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강장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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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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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효강장황후.jpg

생몰년도
1640년 ~ 1663년
시호
효강자화장의공혜온목단정숭문육성장황후
(孝康慈和莊懿恭惠溫穆端靖崇文育聖章皇后)
배우자
청세조 순치제 아이신기오로 풀린
신분변화
서(庶)비⇒강(康)비
자녀
황3자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순치제후궁으로, 강희제의 어머니.

2. 상세[편집]


정람기 한군 출신인 아버지 동도뢰(Tong Tulai, 佟 圖賴)는 원래 여진족의 후손으로 조상이 명에 복속되면서 한화하였으나 청태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편에서 싸웠으며, 그로 인해 효강장황후 퉁기야씨의 가문은 호적상으론 한군이지만 사실상 만주인 대우를 받는 명문가였다.[1] 그녀는 순치제후궁이 되어 서비(庶妃)의 작위를 받고 서비 동씨(庶妃 佟氏)라 불리며 자금성의 경인궁(景仁宮)을 거처로 삼았다.

1654년, 아들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강희제)가 태어난다. 이후 강비(康妃)로 높여진다. 즉, 여러 기록에서 다르게 일컬어지는 서비 동씨와 효강장황후 퉁기야씨, 강비 퉁기야씨(康妃 佟佳氏)는 동일인물이다. 이 당시 효강장황후 퉁기야씨는 승건궁(承乾宮)의 현비 동고씨[2]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동고씨의 소생인 영친왕이 1658년에 요절하고, 현비 동고씨가 1660년 천연두로 사망, 곧 순치제도 죽어 히오완예이가 황제에 등극하게 된다.

그러나 본래 그녀는 몸이 약한 편이었고, 강희제 즉위 4개월만에 시름시름 앓더니 고작 24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성씨는 한족식인 동씨인데 왜 황후의 성씨가 퉁기야씨냐 하면, 동가씨는 원래 여진족이였으나 조상이 명나라에 투항해 한화된 여진족이였다. 이후 후금이 세워지자 다시 후금으로 투항했으며 이후 동씨 가문이 공을 세우고 누르하치 가문과 혼인을 맺고 강희제가 즉위 하자 만주 양황기로 대기 되었다.[3] 동씨네를 정람기 한군에서 양황기 만주 소속으로 대기하면서 원래 성씨인 동가씨로 바꿨다..[4] 이 때문에 기존 양황기 만주인들 사이에서 잠시 안 좋은 소문이 퍼지기도 했지만 여기다가 진지하게 태클을 걸면 역적질이나 다름없었던데다 원래 누르하치 이전부터 여진족 출신이기도 했던지라 그냥저냥 묻힌 듯. 그래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만주 기인만으로 이뤄진 네르친스크 조약 대표단에 효강장황후의 동생인 동국강이 포함되는등 일족들은 물론 후손까지도 다들 잘먹고 잘 살았다.

어룬타이(鄂倫岱)[5], 효의인황후 퉁기야씨(孝懿仁皇后 佟佳氏)[6], 각혜황귀비 퉁기야씨(慤惠皇貴妃 佟佳氏)[7], 롱코도(Longkodo, 隆科多)[8]가 모두 그녀의 친정 조카들이다. 중국의 배우 통따웨이(佟大为)는 그녀의 방계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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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조에서 한화한 여진족의 후손들은 누르하치가 흥기하면서 누르하치 편으로 넘어가 누르하치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고, 만주의 명예 칭호를 받아, 고위직에 임명되기도 했다. 물론 청나라가 멸망하여 만주족이 나라 없는 민족이 되고 더 나아가 한족에 거의 동화된 관계로 현재 그 후손들은 조상들의 한족식 성씨를 쓰고 있다. 퉁기야는 佟佳를 만주식 발음으로 읽은 것.[2] 죽은 뒤의 추서로 효헌단경황후 동고씨가 된다.[3] 일가 전체를 편입시켜달라 했지만 직계 50명만 양황기 만주로 편입되었다. 양황기는 황제의 호적이 속한 기. [4] 이후에도 본디 정황기의 한족 포의 출신인 효의순황후처럼 다른 한족 출신 후궁들은 오랜 궁중생활 끝에 황귀비 이상으로 승급하면 정황기 또는 양황기 만주인으로 대기되면서 만주식 성씨로의 사성 또한 거쳤다. 원칙상 만주인은 한족과 통혼할 수 없었기 때문. [5] 강희제의 외숙 동국강의 아들. 강희 연간에 2황자 윤잉이 폐태자되었을 때 아령아, 규서, 왕홍서 등과 함께 8황자 윤사를 지지했다.[6] 강희제의 외숙 동국유의 딸이자 강희제의 세 번째 황후. 임종을 지키던 강희제에 의해 죽기 직전 황후로 승급했기에 살아생전 황후가 된 비빈치고는 존재감이 적었지만 궁중법도에 따라 4황자 윤진을 키우지 못하던 우야씨 대신 양어머니로서 윤진을 헌신적으로 키웠고, 옹정제 즉위 후 성모황태후가 된 친어머니 이상으로 드높여졌다.[7] 동국유의 딸이자 효의인황후의 친동생. 강희제의 후궁이었고 효의인황후 사후 후궁의 수장으로서 육궁을 통솔했다.[8] 동국유의 아들이자 효의인황후, 각혜황귀비의 남동생으로 옹정제에게는 외숙뻘이다. 옹정제의 최측근으로서 옹정제 등극을 도왔고 권세를 누렸으나 결국 옹정제에 의해 숙청당했다. 유사시에 수도방어를 담당하는 보군통령이자 강희제의 유언을 담당하는 보정대신인데 4황자 윤진의 지지자였기 때문에 옹정제는 청나라가 망하고도 100년간 찬탈 혐의를 받으며 오명을 뒤집어썼다. 다만 원래부터 윤진을 지지하던 것은 아니고, 8황자 윤사의 지지자였다. 동국유는 강희 연간 후반기에 붕당을 조장한 혐의로 파직되는데, 일족의 권세를 지키기 위한 보험 차원에서 원래 8황자당에 함께하던 자식들을 조정하여 후계자 후보들에게 골고루 침을 발라놓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