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각민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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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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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선통제의 황후
孝恪愍皇后 | 효각민황후


파일:Empress_Wan_Rong.jpg

출생
1906년 11월 13일
청나라 절강성 항주
사망
1946년 6월 20일(향년 39세)
재위
청의 황후
1922년 ~ 1924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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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곽포라(郭布羅)
부모
곽포라 영원, 아이신기오로씨
형제
곽포라 윤양(오빠)[1], 곽포라 윤기[2]
부군
청 공종 선통제
}}}
1. 개요
2. 생애
2.1. 이미 망해버린 나라의 황후가 되다
2.2. 자금성에서의 생활
2.3. 톈진으로 가다
2.4. 만주국의 황후로
2.5. 사망
3.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황후이자 청나라, 그리고 중국의 마지막 황후다.[1] 다만 실질적으로는 효정경황후를 마지막 황후로 쳐주기도 한다. 그 이유는, 효각민황후가 황후가 된 것은 청나라가 멸망하여 소조정만 남겨진 상태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름은 완용(婉容), 만주어·한어로는 완룽이라고 한다.[2]


2. 생애[편집]


효각민황후는 1906년 11월 13일에 만주 정백기(正白旗)에 속하는 내무부 대신 곽포라 영원의 집에서 태어났다. 완용의 어머니는 황족인 애신각라씨이며, 종친인 다라정군왕 부후(多羅定郡王 溥煦)의 손녀다. 하지만 어머니가 완용을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사망하면서 곽포라 영원은 또다시 정군왕의 손녀인 항향(恒香)에게 새 장가를 들게 되었다. 단, 같은 아버지를 둔 자매지간은 아니고 사촌자매지간이다. 완용의 어머니는 부후의 장남인 육장의 4녀이고, 항향은 부후의 차남 육랑의 차녀이다. 새어머니가 원래는 이모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완용과 항향과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곽포라 영원은 당대의 사람들 중에서는 깨어있는 사람인지라 딸에 대한 교육에 소홀히하지 않았다. 특히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 교사인 이자벨 잉그램(Isabel Ingram)을 초청하여 영어와 여러 가지 신식학문들을 가르치게 했으며, 완용은 이 덕분에 영어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완용은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교육만을 받으며 어엿한 귀족영애로 자랐다.

2.1. 이미 망해버린 나라의 황후가 되다[편집]


1922년에 만 16세가 된 완용은 만주족이라서 선통제의 황후가 될 규수를 뽑는 수녀선발에 나가게 된다. 다만 엄밀히 말하자면 완용은 다우르족 출신이었다. 그래도 만주팔기 출신인 데다가 만주족 혈통도 가지고 있어서 (어머니가 청나라 황족 출신) 사실상 만주족 대접을 받았다.

그러다가 단강황귀비 타타르씨(端康皇貴妃 他他拉氏)[3]가 강렬하게 "완용이 선통제의 황후가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여 완용이 황후가 되었다. 당시 완용과 더불어서 황후가 될 후보 1순위였던 아가씨가 바로 악이덕특 문수(鄂爾德特 文綉)였는데, 그녀도 완용처럼 좋은 집안의 딸이지만 단강황귀비의 의견에 따라 완용이 황후가 되었으며, 문수는 숙비(淑妃)에 봉해졌다.[4]

하지만 10년 전인 1912년에 청나라신해혁명으로 인해 패망하였고, 중국은 군주제가 폐지된 상황. 자금성에 있는 청나라 소조정중화민국으로부터 옛 왕조의 권위만을 인정받고 있고, 황제 또한 외국 군주의 예우를 받을 뿐이었다. 그러니 선통제와 완용의 혼례는 옛 시절 황제의 대혼례로 행해졌다. 그리고 완용은 중화민국 정부에서 특별히 준비해놓은 봉황이 그려진 마차를 타고 동화문에서 자금성으로 들어갔으며, 1922년 11월 30일에 완용은 청나라 마지막 황후가 되었다.


2.2. 자금성에서의 생활[편집]


완용과 부의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처음에 자금성에서의 생활은 황후를 위한 일상적인 의식과 예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완용은 종종 가정교사 이자벨 잉그램과 함께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다. 푸이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려고 들르거나 장난을 치거나 완용에게 전화를 걸어 자주 공부를 방해하곤 했다.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완용은 헌신적인 학생으로 남아 가정교사를 놀라게 했다. 완용은 친구들과 가족들의 방문도 수시로 받았다. 그녀는 사진 찍기, 추리소설 읽기, 피아노 치기, 영어회화, 자전거 타기를 즐겼다.

일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부의와 완룽은 결혼생활을 그만두지 못했고 자식도 없이 지냈다. 완룽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하이퍼포커스(Hyperfocus)와 강박장애(OCD)로 나타난다. 이는 이사벨 잉그램이 가장 두드러지게 증명하는데, 그녀는 완용이 공부와 오르간 연주와 같은 일에 몇 시간 동안 집중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녀는 아편담배를 피우며 스스로를 구원했을지도 모른다. 두통과 생리통에 시달리던 그녀는 푸이의 허락을 받아 아편을 피우기 시작했고, 점차 아편에 중독되었다. [5]
1923년 12월, 그녀는 기근 구호 노력에 600개의 은화를 기부했고 전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태감 손요정(孫耀庭)의 회고에 따르면 완용은 목욕할 때는 자기 손을 쓰지 않고 궁녀에게 맡기고, 목욕 후에 자기 몸을 감상하는 것, 그리고 쉬는 동안 방문을 활짝 열어놓는 등 여러 가지 기벽(奇癖)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황상(부의)이 완용의 침소에서 밤을 보내는 일이 극히 드물었고, 와도 그녀를 바로 보지 못하는 등 부부의 정이 매우 희박했다고 한다.#

2.3. 톈진으로 가다[편집]


1924년 북경정변으로 인해 청나라 황실 우대조건이 파기되자, 부부는 자금성에서 추방당하고 각국의 보호도 거부당한다. 부부는 순친왕부로 옮겼지만 이미 순친왕부는 대가족이 살고 있어 시끄러운 상태라, 부의와 완용은 "둘이서 조용히 살게 해주겠다"는 일본의 꾀임에 넘어간다. 그리하여 톈진의 일본조계에 있는 장원으로 들어갔고, 1929년에는 다시 정원(静園)으로 이주한다. 국공내전의 영향은 톈진에 크게 미치지 않았고, 자금성을 벗어나 인습에 구애받지 않고 일본의 간섭이 깊어질 때까지 부부는 현대식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이때부터 완용은 왕실전통의상을 벗어버리고, 현대식으로 개량한 치파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다녔다. 현대식으로 꾸민 완용은 당시 모던여성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수가 장원을 탈출하며 푸이에게 이혼을 선언하면서, 부의와 완용의 부부 사이는 악화된다. 부의가 딱히 문수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완용이 문수를 쫓아낸 결과, 이혼으로 황제의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도 아닌 황제가 후궁에게 이혼을 당하는 일은, 황제의 지위에 있던 부의로서 견디기 힘든 굴욕이었을 것이다.

때를 같이하여 중국국민당에서 벌인 청나라 역대 황제들의 능묘 도굴사건은 부의로 하여금 큰 분노를 자극하게 되었고, 자금성에 살 때부터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완용의 소원이기도 했던 해외탈출의 꿈을 접고 복벽에 집착하게 된다. 이런 부의의 행보에 일본은 "부의를 만주국 황제에 앉혀 청나라 복원을 이루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부의는 그 꾀임에 말려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성적 결함에 부부간의 불화, 일본의 말만 듣는 남편에 대한 울적한 기분을 풀려던 완용은 아편에 손을 내밀어 결국 중독 증세를 보이게 된다.

2.4. 만주국의 황후로[편집]


만주사변 발발 후인 1931년 말, 푸이가 일본 육군으로부터 '대청제국의 부흥인 신국가(만주국)'의 황제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것을 수락, 톈진을 탈출해 만주로 이주한다. 정원에서 푸이가 떠났음을 안 완룽은 푸이로부터 "만주로 와 달라"는 청을 받지만, "황후의 신분을 찾을 의사도, 남편의 품으로 돌아갈 의사도 없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관동군의 명을 받은 카와시마 요시코가 "황제가 다롄에서 죽었으니 장례식에 참석해 달라"고 속여 만주로 끌고 갔다.

푸이가 2년간의 집정을 거쳐 1934년 3월 1일, 황제에 즉위하자 완룽 또한 황후가 되지만, "완룽이 황후에 적합치 않다"고 보는 관동군의 뜻에 따라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고천례 의식에도 즉위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같은 해 6월 7일 방만 중이던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의 훈장 전달식 때도 관동군은 완룽을 알현시키기 싫었지만, "전달식에는 황제·황후 모두 참석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따라 예외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완룽은 훈일등보관장 수상의식에도 그 후 연회에도, 심지어 12일 치러진 만주국황제의 초연 자리에서도 구설수에 올랐던 것과는 달리 아편중독 증세를 보이지 않고 건강한 모습 그대로 의례에 임해 연회의 여주인 역을 맡았다.

그러나 자유가 없는 폐쇄적인 생활과 황후로서의 행동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편에 대한 의존은 심화되어, 1935년경에는 새로운 의류를 구입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푸이의 아이가 아닌 여아를 출산한 것도 이때. 놀랍게도 완룽의 친오빠가 일본군에게 이권을 얻는 대가로, 여동생이자 황후인 완롱이 일본군 장교에게 강간당하는 것을 묵인했다고 한다. 정실황후 완룽이 일본군 장교의 사생아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푸이는 완룽이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그 아이를 화로에 던져 죽여버렸다. 또한 완룽에게는 아이가 잘 크고 있다며 거짓말을 하고 숨겼다. 푸이가 아이를 화로에 던져 죽인 사실은 초판 자서전에는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기록되지 않았고[6] 푸이가 사망하고 한참 후에야 밝혀졌다.[7] 완룽은 1946년아편에 빠져 병사할 때까지도 자신의 아이가 오빠의 주선으로, 시골의 평범한 집에서 자라고 있는 줄 알았고 매달 자신의 오빠에게 양육비를 건넸다고 한다.

푸이의 동생 푸제의 아내인 사가 히로는 "1937년 가을 무렵, 아편중독의 영향으로 완룽의 식사 모습에 이상 징후가 있었다"고 자서전에 적고 있다.

만주국 말기에 완룽의 모습을 본 사람들에 따르면, 그녀는 누더기나 다름없는 헐벗은 옷을 입고, 머리는 헝클어진 채, 화장은커녕 세수조차 하지 못했으며, 아편중독과 건강치 못한 생활로 시력을 거의 잃어 자력으로 일어설 수 없었다고 한다. 정신착란을 겪고 있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푸이는 손도 대지 않고 오히려 이혼과 폐위를 생각했다고 한다. 푸이는 이 시기 완룽과 이혼까지 생각했으나, 일제가 완룽의 후임으로 일본인 여자를 집어넣으려는 걸 알자 그만두었다.[8]


2.5. 사망[편집]


일본의 패전만주국 붕괴로 푸이가 일본 망명을 기도하고 도망간 뒤, 동서인 사가 히로 등 소수의 친족 및 수행원들과 함께 남겨진 완룽은 소련몽골연합군과 함께 만주로 온 팔로군에게 체포돼 각지를 전전하고, 통화에서는 통화사건에 휘말렸다.

이런 상태인 완룽을 보러, 형리들과 팔로군 간부들이 감옥에 모여드는 모습을 사가 히로는 자서전에서 "동물원과 같아서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다"고 술회했다.

이후 친족이나 수행원과 떨어져 석방허가가 났지만, 인수자가 없어 군이 이동함에 따라 유치장교도소를 전전하게 된다. 연길의 감옥 안에서 아편중독의 금단증상과 영양실조로 인한 쇠약이 진행되지만 "어차피 죽을 테니까"라며 고통을 덜어줄 아편은 물론 물조차 받지 못하고 급기야 돌보러 온 사가 히로도 알아보지 못한 채 고독 속에서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완용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선통제의 회고록에는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 헤어졌으며, 그때 완용은 이미 마약 중독으로 심각하게 병약해진 상태라[9] 1946년에 길림성 연길감옥에 수감된 뒤에 옥중에서 사망하였다고 하며, 그녀의 시신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완용과 함께 있던 부걸의 아내 사가 히로 등 다른 사람들은 죄다 선통제와 다른 주장을 하였고, 완룽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완룽의 사망 소식을 푸이는 3년 만에 구금처인 소련에서 들었다. 이후 푸이는 자서전 <나의 전반생>에서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건 흡독(아편)의 습관에 물든 것, 용서할 수 없는 행위가 있었다는 것[10] 정도이다"라고만 썼다.

1995년 허베이성 이셴(易縣)에 있는 청나라 역대 황제의 능묘, 청서릉 인근 민간묘지 화룡황원의 경영자가 묘지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1962년 푸이와 재혼한 이숙현에게 그의 능묘를 조성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동의한 숙현에 의해 푸이의 유골은 이 묘지로 옮겨졌다. 또 나중에 푸이의 능묘 옆에 완룽과 탄위링의 능묘도 조성되었으나 완룽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아 유품 몇개만이 묻혀 있는 가묘(假墓) 상태이다. 2002년 청 황실인 아이신기오로 가문에서 효각민황후라는 사시(私諡)를 수여받았다.


3. 매체에서[편집]


영화 마지막 황제에선 조안 첸이 완룽 역할을 맡았다.
1986년 중국에서 개봉한 말대황후라는 영화도 있다. 유튜브에 무료로 올라와 있다. 링크

여담으로 남동생인 곽포라 윤기는 살아생전에 매체가 누나의 모습을 왜곡해서 묘사했다고 불쾌해했다. 특정 매체를 언급하진 않았으나, 가와시마 요시코와 동성애 관계인 것처럼 묘사한 영화 마지막 황제 등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궁인 원슈를 라이벌로 생각했다는 기록 때문인지, 원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중국 드라마 말대황비에선 원슈를 핍박하는 표독한 성품의 소유자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다만, 완룽이 남긴 일기나, 원슈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미워하기만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완룽이 원슈를 놀리는 편지를 보내면 원슈는 오타를 지적하는 답장을 보냈다고(...).링크
완룽은 푸이가 원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생전에 남긴 시를 보면 원슈를 제비에 빗대는 등 매력적으로 묘사한다.

또한 완룽이 생전에 남긴 일기에는 아편을 흡연하는 모습을 목격한 원슈가 "나는 자살 기도를 했지만 죽지 않기로 했다"면서 완룽의 아편 흡연을 비난했다고 적었는데, 원슈가 '자살 기도'를 언급한 것이 마음에 걸린 완룽이 푸이에게 셋이 같이서 식사를 하자고 부탁했다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푸이는 그럴 거면 자기는 식사를 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한다. [11]

영국 언론인 Henry Woodhead도 완룽과 원슈가 자매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황제에선 완룽과 원슈의 관계가 친구처럼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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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족 황후로 범위를 좁히면, 살아생전에 황후가 된 케이스로는 명나라 숭정제의 아내 장렬민황후가 마지막이고 추존황후까지 포함하면 푸이의 마지막 부인이었던 리수셴이 마지막이다. 리수셴이 청나라 황후로써 받은 시호는 효예민황후(孝睿愍皇后)다.[2] 우연이겠지만 송나라 시기 후궁의 호칭 중 하나이기도 했다.[3] 광서제의 후궁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효정경황후를 대신하여 자금성을 관리하고 있었다. 진비의 언니이기도 하다.[4] 원래 수녀선발에서 탈락하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수 있지만, 문수는 선통제의 마음에 들었는지 바로 비로 간택되었다.[5] 당시 중국에서는 아편이 의료용으로도 많이 쓰였다.[6] 무엇보다 아기를 태워죽여버린 것은 지나치게 잔인한 행위로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일이기 때문이다.[7] 푸이가 아이를 죽인 이유로는 질투심도 있을 것이고, 아이가 일본에 정략적으로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엉뚱한 씨를 받은 이 아이가 청나라 장손 노릇 하는 것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8] 사실 청나라 황실은 푸이의 조상인 숭덕제 치세에 보르지긴 가문으로부터 몽골 제국 대칸위를 찬탈한 바 있으니, 몽골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업보를 치르다 만 셈이다.[9] 사가 히로의 회고록에 의하면, 완용은 아편금단 증상으로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며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뒹굴었다고 한다.[10] 외도를 하고 아이를 출산한 일을 가리키는 듯하다.[11] 영문 위키에 따르면 <The Last Emperor and His Five Wives>라는 책에 언급된 내용이라고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