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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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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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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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세력
황산진구 전투
,77,
-
가야
마두성 전투
,94,
-
가야
황산하 전투
,115,
-
가야
포상팔국 전쟁
,209,
안라국
포상팔국 연맹
신라-왜 전쟁
,(신라의 일본침공사례),
,364 ~ 404
(291 ~ 720)
,
고구려
가야, 백제, 왜국
신라-우산국 전투
,512,
-
우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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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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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키
독산성 전투
,548,
백제
고구려, 동예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551,
백제, 가야
고구려
관산성 전투
,554,
-
백제, 가야, 왜국
가야멸망전
,562,
-
가야, 백제, 왜국
아막성 전투
,602,
-
백제
북한산성 전투
,603,
-
고구려
가잠성 전투
,611,
-
백제
가잠성 전투
,618,
-
백제
가잠성 전투
,628,
-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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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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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대야성 전투
,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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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황산벌 전투
,660,
-
백제
백제멸망전
,660,
당나라
백제
칠중성 전투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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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북한산성 전투
,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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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말갈
과천 전투
,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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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강 전투
,663,
당나라
백제 부흥군, 왜국
사천 전투
,668,
-
고구려
평양성 전투
,668,
당나라
고구려
석문 전투
,673,
고구려 부흥군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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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
-
당나라
칠중성 전투
,675,
-
당나라
매소성 전투
,675,
-
당나라
기벌포 전투
,676,
-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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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733,
당나라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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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
-
장안국
달벌대전
,839,
-
청해진, 김우징
신라구의 일본 침입
,811 ~ 936,
-
일본
원종ㆍ애노의 난
,889,
-
원종애노
대야성 전투
,901,
-
후백제
대야성 전투
,916,
-
후백제
대야성 전투
,920,
-
후백제
서라벌 기습
,927,
고려
후백제
고창전투
,930,
후백제
고려
운주성 전투
,934,
고려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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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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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전투
黃山벌 戰鬪

파일:계백 장군의 황산벌 전투 전쟁기념관, 한국문화정보원(공공누리).jpg

황산벌 전투 기록화. 전쟁기념관
시기
660년 7월 9일 ~ 10일
장소



백제, 황산벌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1][2]
원인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교전 세력
백제
(수비)


신라
(공격)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백제 군기.svg 계백 (대장군)
지휘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유신 (대장군)
참가자}}}
파일:백제 군기.svg 충상(忠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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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백제 군기.svg 그 외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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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반굴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그 외 미상[3]
병력
5,000명
50,000명
피해
방어군 궤멸
포로 20여 명[4]
12,000명?[5]
결과
신라군의 승리 및 당나라군과 합류 성공.
영향
백제 수뇌부 붕괴 및 멸망
1. 개요
2. 백제의 내분
3. 전투가 일어난 장소
3.1. 산성에서 막았다
3.2. 들판에서 막았다
4. 백제군의 규모
5. 신라군의 규모
6. 관창, 그리고 패배
7. 후폭풍
8. 기타
9. 대중문화에서



1. 개요[편집]


660년 음력 7월 9일 ~ 10일,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황산벌에서 벌어진 백제신라 간 전투이다. 황산벌은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현재의 부여)으로 가는 길목이다. 신라는 사비성에 가기 전 당군과 합류하려 했고, 백제는 이를 어떻게든 막아내기 위해 전투를 걸어야 했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신라군의 사비진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후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나당연합군을 결성해 사비성을 공격, 백제는 멸망한다.


2. 백제의 내분[편집]


660년 3월 당나라의 12만 2711명, 배 1천 9백 척 규모의 대군이 중국을 출발, 황해를 건너 덕물도[6]에 6월 21일 상륙했다. 5만명의 신라군도 5월 26일 서라벌을 출발, 무열왕은 남천정[7]에 도착하고 무열왕은 태자 김법민을 배 100척 규모의 신라 수군과 함께 서해의 덕물도로 파견하여 당군을 영접하게 하였다. 이상훈 교수는 이 100척이 원래 서해안 당항성에 소속된 수군이며[8] 승선 인원은 약 6,500명으로 추산했으며[9] 신라 수군 지휘관은 병부령 김진주와 장군 천존으로 추정했다.[10] 양측은 7월 10일,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백제를 협공해 백제의 수도에서 만나기로 일정을 맞추었다.

신라 최고의 명장 김유신이 이끄는 병력은 모두 5만. 당나라 부대의 절반 정도 되는 숫자였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육군은 7월 9일, 황산벌로 나아갔고, 신라군 수군이 가세한 당군은 덕물도에서 10여 일 이상 항해의 피로를 풀고 휴식을 충분하게 취한 뒤, 서해안 연안을 따라 항해해 백강구(白江口, 오늘날의 금강)를 바라보고 진격하였다. 서쪽과 동쪽에서 도합 20여만에 가까운 대군이 백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백제 측은 덕적도에서 나당연합군이 만났음에도 이 때까지는 백제가 이를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완전하게 느끼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수나라부터 서해를 횡단하여서 평양으로 직공하던 적이 몇 번 있었고, 전과는 달리 약간 남쪽으로 오기는 하였지만, 신라왕이 군대를 이끌고 한강유역까지 북상하였기에 황해도를 공격해서 평양으로 갈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늦어도 이후 덕적도에서 수군이 남하하면서 백제 영역인 당진 일대를 통과할 때쯤에는 백제도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이렇게 양쪽에서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백제 조정의 전략은 성충, 흥수의 말대로 기벌포와 탄현에서 당, 신라군을 동시에 모두 저지하려는 방어적 전략과, 적군의 진입을 일단 허용한 뒤 좁은 길목에서 당군에게 공세를 가하려는 의직의 공격적 전략이 맞서게 된다. 백제 조정은 성충과 흥수의 1안 대신, 조공으로 신라군의 전진을 저지하는 한편, 수도 주력군으로 기벌포[11]에 상륙해서 백강을 거슬러오르는 당군을 요격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성충과 흥수의 1안은 단순한 전략적 판단 외에,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서 기존 귀족세력과 화합하여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맞서자는 의도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백제 왕실과 귀족 세력은 극도로 깊은 골이 파여있었고, 이 상황에서 재결합하기 위해서는 백제 왕실로서도 파격적인 양보가 필요했으므로 이러한 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1안과 2안 모두 나당연합군의 합류를 저지하거나 최소한 지연시키는 것을 기본적인 전략으로 삼고 있으며, 백강에서 당군을 요격한다 해도 나당연합군의 합류를 저지하려면 최소한 탄현 근처에서 신라군을 잡고 있어야 하므로[12], 백제의 기민한 초기 대응이 이뤄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백제 조정에서 이런 논란을 벌이는 동안 이미 신라군은 탄현을 통과해 버렸다. 워낙 기습적인 공격이었고 백제 조정은 신라군의 진격 속도를 오판한 셈. 아무튼 탄현에서 틀어막는 건 이미 늦었고, 백제는 5천 결사대를 편성해, 신라군이 대전, 금산에서 백제의 수도 부여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논산 연산면 지역, 즉 황산벌로 나가 신라군을 막으려고 하였다. 사령관은 계백이었다.

3. 전투가 일어난 장소[편집]



3.1. 산성에서 막았다[편집]


파일:attachment/hwangsanbul1.png
신라군의 이동경로
[1] 황산벌 전투의 전장이 육군훈련소 근처기 때문에, 육군훈련소가 1절에도 계백관창이 등장한다. 육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는 훈련병과 기간병이라면 퇴소 또는 전역 때까지 자주 부르게 된다.[2] 다만 현재 학계에서도 정확한 위치는 여러 이견이 존재하니 참고.[3] 삼국유사에는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이라는 인물들이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 그런데 사실 계백의 전사 후 패잔병(?)들이 웅진강 입구를 막고 강변에 주둔했다고 한다[5] 족히 10,000명은 잃지 않았겠느냐는 주장부터, 반굴, 관창이 이끈 별동대원들 위주로 1,000명에서 3,000명 정도로 잡는 주장까지 각양각색이다. 김유신이 실시한 4차례 공세의 목적에 대한 기록이라도 있다면 전투 과정과 피해규모를 아주 거칠게라도 추정해 볼 수 있겠지만, 기록이 일절 없기 때문에 누가 그럴싸하게 소설 잘 쓰냐로 귀결된다.[6]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7] 경기도 이천시[8] 신라 서해안과 신라 남해안 사이에 백제가 있기 때문에 함대 간 신속한 연계가 힘들기 때문.[9] 삼국유사의 12만 2711명에 이 6,500여명을 더하면 대략 반올림하여 여러 사서에 기록된 13만이 된다.[10] 이 두 사람은 무열왕, 김유신과 함께 서라벌을 출발했는데 황산벌 전투에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당군과 함께 금강 하구로 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11]서천군 장항읍[12] 신라가 탄현을 우회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 경우의 우회루트가 익산이나 대전인데 이쪽은 탄현보다 대규모 거점이었다는 문제가 있으나, 신라 병력이 워낙 대규모였다는 것, 국왕직속병력은 모두 차출되어서 백강으로 달려갔을 것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지키는 귀족 병력들이 얼머나 중앙군과 일치단결하여 대처할지에 대해서 백제왕실이 불안해했을 수는 있다.

至黃山之, 設三營, 遇新羅兵將戰。

황산의 들판에 이르러, 세개의 군영을 설치하고, 신라군과 조우하자 장차 싸웠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

김유신 휘하 신라군 5만이 탄현(대전광역시 식장산 동쪽 부근)을 넘어 충남의 평야지대로 진출하자 백제 조정은 좌평 충상, 달솔 계백상영에게 5천명의 군사를 주어 황산벌에서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신라군을 저지하게 한다.

그런데 신라본기에는 계백이 들판에 진을 친 것이 아니라 험지를 선점했다고 적고 있다. 상식적으로도 10배가 넘는 적과 허허벌판에서 교전하면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포위돼서 붕괴해버릴 것이다.[13] 이상적으로는 이런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게하는 것이 가장 좋다. 반대로 말해서 상대에게는 그런 상황을 강요하는 것이 이상적이기도 하다는 소리이다. 웬만하면 다수의 아군이 소수의 적군을 그리고 아군이 유리한 곳에서 싸우는게 맞다. 적군의 피해만큼이나 아군의 피해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걸 계백이 몰랐을 리 없으나 전투를 피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지보단 야트막한 산이나마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잡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춘추지가 병마를 거느리고 노수리산(怒受利山) 에서 주둔하였다.

일본서기

파일:attachment/hwangsanbul2.png
양군 대치도
[13] 흔히들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물리친것에 "우와~ 대단하네!" 라고 여기곤한다. 하지만 군사운용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단한건 맞지만 웬만해선 하면 안되는 행동이다. 고전 병법인 손자병법에서도 '병력이 10배나 차이나면 싸움을 피해라. 정면으로 싸우면 반드시 패배한다.'라고 강조한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신라군이 노수리산에 진을 쳤다고 기록 되어 있는데 이 3개의 영은 각각 현재의 황령 산성, 산직리 산성, 모직리 산성으로 추측된다. 이 중 계백의 본영은 산직리 산성에 위치했을 것으로 비정된다. 계백이 열세에 있는 군을 셋으로 나눈 이유는 신라군이 산직리 산성을 우회하여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는 한편, 세 산성은 어느 한 곳에 공격을 집중할 경우 배후를 노출시키는 형세였으므로, 지세를 활용하여 병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군을 분산시킨 약점에 대비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 추가로 깃대봉-국사봉-귀명봉 주위의 보루에 소규모 병력을 배치하여 신라군의 우회를 감지하는 방식의 반원형 진을 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직리 산성의 고도는 30~50m이고 모직리 산성도 150m에 위치한 것에 불과하며, 이들 산성은 석성도 아니고 작은 토성에 불과하다[14][15]. 산직리 산성은 석성일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애초에 고도 때문에 평저성과 차이가 없다. 따라서 본격적인 공성전이라기보다는 구릉지대의 작은 토성과 목책을 세워 신라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식의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3.2. 들판에서 막았다[편집]


파일:5천결사대출정상1.jpg
오천결사대 출정상, 충청남도 부여군 출처
[14] 사실 고대사에서 토목 공사 기술이 그렇게 발전되지 않았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토성을 쌓았던 것이 일반적이긴 하다. 고구려의 석성도 사실상 긴 시간 동안 토목 공사를 해서 그렇지 계백은 재빨리 결사대를 꾸려서 방어전을 했기에 시간이 급급해서 토성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비록, 토성이 석성에 비해 방어가 부족하긴 하나 목책이나 여러 방어 시설을 설치하면 왠만한 석성 못지 않게 방어할 수 있고 추측하자면 계백이 그만큼 상황이 긴박했음을 볼 수 있다.[15] 앞에서 나오듯이 흔히 성이라고 하면 돌이나, 벽돌로 쌓여진 성곽을 가진 것을 생각하지만, 사실 원래는 토축으로 만든 토성이 튼튼하였다. 애초에 우리나라에서는 돌로만 만든 성들이 거의 없이 토축으로 만든 성벽에 앞뒤로 돌을 쌓은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그리고 다지기만 잘 되어 있다면 일정 관리만으로 성벽이 유실되지 않게 할 수 있는으며, 성벽을 오르기에도 토성은 제법 어려운 편이다. 거기다가 이것이 평지가 아닌 구릉지대라면 밑에서 올라가야 하는 적군의 어려움은 증가한다.

황산(黃山)에 군진을 펼치니, 적들고슴도치올빼미처럼 모여들어 (우리의 진군을) 가로막고자 하였다.

列陣黃山蝟聚▨[16]

張欲申距

문무왕릉비

우선 이 전투의 성격을 파악해보면, 신라군의 목표는 진격로 상의 교전이 아니라 수도 사비성 도착, 당군과의 합류였기에 불필요한 교전은 피하고 곧장 진격하려 했을 것이다. 결국 황산벌 전투에서 시간을 끌어서 합류 약속 날짜보다 하루 늦었다는 점에서, 애초에 신라군은 도중에 전투를 하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내달려야 겨우 맞출 수 있는 일정을 계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전까지의 나제간의 전투는 모두 국경지역에서 몇 개의 성을 빼앗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였는데, 나당연합군은 수나라 이후 고구려를 공격할 때처럼 수도 직공으로 전략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이 작전을 구사함에 있어서 수도를 직공하는 부대는 변방의 성들이 대항할 수 없는 대규모 병력으로 구성되어서 전투를 할 엄두가 나지 않도록 하였다. 다만 이런 전략의 경우 약점이 있는데 실패하면 리스크가 크다는 점과, 백제의 중앙조직이 빠르게 붕괴시키는데에는 효과적이였으나, 지방에 세력들이 남아 있음으로 인하여서 후환을 두는 계책이였다.[17][18]

그러나 계백의 백제군은 신라군과 반드시 싸워야만 했기에 성이나 방어에 용이한 장소에 틀여박혀 방어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신라군을 도발, 합전(合戰)을 해야만 했다. 이는 나당연합군이 일정한 영토점령이 아닌 애초부터 수도 사비성 함락, 백제 멸망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황산‘벌’이 이름과 달리 벌판이 아닌 산성이었다는 견해와 험준한 곳에 목책을 둘러 방어했다는 의견은 일부 사실일지 모르나, 이 전투는 기본적으로 공격군을 방어로서 요격하려는 성격이 아니었다. 백제군 지휘부는 이미 신라군의 진격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단 걸 알고 있었다. 계백이 가족을 모두 죽이고 출진했다는 일화도 계백이 살아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았다는 뜻이다. 백제군은 신라군을 황산벌에서 최대한 저지,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후방에서 전력을 추스르고 서쪽의 수군에 대한 대비도 하겠다는 계획이었고, 결국 그것은 5천 결사대 전멸(全滅)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상훈 교수는 기록을 살펴보아 백제군이 어떤 성이나 보루에 입성해 지켰다는 기록이 없고,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군도 어떤 성이나 보루를 차지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며, 관창 열전에서는 황산벌에 이르러 양쪽 군대가 서로 마주하였다(至黄山之野, 兩兵相對)라고 썼다는 점, 계백이 관창의 목을 말 안장에 매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낸 점에서 신라군 진영과 백제군 진영은 말을 통해 오갈 수 있는(즉 급경사가 아닌) 지형이므로 벌판에서 싸운 전투로 파악했다.[19]


4. 백제군의 규모[편집]


삼국사기에서는 백제군의 숫자를 5천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 사학계에서는 이를 따라 5천명을 정설로 보고 있다.

계백(달솔)보다 상위 직급인 충상, 상영(좌평)이 존재한 데서 착안해 이들이 계백과 대등하거나 더 많은 병력을 통솔하여 5000x3으로 도합 15000명설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백제군 5천 명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고, 지휘관도 좌평 충상, 상영 대신 계백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충상, 상영은 명목상 지휘관이고 실 지휘는 계백이 맡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힘을 받고 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의직이 당군을 저지하기 위해 10,000명을 이끌고 파견되었다고 실려있다.[20] 백강 전투에서 당군의 상륙 저지에 실패한 뒤 사비성 인근에서 백제군과 당나라군과의 교전에서 10,000명이 넘는 백제군이 전사한 기록이 있는 점을 보면, 황산벌에 파견된 병력을 제외한 백제 주력군은 당군과 교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군이 13만이고 신라군이 5만이었으니 백제 입장에서는 더 강한 당군의 진격을 막는데 주력 병력을 배치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의직은 좌평의 지위일 뿐만 아니라 신라와 여러차례 싸운 경험도 있다. 신라와의 전쟁이 발발하면 응당 출진했을 의직이 신라군을 막으러 출동하는 병력 명단에 빠져있는 것을 보면 의직 및 다른 좌평급 지휘관들은 당나라와의 전쟁에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의직과 주 병력은 백강으로 보내고 상대적으로 약한 신라군에게는 좌평 다음가는 달솔 직급의 계백을 보냈으며, 계백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좌평인 충상, 상영을 함께 보낸 것으로 여겨진다.[21]

좌평 충상은 의자왕 재위 초창기에 40여명의 왕자들을 좌평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왕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허울뿐인 지휘관이라는 설도 있으나 김유신 열전에서 적극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에 백제 정치에서 영향력이 상당히 컸던 인물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백제의 좌평 중상(仲常)[22]

이 왕에게 아뢰었다.

“신라인의 해골을 남겨 두어 유익할 것이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신라가 신의를 저버리고 우리 여덟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은 저들에게 있는 것이요, 우리는 옳은 것이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 김유신 상


상영은 달솔이었으나 위 백제군 전략 2안의 입안자로 황산벌 전투 즈음에서 좌평으로 승진한 것으로 보인다.

5. 신라군의 규모[편집]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5만의 병력이 동원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백제군 5천 vs 신라군 5만이 붙었다고 본다.

이 5만 병력은 신라 안에서도 지금의 경상도 주둔 병력 위주로 구성되었으며 경기, 강원 지역 일대 주둔 병력은 고구려와 대치중인 관계로 편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차피 경기강원은 전방지역이자 지정학적 요충지일 뿐 현대처럼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은 아니었고[23] 이 당시 신라는 경상도 지역 외에는 딱히 인구 밀집지대라고 할 게 없었다고 보는 편이라(+안정적으로 병력 동원 가능한 베이스) 신라가 동원 가능한 전력의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상훈 교수는 신라군이 수군 6,500여명을 당 수군과 합류시켰다고 보았으므로,[24]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은 그런 예비 전력 다 제외하고 나온 수치인 셈이다. 실제 황산벌 전투에 참전한 신라군 부대들의 소재지를 조사한 논문이 있는데, 미다부리정 같은 부대들은 원래 주둔지가 신라에서도 후방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러니 신라도 병력들을 싹싹 긁어모아 5만 대군을 편성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낙동강 서안지역 일부가 이때까지도 백제가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특히나 이 지역의 백제군이 움직이면 수도 서라벌이 위험할 가능성이 있기에 병력을 뺄 여유가 없어 경기도 일대에 위치해있던 정예병력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윗지방에 고구려가 있는데 그게 말이 되냐!"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으나 당시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는지 별다른 활동 기록이 중국과 한국 사서에 남아있지 않아, 경기쪽 병력을 빼더라도 남쪽으로 내려올 여력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해당 주장을 뒷받침 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5만의 신라군이 당나라를 위한 보급부대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해상을 통한 보급이 육로 보급보다 훨씬 높아 굳이 육상으로 보급을 했을까 + 중국측 사료를 보면 당시 5만은 전투병 위주의 병력이 맞다는 의견과, 5만명이 보급부대라는 정확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에 진행되는 고구려 공격에서 신라군이 주로 보급부대 역할을 하였다라는 것과 13만명이나 되는 병력의 보급물자 소비가 막대하다는 것, 그리고 산동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한반도 지역이 장산곶인데, 이곳은 고구려의 영역이자 수도 평양과 비교적 근접한 지역으로 13만이나 되는 병력을 막지는 못하지만[25], 보급선을 위협하거나 끊어질 위험도가 있다는 점에서 이때에도 보급부대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낮지는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상 661년 고구려전은 신라군이 보급부대를 맡은 것이 직접적으로 기록된 반면, 황산벌 전투의 신라군은 정예병 5만(精兵五萬)이라 표현되어 있어 전투부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보는 강종원, 이상훈 등의 학자도 있다.


6. 관창, 그리고 패배[편집]


처자식을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발한 계백은 전투가 시작하기 전 "지난 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吳)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지금 오늘 마땅히 각자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라고 말하며 사기를 올리려 했다. 한명이 천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봐서 백제군의 사기가 매우 높았다는걸 알 수 있다.

7월 9일부터 10일까지 하루동안 신라군은 4차례나 백제군을 공격했으나 백제군은 4번 모두 신라의 공격을 패퇴시켰다.[26] 비록 백제군은 수적으로 크게 밀렸지만 기본적으로 백제 영토 깊숙한 홈그라운드에서 신라군이 오기 전부터 진영을 구축하고 방어전 준비를 해 두었고, 문무왕릉비에서 황산벌의 백제군이 고슴도치처럼 싸웠다고 기록된 것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밀집해 필사적으로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신라군은 사기가 떨어지고 당군과의 합류 날짜를 맞추기 어렵게 되자 화랑 반굴관창을 백제군을 향해 돌격시킨다.[27] 반굴은 처음 돌격 때 전사하고, 관창은 한번 사로잡혔다가 풀려났으나, 다시 돌격하여 결국에는 사로잡히고, 계백도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돌려보낸다. 이에 분노한 신라군이 백제군을 향해 마지막 공세를 펼친다. 그 전까지 4차례의 전투로 병력이 크게 소모된 백제군은 마지막 5번째 공세에는 끝내 버텨내지 못했다. 3영이 붕괴되고 충상, 상영을 비롯한 20여 명은 사로잡혔으나 계백을 위시한 결사대 5천은 전멸한다. 백제군이 신라군의 진격을 저지한 시간은 하루에 불과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방어진지도 아닌 3개의 산성에서, 당군과의 합류를 위해 최대한 공격적으로 나왔을 신라군을 상대로 4차례나 승리한 것은 그만큼 계백의 지휘가 탁월했고 백제군이 분전이 눈부셨다는 방증이다.[28]

이 전투에서 신라군이 입은 피해는 알 수 없다. 백제군의 분전으로 인해 피해가 적지 않았으리라는 추측도 있으나, 반굴관창이 이끈 별동대 이전에 있던 4차례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다. 반굴과 관창은 소규모 별동대를 이끌었으리라 추정되며 사상자가 대거 발생했다면 수습에도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기 마련인데 전투 직후 바로 신라군이 진군을 계속해 소정방과 합류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큰 피해 없이 압도적인 전력차의 신라군이 포위섬멸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대부분의 전근대 전투에서는 교전 자체보다는 승패가 결정되고 진 측이 전장에서 이탈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황산벌 전투 전투서열을 정리한 대전대 군사학과 윤일영 교수는 아예 백제군이 4차례에 걸쳐 신라군을 저지한 후에 반굴과 관창의 공격이 이뤄진게 아니라 반굴과 관창의 공격이 그 4차례 공세에 포함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에선 신라군을 4차례 걸쳐 격퇴했다고 서술했고, 반굴이나 관창이나 단기로 공격하지 않았다. 이들의 공격이 4차례 공세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4차례 공세에 이 둘의 공세까지 더해(관창의 공세는 2번이니까) 7차례에 걸쳐 저지하고 8차례 째에 무너졌다고 서술해야 한다는게 윤교수의 주장.

이는 《삼국유사》 태종 무열왕 본기와 《삼국사기》계백, 관창 열전 기록이 상충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데 무열왕 본기에선 4차례에 걸친 공세가 실패한 후 반굴과 관창을 투입했다고 적었으나 관창 열전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그리고 계백 열전에는 4차례 걸쳐 신라군을 저지했으나 힘이 다하여 죽었다고 적혀 있다. 흔히 반굴과 관창이 단기돌격한걸로 알려져 있다보니 의문을 갖는 사람이 적은데 상술했듯 반굴이나 관창이나 혼자 돌격했을 가능성은 없다. 병력을 이끌었는데 이들을 격퇴했다면 이를 세지 않을 이유가 없다.

7. 후폭풍[편집]


신라군을 약속된 합류 일자보다 고작 하루 늦춘 황산벌 전투의 패배로 당군과 신라군의 합류를 저지하려던 백제의 전략은 사실상 실패했고, 백강으로 들어오는 당군에게도 대패하면서 결국 당군과 신라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 앞에서 합류한다. 하지만 신라군의 출발시점이 너무 늦었던 탓에[29] 신라군의 합류 일정이 늦어지자 당군은 신라의 장수 김문영을 처형하려고 하는 등 압력을 넣었으나 김유신소정방에게 강경대응하면서 일단 알력은 무마되었고[30], 얼마 되지않아 의자왕은 부여성에서 탈출하여, 방어에 조금 더 유리한 성 웅진으로 달아났으나 결국 예식진의 배신으로 사로잡힌다. 이를 두고 의자왕이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했다는 시각이 있다. 의자왕이 장기전을 택한 가능성은 낮다고 보며 그러려면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충, 흥수의 1안을 따랐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거기에 백제의 상비군은 위의 두 전투를 거쳐 거의 와해된 것으로 추정한다. 결국 백제는 황산벌 전투를 계기로 수뇌부가 붕괴하여 멸망한다. 그러나 전력이 날아 갔다고 포기하란 법은 없다. 의자왕 역시 예식진이 배신하는 순간에 자결을 시도했다는 신채호의 기록이 있다. 이는 예식진과 그 후손들의 묘비명이 발견되고 의자왕이 예식진에게 사로잡혔음이 명백히 드러나면서 신빙성이 높아졌다. 의자왕은 결사항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의자왕은 당으로 압송되면서 백성을 달랬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오며, 의자왕이 반신반의한 지방군은 예식진의 배신 직후 백제 부흥군으로 일어났다. 무엇보다 당시는 현지보급이 중요한 시절이었다. 부여 일대 유적지에서는 군창터에 불에 탄 탄화미가 발견된 바 있다. 지방군이 건재했고 수도만 빼았겼는데 군량을 폐기하는데 성공했다면, 장기전으로 가면 나당측이 포위당한 형세였다. 최초 전략이 실패하여 주력군이 와해 되었다고 장기전이 불가능했다는 관점은 여러 사례를 볼 때 지나친 면이 있다.


적의 수도(首都)에 이르자 그 우두머리가 군문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고, 그 좌리(佐吏)들도...[31]

至賊都元惡泥首轅門佐吏...

문무왕릉비


다만 660년의 상황은 백제 전국 각 지방의 세력이 온전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오직 웅진, 사비 등 백제의 수도권만 격파 당한 상태였다. 흑치상지 열전에서 백제부흥군으로 3만명이 모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처럼[32] 여전히 백제 유민들은 싸울 전력이 남아있었고 이들은 이후 3년간 일본에서 돌아온 왕자 풍왕을 중심으로 나당연합군에 항전했다. 실질적으로 백제의 전력이 완전히 붕괴한 것은 백강 전투로,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조선시대의 역사학자들은 의자왕 다음으로 풍왕이 마지막 왕이고 백제의 진정한 멸망은 663년이라고 봤다. 이렇게 볼 경우 황산벌 전투는 백제의 마지막 불꽃이 아니라 백제 멸망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


8. 기타[편집]


  • 아이러니하게도 후삼국시대후백제 마지막 왕 신검고려와의 전투에서 패해 항복한 곳도 황산벌이다. 이렇게 보면 황산은 백제와 정말 악연이 있는 장소다. 태조 왕건에서는 아예 일리천 전투에서 대패한 신검이 하필 도망쳐도 황산벌로 왔다며 여긴 계백이 최후를 맞이했던 그곳이라는 언급을 해 가뜩이나 사기가 떨어져있던 백제군 진영은 말 그대로 초상집 분위기가 된다.

  • 미수 허목 같은 조선 시대 학자들은 백제를 가리켜 "사납고 용맹하여 전쟁을 좋아하다 나라가 망했다."라고 평가했는데, 아마 이 황산벌 전투 같이 의자왕 시절에 백제신라를 위협했던 일을 두고 그런 말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 논산에 위치한 육군훈련소의 부대가에서 "백제의 옛 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 관창의 어린 넋이 지하에 혼연하니 웅장한 황산벌에 연무대 높이 섰고" 이부분이 바로 황산벌 전투를 의미한다. 두 국가가 명운을 걸고 싸우던 장소가 그 후손들을 같이 훈련시키는 장소가 된 셈.

9. 대중문화에서[편집]



유명한 전투다 보니 여러 번 영상화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황산벌 전투의 경우 방송 3사 모두 한 번씩 영상화 하였다. 그런데 방송사에서 다룬 황산벌 전투는 삼국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군이 쌀배달이니 군수품 보급을 담당했다는 소리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황산벌 회전에서 신라군이 맡은 역할은 절대로 쌀이나 보급품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군과의 신속한 합류가 목적이다. 당나라군은 수군 함대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기에 신라군의 군량 보급이 필요 없었다. 신라군이 당나라에 군량 보급을 한 경우는 고구려 정벌시에 겨울철 항해가 불가능한 때에 김유신이 한 번 군수물자를 보급한 것과 백제 멸망 후 백제에 주둔한 당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것이 전부이다. 이 두 가지는 "답설인귀서"에 정확히 적혀 있다. 그 외에는 당나라에서 생산되는 넉넉한 군량으로 다 채웠다.[반론]

  • 1992년 드라마 삼국기 - 이때 계백역을 맡은 유동근과 김유신역에 서인석은 드라마 연개소문과 정도전에서 다시 라이벌로 만난다.

  • 2000년 게임 천년의 신화 - 3부 신라 시나리오 3장으로 등장한다. #[33] 관창의 성우는 엄상현. 신라의 승리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에 임하는 관창의 각오를 훌륭히 소화해냈다.

  • 2003년 영화 황산벌 - 문서 참고. 고증을 딱히 신경 쓴 영화는 아니지만, 코미디 영화라는 홍보를 보고 찾아온 관객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전개로 2000년대 사극 영화로는 이례적인 수준의 임팩트를 남겼다. 오히려 사학자들이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한데, 의외로 역사의 굵직한 면을 비교적 사실적이고 현실적이게 그렸기 때문.

  • 2006년 드라마 연개소문 - 극 후반부 백제 멸망을 다루면서 함께 다뤄진다. 심지어 96화는 통째로 황산벌 전투 및 백제 멸망에 할해되었다. 합판소문으로 악명 높은 드라마 답게 굉장히 허술하게 묘사되었는데, 백제군과 신라군을 다 합해서 100명 될까 말까 한 정도의 숫자로 어설프게 싸우는 등, 연출과 묘사가 굉장히 허술하다. 그 이후 삼천궁녀 씬으로 드라마는 발CG와 허술한 연출의 정점을 찍었다. 사실 드라마의 주역은 연개소문과 고구려인 만큼, 드라마가 백제 멸망 파트를 자세하게 묘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간단하게 넘겨도 되었을 장면에 쓸데없이 돈을 들이고 비웃음만 산 꼴이 되고 말았다.

  • 2011년 드라마 계백 - 계백이 주인공인 드라마이니 만큼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쟁으로 그려진다. 작중에서는 의자왕도 계백도 처음에는 성충, 흥수의 작전대로 기벌포와 탄현에서 적을 틀어막고 장기전으로 끌고 나가려 하지만 귀족들이 사병들과 함께 죄다 도망가는 바람에 작전에 필요한 병력을 조달할 수 없어져 결국 차선책으로 기벌포와 황산벌에서 당군과 신라군을 요격하는 작전을 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 2013년 드라마 대왕의 꿈 - 여기서는 계백이 평야에 목책을 세우고 신라군을 저지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다가 관창과 반굴의 전사로 신라군의 사기를 올리고 신라군이 최후의 야습을 감행하며, 두 좌평인 충상과 상영이 배반하여 진에 잠입한 신라군과 군량을 불태우고 진을 혼란스럽게 해 목책이 함락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16] 1글자는 마모되어 확인 불가.[17] 실제로 성공했기 때문에 전자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후자는 향후 3년간의 백제부흥전쟁으로 나타나게 된다.[18] 여요전쟁 당시 거란군이 이 전략에 궤멸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고구려-당의 2차전쟁 당시 당군이 이런 방식을 고구려에게도 했다가 양패구상 끝에 야전에서 대패를 당하고 철수하기도 했다.[19] 신라의 통일전쟁, 민속원, p80[20] 해당 서적에는 윤충이 백제 멸망 뒤 당나라로 건너가 월주(현 중국 저장성 사오싱시)를 정벌했다는 기록도 실려있다. 이는 다른 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21] 조선상고사에서는 계백이 지난 가잠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름을 떨쳤다는 내용도 있다. 계백의 다른 기록이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게 맞다면 신라와 싸워본 계백이 좌평급 인사들을 제치고 총 지휘관으로 나선 것도 납득이 된다.[22] =충상(忠常)[23] 강원지역은 인구수가 많은 곳이 아니고, 태백산맥을 통하여 충북일대까지 고구려군의 작전이 가능하기에 유지하여야 한다. 경기지역도 비교적 넓은 서남부지역은 백제와의 경계지역이라 많은 인구가 살 지역이 아니였다.[24] 신라 병선 100여척이 덕적도에서 소정방을 맞이하러 나갔다.[25] 다만 중국이 대 고구려 전쟁에서 동원한 수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 13만 명이 전부 수병은 아니었을 것이므로 만약 한반도 최강으로 군림하던 고구려 해군이 내려올 경우 사람을 꽉꽉 밀어넣은 수송선 상대로 대학살극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 해군은 이미 광개토대왕기에 백제 최고의 해상 요충이었던 관미성을 일곱 방향으로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이후에도 여수전쟁기에는 산둥 일대를 강습하는 등 동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강군으로 군림했다.[26] 세번째 공격 때는 기어이 신라군이 백제군을 완전히 포위하는 데 성공했는데 백제군이 어찌나 처절하게 덤벼들었는지 포위망이 뚫렸다(!) 쉽게 말해서, 전력적/전술적 이점을 완전히 취하고도 결사항전이라는 단 하나의 의지에 패배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 포위망 때문인지 네번의 공격 후 백제의 전력이 80%가 박살났다.[27] 흔히 반굴관창의 돌격이 '단기돌격'이라 알려져 있고 여타 대중 매체에서도 그렇게 묘사되는데, 이건 삼국사기가 아니라 삼국사절요와 단재 신채호조선상고사에서 와전된 이야기다. 삼국사기 원문에서 관창이 잡힐 때 분명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而彼衆我寡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보내졌다"라고 적혀 있어서, 숫자가 적었던 건 맞지만 관창 혼자서 돌격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의 돌격이 사기 진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군의 기동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는데, 반굴과 관창이 자살돌격으로 시선을 끄는 사이 병력의 일부를 나누어 황산벌의 중심을 흐르는 연산천 옆의 구릉을 우회하여 계백의 5천 병력을 포위섬멸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반굴과 관창의 돌격은 단기돌격이 아니라 상당수의 병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28] 무엇보다 저 숫적 차이를 보라, 10배다. 손자병법에서는 10배 정도면 포위해서 싸우라고 되어있다. 즉 백제는 신라군에게 포위당해 패하기 딱 좋은 상황에서도 절대적 의미에서의 전멸까지 당해가며 5번 싸워 4번은 이기고 마지막 다섯번째에야 완전히 패배한 것이다. 숫자나 상황상 1번을 이기는 것도 힘들 판에 저정도면 잘 싸운 거다.[29] 황산벌로부터 부여성까지 거리는 이틀거리였는데 황산벌에 도착한 건 하루 전이었다. 전투 하는데 또 하루를 소모했으니 약속 시간보다 이틀이나 늦어버렸다.[30] 김유신이 직접 도끼를 매고 당나라 진영으로 가서 백제를 멸망시키기 전 당군 네놈들부터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잔뜩 쫄아버린 당군 수뇌부는 바로 김문영의 처형을 없던 일로 했다(...). 사실 말 그대로 쫄았다기보다는 고대에는 꽤 리스크가 있는 원양 항해까지 하며 10만명이 넘는 대군을 신라와의 파트너십을 위해 원정 보냈는데, 고작 하루이틀 늦었다고 사이가 틀어져 버리면, 당은 한반도 내의 파트너를 잃고 제 1목표인 고구려 원정도 기약할 수 없게 된다는 외교적 배경도 있었을 것이다. 단독으로는 안 된다는 걸 고구려-수 전쟁고구려-당 전쟁으로 뼈저리게 알고 있는 당 수뇌부였을테니...[31] 뒷글자는 마모가 심해 확인이 불가능.[32] 황산벌 5천, 사비성 수비 병력이 1~2만 내외였다. 본 전쟁이 다 끝난 다음에 오히려 더 많은 병력이 모인 것이다. 그만큼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격이 기습적으로 빠르게 진행돼 백제 측이 제대로 힘을 끌어모아 대응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반론] 당나라는 당시 사방으로 팽창하던 국가로 많은 군사들을 천지사방으로 나눴다. 이들에 대한 군량을 모두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라는 것은 사실 말도 안되는 것이며, 수도 장안이 있던 관중지역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체 식량 수급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수양제대운하를 건설하였다. 또한 당시 강남지역이 하북의 경제력을 완벽하게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기에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만약 신라군이 보급부대가 아니라면 소정방이 김유신을 약속시간보다 더 기다릴 필요가 사실 없다. 왜냐하면 소정방은 13만명으로 사비성 앞에 있는데, 단지 연합을 하였다라는 이유로 5만에 불과한 병력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 오히려 단독작전으로 사비를 점령하고, 신라가 백제 멸망에 한 일이 없음을 들어서 영토를 내주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편이 훨씬 편했다.[33] 계백과 관창의 대화는 19분 50초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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