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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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화엄사.png
화엄사 각황전(국보)를 중심으로 찍은 사진. 각황전으로 진입하는 계단 앞에 서 있는 탑은 서 오층석탑(보물)이며, 각황전 앞에는 석등(국보)과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이 보인다. 국보로 지정된 사사자 삼층석탑은 각황전 뒤쪽에 자리하고 있으니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하자.

화엄사의 전경



1. 개요
2. 역사와 설화
2.1. 창건부터 중창
2.2. 임진왜란 이후 현재까지
2.3. 각황전 중건 설화
3. 가람 배치와 문화재
3.1. 이상한 가람 배치
3.2. 문화재
3.2.2. 도난문화재
3.2.3. 벽암대선사비
3.2.3.1. 앞면
3.2.3.2. 뒷면
3.3. 전각
3.4. 산내 암자
4. 화엄사를 거쳐간 스님
5. 교통
5.1. 자가용
5.2. 대중교통
6. 여담
7. 말사 목록[1]
8. 관련 문서
9.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한자 : 華嚴寺 / 로마자 : Hwaeomsa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통일신라 8세기 중엽에 세워진 역사 깊은 사찰이며 전국의 사찰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거대한 중층 금당이자 국보로 지정된 각황전으로 유명하다.

2. 역사와 설화[편집]



2.1. 창건부터 중창[편집]


구례군이 현재 전라남도이기 때문에 화엄사가 백제와 연관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화엄사는 신라 고승들이 창건하고 중창한 절이다. 오늘날의 구례와 광양, 순천 지역은 6세기까지 가야의 영토였고,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이 가야의 전 지역을 신라에 완전히 병합하면서 이 지역도 신라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광주대구고속도로 경로를 따라 남원시에 있는 아막성까지 신라의 영역이었고 화엄사는 남원에 인접한 지리산 자락의 길지에 지어졌다.

이 지역을 신라에 편입한 진흥왕은 화엄사를 세움으로써 해당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면서 지배력을 강화하고, 아울러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신라의 전통적인 정복지역 유화정책과 신라 불교 고유의 중요한 특징인 호국불교사상과 연관되는데, 실제로 화엄사는 화랑정신교육 장소로 이용되는 등 군사 교육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신라고승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 이 분은 신라에 대승 불교를 도입했으며 진흥왕의 총애를 받았던 승려였다. 절의 이름은 당연하게도 화엄경의 두 글자를 따서 붙었다. 이후 643년(신라 선덕여왕 12년)에는 신라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건의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신라의 고승 자장(慈藏)법사가 절을 증축하고 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 7층탑, 석등롱(石燈籠) 등을 지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677년(신라 문무왕 17년) 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대사가 각황전을 창건하고 왕명으로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긴 것을 화엄사에 보관한다. 이 기록은 조선 정조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전라도 구례현의 읍지인 『봉성지(鳳城志)』에 적혀있다. 그리고 의상은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 사상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경덕왕 때에 8원(院) 81암자(庵子)로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었고, 875년(신라 헌강왕 1년)에는 도선대사가 다시 증축했다고 한다.

고려 때에도 꾸준한 중수가 이루어졌는데, 943년(고려 태조 26년)가 도선대사의 유지에 따라 중수를 한 이후, 광종, 문종, 인종, 충숙왕 때에 중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인 만큼 고려시대 전시대에 걸쳐 절이 지속적으로 유지보수, 관리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화엄사 연기 조사의 진영에 참배하고(華嚴寺禮緣起朝師影)

偉論雄經罔不通  웅위한[2]

경과 논에 모두 통달하여

(조사는 평소에 『기신론』과 『화엄경』을 강연하였다. 師平昔講演起▣花嚴)

一生弘護有深功  일생 동안 널리 알린 공이 깊어라.

三千義學分燈後  3천 의학이 법등을 나눠 받은 뒤로

圓敎宗風滿海東  원교의 종풍이 해동에 가득해졌도다.

(본전에서 가르침을 전한 의학의 수가 3천이었다고 하였다. ▣▣▣▣▣▣▣▣▣▣)

『대각국사문집』

또한 대각국사 의천이 화엄사에 방문하여 화엄사를 처음 세운 연기 조사의 초상화를 보고 남긴 시가 전해진다.

화엄사는 지리산 산록에 있다. 승려 연기(煙氣)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절을 지었다. 그중에는 불전이 하나 있는데 네 벽에 흙을 바르지 아니한 청벽(靑壁)으로 그 위에 화엄경을 새겼는데, 세월이 오래되니 벽이 무너지고 문자는 희미해져 읽을 수가 없다. 석상(石像)이 있는데 어머니를 이고 서 있다. 세속에서 이르기를, “연기와 그 어머니가 화신(化身)한 곳이라.” 한다. 절 앞에는 큰 시내가 있고, 동편의 일류봉(日留峯) 서편에 월류봉(月留峯)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화엄사의 모습이다. 이 기록은 화엄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 전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2.2. 임진왜란 이후 현재까지[편집]


그러다가 임진왜란의 와중인 1597년(조선 선조 30년) 인근 석주관에서 일본군과 대치할 때 승군과 군량을 지원해 준 보복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고, 살아남은 승려들은 지리산과 주변 동굴에서 은신하다가 다시 모여 이 절의 폐허를 본 뒤 분개하고는 이 '대화엄종주'를 다시 세우기로 맹세하고 절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1630년(조선 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중심이 되어 재건을 펼쳐서 대웅전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건물들은 1636년, 각황전은 1703년(기록에 따라서는 1643년)에 완료했다.

이러한 재건을 거치면서 화엄사는 1701년(조선 숙종 27년)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가람(大伽藍)(큰 절)으로 정했다. 선교양종이란 불교의 일파인 선종교종을 가리키는데 선종은 참선을 통한 스스로의 깨달음을 중시하고, 교종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두 일파를 다 갖춘, 요즘 식으로 절 중의 절이라는 뜻.

파일:화엄사 전경 국립중앙박물관.jpg
일제강점기 화엄사 전경
1925년 수해 복구를 위해 화엄사 청년회에서 53원 30전을 보냈다.
1931년 정병헌이 주지가 되었다.
1934년 정병헌이 화엄사 주지 재선에 성공하였다. 63표 중 33표를 받았고 소병선은 24표로 낙선되었다.

6.25 전쟁때 '빨치산들이 지리산의 절에 숨을 수도 있으니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당시 이를 받은 차일혁 초대 경찰 총경이 "태우는 건 하루면 족하지만 다시 세우려면 천 년도 부족하다." 하면서 대신 빨치산이 숨기 힘들도록 문짝만 모두 떼어 태울 것을 건의하여 살아난 이야기가 유명하다. 심지어 당시 차일혁 총경이 담당하던 지역은 전라북도였다. 한 마디로 경계를 넘어서 일을 벌인 것. 이 때문에 차일혁 총경은 감봉 조치를 당했지만 후일 화엄사를 비롯해 지리산의 문화유적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3등급)이 추서되었다.


2.3. 각황전 중건 설화[편집]


(출처는 오마이뉴스 강형구 기자 해당 기사)

본래 각황전의 이름은 장육전이었다.

장육전 중건불사를 마음으로 결심하고 백일기도를 올리던 계파 선사는 문득 지난 밤 꿈을 떠올려 보았다. 백일기도를 드리던 지난밤 비로소 잠깐 잠자리에 들었는데 언뜻 하얀 옷을 입은 신령스런 노인이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 계파[3]여! 그대가 지금 세운 장육전 중건불사에 대한 대발원은 쉽게 이루어질 일이 아니니라. 그렇게 큰 일을 이루려면 복 있는 화주를 내어 큰 시주자를 얻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러려면 대웅전에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먼저 물 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어 빼보았을 때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이 장육전 건립의 화주가 능히 될 수 있을 것이니라! 내 말을 명심하거라, 계파여!"

이렇게 말을 마친 신령스런 노인은 문득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눈을 번쩍 뜬 계파 선사는 이상스런 꿈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날짜를 짚어보니 마침 다음 날이 드디어 백일기도 회향일이었다. 자신의 백일기도에 드디어 부처님이 답을 주신 것을 알아차린 계파 선사는 묵묵히 그 꿈에서 준 계시를 실행하여 장육전 중건 불사를 할 수 있는 화주를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계파 선사는 대중 스님들이 아침 공양을 마치자 대웅전 마당으로 모두 모이게 했다. 산내 스님들과 대중에게 지난밤 꿈 이야기를 한 계파선사는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대웅전에 차려놓고 차례차례 스님들이 들어가 먼저 물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은 다음 그 물 묻은 손을 다시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넣어 하얀 밀가루가 묻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벌써 승려 열댓 명이 그렇게 해보았으나 손에는 하얀 밀가루가 묻어있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실망할 때가 아니었다. 구름처럼 많은 스님들이 마당 가득 줄줄이 늘어서서 대기하고 있지 않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끊고 맑고 밝은 부처의 마음을 깨달아 고통 지옥에 시달리는 중생구제의 대원력을 세우고 출가한 수행자들이기에 누군들 장육전 대불사의 화주를 맡을 주인공이 결코 없지는 않을 듯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천여 대중을 넘는 산내의 모든 사람들을 다 실험해 보았으나 화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망의 빛이 얼굴 전면에 감도는 계파선사는 자신의 장육전 중건불사를 위한 백일기도가 이렇게 맥없이 끝나 버리는가 하고 깊은 회한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실험을 아직 안 한 누가 없을까?'

이렇게 마음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헤아려보는 순간 공양간 앞에서 중년의 공양주 보살이 캐온 봄나물을 다듬고 앉아있는 것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계파선사는 대중스님에게 일러 나물을 다듬고 앉아 있는 공양주보살을 불러오게 했다.

계파선사의 말에 공양주보살은 마다하지 못하고 대웅전으로 들어가 먼저 물 묻은 항아리에 손을 푹 넣었다. 그런 다음 물 묻은 손을 그대로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푹 넣었다. 그리고는 그 넣은 손을 대중스님들 앞으로 내밀었다.

"아! 이럴 수가……."

"밀가루 하나 묻지 않았다니!"

대중스님들이 공양주보살의 손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화엄사 공양간에서 오직 밥 짓고, 나무 해 불 때고, 나물 캐 나물 만들고, 국 끓여 올리고 설거지하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 그런 엄청난 재물이 들어갈 대불사의 화주가 되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이적입니다. 이로써 장육전 중건불사의 대화주로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정해진 것입니다."

계파선사는 대중스님들에게 엄숙히 선언했다.

"선사님 저는 아닙니다. 일자무식인 저는 오직 밥밖에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거두어 주소서 선사님!"

파리하게 얼굴이 질린 공양주보살은 계파선사의 말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공양주보살님이 10년을 공양주로 열심히 일한 복력이 천여 대중스님들보다 뛰어나니 이렇게 오늘의 실험에서 신비로운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실험한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주인이신 문수보살님께서 꿈에 나에게 지시한 것이니 공양주보살님을 화주로 선택한 것은 바로 문수보살님입니다. 그러니 이제 대시주자를 얻어 장육전 중건불사를 잘 이루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계파선사는 공양주보살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대중스님들도 공양주보살이 화주로 정해진 것을 알고는 공양주보살에게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화주의 중임을 맡기게 되었다.

꼼짝없이 그날 화주의 중책을 맡은 공양주보살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직 밥 짓고 부처님 앞에 조석으로 공양 올리는 일밖에 모르는 자신이 엄청난 재물이 들어갈 장육전 대불사의 책임을 맡다니 자다가도 기절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화주로 정해진 바에야 어떻게든 부처님을 붙잡고 늘어지는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지엄하신 계파선사가 화주 소임을 딱 맡겨버린 판이라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저녁 공양을 지어 올리고 공양시간이 끝나자 공양주보살은 대웅전으로 들어가 마음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았다.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 소임으로 맡은 화주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맡은 바 소임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리며 자꾸 머릿속으로 되뇌며 기도를 하는 공양주보살의 눈꺼풀이 어느덧 스르르 감겨 내렸다.

그러더니 그 눈앞에 머리가 허연 노인이 홀연 나타나는 것이었다.

"공양주보살, 그대는 화주를 맡은 일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일 아침 일찍 화주 소임을 실행하러 길을 떠나거라. 그리고 길을 가다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거라. 알았느냐!"

공양주보살은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노인은 없었다. 대신 부처님이 빙그레 미소를 지은 채 촛불 앞에서 반짝이는 것이었다. 꿈이었다.

'내일 아침 길을 떠나서 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청하라고? 아! 이는 지리산의 주인인 문수보살님의 현몽이구나.'

공양주보살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음 날 아침 공양을 마친 후 비로소 화주 소임을 위해 길을 떠났다. 꿈에 노인의 말처럼 길을 가다가 처음 만나는 사람을 무조건 붙잡고 장육전 대불사의 시주자가 되어 달라고 다짜고짜 부탁을 할 참이었다. 사실 그 방법 외에는 자신에게는 더 이상의 좋은 방법도 없을 듯 싶었다.

맑은 지리산 물이 굽이쳐 흘러내리는 길 따라 내려가면서 공양주보살은 진달래 꽃이 피고 진자리에 파릇하게 돋아난 새순들을 바라보면서 모처럼 바깥바람을 쐬며 여러 생각들을 자유로이 해보았다.

어젯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부탁하라고 했으니 사실 그 일도 다 풀린 일이 아닌가. 적어도 천석지기나 만석지기 큰 벼슬을 사는 대감을 만나게 되어 무사히 일이 풀리게 되겠지하고 낙관해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간절히 고대하며 길을 가는데 진짜 멀리서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이제 저 사람이 장육전 불사를 해 줄 어마어마한 재물을 가진 훌륭한 시주자이겠거니 하고 공양주보살은 들뜬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가갔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다가가던 순간 공양주보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공양주보살은 열린 입을 닫지 못했다. 공양주보살 앞에 나타난 이는 놀랍게도 누더기를 걸친 거지 할머니였던 것이다. 화엄사 앞에 움막을 치고 살면서 가끔씩 화엄사 공양간에 와서 나물도 캐주고, 불도 때주고, 잔심부름을 거들어주면서 한 끼 공양을 얻어먹고 가거나 누룽지나 과일을 얻어가던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거지 할머니였다.

돈 많고 권력 많은 대 시주자를 만나겠거니 했는데 저런 거지 할머니라니,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머리가 어지러워진 공양주보살은 그 자리에 짚단처럼 맥없이 풀썩 쓰러질 지경이었다.

절망의 순간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공양주보살은 지난밤 꿈만을 믿고 안되겠다 싶어 다짜고짜 엎드려 말했다.

"대 시주자님이시여! 우리 화엄사 장육전을 크고 훌륭하게 지어주소서!"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이제 실성을 했나보네 그랴. 새로 장육전 불사를 한다고 계파선사님이 그러시더니 이제 아주 실성을 했어 그랴!"

"아닙니다. 대 시주자님이시여!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장육전을 새로 짓게 시주를 해주옵소서!"

거지 할머니가 그 말을 들으며 보니 공양주보살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로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거지 할머니는 순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말했다.

"지리산의 문수보살님이시여!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면 장육전 불사를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저에게 가피를 내려주소서!"

거지 할머니는 수십 번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외더니 순간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지리산 깊은 계곡 아래로 몸을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양주보살은 깜짝 놀라 거지 할머니가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아스라이 저 아래로 몸을 던졌으니 죽었을 게 틀림없었다. 공양주보살은 어쩌다가 장육전 화주가 되어 애매한 생목숨 하나를 죽게 하였구나 생각하고는 큰일이다 싶어 마구 달아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그새 육 년이 지났다. 한양 땅으로 도망가 주막집에서 막일을 하고 살던 공양주보살은 어느 부인의 심부름으로 창덕궁 앞에 나가게 되었다. 손님 하나를 만나 데려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곳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마침 궁 안에 살던 어린 공주가 유모와 함께 창덕궁밖에 나와 놀고 있었다.

다섯 살이나 먹었을까 하는 어린 공주는 길가를 아장아장 달려 다니며 뛰어 놀았다. 그 옆에 서있던 공양주보살은 그 어린 공주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어린 공주가 공양주보살을 알아보고 낡은 옷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우리 공양주보살님!"

그 어린 공주의 눈빛은 정말 공양주보살을 알아보는 눈빛이었다. 공양주보살은 깜짝 놀라며 그 어린 공주를 안아 주었다. 그런데 이 어린 공주는 이상하게도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손이 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린 공주의 손을 공양주보살이 만지자 그대로 펴지는 것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 공주의 펴진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써져 있었다.

이 사실은 곧바로 숙종대왕에게 전해졌다. 숙종은 공주를 낳고 손이 펴지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몹시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공양주보살의 손이 닿자 펴지고 그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글씨가 써져 있다는 것을 보고는 그 내력이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숙종은 공양주보살을 곧 내전으로 불러 들였다. 숙종 앞에 나선 공양주보살은 절을 올리고 나서 지금까지의 일을 소상하게 말했다.

"참으로 장하도다! 거지 할머니의 진실된 원력이 결국 공주로 환생하게 하였구나! 내 공주를 위하여 모든 비용을 내겠도다!"

숙종은 감격하여 말했다. 그러면서 장육전 중창을 할 비용을 바로 하사하였다. 장육전이 완성되자 숙종은 직접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사액을 내려 주었다. 각황전이라는 사액의 뜻은 부처님을 깨달은 왕,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양주보살은 각황전 건물이 완성되는 날 먼 옛날 그 거지 할머니를 떠올리면서 혼자만 아는 깊은 미소를 짓고 물끄러미 각황전 처마 위로 펼쳐진 지리산과 파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었다.

물론 숙종에겐 슬하에 공주가 없었고 실록에 기록되지도 않은 민중의 야사이다.[4]

법철스님에 따르면 공양주보살은 거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관아에 쫓겨 청나라까지 흘러가게 되고 저 공주는 청나라 강희제의 딸이라고 한다. 강희제가 시주를 하고 숙종 임금이 도왔다는 설.# 그래서 각'왕'전이 아니라 각'황'전이라 한다.


3. 가람 배치와 문화재[편집]



3.1. 이상한 가람 배치[편집]


파일:attachment/WUtemple03.jpg
화엄사의 가람 배치도

화엄사가 일반적인 다른 사찰들과 차이점을 든다면, 보통 절이라면 이나 대웅전이 가장 큰 건물이기 마련인데, 이 화엄사는 각황전이 압도적으로 크다. 물론 각황전 역시 부처상이 있는 금당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러한 크기 차이 때문에 가람의 배치가 지나치게 비대칭적으로 변해 좀 이상해졌다. 게다가 각황전 앞의 석등과 그 아래의 서 오층석탑은 삐뚤게 배치되어 있고, 대웅전 앞 아래에 있는 동 오층석탑 역시 정 중앙에 있지를 않고 삐뚤게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 더 이상한 점은, 중문(사천왕문)을 지나 대웅전과 각황전을 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보제루를 여느 절과 달리 밑으로 못 지나가고 동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단한 의도가 숨어있다.

절의 방문자가 보제루를 오른쪽으로 멀리 돌게되면 각황전은 멀어지고 대웅전은 상대적으로 가깝다. 그렇게 되면, 원근감에 의해 각황전과 대웅전의 크기 차이가 많이 줄어든다! 또한 보제루를 돌아 삐뚤게 배치되어 있는 각황전과 대웅전, 탑과 석등 전부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되면 그 순간 마치 일직선상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서 오층석탑-석등-각황전이 일렬로 놓이고, 동 오층석탑과 대웅전이 일렬로 놓이게 되는 탁월한 시각적 배치를 보여준다.


3.2. 문화재[편집]


화엄사는 역사적·학술적인 가치를 인정 받아 절 자체가 2009년 사적 제505호와 명승 제64호로 지정되었으며, 경내에는 2022년 2월 현재 국보 5건, 보물 8건, 천연기념물 2건이 지정되어 있다. 해당 문화재들의 종류와 명칭은 아래 표와 같다.

종류
명칭(지정번호)[5]
지정년월일
비고
국보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12)
1962년 12월 20일
항목 및 후술되는 내용 참조.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35)
구례 화엄사 각황전(67)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301)
1997년 9월 22일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불삼신불좌상(336)[6]
2021년 6월 23일
보물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132)
1963년 1월 21일
국가문화유산포털 홈페이지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133)
국가문화유산포털 홈페이지
구례 화엄사 대웅전(299)
국가문화유산포털 홈페이지
화엄사 '대웅전'의 편액은 선조의 여덟째 아들 의창군 이광이 쓴 것이다.[7]
의창군이 쓴 화엄사 대웅전 편액은 이후 번각(飜刻)되어 인근의 하동 쌍계사, 서울 조계사, 진관사, 완주 송광사 등 여러 사찰에도 걸렸다. 예산 수덕사, 정읍 내장사에도 걸렸으나 이쪽은 나중에 교체되었다.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300)
국가문화유산포털 홈페이지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1040)
1990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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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가 각황전을 창건하고 왕명으로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겨 보관했는데, 임진왜란 때 절이 전소되면서 파편으로 남았고 색도 검게 그을렸다.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화엄사 서 오층석탑 사리장엄구(1348)
2002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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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1363)
2003년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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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2139)
2021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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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구례 화엄사 올벚나무(38)
1962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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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벚나무는 벚나무의 종류 중 하나로 일반적인 벚나무보다 꽃이 잎보다 일찍 핀다고 한다.
이 나무는 병자호란 이후 군수물자로 쓰이던 벚나무를 심으라는 인조효종의 명에 호응하여, 근처에서 잘 자라던 올벚나무를 여러 그루 심었는데, 그 중 지금까지 살아 있는 한 그루로서 현재 가장 수령이 오래된 벚나무 단목이다. 사찰 경내에는 자리하지 않고, 사찰 입구에서 개울 건너에 있는 일지암이라는 암자 뒷편에 자리하고 있다. 혹시 모르면 사찰 분들께 한 번 물어보길.
구례 화엄사 매화(485)
2007년 10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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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각황전 옆에 자리한 '홍매화(紅梅花)'가 유명[8]해서 그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착각하기 쉽지만, 화엄사 경내에서 구층암을 지나 길상암으로 가기 전 길가에 피어있는 이 '백야매(白野梅)'가 천연기념물이다.

참고로 문화재는 아니지만, 전통 건축을 연구 혹은 관심이 있는 분들이 화엄사에서 찾는 곳이 '구층암(九層庵)'이라는 암자인데, 이 암자의 요사채 건물의 기둥은 일반적인 가공된 목재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목재. 그것도 모과나무의 기둥을 그대로 건물에 쓰였다. '한국 건축은 자연과 어우러지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건물이니 해당 암자에서 길상암 가는 길에 자리한 천연기념물 매화나무를 구경하는 김에 같이 보는 걸 추천한다.

파일:attachment/WUtemple1.jpg
구층암의 독특한 기둥.



3.2.1.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화엄사/국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2. 도난문화재[편집]


  • 금강역사상 및 녹사 - 나한전 안에 있던 유물이다.
  • 지장탱화, 시왕탱화 - 명부전 안에 있던 불화이다.
  • 지장암 보광전 불상 - 화엄사 산내 암자인 지장암에 있던 목조관음보살좌상이다.


3.2.3. 벽암대선사비[편집]


1663년 세워진 벽암 각성을 기리는 비로 비지정 문화재이다. 앞면과 뒷면을 클릭하면 비문의 해석문을 볼 수 있다.

3.2.3.1. 앞면[편집]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

국일도대선사비명(國一都大禪師碑銘)(전자(篆字)로 씀)

사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 벽암(碧巖) 비명(碑銘) 병서(幷序)

원임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이경석(李景奭) 지음

숭록대부 행의정부좌참찬 겸지경연 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오준(吳竣) 글씨 씀

가의대부 행승정원도승지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 조계원(趙啓遠) 전자(篆) 씀

무릇 유교와 불교는 이치가 달라 도를 함께 도모할 수 없고 수행과 학업을 고찰하면 또한 보고 느끼는 것에 가로막혀 있다. 대패로 빈 구멍을 파낸다는 뜻은 오히려 자기만 옳다고 행동하는 것만 못하다. 기원정사(祗園)에서 은혜를 베푸니 공적은 널리 구제하는 일에 빼어나고 하늘에 길게 드리워 높으니 실로 선림(禪林)에 흡족하다. 벽암(碧巖)대사의 상수제자가 천리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서호(西湖)로 나를 찾아왔다. 행장을 손에 들고 글을 써줄 것을 청하였는데 날이 갈수록 더욱 절실하였다. 내 그 정성을 차마 져버릴 수 없어 결국 행장에 의해 글을 쓴다.

행장에 따르면, 대사의 법명은 각성(覺性)이고 벽암(碧巖)은 그 호이다. 호서(湖西) 보은(報恩) 사람으로 속성은 김해(金海) 김씨(金)이고 그 선조는 사대부였다고 한다. 대사의 아버지가 일찍이 현의 서쪽에 살 만한 곳을 골랐는데 관상을 보는 자가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큰 승려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어머니 조(曹)씨가 자식이 없었는데 함께 깨끗이 목욕재계하고 칠성신(北斗)에게 빌자 오래된 거울을 꿈에서 보고 임신하였다. 대사를 낳으니 만력(萬曆) 을해년(선조 8, 1575년) 12월 정해(丁亥)일이었다. 풍채와 기골이 바르고 엄정하였고 눈은 번개처럼 빛났다.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어려서도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9살에 아버지를 잃고서 몸이 매우 여위었다가 겨우 나았다. 이미 복상을 끝낸 후 돌연 지나가는 승려를 만나고는 선(禪)을 배우는데 마음이 기울었다. 어머니와 거듭 헤어졌는데 점차 느끼고 깨닫는 것이 있어서 마침내 화산(華山)으로 가서 설묵(雪默)대사에게 절하고 스승으로 섬겼다. 14세에 머리를 깎고 보정노사(寶晶老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부휴(浮休: 善修)가 화산에 왔는데 그를 매우 남다르게 여기고 진실한 법(眞筌: 眞詮=眞諦)을 권면하였다. 곧 부휴대사를 따라 속리산(俗離山)으로 들어갔고 덕유산(德裕), 가야산(伽耶), 금강산(金剛) 등을 옮겨 다녔다. 날마다 경전을 보는 것이 이로부터 계속되었고 잠시도 놓지 않았다. 임진년(선조 25, 1592년) 난에 송운 유정(松雲 惟政) 대사가 관동(關東)에서 의려군(義旅軍)을 불러 모았다. 부휴선사에게 가서 묻고는 산에서 적을 피하였는데 반드시 경전을 손에 들고 어려운 곳을 물었다. 계사년(1593년) 송운이 부휴를 조정에 천거하여 격문으로 부르고 위에 아뢰니 대사 또한 칼을 잡았다. 명나라 장수를 따라 바다에서 적을 격파하였는데 중국 사람들이 대사를 보고 매우 칭송하였다. 경자년(1600년) 칠불난야(七佛蘭若)에서 하안거(結夏)를 하였는데 부휴가 병이 들어서 강석을 거두고 대사에게 물려주었다. 대사가 사양하였지만 할 수 없어서 법좌에 올라 토론하니 현묘한 기풍이 크게 떨쳐졌다. 병오년(1606년) 가을 모친상을 당하니 문도 대중을 떠나 속리산 가섭굴(迦葉窟)에서 재(齋)를 행하고 복을 빌었다. 남이 견디지 못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었으므로 부휴 문하에서 20여 년간 수업하여 입실(入室)제자로 법을 전수받았다. 계를 실천함에 뛰어났고 인연에 따라 태연하고 담박하였다. 곡기를 끊고도 굶주리지 않았고 밤을 새우고도 잠을 자지 않았으며 늘 옷은 닳고 헤져 있었다. 방장실(丈室: 方丈, 住持의 방)에 결가부좌를 하니 책 상자를 짊어지고 오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단 이슬 같은 가르침이 골고루 뿌려졌다. 스스로 세 개의 잠(箴)을 지어 문도를 경계하였다.

생각함에 거짓이 없다.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다.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신비한 구슬이 한 번 비추니 고인 물에 빛을 담근다. 화엄(華嚴)을 엄숙히 외우니 큰 악귀가 퇴각한다. 깨끗한 땅에 썩은 고기를 묻으니 요괴가 단박에 없어진다. 심지어 사나운 호랑이가 길을 지켜준 적도 있었고 따르는 까마귀가 어깨에 모여들었으며 닭은 다시 살아나 보답할 줄을 알고 그물을 태우자 물고기는 감사함을 머금었다. 날고 달리는 동물도 오히려 교화하였는데 하물며 인간에 있어서야! 여러 산사(山園: 山寺)를 혹은 창건하고 혹은 중수하였는데 쌍계사(雙溪)의 동찰(東刹), 화엄사(華嚴)의 대대적 중창, 송광사(松廣) 가람이 그 중 큰 것이며 나머지는 생략한다. 광해군 때 옥사(獄事)가 일어났는데 부휴선사가 요승의 무고를 당하니 대사가 함께 서울로 들어갔다. 광해군이 두 대사를 보고 범상치 않게 여겨서, 부휴선사를 석방하여 산에 돌아가게 하였고 대사를 봉은사(奉恩寺)에 머물게 하여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으로 삼았다. 공경과 사대부 여럿이 대사와 친하였는데 동양위(東陽尉: 申翊聖)와 특히 사이가 좋았다. 얼마 안 있어 남쪽으로 돌아갔다. 인조대에 남한(南漢)산성을 쌓을 때 의논하는 이들이 주상에게 아뢰고 대사를 불러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삼고 승도를 영솔해서 축성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3년이 지나 공역이 끝났다고 보고하니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칭호를 하사하였고 아울러 의발을 내려주었다. 병자년(인조 14, 1636년) 지리산(智異山)에 머물렀는데 임금의 수레가 남한산성에 행차하였음을 들었다. 이에 북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대중을 깨우쳐 말하기를, “우리 승려들도 임금의 백성인데 하물며 널리 구제함(普濟)을 근본으로 삼음에야! 나라 일이 시급하니 차마 앉아서 관망할 수 없구나” 하였다. 바로 군복을 입고 궐기하였고 격문으로 남녘의 승려들을 불러들이니 달려 온 자가 수천 명이었다. 이끌고 북쪽 길로 가는데 적이 퇴각하였음을 듣고는 통곡하며 남으로 돌아왔다. 이후 동쪽 일본으로 가는 사신으로 임명되었는데 감히 사양하지 못하다가 사행이 중도에 이르러 노환이 심해졌기에 청하여 산으로 돌아갔다. 효종은 즉위 전에 편지를 보내고 물건을 보내주었는데 즉위함에 이르자 조정의 의논으로 총섭(摠攝)의 직책을 제수하고 적상산(赤裳)의 사각(史閣)을 지키게 하였다. 앉아서 남녘 승려의 기풍을 교화하고 널리 진실한 법을 펼쳤다. 머문지 얼마 안 되어 여러 명산을 유력하였는데 부안(扶安)의 변산(邊山)을 올려다보고 남해(南海)를 굽어본 후 지리산(方丈) 화엄사(華嚴寺)로 돌아와 주석하였다. 기해년(1659년) 여름 효종이 승하하자 제사를 올리고 슬피 울었다. 가을인 9월에 미미한 병세가 있었는데 문도들에게 수업에 힘쓸 것을 권면하였고 나라의 은혜를 갚으라고 하면서 비석은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경자년(현종 1, 1660년) 정월 12일 제자들이 대사가 장차 입적할 것을 알고 게송을 청하였다. 이에 붓을 잡아 손수 쓰기를,

“대경(大經) 8만 게송과 염송(拈頌) 30권이 충분히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두 이로움을 갖추었는데 어찌 별도로 게송을 지을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편안하게 입적하니 세상에 몸을 맡긴지 86년, 법납(禪臘)은 72세였다. 함께 받들어서 다비를 행하였는데 삼남(三南) 온 절의 불제자들이 골짜기를 메웠다. 사리 세 개가 튀어 나오자 절의 서쪽 기슭 부도에 봉안하였다. 대사가 불교를 계승함은 저 부용영관(芙蓉靈觀)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임제(臨濟)가 남긴 법맥을 접한 것이다. 부휴와 청허 휴정(淸虛 休靜)은 모두 영관을 섬겼는데 휴정은 송운(松雲)에게 전하였고 부휴는 벽암(碧巖)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저술로는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1권, 『간화결의(看話決疑)』 1편,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1권이 있으며 제자 중 다수가 현묘한 이치에 통하는 관문(玄關)을 열었다. 글을 써줄 것을 청한 이는 율계(律戒)이다. 내 일찍이 원대한 뜻을 품었는데(圖南), 벽암이 와서 구례현(求禮縣)에서 만나보고 나에게 지팡이를 주었다. 율계가 그를 수행하였는데 수년 전에 율계가 또한 낙하(洛下)로 나를 방문하였고 지금 스승을 위해서 왔으니 참으로 매우 부지런하다. 이런 관계로 비명을 짓는다.

대사의 높은 행실은 부모께 효도함에 근원하였고

대사가 속세를 버린 것은 대사의 진면목을 얻은 것이다.

지혜의 칼은 의심을 끊었고 깨달음의 터에서 인륜을 높이 숭상하며,

자비의 배는 중생을 구제하고 보배로운 뗏목으로 나루를 건넌다.

수많은 미혹이 단박에 흩어지니 밤에 새벽을 맞는 것과 같도다.

바다에서는 큰 고래가 따르고 산에서는 사나운 호랑이가 복종하며

물고기는 못에서 즐기고 새는 집에서 따른다.

은혜는 대천세계에 두루 미치고 의리는 시급한 어려움에서 드러난다.

공적은 성채에 있고 도는 산봉우리보다 높구나.

자취는 선림(禪林)에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나라에 있을 뿐이다.

외로운 구름은 머물지 않고 가는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학은 가까이 머물 곳을 잃고 갈매기는 쪼개진 잔에 놀란다.

산천의 색이 변하고 고승은 슬픔을 일으키는데

절에는 소리가 남아 오히려 구름을 감싸서 돈다.

눈에는 빛이 남아 있고 정신은 함께 없어지지 않았구나.

생각건대 바위(巖)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예로부터 홀로 푸르도다(碧).

-해석자 정병삼-



3.2.3.2. 뒷면[편집]

강희 2년 계묘년(1663년) 8월 일 세움

관찰사(觀察使) 조귀석(趙龜錫)

가선(嘉善) 정사립(鄭士立) 손춘절(孫春節) 오말복(吳唜?) 통정(通政) 정애복(鄭愛?) 김기수(金起水) 명진(命眞) 김개금(金介金) 최복남(崔?男) 오말남(吳唜男) 이명립(李命立) 박영록(朴永?) 성의춘(成儀春) 해순(海淳) 언신(彦信) 청해(淸海) 회묵(懷默) 조봉선(曹奉先) 덕묵(德默) 처우(處愚) 천해(天海) 사순(思順) 성정(性靜) 혜심(惠諶) 청간(淸侃) 성일(性逸) 영우(靈祐) 상심(尙諶) 청변(淸卞) 영현(英絢) 현변(懸卞)

자헌 승대장겸총섭(資憲 僧大將兼摠攝) 응준(應俊)

가선(嘉善) 진일(眞一) 통정(通政) 성혜(性惠) 경헌(敬憲) 각명(覺明) 천선(天仙) 자순(自淳) 덕민(德敏) 탁린(琢璘) 충신(忠信) 일우(一祐) 도영(道英) 성천(性天) 옥헌(玉軒) 홍준(弘俊) 신희(信希) 지상(智祥) 여인(如印) 의상(義祥) 덕일(德一) 쌍휘(?輝) 학종(學宗) 현민(玄敏) 경오(敬悟) 자호(自浩) 수균(守均) 묘혜(妙惠) 처은(處?) 영축(靈?) 태준(太俊) 현찬(玄贊) 계민(戒敏) 운변(云卞) 영준(英俊) 신호(信浩) 선미(善美) 영규(靈圭) 의민(義敏) 덕인(德仁) 경인(敬仁) 계우(戒祐) 덕연(惠演) 신행(信行) 해담(海淡) 경욱(敬旭) 일학(一學) 설심(雪心) 유준(惟俊) □유(□宥) 두희(杜希) 천운(天雲) 청언(淸彦) 신해(信海) 계문(戒文) 법장(法莊)

총섭(摠攝) 희원(希遠) 종륵(從勒) 도성(道成) 도정(道淨) 명선(明善) 혜호(惠浩) 성욱(性旭) 명원(明遠) 도한(道閑) 희옥(喜玉) 삼학(三學) 해보(海寶) 응열(應悅) 인영(印英) 정임(正稔) 석륜(碩倫) □륜(□倫) 법호(法浩) 천응(天應) 지잠(智岑) 대언(大彦) 대의(大儀) 천인(天印) 천일(天一) 대흠(大欽) 현운(玄云) 지순(智淳) 두영(杜英) 계현(戒玄) 대영(大英) 행조(行照) 지호(智浩) 수간(守侃) 영숙(英淑) 자정(慈淨) 행수(行修) 자경(慈敬) 찬인(贊仁) 유찬(惟贊) 법명(法明) 능변(能卞) 계운(戒云) 의열(義悅) 의경(義敬) 원민(元敏) 규철(圭哲) 의전(義全) 천승(天勝) 융담(融淡) 보천(普天) 삼치(三冶) 삼일(三日) 삼윤(三允) 의택(義澤) 정인(淨仁) 수견(守堅) 원규(元圭) 수백(守白) 의간(義侃) 의정(義淨) 삼훈(三訓) 경찬(敬贊) 삼인(三印) 계강(戒康) 극보(剋寶) 정민(正敏) 기변(機卞) 선청(善淸) 선일(善日) 삼현(三玄) 원담(元淡) 탄일(坦一) 탄헌(坦軒) 문희(文希) 옥매(玉梅) 탄매(坦梅) 원진(元振) 쌍옥(?玉) 탄문(坦文) 일준(一俊) 문선(文善) 지행(志行) 인잠(印岑) 인헌(印軒) 일훈(一訓) 설잠(雪岑) 인환(印還) 응민(應敏) 상밀(尙密) 인견(印堅) 인한(印閑) 인안(印眼) 해현(海玄) 지명(智明) 인균(印均) 석임(碩稔) 인찬(印贊) 청성(淸性) 취행(就行) 취문(就文) 취해(就海) 취인(就仁)

병마사(兵馬使) 구문치(具文治)

태수(太守) 류중기(柳重起)

가선(嘉善) 손숙남(孫淑男) 김대남(金大男) 김귀연(金貴延) 추양(秋陽) 장인룡(張仁龍) 장승룡(張承龍) 류고공(柳古公) 사비(士非) 김안세(金安世) 박돌시(朴乭屎) 여옥(汝玉) 진개(陳介) 이득남(李得男) 최덕봉(崔德奉) 분개(粉介) 최치□(崔致□) 원철(元哲) 상원(尙元) 지행(智行) 탄원(坦元) 법정(法淨) 대오(大悟) 신여(信如) 홍택(弘澤) 묘원(妙元) 나영(懶英) 인규(印圭) 신열(信悅) 홍신(弘信) 혜림(惠林) 상희(尙熙) 영민(靈敏) 수초(守初) 정특(挺特) 성감(性甘) 성오(性悟) 인욱(印旭) 경눌(敬訥) 정현(正玄) 영인(靈印) 유극(惟克) 충경(??) 치옥(淄玉) 삼우(三祐) 천연(天然) 천민(天敏) 인종(印宗) 지선(智先) 연수(延壽) 성규(性圭) 원규(圓圭) 경연(敬然) 천일(天日) 대해(大海) 경현(敬玄) 지화(智和) 신홍(信弘) 설운(雪雲) 덕화(德和) 철웅(哲雄) 경림(敬林) 응수(應修) 응현(應玄) 천홍(天弘) 응암(應岩) 등계 처능(登階 處能) 혜원(惠遠) 천기(天機) 승준(勝俊) 승언(勝彦) 인영(印英) 인행(印行) 진언(震言) 법행(法行) 상천(尙天) 상행(尙行) 경일(敬一) 충옥(?玉) 승익(勝益) 혜휘(惠暉) 해란(海瀾) 태상(太祥) 성총(性聰) 태심(太心) 천율(天律) 현일(玄一) 신원(神遠) 홍인(弘印) 삼륵(三勒) 청순(淸順) 응초(應初) 도영(道英) 능안(能眼) 명교(明敎) 해영(海英) 보제(普濟) 나묵(懶默) 극념(克念) 사혜(思惠) 청학(淸學) 삼눌(三訥) 영원(英遠) 정신(貞愼) 융철(融哲) 신일(神一)

통정 도감(通政 都監) 인징(印澄)

총홍섭 전좌(摠洪攝 典座) 계종(戒宗)

등계 차지(登階 次知) 율계(律戒)

-해석자 정병삼-


3.3. 전각[편집]


  • 일주문
  • 불이문
  • 금강문
  • 천왕문
  • 운고루
  • 보제루
  • 종각
  • 영산전
  • 각황전
  • 나한전
  • 원통전
  • 영전
  • 대웅전
  • 명부전
  • 삼전
  • 원융료
  • 범음료
  • 만월당
  • 덕장전
  • 광학장
  • 화엄원
  • 탑전


3.4. 산내 암자[편집]


  • 구층암
  • 봉천암
  • 금정암
  • 연기암
  • 보적암
  • 지장암
  • 내원암
  • 청계암
  • 미타암
  • 남암
  • 묘향암[9]

4. 화엄사를 거쳐간 스님[편집]


화엄사에서 머물렀거나 인연이 있는 스님들을 다루는 장이다.
  • 연기 - 화엄사를 창건한 스님이다.
  • 선각 도선(先覺 道詵, 827~898) - 화엄사에서 스님이 되었다.
  • 낭원 개청(朗圓 開淸, 835~930) - 화엄사에서 스님이 되었다.
  • 선각 형미(先覺 泂微, 864~917) -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 관혜(觀惠) - 후삼국시대 승려로 견훤을 지지하였다.
  • 동진 경보(洞眞 慶甫, 869~948) - 태조 왕건의 왕사였던 스님으로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 윤눌(潤訥)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수군으로 참전하였다.
  • 중관 해안(中觀 海眼, 1567~?) -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으로 이후 화엄사사적이라는 역사책을 썼다.
  •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
  • 계파 성능(桂坡 性能)
  • 명곡 현안(明谷 玄眼)
  • 자운 처관(慈雲 處寬)
  • 용담 조관(龍潭 慥冠, 1700~1762)
  • 진응 혜찬(震應 慧燦, 1873~1941)
  • 포월 영신(抱月 永信, ?~1941)
  • 동헌 완규(東軒 完奎, 1896~1983)
  • 이산 도광(璃山 導光, 1922~1984)

5. 교통[편집]


화엄사 홈페이지 - 찾아오시는 길


5.1. 자가용[편집]


어느 쪽에서 오느냐에 따라 다르다.

양 쪽 모두 거리가 약 20분 정도로 비슷하며, 18번 국도의 종점으로 사찰 입구로 들어오는 길의 도로명은 화엄사로인데, 왕복 2차로에다가 마을과 학교가 있기 때문에 안전운행은 필수이다. 하지만 2023년4월 우회도로가 개통되었다.
애초에 우회도로 건설 목적이 화엄사를 편하게 진입하기 위함이다.사찰 바로 앞까지 주차가 가능하긴 하지만, 주차비를 내야 하므로 가급적이면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주차해서 숲길을 걸어보자.


5.2. 대중교통[편집]


구례공영버스터미널에서 화엄사 입구 정류장까지 가는 농어촌버스를 운행하며 5회는 성삼재까지 운행한다. 버스 정류장에 내린 후 화엄사까지 20분 이상 걸어가야 한다.

철도의 경우 구례구역이 가장 가깝지만 역에서 화엄사까지 바로 가는 버스는 없다. 1일 1회 운행하지만, 새벽 시간에만(02:40)에만 운행하고 이 마저도 구례구역 - 구례, 구례 - 성삼재가 타 노선으로 취급된다. 때문에 철도 대신에 택시를 이용하거나, 구례구역에서 구례 읍내까지 가는 버스를 타서 환승해야 한다.

시외버스는 구례, 곡성 경유 광주행, 구례, 곡성, 남원 경유 전주, 하동 경유 부산서부행이 있다.


6. 여담[편집]


  • 지리산 국립공원 안에 있기에 입장료를 받는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지리산 국립공원은 2007년 부로 무료로 개방이 된 상태이다. 다만, 여기서 노고단으로 가든 안 가든 절에서 '문화재 관람료' 명목으로 걷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 요금은 성인 기준 4,000원 정도. 그리고 구례군이 대중교통이 좀 부실한 편이라 사찰에서 나가는 교통편을 생각하고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

  • 한편 사찰에서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는데, 성삼재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거리가 길고 등산로가 험하긴 하지만, 겨울에는 성삼재로 가는 노고단로가 통제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엄사에서 등산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돈 내는 건 양 쪽이 비슷하다.(성삼재에서는 주차비). 과거에는 천은사에서 입장료도 받아먹어서 논란이 많았었다. 자세한 건 노고단로 문서 참조. 노고단 이후로는 지리산 주능선에 합류한다.



  • 2012년 10월 5일, 누군가가 방화를 저절렀으나, 다행히 이미 목재에 내화성을 가진 보호제를 발라놓았기때문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CCTV에 신문지에 불 붙이고 달아나는 사내가 찍혔다.

  • 템플 스테이 한다고 마구잡이로 절 아래에 건물을 늘리더니, 이번에는 관공서에서 하지 말라던 목조건물 아래에 무단으로 콘크리트 지하실을 만들다가 걸렸었다. 그래서 화엄사 앞에 목조건물 밑에 있는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구조물이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현재는 마무리되었고, 외부 직원들의 기숙사로 쓰이고 있다. 그 위에 화엄원이 있다.

화엄사 비건버거

화엄사 전통사경원 1기 수료식
  • 화엄사에서는 사경원을 운영하고 있다. 사경이란 경전을 옮겨 적는 것을 말하는데 고려시대까지 기술이 이어지다 끊어졌다. 그러다 김경호 사경장이 사경기술을 복원하였다. 사경원은 이러한 사경기술을 잇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일반인 누구나 사경원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사경기술을 복원해낸 김경호 사경장이 직접 지도하기도 하며 제자가 지도하기도 한다.
  • 화엄사 전통사경원 홈페이지

  • 제 2대 국민의 힘 혁신위원장 인요한과 오래전부터 분쟁이 있다. 인요한이 소유중인 지리산 일대의 무분별한 외국인 선교사 별장 문제와 관련해 마찰을 빚고 화엄사가 인요한에게 항의하는 등 갈등이 깊다.#

7. 말사 목록[10][편집]



고흥
  • 상운사 - 주지 영석

곡성
  • 관음사 - 주지 대요
  • 도림사 - 주지 우범
  • 서산사 - 주지 덕해
  • 수도암 - 주지 삼묵
  • 천태암 - 주지 대주
  • 태안사 - 주지 각초

공주
  • 가산사 - 주지 원각

광양
  • 백운사 - 주지 정산
  • 운암사 - 주지 종견

광주광역시
  • 무량사 - 주지 종국
  • 자성사 - 주지 일주
  • 화엄사빛고을포교원 - 주지 연성

광주(경기도)
  • 빛고운절 - 주지 보관

구례
  • 백련사 - 주지 대엽
  • 봉명암 - 주지 혜욱
  • 사성암 - 주지 우석
  • 수미정사 - 주지 석인
  • 연곡사 - 주지 지원
  • 죽림사 - 주지 법수
  • 죽림정사 - 주지 덕제
  • 천은사 - 주지 대진

남원
  • 극락암 - 주지 성환

담양
  • 보광사 - 주지 지암

대구
  • 대륜사 - 주지 덕신
  • 보현사 - 주지 덕명

부산
  • 대덕사 - 주지 선운
  • 해동용궁사 - 주지 덕림

순천
  • 금룡사 - 주지 범일
  • 동화사 - 주지 관문
  • 정혜사 - 주지 정륜
  • 흥륜사 - 주지 묵산

여수
  • 달마사 - 주지 명현
  • 석천사 - 주지 진욱
  • 용문사 - 주지 효광
  • 은적사 - 주지 담연
  • 한산사 - 주지 해봉
  • 향일암 - 주지 연규
  • 흥국사 - 주지 명선

영동
  • 정초암 - 주지 봉일

울산
  • 도솔암 - 주지 덕송

제천
  • 옥천사 - 주지 오명

파주
  • 천불사 - 주지 동일

함평
  • 각궁암 - 주지 덕전

홍천
  • 무봉사 - 주지 덕곡


8. 관련 문서[편집]




9.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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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3년 기준[2] 웅장하고 위엄있는[3] 계파 성능, 북한산성에 팔도도총섭으로 주석하면서 북한산성 역사서인 북한지를 작성하였다. 여러모로 숙종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4] 정확히는 인경왕후 소생의 두 딸이 있었으나 1년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5] 2021년 이후 문화재에 지정번호를 사용하지 않지만, 편의상 기록한다.[6] 본래는 보물 1548호(2008년 3월 12일 지정)였다가 국보로 승격.[7] 숭정구년세사병자중추의창군광서(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이라는 낙관이 있어, 의창군이 1636년에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주문에 걸려있는 '지리산화엄사' 편액에도 황명숭정구년세사병자중추의창군광서(皇明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라는 낙관이 있다.[8] 조선 숙종(1661~1720) 때 각황전을 중건하고 기념하기 위해 심은, 300년 이상을 꿋꿋이 지켜와서 이쪽도 화엄사의 상징이다 템플 스테이 후기 기사[9] 반야봉 중턱 해발 1500m에 자리하고있다. EBS 한국기행에서 다녀가서 처음으로 전파를 탔다. 성삼재에서 5시간을 올라와야할 정도로 꽤나 깊은 곳에 자리하고있는 암자이다.[10] 2023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