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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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의 왕녀
화평옹주 | 和平翁主


화평옹주·박명원 합장묘 전경
출생
1727년(영조 3년) 6월 16일[1]
사망
1748년(영조 24년) 7월 19일[2]
(향년 22세)
능묘
화평옹주·박명원 묘 및 신도비[3]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파주1리 산 5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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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왕
영조
생모
소유영빈 이씨
부군
금성위 박명원[1]
(錦城尉 朴明源)
자녀
슬하 1녀
딸 - 반남 박씨(潘南 朴氏) 조졸
양자 - 박상철(朴相喆)
봉호
화평옹주(和平翁主)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혼인
2.3. 아버지의 편애
2.4. 죽음
3. 여담
4.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조선 영조의 서3녀. 영조의 총애를 받은 딸이며, 사도세자동복누나가 된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727년(영조 3) 당시 종2품 숙의였던 영빈 이씨가 낳았다. 비록 아들은 아니지만, 화평옹주가 태어날 당시에는 효장세자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영조에게는 후계에 관한 근심이 없었다.

1731년(영조 7) 옹주가 5세에 천연두를 앓자 영조는 모든 추국과 형신을 정지했다. 당대에 천연두는 '마마' 또는 '손님'이라고 불렀는데, 천연두에 걸린 환자가 있을 때는 부정탈 만한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는 금기가 있었기 때문이다.[5] 다행히 무사히 완치되어 그해 7월 20일 화평옹주로 책봉된다.[6][7]

2.2. 혼인[편집]


1738년(영조 14) 2월 17일 초간택, 2월 25일 재간택, 2월 30일 삼간택을 진행하였다.

전 참의 박사정의 아들 박명원, 감사 조석명의 아들 조재약, 주부 유은의 아들 유정양

재간택 명단[8]

이 중에서 참의 박사정의 아들 박명원이 부마간택되었다.[9] 초간택과 재간택 명단에서 박명원의 이름이 계속 첫번째로 언급된다.[10]

영조의 딸사랑이 지나쳐 말이 많았는데 자기 친모의 자택이었던 이현궁을 화평옹주의 신혼집으로 주기 위해 고칠 정도였다. 다만 신하들이 이현궁은 어의궁보다도 더 크다고 간언하고 옹주도 이현궁은 과분하니 받지 않겠다고 해서 다른 궁을 내려주었다. 그 외에도 화평옹주의 집을 수리하기 위해서 경복궁 터에 있는 나무를 베어다가 목재로 쓰게 하는 등 혼인할 때도 예물이 화려하고 풍성했다.

이 때 숙녕옹주(효종과 안빈 이씨의 딸)의 남편 금평위 박필성[11]이 왕녀들의 주혼(主婚)[12][13]을 맡았는데, 박필성은 "숙녕옹주의 혼인 때보다 화순옹주가 혼인할 때 예물이 열 배는 풍성했고, 화평옹주가 혼인할 때는 화순옹주보다 더 풍성했다."고 말할 정도였다.[14]

2.3. 아버지의 편애[편집]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는 자식들을 비정상적으로 편애하는 아버지였다. 화평옹주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것처럼 끔찍하게 사랑했지만,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는 미워한 것이다.

화평옹주를 보러 갈 때에는 사도세자에게 뭐라도 물어서 대답을 들은 뒤에 귀를 씻고 양치질을 하고, 그 물을 화협옹주의 집 방향으로 버렸다. 마치 부정을 씻어내는 의식처럼 기이한 행위다. 화평옹주에게 보여주는 애정과 천지차이인데 혜경궁 홍씨는 화평옹주를 가리켜 "부왕의 자애를 특별히 입으시니" 라고 말했다. 그러나 화평옹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하지 않고, 동생들과 사랑을 나누려고 애썼다. 호불호가 극명한 영조에게는 불가능한 일 때문에 사도세자나 화협옹주는 화평옹주와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화평옹주가 홀로 부왕의 자애를 받는 일이 숨은 아픔이 되어 부왕께 "마옵소서" 여쭈나 아무리 해도 영조께서 듣지 않으시니 할 수 없었느니라.

《한중록》[15]


2.4. 죽음[편집]


이렇게 화평옹주는 영조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지만, 첫 딸을 낳다가 난산으로 그만 요절한다. 향년 22세. 출산하던 아이도 제대로 태어나지 못하고 함께 죽고 말았다. 당시 기록을 보면 각별히 사랑한 딸을 갑자기 잃은 영조의 충격과 상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영조는 화평옹주의 부고를 듣자마자 바로 그녀의 빈소에 찾아가 밤을 새우며 통곡했는데, 날씨가 무더워 임금의 옥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염려한 신하들이 환궁을 권유했으나 듣지도 않았다고 한다. 또한 영조는 화평옹주를 염하는 것도 직접 보고 장례도 호화스럽게 치르려 했다. 이에 신하들이 옹주의 장례로는 너무 지나치다고 간언했지만, 영조는 듣지 않고 오히려 간언한 신하들을 모조리 파직하고 유배형에 처한다.

당연히 옹주의 장례도 국상에 버금가게 치뤘다. 옹주의 무덤을 조성하는 데에 수개월이 걸려서 공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농사를 못 짓고 폐기할 정도였다. 영조는 "딸의 경우에는 화평 옹주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이제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깊은 슬픔을 나타냈다.[16] 화평옹주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에 있고 영조의 친필로 비석을 세웠다.

화평옹주의 이른 죽음은 아버지 영조뿐 아니라 동생 사도세자에게도 큰 불행이었다. 그녀는 어질고 온화한 성품으로 사도세자를 비롯한 동생들과의 사이도 좋았고 갈수록 악화일로로 치닫던 영조와 사도세자를 중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이제 부자의 갈등을 막아줄 사람도 없어진 것이다. 그나마 영조의 적모 인원왕후와 정비 정성왕후가 어떻게든 영조에게서 세자를 보호하려 애썼지만[17] 애초에 영조는 누구 말도 안 듣는 성격에다 이들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자[18] 부자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파멸하기에 이른다.

화평옹주 계실 제는 동생 역성을 들어 일에 따라 부왕께 말씀을 올려 맺힌 것을 푼 일이 많았는데, 그 옹주 돌아가신 후에는 위에서 과한 행동을 하시거나 자애가 부족하셔도 "참으시어 그리 마소서" 할 이 없으니, 점점 부왕의 자애는 부족하고 경모궁께서는 두렵기가 날로 심하시니 자식 된 도리를 점점 못 차리시니라. 화평옹주 계셨으면 부자간에 자애와 효도를 갖추게 하였을 것이니, 착하신 옹주 일찍 돌아가신 것이 어찌 국운(國運)과 관계치 않으리오. 지금 생각하여도 애석하도다.

《한중록》[19]


혜경궁 홍씨의 말처럼 화평옹주가 오래 살았다면 부자 관계가 극한까지 치닫지 않도록 조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화평옹주 사후 영조의 총애는 그녀의 동복 막내동생 화완옹주가 차지한다. 그러나 화완옹주는 언니와 달리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하고 부자 사이를 중재하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화완의 이런 모양에 한번 제대로 폭발한 세자도 화완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부왕에게 내 말 들어주게 할래 말래?!"못 하면 디진다라고 협박한 적도 있었다. 혜경궁은 화완이 울면서 싹싹 빌고, 영조에게 수단을 부려 세자 말을 들어주게 했으니 무슨 재주인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둘렀다.

3. 여담[편집]


  • 사도세자혜경궁의 장남 의소세손이 화평옹주의 탈상[20]인 달에 태어나자 영조는 이 손자까지 반기지 않았다. 부모가 된 아들 내외에게 흔히 하는 "네가 어느 사이 자식을 두었구나. 아들을 낳았으니 기특하다" 같은 덕담 비슷한 것도 없었고, 영빈 이씨가 혜경궁 홍씨의 산후조리를 돕자 죽은 딸은 잊고 손자 태어난 것만 좋아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21] 그러다가 갑자기 영조가 의소를 예뻐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들이닥쳐 의소의 옷을 풀더니 어깨에 있는 점을 보고는 화평옹주도 여기에 점이 있었다며 이 아이는 옹주의 환생이라고 믿고 기뻐했다는 것. 그리고 언제 푸대접했냐는 듯 100일 전후에 바로 원손으로 책봉해버리는 행동력까지 보여서, 혜경궁도 아끼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과했다고 평했다. 이쯤되면 딸바보도 아니고 그냥 무섭다 애석하게도 영조가 화평옹주의 환생이라고 기뻐했던 이 세손은 전생(?)보다도 훨씬 더 이른 나이에 또 요절해 버리고 만다.

  • 실제로 의소를 가졌을 때 어느 날 혜경궁이 화평옹주가 생전 그대로처럼 방에 들어와 앉거나 웃고 얘기하는 생생한 을 꾸었다고 하며 불길한 징조인가 하다가 임신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 1743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사찰 불암사 목조석가여래좌상[22] 개금불사에 남편 박명원과 함께 대시주자로 동참한 기록이 있다. 이 불암사는 후일 의소세손의 원당이 된다. 이걸 보면 화평옹주와 의소세손이 인연은 인연인 듯.

  • 화평옹주의 사후에 시조카 박상철이 그녀의 양자로 입적된다. 훗날 그가 과거를 보아 명단에 이름을 올리자 영조는 내 손자가 왔다며 감격했다고 한다. 진짜 무섭다. 피 한방울 안 섞인 양손자에게 이러면서 친아들은

4. 가족 관계[편집]


  • 부 : 영조(英祖, 1694 ~ 1776)
  • 모 :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 ~ 1764)
    • 동생 : 화덕옹주(和德翁主, 1728 ~ 1731)
    • 동생 : 삼옹주(三翁主, 1729 ~ 1731)
    • 동생 : 사옹주(四翁主, 1732 ~ 1736)
    • 동생 :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 ~ 1752)
    • 동생 :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 ~ 1762)
    • 동생 :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 ~ 1808)

  • 남편 : 금성위 박명원(錦城尉 朴明源, 1725 ~ 1790) - 정안옹주의 5세손[23] [24]
    • 딸 : 반남 박씨(潘南 朴氏) - 조졸
    • 양자 : 박상철(朴相喆, 1737 ~ 1761) - 시숙 박흥원(朴興源)의 3남
    • 며느리 : 안동 김씨(安東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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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4월 27일[2] 음력 6월 24일[3] 파주시 향토유적 제13호[4] 육군 제 7663부대 내 위치[5] 영조실록 29권, 영조 7년 1월 12일 병자 1번째기사. # [6] 5살이라는 상당히 이른나이에 옹주로 책봉되었다. 영조의 다른 딸들인 화순, 화완옹주는 6살에 책봉되었고 화협, 화유, 화령옹주는 7살에 책봉되었다. 화길옹주도 7살이 되던 해, 조카인 청연군주와 함께 작호 봉작에 관한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이 때 책봉된 것으로 보인다.[7] 화평옹주가 얼마나 이른 나이에 옹주로 책봉되었냐면, 전 세대 왕녀인 효명옹주11세에, 명안공주7세에, 명혜공주는 기록이 없지만 7세가 되던 해에 명혜공주라고 불린 기록이 있었고, 후 세대 왕녀들인 숙선옹주10세에, 명온, 복온, 덕온공주7~8세에, 영온옹주11세에, 영혜옹주9세에 공주/옹주로 책봉되었다. 사도세자의 딸들인 청연군주는 7세가 되던 해, 고모인 화길옹주와 함께 작호 봉작에 관한 기록이 있고 청선군주7세에 군주로 책봉되었으며, 청근현주10세에 현주로 책봉되었다. 적출왕녀들도 최소 7세가 되어야 정식으로 책봉되었는데 서출왕녀일뿐인 화평은 이들보다도 2살이나 앞서 책봉된 것.화평뿐만 아니라 영조의 딸들이 전체적으로 옹주 작위를 이른 나이에 받긴했다.[8] 승정원일기, 영조 14년 2월 25일. # [9] 중상학파 실학자의 거두이자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의 8촌 형이다. 박지원이 당시 변변한 벼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에 다녀와서 열하일기를 쓸 수 있었던 것도, 건륭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된 박명원이 박지원을 자제 군관(일종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신단에 넣어줬기 때문이다.[10] 보통 이런 경우는 처음부터 부마감으로 눈에 들어 점찍어 놓았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혜경궁 홍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될 때도 명단에서 제일 첫번째로 언급된다.[11] 효종의 사위가 이때까지 살아있나 싶을텐데 박필성은 1652년에 태어난 사람으로 1747년인 96세까지 장수하였다. 당시 박필성은 87세의 고령이긴 했다.[12] 혼인에 관한 일을 주관하는 것. 원래 신부의 아버지가 한다. 하지만 왕은 나랏일을 하느라 바쁘므로 직접 자식의 혼인을 챙길 수 없고, 부마 집안과 신분 차이 때문에 서로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왕녀가 혼인할 때는 종친 중 한 사람이 왕을 대신해 혼인을 주관하는 게 관습이었다.[13] 주혼의 다른 예를 들자면 선조 사후 광해군 대의 왕녀 주혼은 종실의 맏이이자 선조의 5남인 정원군이 주관하다가 정원군 사후, 그 다음 종실의 어른이되는 정원군의 막냇동생인 의창군이 이어받아 주관하였다. 인조 사후, 왕녀 주혼은 인평대군이 주관하였으며 그 사후에는 소현세자의 3남인 경선군, 그 다음은 인조의 7남인 숭선군, 8남 낙선군, 숭선군의 2남인 종친 동평군 이항이 주혼을 맡게된다[14]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8월 2일 갑신 1번째기사. # [15] 혜경궁 홍씨, 정병설 편역, 『한중록』, 문학동네, 2010. [16]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7월 1일 계미 2번째기사. # [17] 영화 사도에서는 인원왕후가 단식투쟁까지 선포하며 영조와 맞선다. 실제로 인원왕후와 정성왕후의 승하 이후 사도세자의 정신병 증세가 급속도로 심해진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18] 두 사람은 한 달 사이로 연달아 승하한다. 정성왕후는 1757년 2월, 인원왕후는 1757년 3월.[19] 혜경궁 홍씨, 정병설 편역, 『한중록』, 문학동네, 2010. [20] 삼년상이 모두 끝나 상복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21] 사도세자가 효장세자 사후 7년만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고 갈수록 왕실의 남계 후손이 줄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영조의 이런 행동은 납득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손자 대접도 안하던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반. 그냥 영조가 영조한 거[22] 2018년 12월 19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다.[23] 정안옹주 - 박세교 - 박태두 - 박필하 - 박사정 - 박명원[24] 화평옹주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해, 형의 아들인 박상철을 양자로 들였으나 박상철 또한 요절하였다. 측실에게서 4남 3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