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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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활자의 첫 등장
2.2. 목활자
3. 한글 금속활자
3.1. 유럽 활자와 축도기



1. 개요[편집]


활자( / Type)는 특정하게 디자인된 글자를 말한다. 그러나 그 기원이 활판인쇄에서 사용하는 글자틀이었기에 인쇄되는 글자라는 의미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형적인 모습은 사각 기둥 형태의 소재에 글자를 양각으로 새긴 것이다. 이 활자의 묶음을 활자체라고 한다.

초기 인쇄술에서는 페이지 하나 하나를 통째로 판 하나에 새긴 후 이를 이용해 인쇄하는 방법을 썼으나, 이는 판 하나를 새기면 똑같은 페이지 하나만 만들 수 있는데다 중간에 오자 하나만 생겨도 판을 통째로 갈아야 제대로 수정이 되는 등 돈과 시간 면에서 여러 모로 많은 수고가 들었다. 그런 와중에 페이지 단위가 아니라 한자씩 글자를 새긴 후 이를 모아서 페이지 단위로 책을 찍고 재활용할 수는 없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나오게 되었고, 북송 시대에 필승(畢昇)이 그런 아이디어를 실용화해 교니(膠泥, mortar)활자를 만들어내면서 최초의 활자가 나오게 된다.


2. 역사[편집]



2.1. 활자의 첫 등장[편집]


활자를 이용한 최초의 인쇄물은 기원전 17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미노스 문명파에스토스 원반으로 여겨지고 있다[1]. 이 원반은 기록된 문자와 언어가 무엇인지 밝혀지지않은 점 등, 여러모로 수수께끼가 많다. 파에스토스 원반 이후로 활자 인쇄물이 역사에 다시 등장하기까지는 무려 30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인 서기 1299년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이렇게 활자 기술이 오랫동안 전승되지 못하고 명맥이 끊긴 이유에 대해, 미국생물학자이자 인류학자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당시의 미노스 문명에서 활자에 대한 수요가 많이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활자로 대량의 서적을 만들어내야할 만큼, 당대의 대중들이 문해율이 높았거나 지식 수준이 높았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기술이 사장되어 버린 것이다.

실제로 11세기 이후의 동북아시아에서는 과거 제도의 실행으로 인해 유교 경전에 대한 수요가 높았고, 같은 시기의 유럽에서도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성경과 각종 행정 서류에 대한 수요가 높아서, 목판 인쇄술이 등장하자 금방 각지에 인쇄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2]. 이는 뒷날 금속활자의 발명과 보급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당장 유럽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만들어서 보급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도 본업은 금속세공사를 겸하던 인쇄업자였다. 미노스 문명같은 고대 시대는 이렇게 인쇄술이 발달할만한 기반 자체가 전무했기 때문에, 파에스토스 원반이라는 획기적인 발명품이 주목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2.2. 목활자[편집]


점토를 이용한 활자는 제작에 용이하지만 지속적인 인쇄에 쓰기에는 강도가 문제가 있었고, 해서 필승 이후에 점토를 대체하는 소재를 사람들은 찾게 된 끝에 나무가 소재로 쓰이게 된다. 원나라 시대에 왕정(王禎)이 1298년 목활자 3만여 개를 만들어 책을 찍어낸 것이 목활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목활자가 아닌 목판 인쇄 방식이다. 차이점은 목판인쇄는 책의 한면을 통째로 만들어 찍어내고 목활자는 글자를 하나씩 만들어서 조합해서 한면을 만들어 찍어낸다. 목판 인쇄는 목활자 인쇄보다 오래된 방식으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

한국의 경우 목활자를 정확히 언제부터 썼는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학자들의 주장 중에는 고려에선 목활자보다 금속활자의 사용이 빨랐다는 것도 있다. 금속활자를 쓰게 된 이후에도 초기 제작 비용이 적다는 점 때문에 목활자의 제작과 사용은 계속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기존에 중앙에서 가지고 있던 금속활자가 몽땅 털리자 어쩔 수 없이 목활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2.3. 금속활자[편집]


목제 활자 역시 쓰다 보면 갈라져 버리는 등 지속적인 인쇄에 쓰기에는 강도에 문제가 있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금속 활자가 쓰이게 된다.

한국 쪽은 금속활자의 시용 면에선 최초 자리에 있다. 기록으로 남아있기로는 금속활자로 고금상정예문을 찍었다는 기록이 금속활자에 대한 기록으로는 가장 최초이나 상정고금예문 자체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 외에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가 고려시대에 금속활자로 찍은 책을 조선시대에 복각한 판본으로서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사용에 대한 단초를 남기고 있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 금속활자로 찍어낸 책이 몇 가지 남아 있으며, 그 중 직지심체요절은 현재 전하는 금속활자로 된 인쇄물 중 가장 오래된 책....이라고 그간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한 판본이 직지심체요절보다 139년이나 앞선 금속활자 인쇄물임이 밝혀졌다. 그간 목판본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90년 동안이나(...) 자세한 전말은 금속활자 항목에 서술된 내용을 참고. 이 남명증도가 판본은 목판본으로서도 이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조선은 고려 때보다 금속 활자 면에서 발달한 면을 보여준다. 조선 정부가 처음으로 만든 금속 활자였던 계미자는 밀랍을 깔고 그 위에 활자를 놓아 고정한 후 인쇄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는데, 이런 방법으로는 밀랍을 사용하면서 추가비용도 들고 인쇄하는 데 시간도 많이 들었다. 그러다 세종 때 새로운 금속 활자인 경자자와 갑인자를 제작, 활자를 반듯한 입방체 형태로 제작하여 글자간의 빈틈을 없애고, 인쇄를 위해 글자를 고정할 때도 대나무로 글자들을 조이고 고정하는 방식을 사용하면서 밀랍을 사용하지 않고 인쇄 속도도 향상되는 성과를 얻었다.


3. 한글 금속활자 [편집]


2021년 6월 2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공평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현장(인사동 79번지 일원)에서 1600여개의 세종대왕 치정기 즈음으로 추정되는 한글 금속활자를 포함하는 갑인자 활자가 대량 출토 및 발굴되었다고 문화재청이 공식발표하였다.
문화재청 (국영문 동시 배포) 공평동 땅속에서 항아리에 담긴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 발굴
한편 이번 출토된 갑인자 한글 금속활자는 가로 1cm, 세로 1cm 크기이다.
세종대왕 이후에도 한글 금속활자는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

3.1. 유럽 활자와 축도기[편집]


유럽의 경우 동아시아권보다 활자의 개발이 늦었지만, 산업으로써의 인쇄가 발달하고 각종 인쇄기와 제반 기술이 점차 확충되어 결국 동양의 활자와 인쇄를 대체하였다.

특히 유럽의 활자 제작 측면에서는 19세기 무렵부터 어느정도 자동화된 생산이 시작되는데, 1834년에 축도기라우터(router: 나무 등에 홈을 파는 기구)가 결합된 장치가 개발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장치의 개발 덕분에 유럽 활자공들은 한 가지의 스케일의 활자와 도안 디자인만 하면 다른 스케일의 활자와 도안을 오차없이 자동화된 방법을 통해 복제할 수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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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활자 인쇄물 뿐만 아니라, 도장을 제외하면 인쇄물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물건이다.[2] 이 시기의 유럽은 막 중국제지술이 보급되었던 때라서 종이의 값이 비쌌고, 인쇄 기술에도 한계가 있어서 자체도 무척 귀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성경의 일부분만 인쇄한 종이를 낱장으로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고, 책 자체는 귀중품으로 간주되어 집안에 신주단지 모시듯이 보관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 정도로 책에 대한 대중들의 수요가 높았기 때문에, 종교 개혁이 발흥했을 때는 활자 인쇄술이 이미 등장하여 대중화된 틈을 타서 개신교 측과 가톨릭 측이 서로 경쟁하듯이 유럽 각국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이 성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