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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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黃儼

명나라의 환관. 생몰년도 미상.

조선 출신으로 조선에 자주 사신으로 파견되어 태종 때 1403년(2회), 1406년, 1407년, 1408년, 1409년(2회), 1411, 1417년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세종 때 1419년(2회)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2. 생애[편집]


1394년에 흠차내관을 지냈고 태종이 명나라로 오자 만난 적이 있었으며, 1403년에는 환관태감으로 있었고 조선에 사신으로 자주 파견되기 시작했다.

황엄은 행동거지를 무례하게 하였고, 사신으로 오면서 축재에 힘썼다는 기록이 많으며, 조선측 기록을 보면 다양한 방법으로 태종 및 신하들을 쩔쩔매게 하고 이를 은근히 즐긴 것으로 보인다. 사신으로서의 자신의 위력을 앞세워 소위 '갑질'을 한 것이 곳곳에서 보인다.

1406년, 황엄이 조선에 왔는데 당시 목적은 황제의 명을 받고 제주도에서 동으로 된 불상을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헌데 이 과정에서 사람을 때려죽이는 등의 민폐를 일으킨 사고가 벌어졌다. 이에 태종이 교외에 나와 영접하지 않자 기분이 나쁜 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를 앙갚음하려 했는지 태종에게 불상을 맞이하면서 불상에다가 절을 하라는 황당한 말을 꺼낸다. 아래는 이에 관한 기록.

황제가 태감(太監) 황엄(黃儼)을 파견하여 제주(濟州)에서 동불(銅佛)을 영입하게 하였다. 불상(佛像)이 사관(使館)에 도착하자, 황엄이 상(태종)더러 먼저 불상에다 절을 하게 한 뒤에 예를 행하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불이 중국에서 온 것이라면 내가 당연히 절을 하여 경의를 표해야 하겠지만 조정의 의견이 지금 그렇지 않으니 어떻게 절을 할 수가 있겠는가.”하였다.

하륜과 조영무가 아뢰기를, “황제가 불도(佛道)를 신봉하여 먼 곳에서까지 동불을 구하고 있고, 또 황엄이 고약한 위인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니, 권도에 입각하여 불상에다 예배를 하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신하들은 의리를 지키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 황엄을 이렇게 무서워하니 임금을 어려움에서 구제할 수 있겠는가. 고려조의 충혜왕(忠惠王)이 원(元) 나라로 잡혀갈 때 나라에서 아무도 구하려 드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위급한 상황에 처한다면 역시 이 지경이 되고 말 것이다. 임금은 행동을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인데 내가 부처에다 절을 한다면 예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황엄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화(禍)와 복(福)은 천자한테 달려 있고 불상한테 달려 있지 않으니, 마땅히 천자의 사신을 먼저 뵈어야지 어찌 우리나라의 동불에게 절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황엄이 하늘을 쳐다보고 한참 있다가 미소를 지으며 행례하기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불상에다 절을 하지 않았다.

국조보감》, 태종조 6년(병술, 1406)

당황한 태종은 황엄이 자신을 욕보인다고 여겼으나 상국 명나라의 사신이므로 대놓고 뭐라할 수는 없었다. 황엄이 조선 물정을 아예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사신으로 오간게 수차례였으니 당시 조선에 만연한 숭유억불 정서를 모를리 없었다. 다시 말해 대놓고 사신이라는 본인의 입지를 이용해서 태종을 쩔쩔매게 하고 황엄 본인이 이를 즐긴 것이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태종이 차마 절을 할수는 없으니 황엄에게 예의를 차리고 한마디 하자 별말없이 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넘어간다.

당시 신하들의 여론은 황엄이 욕심이 많고 간사한데다가 사람까지 죽였으니 그 죄가 중하다면서 황제인 영락제에게 고발하고자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고발하지 않았다. 실록을 비롯한 조정 기록에는 자세히 기록되진 않았으나, 제주도에 불상 받으러 간답시고 어지간히도 민폐를 끼쳤는지 황엄이 일으킨 민폐 때문에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고 전라도 관찰사 박은이 사직을 청할 정도였다.[1]

1407년에는 사간원이 하륜의 허물을 논하면서 황엄을 언급했는데, 태종은 황엄을 천하의 사치한 자로 평했다. 또한 황엄과 비교하면 하륜은 검소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깠다. 태종이 대놓고 '사치스러운 사람'이라고 평가했고 하륜의 탐욕스러움도 태종이 모를리가 없는데도 그 황엄과 비교하면 낫다고 할 정도니, 태종이 보기에도 상당히 부패하고 축재에 힘쓰는 불량한 사람으로 보였는듯. 기사

1408년에는 조선에 와서 명나라에 데려가기 위한 처녀들을 선발하는 일을 하도록 해서 처녀들이 선발되자 데려가서 명나라로 귀국했다. 이 때 하필 태조 이성계의 장례와 겹치면서 태종은 식음을 전폐하고 정무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심신이 지쳐 있었는데 명나라 사신을 박대할 수는 없으니 상복도 벗고 황엄의 접대는 예의를 차려 진행했다. 헌데 황엄은 장례 중이라는 것을 모를리 없을텐데도 무례하게 태종에게 고기 반찬을 권해 태종을 당황시켰다.

황엄(黃儼) 등이 객관(客館)에 있었다. 상이 담복(淡服) 차림에 소연(素輦)을 타고 객관으로 가서 황엄을 위로하니, 황엄이 기뻐하면서 고기 반찬을 들기를 청하였다.

상이 사양하기를, “삼년상은 천자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담복(淡服)을 입은 것은 단지 사신(使臣)을 위해서 일뿐입니다. 궁중에 있을 때에는 최질(衰絰)을 입기 때문에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불가합니다.”하였다. 황엄이 재차 청하였으나, 상이 굳이 사양하였다.

국조보감》, 태종조 8년(무자, 1408)


1409년에는 태감을 지냈고, 황제가 처녀 한두 명을 더 보내라고 해서 다시 조선으로 와서 처녀들을 보았다.

세종이 세자가 되기 전에 태종이 똑똑하고 밝은 것을 칭찬하면서 영명한 것이 부왕을 닮았다면서 그가 왕이 될 것이라 여겼는데, 1418년에 왕세자를 바꾼다는 표문이 명나라에 올라오자 황엄은 세종을 왕세자로 봉하는 것이라 여겼다. 1419년는 사례감태감이 되었으며, 그 뒤의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1427년 뒷얘기로 전해져온 기록에 따르면, 최후는 좋지 못했었는듯. 황엄은 죽은 뒤에 관을 자르는 죄를 입었고 아내, 노비는 재산이 몰수당하고 관청의 종이 되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따라서 명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중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죄인 취급을 받았고 1427년 이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3. 창작물에서[편집]


  • 용의 눈물 - 서동수[2]
명나라 황제의 딸과 양녕대군과의 국혼을 추진하여 당초 세자빈이 되기 위해 왕실 교육을 받던 김한로의 딸은 쫓겨날 뻔하지만, 사실 이는 명나라 황실의 뜻이 아니었고 이를 통해 조선으로부터 뇌물 등을 챙겨먹으려던 황엄의 낚시질이었기에 명나라와의 국혼은 무산되고 여기에 낚인 조박은 귀양간다.

조선 출신인 것으로 설정하였다. 처음엔 전형적인 거만하고 탐욕스러운 인사였으나 충녕대군에게 감화되어 조선에게 우호적인 입장으로 바뀌었고, 이후 장영실과 다연을 도와주다가 암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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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제주도는 전라도 제주목으로 전라도 관할이었다.[2] 야인시대에서 털보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