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의순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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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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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추존황후
孝儀純皇后 | 효의순황후


파일:孝儀純皇后.jpg

생몰년도
1727년 10월 23일, 청 강소성 ~ 1775년 2월 28일
시호
효의공순강유자인단각민철익천육성순황후
(孝儀恭順康裕慈仁端恪敏哲翼天毓聖純皇后)
배우자
청고종 건륭제 아이신기오로 훙리
민족
정황기 포의 ⇒ 양황기 만주
신분변화
위귀인⇒영(令)빈⇒영비⇒영귀비⇒영황귀비
자녀
황7녀, 황14자, 황9녀, 황15자, 황16자, 황17자
능묘
유릉(裕陵)
1. 개요
2. 생애
3. 입궁 과정
4. 봉호 영(令)의 의미
5. 황제가 내린 특혜
6. 자녀들
7.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파일:효의순황후 위가씨.jpg

중국 청나라의 황제인 건륭제의 황후로, 역대 청나라 황후 중 유일한 순수 한족 출신[1]이자, 역대 청나라 황후 중에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황후였다.


2. 생애[편집]


건륭제의 후궁으로 계황후가 유폐된 후에 황귀비로 책봉되어 사실상 황후 대신에 내명부를 통솔했다.

역대 청나라 황귀비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황귀비이기도 하다. 가경 23년에 위씨(魏氏) → 위가씨(魏佳氏)로 진정한 만주족을 의미하는 "가(佳)"를 붙여 위가씨로 사성받았다. 옹정 9년 9월 초구일생에 출생하여 건륭 40년 정월 29일에 사망했다. 사망 후에 건륭제가 직접 효의황후(孝仪皇后)로 추봉하였다.

건륭 10년에 위귀인으로 책봉되었고, 같은 해 정월 23일에 빈으로 책봉되었다. 건륭 13년 정월에 영비로 책봉되었다. 건륭 24년 11월 13일 영귀비로 책봉되었다. 건륭 25년 10월 초육일에 영귀비가 원명원에서 황15자 영염을 낳았다. 건륭 30년 정월 15일 남방 순시에 함께하였고 5월 초10일에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건륭 38년 동지에 황귀비가 낳은 황15자 영염이 밀건법으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당시 영염의 나이는 13세였으며 건륭제는 옹정과 같이 건청궁 "정대광명(正大光明)" 뒤에 밀봉하여 자신의 조서를 남겼다.

건륭 40년 정월 29일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2월 11일 영의황귀비(令懿皇贵妃)라는 시호를 내렸다. 건륭 60년 9월 초3일에 건륭제는 황 15자 영염을 황태자로 공표하였고, 황태자의 생모인 영의황귀비를 건륭제가 "직접" 효의(孝仪)황후로 추봉하였다.


3. 입궁 과정[편집]



연희공략이나 여의전에서 효의순황후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들이 궁녀로 나온다. 실제로 효의순황후 위가씨는 내관령 위청태의 딸이었다. 청나라는 만 13세에서 만 17세까지의 내무부 포의집안에 속하는 수녀들은 "무조건" 수녀선발에 참여해야했다. 내무부 포의 가문의 수녀들은 대부분 자금성 궁녀나 왕부의 궁녀로 차출되었다. 직접적으로 효의순황후 위가씨가 궁녀로 일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내무부 포의 집안이었기 때문에 건륭 6년 즈음 궁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위가씨가 귀인이 된 나이가 19세이니 그 전에 수녀선발에 참여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위씨네는 내무부 포의 집안이었기 때문에 기분 니루의 귀족들보다는 위세가 덜할지언정 전체 청나라 인구와 가문을 생각한다면 한미한 집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중상류층은 되었다고 보면 된다.


4. 봉호 영(令)의 의미[편집]


건륭 10년에 "빈"에 책봉될 때의 나이가 고작 19세였다. 귀인이 된 다음 몇 개월 지나 바로 빈이 되었으니 고속승진이 따로 없었다. 봉호 영(令)의 의미는 <詩經·大雅>에 나오는 “如圭如璋,令闻令望"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뜻은 "구슬처럼 순결하여 아름다운 명성이 들린다"라는 의미이다. 위가씨가 빈의 자리에 있을 때 이미 서빈 엽혁나랍씨와 유빈 가리엽특씨가 있었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영빈이 짬밥있는 후궁들을 제치고서 빈의 수장이 되었다. 자리에 앉을 때나 행사가 있을때 서빈보다 영빈이 앞에 있었다. 또한, 건륭은 특혜를 하나 주어서 자신이 아끼는 궁중화가 낭세녕에게 특별히 영빈을 그리라고 하였다. 다만 영빈이 되던 무렵부터 일방적인 총애를 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건륭 13년까지 가장 사랑받았던 여인은 효현순황후였고, 효현순황후 사후에는 숙가황귀비(가귀비), 순혜황귀비(순황귀비)가 있었다. 일방적으로 사랑받기 시작한 것은 가귀비와 순황귀비 사후부터였다. 물론 빈을 지나 영비가 될 때의 승진 역시 빨랐던 것을 보면 건륭제의 깊은 총애를 받았던 건 분명하다.


5. 황제가 내린 특혜[편집]


건륭제는 효의순황후를 무척 총애해서 다른 후궁들과는 차별화되는 여러 가지 특혜를 주었다.

청나라에선 황제가 식사할 때 후궁이나 황후는 함께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이들은 서서 황제의 식사 시중을 들었어야 했는데 건륭제는 효의순황후에게 특별히 식사할 때 같이 앉아서 하자고 허락을 했다. 이런 특혜를 누린 것은 첫 황후인 효현순황후와 효의순황후밖에 없었다. 또한, 건륭제는 효의순황후의 가문을 2번이나 대기(抬旗)[2]시켜주었다. 효의순황후 위가씨의 집안은 한족 혈통의 정황기 포의였는데, 포의관령에 불과했던 집안을 포의좌령으로 한 차례 격상시켜주었고[3], 그리고 건륭 40년에 정황기 내무부 포의좌령에서 양황기 만주 기분 니루(정식 귀족)으로 대기시켰다. 그에 따라 현재 효의순황후의 방계 후손들은 법적으로 만주족이다.

또 다른 특혜로는 사망한 후에는 장례식을 아주 성대하게 해주었다. 계후 호이파나라씨가 유폐당하고, 황귀비의 예로 장례를 치른 걸 생각하면 참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비록 살아생전 황후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으나[4][5] 여느 황후보다도 못지않은 혜택을 누리고 살았다. 건륭이 직접 시호를 내려주었는데, "효의(孝仪)"라는 시호는, "의(仪)"가 양을 뜻하고, 고종의 연호인 "건(乾)"이 음을 뜻하니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의(仪)"가 중궁이란 뜻도 있다.

당시 영황귀비의 집안에 있던 빚을 2번이나 직접 탕감해주었다. 그 중 한번은 부찰부항을 시켜 빚을 탕감시켜 주었다. 또한 부찰부항을 보내 위가씨 친정의 동생들을 취업알선을 시켜주기도 했다.

특별 대우 중 최고봉은 "낭세녕"의 그림. 황후와 황제를 제외하고 다른 비빈들은 일개 궁정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리지만 영황귀비는 영비시절 황제가 직접 영황귀비를 그릴 것을 명했다.


6. 자녀들[편집]


건륭 21년 원명원에서 7월 15일에 태어났다. 건륭은 위가씨가 첫 임신을 하자 위가씨의 집에 집과 토지를 하사했다. 2월에 자금성에서 원명원으로 이사를 왔고, 화정공주가 만 1개월이 되자 건륭은 함께 데리고 열하 여행을 떠났다. 측실이 낳은 딸은 화석공주, 황후가 낳은 딸은 고륜공주로 공주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7공주는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서 건륭 35년에 고륜공주로 봉해져 적녀와 동급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화정공주는 몽골의 초용친왕 박이제길특 납왕다이제[6]와 결혼했다. 건륭이 공주부를 자금성 안에 짓게 할 정도로 예뻐한 딸이지만 공주는 결혼한지 5년도 못되어 건륭 40년 2월 9일에 사망하였다. 생모인 영황귀비도 이에 충격을 받았는지 20일 뒤에 훙서하였다.

  • 황14자 애신각라 영로(1757~1760)
건륭 22년 7월 17일 태어났다. 14황자가 태어났을 때 건륭은 원명원에 있었고, 14황자가 태어난 다음날 위가씨를 데리고 원명원에서 출발하여 열하여행을 떠났다. 건륭 25년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위가씨가 건륭과 함께 남순을 나갔을 때 임신한 아이다. 건륭 23년 7월 14일 태어났다. 건륭 36년 12월에 화석화각공주로 봉해졌고 건륭 37년에 오아 찰란태에게 시집갔다. 건륭 45년 11월 19일에 만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건륭은 화각공주가 죽은 지 석달 후에 손녀를 궁으로 데려와 키웠다.

  • 황15자 애신각라 영염(1760~1820): 훗날 가경제
건륭 25년 10월 6일 원명원에서 태어났다. 건륭 38년 동지에 태자로 정한다는 조서를 밀봉하여 건청궁 편액 뒤에 남겨뒀다. 영염의 양육은 경공황귀비 육씨가 맡았다.[7] 건륭 39년 4월 27일에 15세의 나이로 희탑랍씨를 복진으로 맞이하였다.

  • 황16자 이름 불명 (1762~1765)
건륭 27년에 건륭제가 남순 때 위가씨를 데리고 가서 임신했다. 같은 해 7월에 건륭은 관례대로 열하로 사냥을 떠났다. 11월 30일에 태어났다. 건륭 30년에 천연두로 벽동서원에서 사망했다.

  • 황17자 애신각라 영린(1766~1820)[8]
건륭 31년 5월 11일에 태어났다. 역시 건륭이 열하여행 중이었을 때 임신했다. 건륭은 북경으로 돌아온 후 황후만이 살 수 있는 양심전의 동쪽 방을 수리하라고 명령하였고, 내부 장식들을 보강하여 황귀비가 쓸 수 있게 해줬다. 영린의 양육은 영귀비 파림씨가 맡았다. 건륭의 막내아들이었지만 주색에 빠져 살며 아무렇게나 민간인을 폭행하는 등, 건륭제의 아들들 중 가장 막장인 인물이였다. 동복형인 가경제까지 영린을 안 좋아했을 정도.[9] 양모인 영귀비 파림씨가 칠순이 되었을 때 축하하기 위해 찾아갔는데, 가경제에게 말도 안하고 궁을 출입하는 바람에 질책받았다. 이 때문에 상심한 영귀비는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작위는 경친왕으로 이후 경친왕 작위는 군왕으로 격하되지만 1894년 그의 손자인 혁광이 서태후의 총애를 받아 친왕으로 격상되고 이후 세습망체가 인정되어 철모자왕이 된다

효의순황후는 4남 2녀를 낳았다. 1759년에 임신을 한 번 했으나 유산했다. 즉, 임신은 총 7번을 했다. 첫 임신부터 황16자 때까지는 매년 임신을 한 셈.


7. 미디어 믹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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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희제의 어머니인 효강장황후는 조상이 한화된 여진족이었다가 강희제 시절 다시 만주족에 편입되었다. 다만 이쪽은 말 그대로 조상이 한화된 여진족이었던 만큼, 조상 대에 한족과의 통혼이 이루어져 한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효헌단경황후는 한족 가희 출신이라는 설이 있지만 이는 본인의 출신과 관련된 여러 야사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일단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만주족이 맞다. 즉, 효의순황후 위가씨는 팔기한군 출신은 아니지만 어쨌든 부계로 한족 혈통이 이어지던 포의 집안으로서 황후에 오른 유일한 사례이다. 그러나 명목상 추존된 청나라 황후까지 포함하면 선통제의 마지막 부인이였던 리수셴인데, 이쪽은 1997년 사후 7년 뒤인 2004년, 청나라 황실로부터 효예민황후(孝睿愍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2] 팔기가문에 속하는 기(旗)적을 변경시켜주는 것을 의미한다.[3] 좌령은 니루의 수장을 의미한다.[4] 청나라 초반(숭덕~순치) 때를 제외하면 청나라 황실은 예외없이 만주족만을 황후로 책봉하였다. 계황후가 효현순황후(이쪽도 명문 만주족 가문 출신) 사후에 황후가 된 이유도 그녀가 건륭제의 후궁 중에 한군이나 포의 출신이 아닌 유일한 만주인이었기 때문이다.[5] 건륭제의 후궁 중 서비 엽혁나랍씨도 만주 명문가문이였지만(만주 정황기 소속으로 만주 정람기 소속이였던 계황후보다 더 높았다.), 효현순황후가 사망했을 당시 비에 불과했고 나이도 어렸다. 또한 황후가 되려면 비에서 귀비→황귀비로 두 품계를 건너 뛰어야 하지만, 건륭 시기에 들어서면서 후궁이 한꺼번에 두 품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6] 강희제의 10녀 고륜순각공주의 부마 책릉의 손자[7] 가경제는 귀비였던 자기 양모를 황귀비로 추존해주었다.[8] 여담이지만 손자가 청 말의 총리이자 간신인 혁광이다[9] 실제로 가경제는 자신의 제위 중 친왕이라는 이유로 막장 인생을 살면서 사고를 치는 영린을 몇 번이나 질책하고 그에게 벌을 내리기도 했다. 가경제가 친하게 지낸 인물은 상대적으로 개념있는 이복형이었던 11황자 영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