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제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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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임시 황제
효명제의 딸[1]

출생
528년 2월 12일
북위 낙양 황궁
(現 허난성 뤄양시)
즉위
528년 4월 1일
북위 낙양 황궁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임시 황제
528년 4월 1일 ~ 528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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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하남 원씨
부모
부황 숙종
모후 궁빈 반외련
형제자매
1녀 중 장녀 장남
제호
없음
연호
없음

1. 개요
2. 생애
3. 정통성 논란



1. 개요[편집]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임시 황제.

제9대 숙종 효명제 원후의 딸이었다. 할머니인 영태후 호씨에 의해 단 1일 동안 즉위했기에 실제 황제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다. 사실 영태후에게 이용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 생애[편집]


북위 제9대 황제인 숙종 효명제의 딸이었으며 궁빈(宮嬪) 반외련(潘外憐)의 소생이었다. 현대 중국 일각에선 원고낭(元姑娘)이라고 표기하는데 중국어로 '꾸냥'(姑娘, 고낭)은 그냥 '아가씨' 또는 '딸'이라는 뜻이며 이름을 알 수 없어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보통 효명제의 딸, 즉 영문으로는 Daughter of Emperor Xiaoming of Northern Wei, 중문으로는 위효명제녀 원씨(魏孝明帝女 元氏)라고 부르기도 한다.

할머니인 영태후(혹은 호태후)는 자신의 친아들인 효명제를 독살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528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자신의 손녀를 효명제의 아들이라고 속여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황제로 옹립한 손녀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에 두려워진 영태후는 하루 만에 손녀를 폐위시키고 손자뻘이었던 원조(원쇠)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후 이 여자 아이의 생사는 불분명하다. 결국 권력에 눈이 먼 할머니 영태후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것이다.

'효명제의 딸'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 역사에 전혀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폐위 후 영태후가 상황제(殇皇帝)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가 필요하며, 사실이라고 해도 후대 황제가 올린 정식 시호가 아닌 사시(私諡)이다.


3. 정통성 논란[편집]


위서》 <제기>(본기) 혹은 《북사》 <본기> 어디에서도 다루지 않아 일단 정통 황제로 볼 수는 없다. 즉위 기간이 하루밖에 안 되니 시호가 없는 것은 물론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으니 묘호도 없는 것으로 모자라 아예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아 일반명사인 '고낭'(姑娘)으로 칭해지고 있으며, 여성으로서 황제에 오른 것이 아니라 딸을 아들이라고 속이고 제위에 올렸다가, 단 하룻만에 폐위시킨 것이었다. 즉, 사기 즉위였던 것.

물론 남장 여성으로서라도 의미 있는 기간을 재위했다면 여제로 볼 수도 있겠으나 재위 기간이 1주라도 된다면 모를까 단 1일[2]이라서 대체로 중국 사학계에서는, 비정통 황제로도 인정하지 않는다.[3] 다만 청양(成揚)이라는 중국 사학자는 1985년의 저서에서, 기존의 부정적인 입장이 현대 사회주의 중국에 반하는 봉건적인 사고일 뿐이라며 거짓된 즉위라도 즉위는 즉위이므로 '중국 최초의 여성 황제'임을 인정하자고 주장했다. 황제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효명제의 딸을 여영황제(女嬰皇帝)라고 하는데 '어린 여아 황제'라는 뜻으로 '유주'(幼主)와 같은 맥락의 호칭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유주와는 달리, 사서에 기록된 칭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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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서에 기록된 칭호 없음[2] 즉위하자마자 폐위당했다는 얘기도 있다.[3] 다만 기간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금말제의 경우도 아침에 즉위해 저녁에 죽었지만 황제로 취급받는데 말제는 선황제인 애종으로부터 직접 양위받은 만큼 정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효명제의 딸은 영태후의 허수아비일 뿐더러 이마저도 아들이라고 속이고 즉위시킨데다 그마저도 금방 취소했기에 정통성이 너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