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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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종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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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눌 (효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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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 (혜암)
법전 (도림)
법원 (진제)
성파 (중봉)


※ 괄호는 법호를 의미함.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파일:효봉.jpg

법명
원명(元明), 학눌(學訥)
속명
이찬형(李燦亨)
본관
수안 이씨
출생
1888년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성리 금성동

사망
1966년 10월 15일
(향년 78세, 법랍 42세)
경상남도 밀양시 표충사
학력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와세다대학[1] (졸업)

종교
불교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법호
효봉(曉峰), 포운(泡雲), 선옹(船翁)
1. 개요
2. 생애
3. 오도송과 열반송
4. 일화



1. 개요[편집]


대한민국불교 승려. 구산(九山), 법정(승려) 그리고 고은(시인)의 은사로 잘 알려져 있다.[2] 1962년에 출범한 통합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여 조계종에서는 초대 종정으로 예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해방 이후 1962년 통합 종정 출범까지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며, 1945년 해방 직후 한영스님부터 종정으로 예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평생토록 무(無)자 화두를 들고 참구했던 효봉은 ‘엿장수 중’, ‘늦깍이 중’, ‘판사 중’, ‘절구통 수좌’, ‘아 몰라 스님’, ‘너나 잘해라 스님’ 등으로 알려져 있다.

효봉에게는 묘한 도시전설이 오랫동안 따라다니고 있는데, 바로 10년 동안 판사로 재직하다가 돌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종적을 감춘 뒤 출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2. 생애[편집]


효봉에게는 '1914년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당시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 최초로 판사를 역임했다'라는 도시전설이 오랫동안 따라다니고 있다. 그리고 평양 복심법원에서 10년 동안 재직하던 중 어떤 조선인에게[3] 사형 선고를 내린 것에 회의를 품고 번민하다가[4] 돌연 가족과 직장동료 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종적을 감춘 뒤 장수로 변신해 3년여를 떠돌다가 출가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효봉과 같이 근무하던 일본인 판사가 1933년 당시 유점사를 방문했다가 10여년 동안 종적이 묘연하던 효봉을 마주치고 경악한 뒤 절대 자신의 과거를 발설하지 말아달라는 효봉의 간곡한 부탁에도 결국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발설해버리면서 판사 출신이라는 게 밝혀졌다는 얘기다.

1933년 당시 유점사에 왔던 일본인 판사가 그때 자신과 같이 근무하던 이홍종이라는 조선인 판사와 효봉을 혼동했거나 애초에 연보 등 효봉 관련 문헌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 그런데 워낙 유명한 일화라서 아직까지 저 얘기가 사실처럼 많이 떠돌아 다닌다. 다만 효봉이 엿장수로 떠돌다가 37세에 금강산 신계사 보문암에서 석두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출가 후 5년이 지나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그는, 각오를 하고선 1년 6개월간 금강산 법기암 뒤 토굴에 들어가 정진했다. 좌복에 엉덩이살이 눌러붙을 정도로 정진해서 ‘절구통 수좌’로 불렸다고. 이후 깨달음을 얻고 많은 후학을 길러냈으며, 송광사 삼일선원에 주석할 때 성철, 일타, 탄허 같은 선승들이 그를 따라 모여 수행했고, 송광사 방장 자리를 이은 구산(九山), 무소유의 법정이 그의 제자였으며, 고은도 한때 일초라는 법명으로 효봉의 제자였다. 고은은 효봉에 대해 “나는 스님을 모시고 목욕을 할 때 그 궁둥이와 발가락, 발바닥에 그 고행의 자취가 역력히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법정의 경우는 1956년 효봉이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 가서 한철 정진을 할 때 시자로 데리고 간 유일한 사람이었다.

또한 효봉은 1962년 한국불교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며,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3. 오도송과 열반송[편집]


오도송:

海底燕巢鹿抱卵 (해저연소록포란)
火中蛛室魚煎茶 (화중주실어전다)
此家消息誰能識 (차가소식수능식)
白雲西飛月東走 (백운서비월동주)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불 속 거미집엔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 소식 뉘라서 알랴?
흰 구름 서쪽으로 날고 달은 동쪽으로 달리네

열반송:

吾說一切法 (오설일체법)
都是早騈拇 (도시조병무)
若問今日事 (약문금일사)
月印於千江 (월인어천강)

내가 말한 모든 법
모두 다 군더더기
만약 오늘 일을 묻는다면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4. 일화[편집]


  • 출가 당시 학력과 과거 행적을 완전히 숨기고 오직 ‘못 배운 엿장수’였다고 자신을 소개했으므로, 모두들 효봉을 ‘엿장수 중’으로 불렀다. 그 후 같은 법원에 근무했던 일본인 판사가 관광차 절에 왔다가 우연히 조우, 그동안 숨겨왔던 판사 전력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효봉은 ‘판사 중’으로 불리게 되었고, 사찰의 법률문제만 생기면 효봉을 찾게 되었다. 이에 효봉은 이 일이 번거로워 금강산을 떠나 남행길에 오르게 되었고, 그 덕택에 남북분단 후 이 나라 불교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위에 설명했듯이 판사 출신이 아니라는 게 거의 확실해짐에 따라 '사람들이 법률문제를 의논해서 번거롭게 했다'라는 얘기도 나중에 덧붙여진 허구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 6.25 전쟁이 일어나 해인사에까지 인민군의 발길이 뻗쳐 왔을 때, 모두들 피난을 갔지만 효봉과 구산, 법흥, 원명, 보성 등의 문도들만 해인사에 남았다. 피난 가자고 보채는 제자들에게 효봉 曰 “저 소는 지난 여름 내내 농사 짓느라고 죽도록 부려먹었다. 그런데 이제 저 소를 버리고 사람만 피난을 가잔 말이냐?” 하지만 결국 소를 빼앗기자 효봉 曰 “소 버리고 사람만 피난갈 수 있느냐, 그 소가 우리 대신 죽었구나. 그 소가 우리 대신 죽었어”

  • 효봉의 생전 법어나 일화를 모은 <효봉 노트>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 때 조계종단 대표로 다른 종교 대표들과 함께 경무대로 초대받았을 당시 일화로, 고관대작들의 인사를 받던 이 대통령은 효봉이 들어오자 일어나 손을 잡고 앉을 자리를 권하며 “스님 생일은 언제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효봉은 “생불생(生不生) 사불사(死不死)"를 말하며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 생일이 어디 있겠소?”라고 답했고, 이 대통령은 한참이나 효봉이 말한 ‘생불생 사불사’를 되뇌었다고 한다. #

  • 효봉의 제자였던 법정의 회고에 따르면 성격은 의외로 어린애 같아서 시자들과 장난도 곧잘 치고 자비롭기 그지없었다고 하는데, 시줏물을 낭비하는 것엔 엄중했다고 한다. 초 심지가 다 타서 내려 앉기 전엔 새 초를 갈아 끼지 못하게 했다. 수도인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곧 부자살림이라고 금강산 시절부터 쓰던 다 닮아진 세숫비누를 쌍계사 탑전에 와서도 쓸 만큼 철저했으며, 무더운 여름날 단 둘이 앉아서 공양을 하면서도 가사와 장삼을 입고, 죽비를 쳐서 심경[5]을 외우면서 엄숙히 음식을 먹었다고.

  • 남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제자에게는 나쁜 짓인줄 알고 있으면 너나 잘하면 될 것이지, 어쩌자고 남의 허물만 고자질 하느냐고 어김없이 “너나 잘해라! 너나 잘해!”라고 호통을 치셨다. 그래서 나중에 ‘너나 잘해라 스님’이란 별명이 붙었다.


  • 개신교인인 함석헌과는 같은 평양고등보통학교 선후배[6]로 가까운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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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관해 논란이 있다.[2] 다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고은 문서 참조.[3] 독립운동가였다는 버전도 있다.[4]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된 사람이 나중에 무죄로 밝혀져 충격을 받았다는 버전도 있다.[5] 식사 전 외우는 글[6] 효봉이 1기, 함석헌이 8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