수립되자, 간도성(間道省)의 관할이 되었다. 1946년 중화민국이 동북지구의 행정구역을 동북 9성으로 정비하였을 때는 쑹장성(松江省)에 속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속하게 되었다. 1993년에 현급시로 승격되었다.
3개의 가도(街道), 8개의 진(鎭)이 위치해 있다.
청산리 대첩이 바로 화룡시 외곽의 청산촌에서 벌어졌다.
2024년 1월, 북한 노동자들이 임금체불과 관료들의 부패에 항의하는 대규모 폭동이 화룡시 남평진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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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어 간체: 和龙
한어병음: Hélóng
중국조선어: 화룡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 속하는 현급시이며, 면적은 5,068.71km2, 인구는 117,087명이다. 두만강 상류로, 백두산의 동쪽에 인접해 있는 도시이다. 시(市)의 남쪽은 북한의 함경북도 및 량강도, 서쪽과 북쪽은 안도현, 동쪽은 용정시에 접해 있다. 과거 발해의 대도시이자 부수도였던 중경현덕부가 위치해있던 것으로 유력시된다.
화룡시는 두만강 접경지역으로 예부터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현재도 조선족이 시 인구의 60% 정도를 차지한다. '화룡(和龍)'이란 지명은 지형이 용이 어우러진 형상이라 하여 근세에 조선인들이 지어 붙인 이름이다. "산골짜기" 를 의미하는 만주어라는 설도 있다.
화룡 인근에 공항이 들어서고 있다. 백두산 공항과 다른 공항이다.
2. 역사[편집]
신석기 시대에는 지금의 화룡시 동성진(東城鎭) 흥성촌(興城村), 서성진(西城鎭) 고성촌(古城村), 남평진(南坪鎭) 용연촌(龍淵村) 등지에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산말갈의 영토였으며 고구려의 영역에 들었다.
698년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뒤 중경현덕부의 관할에 편입되었고, 982년 요나라가 이 지역에 요동동초토사(東招討司)를 설치할 때 백산말갈의 후신인 백산 여진족 솔빈부의 관할이 되었다. 1115년 금나라가 건국되자 해란로총관부(海蘭路總管府)에 편입되었다. 1233년에는 원나라 요양성(遼陽省) 개원로(開元路)의 관할이 되었다.
1611년 누르하치가 토문강 유역을 정복한 뒤 후금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1677년 지금의 화룡시 전역이 백두산 봉금구역에 포함되었다. 1714년에는 혼춘협령(琿春協領)에 편입되었다. 1881년 봉금정책이 해제되자, 비로소 간국(墾局)이 설치되어 지금의 화룡시 일대는 남강초간국(南崗招墾局)의 관할에 편입되었다. 1884년에는 청나라 정부가 화룡욕(和龍峪)[1] 에 통상국(通商局)을 설치하고 혼춘부도통(琿春副都統)의 관할에 편입시켰다. 1902년 12월에는 청나라 정부가 화룡욕에 분방청(分防廳)을 설치하고 연길청(延吉廳)의 관할에 편입시켰다.
1910년 4월 청나라 정부가 화룡욕의 분방청을 화룡현(和龍縣)으로 고친 뒤 길림성 동남로(東南路) 분순병비도(分巡兵備道)의 관할에 넣었다.
1914년 6월 동남로가 철폐되고 연길도(延吉道)를 설치해 화룡현은 연길도 관할이 되었다. 1932년 3월 만주국이 수립되자, 간도성(間道省)의 관할이 되었다. 1946년 중화민국이 동북지구의 행정구역을 동북 9성으로 정비하였을 때는 쑹장성(松江省)에 속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속하게 되었다. 1993년에 현급시로 승격되었다.
3. 행정[편집]
3개의 가도(街道), 8개의 진(鎭)이 위치해 있다.
- 가도: 민혜가도(民惠街道), 광명가도(光明街道), 문화가도(文化街道)
- 진: 팔가자진(八家子鎭), 복동진(福洞鎭), 두도진(頭道鎭), 서성진(西城鎭), 남평진(南坪鎭), 동성진(東城鎭), 숭선진(崇善鎭), 룡성진(龍城鎭)
4. 기타[편집]
청산리 대첩이 바로 화룡시 외곽의 청산촌에서 벌어졌다.
2024년 1월, 북한 노동자들이 임금체불과 관료들의 부패에 항의하는 대규모 폭동이 화룡시 남평진에서 일어났다.
5. 출신 인물[편집]
- 김용국 -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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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智新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