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장문황후

덤프버전 :

파일:청나라 군주기.svg
청 황후

[ 펼치기 · 접기 ]
정식 재위
천명제
숭덕제
순치제
효열무황후
울아나라씨
효단문황후
보르지기트씨
폐황후
보르지기트씨
순치제
강희제
효혜장황후
보르지기트씨
효성인황후
허서리씨
효소인황후
니오후루씨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효의인황후
퉁기야씨
효경헌황후
울아나라씨
효현순황후
푸차씨
건륭제
가경제
계황후
호이파나라씨
효숙예황후
시타라씨
효화예황후
니오후루씨
도광제
함풍제
효신성황후
퉁기야씨
효전성황후
니오후루씨
효정현황후
니오후루씨
동치제
광서제
선통제
효철의황후
알루터씨
효정경황후
예허나라씨
효각민황후
고불로씨
추존 재위
원황제
직황제
익황제
원황후
직황후
익황후
선황제
천명제
선황후
효원고황후
퉁기야씨
효선고황후
푸차씨
천명제
숭덕제
순치제
효자고황후
예허나라씨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
효강장황후
퉁기야씨
순치제
강희제
옹정제
효헌장황후
퉁기야씨
효공인황후
우아씨
효성헌황후
니오후루씨
건륭제
도광제
효의순황후
위가씨
효목성황후
니오후루씨
효정성황후
보르지기트씨
함풍제
선통제
효덕현황후
살극달씨
효흠현황후
예허나라씨
효예민황후
이씨
청 황제 · 청 후궁




청 추존황후
孝莊文皇后 | 효장문황후


청 순치제조 성모황태후
소성황태후 | 昭聖皇太后


청 강희제조 태황태후
소성태황태후 | 昭聖太皇太后


파일:효장문황후.jpg

시호
효장인선성헌공의지덕순휘익천계성문황후
(孝莊仁宣誠憲恭懿至德純徽翊天啓聖文皇后)
존호
소성자수공간안의장경돈혜온장강화인선홍정태황태후
(昭聖慈壽恭簡安懿章慶敦惠溫莊康和仁宣弘靖太皇太后)
이름
보르지기트 붐부타이 (博爾濟吉特 布木布泰)[1]
출생
1613년 3월 28일
사망
1688년 1월 27일 (74세)
베이징 자금성 자녕궁
재위
청나라의 황태후
1643년 ~ 1662년
청나라의 태황태후
1662년 ~ 1688년
배우자
청태종 숭덕제 홍타이지
능묘
소서릉(昭西陵)

1. 개요
2. 생애
2.1. 출생부터 장비 시절까지
2.2. 황태후 시절
2.3. 태황태후 시절
3. 평가
4. 미디어



1. 개요[편집]


청나라의 유일한 태황태후[2]이자 중국 역사상 마지막 태황태후.[3]
홍타이지의 비로서 효단문황후와 함께 청 최초의 태후이며 순치제의 생모, 강희제의 조모이다.


2. 생애[편집]



2.1. 출생부터 장비 시절까지[편집]


1613년, 몽골의 호르친(Khorchin, 科爾沁, 과이심) 부족의 버일러(beile, 貝勒)[4]이자 호쇼이(hošo-i, 和碩) 충친왕(忠親王)이었던 보르지기트 자이상(borjigit jaisang, 博爾濟吉特 寨桑)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니까 몽골족 출신. 성씨인 보르지기트는 몽골어로는 보르지긴이라고 하는데, 이는 몽골 제국의 황성(皇姓)으로, 그녀는 칭기즈 칸의 동생인 카사르의 후손이다.

그녀의 이름인 붐부타이(布木布泰), 즉 하늘이 내린 귀인이라는 뜻의 이름이 지어진 이유는 그녀가 태어났을 때 티베트 불교 승려가 "이 아이는 장차 천자의 어머니로 군림할 것"이라 예언했기 때문이다.

1625년에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인 홍타이지의 측복진이 되었고, 1636년 홍타이지가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황제가 되자 영복궁 장비(永福宮 莊妃)에 봉해졌다.

참고로 홍타이지의 정실 부인이자 황후인 효단문황후 보르지기트씨(孝端文皇后 博爾濟吉特氏)[5]는 그녀의 고모이고, 홍타이지의 비(妃)이자 홍타이지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으로 알려진 민혜공화원비 보르지기트씨(敏惠恭和元妃 博爾濟吉特氏)는 그녀의 친언니이다. 즉, 홍타이지는 붐부타이의 고모부이자 형부이자 남편이 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Consort_Zhuang.jpg
영복궁 장비 시절

홍타이지의 측복진이 된 후에 한동안 아들을 낳지 못해 그녀의 부족이 그녀의 언니 하르졸(海蘭珠)[6]을 홍타이지에게 측복진으로 보냈다. 하르졸이 측복진이 된 후 총애를 뺏기게 되고 홍타이지가 황제가 되자 자신은 비 중에 가장 서열이 낮은 후궁[7]이 되고 해란주는 관저궁 신비(關雎宮 宸妃)로 봉해져[8] 황후를 제외하고 가장 서열이 높은 후궁이 되었다. 나중에 가까스로 아들을 낳았으나 하르졸의 아들이 죽은 지 이틀 만에 태어나 상심에 빠진 홍타이지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르졸이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병약해지고 몇년 후 사망하자 홍타이지 역시 건강이 악화되어 그녀가 죽은 후 2년만에 후계를 정하지 못한 채 급사한다. 여러 황족들이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녀는 고모인 황후 저르저르와 함께 황족들과 팔기군을 설득하여 자신의 아들을 즉위시킨다.[9]

2.2. 황태후 시절[편집]


이후 아들 푸린이 즉위하여 순치제가 되면서 황태후에 책봉되었다. 도르곤이 죽고 순치제는 친정을 시작하였다. 태후가 된 효장문황후는 자신의 조카를 순치제의 황후에 앉혔으나[10] 처음부터 그 결혼이 싫었던 순치제로 인해 아들과의 사이가 틀어졌다. 이후 순치제는 후궁인 동악비를 총애하여 황후를 폐위하는 등, 모후인 효장문황후와 여러모로 대립했다. 더군다나 효장문황후의 조카였던 순치제의 첫번째 황후도 태후인 효장문황후가 몇번이나 주의를 줄 정도로 질투가 너무 심했다고 한다. 결국 이를 트집잡혀 효장문황후도 어쩔 수없이 조카의 폐위에 찬성했지만 순치제의 새 황후는 총애를 한몸에 받는 동악비가 아니라 효장태후의 조카손녀였다.[11] 이로 인해 모자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순치제는 총애하던 동악비가 죽자 상심하고 이어 천연두에 걸려 붕어했다.

2.3. 태황태후 시절[편집]


순치제가 죽고 효장태후의 친손자인 히오완예이가 즉위하여 강희제가 되면서 태황태후에 책봉되었다. 효장태황태후는 순치제가 급서하자 재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고 황궁을 굳게 닫았는데, 이때 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보위를 둘러싸고 황궁에서 쟁탈전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히오완예이를 제위에 올려 화를 막을 수 있어 청의 혼란을 막은 공이 크다는 평을 받는다.[12]

그녀는 강희 연간 여러 차례에 걸쳐 존호를 받으며 소성태황태후(昭聖太皇太后)로 불렸다. 1679년 증손자 옹정제가 태어나자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1688년(강희 27년)에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시호는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로 추존되었다. 1723년(옹정 원년)에는 증손자 옹정제가 강희제의 유언에 따라 그녀를 소릉(昭陵)에 묻지 않고 새로운 능인 소서릉(昭西陵)에 안장하였으며 지덕(至德)이라는 시호를 가상하였다. 그 후 고손자 건륭제는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기 위하여 순휘(純徽)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생전에는 노조종(老祖宗)으로 불렸다.


3. 평가[편집]


조모 태황태후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위업은 없었을 것이다. - 강희제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는 아들 순치제가 사망했을 때 재빠르게 히오완예이를 황제로 추대해서 혼란을 막았다. 앞서 홍타이지가 갑자기 쓰러져서 깨어나지 못했을 때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아 십수일간 도르곤과 호오거의 기싸움이 벌어지고, 다이샨의 아들과 손자의 목이 달아나는 사태까지 빚어졌던 것과는 사뭇 다른 깔끔한 정리였다. 비록 순치제가 예수회 선교사의 조언에 따라 자금성의 천연두 대유행 때 천연두에서 안 죽고 살아남은 히오완예이를 후계로 삼으라 유지를 남겼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개국공신 친왕들이 건재한 상황에서 황제가 어린아이를 후계자로 남기고 요절하였으니 황권은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였다. 그런 위기에서 효장문황후는 중심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사태를 수습하며 황실의 수장으로서 강희제를 보호했다. 그 후로 효장문황후는 보정대신들에게 정치 실무를 맡기고 어린 황제의 교육을 맡아 강희제가 빠른 시간에 제왕학을 패스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얼추 성장한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하며 오만한 보정대신 구왈기야 오보이를 처분함으로서 강력한 황권을 얻어놓고도, 삼번의 난으로 다시 갈팡질팡하자 천고일제로 거듭나기 이전 철이 덜 든 강희제를 굳게 잡아주며 손자의 멘토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청나라의 세력을 크게 일군 황제의 부인이며, 청 최초로 중원 진출에 성공한 황제의 어머니였고,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룬 황제의 조모이자 스승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청나라 때 궁녀들은 화려한 치장을 할 수 없었고 옷, 신발, 화장법, 머리 장식에 이르기까지 엄격하고 까다로운 제한을 받았는데, 이것도 바로 효장문황후가 직접 정한 규범이었다. 궁궐에 소박하고 검소한 풍토가 자리잡게 하고, 궁궐 사람들 간의 쓸데없는 말썽을 막으며, 궁녀가 모시는 주인에게 예의를 다하도록 기풍을 다스리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정해둔 소박하고 검소한 풍토가 건륭제 치세와 서태후의 섭정기에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풍토로 바뀌었다. 특히 서태후의 사치는 건륭제의 사치마저 능가할 만큼 심각해서 훗날 서태후의 섭정기 이전이 배경인 청나라 사극에서 서태후 섭정기의 화려한 청나라 의상이 나오는 고증 오류가 생기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4. 미디어[편집]


강산풍우정을 비롯해 효장비사, 대청풍운, 대옥아전기, 녹정기 등 명청교체기와 순치, 강희 연간을 배경으로 하는 중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연, 조연급으로 많이 등장한다. 특히 청조의 입관 이전을 그리는 사극에서는 정사와는 별개로 야사 속 도르곤과의 열애설, 재혼설도 적극 활용하여 도르곤과의 로맨스가 많이 묘사되기에 미모의 젊은 여배우들이 많이 섭외되어 금단의 사랑(!)과 정치적 풍파 속에서 어린 아들을 지키려는 절실한 모성애를 그려낸다. 중국 사극의 단골 로맨스 중 하나. 한편 순치 연간에는 아들 여자친구를 못마땅해하며 아들과도 사이가 멀어지는 시어머니(...)로도 묘사된다. 강희 연간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 강희제의 푸근한 할머니로 묘사되는데, 이 경우 강희제가 고민에 빠질 때마다 찾아오면 현명한 조언을 해주는 자애로운 할머니이자 스승의 면모와 동시에 오만한 송고투나 밍주 등의 만주족 공신들도 벌벌 떨 정도로 부패한 권신들을 따끔하게 훈계하는 근엄한 어른으로도 묘사된다. 이렇듯 청나라 사극의 여성 캐릭터 중 가장 존재감 넘치는 인물이지만, 2010년대부터의 청나라 사극은 옹정황제의 여인이나 연희공략태황태후 살아계셨으면 다들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궁중 여인들의 캣파이트가 큰 인기를 끌면서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파일:EUIV_MoH-Forum-banner.jpg
DLC 중 천명 DLC의 모델로도 등장하였다.

  • 《일대황후 대옥아(一代皇后大玉儿)》 배우: 반영자(潘迎紫) <아역> 지친(季芹)
파일:일대황후효장.jpg

  • 《신월격격(新月格格)》 배우: 유설화(刘雪华) [13][14]
파일:신월격격태후.jpg

  • 《회옥공주(怀玉公主)》 배우: 유설화(刘雪华)
파일:회옥공주태후.jpg

  • 《강희왕조(康熙王朝)》 배우:스킨고바(斯琴高娃)
파일:강희왕조태후.jpg

  • 《효장비사(孝庄秘史)》 배우:닝징(宁静)
파일:효장비사옥.jpg

  • 《소년강희(孝庄秘史)》 배우:반홍(潘虹)
파일:소년강희태후.jpg

  • 《연화삼월(烟花三月)》 배우:귀아뢰(归亚蕾)
파일:연화삼월태후.jpg
  • 《대청풍운(大清风云)》 배우:허청(许晴)
파일:대청풍운태후.jpg

  • 《강산풍우정(江山风雨情)》 배우:우리(牛莉)
파일:강산풍우정태후.jpg

  • 《강희비사(康熙秘史)》 배우:우천천(邬倩倩)
파일:강희비사태후.jpg

  • 《경성절연(倾城绝恋)》 배우:반영자(潘迎紫)
파일:경성절연태후.jpg
여주인공 미리를 같은 고향인 코로친 출신의 사람이라서 많이 아끼고 총애한다. 미리가 강희제 사촌동생인 정헌과 사랑에 빠진 것을 알지만 둘의 혼인을 쉽게 허락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미리의 아버지가 우연의 사고로 사망하게 되면서 대신 미리를 맡아주기로 한다. 하지만 그 총애가 너무 하늘을 찔러서인지 미리에게는 독이 되어버렸다. 미리가 우여곡절 끝에 정헌과 혼인을 하지만 겨우겨우 측복진이 되었다. 하지만 미리를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 않자, 미리가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고자 태후에게 자신을 적복진으로 올려달라 청하지만 태후는 미리의 욕심이라며 단정하고 거절한다. 결국 참다 못한 미리는 아들을 위해 자살을 하고, 태후는 미리가 남긴 유서를 읽으며 그동안 미리가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태후는 '설마 내가 미리를 너무 총애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하며 자책했다.

  • 산하련(美人无泪)》 배우:원산산(袁姗姗)[15][16]
파일:산하련옥.jpg
처음에 고모의 혼인식에서 홍타이지를 보고 첫눈에 반해 도르곤이 아닌 그에게 시집간다고 했다. 누르하치의 임종을 혼자서 보게 되는데 다음 보위를 누가 이을지 적혀있지도 않았고, 누르하치가 말하려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하지만 버일러들이 모여 대옥아에게 추궁을 하게 되는데 이때 거짓으로 홍타이지에게 보위를 물려준다고 말한다. 그러자 홍타이지가 정말 맞냐고 맹세할 수 있냐고 하자 본인이 "하늘과 돌아가신 칸께 맹세해요. 제 말이 거짓이라면 평생 남편의 사랑도 못 받고 불효자식을 낳을 것이며 쓸쓸하게 늙어갈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홍타이지를 황제로 만들고 그에게 시집을 간다. 총애를 잠깐 받기는 했으나 해란주의 등장으로 총애를 잃게 된다. 해란주가 총애를 받으며 행복하는 모습을 보며 도르곤을 떠올리면서 "도르곤에게 시집갈 걸 그랬다."며 후회를 한다. 하지만 둘은 이미 정신적으로 불륜을 저지르며 애꿎은 도르곤의 부인 소옥아[17]을 죽게 만들었다. 아들 복림이 황제가 되자 갈등을 많이 겪게 되는데 이와 중에 첫번째 황후가 사망하자 "다시는 황후가 되지 말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홍타이지에게 모욕과 냉대를 받았지만 복림의 아들 현엽이 보위에 오르니 중국 역사상 가장 좋은 황제로 꼽히는 강희제이니 오욕으로 점철된 대옥아의 인생이 꼭 헛된 것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옥아가 맹세했던 저 말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으나 본인 스스로 돌아보았을 때는 다시 이런 선택이 주어지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하며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정식 사극은 개연성이라던가 그런 것을 따지면 안된다.

  • 《다정강산(多情江山)》 배우:원영의(袁咏仪)
파일:다정강산태후.jpg
순치제가 동소완을 후궁으로 책봉하는 것부터 큰 반대를 했다. 며느리로 조차 인정하지 않으며 황후를 가장 총애를 했다. 동소완을 반대하는 이유는 몽골족인 아닌 한족이라는 점이 더 컸다. 순치제가 막무가내로 동소완을 후궁책봉을 하자 태후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드라마가 끝나가는 후반부가 돼서도 동소완을 힘들게 하지만 종영 직전에서야 동소완의 마음을 알게되며 며느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 《대옥아전기(多情江山)》 배우:경첨(景甜)
파일:대옥아전기옥.jpg
홍타이지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도르곤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상태지만, 역사대로 홍타이지에게 시집을 간다.
입궁하면서 고모와 친하게 지내기도 하고, 홍타이지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지만, 아직도 마음속엔 도르곤이 있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홍타이지에게 도움과 조언을 주어 부인으로서 자리를 지키지고, 도르곤에게는 위기와 기회를 알려주면서 두 남자 사이에 서게 된다. 자신의 이복언니 해란주를 에제이한테서 구출해와 따뜻하게 신경을 써준다. 해란주가 처음에 롱거에게 시집을 간다고 했을 때 그 말을 이루어지기 위해서 롱거를 찾아갔더니 거절한다고 해서 이번에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도르곤에게 보내려고했다. 홍타이지가 언니를 마음에 두었다는 것을 알게되어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조언하는 등 자신보다 약한 언니를 챙기는 모습으로 나온다. 홍타이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데 도르곤의 꿈을 꾸는 탓에 자기도 모르게 도르곤을 부르는 바람에 총애를 잃어버린다. 냉궁으로 보내졌을 때도 애원하기 보단 꿋꿋히 지내는 모습을 보여 홍타이지는 그 점에서 자신 보다 뛰어나 언제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을 지도 모른다는 위협감이 몰려오게 되었다. 시녀 소말이 해란주에 대해 나쁘게 말해도 "언니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며 해란주의 심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복림이 낳았을 때도 8황자는 자신의 아이가 되어야 마땅했지만 홍타이지가 억지를 쓰며 해란주의 아들이 8황자라고 하는 바람에 9황자가 되었는데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냥 건강하게 태어난 것 만으로도 다행이지."라고 했다. 해란주가 죽음을 옆에서 지켜주며 끝까지 언니를 믿고 보살펴 주었다. 자신이 동궁을 받지 못한 것은 도르곤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기 때문에 홍타이지에게 미안함을 가져 해란주에게 양보했다. 홍타이지가 죽고 자신의 아들이 복림이 황제로 즉위하니 이제 도르곤과 재혼 할 수 있으려나 했지만 홍타이지는 이 점을 우려하여 유언으로 재혼을 불가한다는 것을 남긴다. 복림의 방해와 도르곤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상황이 최악으로 몰리면서 대옥아가 도르곤을 죽이게 되는 상황까지 되었다. 그 유명한 복림과 동악비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어졌다.

  • 《황제의 봄(寂寞空庭春欲晚)》 배우:미설(米雪)

  • 《용주전기 무간도 (龙珠传奇之无间道)》 배우:스킨고바(斯琴高娃)

  • 독보천하(独步天下)》 배우:조몽격(曹梦格)
홍타이지의 측복진으로, 질투가 많은 여인이다.
원래는 4패륵부로 시집간 고모와 지내다가 불평불만한 편지를 몽골에 보내다가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에게 걸려,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게 하기 위해 누르하치는 붐부타이를 홍타이지의 측복진으로 맞이하게 한다.
그러다가 고모부였던 홍타이지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홍타이지 마음을 얻지 못한다.
서복진이었던 부유란과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해란주가 된 부유란을 부유란이라고 알아보지 못한다.[18]
부유란이 죽으면서 분량이 엄청 줄어들었고, 이후 홍타이지가 황제가 되면서 서궁 영복궁 장비[19]가 되었다
  • 《소말아전기(苏茉儿传奇)》 배우:유천함(刘芊含)

  • 《화락궁정착유년(花落宫廷错流年)》 배우:왕려운(王丽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7 04:01:39에 나무위키 효장문황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Borjigit Bumbutai, 하늘이 내린 귀인이라는 뜻이다. 야사에 전해지는 대옥아(大玉兒)라는 이름은 옥 같은 외모 때문에 불리는 것이라고 한다.[2] 누르하치가 사망할 당시 대복진이었던 울라나라씨는 도르곤 삼형제를 견제하려는 형들에 의해 석연찮은 유서를 근거로 순장당했고, 홍타이지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던 터라 누르하치의 부인들 중에는 태후로 존숭받을 사람이 없었다. [3] 동태후와 서태후의 경우 광서제가 함풍제의 양자이자 동치제의 동생 자격으로 제위를 계승한 터라 태황태후로 존숭되지 않았다. 그리고 광서제 사후 서태후는 다음 황제를 지명하여 옹립해놓고 다음날 숨져 정식 태황태후로 존숭받지 못했다.[4] 족장 혹은 군주에 상응하는 직책[5] 휘는 보르지기트 저르저르(哲哲).[6] 만주어로 비취라는 뜻이다.[7] 어디까지나 정실인 적복진과 측복진내에서 낮은 것이지 홍타이지의 여자들 전체에서가 아니다. 홍타이지의 비들은 황제가 된 이후에 지정된 정궁 황후 저르저르, 관저궁 신비 하르졸, 인지궁 귀비 나무츠(娜木鍾)차하르부 링단칸의 대복진, 연경궁 숙비 바트마조(巴特瑪璪)차하르부 링단칸의 복진, 영복궁 장비 붐부타이만을 지칭하며, 심양고궁을 가봤으면 알겠지만 고궁 중앙쯤에 별도로 높게 쌓은 구역에서 홍타이지의 거처를 둘러쌓은 5건물들이 이들 5복진들의 거처이다. 이들 5복진들은 모두 보르지기트씨들이다.[8] 관저(關雎)는 시경의 관저편에서 따온 이름인데, 이는 군자가 숙녀를 배필로 얻어 함께 즐겁게 사랑할 것을 노래한 시였다. 또 신(宸)은 황제의 시호에만 쓸 수 있는 글자다. 사후에는 원비(元妃)로 높였다.[9]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대부분의 귀족들이 누르하치의 14남 도르곤을 지지하였고, 홍타이지의 친위세력들은 서장자였던 호오거(豪格)를 지지하면서 갈라져 있었는데, 도르곤의 세력이었던 다이샨네 아들들이 몰래 도르곤을 제위에 올리려고 쿠데타를 모의하다 발각되자 도르곤이 앞장서 이들의 목을 날리며 손절하는등 분란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도르곤은 이에 홍타이지의 아들 중에서도 모계 혈통이 미천한 황자들은 제외해야 한다며 자신이 내세우던 고귀한 모계 혈통이라는 명분을 관철하면서 호오거의 대권 쟁취를 막는데에 집중했고, 덕분에 정실 5비 소생으로 살아있는 아들들 중 가장 많은 나이였던 푸린이 황제가 되었다.[10] 효장태후가 자기 친정의 이익을 추구한 걸로 보일진 몰라도 당시 남명잔당이나 삼번의 반란에 대비한 후방의 안전과 몽골의 칸위보장+군사력이 필요해서 한 정략결혼이다. 급사하여 혼인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도르곤 역시 이 방침에는 이의가 없었다.[11] 그래서 그런지 효혜장황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효강장황후나 전술한 효헌단경황후(동악비)는 자식이 있지만,(강희제, 화석영친왕) 이들은 사망 당시는 모두 후궁 신분이었다.[12] 앞서 홍타이지 사망 직후 팔기들과 황제 친위세력간의 내전을 막후에서 조정하던 사람이였이며, 순치제 사망쯤에 다음 후계자로 강희제를 세우는데 사실상 주도하던 사람이였으니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13] 궁쇄심옥,견환전,신 황제의 딸등으로 우리에 알려진 배우다.[14] 중국에서 태후 전문 배우로 불리기도 한다.[15] 우정(작가)의 페르소나였을 만큼 이때 이 작가의 작품에 다수 출연하였다. 지금은 작가의 작품에 출연하지 않는다.[16] 다른 배우들의 연기는 최고지만, 원산산의 어색한 울것같은 표정 연기도 감내해야 한다[17] 대옥아의 사촌동생[18] 이것도 모순인게, 치고박고 미운정고운정 다 든 사람인데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첫 번째 의문이고, 보자마자 바로 지 언니 아니라는 것도 알았으면서 왜 부유란으로 보지 못하는 지 그게 2번째 의문이다.[19] 해란주는 동궁 관저궁 신비인데, 서궁은 동궁보다 서열이 아래였다. 홍타이지가 해란주를 엄청 사랑한다는 대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