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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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皇城新聞
국가
[[대한제국|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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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창간
1898년 9월 5일
폐간
1910년 9월 14일
설립자
남궁억
나수연 등
주필
유근
박은식
장지연
종류
일반일간신문


파일:황성신문 창간호.jpg

《황성신문》 창간호[1]
1. 개요
2. 시작
3. 위기와 폐간
4. 기타 사항



1. 개요[편집]


1898년(광무 2년) 9월 5일에 남궁억, 나수연 등의 유학파가 주축이 되어 창간한 대한제국 시기의 신문이다.


2. 시작[편집]


이전에 발간되던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받아 창간했다. 주필로는 유근,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이 활동했다. 고금제를 최초로 이용한, 즉 민간의 자본을 바탕으로 한 신문이었다. 국한문혼용체가 사용되었으며. 국한문혼용체 중에서도 상당히 한문투가 강했던[2] 극한 국한문혼용체로 된 신문이었기 때문에, 주 독자층은 한문에 능숙한 중류 이상의 유림층과 식자층을 대상으로 했다. 원래는 주2회 2면 발행이었다가, 1899년(광무 3년) 11월 23일부터 4면 4단제로 발행을 시작했다.


3. 위기와 폐간[편집]


1900년(광무 4년) 8월 8일자 간행본에서 러시아일본의 밀약[3]을 폭로하는 기사를 실었는데, 이를 고깝게 여긴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핵심 인물인 남궁억이 투옥당하고 사장직에서 내려왔다. 이 이후로 어찌저찌 운영을 이어갔지만 1905년(광무 9년) 《을사조약》에 대한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계기로 인해 정간당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신문 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바뀌었고 9월 14일 제3470호를 끝으로 폐간당했다.

《황성신문》이 발행된 13년간 평균 발행 부수는 3000부 가량이었다.[4]

당시의 《황성신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4. 기타 사항[편집]


해당 신문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한 명인 장지연은 훗날 변절하여 일본을 옹호하는 투의 사설과 시를 《매일신보》 주필 당시 써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 당시 이승만과 유영석이 발행했던 《제국신문》과는 라이벌(?) 사이였다. 《제국신문》은 창간 시부터 일반 대중과 부녀자들을 주 구독층으로 삼고 순한글로 신문을 만들었는데, 이를 좋게 보지 않았는지 《제국신문》을 "아녀자들이나 보는 암신문"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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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 출처 - 위키백과.[2] 아예 한자어로 쓴 일부 낱말은 그 자체로 짧은 한문 문장인 경우가 허다했으며, 유교 경전에 익숙한 사대부가 아니면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성어와 비유를 많이 사용했다. 이러한 비유법을 전고(典故)라 한다. 그나마도 유림들이 많이 양보하여 고전 한문에 비해 입말에 가까운 어순으로 기사를 쓴 것이다.[3] 러시아와 일본이 나중에 한반도를 38선을 기준으로 반으로 갈라 통치하자는 밀약을 일본이 제안했다. 결국 불발되긴 했지만.[4] 발행 1년 만에 발행 부수가 3천 부에 이르렀고, 창간 4년 반이 되는 1903년 2월 당시의 부수는 약 1만 3천여 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