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옌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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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황옌페이.jpg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2,3,4기 전국위원회 부주석
한문
黃炎培
한국식 독음
황염배
영문
Huang Yanpei

임지(任之), 인지(韌之)

초남(楚南)
필명
포일(抱一)
출생
1878년 10월 1일 청나라 장쑤성 촨샤현
사망
1965년 12월 21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상하이 남양공학 재학
직업
정치가, 교육인, 실업가
종교
무신론

1. 개요
2. 생애
2.1. 초기 경력
2.2. 중국의 교육가
2.3.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
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3. 문제작, 『조선(朝鮮)』
4. 가족관계
5.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교육가, 실업가, 정치인. 1905년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한 이래, 교육사업을 펼쳐 여러 교육시설을 설립했고 많은 인재들을 길려냈다. 1930년대 일제의 중국 침략이 가속화되자 항일운동에 뛰어들었고 1938년 국민참정회 참정원으로 선출되었다.1941년 중국민주정단동맹을 결성해 위원회 주석으로 취임했고 1945년 9월에 상하이에서 상공 및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중국 민주건국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탄압이 있자 1949년 베이징으로 건너갔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경력[편집]


황옌페이는 1878년 10월1일 장쑤성 촨샤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1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살때 아버지를 잃어서 가정 형편이 곤궁했기에 외할아버지 집에 기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찍이 동야학당에 다니면서 사서오경을 공부했는데 머리가 워낙 비상했기에 바로 고향에서 글방을 차려서 아동 교육을 맡았다. 1899년, 황옌페이는 21살에 송강부에서 시험을 봐서 장원급제해 수재(秀才)로 뽑혔고 1901년에 상하이 남양공학에 입학하여 외국어반에 배속되었다.

1902년, 황옌페이는 학교 측이 민주운동에 가담한 학생들을 집단 퇴학 및 제명시킨 것에 항의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천연론' 등 서구 서적을 중국어로 번역한 책들을 탐독했고 촨샤소학교를 세웠다. 1903년, 그는 남회현에서 강연하다가 현아문에서 당국에 의해 혁명당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한때 처형될 위기에 몰렸지만, 마침 남회현을 방문했던 미국 선교사가 보석금을 대신 지불해 준 덕분에 풀려났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3개월 만에 상하이로 돌아가 여러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05년 가을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황옌페이는 1906년 상하이 동맹회 지부장을 맡아 교육사업을 펼쳤고 1909년엔 장쑤성 상주의원으로 선발되어 행정을 담당했다. 또한 광명소학교, 사범강습소, 푸둥중학교를 창립했으며 애국학사, 성동여학 등 신교육단체와 학당에서 교사로서 활동했고 장쑤학무(江苏学务)창립에 참여했다. 그리고 1908년 푸둥 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해 푸둥에 전력 공급이 원활하게 했다. 그러던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혁명파에 가입했으며 장쑤성의 교육사장으로 승진했다.

1913년, 황옌페이는 "학교 교육에서의 실용주의의 상용화"를 출판하여 교육과 학생의 생활에 실용주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학교는 사회와 실제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1914년 2월부터 1917년 봄까지 안후이성, 장시성, 저장성, 산둥성, 베이징, 톈진 등 여러 성과 주요 도시들을 차레로 방문해 중국 각지의 교육실태를 조사했다. 1915년에는 농상부 시찰단의 일원으로 미국의 교육사업을 시찰하고 <여미수필(旅美随笔)>을 편찬했으며, 1917년에는 일본과 필리핀의 직업교육에 대한 시찰도 했다. 그해 5월에 상하이에서 중화직업교육사를 설립했고 이듬해엔 중화직업학교를 설립해 철공 및 목공 등 각 과목을 만들어 많은 학생들을 길러냈다. 그는 교육을 하는 것이 병을 고치는 것과 같아서, 지병의 근원을 알아야 좋은 처방을 낼 수 있고 증상에 맞게 약을 처방할 수 있다며 중국이 낙후된 까닭은 교육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외국에서는 고찰하고, 책을 읽는다.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데, 병의 유래가 다르거늘 옛것을 고집하여 오늘의 병을 치료하고, 다른 사람을 붙들어 놓으면 병이 언제 다 나을 수 있겠는가."


1917년 5월 6일, 황옌페이는 상하이에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량치차오, 장젠(張謇), 쑹한장(宋漢章) 등 48명과 함께 중화 직업교육사를 설립했고 이듬해엔 중화 직업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그는 수십년 동안 교육과 사회활동을 주로 중화 직업교육사를 통해 전개했다. 1919년 5.4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장쑤성 교육회 책임자 자격으로 상하이의 각 학교 교장을 소집해 회의를 열어 5.4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시 전체의 수업 거부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2.2. 중국의 교육가[편집]


1920년, 미국의 유명한 철학가 존 듀이가 중화민국의 초청을 받고 상하이에서 황옌페이와 함께 공개강연회를 열었다. 듀이는 실용주의 철학의 대가였고 황옌페이는 실용주의적 교육을 주장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부합하는 점이 많았다. 황엔페이는 강연에서 전통교육의 문제점을 극력 비판하며 자신이 파악한 수치에 따라 100명의 중학교 졸업생 중 얼마나 진학했는지, 실업자가 얼마나 되는지 등의 수치를 상세하게 설명하며 전통교육이 사회발전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강연을 보러 갔던 27세의 마오쩌둥은 황엔페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25년 뒤, 마오쩌둥은 옌안을 방문한 황옌페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20여년 만에 재회하는군요!"


마오쩌둥을 직접 대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했던 황옌페이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자, 마오쩌둥은 1920년때 있었던 강연회에 자신이 참석했음을 이야기했고, 두 사람은 그날의 일에 대해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1921년, 황옌페이는 량스이 내각에서 중화민국 교육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을 거부했다. 그 대신, 그는 1922년에 농촌 건설 사업을 수행하고 난징 고등사범학교를 조직하는 학제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하해공정 전문학교(현 하해대학) 부주임, 국립동남대(현 난징대학), 상하이 상과대학(현 상하이 재경대학교), 샤면대학 등 여러 학교의 교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1926년엔 <대직업교육주의>를 제창해 "교육직에 전념하기만 해서는 국가를 구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생활> 주간지 창간에 함께했고 제2의 혁명을 선전했다.

1927년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황옌페이는 국민당으로부터 학벌을 형성해 국민정부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지명수배를 받았다. 하지만 장제스는 곧 그를 사면했고, 황옌페이는 교육사업에 복귀해 몇년간 학생들을 길려내는 데 전념했다.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그는 항일 구국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구국통신>을 창설해 애국주의를 선전했고 '상하이 시민유치회'(후에 상하이지방협회로 개명)를 조직하여 내전 중단, 항일투쟁을 주장했으며 제1차 상하이 사변 때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국민혁명군을 위해 군수품을 모집했다.

한편, 그는 실업가로서 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다. 1920년대에는 쓰촨성 경제가 발전했지만 육상 교통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이에 1921년 1월, 황옌페이는 장지학(张志鹤), 육죽평(陆竹坪), 육연계(陆莲溪), 고란주(顾兰洲) 등과 함께 상천교통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철도 공사를 계획했고 3월에 주식 모집 약장을 제정하여 상하이 시내와 쓰촨성 안에 주식 수취처를 설치해 50만 위안의 자금을 확보했다.

이후 공사는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1925년 10월, 경녕사~공가로 구간 공사가 준공되어 철도 개통이 완료되었다. 선상에는 경녕사, 금가교, 신육, 소가롱, 조가로, 공가로 6역이 설치되었고 하루 이용객이 1000여 명이었으며 상하이에 있는 많은 외국인들도 기차를 타고 푸동으로 향했다. 1926년 1월, 이번엔 공공로~촨샤 구간 건설이 개시되어 7월 10일에 개통되었으며, 다완(大湾), 샤오완(小湾), 모자교(暮紫桥), 촨샤역이 증설되었다.

1934년 5월, 상천교통주식회사는 촨샤현 정부와 철도 임대계약을 체결했고 상천철도를 동쪽을 향해 씨아오잉팡(小营房)까지 확장했다. 그리고 1936년 3월, 씨아오잉팡으로부터 남쪽을 향해 철도를 건설해 난후이현의 쭈차오쩐(祝桥镇)까지 이르렀다. 이로서 상천철도는 35.35리에 이르렀고 푸둥 지방 경제 발전을 촉진시켰다. 상천철도는 1975년 11월까지 50여년 동안 운영되다가 철거되었다.


2.3.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편집]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황옌페이는 3개월 동안 애국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상하이와 난징을 9차례나 왕복했다. 이 당시 도로 사정이 영 좋지 않고 차도 성능이 좋지 않아서 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황옌페이는 책을 읽는 것에 전념했다. 이때 그는 에드거 스노우의 <서행만기>와 <마오쩌둥 자서전>을 읽으며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에 대해 탐구했다. 그후 1937년 12월 28일, 그는 창사에서 중국의 교육가이자 공산당원인 쉬터리(徐特立)를 만났고 1938년 5월 19일 한커우에서 저우언라이와 접촉했다.

1938년 4월, 우한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황옌페이는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참가했으며 국민참정회 참정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그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을 결의하긴 했지만 여전히 두 당간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 국민당 인사들과 공산당 인사들을 불러서 함께 시국을 연구했으며 두 당 이외의 각당 인사들과 함께 공동으로 호소문을 발표해 "각 당이 성심성의껏 협력해야 하며, 어떠한 의견도 법률상 관례적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1940년 6월 14일, 황옌페이는 저우언라이에게 국민당과 공산당의 이해가 상충되지 않기를 바라며 모든 정당의 의견을 수용하기를 권고했다. 또한 그는 7월 1일 장제스와 만나 중국 공산당 문제를 논의하면서 장제스에게 공산당원들을 공평하게 대우할 것을 권유했다. 1941년 환남사변이 벌어지자, 그는 참정회에 더이상 출석하지 않고 여러차례 장제스와 저우언라이를 만나 서로 화해할 것을 권고했으며, 중국민주정단동맹 수립에 참여해 위원회 주석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장제스로부터 사조직이라는 비난을 받자 곧 사임했다.

1944년 9월, 민주정단동맹은 정단이라는 단어를 없애고 중국 민주연맹으로 개명하기로 결정했다. 황엔페이는 민주연맹의 주요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또한 1943년 11월 12일 발족한 국방 최고위원회의 헌정시행협진회 상무위원과 소집인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인민과 정부가 협력하고, 각 성과 중앙이 협력하며, 각 당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국민참정회의 항일모금위원회 사무총장이 되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각국의 화교 상인들에게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서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군에게 지원했다.

1945년 7월, 황엔페이는 국공합작을 유지하기 위해 장보쥔 등의 참원들과 함께 엔안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면담했다. 충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연안반래(延安歸來)>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에는 그와 마오쩌둥의 '주기율(週期律)'에 관한 담화문이 기록되어 있었다.

황옌폐이: 내가 생후 60여 년이나 되었지만, 모든 눈으로 직접 본 바에 의하면, 그야말로 '기가 흥하면 모든 게 발아하고, 기가 망하면 모든 게 갑자기 꺾인다"라는 말이 있듯이, 한 사람, 한 집, 한 단체, 한 지방, 한 나라, 그리고 많은 기관들은 이 주기율의 지배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체로 초저녁부터 정신을 집중하여 정신을 차리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때는 아마도 힘들고 괴로웠을 것이다.그러다가 환경이 점점 좋아지자, 정신도 점점 좋아졌다. 어떤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적인 타성 발작을 일으키기 때문에, 적은 수에서 대다수에 이르기까지 기의 발아까지는 강하지만 역으로 기가 망할 때는 치료할 길이 없다. 지역적으로 한 걸음 한걸음 더 발전하기 위해서, 어떤 이는 자연적인 발전을 추구하고, 어떤 이는 공업에 대한 욕구에 의해 억지로 발전을 꾀했다. 그러나 간부의 인재들이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환경은 오히려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중략) 어쨌든 어떤 것도 이러한 주기율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마오쩌둥: 국민이 정치의 근본이고 국가는 정체이며, 새로운 길은 전력전술에 있으며, 민주를 위한 것이다. 민주적으로 나라를 세우면 모든 사람이 책임을 다하고, 오직 정치만을 위해서는 백성을 잘 살펴야 하며, 정치를 함에 있어서 덕을 베풀면, 결코 이전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을 찾았으며, 우리는 이 주기율제를 뛰어넘을 수 있다.이 새로운 길은 바로 민주적인 것이다.국민이 일어나서 정부를 감독하도록 해야, 정부는 감히 긴장을 늦출 수 없다.사람은 일어나서 책임을 져야만 정치를 망치지 않는다.


그러나 푸스녠(傅斯年)은 황옌페이의 <연안반래(延安歸來)>를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황옌페이 등이 마오쩌둥이 보내준 흙담요를 공옥처럼 소중히 여겨 마치 황제가 하사한 다라경이나 이불과 같이 여겼음을 알리는, 가장 파렴치한 책이다."


1945년 9월, 황옌페이는 상하이에서 상공 및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중국민주건국회를 결성해 상무이사로 취임했다. 이후 국공 평화협상이 결렬되어 내전이 발발하자, 황혠페이는 상하이로 돌아가 국민당 독재에 반대하고 내전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나 국민당이 중국 민주연맹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하자, 그는 1949년 2월 공산당 비밀조직의 주선으로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이후 황옌페이는 둥비우 등과 함께 중앙인민정부 조직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편집]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인 1949년 10월 19일, 황옌페이는 정무원 부총리 겸 경공업부장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을 겸임했다. 또한 1954년 9월 전국인민대표대회 1기 1차 회의에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부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59년과 1964년에도 이 직책을 계속 역임했다. 그리고 1954년부터1965년까지 제2,3,4기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했으며, 1949년부터 1962년까지 민주연맹 중앙 상무위원을 역임했고 중국 민주 건국회의 주요 책임자로 활동했다.

황옌페이는 중국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용인했지만 일부 정책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졌다. 특히 농민에 대한 양곡 일괄수매정책에 반대했으며, 공사합영(公私合營)에 의해 개인 기업이 차별을 받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며 자본가라는 계급 딱지를 떼어줄 것을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이런 그를 "자본가의 대변인"이라고 지칭했지만 개인적으로 그를 존경했기 때문에 딱히 건드리지 않았다. 1957년 반우파 투쟁 시기 수많은 비공산당 인사들이 우파로 몰려 탄압받았지만, 황엔페이는 실권을 잃고 인민대표대회와 정치협상회의의 직함만을 맡게 된 것 외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경호원이었던 윤형산(尹荊山)의 회고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왕희지의 서예 작품을 간직하고 있었던 황옌페이에게 빌려줄 것을 청하고 한달 동안 간직했다고 한다. 그런데 황옌페이는 귀한 작품을 잃어버릴까봐 매우 불안하여 한달 동안 계속 마오쩌둥에게 전화를 걸어 돌려달라고 재촉했다. 마오쩌둥은 이런 황옌페이의 행동에 내심 불쾌했지만 1개월 후 당직실 직원에게 "송환해라. 오늘 반드시 보내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불쾌하게 만드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던 마오쩌둥이었지만, 황옌페이만큼은 이후로도 정중하게 대했다.

1965년 12월 21일, 황옌페이는 베이징에서 8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3. 문제작, 『조선(朝鮮)』[편집]


황옌페이는 중국과 수백년 이상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조선에게 관심이 많았고 3차레에 걸쳐 조선을 방문했다. 첫번째는 1918년 6월 말에서 7월초에 걸쳐 신의주, 서울, 인천 등을 여행한 것이었고, 두번째는 1927년 10월 서울, 수원, 인천, 평양 등지를 여행했으며, 세번째는 1931년 4월 서울과 부산 등지를 여행했다. 그는 두번째 여행에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의 역사와 당시의 정치와 경제,사회 상황을 소개한 <조선>을 집필, 출간했다.당시 중국 근대 지식인들 중 그처럼 한국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이는 드물었다.

황옌페이는 일본의 대륙침략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연구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고대 일본의 신공황후, 중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근대의 정한론의 등장은 한국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중국 대륙을 목표로 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1914년 일본이 창다오를 강탈하고 세력을 황하유역을 확장하려 하는 것을 지원하는 기지는 한국이며, 따라서 일본의 대륙침략사를 알기 위해서는 일본이 통치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의 이와 같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은 서론에 적힌 다음의 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보통학교와 초등학교의 지리수업에서 어찌하여 만주 지리를 함께 수업하는가? 조선과 만몽문제를 연계하려는 야심가의 필설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황옌페이는 자신이 <조선>을 집필하는 데 참고한 도서가 129권이라 밝혔는데, 그 중 중국 저서는 28권, 한국 저서는 14권,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한 통계자료와 연감 및 보고서가 22권, 일본인이 쓴 서적이 65권이었다. <조선>은 크게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제1장 서론에서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한국에 대한 일본 통치를 보는 관점 등 황엔페이의 사회관과 역사관을 기술하고 있다. 제2장에서는 조선의 지리 및 자연환경을 다루며, 제3장은 조선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고 제4장과 제5장은 당시 조선의 전반적 상황과 조선인을 다룬다.

황옌페이는 조선의 단군개국설은 일연삼국유사에 처음 나온다고 하면서, 이 책이 역사서로 가치가 없다고 간주하고 단군에 대한 기록은 황당무계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사의 시기를 네단계, 즉 한족개화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이조선시대로 구분했다. 그는 한나라한사군을 설치하기 이전 한국의 문화는 중국을 발원지로 하며, 이는 역사학계나 고고학게를 막론하고 모두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족개화시대는 기자시대, 위만시대, 한사군의 설치 등 3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다. 황옌페이는 기자시대에 관해서 사기한서의 기록을 분석하면서 문자기록 외에 아직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적었다. 또 기자조선의 실체에 대해 사기의 기록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존재여부를 유보했다. 또한 그는 위만조선에 관하여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은 상세하지 못하며 오히려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의 기록이 상세하다고 평가했다.

황옌페이의 삼국시대에 관한 서술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일본의 조선경략과 수나라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관한 기록이다. 그는 일본의 조선 경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가야 6국은 반도의 남단에 있으며 일본과 거리가 가장 가깝다. 스진 덴노 말년에 신라와 가야가 땅을 놓고 전쟁하였는데, 가야가 이기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땅을 바치며 원조를 청하자, 일본이 다시 빼앗아 가야에게 돌려줬다. 이 일은 일본이 한반도에 개입하게 된 기점이었다. 이후 일본의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자, 신라가 대항할 수 없어서 항복했고 이에 일본이 한반도에 세력을 더 확장했다. 또 일본은 백제를 도와 신라를 정벌하고 호기득한 영토와 보호국을 총칭하여 임나라고 부르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통치했는데, 그 성격은 조선총독부와 거의 같았다. 유라쿠 덴노 말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대거 백제를 공격하여 그 도읍을 함락하자, 일본이 임나의 일부인 웅진을 주어서 백제를 복구하게 하였다. 이때 한반도에는 북쪽의 고구려를 제외하고 일본세력이 한반도를 지배하였으며, 일본 긴메이 덴노 31년(570년)에 고구려도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황옌페이는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하자 삼국이 조공했고 일본도 사신을 보냈는데 그 국서에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서신을 보내 안부를 묻는다."라고 쓴 부분을 지목하며 "그 기개를 짐작할 수 있다."고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수와 고구려의 전쟁과정, 당과의 전쟁을 통해 고구려가 멸망했다는 사실과 뒤이어 신라의 통일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삼국시대의 문화를 서술했다. 그는 삼국시대의 문화에 중국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인식했다. 즉 한반도 문화의 원천은 중국이며 삼국 가운데에서 신라가 그 문화를 전파하는 데 공헌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고구려는 한반도에 불교를 전파한 공로가 있으며 백제는 중국과 일본의 문화교류에서 중개자의 역할을 맡았다고 평가했다.

황옌페이는 통일신라와 발해의 흥망을 간략하게 서술하면서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을 말갈인으로 파악하여 고구려와의 계승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발해가 당과의 관계에서 매우 공순하였기 때문에 매우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이후 그는 고려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고려의 470년 역사는 내란, 외침, 그리고 불교로 묶을 수 있으며, 고려는 이 세가지로 인해 망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내란은 왕실과외척, 권신 사이에 일어난 권력분쟁을 의미하며,그 사이에 무신이 문신을 참살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다. 그리고 모든 분쟁이 궁정에서 발원했으며 고려왕조 34대 동안 몇몇 왕을 제외하고 대부분 혼란스럽고 아둔하며 방종하여 잘못이 많았다고 평가했다.

외침의 항목에서는 고려가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의 침략을 받은 사실을 열거하고 고려가 침략국가의 역법을 받들고 그 의관을 입었으며 왕실에서는 아첨이 끊이지 않는 등 고통받았다고 서술했다. 황옌페이가 보기에 고려가 멸망한 이유는 권신들이 대국의 눈치를 보고 국인에게 거만하게 행동했으며 구차하게 살면서 욕망대로 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기때문이었다. 또한 불교의 항목에서, 그는 고려가 '부처에 홀리고 부처 때문에 망하였다'고 하면서 불교가 연등회, 팔관회 등을 제창하여 불교의 기본 의의를 없애고 형식에 얽매여 그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황옌페이는 조선 시대사를 세개의 큰 주제, 즉 가난(家難), 당쟁, 외침으로 묶어 서술했다. 가난의 항목에서는 조선의 정치를 4차의 왕족 분란으로 설명했다. 제1차는 태종의 왕위 찬탈, 제2차는 세조의 왕위 찬탈, 제3차는 광해군의 폐위사건을 들고, 제4차는 숙종 때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비빈과 외척이 권력다툼한 것을 들고 있다. 이후 계속되는 왕위계승 문제를 거론하면서 조선의 운명이 왕당과 비당이 서로 싸우는 와중에 끊어졌다고 서술했다.

당쟁 항목은 이조의 가난이 당쟁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조가 당쟁 때문에 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황옌페이는 분당 발생의 원인을 과거에 의해 인재를 등용한 것에서 찾고 있다. 그는 유생이 정치에 참가하고 세력이 있는 사람이 나와서 그 도당을 이끌면 파벌이 형성되고 도당에서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 동시에 나오면 몇개의 파벌로 나누어지며 파벌이 다르면 혼인도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조선의 붕당은 일종의 병적심리의 표현이라고 간주하고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일한합방' 일후 일본이 작위를 수여할 때도 파벌을 따지는 등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혹평했다.

외침의 항목에서는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호란을 거론했다. 황옌페이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대요시는 영웅의 자태를 가지고 국정을 장악했으며 나아가 중국을 도모했다고 적었다. 또한 조선 조정은 일본에 대비하는 문제로 당쟁이 크게일어났지만 준비하지 못했다고 비판했고 임진왜란과 관련해서 한 사건을 언급했다.

"명이 망하자, 조선에서는 임진왜란때 군사를 보낸 명의 덕을 생각하여 명신종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이 망할 때까지 명을 잊지 못하고 청을 매우 미워하였다."


정묘, 병자호란에 대해서는 인조가 도망가고 주전파와 주화파의 당쟁으로 인해 한양이 함락되고 속국의 예로서 항복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조선의 멸망은 가난에서 배태되고 당쟁으로 배양되고 외환으로 끝맺었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망국에 대한 항목에서는 그 과정을 간략하게 표로 정리하고 독립운동을 3.1 운동부터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진정서를 내는 활동까지 개괄적으로 서술했다. 황옌페이는 1919년 3월 1일의 독립운동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시정방침이 변화했다고 지적했다. 즉 1919년 8월 조선총독부의 관제를 바꾸고 총독에 무관을 임명하는 관례를 중단하고 문관을 임명했으며 1920년 9월 총독부가 형식적인 정치의 타파, 정무의 간소화, 언론, 집회 출판에 대한 고려, 교육, 산업, 교통, 경찰, 위생 등 사회경제와 기타 행정의 쇄신을 표방한 '문명정치'의 포고를 발표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황옌페이는 한국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해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고 기술했고 한국인의 미국에 대한 기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군중은 미국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윌슨 총통이 비행기를 타고 와서 원조할 것이라고 믿었고 민중은 밤낮으로 북한산에 모여 하늘을 쳐다보며 비행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황옌페이는 한국의 정세에 대한 서술에 앞서 일본의 정책과 시책의 성과를 언급했다. 그는 자신이 조선을 여행하면서 일본의 정치능력이 대단함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특히 일본이 1894년 중국에게, 1904년 러시아에게 승리했고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1910년 일한합방의 결과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일본이 한국을 통치한 지 2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식민통치의 성과가 대단하다고 파악했다. 그는 그 성과를 주로 사회생산력과 대외무역에 있다고 봤다. 또한 황옌페이는 일본이 조선의 조혼을 금지하는 것을 칭찬했다.

"지금 정치를 관찰하는 사람들이 홀시할 수 없는 작은 일이 있는데 민족을 약하게 하고 망하게 할 수도 있으니, 바로 조선인의 결혼연령이다. 1925년 통계에서 남편이 17세 미만인 사람이 4500여 명에 이르고 아내가 15세 미만인 사람은 1만 3천명에 이른다. 지난날에 비하면 늘어났고 줄어들지 않았다.조선은 온대 북부에 있어서 생리상 조숙하지 않다. 종치에 소홀한 국가에서는 돌보지 않고 그럴 수 있다고 한다. 일본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이 조혼 문제를 잘 깨우치고 이 악습을 혁파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는 통치자가 피치자를 행복하게 하는 좋은 기회일 뿐만 아니라 문명국가의 영광스런 계획이며 일찍이 혁파할 필요가 있다. 이 외에 유도와 검도는 국민체격을 단련하는 것으로 조선인학교와 일본인 학교에서 모두 장료하고 있으니 이 또한 정치를 관찰하는 사람이 매우 바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일본의 통치를 다음과 같이 높게 평가했다.

"2천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 300년의 당쟁의 결과 나라는 있되 자존할 수 없게 되어 지사와 국민은 비분에 잠겨 있다. (중략) 일본정부는 인심공도(仁心公道)의 태도를 취하여 조선인에 대하여 그 복운을 끊이지 않게 하고 그 진화를 돕고 공존공영을 일본-조선 인민에 대한 공동 준칙으로 하고 있으니 조선인 중 성덕을 모르는 자가 없다."


황옌페이는 조선의 현황을 연구하려면 조선합방의 18년간을 알아야 하며 그 시기는 1919년 조선독립운동의 이전과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3.1 운동 이후 치안의 확보, 민의의 창달, 민생의 안정, 문화와 복리의 증진, 제도의 갱신, 조선인과 일본인 관리대우의 차별의 철폐, 지방제도의 수정, 중앙집권주의를 지방분권으로 개정, 행정처분상의 피처분자에 대한 양해, 구문화와 관습의 존중 및 채택,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인재등용의 개방, 조선인과 일본인 사상의 융화를 도모했으며, 이런 것들은 일본정부가 조선인민을 다루기 위해 표방한 시정방침이라고 주장했다.

황옌페이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시정방침이 경제를 중심으로 시행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조선 말기에 정치는 부패하고 재정은 문란했으며 도적이 봉기하여 사회생산사업이 날마다 쇠락했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합방이 이뤄진 후 일본은 한국에서의 정권을 공고히하고 재정정리를 통해 생산의 증진을 도모하여 1910년 이후 잘 진행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보통은행과 금융조합의 설치를 통해 농민의 금융을 완화하고 농업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대외무역에서도 합방 전에는 수출입 합계가 5천만원 정도에 그쳤으나 1911년~1925, 1926년간 수입은 6배, 수출은 18배 이상 증가했다고 서술했다.

또한 농업과 수산업 분야에서도 상당한 발전을 이룬 것으로 평가했다. 농업분야에서는 토지개량사업의 실시를 대표적으로 들면서 1930년부터 실시한 토지개량사업으로 당시 조선의 경지면적이 450만 정보로 증가하여 조선농업의 전도에 희망이 있다고 평가했다. 수산업분야에서는 행정력을 동원하여 어업 법규의 수정, 어항의 건설, 어선, 어구, 어법의 개량과 지도, 수산양식의 장려, 수산회와 어업조합의 설립, 수산시험장의 설치, 수산교육의 보급 등을 통하여 어획고와 수산상품이 해마다 증가하여 1925년에는 1911년에 비해 9배나 증가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황엔페이의 주장은 조선을 지나치게 비하하고 일본에게 지나치게 우호적이며 심각한 역사왜곡을 초래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이시영은 1934년 상하이에서 감시만어(感時漫語)를 지어 황옌페이의 <조선>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이시영은 "일본 사람들의 저술을 참조하면서 꼼꼼히 살펴보지 않음으로써 그 진실을 잃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본의가 역사의 실상을 왜곡하자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오로지 일본을 대신하여 저들의 거짓된 인과 위선의 설을 선양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상한 것은 우리나라의 고전을 조사하고 유풍(遺風)을 탐방하면서 어찌하여 은인문사들을 찾지 않고 일본 사람들의 일방적인 말에만 오로지 의존하였으니 그야말로 본을 버리고 말을 좇으며 사실을 버리고 그릇된 것만 입증하는 것이 되었다. 황씨가 참고로 사용한 소위 행정연감은 일본의 범죄행위의 기록에 해당하는 책이었고 저들의 허상을 자랑하기위한 비본(秘本)을 절세의 희귀본으로 알고 자랑하고 만족스러워 하는 것은 결국 일본사람들의 말투를 따라 한국을 모욕하는 셈이 된다."


이시영은 조선의 민족성에 대한 황옌페이의 비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사람됨이 혜민(慧敏)하고 우둔함이 각각 하늘로부터 타고난 자질이 다르므로 서로 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한 집안의 형제라고 판이하게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어찌 그뿐이랴! 시험 삼아 중국인에게 물어 보라. 기타의 인종에게도 물어보라. 동일혈족 안에서도 아주 판이하게 서로 같지 않게 차이가 뚜렷하지 않은가. 그렇거늘 황군은 도대체 어떤 법으로 해설했기에 이런 말을 하는가. 한국은 원래 대륙과 해양의 구별이 있다. 남쪽 해양성은 표정이 많은 편이며, 북쪽 대륙성 기질은 질박하고 돈후(敦厚)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지고 지혜롭다거나, 우둔하다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황차 한국인의 혈통을 억지로 저 상고시대의 그것과 비교하여 탐구하는 것도 잘못이다."



4. 가족관계[편집]


황옌페이의 아내는 왕정사(王糾思)로, 1900년대 초에 결혼했다가 1940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2년, 황엔페이는 구이양대 졸업생인 야오웨이진(姚維鈞)과 결혼했다. '<연안반래(延安歸來)>은 황옌페이와 야오웨이진이 공동으로 작성한 서적이다. 야오웨이진은 남편이 죽은 지 1년후에 발발한 문화대혁명 때 박해받았고 1968년 1월 20일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자살했다.

1. 여섯 아들들

  • 장자: 황방강(黃方剛). 칭화대 졸업. 1901년에 태어나 1922년 미국으로 유학가 철학을 배우 1927년에 귀국했다. 1943년 병으로 쓰촨성 낙산에서 사망했다.
  • 차자: 황경무(黃競武). 칭화대 졸업. 1903년에 태어나 1924년 미국 하버대에 연수갔고 경제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9년 5월 18일 상하이에 국민당 특무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 삼자: 황안리(黄万里). 1911년에 태어났다. 중국의 유명한 수학자였고 2001년에 사망했다.
  • 사자: 황대능(黃大能). 1916년에 태어났다. 중화직업교육사 명예 부이사장이었으며 중국의 유명한 콘크리트 기술 전문가였다. 2010년에 사망했다.
  • 오자: 황필신(黃必信). 대련공대 무선전파자 교사를 역임했으나 1957년 우파로 분류되어 박해받았고 1966년 6월 14일에 홍위병에게 온갖 구타와 모욕을 당한 뒤 목을 매어 자살했다. 1968년 6월15일, 황필신의 아내 여계운(余啟運)은 홍위병에 가담한 학생들에게 수감되던 중 독살당했고 14살의 어린 딸은 1966년 10월 행방불명되었다.
  • 육자: 황방의(黃方毅). 1946년 출생. 미국 듀크대 석사, 장년공직 중국사회과학원, 베이징대 경제연구원, 미국 홉킨슨대 고등국제 연구원,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또한 제10기 전국정치협상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다.

2. 세 손자들

  • 황맹복(黃孟復): 황경무의 아들.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전국 상공연맹 주석을 역임했다.
  • 황관홍(黃觀鴻). 황만리의 장자. 천진대 교수이다.
  • 황노순(黃魯淳): 황만리의 3남. IT 전문 고급 엔지니어다.


5.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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