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혜공주

덤프버전 :






조선 중종의 왕녀
효혜공주 | 孝惠公主

출생
1511년 6월 23일(음력 5월 18일)
사망
1531년 5월 16일(음력 4월 20일)
(향년 20세)
묘소
고양 신원 원당면(高陽 新院 元堂面)[선원록]
본관
전주 이씨

옥하(玉荷[훈음])[선원록]
부모
부왕 중종
모후 장경왕후
부군
연성위 김희(延城尉 金禧)
자녀
슬하 1녀
딸 - 김선옥(金善玉)
봉호
효혜공주(孝惠公主)
1. 개요
2. 생애
3. 어린 시절
3.1. 혼인
3.2. 죽음
3.3. 사후
4. 가족관계
5.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공주.

조선 제11대 왕 중종과 계비 장경왕후의 적장녀.[1] 또한 인종동복누나이자 명종의 이복누나이다.

2. 생애[편집]



3. 어린 시절[편집]


1515년(중종 10) 공주는 나이 5세에 어머니 장경왕후를 여의었다.[2]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데다 유일한 친남매라는 공감대로 인종과 사이가 매우 돈독했으며, 연려실기술의 인종조 고사본말에서는 나중에 효혜공주가 죽자 인종은 너무 슬퍼하다 병을 얻을 정도였다고 한다.

3.1. 혼인[편집]


1520년(중종 15)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3]와 혼인하기로 결정되어 이듬해 11월 가례를 올렸다.부마가 된 김희는 연성위(延城尉)에 봉해졌다.

한편 딸을 사랑한 중종은 공주의 시아버지가 된 김안로에게 "공주가 떠받드는 속에서만 자라서 시부모를 존대하는 예를 모르니 부드럽게 타일러 달라."라고 말했는데, 쉽게 말하자면 '내 딸이 귀하게 자라 버릇 없겠지만 심하게 혼내지 말고 잘 달래라'라는 것이다.[4] -이거 사실상 협박이다-

가례를 올린 공주는 중종이 진성대군일 적 잠저에서 신혼생활을 하였다. 중종과 신하들 모두 효혜공주와 연성위의 집을 중종의 잠저라고 말하고 있다.[5]

3.2. 죽음[편집]


1528년(중종 23) 공주가 이질을 앓았는데, 중종이 이를 걱정해 대간의 반대를 부릅쓰고 문병하였다.

그로부터 3년 후 외동딸을 출산한 후 산후병으로 향년 21세로 사망했다.[6]

3.3. 사후[편집]


효혜공주는 슬하에 김선옥(善玉)이라는 딸 하나만 두었다. 이 딸은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과 혼인했다. 그런데 윤백원은 명종대에 이량 일파에 가담하여 사림을 제거하려다가 유배되는 사람이다. 그 이유가 아버지 윤원로를 죽게 만든 윤원형에게 복수하고자 권신이자 외척인 이량의 말 잘 듣는 장기말이 되었던 것. 이때 효혜공주의 하나밖에 없는 사위라고 문정왕후가 언서를 내려 가까운 곳으로 유배지를 옮겨주었다.[7]

사실 문정왕후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중종의 후궁들이나 자식들에게 야박하게 군 적은 없다.[8]

훗날인 1589년 효혜공주의 사위 윤백원이 의문사한다. 그의 첩 복이와 딸 윤개미치가 아버지/남편을 독살했다는 죄목으로 장을 맞다가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13년 후인 1602년, 윤개미치의 아들 이순이 상언하여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알고보니 진범은 윤백원의 아버지의 서자들(즉 윤백원의 이복동생들)이었고, 이들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죄를 전가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진실이 밝혀진 뒤 복이와 윤개미치는 뒤늦게 신원(伸冤) 및 복권되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비극. 그나마 진범들은 자신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당한 것과 완전히 똑같은 꼴을 그대로 되돌려받게 되었다.(출처: <조선의 명탐정들>)

4. 가족관계[편집]



  • 시부 : 김안로(金安老)(1481 ~ 1537)
  • 시모 : 인천 채씨(仁川 蔡氏) - 채수(蔡壽)의 딸

  • 남편 : 연성위 김희(延城尉 金禧)(? ~ 1531) - 김안로의 차남
    • 딸 : 김선옥(金善玉)(1531 ~ ?)
    • 사위 : 윤백원(尹百源(1528 ~ 1589) -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로의 아들
      • 외손녀 : 윤개미치(尹介未致)(1555 ~ 1589) - 아버지 윤백원을 독살했다는 모함을 받아 사망함.
      • 외손서 : 이홍원(李弘元)(1554 ~ 1586)

5. 대중매체에서[편집]


  • 주로 중종의 효성 깊은 딸이자 문정왕후의 호통에 움츠려드는 심약한 성품으로 그려지는데, 김안로가 권세를 휘두를 수 있게 해주는 원천이 되어준다. 남동생인 인종과 우애가 깊은 사이로 묘사되지만, 문정왕후가 김안로와 대립관계에 있는 탓에 갈굼을 많이 당한다. 또한 남편 김희와 함께 작서의 변에 가담하는 것으로 묘사되며[9] 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출산 중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 혼인 전 어린 소녀 시절의 모습으로, 아역이 맡아 출연했다. 공주가 여러 날 동안 식사를 거부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어 궁궐이 발칵 뒤집히는 에피소드다. 진실은 장마철 폭우에 잠겼던 미곡에서 미세한 잡내가 나는 것이 거슬려서 도저히 밥을 못 먹었다는 것. 어째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아버지도 군말 없이 드시는 수라를 어찌...(불평하겠느냐는 뜻)"라고 대답한다. 불평하는 것보다 왕녀가 밥을 거르는 게 더 큰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 인물. 아버지를 포함한 집안 어른들만 걱정시키고 수랏간 나인과 상궁들만 내리갈굼으로 고생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7 04:17:26에 나무위키 효혜공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선원록] A B #[훈음] 구슬 연꽃 [1] 적서를 통틀어서도 장녀이며, 중종이 장남 복성군 다음으로 본 둘째 자녀이다.[2] 이때 장경왕후는 아들 인종을 낳고 산후병을 얻어 25세 나이로 일찍 떠났는데, 딸인 효혜공주도 똑같이 산후병으로 25세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3] 실록에서는 몽룡(夢龍)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김희의 아명이거나 초명일 것이다. [4] 중종실록 43권, 중종 16년 11월 11일 기미 1번째기사. # [5] 중종실록 52권, 중종 19년 11월 4일 갑자 1번째기사. # [6] 중종실록 70권, 중종 26년 4월 20일 3번째 기사. # [7] 선옥은 태어나자마자 효혜공주가 죽어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문정왕후도 남동생 윤원로를 정계에서 축출하는 데 동의했을 테니,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이기도 한 윤백원과 자신의 의붓손녀인 선옥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8]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 창빈 안씨 등은 명종 대까지 궁중에서 살았고, 문정왕후의 행장에도 평상시에 왕자와 왕손들에게 두루 은전을 베풀었다고 쓰였다. [9] 다만 김안로 부자와 달리 효혜공주는 어디까지나 친동생 인종을 지켜주기 위해서 가담한다. 비록 인종이 중종의 적장자에 세자였으나, 총애 받는 어머니가 살아있는 복성군과 알게 모르게 신경전을 펼치는데다 입지가 불안해서 김안로의 권세에 의지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