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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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불로 상대 함선을 공격하는 배를 찾는다면 화공선 항목으로
1. 개요
2. 역사
3. 여담



1. 개요[편집]


和船. 야마토가다선(大和型船)이라고 적기도 하며 전근대시대 일본에서 사용된 일본식 목선을 통칭한다. 노와 돛을 혼용하였으나, 일단 한선, 정크선과 마찬가지로 전근대시대 배들이 모여있는 범선항목에 들어갔다.


2. 역사[편집]


가장 최초의 일본의 배는 조몬 시대의 것이다. 통나무 하나를 세로로 가른 뒤 그대로 속만 파서 만든 단순한 구조의 통나무배(독목주)로, 한국/중국의 원시 통나무배와 큰 차이는 없으나 등장시대는 약 2천 년 정도 늦다.

본격적인 초기의 화선은 야요이시대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큰 차이가 없는 준구조선 형태의 통나무배를 사용했다. 이 통나무배는 배모양토기나 일본토용(하니와)로 알 수 있는데, 가야제국이나 신라의 배모양토기와 차이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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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배를 묘사한 삽화(위)*와 배 모양 하니와(아래)*. 백촌강 전투 당시 일본의 배도 이거와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일본 학계에서는 추정중이다.

이런 형태의 준구조선은 의외로 오랫동안 일본에서 유지되어 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 막부까지도 계속해서 이용되었다. 물론 이때 백제선과 신라선의 영향을 받아 구조선에 속하는 견당선(遣唐船)[1]이 있긴 했지만, 견당사가 폐지되면서 구조선이었던 견당선은 사라지고, 대형의 구조선들보다는 간단한 구조에 빠른 속력을 낼 수 있는 중소형의 준구조선이 주로 쓰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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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말기 벌어진 단노우라 전투 당시의 왜선.* 아래쪽 그림에서 오른쪽의 거대한 당선(唐船)을 제외한 주력선들은 모두 준구조선임을 알 수 있다. 거대한 당선은 타이라 가 세력이 안토쿠 덴노와 삼종신기를 태우고 적군을 꼬시는 역할이 전부였다.(...) 그래놓고 결국 나중에 안토쿠 덴노를 데리고 저승으로 도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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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해전을 고증 복원한 오스프리 일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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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당선의 복원 모형*...이라고는 하지만, 현존하는 견당선에 관한 사료는 오래된 삽화들뿐이다. 사진의 모형은 옛 삽화를 저본으로 하고 중국 정크선을 어느 정도 참조하여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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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당선을 그린 삽화.*

이후 무로마치 막부에 들어오면서 급속도로 구조선으로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때의 대표적인 배로는 명나라에 가는 사절이 타는 견명선(遣明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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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명선의 모습.*
이러한 구조선의 발전은 센고쿠 시대로 접어들면서 싸움배 제작에 접목되어 일본의 해전의 형태를 상당히 바꾸어놓게 된다. 기존의 일본의 해상전술은 중소형 쾌속선을 중심으로 적선에 빠르게 접근해 도선하는 방식을 택하였으며, 일본 수군은 대부분 항구도시나 바다와 인접한 지역의 해상 호족 세력이 중심이 되었다.(이들이 해상으로 하라는 무역은 안 하고 노략질을 하는 경우 악명 높은 왜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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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센고쿠 시대에 들어 전쟁이 격화되면서 해상 호족 세력과는 별개로 각 지방 영주들이 자체적인 수군을 양성하면서, 상대적으로 해상전 경험이 적은 무사계급이 해전에 투입되는 경우가 늘어나다 보니 근접전에서 보다 유리하게 싸우기 위해 대형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여기에 구조선의 발달추세가 겹쳐지면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다케부네(안택선), 관선(세키부네), 소조선(고바야부네)등의 신형 싸움배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일본 수군은 여전히 도선을 통한 백병전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기에 대형선이라 해도 내구성과 장거리 포격전보다는 화살이나 조총정도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수준의 방호능력과 얇은 선체를 통한 중량 감소, 첨저에 속하는 선체구조로 빠르게 접근해 싸우는 걸 선호하였다.

아무튼 센고쿠 시대 이후 상대적으로 전쟁이 줄어든 아즈치모모야마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군선의 발전보다는 당시 일본에 와서 무역을 하던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의 영향을 받아 일본도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장거리 무역을 하게 되고 현지에 대규모의 일본인 거주지도 생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대표적인 배가 바로 주인선(朱印船, RedSealShip)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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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선을 그린 옛 그림(위)와 1/10복원모형(아래)*. 기존의 화선들과 달리 서양 갤리온선과 중국 정크선을 절충시켜 만든 배로, 구조가 기존의 화선들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면서 지방 영주의 500석급 이상의 규모의 싸움배의 제작 금지[3](참조링크), 쇄국정책과 지방 영주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참근교대제의 시행으로 인한 상인세력의 대규모 성장, 완전한 평화시대의 도래로 원양을 누비는 항앙선보다는 상인들의 연근해용 수송선박인 벤자이센(변재선)이 발달하고 기존의 연근해용 일본 싸움배들이 실전성보다는 화려함을 강조하게 되었다. 또한 목할법(木割法)[4]의 보급으로, 이전에는 같은 배라도 지역마다 들쭉날쭉하던 배의 규모가 점차 일정하게 변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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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성이 강해진 에도막부의 세키부네.* 에도막부의 사실상의 안택선 제작 금령으로, 반대급부로 세키부네가 실질적인 주력이 되면서 전반적인 규모가 커지고 각 지방 영주의 세력과시용으로 화려하게 변했다.

또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들어 사회가 안정되고, 도쿠가와 막부의 참근교대 정책으로 상인 세력이 크게 발전하면서 상인들의 수송선인 벤자이센[6]이 다수 건조되면서 이 시기를 대표하는 화선으로 떠오르게 된다. 초기의 변재선은 임진왜란 당시 보급/수송 용도로 주로 쓰였으나 본래 연안용 선박이었기에 외양 항해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가 점차 항해술이 발달하고 2,000석급의 대형 벤자이센인 능원회선(菱垣廻船, 히가키카이센がきかいせん), 훗날 능원회선을 몰아내고[7] 주력이 되는 준회선(타루카이센たるかいせん), 우리나라의 조운선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성미회선(城米廻船), 일본 서쪽의 오사카~홋카이도 일대 항로에서 주로 쓰인 기타마에부네(북전선北前船, きたまえぶね)등 다양한 종류의 벤자이센들이 지역마다 등장하였다. 그러나 연안용 선박 시절의 내부구조에서 오는 한계점이 크게 변하지는 않아 장거리 외양항해용으로는 쓰이지 않았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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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시기 사용된 다양한 벤자이센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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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의 수송선인 벤자이센의 모습과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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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원회선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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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통신사를 비롯한 외국 사절들이 타던 어좌선(御座船).* 강에서 사용하는 강배다.

근대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서양의 배들이 들어오면서[9] 그 구조를 어느 정도 절충하여 기존의 화선의 내부를 지탱하던 버팀목 구조가 서양식으로 용골늑골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싸움배의 경우 서양식 배들로 일원화되면서 싸움용 화선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후로는 소규모의 어선이나 강배 수준만이 남아있다가, 근현대로 오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후 일본 함선의 계보는 일본 제국 해군, 해상자위대 항목 참조.


3. 여담[편집]


화선은 근세시기부터는 설계도나 신사에 봉헌된 배 모형 등 관련 사료가 상당히 많지만, 중세를 거쳐 고대로 넘어가면 미술품과 토용, 극소수의 통나무배 유물이 대부분이라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 그나마 삽화자료가 가장 많지만 이 경우 얼마나 정확하게 배를 묘사하였는가가 문제가 된다. 특히 일본은 초기 형태의 통나무배를 제외하면 우리나라나 중국처럼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목선이 출토된 경우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배 모형의 경우에도 주 목적은 신사에 봉헌하는 것인지라 실제 배와 얼마나 똑같이 만들었을지는 100% 장담할 수 없다. 때문에 연구 시 사료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중시되고 있다.[10]

다른 특징으로는 화선에서 중국 정크선이나 한국 한선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정크식 돛(가로활대 돛)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정크식 돛이 비록 좀 무겁기는 하지만 역풍항해가 자유로워 배를 부리기 쉽다는 장점이 있고, 원양 항해선인 주인선에서 이를 도입한 것을 보면 일본에서도 정크식 돛의 장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일본 배에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정크식 돛을 찾을 수 없으며, 역풍에 취약한 포범(일반 사각돛)만이 보인다. 물론 변재선의 경우 선박기술과 조종술의 발달로 포범임에도 어느 정도 역풍항해가 가능하긴 했지만 이는 매우 미약한 역풍항해능력으로 정크식 돛에 비할 바가 아니다. 왜 그랬는지는 미스터리.[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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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나라로 가는 사신인 견당사가 탄 배. 수나라가 있던 짧은 시기에는 견수사라고 했다.[2] 일본 측 자료에는 이 견당선의 등장을 다소 모호하게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륙, 특히 신라와 백제의 배의 영향이 컸음은 일본서기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기록을 보면 백제선을 모방해 배를 만들었다 풍랑을 만나 박살난 이후, 신라배가 풍랑에 강하다는 것을 듣고 신라에 배를 조금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해 배 두 척을 얻어간다. 신라배 주세여 두 척 주세여[3] 당시 일본의 최강급 싸움배이던 안택선은 1천석급이 넘어가는 배였다. 한마디로 지방영주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무력을 약화시키는 법령.[4] 배를 일정한 비례대로 짓는 방법[5] 우리나라나 중국, 서양, 중동도 배의 규모가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쓰임새와 경우에 맞게 배를 나누면서 '00형 배의 크기와 수송용량은 대충 @@정도다'하는 수준의 규격은 갖추고 있었고, 특히 중앙정부 소유의 관선의 경우 법제화된 규격을 상당히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센고쿠 시대의 영향으로 이때까지는 규격이 전혀 없었다. 예를 들면 같은 세키부네도 영주의 방침에 따라 안택선 뺨치는 크기를 갖춘 경우도 있었고, 고바야부네보다 조금 나은 정도인 경우도 있었다.[6] 변재선(弁財船). 천석선(千石船), 하선(니부네荷船)이라고도 한다.[7] 능원회선의 2,000석급이라는 엄청난 수송용량은 분명 장점이었으나, 에도 시대에 들어 상업과 소비문화가 발달하면서 폭증한 신선 식료품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기에는 능원회선의 큰 선체에서 오는 느린 속도는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당히 채워가서 납품기일을 맞추자니 이번에도 거대한 선체에서 오는 많은 제작/유지비가 또 발목을 잡아버렸다. 이에 반해 준회선은 크기는 작아도 그만큼 속도가 바르고 가격 대 성능비가 잘 맞아 성공적으로 주력 선박으로 정착했다[8] 일단 선체를 이루는 외판 자체가 일본배답게 얇고 약했다. 거기다 선체 내부의 버팀목(선량)이 기껏해야 2~3개 정도였는데, 배가 커지면 갯수를 늘리거나 다른 형태의 구조로 만드는 게 아니라 버팀목의 크기를 키우는 방법을 택했다. 이는 큰 목재를 구하기 쉬웠던 일본의 자연환경상 목재를 구하자마자 바로 재료를 만들기 좋았기 때문. 하지만 대형화되면 선량이 배의 내부를 지지하면서 부담해야 할 자기의 무게도 덩달아 늘기 때문에 선량의 피로도가 커져 대형선에는 부적합했다. 일부 개량형에서는 격벽(칸막이)이 도입되기는 했으나 주력은 아니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로 서양선이 대대적으로 들어오면서부터는 서양식 늑골이나 늑골과 유사한 구조가 사용된다.[9] 본격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서양 배를 구입하거나 본뜬 배를 건조하는 등 부분적인 도입은 있었다. 우리나라의 당포전양승첩도에도 서양 갤리온과 유사한 화선이 그려져 있다.(국립해양유물전시관 '조선시대 그림 속의 옛 배'특별전 도록 참조)[10] 국립해양유물전시관(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주최, <2008국제학술대회-동아시아 전통선박과 조선기술>학술자료집 참조.[11] 앞서 소개한 학술자료집에 이 부분에 관해 한국학자와 일본학자 간 질의응답이 있었는데, 질문만 실려있고 답변은 없다. 뭐 어쩌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