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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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특징
3. 명칭
4. 세계의 환관
4.1. 중국
4.2. 한국
4.2.1. 신라
4.2.2. 고려
4.2.3. 조선
5. 환관이 되는 법
6. 권력
6.1. 조선의 사례
7. 결혼과 가족관계
7.1. 중국
7.2. 조선
8. 환관의 조직
9. 유명한 환관ㆍ내시
9.1. 중국
9.2. 한국
9.3. 서양
10. 대중문화에서



1. 개요[편집]


사람이 아니다. 환관일 뿐이야. 환관은 짐승의 짐승이고 노비의 노비다. 겉은 사람 같지만 황궁에서 쓰이는 도구에 불과하다. 신발 깔창이나 세숫대야, 걸레와 같은 도구일 뿐이지. 후궁들은 네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폐하는 네 앞에서 볼일도 보신다. 네가 환관이기 때문이다. 넌 물건이다. 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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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극 《정화하서양》 3화에서 요광효[1]

가 어린 마화[2]에게.[3]


환관(, Eunuch)은 고대 문명국에서 이어져 온 궁정 직업종 중의 하나. 요약하면 고환없는 남성 궁정인. 다만 고환과 음경이 둘 다 없거나[4], 음경만 또는 고환만 불구인 경우도 있었다.

업무 자체로만 따지자면 노예이다. 단, 엄청난 차이점이 있는데 일반 노비는 일반인이 부리는 노예이며 환관은 임금이 부리는 노예이다. 하는 일은 완전히 노예이지만 부려먹는 사람이 워낙 넘사벽인 사람인지라 천민 취급을 받지 않을 뿐이다.


2. 특징[편집]


왕정이 확립되고 일부다처제가 뿌리깊은 국가에서 운용된 제도이다. 신하나 고용인이 하렘에 침범해서 왕의 여자들을 건드리는 것은 그 자체로도 매우 불경한 일이었지만 아이라도 생겼다가는 그 아이를 왕의 자식과 바꿔치기해서 왕위라도 물려 받는 최악의 경우도 발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사태를 사전에 차단시키고자 남성성이 차단된 고자인 환관을 기용하게 된 것이다. 환관은 기본적으로 고자니까 왕비나 후궁들의 정조를 위협할 수 없었고, 설령 왕비나 후궁들의 침실에 불려간다 해도 씨앗이 없어[5] 아이가 생길 위험도 적다. 목적상 생식능력만 제거되면 고자로 인정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환관도 부위를 절제하는 정도에 따라서 종류가 여러 가지였다.

권력은 지위도 중요하지만 권력자[6]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했기에 얼마나 자주 만나고 대화하고 소통하는지가 중요하다. 현재로 보면 장관과 비서관의 차이같은 것이다. 문무백관들이 아무리 총애를 받더라도 환관들은 황제와 24시간 붙어다니며 밥도 같이 먹고[* 실제로 황제의 식단에 독이 들었는지 검사하기 위해 먼저 먹어보는 일을 담당하는 환관도 있었다. 이런 일을 기미라고 하며, 흔히 말하는 기미상궁이 이 일을 담당했던 상궁이다.] 잠도 같이 잤다.[7]

군주와 숙식을 함께하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했고 그 때문에 환관들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특히 한나라의 십상시나 당나라 황제들을 갈아치운 환관같이 황제보다 강력한 환관들도 있었다. 후한 영제는 십상시에게 아예 아버지 대우를 해 줬을 정도였다. 그래서 한나라가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다. 특히나 십상시의 스승 격인 조등의 경우는 누굴 천자로 올려야 할지에 관여할 정도로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당연히 조등은 양자를 들였으며 조등의 존재감이 무엇인지 보여준 인물도 존재한다.

시대상 고자는 밖에 나가면 평생 손가락질당하며 시달리는 삶을 살아야 했는데 군주의 측근으로 들어간 덕분에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므로 왕이나 황제의 권력에 철저히 의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군주의 입장에서도 자신과 한 배를 탄 존재라고 느껴져 나름 믿을만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군주에게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이며 충성스러웠던 경우도 많았다. 한국사에선 고려시대에 주인인 공민왕을 구하기 위해서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안도치가 있고, 조선시대에는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연산군 앞에서 충언을 멈추지 않은 김처선이 있다. 그리고 상술한 권세 있는 환관들도 어쨌든 구조상 황제를 앉혀놓기는 해야 했기에 역성혁명같은 건 일어나기 어려웠다.

환관들은 대체로 체력이나 완력이 약하다는 편견이 있지만, 상황에 따라 단순 힘쓰는 일부터 경호, 때로는 군사령관같은 격무도 수행했으므로 이들의 몸이 정말 약했다면 제도가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예컨대 당현종의 측근이었던 고력사는 비록 환관이었으나 6척 5촌의 거구[8]에 힘도 매우 장사였다고 한다. 또한 부견 휘하 제일의 맹장이었던 장자(張蚝)의 경우에는 젊은 시절에 스스로 자신의 남근을 잘랐으나[9] 엄청난 힘의 천하장사였기에 전장에서는 누구보다 용감해서 동료인 등강과 더불어 만인지적이라 불렸다.


3. 명칭[편집]


한자의 환(宦)과 엄(閹)은 고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환(宦)은 원래 신을 섬기는 노예[10]였으나 시대가 흘러 왕의 궁묘 관리인이 되었고, 엄은 신체적인 특징에서 기인한 것이다. 엄(閹)은 고대에는 엄(奄)으로만 쓰였으며, 『주례』와 『예기』등에는 이런 명칭으로 등장한다.

중국에서는 환(宦)은 환자(宦者), 환수(宦竪), 폐환(嬖宦), 중환(中宦), 내환(內宦) 등으로 불렀고, 그들의 신체적 특징에서 기인하여 엄인(閹人), 엄자(閹者), 엄수(閹竪), 엄시(閹侍) 등으로 불리웠다. 엄과 환을 합쳐서 엄환(閹宦)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궐문을 지켰기 때문에 '문지기'라는 의미에서 혼관(閽官), 혼시(閽侍)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한 궁중의 일을 돌본다 하여서 궁녀와 더불어 중인(中人)이라고도 불렸다.

화자(火者)라는 말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어원이 있는데, 환관이 남중국의 광동성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에 피부가 불에 그을린 것처럼 검다고 해서 화자라고 부르게 되었다든가, 인도에서 수입해온 환관들이 피부가 검어서 역시 이렇게 불리웠다든가[11], 화(火)라는 글자가 사람 인(人) 변에 좌우에 2개의 점이 찍혀 있기 때문에 이 점 2개를 불알로 봐서 이런 의미가 붙었다든가, 환관을 수술로 만들어내기 전에는 불로 자지를 지져서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정신(淨身)이라는 용어도 있다. 이것은 '깨끗한 몸'이라는 의미로 여자와 성교하지 않은 동정이라는 의미지만, 이 역시 남성으로서 능력을 상실한 놈이라는 욕설로 쓰였다.

태감(太監)은 본래 환관들이 맡고 있는 기관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말이었지만, 환관 전체를 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덕분에 환관들도 이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영감의 경우처럼 본래 높은 사람을 이르던 말이 상대를 존중하기 위한 존칭으로 변한 격이다.

내재(內宰)는 궁궐 안의 재상이라는 의미인데, 이 또한 환관을 한껏 높여주는 이름이다. 사실 중국 역사 속에서는 환관이 재상이 된 경우가 많았고, 우리나라에서도 환관이 재상에 해당하는 높은 벼슬을 받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이 용어가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는 내시(內侍)라고도 불렀다. 이는 조선시대내시부를 환관이 독점하게 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일반 관료들이 내시직을 맡기도 했기 때문에 구분되어 있었다. 하여튼 그 영향으로 오늘날 한국에서도 흔히 내시하면 곧 환관을 가르키는 말로 통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고려시대의 내시조차 흔히 환관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한다.[12]

히브리어로는 '사리스(סריס)', 그리스어로는 '에우노코스(Ευνούχος)'라고 한다. 이 말에서 현대 영어로 환관 또는 고자를 뜻하는 eunuch가 유래했다. eune-는 침대, -okhos는 지키다라는 뜻이라 오스만의 하렘을 지키는 환관들을 일컬어 그리 부르기 시작한 것이 유래이다.


4. 세계의 환관[편집]


동양권에서는 중국에서 시작되어 고려조선, 베트남 등으로 전파되었다.

남성을 거세해서 환관으로 삼는 문화는 상나라 시절에도 존재한 유서깊은 문화이다. 실제로 남근과 칼이 같이 묘사된 섬뜩한 갑골문이 존재한다.#

일본에는 전파되지 않았다고 전해지지만, 몇몇 기록들을 보면 소수의 지역에선 행해지긴 했던 모양. 환관이란 것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지 않았다 뿐 성불구가 된 남성 개개인을 비슷한 용도로 고용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에도 막부에서는 군주(쇼군)의 하렘인 오오쿠의 관리를 여급, 즉 여자들이 직접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어르신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お年寄(오토시요리)라는 단어는 원래 이 오오쿠에 있는 여성들을 선도하는 궁녀장을 의미했다.

서양의 경우 오리엔트 지역에서 고대로부터 환관이 존재하였다.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록에도 환관이 나오며,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에도 존재했다고 한다.

헬레니즘 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의 근위대장 포티누스는 환관이었다.

기독교의 전파로 유럽에서는 환관이 줄어들었으나, 이탈리아에서는 특이하게 하렘을 관리하는 목적이 아니라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를 간직한 카스트라토를 만들기 위하여 어린 남성을 의도적으로 성불구자로 만드는 일이 빈번했다.

동로마 제국의 궁정에는 환관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환관의 위상이 낮았던 중국에 비해 장군, 제독 등 국가 고위직을 차지한 유명인사들이 많은 편이다. 나르세스가 어마어마한 노익장에 환관 출신 장군으로 유명하다. 이건 동로마의 특이한 사항이 적용된 것인데, 다른 나라에서는 제위 계승에서 밀려난 황족은 후환을 제거하려고 죽이지만, 동로마 제국은 국교가 정교회였으므로 기독교 정신을 적용(?)한다는 의미에서 죽이지는 않지만 제위를 잇지 못하도록 신체훼손형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죽여라[13] 이런 경우 비록 거세당했지만 고귀한 신분은 그대로 유지되므로 고위직을 맡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다만 황족이 아니라 일반적인 신분에서 환관이 되는 경우는, 검열삭제를 통째로 제거하거나 일부분 제거하는 대신 정관만을 끊어내어서 환관으로 만드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당연히 발기도 가능해서 이런 환관들이 권력자들의 아내들이나 들의 내연남이 되는 경우도 잦았는데, 어떤 시인은 '여자들은 연애의 만을 누리기를 원한다. 열매를 가지는 부담 대신에'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이슬람권 역시 환관이 많았다. 백인도 있긴 했으나 대부분 흑인이었다. 동로마와는 달리 성기를 통째로 잘라냈는데, 이는 환관들의 주된 용도가 하렘이나 여자의 경호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세 이전부터 흑인 노예를 광범위하게 부려왔음에도[14] 아랍권에 흑인 인구가 별로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흑인을 불러오는 족족 거세를 했으니 인구를 늘릴 씨 자체가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것.

아프리카男을 노예로 삼고 거세한 아랍인들… 카다피가 사과하기도 아니 이보시오 이보시오 주인양반

페르시아사파비 왕조 때는 특히 환관의 세력이 강했으며, 오스만 제국에서는 백인 및 흑인 환관을 널리 사용했다.


4.1. 중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중국의 환관조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국에서는 상나라 시대의 갑골문에 이미 강(羌)족의 전쟁 포로들을 환관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이미 요순 시대에 궁형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고대 중국의 환관 중에는 진시황의 뒤를 이은 영호해의 측근으로, 권모술수에 능하여 온갖 권세를 휘둘렀던 조고, 후한 말의 십상시, 그 이름도 유명한 조조의 의붓 할아버지이자 십상시의 스승격인 조등이 유명하다. 실제로 온갖 전횡을 부리던 십상시가 유일하게 어려워한 인물이 바로 조등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본디 환관이 되려면 절삭한 남근을 담은 항아리에 태감의 직인이 찍혀 있어야 환관이 될 수 있었는데, 십상시의 그 항아리에는 조등의 직인이 찍혀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환관의 영향이 매우 커서,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환관이 존재하기도 했다. 황제 전용의 행정관료이기도 했기 때문. (자세한 것은 명나라 항목 참조.) 그 때문에 명나라 대에 이르러 권력을 독점하고 악행을 행한 환관들이 숱하게 등장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명나라의 왕진, 유근, 위충현 등이다.[15] 다만 명나라 때의 환관들은 말 그대로 뒤웅박 팔자라서, 황제의 총애를 잃는 순간 모든 걸 잃는 운명이었다. 한나라당나라 때의 황제의 목숨까지 쥐락펴락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명나라는 환관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에 이런 저런 이유로 남성으로서 생식기능을 상실한 12세에서 18세 사이의 남자아이를 보낼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화자(火者)[16]라고 한다. 그중에서 1428년(세종 10년) 10월 3일자에 명나라에 들어간 황해도 신천군 출신의 정동(鄭同)은 명나라 황궁 생활에 잘 적응한 결과 최고의 권세를 누리는 환관으로 성장했다. 정동이라는 이름이 다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1469년(예종 1년) 1월 30일자에서다. 명나라 사신으로 최안[17], 정동, 심회 3명이 곧 한양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보고서였다. 41년 전에 화자로 갔던 바로 그 정동이 이제 명나라 환관들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인 태감(太監)이라는 벼슬을 갖고서 조국의 땅을 다시 밟게 된 것이다. 정동은 한양에 머무는 동안 별도의 집을 마련했고, 중간에 고향 신천도 방문하고 왔으며, 가까운 친척의 관직 청탁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정동의 청을 빠짐없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4월 6일에는 그의 고향 신천을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어쨌거나 정동의 입장에서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당시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들어오면, 3~4개월 정도 머물며 온갖 향응과 유람을 즐기다가 더 이상 싣고 가기 힘들 정도의 각종 선물을 받고서 북경으로 돌아갔다. 정동도 5월 2일 돌아가는 길에 고향 신천군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호조판서 노사신황해도까지 안내를 맡았다. 화자가 명나라 태감이 되었다는 사실의 신분상승적 의미는 그만큼 컸다.

이후 명나라를 방문하는 조선의 사신은 무조건 북경에 있는 태감 정동의 집을 방문해 현안에 관한 입장 조정을 거쳐야 했다. 정동도 가능하면 고국의 문제들이 잘 풀릴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많은 애를 썼다. 어쩌면 세조부터 성종대의 대명외교를 연구하는 데 정동은 가장 중요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세종대왕 때 명나라의 사신으로 자주 온 윤봉이란 이도 조선 출신에 세종 말년에 조선을 위해 큰 활약(?)을 했는데, 조선이 그토록 바라는 의 조공을 중지하게 힘을 써줬다. 대신 받아먹는 건 엄청나게 받아먹어서, 그의 동생을 재상급까지 만들었고, 여생을 조선에서 보내고 싶다며 집과 땅까지 받아냈다(…)

1479년 1월 4일 성종과 한명회가 나누는 대화의 한 대목을 보면 이미 정동은 명나라 조정 내에서 핵심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동이 병사(兵事)를 맡은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조정(朝廷)의 일을 많이 장악하고 있으니, 명의 대신이 모두 삼가고 반드시 그를 꺼릴 것이다. 내가 만약 정동에게 뇌물을 내렸다가 중국 조정에서 안다면 반드시 나를 비루하다고 할 것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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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00권, 성종 10년(1479년) 1월 4일 신유 2번째 기사


정동에게 뇌물을 줘야 한다고 했던 인물이 바로 한명회였다. 따라서 한명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이 무렵 이미 한명회는 동시통역사인 장유화를 매개로 해서 정동과 깊은 유착관계를 형성해 놓고 있었다. 그것이 조선 조정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환관 정치의 폐해가 만연하던 명나라를 거울로 삼아 환관조직을 축소하고 환관의 수를 줄였다. 명말 자금성에는 5만명의 환관이 재직하고 있었으나, 북경에 입성해 자금성을 접수한 도르곤은 이를 천명으로 줄이고, 순수하게 환관 본연의 임무인 황제나 비빈의 시종노릇만 하게 했다. 그리고 환관은 글을 배우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전대인 명나라와는 달리 청나라 역사 내내 환관은 역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게 된다.


4.2. 한국[편집]



4.2.1. 신라[편집]


환관에 관한 기록이 가장 처음 나타나는 것은 통일신라 시대의 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흥덕왕 원년(826) 기사에는 "왕비가 죽자 슬픔에 젖은 흥덕왕이 시녀들조차 가까이 하지 않고 오직 환수(宦竪)들만을 심부름꾼으로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초에 편찬된 내시의 사적을 기록한 내반원기에는, 신라 문무왕 때 수충(守忠)과 아진함(阿珍含)을 환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신라의 관직인 대감(大監)을 내시를 가리키는 태감(太監)과 혼동하여 생겨난 오류다.

다만 아직까지는 환관은 그다지 기를 못 펴던 시기였다. 중국과는 달리 자연적으로 고자가 된 인물들만을 뽑는다는 규정이 있었고 수도 적었기 때문. 무엇보다 망할 때까지 골품제가 유지되어서, 진골 아니면 권력 핵심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4.2.2. 고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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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환관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가, 고려의 제11대 왕인 문종대에 다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려사에 부기된 이제현의 찬에 보면, 문종의 검소한 생활에 대하여, '환관과 급사를 10여명 밖에 두지 않았다'는 표현이 있다. 이는 뒤집어보면 이전에는 어느 정도 환관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고려의 내시는 환관과는 별개였다. 대표적인 내시로는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척준경의 아들도 내시를 했고 고려 후기 지식인 안향도 내시였다. 이처럼 내시는 문벌귀족의 자제들이 기용될 정도로 엘리트 계층으로 환관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헌데 고려의 제18대 왕인 의종시기부터 환관의 힘이 막강해졌다. 본디 환관은 남반직에 속해서 7품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같은 제도가 의종시기부터 무너졌다. 의종은 자신을 젖 먹여 키워준 유모의 남편이요, 의종이 친동생에게 밀려 하마터면 왕위를 놓칠 뻔했을 때 비호자로 활약해준 환관 정함을 정7품 문관 벼슬인 합문지후에 임명하고, 왕광취, 백선연 등의 환관을 총애했다. 그러나 문신과 대간들은 "전례 없는 일"이라며 강력히 반대했고, 심지어 최숙청은 정함이 세를 믿고 권력을 남용한다면서 몰래 죽이려다가 발각되어 외딴 섬으로 귀양을 갔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의종은 단식투쟁까지 해가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정함은 환관이 내시가 되는 데 물꼬를 텄다. 의종은 신하들과 거리를 두고 조정에도 잘 나가지 않았으며, 환관을 통해 조정에 필요한 일을 알리고 신하들의 말도 환관을 통해 전해들었다. 자연히 환관의 권력이 강대해졌고 정함이 죽은 뒤에는 백선연이 의종의 후궁 무비와 결탁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의종을 몰락시키고 무신정권시대가 되자, 왕광취 등이 환관들이 반란 세력의 핵심 인사들을 궁궐로 끌어들여 살해하려다가 환관 한숙이 밀고하여 실패로 끝나 오히려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이후 무신정권 시대 동안에는 환관이 기를 펴지 못했다.

고려원나라에 복속된 뒤 원 간섭기가 되자, 원나라는 고려에서 환관을 차출해갔다. 이 중에는 원사(역사책) 환자편에 오를 만큼 출세한 박불화 같은 인물도 있었다. 원나라 조정에서 봉사한 환관들의 영향은 막강해서, 충선왕 시기에 환관들이 대원군, 군에 피봉될 정도로 권세를 크게 누렸다. 환관이 각광받는 직업이 되자 스스로 성기를 거세해서 환관이 되는 자가 많아져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18]

고려 조정에서도 환관의 영향이 확대되었고, 공민왕 시대에는 환관들로 이루어진 내시부가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공민왕은 특히 환관들과 인연이 깊은 왕이었는데, 홍건적의 침공으로 인하여 흥왕사에 피신해 있을 당시, 김용이 난을 일으켜서 죽을 위기에 처한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왕을 호위하던 이들은 모두 달아났으나, 안도치라는 환관은 다른 환관인 이강달로 하여금 왕을 업고 피신하게 한 후 자신이 왕으로 가장하고 침전에 누워있다가 반역자들에게 대신 살해당하였다. 그야말로 자신의 몸을 바쳐 왕을 구한 셈.[19]

우왕 시절에는 환관의 폐단으로 내시부가 폐지되고 환관들은 노비 신분으로 전락했다가 공양왕대에 이르러서 내시부는 다시 부활했다. 그리하여 내시부 소속인 환관과 본래의 내시는 혼동되어 불리기 시작했으며, 어느덧 최고 엘리트 집단을 지칭했던 내시는 환관의 별칭이 되고, 본래의 내시는 이름은 물론이요 고유의 역할과 지위까지 잃어버렸으며 결국 내시는 환관의 동의어가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내시라는 이름으로 환관을 기억하는 까닭이다.


4.2.3. 조선[편집]


조선 초기에는 환관을 모두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태조 이성계는 환관의 필요성을 깨닫고 이들을 존치하고 공민왕 대에 원나라에서 환관으로 일하다가 고려로 돌아와 조선에서도 일하게 된 환관 김사행을 시켜서 내시부 전체를 환관 조직으로 만들고, 조직화하는 데 성공한다.[20]

중국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환관의 수가 적었고, 임무가 궁궐의 잡일로 한정되어 있어서 환관들의 권력 남용이나 월권의 폐해가 적었다. 물론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 소속이거나 왕명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내시 정도면 웬만한 관리 수준의 위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위세가 상당했을 뿐 국정에 관여할 길은 원천차단 당해 중국의 예에 비하면 권력이 없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 조선에서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은 대상은 종친, 외척, 환관의 3가지 부류인데, 종친이나 외척은 가끔씩이라도 권력에 접근하기도 했지만 환관만은 그 500년 동안 일화 수준에서는 얼굴을 내밀긴 해도[21] 본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든가 권력을 휘어잡았다든가 하는 얘기는 없다. 또 내시부에 대한 규찰은 승정원에서 맡고 있었다.

조선 환관은 중국 환관과 차이점이 좀 있는데 중국 환관은 아예 24시간 천자와 붙어살았지만 조선 환관은 왕과 궁 안에서 산다는 공통점만 존재할 뿐 환관 숙소는 왕 숙소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은 환관이 권력에 관여할 수 없었으며 조선 환관은 완벽한 왕의 하인이었다. 똑같은 건데 일반 양반집에서 하인을 하면 외거노비, 왕의 하인을 하면 환관이었던 것이다.

또한 왕실 이외에는 사적으로 환관을 부리는 것을 금지했다.

특이하게도 조선의 환관들은 공식적으로 결혼도 가능했고 양자를 들이는 것도 가능했다. 경상북도 청도군에 소재한 내시 집안 고택의 계보를 보면 환관 집안은 친척이 아닌 아이를 양자로 삼고 이 양자를 거세를 시켜 환관으로 다시 입궁시키는 형식으로 대를 이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환관 가문은 양반 집안과는 다르게 윗대와 아랫대의 성씨가 아예 다른 경우가 흔했다.

또한 왕 곁에서 있는 사람들이 유학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들은 유교 공부도 해야 했는데, 대신 나이가 좀 들면[22] 그냥 때려쳐도 되었다고. 어차피 유학 배워도 과거 못 친다. 이것도 그냥 공부를 시킨 게 아니라, 뉴비 환관을 과거 시험 신규 급제자(= 막 조정에 출사한 신참 하급 관리)들이 가르치는 식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환관이 짬밥을 먹고 승진해도 옛날의 스승들이 같이 짬밥을 먹고 조정 대신으로 포진해 있어 환관들의 기를 억누르는 효과도 있었다.

환관은 1884년 갑신정변 후 이튿날인 12월 5일 정강 14조가 발표되고 내시부가 폐지되면서 그 중에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하는 것 외 나머지는 궁에서 나갔고, 더 이상 환관을 뽑지 않으면서 그 수가 줄어들다가, 결국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공식적으로 환관제도는 사라지게 되었다.

대한제국을 합병한 일본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환관 제도를 공식적으로 두지 않고 단지 자연 성불구자를 비공식적으로 채용해 잡일을 시키는 정도에서 그칠 정도로 환관 제도가 정착된 나라가 아니었고, 이미 이 시점에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쳐 일본제국 헌법과 내각을 위시한 근대적 법률체계와 정부조직 체계를 갖춘 뒤였기 때문에 환관을 쓸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남은 환관들은 이왕가(구 대한제국 황실)에 고용된 피고용 노동자로 전환됐다. 또한 남성기의 고의적 제거를 금지하는 형법과 의료법 그리고 아동보호법 등의 법률들이 20세기 일제시대-미군정-대한민국을 거치며 제정 및 강화됨에 따라 환관 양성의 명맥이 완전히 끊겼고, 남은 옛 환관들이 모두 사망함에 따라 한국에서 환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5. 환관이 되는 법[편집]


중국에서 초기의 환관들은 궁형을 받은 죄인들이었다. 하지만 환관들이 점차 막대한 권력을 누리게 되자, 부와 권력을 누리기 위해 스스로 거세를 선택하여 환관이 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거세 수술을 전업하는 기술자 엄공들이 성업하였다.

조선에서는 세종 때에 이르러 사사로이 거세하고 환관이 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는 조선이 건국 이래 유교를 국시로 삼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거세를 비롯해 스스로 신체를 훼손하는 것은 당시 조선에서는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던 일로, 유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효의 시작이 바로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23] 다만 어린 시절 고자가 되어 환관의 양자로 들어간 사람이 나중에 환관이 되었다.[24] 환관이 양자를 고자로 만들 때는 반드시 관아에 알려야 했으며, 고자만들기 비용은 어린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이는 환관이 담당했다.

하지만 흉년이 들거나 하면 호구지책으로 환관이 되기 위해 고자행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이렇게 스스로 거세했다가 환관이 되지 못한 고자들은 여염집에서 하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여염에서도 노비 주제에 결혼을 하겠다느니 자식을 낳는다느니 하면서 귀찮게 굴거나 집안의 여성들에게 손 댈 일이 없으니, 구할 수만 있으면 괜찮은 선택이었을 듯. 하지만 일천즉천이건 종모법이건 종부법이건, 고자 노비는 더 불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좋은 선택이 아니긴 하다. 물론 노비를 죄다 고자들로만 채울 일은 없고, 다른 정상적인 노비들도 많으니 별 문제는 없다. 애당초 노비되겠다고 고자된다는 선택지를 고르느니, 그냥 멀쩡한 몸으로 노비되는 게 더 나을 테고.

거세를 위한 수술방식은 고대에는 에게 물어뜯게 하는 등(…) 무식하기 짝이 없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수술방법도 발전, 고환과 음경까지 잘라도 안전해졌다고. 그러나 청나라 대에도 거세 수술을 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25] 일단 당나라 기준으로는 수술 후 1/4~1/3은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100일 이내에 기타 이유로 죽는 사람들이 앞에 나온 비율보다 더 많았다. 즉 환관이 되는 건 자기 목숨을 걸고 권력을 얻으려고 하는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거세 방식은 크게 고환과 음경을 함께 절제하는 방식과 고환만 잘라내는 방식의 2가지이다.[26] 중국의 환관은 전자, 우리나라의 환관은 후자의 방식으로 거세했다. 음경 절제시 잘라낸 자리에 대롱(…)을 끼워서 요도를 보존한 관계로 소변 조절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하지만 고환만 잘라내는 방식에 비하면 사망율이 높았다고 한다. 청말민초의 자금성에서 일했던 환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소변을 조절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요실금처럼 속옷에 오줌을 지리는 일이 많아 사시사철 솜바지를 입었다.

거세한 고환과 음경은 소금에 절여 손바닥만한 항아리에 넣고 그 항아리를 상선이 잘 보관해 뒀다가, 해당 고자 환관이 죽으면 원래 있던 자리에다 실로 꿰매서 장례를 치른다. 이는 신체발부 수지부모에 의거한 것으로, 온전한 신체를 갖추어 조상 곁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였다. 청나라 때 환관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정도 출세한 환관은 자신을 거세했던 도자장에게 양자를 보내 예물을 지급하고 항아리에 보관된 자신의 고환과 음경을 돌려받는데, 이를 받들고 조상의 선영에 가서 떠들썩하게 행차해 제사를 지낼 때에서야 비로소 바닥을 구르며 대성통곡하는 모습이 애절하기 그지없었다고 술회했다.

고환만 잘라내는 환관은 발기능력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귀부인들의 장난감(…)으로 많이 활용되기도 했다.[27] 의외로 이런 식의 환관을 채용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왕이 공사다망할 경우 하렘에 있는 여자들을 만족시켜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키지만 않는다면 암묵적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중국에서는 고환과 음경이 다 날아가야 환관으로 인정하므로, 그런 환관은 발견 즉시 사형이었다.

자세한 수술법은 거세를 참조.


6. 권력[편집]


직책상 핵심 권력층의 최측근으로 일하는 탓에 고대로부터 환관은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전형적인 문고리 권력으로 특히 중국 역사에서는 이 환관들이 허수아비 황제를 조종하며 군림하는 일이 많았다. 중국 무협영화에서 악당으로 나오는 대표적인 사람들. 당고의 금을 일으키고 삼국지의 초반부에 나오는 십상시들도 환관들이다.

조선시대에 내시에게 가정을 갖게 하는 이유 중 하나도, 내시의 관심사를 권력에서 돌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가정도 없고 가족과도 떨어져 있는, 권력에 접근하기 쉬운 내시들이 권력에 관심을 가지고 맛들이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악랄한 관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동양에서는 환관이 되려면 일단 고자가 되어야 했고, 어느 정도의 전문 지식을 요구했다. 궁내의 안방살림은 환관들이 도맡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 환관들은 그야말로 왕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어릴때부터 선발하여 약 100여명 정도를 10년간 교육 시킨 후 최종적으로 환관을 뽑았으며, 중국도 명나라/청나라 시절에는 고등부터 하등까지 환관의 수는 2,000명을 가볍게 뛰어 넘었다.

또한 원래 중국에서는 내정에 간섭하고 권력에 물든다 하여 환관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았으나, 최측근으로서의 지식이 중요해지면서 교육시설까지 설치하게 된다.

특히 환관은 품계로 치면 정4품에 지나지 않았으나, 통치자의 최측근이며, 궁내의 살림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그 권력과 부는 엄청났다.[28] 예를 들어서 환관의 권세가 낮았던 시절에도 99칸짜리의 거대한 집과 수개의 별채를 보유할 정도였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 하면, 조선시대엔 100칸 이상인 집은 궁궐 외에는 지을수 없다는 법이 있었다.[29] 즉 99칸이면 엄청난 권세가라는 뜻이며,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한들 아무나 99칸집을 지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부와 권력이 엄청났을 때에는 그야말로 나라를 주물렀다고 한다. 한마디로 고자라고 무시할 수 없다. 내가 거기가 없지 권력이 없냐?

중국의 왕조들의 경우 주기적으로 환관의 횡포와 부정부패가 발호하였기에, 조선이나 청나라에서는 이를 경계하여 여러가지 대응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사실 원래는 권력이라고 말할 것도 없고, 단지 황제의 똥(…) 수발이나 들고, 음식상을 내오고, 신하들의 접견 요청을 황제에게 알리는 등의 단순 노예에 지나지 않았으나[30], 수십년간 자신의 인격과 정체성을 버리고 황제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다보니 황제에 대한 모든것을 자연히 알게되어 황제와 친분이 쌓이다보니 나중에는 무시할수 없는 비공식적인 권력자가 되어버렸다. 특히 황제의 성적 취향에서부터 정치 성향, 신체 리듬, 음식 성향 등을 모두 꿰고 있었기에, 가령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신하나, 뇌물을 안 바치는 신하에게는 황제가 빡쳐있을 때 기분이 나쁠 때 "지금 황상폐하의 심기가 무척 좋으시니 들어가 정치를 논하시지요"(…)라고 말해 피박을 쓰게 하거나 아무 일도 없는 황제를 아프다거나 바쁘다는 말로 둘러대면서 신하들의 접견을 거부하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31]

대표적으로 진(秦)나라의 환관 조고는 재상 이사를 제거하려고, 2세 황제 호해가 신나게 놀고 있을 때, 이사에게 "지금 황제 폐하께서 정무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어서 들어가 정사를 논하시지요"라고 말해 피박을 쓰게 만든 다음 황제에게 달려가 "이사가 황제 무시한데요(…)"라고 이간질을 해 이사를 제거했다. 그리고 후한 말의 십상시와 명나라의 왕진, 유근, 위충현은 불멸의 악평을 자랑한다.

이외에도 불알(…)이 없기에 불알이 달려 있는 신하들과는 달리 군사를 가지고 튀어버려 나라를 건국한다거나 총부리를 돌려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없다고 판단했는지[32] 환관들에게 군사권을 주는 사례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후한서원팔교위당나라가 있었다. 과연 당나라 군대. 그 유명한 당현종 때부터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데 나중에는 군사에 대한 전권을 가진 환관들이 황제를 뒷방으로 몰아내고 국정에 대한 전권을 휘두르는 일까지 발생했다. 심지어 당나라 중반기에는 경종이 환관에게 밉보였다가 화장실에서 칼빵(...)맞은 일도 있었다.

특히 명 왕조는 환관이 엄청나게 득세했던 시대인데[33] 황제들이 환관으로 이루어진 비밀경찰 조직을 만드는 등[34] 환관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정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명나라는 환관의 수가 무려 10만 명(!)이나 되어 환관이 워낙 우대받던 시대다보니, 못 먹고 못 사는 백성들 중 "차라리 환관 되고 팔자 펴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까지 나와, 환관 1,000명을 뽑는데 5,000명이 몰리는 사태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단, 그렇다고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항상 환관이 권세를 누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실제로는 후한, 당나라, 명나라 시절을 제외하면 잠깐 권세를 누린 경우는 있어도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 정도로 권세가 강하진 않았다. 단지 명나라 때는 국가 시스템상 환관이 전권을 장악하기 쉬웠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런 명나라에조차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권세가 강한 환관이라도 어렵지 않게 제거할 수 있었다. 특히 명나라는 중국의 역대 그 어느 왕조들보다 강력한 황제독재체제를 구축한터라 황제와 신하들의 거리가 무척이나 멀었고 상호견제수단도 미약했으며, 국가의 모든 중요기구와 운용체계가 황제에게 몰려있다보니 황제의 최측근인 환관들의 권한이 덩달아 강해졌다. 이 때문에 주원장은 후한, 당의 사례를 들며 환관의 발호를 크게 경계했고, 환관에게 많은 제약을 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할 정도로 철저하게 황실의 심부름꾼으로만 활용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가혹하여 결국 정난의 변영락제와 내통한 환관들이 성문을 열어, 의도치 않게 손자 건문제를 죽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영락제는 주원장의 원칙을 깨고 자신을 도운 환관들에게 특혜를 주기 시작하면서, 환관의 발호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환관이 가진 권력의 가장 큰 문제는, 환관의 힘이란 결국 황제와 기존 체제에 빌붙어서 나오는 기생충에 가까운 권력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권세가 강해도 결국 강력한 황권의 비호 아래 탄생한 것이었기에 황제의 신임을 잃으면 그걸로 끝이었다.[35] 하지만 명대의 환관의 위력이 상당히 강했던 것은 사실이며, 후한, 당나라 등 다른 왕조에서 몇몇 환관이 권세를 누리던 시절과 그게 겹쳐져서 지금의 사실상의 흑막, 혹은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환관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알아둘 것은, 명의 환관 권력이 강했던 것은 환관이 기생하는 황제의 독재권이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홍무제가 귀족들의 발호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재상도 없애버리고 황제의 결재가 없으면 어떤 일도 못하도록 만들어 놨는데, 황제가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 자연히 황제 곁에 붙어있는 환관들의 권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즉 황제가 의욕적으로 일을 하지 않을 때에나 환관의 영향력이 강해졌다는 말이다. 명대의 가장 악명높은 환관인 위충현조차, 정치에 관심없던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가 즉위하자마자 내린 명령 한마디에 내쳐지고 자결을 강요받았을 정도다.

더불어 환관이 죄다 권력을 누린게 아니다. 권력을 누리는 환관이 되는것도 일단 황제의 눈에 띄거나 연줄을 갖춰야되어야 되는데다가 거기에 더해서 권모술수를 동원하는 정치력까지 갖춰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권모술수 같은 정치력과 거리가 먼 대다수 환관은 그저 말단직에 머물면서 그저 막일, 잡일이나 하다 조용히 은퇴하는게 일반적이었고, 거세로 요도가 짧아지기때문에 나이가 들면 요실금으로 고생하며 일찍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실제로 청나라 말기에 환관 몇몇이 서양 기자들과 인터뷰했는데 그들은 환관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극히 일부라는 하소연을 거리낌없이 말했다고 한다. 물론 먹고 살 거 정도는 해결될 수 있었겠지만. 암만 그래도 왕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니 적어도 굶어 죽을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었을 것이다. 괜히 조선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 어려우니까 어린애에게 거세를 시킨 후 개에 물렸다는 둥 자연적인(?) 고자라고 주장해 내시로 만든 게 아니다. 하지만 조선은 내시에 대한 최소한의 노후 복지는 있었으나 중국에서는 없어서, 말단직이라 재산을 많이 쌓지 못해 노후 자금이 넉넉치않은 환관들이 객사하거나 고독사한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

또 환관이라고 해서 무조건 권력을 휘둘러서 나라를 망친 것만은 아니고, 진심으로 국가 또는 황제에 충성하거나 훌륭한 업적을 이룬 환관도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종이를 만든 채륜이라든가, 대원정으로 유명한 정화 같은 사람도 환관이었다. 또한 당현종 때의 환관인 고력사의 경우에도 전설적인 문사였던 이백과의 알력 때문에[36] 이미지가 나쁘고, 그 자신도 생전에 심한 권세를 부리기는 하였으나 현종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바친 충신이었으며 현종이 죽자 통곡을 하고는 7일간 식음을 전폐하여 황제를 따라 죽었을 정도로 강한 충성심을 지니고 있었다. 숭정제의 최후를 곁에서 지키고 함께 자결한 왕승은 같은 인물도 있다.

한국사에서도 예외는 아니라서 공민왕의 목숨을 구한 안도치, 세조의 위협을 받던 단종을 끝까지 지킨 엄자치와 같은 충신 환관이 있다. 거기에 정점을 찍는 사람이 연산군에 직언을 하며 저항하다가 피살된 김처선. 궁형을 당한 피해자로 널리 알려진 사마천의 경우, 환관들의 존경을 받기는 했으나 환관은 아니었다. 그의 성인 사마씨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주나라 시절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귀족 출신인데, 집안이 망한 것도 아니고 환관이 되었을 리가.


6.1. 조선의 사례[편집]


환관들의 횡포가 극심했던 유교 문화권 왕조들 중에서, 유달리 조선만 예외로 환관들의 존재감이 없었던 이유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조선에서는 환관들이 권력을 잡는 일을 방지하고자, 환관들의 교육을 전부 일반 관리들이 했다. 그것도 음서 등으로 들어온 사람이 아닌, 과거 시험을 치르고 성균관을 졸업한 사람들 중에서 갓 등용된 초짜들이 도맡아했는데, 이러면 환관들 중의 최고위직인 상선까지 올라갔더라도 신참내기 시절에 자기 교관으로 있던 관리도 마찬가지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서 권세도 장난아니고 짬밥에서도 밀리니, 왕의 최측근일지라도 감히 조정 대신들에게 나댈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99칸이나 되는 대저택을 소유하고도 권력의 근처도 갈 수가 없었다.

더구나 걸핏하면 만만한 게 환관들이라고, 왕이 조금이라도 비행을 저지르면 "이게 다 요사스러운 궁녀들과 환관들이 희롱하여 왕의 눈과 귀를 가린 탓"이라며 탄핵을 일삼으니, 환관들이 국정을 농단할 가능성은 0에 한없이 수렴했다. 일례로, 퇴계 이황선조에게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은 요망한 환관들을 가까이한 탓"이라고 디스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다.

상술한 왕궁의 문고리 역할도 이미 똑같은 업무를 담당하는 도승지라는 직책이 대신하고 있었는데, 도승지는 엄연히 과거 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이들이 하는 직책인지라서, 자신의 소속 붕당이나 왕의 눈치를 더 많이보느라고 조정 대신들의 접견을 자의로 방해하거나 알선해줄 수가 없는 처지다. 만일 도승지가 환관들마냥 조정 대신들의 접견을 방해했다가는, 똑같이 과거 시험쳐서 들어온 처지인 대신들에게 피박살이 나는 수가 있었다. 당연히 순순히 시키는 일만 해야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도승지가 왕 입장에서는 환관보다 더 듬직한 최측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환관들이 할 일이란, 순전히 대신들의 알현을 알리는 역할밖에 없었고, 자기들이 왕의 접견을 허락하느니 마느니 할 처지가 못됐다. 일례로, 갑신정변 당시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개화파 대신들이 고종을 알현하려고 했을때, 당시 고종의 처소를 지키던 이재현이라는 환관이 접견을 막으려 했으나, 이에 대신들이 분노하여 "너부터 베어주겠다."라는 살벌한 협박을 하자, 그냥 빤스런한 사례도 있었다.

심지어 왕이나 왕자들조차도 환관들을 길바닥에 채이는 돌보다도 못하게 보기도 했다. 일례로, 숙종 시절에 우의정 민암청백리로 명망이 높았던 한 환관의 사례를 들어서 검소한 생활을 할 것을 간언했다가, 감히 환관 나부랭이와 자기를 비교했다고 빡친 숙종에 의해, 본인은 갑술환국으로 인해 본인의 붕당인 남인과 함께 개발살이 나고, 문제의 환관은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다. 또, 사도세자는 부왕인 영조의 비상식적인 학대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아 투병하던 중에, 자신에게 의복을 가져다주던 환관을 홧김에 베어죽인 일이 있었다. 심지어 연산군 때는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입냄새난다는 이유로 유배를 간 환관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환관 팔자가 개팔자인 셈인데, 조선이 유난히 환관들이 기를 못 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조선이 환관들을 쥐잡듯이 들들 볶아대서 권력에서 손 떼게 한 것에는, 이웃한 중국의 왕조들, 특히 명나라의 환관들이 황제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한 것을 반면교사로 삼은 탓도 크게 한몫했다.


7. 결혼과 가족관계[편집]



7.1. 중국[편집]


중국은 원칙적으로 환관은 부부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은밀히 불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부부생활만 못한다 뿐이지 양자 입적은 가능했다. 일례로 환관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조등의 경우 조숭을 양자로 데려와 키웠는데 그 조숭의 아들이 다름아닌 조조이다.

환관들은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은밀히 궁녀들과 연분을 맺고 부부맹약을 맺었다. 이런 남녀관계를 대식(代食)이라 했는데 본래는 서로 밥을 나눠먹는다는 뜻으로, 자신들의 은밀한 관계가 주변인들에게 발각되면 "서로 밥만 나눠먹는 사이"라고 둘러댄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37] 대개 한번 부부 맹약을 맺은 궁녀와 환관은 죽을 때까지 인연을 끊지 않았고, 한쪽이 죽어도 다른 사람과 연을 맺지 않고 나름대로 정절을 지키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배우자를 중국 궁정에서는 숑메이(兄妹)라고 에둘러서 표현했으며[38], 황제조차도 이런 관습을 알고 있어서 명나라 대에 오면 황제가 측근 환관에게 아예 대놓고 "네 짝은 누구냐."라고 묻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관계라서 공식적으로는 다들 알면서도 쉬쉬하던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졌다. 궁녀들은 어쨌든 제왕의 여자이기 때문에 환관과 사통한 것이 발각되면 즉시 황제를 속인 죄가 적용되어 둘 다 처형당했고, 극히 일부 충직하고 성실한 (또는 재산과 권력이 넘쳐 어지간한 관료나 황족들에게도 부담스러운) 환관과 궁녀들만이 황제의 '묵인'을 받는데에 그쳤다. 그리고 청나라 때부터는 궁녀들 대부분이 서구권의 경우처럼 신부수업을 받고 황실이나 귀족 집안으로 시집갈 준비를 하러온 귀족 집안의 영애들이었으니 아예 환관들이 궁녀와 눈조차 마주칠 수조차 없었다.

공공연히 여자를 들여 아내로 삼은 환관도 있는데, 이런 여자들을 식모와 비슷한 뜻의 채호(采戶)라고 불렀다. 특히 명나라 환관들은 어느정도 재산을 얻으면 누구나 채호를 두고 지냈다. 양자를 들여 자식을 삼기도 했는데, 10세 이하의 어린 시절에 입양한 아이는 입양 즉시 고자가 되고, 환관 수업을 받으며 양부의 지도와 보호 아래 환관으로 성장한다. 때로는 유력자가 환관과 줄을 대기 위해서 양자를 자처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조 집안이 대표적인 케이스. 다만 조등이 양자를 들인 것은 중국 수천년의 역사에서도 극히 예외적인 사례다.


7.2. 조선[편집]


조선에서는 같은 시기의 명나라와는 달리 공식적으로 환관에게 결혼할 권리와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을 했다. 사대부들은 고자인 환관들이 아내를 두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계속 올렸으나, 왕실에서는 거부하며 환관이 가정을 지킬 수 있게끔 지속해서 뒷받침해주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환관들이 부와 권력 이외에 몰두할 것을 주어 환관의 폐단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고, 환관들도 지켜야 할 가정이 있고 가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에 행동거지를 조심스럽게 할 수 밖에 없었다. "환관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를 수시로 들을 수 있는 사회였던 바로 옆 명나라[39]와는 반대로 조선사 500년 중에 환관이 권력을 농단했다는 기록은 단 1줄도 없을 정도로, 환관에게 집안일이라는 소일거리를 줌으로써 실질적인 권력 삭감 효과를 봤다.

우리가 조선사에서 잘 아는 인물들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 환관의 이름은 정말로 얼마 안 된다. 끽해야 계유정난으로 공신이 된 정균, 연산군에게 바른말했다가 죽은 김처선[40], 그나마 이들도 부는 누렸을지 모르나 권력을 누린 건 아니었다. 그나마 가장 셌던 시기는 문정왕후수렴청정하던 명종 시기로, 내수사의 힘이 막강했는데 이 내수사를 맡은 게 내시들이었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강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조선의 환관들도 양자를 들여서 대를 이었는데, 양부와 성씨가 같은 경우도 있고 다른 경우도 있다. 양부와 성씨가 같은 아이와 양모와 성씨가 같은 아이가 자식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양부와 같은 아이는 친가에서, 양모와 같은 아이는 처가에서 데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관의 양자들은 고자가 돼서 환관으로 일하게 된다. 환관은 아이를 관청에 데려가서 수술비를 주고 공식적으로 고자를 만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환관을 지속적으로 수급했던 것이다. 물론 환관의 양자이지만 고자가 아닌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는 성인인 경우는 거의 없고 일가 친척 중에 부모를 잃은 아이를 데려다 키운 경우에 속한다. 고아가 된 아이를 키울 사람이 없어서 별 수 없이 양육권을 떠맡은 것에 가깝다. 심지어 양녀를 들이기도 했는데, 이 경우도 환관 본인의 친척이나 처갓집 사람을 입양한 경우에 속한다. 성인을 양자로 삼는 것에 별다른 제한은 없었지만, 상술한 이유로 조선의 환관들은 권력이 하나도 없는, 그저 왕의 시다바리에 불과했던지라 환관들과의 유착 관계를 만들고자 환관의 양자로 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리학의 영향으로 인해 평민들조차 가문을 엄청나게 따졌던 조선 사회였던지라, 저 양자 제도 때문에 본관도 성씨도 제각각인 환관 가문에 편입되길 꺼린 탓도 컸다.

한국에서는 고환만 잘라내는 방식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해서도 성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사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인을 무는 등 괴롭혔다고 한다. 아무래도 내시의 아내들은 엄청난 성적 고통을 겪었던 듯. 이상의 내용은 한 향토사학자가 어렸을 적 자신의 옆집에 살았던 내시의 아내가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을 들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환처[41]불륜을 요구할 때는 해주는 것이 도리다."란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는 과학적으로 맞지 않는다. 고환을 절제했더라도 전립선이 있으면 사정이 가능하다. 또한 사정을 하지 않더라도 절정을 맞는 것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2차 성징 이전의 남자아이는 전립선이 발달하지 않아서 성기를 자극하더라도 사정을 하지 않지만,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고환을 절제했을 경우 남성호르몬이 부족해서[42] 발기부전이나 성욕이 떨어져서 성적 문제를 겪을 가능성은 있다. 근데 어차피 거세 안 당한 남자도 이런 문제는 왕왕 겪잖아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과학적인 사실로 보는 것은 좀 부정확하다. 아마도 단순히 기능이 작동하느냐 마냐의 문제라기보다는, 환관으로서의 자괴감, 박탈감, 절망감, 사회적 소외감 등을 풀기 위해서 성적인 학대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릴 때 거세를 한 환관은 남성호르몬 작용이 안 되기 때문에 변성기도 없어서 목소리가 여자와 비슷했다. 흔히 새된 목소리로 아첨하는 환관의 이미지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실제로는 이런 이미지와는 좀 달랐던 것 같다. 환관이라 해도 변성기가 지나서 거세를 받을 경우에는 일반 남자들처럼 남자다운 목소리를 지니는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향토사학자는 "어릴 때 이웃집이 구한말에 궁중에서 일하다 은퇴한 고위직 환관이었는데, 체격도 우람[43]했지만 목소리도 남자답고 쩌렁쩌렁해서, 산에서 고함을 치면 마을 전체에 다 울릴 정도였고, 행동거지도 위엄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왕의 남자, 음란서생,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2000년대 이후의 사극에서는 고위직 환관을 남자다운 이미지의 연기자가 맡는 경우가 늘어난 것도 이런 사실을 반영한 것.

실제로 건석, 고력사 등 환관임에도 건장한 체격을 가진 인물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거세 이후에도 오히려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는 경우는 있는 듯 하다. 오히려 정화나르세스 등 환관 출신 명장들의 사례를 보면 자기관리만 충분하다면 아예 먼 군사원정을 지휘할 수 있을 정도로 신체적으로도 강인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고환암이나 전립선암 등으로 고환을 절제한 환자들도 철저한 자기관리가 곁들여진다면 원래의 건장했던 체격을 유지하는 이들이 꽤 있다. 환관의 주 목적 중 하나가, 체력적으로 한계가 큰 여성들인 궁녀들만으로는 건물 보수 등 힘쓰는 일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남성 일꾼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건 아니다. 사실 내시들은 직무 상 경호와 상관없는 보직이라도 유사시에 왕을 보호하기 위해 간단한 무술을 익혀야 했거나, 전란이 닥쳤을 때를 대비해서 사람을 업고 산악행군을 하는(…) 등으로 체력을 다졌으며, 아예 정말로 호위무사로 일하는 내시도 있었다.[44] 그 이외에도 환관들은 테스토스테론 수치의 감소로 인한 비만을 막기 위해 개인적으로 운동을 하거나[45], 겨울철에 냉수마찰을 하는 등으로 신체 관리를 하기도 했으므로, 꽤 건장한 체격의 환관들이 많았던 건 당연한 얘기다.

가문과 조상을 중시했던 조선 시대의 환관답게, 환관들도 자신을 친부모처럼 키워준 양부모에 대한 효도와 공경을 매우 중시했다. 때문에, 정조 대의 내관 이윤목은, 『양세계보(養世系譜)』라는 환관 족보까지 만들었는데, 그가 서문에서 밝히기를, "내시 집안은 양자를 통해 계통을 이었기 때문에 모두 성씨가 달라[46] 미처 족보가 마련되지 못했다."면서, 비록 혈육은 아니지만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에서 족보를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양세계보의 양세는 양자를 후세로 삼아 대를 이었다는 뜻이다.

그 후 그의 7대손인 문건호가 중수작업을 했다. 양세계보는 세종 대까지 올라가며, 여기에 기록된 인물 중 일부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민법 판례"우리나라 구(舊) 관습상 내시 종중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47]라는 사례가 있다. 내시는 자식이 없었을 테니까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시 종중이 양자로 대를 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문중의 혈연적인 의미에 치중해 "양자는 문중원이 될 수 없다."는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왕조가 망한 지 67년 후로 더 이상 내시가 존재하지 않게 된 상황이라 가능했고[48] 일제강점기의 신문에는 내시 집안의 재산다툼 이야기가 종종 나와 있다.


8. 환관의 조직[편집]


중국명나라에는 24아문이나 동창 등 방대한 환관 조직이 있었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중국의 환관조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려에는 액정국이 있었고, 조선에는 내시부가 있다.


9. 유명한 환관ㆍ내시[편집]


시대순으로 나열.


9.1. 중국[편집]


  • 수초: 춘추전국시대 제환공의 환관으로, 원래는 제환공의 가신(家臣)[49]이었는데 제환공의 사랑을 받자 제환공을 24시간 모시고 싶다고[50] 스스로 거세하고 환관이 됐다(…). 이 때문에 관이오는 "몸을 아끼는 건 사람의 기본인데 이 놈은 제 몸을 스스로 해쳤으니 그런 놈이 무슨 왕에게 충성하겠습니까?" 라고 제환공에게 말했지만 무시 크리. 하지만 제환공은 결국 무시한 대가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수초 또한 끔살당했다.
  • 노애: 환관 직책을 역임하기는 했으나, 위장취업이었다. 이쪽은 고자도 아니고 심지어 거근인 주제에 목적을 숨기고 환관으로 활동한 것. 적발당하자 억지로 수염을 길러진 뒤 조리돌림 당하고 사형당했다.
  • 조고: 진(秦)나라시황제이세황제의 환관이자 조나라의 왕족 출신으로 진나라의 재상, 권신까지 된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동시에 환관의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간신, 역적으로 유명하며 사실상 진나라를 작살낸 역적이다.
  • 사마천: 진짜 환관은 아니나 궁형을 받은 이후 환관들이 맡던 중서령이 되었다. 그 유명한《사기》의 저자.
  • 중항열
  • 채륜: 종이를 발명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 조등: 조조의 의붓할아버지로 조비가 위나라 황제가 되자 고황제로 추승되었다. 본격 고자 황제
  • 십상시
  • 목순:《삼국지연의》에만 나오는 가상인물. 여포에게 죽은 목순[51]하고 환관 목순이 한자까지 완전히 같다.
  • 황호
  • 잠혼:《삼국지연의》한정으로 원래는 환관이 아니다.
  • 양사욱
  • 고력사
  • 왕수징
  • 구사량
  • 장승업
  • 이헌: 환관이지만 대부분을 서북 지역에서 보냈다. 1081년 오로벌하 시기 난주를 수복했고, 희하로는 희하난회로로 개칭된다. 이후 서하군의 침공을 격퇴한다.
  • 동관
  • 박불화
  • 고용보
  • 정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환관. 대함대 탐험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 황엄
  • 왕진
  • 전균
  • 유근
  • 풍보
  • 위충현
  • 왕승은
  • 이덕전
  • 쑨야오팅: 중국사 최후의 환관으로, 청나라 멸망 이후에 청나라 소조정만주국의 환관으로 일했으나, 둘 다 멸망한 후에는 실직자가 되어 매우 비참한 삶을 살았다.

9.2. 한국[편집]




9.3. 서양[편집]




10. 대중문화에서[편집]


가볍게 다루면 고자라는 점 때문에 중성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태반이고 웃음거리가 된다.[52] 반면 사극 등에서는 특별히 환관다운 묘사는 보이지 않고, 병풍이 되거나 왕의 곁에서 간하는 정도다. 권신이라면 환관이라기 보다는 권력자의 포스가 강하다.

무겁게 다룬다면 전제군주제에서 유일하게 군주가 마음을 열수 있는 남성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많다. 특히 정치나 전쟁, 혹은 후궁간의 궁중암투극으로 인해 피로에 젖은 왕/황제를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환관이라는 군주가 신뢰할수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한 편으로는 거세를 당해 성장이 더디다는 점 때문에 몇몇 여성향 작품에서는 중성적인 외모의 동안 미소년, 미청년 더 나아가 미중년으로 묘사되는 편이며, 몇몇 로맨스 사극 작품에서는 여주인공이 이 점을 이용해 남장하고 환관으로 몰래 위장 잠입하는 경우도 있다.

무협물에 자주 등장하는데, 남성성의 상실을 메우기 위해 극단적으로 무공을 탐하고 권력욕에 불타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악역으로만 등장하며, 체질상 일반 남성들은 익힐 수 없는 무공[53]을 익혀 최종보스, 혹은 그에 준하는 무공을 경우도 많다. 이게 다 규화보전때문이다.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환관 바리스는 각종 궁정 모략의 중심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무결병들은 고자들로만 이루어진 노예병이다.

레진코믹스에《환관제조일기》라는 여자도자장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가 있다. 작가는《여자 제갈량》을 그린 김달이다.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에 나온 아르타니스가 등장 초창기에는 나사빠진 성능이라 그의 직함이 신관이라는 점을 비꼬아 환관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tvN의 예능 프로그램인 《렛츠고 시간탐험대》에서는 조선의 환관들을 다룬 바 있는데, 현대로 치면 차관급에 해당되는 종2품의 직위인 상선조차도 어전 회의 중에 조정 대신들에게 폭풍같은 디스를 당하거나, 다소 과장되긴 했으나 이에 혹한 왕 장동민군사 150만 명(!)을 내어서 상선인 유상무의 집안을 개발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철회해서 유상무를 데꿀멍시키는 등(...), 개차반 신세였던 환관들의 모습을 잘 재현했다. 여기서는 환관들의 채식 위주의 식습관이나 궁중에서의 업무[54] 등이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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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광효는 영락제의 태묘배향공신으로, 권모술수에 능한 승려였다. 승려의 신분임에도 환속을 거부하고 영락제 옆에서 참모로 활약해 흑의재상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2] 훗날의 정화[3] 하지만 요광효는 "환관은 도구지만 동시에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어린 마화에게 사마천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현재의 오욕을 참고 견뎌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4] 대표적으로 중국이 해당.[5] 실제로 환관들은 왕비, 후궁들의 노리개 역할로 쓰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거세가 되지 않은 남성이 환관으로 위장취업하여 후궁의 여인과 관계를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 역사에 이름이 전하는 예로 노애. 다만 이쪽은 씨앗이 있는데 노리개로 쓰인 것다보니 진짜로 자식이 나왔다.[6] 황제을 말한다.[7] 황제를 경호하기 위해서 황제가 자는 방에서 함께 밤을 보내는 환관도 존재했다. 낮에 미리 잤다가 황제가 잘 때는 침실에서 보초를 서는 것.[8] 현대의 기준으로 환산하면 180cm 정도.[9] 양아버지의 애첩과 간통한 것을 들키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맹세하기 위해 잘랐다고 한다.[10] 고대에는 왕을 신으로 숭배했다.[11] 인도인들은 아리아인이나 드라비다인, 문다인 계통 이주민들이 선주민인 오스트랄로이드계 주민들과 혼혈한 후에, 다시 자기들끼리 혼혈을 이루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외견 상으로 한족들같은 동아시아인에 비하면 피부가 다소 검은 편이다. 그래서 인도인 환관을 보고 저렇게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12] 예컨데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정중부가 내시 한뢰의 무례함을 꾸짖으며 "환관 놈"이라고 욕을 하는데, 이는 잘못된 묘사이다. 사실 고려시대의 내시직은 명망높은 가문의 자제들에게나 허용되는 엘리트 코스였기에, 환관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한다. 곁에서 국왕을 수행하며 조정의 대신이나 재상직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기 때문.[13] 제국 초기에만 해도 코를 자르는 선에서 정리되었지만, 코를 잘리고도 쿠데타로 집권한 황제가 나오면서 눈을 뽑거나 고자로 만들기 시작했다. 눈 뽑히고도 집권한 황제도 결국 나왔지만[14] 애초에 유럽에 흑인 노예를 수출하는 최대 업자들이 아랍 및 바르바리 해적들이었고, 미국에 수출된 흑인 노예들도 아랍인 노예사냥꾼들이 잡아들였다. 뭐 바르바리 해적들이야 백인노예들도 많이 잡았지만(…)[15] 특히 엄숭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조선에서 나온 명나라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나오는 권세쥐고 나라를 쥐락펴락 하는(쉽게 말해 간신) 환관의 이름은 죄다 엄숭이다(…) 참고로 실제 엄숭은 환관이 절대로 아니었다.[16] 말 그대로 사람(人)에서 고환을 상징하는 2개의 점이 떨어져나간 사람을 뜻한다. 흔히 이런 사람을 고자(鼓子)라고도 했는데, 이는 북처럼 속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17] 정동과 마찬가지로 조선 사람으로 온양 출신이었다.[18] 고려시기엔 궁형이 없어서, 젖먹이 때 불알을 개에게 씹혀서 고자로 만들어 환자로 만들었다고 한다.[19] 이강달은 이후 공신에도 책록되고 공민왕의 신임을 얻었으나 방자하게 행동한다는 탄핵을 받고 권세가 한풀 꺾인다. 그러나 공민왕 시해 후 궁 안팎의 보안을 철저히 하고 기밀을 엄수해 자칫 발생할 수 있던 후계자 분쟁같은 왕실의 큰 혼란을 미연에 방지한 공을 세웠다. 공민왕이 갑작스레 사망한지라 후계자를 딱히 내정한 것도 아니였는데 공민왕의 생전 유지를 받았다는 이인임이 나서 우왕이 보위를 잇기를 주장했음에도 경복흥이나 이수산 등 다른 원로들이 혈통이 더 명확한 방계 종실을(창왕 폐위 후 이성계 세력이 추대한 신종의 7대손인 공양왕같은) 세우자고 했고 명덕태후 역시 이에 동조했을 정도로 우왕의 혈통은 미심쩍고 불안정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이인임의 강권으로 우왕이 가까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직전 이강달의 공이 없었으면 왕위에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우왕의 혈통을 부정하며 이를 노리는 무리들이 준동했을 가능성이 높다.[20] 그러나 김사행정도전에게 가담했다는 이유로 제1차 왕자의 난태종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21] 경종 때 건저와 대리일 때, 경종이 조태구를 만나볼 때 힘을 썼다든가[22] 대략 35세 이후부터.[23] 성종 대에 함흥 천민 출신의 한 환관이 스스로 거세한 사실이 적발되어 쫓겨났다는 기록이 있다.[24] 이를테면 변소에서 변을보다 고환에 묻은 변을 미친개가 달려들어와 뜯어먹어 고자가 되는 경우도 으아아 있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어릴 때 유아가 변을 본 다음 개가 유아의 항문에 묻은 변을 핥아서 변을 닦게 하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 이게 잘 넘어가면 좋지만 개가 변을 핥다가 변만 핥는 것이 아니라… 음… 아… 아무튼 대부분의 경우 문제가 없었으니까 풍습으로 이어졌겠지만, 애기 팔자가 개에 의해 조져지는 일이 꽤 있었다고 한다. 70년대 라디오 방송에 집안의 하나뿐인 손주를 고자로 만들어 보신탕이 된 똥개 얘기가 나왔으니…[25] 고통은 둘째치더라도, 음경은 자르고 적당히 지혈해두면 물론 지혈이 더럽게 힘들다 상처는 자연히 아물지만 고환은 정관이 연결되어 있고 혈관이 많아 출혈량도 상당하다. 지혈도 어려울 뿐더러 대충 봉합해봐야 파열된 혈관으로부터 신체 내부에 피가 차거나 수술 부위가 오염되어 사망에 이르기 십상이라, 현대의학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수술로 통한다.[26] 당나라 때는 이것들보다 더 무식한 방법도 있었는데 돌로 고환이고 음경이고 깨버리는 것(…) 무슨 마약했길래[27] 사실 삽입성교를 안하더라도 만족을 얻을 만한 방법은 많기(…) 때문에 음경까지 잘라낸 환관도 비슷한 케이스가 왕왕 있었을 것이다.[28] 특히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내시는 상선이라 하여, 종2품(현대의 차관급)에 달하는 품계를 가지고 있었다.[29] 단, 왕족인 대군, 군, 공주, 옹주 등의 사저는 100칸 이상으로 건축하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비슷한 예로 궁궐과 사찰 외에는 원형기둥과 단청, 공포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30] 특히 조선의 환관들은 하는 일이 노비와 비슷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법적인 신분도 노비였다. 단지, 실질적인 대우만 양반 취급이었을 뿐이다.[31] 환관들의 사례는 아니지만, 비슷한 사례가 20세기 중반의 바티칸에서도 있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2세가 극심한 신경쇠약으로 인해 골골대느라고 종교 관련 업무만 보기로 하고, 세속 행정은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비서였던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에게 일임했는데, 이에 파스칼리나 수녀는 수시로 교황을 알현하려던 추기경들의 접견을 갖가지 핑계로 방해하면서 바티칸비선실세로 활약했다. 결국에는 후임 교황으로 요한 23세가 집권하고서야 실각해서 실세 자리에서 내려왔고, 그 이후로는 평소 그녀가 크게 관심을 가지던 자선 사업에 종사하면서 말년을 보냈다.[32] 실제로 그 어떤 환관도 황제 자리는 노리지 않았다.[33] 대원정으로 유명한 정화명나라 때의 환관이었다.[34] 특히 동창은 황제 직속의 특무기구인터라 황족들과 고위대신들도 어찌 못했으며, 동창으로 잡혀가 고문당하고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35] 정덕제 시기 유근이나 천계제 시절 위충현 등 권세를 쥔 환관들은 많았지만 일단 황제의 눈밖에 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똑같이 환관의 전횡이 심했지만 명의 상황은 환관이 황권을 농단하던 후한, 당과는 차이가 컸다.[36] 사실 이 알력이라는 것도 고력사도 할 말이 있는 게, 시를 지으라는 황명에 술에 취한 채로 입궐한 이백이 고력사를 보고 "어이, 고자! 와서 내 신발 좀 벗겨봐라!"라고 주정을 부린 것이 고력사를 빈정상하게 했다고. 참고로 이백은 그의 상징물일 정도로 당대 최대의 애주가로 한끗발 하는 인물이었다.[37] 조선에서는 궁녀들로 이루어진 동성애자 커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역시 결혼이 금지된 사람들끼리, 밥 같이 먹는 사이라고 오리발 내밀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38] 중국어남매라는 뜻인데, 환관-궁녀 커플끼리 서로 의남매 사이라고 잡아떼고자 한 것에서 유래했다.[39] 환관들이 국정농단으로 나라가 망한 명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환관의 권위가 바닥이었다는 그 청나라에서조차도 황권이 바닥에 떨어진 청조 말엽에는 서태후의 총애를 받은 안덕해라는 환관이 날뛰어 지탄을 받기도 했을 정도였다.[40] 사실 김처선도 젊은 시절에는 술을 많이 마셔 환관으로서의 업무를 방기한 죄로 곤장을 맞았다는 실록 기록이 있을 정도로 꽤 방탕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승진을 하면서 행실을 고치고 올곧은 성격으로 변하였다.[41] 환관의 아내[42] 고환에서만 남성호르몬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양이 줄어든다.[43] 의외로 진짜로 성장기에 남성호르몬 분비가 끊긴 사람은 그만큼 체격이 커졌다. 성호르몬과 성장호르몬은 서로 길항작용을 해서 성호르몬이 많이 분비되기 시작하면 성장호르몬도 그쯤해서 분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사춘기 무렵이 되면 성장판이 점점 닫혀가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성호르몬 분비가 끊겨버리니 성장호르몬 분비가 더 오래가고, 그러다보니 성장판도 늦게 닫혀 체격이 커지는 것이다. 개인차는 있지만 카스트라토들도 덩치가 컸다는 그림이 남아 있다. 그래서 카스트라토가 맡는 여주가 일반 남성 성악가가 맡는 남주보다도 더 큰 우스운 광경이 나타나기도 했다.[44] 물론, 이미 같은 역할을 하는 내금위라는 조직이 따로 있으므로, 내시들만 왕을 경호하는 건 아니었다. 호위내시들은 대부분 궁궐 내 여성들의 경호를 담당했다.[45] 이런 경우는 식생활도 꼼꼼히 관리하다보니, 가급적 육식을 멀리하고 두부 등의 으로 된 요리를 주식으로 하기도 했다.[46] 위에서 언급했듯 환관 가문은 양자의 성을 아버지의 성씨로 입적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고 대를 이었기 때문에 본관은 물론이고 성씨도 완전히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47] 대판 1977 . 06. 07. 선고 73다67 판결.[48] 조선 멸망 직후에도 내시로 만들어진 경우가 몇몇 있었으나, 이 시점에는 가장 젊은 내시도 60대.[49] 심부름꾼, 안마사, 동성애 파트너라는 이야기도 있다.[50] 궁궐에 24시간 있을 수 있는 남자는 군주, 태자가 아니면 환관이 유일하다.[51] 이 인물도《삼국지연의》에만 나오는 가상인물이다.[52] 특히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주상 전하 납시오~!"라며 양손을 반대쪽 소매에 넣고 허리를 굽히는 장면이 가장 대표적인 클리셰[53] 양물이 제거되었기에 음공을 익힌다던지, 혹은 평생을 동정으로 살 수 밖에 없으니 양기를 축적한 양강한 무공을 사용하는 극단적인 묘사가 많다.[54] 상술한대로 환관들이 무술을 익혔던 것이나, 사람을 들쳐업고 달리는 훈련을 받았던 것이 상세하게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