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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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 내용
3. 진상
4. 재수사
6. 유족의 국가배상 소송과 피해자 부모 사망
7. 그 외
8. 관련 문서


국가는 때로 연쇄살인범보다 더 지독한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중략)

진실을 알려준 건 다름 아닌 범인이었고, 바람을 물거품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경찰이 파묻은 진실…동생 살해한 이춘재보다 국가가 더 밉다


1. 개요[편집]


경기도 화성군 병점5리 원바리고개[1]에서 일어난 이춘재아동 성폭행 + 강간살인 사건.

1989년 7월 7일 화성군 태안읍에 살던 김현정 양(당시 8세, 국민학교 2학년)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실종되었다.

피해자가 겨우 만 8세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에 희생된 것부터 시작해 경찰이 시체를 발견하고도 은닉해 범인뿐 아니라 국가도 유족에게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큰 논란이 되었다. 경찰은 살인을 실종으로 바꾸기 위해 보고서, 진술서, 현장 증거까지 조작했다. 경찰이 시작한 거짓말의 결과는 처참했다. 이러면서 범인이 손을 댈 수밖에 없었던 물건이 국과수에 의뢰되는 일도 없었다. 경찰이 범행 도구를 감춰준 것이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에 비유하자면 범인은 뒤처리라고 할 것도 없이 대충 자리를 떠나 자신을 잡을 꼬리를 무지하게 길게 늘어뜨리고 갔는데, 경찰은 그걸 밟기는커녕 알아서 조심조심 위로 지나가준 꼴이 됐다. 결과적으로 피해자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만든 것도 바로 경찰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유류품조차 모두 슬그머니 버려져, 유가족은 마지막 유품을 만져보지도 못하게 됐다. 무엇 하나 끔찍하다고 표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시대 견찰의 부패한 실상을 보여주는 사건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악행들로, 이 때문에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중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살인 사건들 중에서도 최악의 살인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2. 사건 내용[편집]


김 양은 오후 12시 30분에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실종되었으며 이후 같은 해 12월 김 양이 실종 당시 입고 나갔던 치마와 책가방이 화성군 태안읍 병점5리 야산에서 발견됐다. 김 양이 실종된 지 약 1년 후 화성 9차 사건이 일어났으며 김 양의 물건이 발견된 장소는 9차 화성 사건 현장에서 불과 30여m 떨어진 지점이었다.

이후 부모는 2번이나 수사를 요청했으나 큰 진전이 없다가 이듬해 8월 단순 실종사건으로 종결돼 30년간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유가족들은 희망을 붙잡고 혹시나 피해자가 찾아올까봐 30년 동안 집 전화번호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어딘가에 현정이가 살아 있다고, 기억을 잃어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리라고, 성인이 되면 기억도 찾아서 가족 품으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경기 광명시로 이사한 이후에도 동네에 수시로 찾아가 수소문을 했다. 딸의 기억이 돌아오면 다니던 학교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전학 신고를 하지 않았다. TV 프로그램(1996년, '경찰청 사람들')에도 출연했다. # 하지만 유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진실은 딸이 죽었다, 그것도 강간살인을 당했다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사실과 이후에 일어난 그보다도 더 추악한 일들이었다.


3. 진상[편집]


시간이 지난 2019년 10월 15일 이춘재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자백하면서 추가로 자백한 4건의 살인 사건 중 한 사건이 이 사건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재조명되었다. 이춘재는 당시 김 양을 성폭행 후 살해해 시체를 소지품과 함께 놔두었다고 자백했다.

이춘재의 주장일 뿐이지만, 그냥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 자살을 하려고 산에 갔다가 피해자가 그를 보고 도망치자, 마음을 바꿔 자신이 그동안 저질렀던 사건들이 탄로나는 것이 두려워져 김양을 숲속으로 끌고 가 범행을 했다고 한다. 결박할 때 쓴 줄넘기용 줄은 처음에는 자살용으로 가져간 것이라고 하다가 결국 김양이 소지하고 있던 줄넘기로 김양을 묶었다고 말했다. 김양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그 장소로부터 50m 떨어져 있는 풀이 우거진 곳에 유기했다는 것이다. 8차 사건 재심에 증인으로 참석해 이를 밝힌 그는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건을 벌이고 난 후 나름대로 후회했다. 관계된 모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다"며 "제가 자백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났다. 반성하고 있다"고 형식적으로나마 사과의 뜻을 전했다. #


'줄넘기용 줄로 결박된 뼈' 발견하고도 모른 척...경찰 사체은닉까지(연합뉴스, 19.12.17), '줄넘기용 줄 묶인 유골' 나오자..."삽 갖고 와" 지시(MBC. 2019.12.17.), "차라리 죽었다 말해주지 그랬나"...유족들 '분노'(MBC. 2019.12.17.)

이후 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사건 5개월 후인 1989년 12월 21일 유류품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실종신고된 아이의 이름이 쓰여진 책가방, 신발주머니, 샌달, 양말, 팬티, 필통, 줄무늬 셔츠, 실내화 1짝, 탬버린 등 피해자가 마지막까지 소지했던 모든 물건이 거기 널려있었다. 그런데 담당 경찰관이 이것을 보고도 적극적으로 은폐를 지시했을 뿐 실종자 가족에게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다음 날에는 작은 손목뼈까지 찾아냈지만 시신을 그냥 암매장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게 경찰인지 범죄자인지 헷갈릴 지경. 당시 화성 일대를 순찰하는 민간인 방범대 대장이었던 주민이 1989년 초겨울쯤 형사계장 이씨와 야산을 수색하다가 줄넘기용 줄로 결박된 양손 뼈를 발견했으며 형사계장이 유골 발견 후 부하 직원에게 "삽을 가져와라"고 지시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 형사계장이 김 양의 제사를 지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런 행동은 눈꼽만큼이라도 양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죄책감이 들긴 드는데 진실을 밝히고 처벌을 받을 용기는 없어 그걸 조금이라도 씻어내고 '그래도 이 정도는 해줬잖아'하고 자기합리화하기 위한 비겁함에서 온 행동이었다고 봐야 한다. 정말로 양심이 있었다면 가족에게 진실을 밝혔어야 했고, 세월이 흐른 뒤에 사실이 들통난 후에라도 뒤늦게 양심선언을 해야 했을 것이다. 골프 치고 다니며 안락한 은퇴생활을 보내다가, 연습장에 찾아온 기자에게 “얘기나 마나 나는 모른다니까. 몰라요, 나는. 나는 모른다니까”라고 뻔뻔한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아니라.(2019년 12월 MBC 보도)

당시 화성경찰서 형사는 일요신문과 통화에서 “형사계장이 김 양 제사를 지내는 걸 직접 보진 못했지만 들어서 알고 있다. 당시 쉬쉬하면서 공공연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고 전했다. 일요신문은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는 화성 주민들도 찾아냈다. 화성에서 공인중개사를 30년 넘게 해온 어느 이는 “형사계장에게 직접 듣진 못했지만 전해 들어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쯤 되면 오직 가족만 모르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셈이다.#

범인 이춘재는 살해 이후 피해자의 옷 등을 현장 주변에 던졌다고 진술했다. 살해 사실을 숨기기 위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유류품이 발견된 바로 다음날인 1989년 12월 22일 경찰이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다.

가출인의 옷이 신발주머니 속에 정리돼 넣어져 있어 불상인이 가출인의 옷을 새로 구입 내지 사전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게 한 후 근처에 버린 것으로 보여 단순 가출로 사료됨.

처음부터 조작과 은폐를 작정했음을 알 수 있다. 30년이 지나서야 경찰들은 사실 그때 어땠는지에 대해 "속옷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현장만 보면 현정이가 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실토했다.

또 경찰은 12월 25일(유류품 발견 4일 후) 김 양의 아버지와 사촌언니를 조사하면서 딸이 줄넘기용 줄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고 김 양의 아버지는 평소 김양이 줄넘기를 좋아해 가방에 줄넘기용 줄을 항상 가방에 넣고 다녔다고 대답했다....고 알려졌는데, 이것도 조작이었다. 수사보고서를 보면 같은 날 조사했다는 곳의 장소가 두 가지로, 서로 다르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예 해당 일자에 경찰 조사를 받은 적이 없었고, 진술조서에 찍힌 도장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듬해인 1990년 봄 직접 경찰서로 간 적이 있고, 그 다음날 경찰이 집으로 찾아왔을 뿐이었다. 이때 와서는 '잘 살고 있네', '걱정 안 해도 되겠네'하는 아주 가관인 말을 하고 갔다고. 이 두 건의 수사 기록은 특이하게 모두 손글씨로 적혀 있으며, 작성자로 나온 경찰은 김 양의 사체를 은폐한 혐의로 입건된 장본인이다. 이쯤 되면 대략 시나리오가 짐작이 간다.#

또 사촌언니 역시, 당시 12세 어린아이가 경찰서에서 혼자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는 식으로 되어있는데 말이 안 된다. 사촌언니와 그녀의 부모는 경찰서에 간 기억 자체가 없다고 증언했다. 당시 다니던 포천의 초등학교에 당시 경찰이 두 차례 찾아온 적이 있을 뿐이다. 이쪽의 조서에도 줄넘기 관련 질문이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 사촌언니는 '당시에는 교통 수단이 부실해서 김 양의 집에 갈 수도 없었고 간 적도 없었으며 12살치고는 너무 구체적인 인터뷰 내용'이라고 그것이 알고싶다 인터뷰에서 혀를 찼다.

그럼 왜 경찰이 서류까지 주작했느냐? 왜 경찰이 질문하고 경찰이 가족인 것처럼 답변을 해서 만들어냈느냐? 시신을 발견해 놓고 그 학생과 상관이 없다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 '진술서'를 잘 살펴보면, 가족이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대답들만 가득했다. 예를 들자면 느닷없이 김 양이 "아폴로 과자를 잘 먹냐"고 묻는다. 심지어 '초코크림맛'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면서, 사고 당일 김 양이 "아폴로 과자를 갖고 있었는지" 함께 질문한다. 아폴로 과자는 그 해 12월 21일 김 양의 유류품이 발견됐을 당시 함께 나왔던 것이다. 가족에게 유류품 발견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던 경찰이 증거물에 대해 물어봤다고 써놓은 건데, 아버지는 경찰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는 아폴로 과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또 해당 경찰이 "학교 준비물로 줄넘기를 가지고 갔는지" 물어봤고, 아버지 김 씨는 "갖고 가지 않아 집에 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적혀 있는데, 평소 김 양은 줄넘기를 좋아해 항상 들고 다니는 아이였다. 역시 아버지는 경찰에서 줄넘기와 관련한 질문을 받거나 대답한 적이 없었다.# 김 양의 아버지는 줄에 대한 질문도 당시에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기회가 몇 번 있었음에도 유류품이 발견됐다는 사실조차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

핵심 물증인 줄넘기 줄을 발견하고도 은폐하면서 뒷날 책임이 제기될 경우, 마치 관련 조사를 한 것처럼 근거를 남겨둔 셈이 된다. 또 경찰은 그동안 '행방불명자'로 규정했던 김 양을 사촌언니에 대한 조서에선 '가출인'으로 바꿔놨다. 범죄 관련성이 아예 없는 것처럼 몰아간 것이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아직 화성 지역에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진행 중이었고 경찰도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화성 연쇄살인과의 연관성을 의심해야 한다. 더구나 실종 당시에는 피해자의 나이가 너무 어려 연쇄살인과 연관짓지 못하고 단순 실종으로 처리했다고 해도 1년 후 유류품 발견 현장 가까이에서 14세 여중생(중학교 2학년)을 엽기적으로 강간 살인한 9차 사건이 발생했으니 상식적으로도 소아성애 등 두 사건의 연관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도 경찰이 이 사건을 진행 중이던 연쇄살인 사건과 연관시키지 않고 실종자의 속옷이 발견되었음에도 수사를 재개하거나 증거물과 기록 등을 영구보관하지 않았다. 단순 실종으로 처리했다는 건 상부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하다.

처음에 일부 진실만 알려졌을 때에도 김 양의 아버지는 왜 유류품을 발견했는데도 단순 실종 사건으로 처리했는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또 친척 중 하나는 '유류품까지 은폐하고 실종이라고 모르쇠한 경찰이 시신은 숨기지 않았다는 보장이 있냐'며 경찰에게 따졌다고 하는데 정말 믿기지 않게도 이 말이 적중하는 너무도 끔찍한 진실을 장장 30년 만에야 마주한 뒤 유족들은 극심한 충격에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가족들은 이춘재의 자백으로 한 차례 충격을 받았다가 경찰들의 만행이 드러난 후부터는 모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어머니는 딸을 데려오라고 헛소리를 하고 아버지는 ‘경찰은 누가 잡아야 하냐’ ‘딸을 두 번 죽였다’면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

4. 재수사[편집]


경찰은 이춘재의 자백 내용이 구체적이고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일대를 수색했다. 연인원 1180명과 지표투과 레이더(GPR) 5대 등 장비를 투입해 9일간 6942㎡를 수색했으나 9일 후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이미 그 일대가 개발되어 많은 건물이 들어서버린 탓이다. 피해자 부친은 "지금 죄 없는 후배 경찰들이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당시 경찰들을 불러 발굴 작업을 하면 더 빨리 진행될 것 아니냐"고 분노를 표했다. # 그리고 결국은 경찰이 시신을 치워버렸다는 게 밝혀졌으니, 이 모든 건 무의미한 헛수고에 불과했다. 문제의 경찰들이 애먼 후배 경찰들까지 고생시키는 것이다. 자백을 해야 실마리라도 나올텐데, 끝끝내 입을 다물었으니.

경찰 관계자는 이후 인근이 토지 개발 등으로 크게 바뀌었기 때문에 추가 수색 작업은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모든 수사절차가 마무리된 이후까지도 김양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수사본부는 당시 경찰이 고의로 증거를 인멸한 것으로 보고 당시 형사계장이었던 사람과 형사였던 사람(2009년 사망)을 사체 은닉 및 증거 인멸 등 혐의로 입건했다. 하지만 이러면서 검찰에 제출한 의견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피의자들은 김현정의 사체 등을 완전히 은닉해 살해 사실을 영구히 감추려 했다기보다는 일시적인 수사업무 부담감에서 벗어나고자 사체를 은닉하고 허위 보고를 한 뒤, 추후 용의자가 정확히 특정 검거되면 수사를 재개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견서 27p)

그러나 경찰이 스스로 수사를 재개하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다. 사건은 그대로 종결되었고 묻혔다. 30년 후 다시 시작된 수사는 살인범이 자백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지 경찰이 스스로의 의지로 사건을 다시 끄집어낸 게 아니다. 이런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악행에조차도 필사의 쉴드를 쳐 주는 조직이, 수십년이 흐른 옛날 일일 뿐이라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그들의 김 양 시신 은닉 및 사건 은폐 등 범행 시점은 1989년 12월 21일에서 25일 사이로 추정됐으나, 구체적인 시신 은닉 수법과 동기 등은 그들이 끝끝내 입을 닫아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뻔하다. 이 일대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 범인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던 상황에서 또 다른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심적 부담을 가진 것 아니었겠느냐 이 말이다. 실제로 당시 경찰들은 이렇게 변명했다.

"서로 금기시하는 분위기였다."

"말석이라서 감히 이야기 못했다. 나만 입 다물면 된다고 생각했다."

"또 연쇄 살인으로 시끄러워질까 봐…."

그 경찰관들은 왜 살인사건을 덮었을까?(SBS) 모두 다른 인물들의 발언이다.


함께 침묵하고 증거를 조작한 경찰이 적어도 10명이 넘는다는 정황이 드러났으나, 이들 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증거가 없다고 단 2명만 입건됐다. 하지만 이 사실은 화성연쇄살인 수사팀 다수의 경찰관이 이미 알고 있었다. 뒤늦게 이춘재의 자백이 나오고 나서야 이들은 검경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현정이 사체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를 덮었다는 말도 들었다."

"사체가 발견됐는데, 형사계장의 지시로 묻었고, 최초 발견자를 돈으로 입막음했다고 들었다."

"한 동료가 합장하듯 손을 얼굴에 가져가더니 산 밑을 가리키며 '저기 현정이가 잠들어 있다'고 했다. 그전부터 시신이 발견됐는데도 묻은 걸 알고 있어서 더 묻지도 않았다."

"실종 1, 2년 뒤 우연찮게 현정 양 사건 서류를 보고 동료에게 물었더니 '현정 양 사체가 발견됐는데 덮었다'고 했다."

"유류품이 발견된 장소에서 시신이 발견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출처 역시 모두 다른 인물들의 발언이다.


경찰 수사 결과와 달리, 당시 수사팀 최소 10명 이상이 이미 현정 양 시신 발견 사실을 알고도 침묵했던 것이다. 또 다른 경찰들은 검찰 조사에서 "당시 수사팀 상당수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현정 양 시신 은폐는 여러 동료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다. 화성경찰서 수사팀뿐만 아니라 인근 파출소 근무자도 알고 있었다니 개인 단위 2명이 아닌 경찰의 조직적 침묵과 은폐가 명백하다. 장장 30년의 긴 세월 동안 그들 중 단 한 명도 피해자의 가족에게 이런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의지도, 노력도 없었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공범의식과 함께 죄의식도 희석돼 있었던 것인지.

그나마 30년 만에 진실을 말한 당시 수사팀도 철저히 제3자적 관점을 유지했다. 위 진술에서 알 수 있듯 모두가 '~~라고 들었다'며 나의 업무가 아닌 다른 이의 업무인 양 진술했다. 반성을 입에 올린 이들은 없었고 변명에 급급했다. 그나마 "경찰관들은 참회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도 그 안에 자신이 포함되진 않았다고 한다. 침묵한 자신이 아닌 어디까지나 시신을 직접 은폐한 경찰관이 그래야 한다는 말이었을 뿐이다.

피해자 유족은 2020년 1월 30일 당시 형사계장을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범인도피·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특수직무유기)·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했다. # 피해자 유족측 법률대리인 이정도 변호사는 보상이나 배상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당시 수사관들이 처벌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 “기존 판례에 직무수행 가능성이 있을 때까지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지 않는 것으로 보는 만큼, 당시 수사관들의 직무유기 행위는 퇴임까지 이어졌다[2]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공소시효 범위 등에 대한 검찰의 유연한 판단이 필요해보인다”라고 밝혔다.

피해자 아버지도 비슷한 말을 했다.

“경찰이 아이를 계속 찾다가 결국 못 찾은 거라면 또 모르겠다. 그런데 이건 (시신과 유류품을) 찾아 놓고도 감춘 거다. 특히 직무유기 혐의는 경찰들이 퇴직할 때까지 계속됐다고 봐야 한다. 퇴직 전까지 바로잡을 기회가 충분히 있지 않았나. 그렇다면 공소시효 만료가 아닌 것이다. 범인도피 혐의도 마찬가지다. 사체를 은닉하고 증거를 인멸해서, 이춘재의 자백으로 진범이 밝혀지기 전까지 계속 수사를 방해한 거다. 검찰에서 공소시효 범위를 다시 판단해야 한다. 공소시효를 이유로 사건을 묻는다면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재발하지 않겠나. 당시 경찰들은 반드시 합당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가족, 법원 앞에 서다] 이춘재가 살해한 초등생 부친 김용복씨 “8세 딸 희생 숨긴 경찰 만행… 檢, 시효 다시 따져 진실 캐야”


이렇게 유가족은 변호사의 도움으로 공소시효를 연장할 수 있는 각종 판례를 주장하며 고발장을 제출했다. 경찰의 직무유기죄가 성립되고, 직무유기죄는 계속범(즉시범과 달리 범죄 상태가 계속되는 범죄)이니 공소시효는 현정 양의 시신을 은닉한 1989년이 아니라 은폐 사실이 드러난 2019년부터 산정해야 된다는 게 요지였다.

2020년 7월 딸의 사망장소로 추정되는 경기 화성시의 한 근린공원을 찾아 위령제를 지낸 피해자 아버지는 “경찰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그 사실을 감춰서 뼈 한 줌 못 찾게 했느냐”면서 “개발되기 전에라도 시신을 찾았더라면 뭐라도 발견했을 텐데 이춘재보다 경찰이 더 나쁘다”고 원망했다.

"죽인 놈은 죽였지만, 은폐한 놈이 더 그거 한 것 같아요.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왜 그랬는가?"


하지만 고발 1년 만인 21년 1월,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불기소 결정이 나 결국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넘어갔다. 불기소 결정문에서 5줄 내외 피의 사실을 제외하고 불기소 이유는 '본 건은 1995. 1. 11 및 1997. 1. 11.의 경과로 5년 내지 7년의 공소시효가 완성되었다.' 39자가 전부였다. 김 씨의 주장을 왜 받아줄 수 없는지 설명은 없었다. 법 해석상 수용 불가능한 주장이었다면, 그 이유라도 쓰여 있어야 했다. 하지만 30년 동안 이뤄진 범죄를 A4 반장에 압축시켜놓더니, 공소시효 기산점 산정 이유는 말해주지도 않았다. 검찰은 국가기관의 횡포에 시달린 유가족에게 또 다시 국가기관의 이름으로 군림한 것이다.

"검사가 나한테 어떤 말이라도 들어보고 이런 판결(결정)을 했으면… 나한테 한 번도 말이 없었어요. 경찰이 고생해서 범인을 잡으려 하다가 못 잡으면, '이제 그만하라'고 공소시효가 있는 거 아닌가요? 이 사안은 경찰이 30년 동안 시신을 숨겨 놓은 건데, 이제 와서 공소시효가 없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검사나 판사들은 자식 안 키우나요? 자식을 잃어버리고 30년, 40년 있어봐라 해요. 차라리 죽었다고 했으면 가슴에 묻었을 거 아니에요. 내가 유품이라도 봤으면, 온 산을 다 뒤져서 시신이라도 찾았을 것 아니에요." - 피해자 아버지


사실 유가족이 가해 경찰을 고발한 것도 처벌을 원해서라기보다는 피해자의 시신을 찾고 싶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면 당시 형사들은 입 다물고 잘 살 테니까, 그저 피해자가 묻힌 위치를 알 수 있도록 아는 걸 더 말해달라는 의도였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셈. 하지만, 그들은 끝끝내 사과 한 마디가 없었다. 국가배상 소송 1심이 끝날 때까지도 태도가 변함이 없자, 이제 유족도 지쳐버렸다. 피해자 오빠는 '이제 사과는 바라지도 않고 진실만 알면 된다'고 인터뷰했다. #

5. 그것이 알고싶다 방영[편집]




2020년 7월 25일 그것이 알고싶다 1224화에서 방영되었다.

처음으로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피해자 유족이 이춘재와 접견했다. 처음에는 피해자 부친이 신청했는데 실패했고 다음에는 오빠가 신청해서 화상 접견[3]에 성공했다. 이춘재는 협조적인 태도였고 자기도 당시에 왜 범행을 했는지 모르겠으며 그 날 자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연쇄살인이란 게 제정신으로 하는 게 아니고 정상인은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니 어찌 보면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춘재도 자기가 일으킨 사건에 대해 알아보면서[4] 경찰이 사건을 조작한 정황을 알고 있었던 듯 한데 이춘재는 피해자 오빠와 화상 접견한 자리에서 시신이 발견되면 좋겠는데 당시 경찰들과 얘기가 잘 될런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경찰이 발견한 시신을 도로 묻은 이유에 대해선 '당시 8차 사건이 해결됐다는 축제 분위기에서 백골 시신이 나오면 누군가는 문책을 당하게 되고 분위기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범인으로 체포한 뒤 무더기 승진 잔치를 벌이던 시점에, 새로운 살인사건이 공개되는 건 부담스러워 아예 사건 자체를 묻어버렸다는 것. 고작 그런 이유로, 피해자 가족들이 딸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한을 품고 살게 되면서 무고한 한 가정이 평생 동안 받을지 모를 끔찍한 고통을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생명과 신체의 존엄성, 인격권을 무시하고 수사 편의와 성과주의에 눈이 멀어 인간으로서 가져야 마땅한 기본적인 윤리 의식을 저버렸다.[5] 게다가 그 해결된 8차사건이라는 것도, 알고 보니 엉뚱한 사람을 잡아들이고 강압수사로 범인으로 조작해 무고한 사람 인생을 망쳐놓은 것으로 밝혀졌으니 도대체가 이 사건에선 뭔가 옳은 일이 벌어진 걸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지경이다.

또 기존 보도로 알려진 줄넘기용 줄 관련 부분도 경찰이 피해자 부친과 사촌을 직접 만나 조사한 게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피해자 부친은 같은 날 광양과 화성에서 조사를 받은 것으로 나온 데다 줄에 대한 묘사도 일관성이 없었고 사촌의 진술은 10살 즈음 된 어린이가 말했다기엔 목격한 인물들은 물론 장소와 시간, 타고 있던 차종과 색상까지 지나치게 상세했다. 수사 보고서를 살펴본 프로파일러들은 경찰 조사에서 줄넘기용 줄과 아폴로 과자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게 느껴진다며 이는 '자신들이 뼈와 함께 발견한 줄넘기용 줄이 실종 아동의 것과 다르니 발견한 시신은 실종 아동이 아닐 것이다', '실종 아동은 아폴로 같은 과자를 살 수 없었던 상황이었으니 발견된 시신은 실종 아동이 아닐 것이다'라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심리라고 분석했다.[6]

제작진은 어느 섬에서 해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양심선언한 수사관을 만났고 이 수사관은 제작진과의 대화에서 '수사 보고서의 경우엔 급하게 만들 필요가 생겨서 가라친 것이며 당시 줄에 결박된 뼈를 발견한 관계자들에게 입막음 목적으로 떡값을 줬다'고 말했다. 이 증언대로라면 공식적인 경찰 관계자들과 자료들 중 진실이라 믿을 만한 게 단 하나라도 있긴 한 건지 절망적이다.

실제로 제작진들이 만난 당시 수사관들은 기억이 안 난다고 둘러대거나 심지어 이름을 물어보는 제작진에게 가명을 대고 본인이 아닌 척하기도 했다. 또 초등생 실종사건 수사관들이 8차 사건에서 '범인'(심지어 실제로는 아니었던)을 잡았다는 이유로 대거 특진한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밝혀졌으며[7] 방송 말미엔 8차 사건으로 재심을 청구한 윤 모씨를 포함한 이춘재 사건 당시 고문수사 피해자들이 다시 언급되었다.

유튜브에 올라온 비하인드에서 담당 PD는 이들을 두고 '아무리 옛날 경찰이라지만 그 당시에도 정의로운 경찰은 많았다'며 경찰 조직 전체의 치욕이나 다름없는 사건이라고 언급했다.

시사 PD를 하다 보면 정말 수없이 많은 경찰 분들을 만나요. 대단히 좋은 경찰분들도 만나고 자신의 사비를 털어가며 열정을 불태우고 정의를 위해서 노력하시는 형사 분들을 정말 많이 보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에요, 사실은. 아무리 저희가 '쌍팔년도다', '그 당시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얘기하지만 그 당시에 다른 형사님들도 이러진 않으셨어요.


피해자 유가족들도 모든 경찰이 이렇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재수사하는 경찰들은 자주 찾아오고, 수사 상황을 계속 알려줬다고 한다. 선배 경찰들의 잘못으로 이렇게 됐다고 무릎 꿇고 사과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유가족도 지금 경찰이 죽인 것도 아닌데 무슨 죄가 있겠냐며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당시 유류품을 감추고 사체를 묻은 가해 당사자 경찰이다. 명예 운운하며 골프 치고 다니고 있으니...유족은 '유류품 내놓고 사과하면 용서했을 텐데'라고 말하며 분을 감추지 못했다. 경찰이 증거를 숨기면 누가 찾으라고(내일신문)

6. 유족의 국가배상 소송과 피해자 부모 사망[편집]


유족들은 2020년 3월 2억 5000만원의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경찰의 불법행위로 김양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이 30년이나 지연됐기 때문에 국가배상법에 따라 국가가 손해배상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공소시효 만료로 사건을 은폐한 경찰들에 대한 형사 처벌이 불가능한 탓에 김양의 유족들이 억울함을 풀고 공식적으로 국가의 과실을 인정하는 판결을 받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첫 재판이 시작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사건 전말이 담긴 수사기록 열람등사부터 검찰은 비협조로 시간을 끌었다. 3월 18일 첫 재판 전에 법무부, 즉 정부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해달라. 소송 비용도 원고가 부담하게 해달라"고 짧은 입장을 내놨다. 한 달 보름 뒤인 4월29일, 정부는 두 번째 입장을 법원에 제출했다. 5월6일 열린 2차 재판을 앞두고 정부의 공식 입장을 가다듬은 21페이지 분량 준비서면(변론 내용을 미리 적어 법원에 제출한 문서)이었다. 여기서 정부는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추태를 보였다.
원고들이 주장하는 (정부의) 위법행위가 1989년 당시 있었다고 가정해도, 이 사건 소는 그때로부터 5년이 도과해 소멸시효가 완성된 후 제기됐습니다. (준비 서면 3p)"
1989년 7월 현정 양이 사라진 후 다섯 달 뒤인 12월 경찰의 시신 은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때로부터 5년 이상이 지났기 때문에 정부의 배상 책임이 없다는 뜻이다. 이전 정부가 과거사 소송에서 사법농단까지 해가며 줄기차게 주장했던 시효 완성은 재판에서 번번이 깨져 왔다. 법원은 '국가의 방해로 권리행사에 장애가 있었다면 국가의 시효 완성 주장은 신의성실 원칙에 위배된다'는 판례를 공고히 했다. 이미 확고한 판례가 있는데도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걸 정부도 모를 리 없다. 원고인 유가족이 경찰의 시신 은폐를 알게 된 것 자체가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2019년 말(이춘재의 자백 시기), 경찰이 시신 은폐 사실을 공식 발표한 건 이듬해인 2020년 7월 2일, 김 씨가 소송을 낸 시점은 이보다 넉 달 앞선 2020년 3월이다.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권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가 있던 날로부터 5년'이다. 시효가 충분히 남아있다는 뜻이다.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어도 뻔히 아는 사실인데도, 법률전문가 집단인 법무부(국가)는 시효 완성을 외쳤다. 정말이지 악의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국가폭력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재심(영화)>을 관람하며 과거사 반성에 인색했던 과거 정부와 차별성을 내세웠다. 취임 이후인 2018년 4월엔 '국가폭력 배상 소송의 절차 지연을 줄이고, 조기에 피해구제 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게 한다'는 법무부 보도자료까지 배포했다. '과거사 사건에 대한 진정성 있는 후속조치가 이뤄지고 있다'는 자찬도 덧붙였지만 일선 현실에서는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부 측은 끈질기게 '문제의 경찰 개인의 일탈'이라느니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펼쳤다. 피고 대한민국의 소송을 대리한 정부법무공단은 "객관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부득이 가출 사건으로 처리됐던 것"이라며 "이 사건은 국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된 폭력 내지 인권침해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반박해 왔다. "피고의 책임을 인정하는 판단을 하더라도 당시 부적절한 행위를 한 경찰 이외 다른 경찰은 피해자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점, 이춘재의 자백이 나온 후 대규모 수사본부를 편성해 사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점 등을 충분히 고려해달라"고 주장한 바 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억지. 물론 변호인의 입장상 자신이 변호하는 쪽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더라도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는 큰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유족 측 변호인도 '신속한 권리구제를 해도 모자란 판에 국가의 책임을 경감시키기 위해 황당한 변명만 늘어놓는 건 피해자나 유족들에 대한 2차 가해에 해당한다'고 일갈했다. #]

정부가 자신들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경감시켜서 배상액을 줄이려는 의도로 보이는데 피해자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없는 거다. 22년 7월 법무부가 범죄 피해자 보호를 확대한다며 인권을 보호하는 따뜻한 법무행정이라는 자료를 낸 것이 무색해 보인다.

민사소송은 5개월 안에 1심 판결을 내리는 것이 원칙임에도 2년 8개월, 무려 6배나 되는 긴 기간 동안 재판을 질질 끌었다는 점도 있다. 이춘재가 범인임을 확정하고 발표하기까지 수사를 하느라 관련 절차가 계속 지연된 탓이 컸지만, 기록 제출 비협조 등을 보면 의도적인 시간 지연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시간은 언제나 강자의 무기였으니까.

피해자 부모의 억울함에 대해서는 차마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것이다. 도저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자신의 가족에게 일어났다는 진실을 알게 된 유가족은 뒤늦게 장례와 49재를 치렀지만, 엄청난 스트레스와 울분에 시달린 나머지 안타깝게도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요즘 세상에는 이른 60대의 나이였다. 사건이 일어난 지 31년 뒤이자 국가 상대 소송을 제기한 지 얼마 뒤인 2020년 9월 11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안 그래도 딸을 잃어버리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었다.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고 사람도 잘 안 만났다. 그나마 딸이 살아 있다는 생각의 끈을 잡고 지금까지 버텨 왔는데 아이가 이미 30년 전에 죽었고, 그 과정이 은폐됐단 사실이 극심한 충격이 되었다. 20년 7월 갑자기 주방에서 쓰러져 팔이 부러졌다. 팔을 치료하러 병원에 다니다가 간에 암이 많이 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큰 병원에 간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눈감는 순간까지 남편에게 '현정이 데리고 와라, 예전엔 못 살아서 현정이를 어디 맡겨 놓은 거 아니냐, 이젠 밥은 먹고 살만하니까 데리고 와라'고 말하며,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이의 뼈 한 줌이든 유류품이든 본 것이 없으니.
다시 2년 뒤인 2022년 9월, '서울에서 살다가 목축업을 하겠다고 내려온 자신이 딸을 그렇게 만들었다'며 평생을 자책하고 진실이 밝혀진 후에는 경찰에 대한 분함으로 잠을 이루지 못해 매일 수면제를 먹으며 버티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 다 소송의 결말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김 양의 오빠가 소송을 물려받게 되었다. 본래 4명이었던 가족 중 남은 이는 이제 그 한 명뿐이다. 변호인은 "부모로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등) 마지막 희망까지 무너지니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라며 손해배상 금액을 기존 2억 5천만원보다 많은 4억원으로 변경했다. 변호인은 "신체 건강하고 충분한 기대 수명이 남아있던 김 양의 부모는 경찰의 위법 행위가 밝혀진 지 불과 2~3년 안에 모두 사망했다. 경찰이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하려 한 행위의 영향이 결코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결국 유족 측이 승리했다. 2022년 11월 17일 1심 판결에서 정부는 유족에게 위자료 2억 2000만원을 내라고 판결했다. 부모에게 각 1억원, 형제에게 2천만원.

실종사건 수사에 관여한 경찰의 진술 내용, 당시 작성된 조사 보고서 등을 비춰보면 당시 경찰이 김양의 것으로 볼수 있는 사체를 발견했으나 불상[8]

의 방법으로 은닉했다. 피해자가 살해됐을 가능성을 인식했는데도 단순 가출 사건으로 종결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조작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이로인해 김양 유족이 김양에 대해 애도와 추모를 할 권리, 김양의 사인에 대한 알 권리 등 인격적 법익이 침해됐다고 봄이 타당하므로, 국가는 유족에게 위자료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

유족은 김양의 사망 여부를 알지 못한 채 장기간 고통받았고, 사체도 수습하지 못했다. 이런 피해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회복하기 어렵다. 수사기관이 조직적으로 증거를 은닉했고 국가에 대한 신뢰가 현저히 훼손돼 금전적 보상이 필요하다.

김양의 오빠는 동생의 소식을 기다린 30년보다 소송 판결까지 2년 8개월을 기다리는 게 더 힘들었다며 “재판부가 국가 책임을 인정하긴 했으나, 당사자인 경찰들이 이 사건에 대한 사죄를 꼭 했으면 한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직 진실이 더 있을 거 같은데 아직 다 말을 안 하기 때문에 말했으면 좋겠어요.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고, 어떻게 했는지만 더 물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이제 얘기를 안 하니까…#


법무부는 1심 선고 이후 "담당 경찰관들의 의도적 불법행위로 피해자 가족들이 약 30년간 피해자의 사망 여부조차 확인하지 못해 애도와 추모의 기회 자체를 박탈당했다"고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며 항소를 포기했다. 다만 유족은 항소했다. 소송대리인인 이정도 변호사는 "이태원 살인사건의 경우 수사기관의 과실로 실체적 진실 발견이 지연돼 유족 측 위자료가 4억원 가까이 인정됐다. 이 사건은 수사기관이 명백히 고의적,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한 것으로 국가 책임을 더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항소 이유를 설명했다. "또 소송 후 피해 아동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도 했다. 망인의 사망에 대한 직접적 책임을 묻는 것은 아니지만 유족들이 겪었던 정신적 고통의 정도를 고려하고, 비슷한 사례들에 비춰봤을 때 청구 금액이 절반만 인정된 것은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7. 그 외[편집]


  • 피해자가 불과 9세의 어린이였고 이춘재가 성폭행도 자백했기 때문에 소아성애 이야기도 일부에서 나왔으나 그럴 가능성은 낮고[9] 같은 연쇄살인범인 정남규의 케이스처럼 단순히 범행을 저지르기 더 쉬운 약자라서 노렸을 가능성이 높다.

  • 무료 변론을 하며 유족을 도운 이정도 변호사는 2023년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제22회 우수변호사상을 받았다. 수사기관의 위법한 수사행위와 관련된 사건이나 기타 과거사 사건 등에 있어 사건 발생 후 시간이 많이 흘렀더라도 국가가 책임을 부담할 수 있음을 확인받고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억제·예방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사회적 관심을 환기한 공로라고 한다. # 그는 이전에도 다수의 사건, 국선사건을 수행하며 억울한 피고인, 피의자들을 위한 무죄 판결, 무혐의 처분 등을 받아냈고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원, 국방부 검찰단 사망장병의 유족, 군범죄피해자 국선변호인으로 활동하며 억울한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에 조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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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서[편집]



[1] 병점동탄의 경계에 위치한 구봉산 일대인 화성시 능동 1128 / 병점동 865 일대 인근으로 추정. 추정인 이유는 동탄1신도시의 개발과 병점동 일대의 개발로 행정구역의 구획 조정이 있었기 때문이다.[2] 경찰을 떠날 때까지, 그리고 이춘재가 범인임이 밝혀질 때까지 거의 평생을 유족에게 입다물고 숨겨왔으니까.[3] 당시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 접견이 쉽지 않았다.[4] 연쇄살인범들은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기 수사 상황에 대해 조사하고 범행을 복기한다. 정남규 같은 경우에는 별로 좋지 않은 환경에 살면서도 외국 과학 수사 관련 자료까지 챙겨봤을 정도다.[5] 피해자 가족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낼 때 밝힌 소송 제기 이유에서 일부 인용[6] 줄넘기용 줄은 이춘재가 목을 매기 위한 목적으로 가져간 것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소지품과 다른 것이 당연하다. 아폴로 과자의 구매 여부는 애초에 부모가 확실하게 알 수도 없을 뿐더러 피해자가 이춘재를 마주치기 전 날에 사고 남은 것일 수도 있는 등 여러 가능성이 있었으나 당시 경찰은 이를 필사적으로 모른척했다.[7] 이 중 8차 사건 무마 및 누명 씌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특진한 최 순경은 10여 년간 부귀영화를 누리며 평안히 살았으나 인과응보인지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다. 1999년 교통사고로 저세상에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 생존한 다른 당시 경찰들이 '나는 모른다, 나는 아니다. 다 걔가 지시했고 주도했다'며 모든 책임을 일방적으로 떠넘기는 대상이 되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걸 이용한 것이다.[8] 不詳, 상세히 밝혀지지 않음. 자세히 알 수 없음[9] 자주 오용되는 단어 중 하나로 소아성애자는 어린 아이에게도 성욕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오직 어린 아이에게'만' 성욕을 느끼는 이상성애를 의미한다. 이춘재의 범행 목록을 보면 피해자는 20대 이상의 성인 여성이 대다수이며 최고령 피해자는 70대 노인이다. 이춘재 외에 2명의 어린이를 유괴 후 성추행, 토막살해한 정성현도 집에 수백 편의 아동 포르노를 소지하고 있었으나 성인 여성과의 성적 접촉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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