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조선)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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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태종 ~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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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증(贈)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익성공(翼成公)
황희
黃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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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황희 초상 원본new.jpg[1]
출생
1363년 3월 8일
(음력 공민왕 12년 2월 22일)
고려 개성부[2][3]
사망
1452년 2월 28일 (향년 88세)
(음력 문종 2년 2월 8일, 향년 90세)
조선 경기도 파주
군호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1455년(세조 1)[4]
시호
익성(翼成)
본관
장수[5]/남원[6] 황씨

구부(懼夫)

방촌(厖村)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가족
아버지 황군서 / 어머니 용궁 김씨[7]
초명
도야지(都耶只) / 수로(壽老)[8]

1. 개요
2. 생애
2.1. 출사에 관한 야사
2.2. 정승이 되기까지
2.3.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리다
2.4. 사직 반려
3. 평가
3.1. 사위와 자식들의 범죄 은폐 및 두둔
3.2. 과장과 오해
3.3. 총평
4. 대중매체
4.1. 단독 작품
4.2. 캐릭터로서
5. 기타



1. 개요[편집]


여말선초의 문신 및 정치가, 조선정승이다.

조선에서 가장 영의정을 오래 역임한 사람으로 영의정 18년, 좌의정 5년, 우의정 1년 합쳐서 총 24년을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 재상을 오래 한 것은 누구도 의도한 바가 아니었는데 왕이 원하기도 했지만 본인이 뜻밖에 장수했기 때문이다.


2. 생애[편집]


황희일대기를 다룬 힛갤 만화
두문동 72현 전설 같은 야사 등 지어낸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듯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2.1. 출사에 관한 야사[편집]


그대는 청운에 올라 떠나가고(君登靑雲去).

나는 청산을 향해 돌아가네(子望靑山歸).

청운과 청산이 이에 갈라서니(雲山從此別).

눈물이 벽라의를 적시는구나(淚濕碧羅衣).

정건천

황희가 조선 개창에 반대해 은둔한 선비들 중의 일원이었고 이런저런 간청에 못 이겨 조선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는 일화인 두문동 72현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황희 등이 숨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두문동이라는 지명은 영조 때 급격히 부각되었고 수많은 전설들이 탄생했으며 황희에 관한 것도 이런 두문동에 관한 전설 중 하나다. 애초에 두문동에 관한 전설 대부분은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으며 예를 들어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두문동 때문에 나왔다고 하는데 사실은 두문불출이라는 말 때문에 두문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두문(杜門)이라는 말 자체가 '문을 닫아건다'는 뜻으로 두문불출이라는 말은 가깝게는 이규보의 편지글, 계속 올라가다보면 사마천의 <사기>까지 나온다.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는데 두문동이 언급된 영조 대에 확인된 사람은 2명, 정조 대에는 원래 2명 합쳐서 3명이었는데 점점 숫자가 늘어나면서 결국 공자의 제자인 72명에서 숫자만 맞췄다. 때문에 발표한 곳마다 명단도 다르다. 이러니 영조 대에 밝혀진 임선미, 조의생을 제외하면 관련된 인물 전원이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다. 황희 당대의 기록에는 전혀 그런 이야기가 없고 태조 대에 이미 6품 관직에 임명되어 세자가 자문하기도 하는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에 절의를 지킨 쪽은 분명히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고려를 무너뜨리는 데 공헌한 건국 세력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약 조선 개창에 공을 세웠다면 개국공신에 녹훈되었을 텐데 그렇다면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고작 6품관에 머무를 리가 없다. 아직 젊은 나이어서인지 한쪽 편을 들지 않고 하급 벼슬살이를 해간 것에 가까운 편. 2번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도 관여한 정황이 없다. 생전에 작위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그의 부원군 작위는 아들 황수신이 계유정난에 협력하여 공신으로서 남원군(南原君)이 되면서 추봉된 것이다.


2.2. 정승이 되기까지[편집]


1363년(공민왕 12) 개성부에서 자헌대부 황군서와 용궁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9] 세종실록에 기록된 이호문(李好問)의 사초에 따르면 얼자라고 하는데 적어도 정실 소생이 아니라는 것만은 평소에 본인이 말하고 다녔기 때문에 당대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10]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음서로 14살에 품계가 없는 녹사(錄事)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389년(공양왕 1) 문과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1390년(공양왕 2) 정9품 성균관 학록(學錄)이 되었다.

태조정종 대에는 자신이 볼 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임금의 명령이라도 거부하는 완고함 때문에 여러 번 파직되어 관직 생활이 평탄하지 못했다.

하지만 태종이 즉위하고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의 천거로 1401년(태종 1) 도평의사사 경력, 1402년(태종 2) 대호군 겸 승추부 경력이 되더니 1405년(태종 5) 박석명의 후임으로 지신사가 되면서 관직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태종은 황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4년 동안 지신사직에 두어 크게 중용했다. 지신사는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시행을 감독 및 보고하던 대언(代言)의 으뜸으로 도승지의 전신이며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이다. 국왕 직속인 만큼 권력뿐만 아니라 업무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자리로 유명하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던 태종에게 이 정도로 중용받을 정도면 능력은 입증된 셈. 소위 코드 인사로 인해 일부 관료의 인망을 잃은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후 이조, 호조, 예조, 형조, 병조, 공조판서직을 모두 역임했다. 단, 당시는 현대만큼 사회가 복잡하지 않아 한 부서가 담당하는 일의 폭이 훨씬 넓었다. 지금과 비슷하게 부처가 나누어진 건 갑오개혁과 대한제국 선포이후다.

도승지와 6조 판서와 영의정 모두 지냈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장, 행정각부 장관, 국무총리까지 지냈다는 말이다. 국정 전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 크게 신임을 받았다.

태종은 이런 말로 자신의 측근인 황희에 대한 신임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 일은 나(태종)와 경(황희)만이 홀로 알고 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곧 내가 한 짓이다." -<문종실록> 문종 2년 2월 8일 황희의 졸기(卒記)

그러나 폐세자 건이 나왔을 때 적장자 계승 원칙을 고수하며 양녕대군을 두둔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파직된 뒤 유배까지 갔다. 태종은 '민씨들에게 미움 산 것'을 만회하려고 세자 편을 들었다고 비난했고 황희는 단순히 세자가 너무 가여워서 그랬다고 변명하였다. 태종은 황희가 자기의 신뢰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여 실망하고 황희를 시골로 내쫓았다.[11]

'민씨들에게 미움 산 것'은 민무구, 민무질 등의 옥사를 가리킨다. 당시 조정에서는 지신사 시절의 황희가 민씨 집안을 박살 낸 장본인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러한 극비 정치 사안을 함께 의논할 정도로 태종의 신임을 받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에 있는 교하(交河)로 유배를 갔다가 한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유배지가 지금의 전라도 남원으로 변경되어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이것도 황희의 향관이 남원이었기 때문에 약간 배려한 것. 황희는 노모와 처자식을 데리고 남원에 가서 머물렀다. 이 시기 황희가 지은 광통루라는 누각이 현재의 광한루이다.

평소 황희를 아끼고 높이 평가한 태종이었기에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군권만 행사하는 상왕으로 물러난 후 1422년 세종에게 조정으로 다시 불러들일 것을 권유하면서 재출사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후 세종에게 중용되어 강원도의 기근을 해결하는 데 공을 세웠고 1426년(세종 8) 우의정에 오르면서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1427년(세종 9) 좌의정이 되어 수상으로서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1431년(세종 13) 원래 영의정부사였다가 늙어서 본직을 내려놓고 부원군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던 이직이 죽자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2.3.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리다[편집]


1427년(세종 9)부터 1435년(세종 17)까지는 황희와 맹사성의 투톱 체제로 유명하다. 황희는 보수적이고 강직한 스타일로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나간 면이 있었던 세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대국을 보는 시각이 뛰어났고 당대에 알아주는 군자범죄 사건에도 너그러움을 위주로 처리했다.

강직, 분명, 정확한 스타일의 인물로 주로 추진력과 결단력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다. 강한 결단력, 추진력과 6조 판서직을 모두 수행하면서 축적된 노하우가 결합되어 정책 회의 때마다 주목할 만한 의견을 자주 냈고 복잡한 토론을 거쳐도 결국 황희의 안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원만한 성품의 동료 정승 맹사성은 황희의 이런 강직함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고 주로 융통성과 센스가 필요한 일처리에 능한 편이었다.

사관은 <조선왕조실록>에 황희의 졸기(卒記)를 남기면서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고 평했다. 그는 정책에 있어서 대체로 보수적인 시각을 견지하고는 했는데 이런 그의 능력이 세종에게 가장 필요하였으며 세종은 스스로 독창적인 주장을 내기도 했고 가능한 모든 논점을 검토한 뒤 정책을 결정했기 때문에 정책의 완성도는 높았지만 그 과정에서 무리한 정책도 종종 나왔으며 온갖 주장이 난립하여 심의가 길어져 쟁점들 사이에서 균형을 잃을 수 있었다. 황희는 대국적으로 주장을 정리하고 가장 현실적인 시행 방안을 내어 정책을 조정했다. 세종이 괜히 황희가 온갖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끝까지 부려먹은 게 아니다. 1449년(세종 31)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기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있으면서 세종을 훌륭히 보좌하여 농업, 예법, 군사, 법률 등 각종 국정에서 세종의 정치 고문이자 명재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명성을 떨쳤는데 벼슬살이만 73년을 했다.


2.4. 사직 반려[편집]


  • 1431년(세종 13)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12]
  • 1432년(세종 14)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 같은 해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 1435년(세종 17)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 1436년(세종 18) 6월 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 1438년(세종 20) 11월 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치 않다.
  • 1439년(세종 21)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같은 달 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하다.
  • 1440년(세종 22) 12월 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다.
  • 1443년(세종 25)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 1449년(세종 31) 10월 5일 황희를 영의정부사로 그대로 치사(致仕, 벼슬을 두고 물러남)하게 하다.
  • 1452년(문종 2) 2월 8일 영의정부사 황희의 졸기(卒記/사망).
세종은 황희를 거의 죽기 직전까지 부려먹었다. 영의정이 된 1431년부터 시작해서 1449년에 진정 은퇴하기 까지 장장 20년 가까이 은퇴 반려를 당했고, 황희가 최종적으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 1449년 10월은 세종이 세상을 뜨기 딱 4개월 전이었다. 게다가 황희가 모친상을 당했을 땐 당연히 치러야 하는 3년상조차 못 하게 하고, '환갑 지나면 상중이라도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좌상이 풀만 먹다가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고기를 먹으라.'라고 명령을 내린 바 있다. 결국 황희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 반찬을 먹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13]

물론 어디까지나 농담이고 실제로는 세종이 황희를 정치적으로 실드 쳐준 것에 가깝다. 황희가 정승을 오래 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당시 주변에선 시기나 질투가 있었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황희가 사직서를 내면 세종이 거절하는 식으로 해서 '황희는 벼슬에 욕심이 없는데 내가 막는 것이다.'라고 불만 여론을 잠재운 것이지 정말로 황희가 사직하고 싶은데 일부러 거절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어디까지나 현대의 유머스러운 해석. 세종은 누구든 의지가 없는 신하를 등용하지 않았다. 애초에 의지 있는 신하는 오래 등용하고, 은퇴를 원하면 수락하는 게 조선의 유교 문화였으므로, 그냥 태종이나 영조가 즐겨 쓴 양위 쑈 같은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 그래서 현재 이 밈이 쓰일 때는 이 점까지 고증해서 처음 몇 번은 쑈 맞는데 나중엔 진짜 은퇴하려고 한 거다라는 식으로 전개하는 경우가 많다.[14][15]

그리고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기복 제도라 하여 특별한 경우엔 3년상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법이 있었다. 무조건 3년상을 치러야 되는 비합리적인 예법이면 백성들부터가 수긍하고 넘어갈 리가 없다. 더욱이 조선 시대에는 3년상을 치러도 복직에 대한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3년상을 치르려고 내려가는 관리도 많았다.

건강 문제로 사직을 청하면 아예 재택근무 하라고 한 달에 두 번만 조회에 참석하라고 하든지, 서류 업무는 집에서 관료들을 불러서 누워서 처리하라는 명을 받았다. 원래 전임자인 이직은 영의정이었다가 본직에서 물러나고 부원군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했는데, 나이가 많아져서 출근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국정에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직은 본직에서 물러나고 나서도 여전히 영의정 대우였다. 그런데 황희는 공신이 아니어서 작위가 없었으므로 본직에서 물러나면 정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현직에 그대로 두되 출근 규정을 조정해 준 것이다. 하지만 이 이직조차 황희보다 딱 1살이 많은 1362년생이었다. 그리고, 황희에 가려져 그렇지 이 이직도 유능한 대신이었고 황희와 마찬가지로 죽기 전까지 부려먹었다. 세종이 예순 넘어 은퇴하려던 이직을 마찬가지로 부려먹었고 결국 이직도 죽기 1년전인 1430년까지 일해야 했다. 그런데 이직도 당시에서 꽤 장수한 만 69살까지 살았거늘 68살이던 황희를 계속 부려먹은 것이다.

그만큼 일을 많이 했는데도 평소에 건강 관리에 힘썼다. 평소에 양 눈을 번갈아 감았다 떴다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자기 나름대로의 시력 관리법이었다고 하며[16] 나이가 들어서도 백발 홍안의 신선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야사에는 황희가 째려보면 사람이고 어린아이고 동물이고 다 쫄게 만들어서 심지어는 죽어버리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황희가 실록에서는 대단히 강직한 스타일로 묘사되는 것이나 6진 개척과 여진족 정벌에서 활약하고 다이아 수저 수양대군과 맞섰던 김종서도 황희를 무서워해서 그 앞에서는 항상 각 잡고 있었다는 일화를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이야기다. 말년에 은퇴하고 삽살개와 눈싸움을 했는데 개가 가만히 있자 "나도 갈 때가 되었구나."라고 한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1452년 2월 28일에 만 89번째 생일을 열흘도 안 남기고 만 88세, 세는나이로 90세라는 당시 사람으로서는 드문 장수를 누리고 생을 마감했다. 당대로서는 왕조차도 50줄을 넘기기 힘들었고,[17] 서민들은 간혹 100살 넘게 장수한 경우가 실록에 기록되기도 했지만 평균 수명은 3~40대에 그쳤다.[18] 90세까지 살았다.[20]

시호는 익성(翼成)이며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나중에 가장 출세한 셋째 아들 열성공(烈成公) 황수신이 공신이 되자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작위가 추봉되었다. 묘소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있다.


3. 평가[편집]


이렇게 모두가 인정하는 유능한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군국중사에서 보여준 본인의 대쪽같고 강직한 성품과 처신답지 않게 가까운 사람의 범죄에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가족과 친족의 대형 범죄를 덮다 들키거나 두둔한 것이 알려짐으로써 높기만 했던 명예가 많이 실추되었다. 문제는 이런 사실이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아 아직도 누렁소 일화 덕분에 많은 현대인들이 강직하고 청렴한 재상이라고만 알고 있다는 것.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방적으로 훌륭한 인물이라기보다는 당시의 현실 정치가이자 권력자로서 공과 과가 분명한 인물로 본다.


3.1. 사위와 자식들의 범죄 은폐 및 두둔[편집]


한 번은 사위인 서달이 시골[21]을 지나다 아전이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지 않고 달아나자 감히 좌의정의 사위이자 형조판서의 아들인 자신을 몰라봤다고 종들을 시켜 그를 잡아오게 하였다. 종들이 길 가는 다른 아전을 잡아 패며 달아난 아전의 집으로 자신들을 인도하게 하였는데 마침 지나가던 아전 표운평이 이를 보고 항의하자 종들이 표운평을 패서 서달 앞에 데려갔다. 길 가다 두드려맞은 표운평이 황당하여 아무 말이 안 나오니 서달은 표운평이 일부러 말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저놈이 낮술을 했구나! 버르장머리를 고쳐줘라!"하며 작대기로 그를 흠씬 두들겨 패게했다. 50여 대를 맞은 표운평은 그다음 날 사망했다. 그 뒤 지방 관아에서 사건의 전말을 조사했더니 어렵지 않게 정황이 밝혀졌으나, 서달의 아버지 서선이 바로 형법을 담당하는 형조판서인 데다 장인이 조정 실세인 황희였으니 알아서 긴 수령은 중앙이 아닌 좌의정 황희에게 사건을 먼저 알려버렸고, 서선과 황희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작에 착수했다. 물론 서달의 아버지 서선은 고려 시대 명신 서희의 12대손으로 현재 검찰과 법무부의 수장 격으로 조선의 모든 범죄 처리를 관할하는 수장인 형조판서의 입장에서 굳이 장인인 황희까지 나서서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긴 힘들지만 황희의 유능함을 볼 때 이 사건을 몰랐을 리도 없고 최소한 묵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때의 벌어진 은폐 행각이 매우 심각했다. 피해자의 처를 협박하고 뇌물을 써서 그 친족을 회유하거나 일의 처결을 맡은 지역 수령을 맹사성과 힘을 합쳐서 동향이라는 연고를 내세워 압력을 가하고 급기야 사건의 전말을 왕에게 올리는 상주문을 도중에 짜고 가로채는 짓까지 저질렀다. 그리고 주변과 입을 맞춰 서달은 은근슬쩍 묻히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한 그의 노비인 잉질종이 범인이라고 다 뒤집어쓰는 식으로 사건 내용을 조작했는데, 이에 연루되어 조작에 가담한 관리가 수십 명에 달했다.[22] 계획대로라면 이들의 사건이 조작되어 황희의 사위는 별일 없이 넘어갔겠지만, 그들의 상대는 세종대왕이었다.

세종은 조작되어 올라온 상주문을 읽어본 다음 이상하다며 의금부에 조사를 명했고, 진상이 밝혀졌다. 세종대왕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저렇게 열심히 조작해서 증거를 싹다 지워버렸을 사건을 보고서 한 장 달랑 읽는 것만으로 진상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저 조작된 보고서는 당대 최고 재상인 황희, 맹사성에 6조 판서들, 과거 대과에 급제해서 공직에 진출한 수많은 신하들이 몇 주 동안 의심 안 가게 증거를 조작한 결과물이란 것이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완성본 보고서 한 장 읽고 진상을 파악해 냈다.

서선은 말할 것도 없고 황희와 맹사성뿐만 아니라 관련된 주변 벼슬아치들은 곤장을 맞거나 유배를 가는 등 난리가 났다. 윗사람 뒤처리하다가 아랫사람들도 덩달아 피 본 셈. 그나마 황희와 맹사성은 며칠 뒤 복직했으며 사건을 일으킨 서달은 원래는 사형이었지만 독자라는 이유로 곤장 100대에 3천리 유배, 3년 노역 치 벌금이라는 처벌을 받았다.[23]

이외에도 처남들의 위법 행위를 감싸주기 위해 다소 구차한 변명으로 세종에게 호소해 이들을 구해준 적도 있고, 관청에서 몰수한 장남 황치신의 과전을 돌려주려고 세종에게 개인적으로 글을 올린 적도 있다. 이런 행적을 보면 자식과 친인척에 관련된 일에는 물불을 안 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서자 황중생이 세자궁에서 일할 때 금잔 등을 훔치다가 적발된 다음 조사 과정에서 차남 황보신은 더 많이 훔쳤다는 것이 걸렸으며, 황보신의 땅이 압수되는 과정에서 황치신이 황보신의 기름진 밭을 자신의 돌밭으로 바꾸려다 또 걸리는 등 집안이 제대로 개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이때 황희도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서자 황중생은 자기 아들이 아니라며 황중생의 성을 조씨로 바꿔버렸다. 이건 대인배라는 평가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황희는 이때 더 많은 잘못을 저지른 황보신은 그냥 내버려 두고 황중생만 화풀이하듯 족보에서 파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자세한 사건의 전개를 보면, 황중생의 경우는 황희와 절의 여종 사이에 태어난 서자인데 워낙 무능해서 벼슬할 생각조차 안하고 그냥 놀고 먹었다. 결국 황희라는 아버지 이름값으로 문종이 기거하는 동궁전에 세자 친구 격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다른 것도 아니고 궁중의 창고의 물건을 훔쳐서 집에 가져간 것이 발각된 것이다. 그리고 이걸 이복형인 황희의 적자 중 둘째 황보신에게 줬다고 해서 일이 커졌다.

황보신의 경우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수사한 결과 드러난 것인데, 조사해 보니 황중생보다 더 많은 재물을 훔친 것으로 드러났다. 이유는 첩 선물용. 장물을 받은 첩까지 같이 잡혀갔다. 공금 횡령이다. 결국 삭탈관직에 직첩이 떨어지고 과전이 나가떨어진다. 게다가 이게 겨우 수습 국면에 들어가는데, 황보신의 과전이 반납되는 과정에서 적자 3형제의 장남 황치신이 끼어든다. 몰수되는 동생의 비옥한 과전을 자기가 먹고 대신 자기의 척박한 과전을 대신 반납해 버리는 짓거리를 한 것이다.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24] 결국 황희를 가급적 커버해 주려던 세종도 도저히 못 견뎠는지 황치신까지 파면해 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적자 서자 할 것 없이 비리 콤보 3연타가 줄줄이 터졌고, 그 시작이 서자 황중생의 궁중 창고 절도 사건이었으니, 황희의 분노가 황중생에게 몰린 것은 당연한 거다.

위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적자 3형제의 막내 황수신은 계유정난에 협력 또는 묵인하고 황희의 후손이라는 덕을 보아 영의정까지 올라 가장 크게 되었다. 다만 그도 음서 출신[25]이라 가문의 힘이 컸다. 친한 사이라고 부정 인사를 저질러서 관직 삭탈을 당하고, 아산 전체를 농장으로 바꿔버리는[26] 등의 치부를 해서 탄핵을 당하는 등 아주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조선 시대 치부의 모습을 보여줬다.[27] 이런 큰 비리에도 황희의 음덕으로 용서받고 영의정이 되기도 했다.


3.2. 과장과 오해[편집]


한편으론 황희의 악행이 부풀려진 부분도 있는데, 이호문이라는 사관은 아래와 같이 황희의 비리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왜곡된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전략) 황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별로 없고 장인으로부터도 노비 셋을 물려받았을 뿐인데, 집 안팎에 부리는 노비가 많은 것은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서 마련한 것이다. 또 황희는 박포의 처와 간통했다.(후략)[28]

이 때문에 훗날 실록을 편찬할 때 정인지성삼문 같은 이들이 이 사건을 부정했고, 결국 의견이 모아져 삭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실록을 고친 전례를 남길 수 없다는 이유로 결국 이 글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당연하지만 황희를 존경스러운 조상으로 모시는 장수 황씨 대종회 등에게 있어서 이호문은 천하의 개쌍놈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언론 매체 등에서 "충격! 청백리 황희의 본모습?!" 같은 식의 기사가 나올 때마다, "이게 다 이호문 때문이다." 라며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한다.# 즉 황희의 부정부패와 관련된 행적은 사관 이호문 때문에 잘못 알려지고 과도하게 부풀려진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를 두고 "글쓴이가 맛이 가서 그러니 적당히 거르면 된다."라는 식으로 결론을 냈다.


3.3. 총평[편집]


그러나 이호문 건 외에 사위와 자식들이 문제를 일으킨 부분은 사실이다. 이것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해 보면 집안의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지 황희 본인이 부패했다고 볼 여지는 없다. 다만 친족의 부정행위도 사전에 막을 정도로 대쪽 같은 청백리까지는 아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고, 부정적으로 해석해 보면 친족의 문제는 물불 안 가리고 개입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작정하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자식을 앞세워서 대규모(?) 부정부패를 조직하고 이득을 얻었다는 혐의는 없다. 황희의 권력 개입은 본인의 이득을 위해 사건을 일으키는게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친족들이 일으킨 사건 무마인게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고위 관료로서 비판받고 탄핵받을 사유는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한 차례 파직을 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신 세종이 내린 처벌은 은퇴안식년도 없는 종신 노역형이라고들 역덕후들 사이에서 그러지만, 사실 황희가 사표 쓰고 세종이 이를 반려하는 행위가 세종이 황희를 외부의 여론으로부터 보호하면서 오랜 기간 정승 자리를 유지하도록 감싸준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 조선은 정승을 종신까지 부려먹는 인정 없는 사회가 아니다.[29]

당시 위에서 본 사례들을 가지고 황희가 청렴하지 못했다고 하는 비판의 기본 논조는 황희가 너무 오랫동안 권력을 쉽사리 손에서 내려 놓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황희는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재상을 약화시키고 비서 기구인 승추부를 강화하던 시기에 비서실장인 지신사였고[30] 6조 직계제 시행 전후를 기점으로 폐세자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 육조의 판서직을 두루 맡았으며, 재상의 권력을 키워주던 세종 시절에는 계속 재상으로 있었기 때문에 거의 40여 년 넘게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늙은 관리가 치사를 청하는 것은 의례적으로 되풀이되곤 하던 일이라 냉정하게 따지면 황희가 내심 언제 은퇴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31]

어쨌든 황희는 명예롭게 경력을 마무리했다. 중국 사신들마저도 황희에게만은 깍듯이 대했고 은퇴하고 나서도 의전에서는 다음 영의정 하연보다 위였다. 시호인 익성(翼成)의 익(翼)은 사려가 심원했다는 뜻에서, 성(成)은 재상이 되어 끝까지 잘 마쳤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4. 대중매체[편집]



4.1. 단독 작품[편집]


  • KBS-TV 드라마 <황희정승(1976)>
  • KBS1 드라마 <선구자> '거인의 길' (1986.06.28.) - 극본 이철향 / 연출 류시형
  • EBS <역사극장> '청렴선비 황희' (2003. 08. 08.) - 극본 안금남 / 연출 김유열


4.2. 캐릭터로서[편집]


  • 1962년작 영화 <주유천하>에서는 배우 변기종이 연기했는데, 1964년작 <세종대왕>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1968년작 영화 <방랑대군>에서는 배우 나일이 연기했다.

  • 1976년작 KBS-TV 드라마 <황희정승>에서는 배우 신구가 연기했다.

  • 1978년작 영화 <세종대왕>에서는 배우 최불암이 연기했다.

  • 1980년작 KBS-TV 일요사극 <파천무>에서는 배우 윤덕용이 연기했다.

  • 1983년작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배우 이묵원이 연기했다.

  • 1986년작 KBS1 역사드라마 <선구자> '거인의 길'에서는 배우 김성원이 연기했다.

  • 1990년작 KBS2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원로배우 고설봉이 연기했다.

  • 1994년작 KBS1 <역사의 라이벌>에서는 배우 김원배가 연기했다.

  • 1996년작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박진성이 연기했다.[32]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두문동 사건인데 황희가 두문동에 가담했다는 것이 워낙에 근거가 없다 보니 두문동 사건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이후의 해설 장면에서 지나가듯 살짝 모습만 드러냈고 정종 즉위 이후에 맹사성 등과 함께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태종 즉위 후 박석명의 천거를 받아 지신사가 되어 태종의 충실한 비서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후에 폐세자될 위기에 처한 양녕대군을 홀로 옹호하다 파직되고 유배에 처해진 뒤 세종 대 복귀하는 모습까지 나왔다. 세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부려먹히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에 '태종의 유배는 황희 최후의 휴가'라는 말이 있다.

  • 2003년작 EBS <역사극장> '청렴선비 황희'에서는 배우 박영태가 연기했다.

  • 2008년작 KBS 대하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배우 김갑수가 연기했다.[33] 이 드라마에서 황희의 캐릭터는 재해석을 많이 거쳤다. 초반부터 왕세자 양녕대군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고 그의 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정치 싸움에 능수능란하게 대응하는 정치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결국 양녕대군을 마지막까지 변호하다 파직당하고 세종이 즉위한 뒤 복귀하는 형태. 태종에게 "전하의 대에서 벌어진 일들이 왕자의 대에서도 벌어지면 이 조선은 끝장"이라고 말하며 태종의 가장 큰 역린을 직접적으로 건드릴 정도로 직언을 아끼지 않는다. 다만 초반부 고려 부흥 세력과의 갈등을 위해 야사의 두문동 이야기를 각색하고 여기에 황희를 연결시켰다. 황희가 마지막으로 고려 유신들을 설득해서 두문동을 떠나게 하려 하나 유신들은 끝내 이를 거부하고 황희는 불타 죽어가는 유신들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목격한 고려 부흥 세력의 수장은 황희를 회유하려 두문동 사건을 언급하였지만 황희는 "나는 새 나라에서 백성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라는 입장을 끝내 고수하게 된다. 장영실의 전향으로 인해 일망타진된 고려 부흥 세력의 2인자 전판석을 심문하다가 한 발언은 작중 황희의 사상을 잘 말해준다.

"고려. 높은(高) 아름다움(麗)을 지닌 나라. 그 국호를 이제 더는 입에 담지 마라. 너희들은 단순한 반군, 아니 화적패야! 백성들의 안위는 눈꼽만큼도 생각치 않고, 그저 분풀이나 하는 네놈들은 화적패나 다를 바 없다 이말이야!"

-대왕세종 26화 중


  • 2011년작 SBS 대기획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배우 전성환이 연기했다. 스토리상 비중은 크지 않지만 문자 창제에 대한 반대 여론이 강해질 때 세종에게 "만들기는 만드셨습니까?"라 물어 세종이 은밀한 비밀인 문자 창제의 뜻을 몰래 밝혔을 정도로 신뢰하는 원로 대신의 면모를 보였으며 세종이 이신적에게 "황희가 사직 상소를 올렸다"라 말하니 "그건 매년 있는 일 아닙니까?"란 반문이 나와 노인 학대도 표현되었다.

  • 2012년작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배우 백윤식이 연기했다.[34] 시작부터 충녕대군의 세자 지위를 놓고 충녕대군을 까다가 태종에게 말 그대로 쥐어 터진다.[35] 작중 중반부터 파직된 모습으로 나오는데 충녕대군인 거 뻔히 알면서 대놓고 "내가 너랑 똑같이 생긴 어떤 놈을 알고 있는데 말이야."라는 식으로 깐다던지. 양식을 구하려고 대놓고 기와집 담장을 넘고 쌀 두 가마니를 들고 오는 충격적인 모습을 선보인다.[36]

  • 2015년작 SBS 창사 25주년 특별기획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권화운이 연기했다. 포은을 죽이고 두문동을 파괴한 이방원에 대한 복수를 위해 관직에 나선 것으로 하였다.

  • 2016년작 KBS 대하드라마 장영실에서는 배우 정한용이 연기했다.[37] 무척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나오며 장영실 일행의 역법 연구를 입 다물어주는 등 대인배로 나온다.

  • 2017년 채널A <천일야사>에서는 배우 김경응이 연기했다.

  • 2019년작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는 배우 신구가 영의정 역을 연기했다. 시기를 보면 황희일 수 밖에 없으며 엔딩 크레딧에도 그를 따르는 대신들을 '황희파 대신들'로 적시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세종과 대립하지는 않지만 세종, 장영실과 대립하는 숭명파 신하들의 중심축인 인물로 직접적으로 대립하기보다 겉으로는 세종의 뜻을 따르는 척하면서 아래 사람들을 이용해 세종과 장영실을 밀어붙인다. 이후 장영실의 작업실에서 금속 활자가 발견되고 한글을 보게 되면서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장영실에게 가서 떠보지만 장영실이 모르쇠를 취하자 계속 이러면 주상도 위험해진다고 겁박한다. 이후 어가가 부서지고 세종이 신하들을 모아두고 숭명파 신하들을 역모로 몰아가던 중 금속 활자와 한글을 거론해 세종과 단독으로 대면하고 이후 한글 창제를 하면 사대부들이 전부 왕과 대립하게 될거고 그러면 이루고자 하는 국가를 만들 수 없을 거라며 한글 창제를 포기하면 장영실을 사면하는 데 도와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하여 세종의 숭명파 숙청 시도를 좌절시킨다. 이후 국문 때 장영실의 공을 봐서 사면해 주자며 먼저 거래를 제안하고 장영실을 포기하지 못하던 세종이 따르려던 순간 장영실이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면서 계획은 실패하게 된다. 기존 드라마에서 세종과 친하고 어진 면모를 보인 것과 다르게 직위와 정치술로 세종의 뜻에 어느 정도 반하는 사대부들의 수장으로 나온다.

  • <근육조선>이라는 대체 역사 소설에서는 건강을 되찾고 상왕으로 은퇴한 후 법전을 제정하는 세종에게 '온갖 정치 범죄의 산증인'으로서 정말로 죽는 전날까지 부려먹혔다. 실제 역사보다 3년을 더 살아서 세는나이 93세에 세상을 뜨게 된다.

  • 2022년 KBS1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강지섭이 연기했다. 주로 태종에게서 어명을 전달받으면 그것을 집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때문에 세자 시절의 양녕대군에게 내가 보위에 오르면 경부터 내칠 것이라는 등 자주 협박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세자는 적장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양녕대군이 폐세자될 때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폐세자 반대를 강력히 주장하던 이전의 매체들과는 달리 반대 의견을 냈다가 나머지 대신들이 전부 찬성 의견을 내자 딱히 반박을 못하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이후 태종이 폐세자는 만장일치여야 하니 찬성으로 뜻을 모아달라는 말에 소신껏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한 후 정치적 이유로 귀양을 가는 것으로 나온다. 여담으로 수염 분장과 강지섭의 외모가 실제 황희의 초상화와 매우 닮았다는 의견이 많다.


5. 기타[편집]


  • 한때 김종서를 자신의 뒤를 이을만한 차세대 인물로 인정했을 때 급한 성품을 고쳐준다는 이유로 일부러 김종서를 심하게 갈궜다는 일화도 있다. 하루는 북방에서 조정으로 복귀한 김종서가 황희가 들어왔음에도 모른 척 비뚤어진 자세로 있다가 "저놈 의자 다리가 한쪽 망가진 모양이니 고쳐줘라"라는 한마디에 바로 정좌했다는 이야기. 다른 이야기로 황희를 비롯한 정승들이 한창 정무 일을 하다가 식사 시간이 되자 김종서가 음식상을 차려서 정승들에게 보냈다. 그러자 황희는 "관료들을 접대하는 일은 조정의 예빈시가 맡는 일인데 왜 멋대로 월권 행위를 하는가?"라며 김종서를 호되게 혼을 냈다는 야사이다.

  • 임진왜란 직전 통신정사로 파견된 우송당 황윤길은 그의 5세손이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준비 중이라고 정확히 파악하고 강력하게 조정에 경고했으나 당파 싸움에 밀려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런데 은근 평이 나쁜데 <선조수정실록>에서 황윤길과 허성은 재물만 밝히거나 겁을 먹어 왜인들이 비루하게 여겼다고 기록되었기 때문.[38]

  • <춘향전>의 중요한 무대인 광한루를 세운 인물이다. 1419년 황희가 양녕대군 옹호 문제로 파직되고 남원으로 유배를 왔을 때 지었다.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광한루는 1626년 남원부사 신감이 재건한 것. <춘향전>의 시기가 숙종 즉위 초라는 점을 감안하면 무대가 되는 광한루는 신감이 재건한 광한루로 보는 것이 맞다.

  • 정치인 중 동명이인이 존재한다. 본인이 이름 덕에 고령층에서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파일:반구정.jpg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황희 정승의 업적을 기리는 유적지로 유적지 안에 반구정(伴鷗亭)과 황희선생영당지, 방촌기념관 등이 있다.[39] 현대 수도권 사람들에게는 임진강 민물장어 식당촌으로 더 유명하지만 반구정 이름의 유래 자체가 황희 정승 유적지다. 1449년 황희가 정승에서 물러난 후 경기도 파주에 머물렀을 때 임진강변에 지어놓은 목조 정자. '임진강에 날아온 갈매기와 벗삼아 나누는 정자'라는 뜻으로 지어졌다. 황희가 말년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 정자로 그가 운명한 이후 유림들과 사림들이 황희를 추모하는 정자로 칭송을 받았으나 1950년 한국전쟁북한군의 남침 및 임진강 도강 때 파괴되어 멸실되었다가 1967년 황희 후손들이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임진강과 장단을 바라보는 운치가 있는 곳이지만 지리적으로 북한 개성 지역과 근접해 있는 지역이라 임진강 주변에 철책선이 있고 육군 경계초소가 있어서 군사적인 긴장감을 더해주기도 한다. 대낮에만 풍경을 볼 수 있는 편으로 밤에는 아쉽게도 풍경을 직접 볼 수 없다. 이 때는 초소 초병들이 경계 목적으로 서게 되기 때문에 민간인들은 일몰 및 저녁 이후에는 반구정 출입이 금지된다.

황익성공(黃翼成公 황희(黃喜))은 도량이 넓어서 조그마한 일에 거리끼지 아니하고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스스로 겸손하여, 나이 90여 세인데도 한 방에 앉아서 종일 말 없이 두 눈을 번갈아 뜨면서 책을 읽을 뿐이었다. 방 밖의 서리맞은 복숭아가 잘 익었는데 이웃 아이들이 와서 함부로 따니, 느린 소리로, “나도 맛보고 싶으니 다 따가지는 말라.” 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나가보니 한 나무의 열매가 모두 없어졌었다. 아침 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모여들면 밥을 덜어주며, 떠들썩하게 서로 먹으려고 다투더라도 공은 웃을 따름이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 재상된 지 20년 동안 조정은 공을 의지하고 중히 여겼으니 개국 이후 재상을 논하는 자는 모두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ㅡ 『용재총화


  • 세종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전체를 대표하는 재상의 위치에 있는 인물로 지금까지도 흔히 "황희 정승"이라고 불릴 만큼 정승이라는 말과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승의 대명사가 되었다.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낸[40] 대기록 때문인지 야사에도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대표적인 이야기로는 계란유골의 고사, "어느 소가 일 더 잘해요?" 얘기라든지, 무엇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네가 옳다. 너도 옳다. 부인 말도 옳소."[41] 등의 이야기가 있다.

  • 그의 딸은 입을 속곳(속옷)이 한 벌뿐이었으니 딸을 결혼시킬 돈도 없었다. 헌데 하루는 세종과 신하들과 여러 백성들이 보는 자리에서 광대들이 신나게 줄타기를 하는데 어느 광대가 줄타기를 하면서 "어허, 이 줄타기 춤은 황 정승 속곳 춤이올쎄."라고 외치는 거 아닌가? 이 말을 들은 어느 대신이 "이놈, 감히 영상대감을 모욕하는 거냐? 죽고 싶은 게로구나!" 분노하였지만 그 광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줄타기를 하며 말을 계속했다. "보통들 황정승 나리의 하나뿐인 따님에게 속곳을 달랑 한 벌 남겨두고 살아가는 것을 청렴결백이라고 추앙하지만, 천한 것인 이 몸에게는 쓸데없는 짓거리로만 보일 뿐이옵니다. 혼례가 뭐 대충 치르는 겁니까? 어디 이 속곳춤을 따지실려면 그 황정승 속곳춤의 유래를 과연 옳다고 보실 수 있는지요. 그 따님의 삶은 생각도 하지 않으시는거 아니온지요.[42]이래도 이 광대 놈의 춤과 말이 싫으시다면 사정없이 목을 베시지요."라고 말하면서 살판나게 춤을 추었고 그 대신도 주변 인물들도 뭐라고 반론하지 못하고, 황희를 쳐다봤다. 결국 그 눈길을 견디지 못한 황희는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다.[43] 이 이야기는 야사일 가능성이 크다.

  • 청탁 때문에 탄핵된 적이 1~2번이 아니었으니 사실 청백리라 하기는 힘든 인물이지만 야사에서는 왠지 청렴한 관리로 남았는데 실제 행적을 두고 보면 청백리로 언급되는 것은 죄다 야사일 가능성이 높다. 황희의 청백리 이야기와 관련되어 유명한 것이 계란유골의 고사인데 이것 역시 정식 사서가 아니라 조선 후기에 나온 『송남잡지』(松南雜識)에 실려있던 일화며 시기상의 차이와 실제 행적을 볼 때 이쪽 역시 빼도 박도 못하는 야사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새서 방 안에 그릇을 놓아두고 우산을 쓰고 있었다는 일화 역시 거짓말. 여느 벼슬아치들과 다를 바 없이 크고 아름다운 기왓집이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수 차례 나왔던 황희의 온화하고 관대한 성품은 야사에서도 잘 나타나며 무려 노비의 아이가 한 나라의 정승인 자신의 수염을 잡아 당겨도 혼내지 않고 그저 허허 웃어 "허허 정승"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강강약약.

  • 다른 야사로 노비를 출세시킨 이야기가 있다. 평소 자신이 거느리던 노비가 매우 현명한 머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자, 황희는 밤에 몰래 부른 다음 노비 문서를 건네주고 "글공부를 해서 성공하라"며 떠나보냈다. 이후 세월이 흘러 황희가 과거 시험관을 맡았는데 그 시험에서 급제한 인물 중 1명이 그 노비였다는 야사.

  • 아무리 야사가 미화됐다 하더라도, 아예 거짓이라면 사람들 입으로 구전도 되지 않고 사라지는게 당연하다. 그런 면에서 이렇게 여러가지로 이렇게 오래 전해져온 황희의 여러 야사들은 분명 근거가 없을수가 없다. 개인적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들 그 점은 극소수의 왕이나 대신들만 알 뿐인데 당대 서민들과 관련된 여러 야사들은 정사로도 입증된 관대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건국 초기 나라의 틀이 잡히기 전 마구잡이로 권력을 휘두르던 왕족, 공신들과는 무언가 확연히 다른 행동이나 행적 때문일지도.

  • 궁녀와 총각이 남 모르게 사랑을 하다가 발각되면서 처녀는 고문을 당했고 총각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총각이 황희 정승에게 도움을 청했으며 다음 날 그는 에 가서 임금에게 계속 웃고 있었다. 이에 왕이 웃는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궐문을 나설 때 숫진드기와 암파리가 싸우고 있었는데 숫진드기가 "함께 살자"고 했더니 암파리는 "요새 시골 총각이 처녀와 함께 살다가 쫓겨난 일도 모르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왕은 황희의 뜻을 알아챈 다음 "궁녀를 풀어주고 총각도 더 이상 찾지 말라"고 명했으며 그 뒤 이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야사가 있다.

  • 황희가 청년일 때 어느 농부 두 마리를 가지고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황희는 "이 두 소 중에 어느 소가 일을 잘합니까?"라고 농부에게 물었더니 그 농부는 황희에게 가까이 다가와 "누런 소가 검정 소보다 일을 잘한답니다"라고 귓속말로 대답했다. 황희는 황당해하면서 "그냥 있는 곳에서 말하지. 왜 굳이 귓속말로 대답합니까?"라고 물어보았더니 농부는 "아무리 말 못 하는 짐승이라도 일 못한다는 험담을 들으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 일로 황희는 앞으로 말조심을 하게 됐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교과서에도 삽입돼있어 대부분들의 일반인은 이 일화하나로 황희를 기억하기에 위에 적혀진 큰 흠결들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강직하다고만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 야사에는 당시 장안의 유명한 점쟁이인 홍계관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미래를 점쳐보니 아무리 점을 쳐봐도 때문에 개죽음을 당할 운명인지라 살아남을 방도를 찾던 중 우연히 황희 정승의 아들 3형제의 사주를 봐주게 되었다. 장남과 차남은 별 볼 일이 없었지만 막내인 황수신이 훗날 정승 반열에 오른다는 점괘를 본 홍계관은 황수신에게 "자신을 살려달라" 부탁했고 황수신은 못 미더웠지만 "일단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은 했다. 세월이 흘러 세조 대에 이르러 홍계관의 점이 용하다는 소문이 대궐까지 알려져 세조가 홍계관을 불러 상자를 하나 내밀며 "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고 질문하자 홍계관은 "쥐 세 마리가 들어있다"고 대답했지만 상자를 열어보니 쥐는 한 마리만 들어 있었다. 이를 본 세조는 홍계관을 혹세무민하는 자라 하여 "끌어내 죽이라" 명령하고, 홍계관을 심문하기 위해 한 관리가 들어오는데 그가 바로 형조판서가 된 황수신이었다. 황수신과 홍계관은 서로 알아보고, 홍계관은 그 문제의 쥐를 "다시 1번 조사해 달라" 부탁한다. 이에 황수신이 세조의 허락을 얻어 그 쥐를 살펴보니 유난히 통통했길래 배를 갈랐더니 새끼 쥐 두 마리가 나왔다. 홍계관의 점술에 놀란 세조는 즉시 홍계관을 풀어주었고 그렇게 홍계관은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판본에 따라서 쥐가 5마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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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희 초상화 원본. 깨끗한 모사본 반신상(半身像)도 있다.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서양화 기법을 더하여 그린 판도 있다.[2] 개성의 가조리(可助里)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오늘날 지명은 확인할 수 없다. 황희의 유배지는 모두 황희를 배려하여 정해졌는데 첫 유배지는 오늘날 파주시에 속하는 교하였다.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도 말년을 주로 임진, 장단에서 보냈고 묘소도 그 인근이므로 황희의 연고지는 대체로 고려시대 개성부 영역 남쪽 경계 인근으로 볼 수 있다.[3] 부계의 근거지는 전라도 장수, 남원 등지 였다. 황희의 부친 황군서전라도 남원부 출생으로, 벼슬살이로 인해 개성에 터를 잡았다. 황희의 조부 황균비의 묘소는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산촌마을 ‘풍악산(楓嶽山)’에 위치해 있다.# [4] 좌익공신 3등 황수신의 부모 명목.[5] 현존하는 대다수의 장수 황씨들의 시조격이다.[6] 당시 기준 본관으로 현재 남원 황씨는 계통상 장수 황씨로 분류된다. 후에 태종이 황희를 남원으로 귀양 보낼 때 노모와 처자를 데리고 갈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아들과 본인 모두 남원에 봉작되었다.[7] 감문위호군 김우의 딸이며, 황군서의 첩이었다고 한다.[8] 한자 그대로 오래오래 살라는 뜻으로 어린 시절 몸이 약하여 양친이 장수를 기원하며 지어준 이름의 덕을 받았는지 실제로 오래 살았다.[9] 아버지 황군서를 비롯한 부계의 고향이 남원이라 남원 출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10] 당시만 해도 적서차별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물론 얼자 정도면 얘기가 약간 달랐을 수도 있다.[11] 이때 황희에게 "내가 죽으면 따라 죽을 사람은 그대라고 생각했거늘..." 이런 식으로 맹비난했다. 허나 훗날 세종에게 황희를 다시 불러들여 중용할 것을 권한 것을 보면 능력은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2] 이 당시 이미 만 68세였다.[13]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11월 27일(신해)출처[14] 언급했듯이 무려 사망하기 4개월 전까지 관직에 있었으니 농담이 아니라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 하지만 사명감이 높아 오랫동안 자리에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5] 이에 대해 역사학자 임용한은 재밌는 해석을 내놓았는데, 현대에 와서 재벌 회장이 일이 너무 바빠 새벽에 일어나 빵 먹고 출근하면 그걸 불쌍하다고 할 사람이 있느냐, 오히려 재벌이면 그 정도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나며, 황희도 따지고 보면 국무총리 같은 사람인데 이 사람이 정년 찼다고 바로 등 돌려서 퇴직하는 게 맞냐며 황희도 국가의 중요 인물로서 자리를 비워선 안 되고, 너무 오래 해먹는다는 신하들의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황희는 사직서를 내고 세종이 넌 아직 더 일 하라며 사직서를 반려해, 세종이 황희를 부려먹는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황희를 보호한 것이라고 해석했다.[16] 물론 현대 의학 기준으론 전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부동시의 위험이 있다.[17] 왕들은 새벽 3~4시에 일어나 왕실 어른 문안부터 시작해서 조회, 서류 검토 및 결재, 경연과 같은 일정을 쉬지 않고 소화한 후 밤늦게 잠드는 스케줄을 1년 내내 반복해야 했다. 격무에 시달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고, 대체로 운동 부족이라 세종처럼 성인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아 장수한 경우가 의외로 드물다. 사냥이나 여러 잡기를 통해 운동을 하거나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쉽지 않았다. 46년 동안 재위한 숙종(조선)이나 52년 동안 재위한 영조는 예외적인 경우다. 그리고, 숙종조차도 13살에 제위했을 뿐. 예순을 못 넘겼다. 영조의 경우에는 소식과 운동 등으로 건강을 챙겼으니 그나마 장수하는 것이 납득이 된다.[18] 영아 사망률을 고려해야 한다. 그 시대에도 100년 넘게 산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19] 이귀령은 조선의 정승 중 가장 장수했던 인물이다.[20]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황희보다 더 오래 산 사람들은 100세를 넘겼다는, 이징옥의 아버지 이전생(李全生), 이속의 백부로 검교좌의정(檢校左議政)에 올라 좌의정(左議政)으로 치사(致仕)한 이귀령(李貴齡, 1345~1439)[19], 효령대군(1396~1486), 이구원(李久源, 1579~1675), 성혼의 손자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성직(成稷, 1586~1680),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홍수렴(洪受濂. 1642~1736), 효종의 서녀 숙녕옹주의 남편 박필성(朴弼成, 1652~1747) 등이 있다. 황희의 장남인 황치신(黃致身, 1397~1484)도 장수했다.[21] 신창현.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이 신창현이 맹사성의 고향 동네여서, 황희의 부탁을 받은 맹사성이 신창현과 그 주변 고을의 현감들에게 사건 무마를 지시한다. 물론 나중에 세종에게 다 들통나서 황희, 맹사성과 신창현감, 신창현 주변의 5개 고을의 현감이 모조리 파직당한다.[22] 오늘날로 치면 국회의장의 사위이며 법무부 장관의 아들이 지나가다 업무를 보러 가던 지방공무원 실장급을 인사 안 한다고 갑질+폭행을 저지르고, 그걸 말리려고 한 동료 실장급을 폭행치사시켜 유가족에 고소당해 경찰에 입건되자 국회의장(황희)과 집권당 소속 국회부의장(맹사성)까지 나서서 유가족 친척을 구워삶아 유가족을 협박하여 보상금과 합의해 줄 터이니 고소를 취하하고 무마시켜 달라고 폭행이 일어난 지역 검찰경찰, 지방법원에게 사건을 은폐 축소시켜 달라고 청탁하는 격이다. 그리고 범죄 기록 공문서를 조작하여 없던 것을 만들다가 대통령에게 들킨 꼴이다. 게다가 이 사건을 알리려는 시도마저 막아버린 건 보너스. 즉 살인 사건 은폐 목적의 공무집행방해 & 공문서 위조 & 공갈 협박 & 뇌물 공여 & 법 질서 교란 등. 게다가 기군 망상을 시도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이거, 엄청난 죄이다. 즉 걸리면 그냥 사약 먹거나 목 졸려서 곱게 가는 것도 아니고 저자에서 목이 잘리거나 사지가 찢겨 죽어도 할 말 없는 중죄다.[23] 사실 이들이 벌인 가장 큰 죄는 기군망상죄, 즉 왕을 속이려 했던 것이라 전원 사형당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세종이 그래도 많이 봐준 셈이다.[24] 현대 대한민국은 국가의 행정 작용의 연원이 국민들이 위임한 권력에서 나오지만,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행정 작용의 연원이 왕에게서 나왔다. 따라서 현대법에서 국가적 법익에 대한 죄로 해석되는 죄들은, 조선 시대에서는 왕을 능멸한 죄가 된다. 더군다나 유교 문화권에서는 왕에게 진심어린 충성을 바치지 않는 모든 행위가 반역으로 취급되었다![25] 황수신이 사마시를 보러 갔을 때 시험관이 답안을 보고는 대놓고 시험 보러 왔냐 놀러 왔냐라고 할 정도로 모욕을 줬다고 한다. 그래서 황수신은 이후 각고의 노력을 하며 공부를 한 끝에… 음서로 관직에 나간 것이다.[26] 심지어 이건 일반적인 수준의 치부가 아니다. 저 아산 지역은 국유지이고, 일 시켜 먹은 사람은 공노비다.[27] 덧붙여서 이 황희의 아들 셋 중에서 두 명은 계유정난 후 세조를 지지했다. 정작 황희는 세조와 맞선 김종서를 키우고 후사를 맡겼다. 그럼에도 황희의 명성 때문에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잡은 세조는 황희와 자식들에게 높은 지위를 맡겼다.[28]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박포의 처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도망친 것을 황희가 모처에 숨겨주었고 이것이 와전되어 황희가 정치적인 타격을 입은 것으로 묘사한다.#[29] 사실 계속된 사직 요청과 세종의 불허를 후대인들이 보면서 '황희가 그만두고 싶어 했으나 죽기 직전까지 부려먹혔다'는 이미지가 박힌 것인데, 황희가 이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거나 괴로워했다는 기록은 없다. 세종과 마찬가지로 일 중독이었는지(이렇게 본다면 위에 언급된 재택 업무는 초고령임에도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재상을 돌봐주는 세종의 세심한 배려가 된다), 진짜 은퇴하고 싶었는데 그의 능력을 아낀 세종이 막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떤 경우든지 조선 최고의 성군이라 평가받는 세종이 진짜로 간절히 쉬고 싶어 하는 노인에게 강제로 일을 시켰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30] 즉위 초 태종은 재상 대신 비서 기구를 통해 육조를 장악하려고 하였으므로 이조를 담당하던 지신사가 재상의 권한을 침범한다는 볼멘소리까지 나왔다.[31] 후임자 하연은 늘 그랬듯 의례적으로 치사를 청했다가 문종이 선뜻 받아들이자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32] 2년 후 후속작 왕과 비에서는 성삼문 역.[33] 다소 안 어울린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는 2015년작 MBC 드라마 <퐁당퐁당 LOVE>에서도 황희를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 태종을 맡은 배우가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종간으로 호흡을 맞춘 김영철이다.[34] 2011년작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백윤식이 태종 역.[35] 이 작품의 태종이 한 터프하다. 시작부터 면전에서 땡깡부리는 양녕대군에게 이단옆차기를 날리질 않나. 옆에다 철봉두고 턱걸이를 하면서 정무를 보질 않나.[36] 이 영화는 진짜 고증을 바라고 보면 안 된다. 태종이 짐이라 그러질 않나. 효령대군이 아예 머리를 깍질 않나. 그런 것만 빼면 킬링타임용 영화로서는 볼만하다.[37] 사실상 그의 첫 사극 커리어다.[38] 황윤길의 당색은 서인.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북인의 편향적인 시각이 담긴 <선조실록>에 반발해 반정 세력인 서인들이 편찬한 것이다. 황윤길은 같은 서인들한테도 비난을 받은 것이다.[39] 방촌유적지라고도 한다.[40]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장 기간 영의정 재임이다. 덧붙여 가장 많이 임명된 인물은 숙종 때의 최석정으로 무려 9번이나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소론이었기에 사직을 반복.(병자호란 때 주화파의 대표였던 지천 최명길의 손자.)[41] 황희가 양비론을 펼치는 쿨찐의 모습이라며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실제 속 뜻 의미는 의미없는 논쟁에 참여하지 않고 관심조차 주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인터넷 키배에서도 자주 보이는 해결법이다 보니 반박시 니 말이 맞음단어의 유행으로 일반인들에게도 늦게 재평가 받고 있다.[42] 한마디로 "속곳도 제대로 못 입고 결혼도 못하고 어렵게 어렵게 살고 있는 황정승네 따님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남 일이라고 뒷짐 지고 서서 청렴하네 뭐네 위선이나 떠는구나. 참 잘나셨다."[43] 삼성당 만화위인전 1981년판에서는 바위라는 이름을 가진 광대가 춤을 추며 꽤 길게 이야기하는데, 그 자리에 있던 황희가 "왜, 저 놈이 애꿎은 나를 물고 늘어지는 거냐?" 라고 화낸다. 바위라는 광대는 이 혼례를 이야기하며 "이 얼마나 눈물겹단 말이냐, 정작 청량리 청량리라고 황대감께 찬양받지만 정작 자기 딸내미 마음도 헤아리는 거 맞느냐? 얼씨구, 얼씨구 동네방네 모든 이들에게 이를 알리리오, 알리리라."라고 춤을 춘다.(여기에서는 황희를 위선자라고 더 비아냥거리는데 남들에게 칭송받으나 정작 댁은 딸 혼례를 그 모양으로 하면서 뭐? 적당히 청량리 궁상 떠슈! 라고 풍자한 것) 그 자리에 세종도 있어서 결국 황희는 줄행랑쳤고 세종이 황희를 불러와 혼례품을 국고로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