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미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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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히토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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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황사[1]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秋篠宮文仁親王


출생
1965년 11월 30일 (58세)
도쿄도 치요다구 궁내청병원
미야고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
이름
후미히토(文仁)
어칭호
아야노미야(礼宮)
계승 서열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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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아키히토 상황
1933년 12월 23일 ~ (90세)
어머니 미치코 상황후
1934년 10월 20일 ~ (89세)
형제
나루히토 덴노
1960년 2월 23일 ~ (64세)
여동생 구로다 사야코
1969년 4월 18일 ~ (54세)
배우자
아내 키코 비
1966년 9월 11일 ~ (57세)
자녀
1남 2녀
장녀 코무로 마코
1991년 10월 23일 ~ (32세)
차녀 카코 내친왕
1994년 12월 29일 ~ (29세)
장남 히사히토 친왕
2006년 9월 6일 ~ (17세)
학력
가쿠슈인 유치원 (수료)
가쿠슈인 초등과 (졸업)
가쿠슈인 중등과 (졸업)
가쿠슈인 고등과 (졸업)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 학사)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동물학과 / 석사)[1]
종합연구대학원대학 (생명과학연구과 / 박사)
종교
신토
신체
178cm[2]


1. 개요
2. 어린 시절
3. 결혼과 가정
3.1. 황실 가계도
3.2. 자녀
4. 결혼 후의 행적들
4.1. 논문
4.2. 권력욕
4.3. 공무
5. 후미히토에 대한 평가
5.2. 정치적 행보 관련
5.3.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5.3.1. 2019년
5.3.2. 건강 문제
5.3.3. 후미히토에 대한 또 다른 관점
6. 여담
6.1. 외모
6.2. 한국에 대한 생각?
6.3. 큰딸 코무로 마코의 결혼 스캔들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아키시노노미야 문장.svg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의 문장
일본황사.

일본의 125대 천황 아키히토 상황과 미치코 상황후의 2남 1녀 중 차남이며, 126대 천황 나루히토의 친동생이다. 형 나루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한 2019년 5월 1일 부로 일본 황위 계승 서열 1위로 미야고(궁호)는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이다.

어칭호(御稱号)는 아야노미야(礼宮). 미야고는 황실의 옛 땅인 야마토 북서부의 아키시노(秋篠)에서 유래했다. 일본 황실로부터 받은 오시루시(お印)[2]솔송나무.

아내 키코 비와의 사이에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히사히토 친왕을 두고 있다. 후미히토에게는 유일한 아들, 아키히토 상황에게 있어 유일한 손자이자 다음 황위를 계승하여야 할 남자 황족인 히사히토 친왕은 일본 황실에 40여 년 만에 태어난 황위 계승자로 주목을 받으면서 태어날 때부터 황태손(皇太孫)과 다름없는 취급을 해주었다.

뉴스 등의 언론 보도에서는 '후미히토'라고 불리는 일은 거의 없고 보통 아키시노노미야사마(秋篠宮さま)로 불린다.[3]

2017년 6월 9일 아키히토 천황의 '천황의 퇴위 등에 관한 황실전범 특례법'(天皇の退位等に関する皇室典範特例法)이 국회의 입법절차를 모두 거쳐 법률로서 성립되었고, 부칙을 비롯한 부속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동년 6월 13일부터 시행되었다.

후미히토 친왕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황태자 나루히토 친왕의 천황 즉위 이후 후미히토 친왕에게 '황사(皇嗣)'라는 호칭이 새로이 부여되며, 존칭은 전하가 된다.[4][5] 이 '황사(皇嗣)'란 단어에서 사(嗣)는 '차기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는 사람'이란 뜻이다.[6] 따라서 후미히토가 '황사' 칭호를 받음은 실질적으로 황태제가 되는 셈.[7] 2020년 11월 8일에 정식으로 황사에 책봉함을 알리는 릿코시 선포식(立皇嗣宣明の儀)을 치뤘다. #1 #2 #3 한국 언론에서는 '황사'라는 호칭을 번역하기 애매했는지 그냥 심플하게 왕세제(王世弟)라고 부른다.

새 천황 즉위 이후 거처는 원칙대로라면, 후미히토 일가는 그동안 형인 나루히토 일가가 지내던 아카사카 어소에 지내야 한다. 하지만 이곳은 상황/상황후가 되는 아키히토 내외의 거처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후미히토 일가는 현 저택을 개보수해서 그곳에서 계속 지낼 예정이며[8] 아카사카 어소에 지내는 아버지 아키히토 상황과 어머니 미치코 상황후가 사망한 다음에서야 후미히토 가족은 비로소 아카사카 어소로 들어갈 수 있다.

2. 어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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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昭和40年), 차남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을 낳고 궁내청 병원에서 퇴원하는 아키히토 황태자 부부. 후미히토가 태어났을 당시 병원을 방문하는 가족들.

파일:external/userdisk.webry.biglobe.ne.jp/142381947495430518178.jpg
1965년 명명 의식. 좌측 걸려있는 종이 위에 한자가타카나로 쓰여진 붓글씨가 칭호(아야노미야)와 이름(후미히토)이다. 명명 의식 영상

파일:external/blog-imgs-80.fc2.com/20150731200831692.jpg
1965년 12월, 당시 황태자비였던 어머니 미치코 상황후와 함께.

파일:2214463A-63CF-4979-8009-1A708F1F966B.jpg
과는 다르게 어릴 적부터 장난기가 가득했다. 첫 번째 사진 가운데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사람이, 당시 황태자였던 아버지 아키히토 상황. 오른편의 노부부는 할아버지 쇼와 덴노와 할머니 고준 황후이다.

파일:후미히토와 가족들.jpg
후미히토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 미치코 상황후가 한 차례 유산[9]을 했던 터라 상당한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 한동안 외동으로 자랐던 5살 위의 형 나루히토 덴노도 후미히토 친왕을 엄청 귀여워했으며, 어린시절 두 사람은 같은 방을 썼다.

본래 일본 황실의 자녀들은 친부모의 품에서 떨어져 시종들에 의해 양육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평민 출신 비(妃)'로 화제를 모았던 미치코 상황후는 2남 1녀를 모두 자신의 품에서 손수 키웠다. 그녀는 미국인 소아과 의사 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저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10]영어 원서로 읽고 육아에 대해 공부하여 '나루[11] 짱 헌법(ナルちゃん憲法)'이라는 육아 지침을 세웠고, 이 지침에 따라 아이들을 양육했다. 공무 때문에 시종에게 아이들을 맡길 때도, '나루 짱 헌법'의 내용대로 돌보도록 부탁했다. 훗날 후미히토의 아내가 된 키코 비임신했을 때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를 읽었고, 후미히토 내외의 두 딸 마코 공주카코 공주도 '나루 짱 헌법'에 따라 양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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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어머니 미치코 황태자비, 형 나루히토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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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당시 부모가 공무(公務) 때문에 해외로 떠나자 형 나루히토에게 안겨서 울고 있는 모습.[12] 사실 어린시절의 후미히토는 눈물이 많고 부모님에게 애착이 대단한 성격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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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황궁 후키아게오미야 고쇼(吹上大宮御所)에서 아버지 아키히토 황태자, 어머니 미치코 황태자비와 함께. 뒤에 서 있는 키 큰 남자가 영국찰스 3세이다.

파일:external/blog-imgs-71.fc2.com/739300e118891e685edd693b1cd52164.png
작은할머니[13]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14]에게 전통 서예를 배우는 후미히토.

아키히토 덴노의 숙모인 키쿠코 비는 자녀를 낳지 못해, 조카 아키히토 덴노의 자녀들을 손주처럼 귀여워하며 애정을 쏟았다. 키쿠코 비는 어린 시절에 배운 서예 기법인 '아리스가와 류 서도'[15]를 후미히토 친왕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어린 후미히토 친왕은 교본에 없는 글자를 묻는 등 키쿠코 비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하였지만, 이를 통해 작은할머니와 조카손자가 더욱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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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4월, 어머니 미치코 황태자비, 여동생 사야코 공주와 함께. 당시 후미히토는 가쿠슈인 중등과 2학년, 사야코 공주는 초등과 4학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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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 사야코 공주와 함께. 큰오빠 나루히토와는 터울이 많이 져서 그런지, 사야코 공주는 작은오빠인 후미히토와 더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자주 나왔다. 함께 등교하거나, 황궁에서 황실 가족사진과 영상을 촬영할 때도 사야코 옆에 꼭 붙어있는 등, 5살 아래의 여동생을 무척이나 예뻐했다.

파일:나루히토와 후미히토의 모습.jpg
형 나루히토와 함께.

가쿠슈인 유치원, 초등과, 중등과(남중), 고등과(남고)를 거쳐 1984년 4월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다. 못 하는 게 없는 우등생이었던 어머니, 형 나루히토 친왕, 여동생 사야코 공주와 달리, 후미히토 친왕은 학창 시절 공부를 상당히 못했다고 전해진다. 세간에서는 그래서 '멍청한 아야'[16]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레전드 오브 부정입학: 더 비기닝 심지어, 1984년도 가쿠슈인대학 입시에서는 후미히토 친왕의 점수가 커트라인이 되어 그해 신입생 수가 많았다고 하는 카더라도 있다.

대학 시절에도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정말 많았다. 첫 수업에서 교수가 '나는 황족이라도 안 봐준다.'고 선언하자마자, 그날로 그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또한 후미히토와 같은 시기(1984-1988)에 가쿠슈인대학에 다닌 학생들은, 당시 후미히토가 듣는 수업이 무엇인지 알아내서 같이 수업을 들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 이유는, 후미히토가 듣는 수업은 후미히토의 성적을 낙제 기준으로 잡기 때문. 그래서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 '후미히토가 듣는 수업이라면, 대충 듣고 공부해도 F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소문들이 파다하게 퍼졌을 정도였다. 참고로 훗날 태어난 후미히토 친왕의 자녀들도, 아버지를 제대로 닮았는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같이 공부를 잘 못한다.

가쿠슈인대학 졸업 후 영국옥스퍼드 대학교유학을 갔고, 1996년 조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류 외에 메기도 연구했다.[17] 그리하여 '메기 전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메기와의 인연이 꽤나 깊어(?), 약혼 반지를 메기 모양으로 맞추기도 했다.(반지의 소재는 백금) 이 때문에 후미히토를 우회적으로 디스할 때 '메기 전하'라는 말이 많이 사용된다. 후미히토 일가 관련 기사에 대한 댓글을 보면 ナマズ(鯰)라는 단어가 상당히 자주 보이는데, 일본어로 '메기'를 의미하는 말이다.


3. 결혼과 가정[편집]


파일:attachment/후미히토/kiki1.jpg

파일:external/www.jiji.com/aki211-31-jpp04626619.jpg

1990년 6월 29일, 가쿠슈인대학 1년 후배인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것은 키코가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심리학과에 입학한 1985년 봄이라고 한다. 대학 내의 서점 세이분도(成文堂)에 자주 드나들다가 여기서 만나 알게 되어 동아리 활동 등을 함께 하며 사귀기 시작했고, 후미히토가 20살의 키코에게 청혼했다고. 키코는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며 거절하였고, 어머니 미치코 황후도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키코가 23살이 되었을 때 '결혼시켜 주지 않으면 집을 나가겠다.', '친왕(황족)의 지위를 포기하고 키코와 영국으로 가겠다.'고 했다고 한다.[18]

파일:external/livedoor.sp.blogimg.jp/345a0cba.jpg
결혼 초의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 뒷편의 집은 후미히토의 셋째 고모 다카쓰카사 가즈코가 살던 집이다. 카즈코는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과부가 된 후 친정인 황실로 돌아와 이세 신궁신관 일을 하며 조용히 살다가, 1989년경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이 집에서 두 사람은 둘째 카코 공주까지 낳아서 현 저택(구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저택)으로 이전하였는데, 2019년 2월부터 약 10억엔 가량을 투입하여 이 저택 자리에 임시거처를 지어서 현 저택 개보수가 끝나는 약 3년 정도 지낼 예정이다.


파일:external/dcf12a56adae7760b5ae93a3050dabd0b03f7c1f0b643b6b3b99bd91c1f7dd74.jpg

1997년의 아키시노노미야 일가.
당시 이 둘은 대학에서 캠퍼스 커플로 만나 동아리 활동 등을 함께 하며 꽤 오랫동안 교제한 사이로, 원래는 나루히토 황태자가 결혼한 다음에 차차 결혼할 생각이었다.[19]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나루히토 황태자의 혼사 문제가 빨리 해결되지 않았다. 당시 미치코 황후가 시어머니 나가코 태후 및 구 황족/화족들에게 얻어터지며 온갖 시집살이를 당한 것은, 일본 전 국민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황태자비 후보에 오른 여성들은 죄다 날치기 결혼을 하거나 외국으로 뜨는 바람에, 황실은 황태자비 간택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거기다 나루히토 황태자부터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길 원했는데, 하필이면 나루히토가 사랑하는 여자인 오와다 마사코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외국에서 자란, 능력 있는 진취적인 커리어우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사코는 나루히토의 청혼을 거절하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도피성 해외연수를 떠났다. 나루히토는 마사코를 잊어 보려고 가쿠슈인 출신 한 여자와 진지하게 만났지만, 궁내청의 심사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결국 오와다 마사코를 잊지 못해 사이도 흐지부지되었다.(…) 그렇게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는, 무려 7년에 걸쳐 청혼-거절 테크를 무한 반복하는 중이었다.

결국 참다 못한 후미히토 친왕은 가와시마 키코에게 청혼했다. 청혼한 장소가 가쿠슈인대학 근처 횡단보도의 신호등 아래여서 일명 '신호등 아래의 청혼'이라는 이야기로 화제가 되었고, 문제의 그 장소도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3.1. 황실 가계도[편집]



파일:일본 황실.svg 다이쇼 덴노
(1879년~1926년)







파일:일본 황실.svg 쇼와 덴노
(1901년~1989년)







히가시쿠니 시게코
(1925년~1961년)





         





         



  ╟─










  ╟─

























데이메이 황후
(1884년~1951년)






고준 황후
(1903년~2000년)










































         






















































친왕비 세츠코
(1909년~1995년)






         
















































다카쓰카사 가즈코
(1929년~1989년)











































친왕비 키쿠코
(1911년~2004년)






다카쓰카사 도시미치
(1923년~1966년)









































         







이케다 아츠코
(1931년 출생)














































이케다 다카마사
(1926년~2012년)














































파일:일본 황실.svg 상황 아키히토
(1933년 출생)







파일:일본 황실.svg 천황 나루히토
(1960년 출생)























  ╟─










  ╟─




















상황후 미치코
(1934년 출생)






황후 마사코
(1963년 출생)
























































코무로 마코
(1991년 출생)

























  ╟─





















친왕비 하나코
(1940년 출생)






황사비 키코
(1966년 출생)






코무로 케이
(1991년 출생)










































시마즈 타카코
(1939년 출생)







구로다 사야코
(1969년 출생)







카코 내친왕
(1994년 출생)








































시마즈 히사나가
(1934년 출생)





구로다 요시키
(1965년 출생)














































고노에 야스코
(1944년 출생)










히사히토 친왕
(2006년 출생)









  ╟─




























친왕비 유리코
(1923년 출생)






고노에 다다테루
(1939년 출생)


















































아키코 여왕
(1981년 출생)



















  ╟─

























친왕비 노부코
(1955년 출생)




















































요코 여왕
(1983년 출생)


















































































센 마사코
(1951년 출생)












































센 소시츠
(1956년 출생)


















































쓰구코 여왕
(1986년 출생)


















  ╟─
























친왕비 히사코
(1953년 출생)
















































센게 노리코
(1988년 출생)












































센게 구니마로
(1973년 출생)












































모리야 아야코
(1990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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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야 케이
(1985년 출생)







3.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1녀
코무로 마코
(小室眞子)
1991년 10월 23일 (32세)
2녀
카코 내친왕
(佳子内親王)
1994년 12월 29일 (29세)
1남
히사히토 친왕
(悠仁親王)
2006년 9월 6일 (17세)

파일:8DECD16A-DB87-4453-81EB-F4A2882257F3.jpg

파일:FF50B08A-E216-4262-B824-A16F998447AF.jpg


4. 결혼 후의 행적들[편집]



4.1. 논문[편집]


2008년에는 아버지 아키히토와 공동 저작으로 사이좋게 논문을 냈다.# 저자 목록을 살펴보면 "아키히토, A. 후미히토 등"(Akihito, A. Fumihito et al.)이라고 적었는데, 일본 황실은 성(姓)이 없어서 천황은 '이름'만 올렸고, 후미히토 친왕은 후미히토를 성으로, 미야고인 '아키시노노미야'를 이름으로 등재했다. 대개 황족이 황적에서 이탈할 때는 미야고에서 성을 따오는데[20], 그렇게 할 경우 저자 검색에서 '후미히토'가 아닌 '아키시노노미야' 쪽이 노출되기 때문에 더 자주 사용되는 후미히토를 성으로 등재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저자 주소는 Imperial Residence(皇居: 일본 황거).


4.2. 권력욕[편집]


히사히토 출산 이전에는 나루히토와는 열등감은 있어서 친후미히토 궁내청 지지가 있었음에도 형을 몰아내기에는 권력구도가 매우 안 좋았다. 일본 제125대 천황 아키히토의 유일한 손자인 히사히토 탄생 이후 황실 내부의 권력(입김)구도가 크게 달라졌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차남이라 존재감이 미미하던 후미히토 친왕이 아들 히사히토 및 언론계의 영향력[21] 등을 등에 업고 "친형이 장자를 낳지 못한 상태에 이대로 친형 나루히토가 황위를 이으면 후계문제가 복잡해진다"며 강력한 발언권 온갖 큰일날 소리 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 이후 아키히토의 건강 악화로 황실이 혼란스럽자, 히사히토 친왕의 아버지이자 황위 계승 서열 2위인 후미히토 친왕의 입장은 형인 나루히토 황태자를 몰아 붙이기에 충분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2001년 12월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은 뒤부터 시부모 천황 부부에게 노골적으로 박대당해 '다시 임신해서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사실상 강제적인 유폐생활을 겪었고,이러한 것에 의하여 온 우울증 등으로 9년간 대부분의 공무에서 배제되었다.[22] 이 일로 황태자 부부와 천황 부부의 사이는 소원해져 꽤 멀어졌지만, 차남인 후미히토 부부는 황태자 부부에 비하면 그런 책임이 적었고 예전부터 천황 부부와 종종 친했으며 이후 2006년에 히사히토 친왕을 출산하면서 더더욱 친해지게 된다. 후미히토 부부가 궁내청과 친밀했던 것도 있고, 키코 비가 황족/화족 전용 학교였던 가쿠슈인 출신에 시부모에게 사근사근하게 잘 하는 스타일 덕분이기도 했다. 여기에 차남 부부가 아들을 낳아 후계자 문제를 풀었으므로, '심해졌다.'고 표현할 정도로 황태자 부부를 제치고 천황 부부의 차남 부부에 대한 총애(편애)가 당연히 더 심해졌다.

그는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난 후로 공공연하게 형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적대감과 열등감, 불편한 기색들을 드러냈다.[23] 이렇게 후미히토 일가에서 대놓고 적대하니 자연스럽게 황태자 부부는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행사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는 나루히토 황태자와 후미히토 친왕 사이의 갈등이 그만큼 심각함을 반증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후미히토의 '천황 정년론'의 주장. 일단은 건강이 나쁜 아버지 아키히토를 고려한 효심의 발언 같지만, 차기인 형 나루히토도 겨누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죽하면 당시 '아키히토 천황이 사망하면 일본 황실에서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심각한 내분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상까지 있었다. 아키히토가 생전 퇴위를 하고 덴노 자리를 나루히토에게 물려주는 바람에 별 일은 없었지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루히토 황태자와 후미히토 친왕은 5살 차로[24] 나이 차가 적어서, 실제 '정년제(天皇定年制)'를 시행하면 후미히토도 천황으로서 재위를 최대 5년까지밖에 못한다. 물론 본인이 이를 몰랐을리는 없고, 정년제의 목적은 형 나루히토 가계로 덴노 자리가 이어지는 것을 막고 자신의 아들인 히사히토에게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함으로 풀이할 수 있다. 자신은 얼마 못해도 아들인 히사히토는 오래할 수 있기 때문.

이렇게 입김이 세지자 후미히토 친왕은 2011년 말부터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긴 한데 '아버지를 위해서'라며 '천황 정년제' 주장을 한다거나, 형 나루히토 황태자를 비판하거나 몰아붙이는 발언을 자주 꺼낸다.[25] 그 때문에 '아키히토 천황이 사망하거나 퇴위한 이후에 일본판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다. 나루히토 황태자가 황위를 이을 법적아들이 없는 이상, 나루히토 황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한 뒤에는 후미히토 친왕이 다음 황위 계승 1순위가 되기 때문이다.

2013년 3월에 일본의 한 종교학자가 '황실을 위하여 나루히토 황태자가 퇴위하라!'는 주장을 했다.# 명목상 개인의 의견이라지만, 일본에선 황실을 대상으로 의견을 내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게 절대로 한 개인만의 의견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이 가쿠슈인 초등과 시절부터 공개[26]되면서, 그동안 주간지 등을 중심으로 황태자 내외를 공격하기 위한 소재로 퍼트렸던 아이코 공주의 자폐설 같은 허위사실에 근거한 소문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에 비해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후미히토 본인뿐만 아니라[27] 아내 키코 비(오차노미즈여자대학 박사학위),[28] 큰딸 마코 공주와 작은딸 카코 공주까지 대학 입학 정당성 논란이 있었던 만큼[29] 유서 깊은 부정입학 공부 못하기로 유명한 집안이니, 일본 여론은 차츰 바뀌어 여자천황제를 도입하자는 여론도 생기며 히사히토의 황위 계승 확률이 반반(50:50)으로 나뉘어졌다.

이렇게 후미히토가 자꾸 황위계승 구도를 어지럽히려 들고 궁내청도 후미히토를 밀어 황실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모습에 이를 보기만 하던 아키히토는 결국 고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직무 수행을 못 한다는 명분으로 생전 퇴위 발표해버린다. 사실상 장남 나루히토 황태자를 차기 후계자로 임명하는 것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후계문제를 종결시켜버렸다. 후미히토는 나름 총애를 받았고 친하다 생각했던 부모에게 뒤통수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후미히토의 시련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키히토 상황 부부가 잠시 공무 때문에 자리를 비운 사이 장녀 마코 공주가 코무로 케이와 약혼을 선언하면서 아키히토 상황 부부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파탄났다.[30] 게다가 코무로 케이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아짐에도 아무런 소리를 못 하거나 내심 동의하는 듯한 어쩡쩡한 태도로 인해 이때부터 후미히토의 여론은 더욱더 나락으로 가기 시작한다.

2018년 11월 30일, 자신의 53번째 생일기념 기자회견에서, 황위 계승 행사 예산 문제에 대해 국비로 쓰는 것에 비판을 내놓았다.# 이에 대한 궁내청일본 정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이와 관련 야마모토 신이치로(山本信一郎) 궁내청 장관은 '이미 결정된 방침(국비로 집행)에 따라 준비해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에 맞춰 준비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의 발언에 대해서는 '그런 의견을 갖고 있다고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돌려 말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내각관방장관을 대신해 30일 오전 정례 기자회견을 맡은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康稔) 일본 내각관방 부장관은 '전례에 따라 공적예산에서 지출한다고 각료회의에서 결정됐다.'며 유지한다고 밝혔다. 후미히토 친왕의 발언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으로서의 생각을 이야기한 것으로, 국정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현행 일본국 헌법상의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하였다.

황족이 정부의 일에 간섭하는 발언을 한 것은 쇼와 덴노의 인간선언 이후 이례적이다. 그러나 후미히토는 예전에도 '천황 정년제를 시행하자.'고 말한 적이 있었다. 천황 정년제 발언은 '나도 천황이 되고 싶다.'는 야심을 거의 직접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후미히토가 황실의 유일한 후계자(아들)를 얻은 뒤 궁내청, 우익, 주간지와 함께 나루히토 황태자 일가를 줄기차게 깎아내리고 무시했던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번 발언도 형이자 2019년 5월 천황이 되는 나루히토를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다. 기사에서 말하는 황위 계승 행사는 나루히토의 즉위식을 말한다. 즉, 형의 즉위식에 쓰이는 예산의 출처를 물고 늘어지는 것으로, '형이 천황이 되는 것이 싫다!'는 속내를 대놓고 드러낸 것이다.

한편 이번 일은 후미히토가 앞으로 형의 일에 협조를 안 하고 방해만 하는 미래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즉위식이 앞으로 반 년도 남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찬물을 끼얹으려고 하니(…) 단순히 눈에 띄고 싶어하는 돌출행동이라고 보기에는 타이밍이 좋다. 그리고 일본 포털의 해당 기사 댓글난은 '니 딸 간수나 잘해라', '마코 공주와 코무로 케이의 결혼식에 드는 비용이 더 아깝다' 는 내용 등으로 가득 찼다.[31]

그리고 한 주간지에서는 궁내청 관계자가 현재 후미히토 일가 저택 리모델링 비용 수 백억엔[32]이나 마코 공주 관련 비용 등을 언급[33]하면서 우회적으로 후미히토의 해당 발언을 돌려 비판하기도 했다.

아들 히사히토의 왕위 계승을 위해 먼저 황태자 내외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아내 키코 비와 참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34][35]

2019년 1월 22일, 자신의 친딸 마코 공주의 약혼남 코무로 케이의 성의없는 A4용지 1장 분량의 사과문을 가장한 변명문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이후 황실 특권과 특혜에 대한 비판이 들끓는 가운데 여전히 공식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 국민들은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 후미히토와 마코 공주를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 부녀'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2019년 4월 15일, 그동안 사이가 안 좋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해 온 큰딸 마코 공주와 함께 도쿄국립박물관 특별전에 참석하였다. 그곳에서 2018년 11월에 자신의 생일 기념회견에서 물의를 일으킨 천황 즉위행사들 중 대상제(大嘗祭)[36]에 사용된 물품을 보면서 감탄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지만, 이러한 행동도 천황직위에 대한 욕구로 여겨져 이에 대해서 일본인들의 반발 여론은 상당히 강하다.

즉위식도 코 앞인 2019년 4월 21일 아사히 신문과 대담하는 자리에서 '형 나루히토가 80세가 되면 나는 70대 후반이 되고, 그때부터는 안 된다.'고 말하며 황위 욕심을 계속해서 드러내며 일본 국민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시간을 끌기만 하고 있는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도 않는 주제에 여전히 천황 자리에 욕심이 있다는 뜻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르다. 후미히토는 2019년 들어 음주하는 빈도나 강도가 강해지고 있으며, 종종 측근에게 부탁해서 항불안제 등을 먹는 경우도 있다는 등[37], 앞으로 건강 면에서 적신호가 켜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를 감안해서[38] 자신의 즉위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아들인 히사히토에게 천황 자리를 넘겨주겠다는 소릴 미리 하여 주변인들에게 준비하라는 신호를 주는 동시에, 형 나루히토가 천황 즉위 후 딸 아이코 공주에 대한 여성 천황제 용인 등을 실시할 가능성에 대한 견제구를 간접적으로 날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진짜 의중이 뭐였든간에 해당 기사에 대한 평은 후미히토가 '벌써부터 친아들인 히사히토의 즉위를 확정으로 받아들이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반응이 압도적.

2019년 5월 1일 나루히토 천황의 즉위식에서 역대급 짤방이 나왔다.(…)#[39]

2019년 10월 22일 나루히토 천황이 공식적으로 즉위할 때 또 한번 역대급 장면이 또 나왔다(...)# 고개를 숙이지 않고 눈에 독을 품고 천황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영상이 나왔다는 점에서 또 한번 거하게 욕을 먹을듯 하다.[40] 그냥, 대놓고 천황직 제발 양위해달라고 징징거리는 게 더 먹힐 듯 가 생각난다.

마코와 코무로 케이의 결혼소동으로 연일 논란을 앓고 여론도 안 좋아지는 가운데 대외활동을 이전과는 달리 점차 줄이고 있다.


4.3. 공무[편집]


2013 일본 도쿄국제도서전 개최 첫날인 7월 3일, 예고도 없이 한국관에 들러서 박경리토지 일본어판을 읽었다.

2015년에는 작은딸 카코 공주와 함께 공무에 자주 나왔다. 가끔 키코 비와 히사히토와 나오기도 했다.

2016년에도 공무에 나오는데, 당시 키코 비를 폭행한다거나 자녀교육 문제로 인해 쇼윈도 부부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키코 비가 하녀처럼 우산을 들어주고 있다.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터진 이후에도 그 전과 동일하게 활발하게 공무에 참여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반응은 예전과 달리 상상 이상으로 싸늘하다. 후미히토도 이를 아는지, 속으로는 앓으면서도 계속 공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대망의 2019년 5월 1일 공개된 모든 공무 관련 영상과 사진에서는, 정신줄을 놓았는지 멍 때리는 모습이 자주 보이고 있다. 특히 레이와 시대 첫 국빈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내외를 맞이한 연회에서도, 바로 옆에 앉은 미국 영부인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와 일절 대화하지 않고, 멜라니아 여사와 반대방향을 시선을 두고 멍 때리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 내외를 상대로 활달하게 대화해서 외신들의 호평을 받은 형 나루히토 덴노, 형수 마사코 황후와 비교된다.[41] 후미히토는 본인의 말처럼 제왕학을 일절 배우지 않은 티가 확 나는 듯하다. '일반 공무 때는 그나마 이해하겠지만, 국빈을 모신 중요한 자리에서도 저러는 건 황족으로서 자격 실격이다.'는 등 비난을 받았다.[42]

2019년 6월 11일, 궁내청은 "후미히토 내외와 히사히토가 2019년 8월 말부터 10일간 부탄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많은 일본 네티즌들은 비판했다. "마코 공주로 인한 집안 문제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는데 또 해외에 세금 낭비하러 간다", "그럴거면 황실에서 나가라"는 등등, 현실적으론 불가능하지만 상당히 과격한 주장도 내놓았다.

2019년 6월 말, 후미히토는 아내 키코 비와 함께 유럽으로 해외 공무를 떠났다. 황태자에 준하는 지위인 '황사'가 되었기에, 당연히 B777 일본정부전용기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후미히토는 전세기편으로 이동했고, 여기에 대해서도 욕을 먹었다. "후미히토가 제왕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전용기를 탈 수 있는데도 쓸데없는 짓을 하여, 일반인들과 항공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며, 일본 내각 일부에서도 볼멘 소리가 나왔다. 궁내청 관계자 중에는 "정식 수장도 아닌 황족이 전용기를 타고 상대 국가로 가면, 그게 오히려 민폐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는 사람도 있었지만, 궁내청 다수의 의견은 "전세기편으로 이동하면 일반인들만 불편하게 만든다. 전용기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희망했다고 한다. 어찌보면 '황사의 소탈한 행보'로 미화될 수도 있는 행동인데 오히려 민폐로 찍힌 것을 보면, 평소 행실 때문에 제대로 밉보인 측면이 이런 세간의 평가에도 반영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당초 예정했던 대로, '전세기편 이용'이라는 후미히토의 선택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유럽 공무 중에 2번씩이나 결항이 되었고, 그 때문에 면담 시간이 단축되고 의전 인원들도 오래 대기하게 되는 등, 상대국에 불편을 끼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후미히토에게는 황족관(皇族觀) 자체가 없는 거 아니냐"면서 더더욱 비난 여론이 강화되었다. 그러한 여론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미히토는 부탄 방문에 민간기 2대를 이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키코 비와 히사히토는 후미히토와는 다른 비행기를 탈 예정[43]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대놓고 자기 멋대로 세금을 낭비하겠다는 선언이냐"면서, 가뜩이나 안 좋은 여론이 더 들끓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공식 방문 이후, 일본 언론들은 나루히토 덴노 내외의 공무 비중보다 후미히토 일가의 공무를 더 많이 보도했다. 일본 네티즌들은 "지금 천황이 후미히토냐", "반(反) 후미히토 여론을 무마하고 형 나루히토 내외의 활약을 방해하기 위하여, 후미히토가 자신과 친한 언론인들을 총 동원해서 이러한 것을 하는 걸로 보인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2019년 8월의 부탄 방문에도 문제가 있었다. 우선 일본 국민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굳이 어린(중1) 히사히토까지 데리고 해외 공무를 떠났다. 또한 사적인 해외 방문이라 해도, 외무성과 궁내청을 통하여 상대국과 일정 조정을 해야 한다. 그런데 후미히토는, 원래 부탄 방문에 동행하기로 되어 있던 황사직 궁무원(경찰 출신)을 제외시켜 버렸다. 자신이 잘 아는 학자에게 부탄 방문 관련 업무를 전부 맡기기 위하여 그랬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탄 방문에 궁무원 어느 누구도 따라가지 않았다.

후미히토의 무리한 고집 때문에, 부탄은 후미히토 일가를 맞이한 바로 다음 날에 인도 총리의 방문을 치러야 했다. 이것을 알게 된 일본 외무성은 일정 조정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끝내 실패했고, 일본 정부는 부탄에 상당한 부담을 끼치게 되었다. 이러한 후미히토 일가의 행태에 대해 외무성에서는 반발이 강해졌고, 후미히토는 궁무원을 해고하는 것으로 안 좋은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했다.

2020 도쿄 올림픽 폐회식에 형인 나루히토를 대신해서 황사 자격으로 참석했다.[44]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키코 비는 참석하지 않았다.# 일본 네티즌들은 '무관중이라서 야유를 못 받는 게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거기다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에게 대놓고 무시당하는 장면까지 포착되어 버렸다.

2022년 이후부터 그동안 코로나로 최대한 자중하던 황실이 본격적으로 공무에 돌입하자 후미히토와 가까운 언론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며칠 단위로 일가를 총동원해서 (보여주기식) 공무들을 했다는 보도들을 하루가 멀다하고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일본 대중의 반응은 싸늘하며 오히려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공무 중 논란과 의혹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후미히토 일가가 저택 수리비로 지진으로 무너진 성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비용이나 신 덴노 즉위에 따른 황거의 리모델링 비용[45]보다 더 많은 비용인 최소 50억엔 이상[46]을 투자한 것으로도 모자라 키코 비는 리모델링 책임자에게 접견실 전체를 금칠하라거나 이탈리아산 고급 대리석을 쓰라는 등 사치향락에 눈이 멀어서 온갖 난리를 피웠다는 보도들이 주기적으로 나왔고,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고자 노력하는 대신 주특기인 언론 플레이를 통해 얼렁뚱땅 해결하고자 저택 리모델링 종료 후 평범해보이는 곳들 위주로 일부 공개했으나 하필이면 일본 정부에서 세금 증액을 대놓고 주장[47]하여 더더욱 논란이 확산되는 시기에 이걸 공개함에 따라서 많은 국민들의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동안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대한 일반대중의 부정적인 인식을 촉발시킨 딸 코무로 마코와 사위 코무로 케이에 대한 여론도 마찬가지로 나쁘며, 코무로 케이가 3수만에 겨우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부를 비롯한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해소되지 않고 더더욱 커지고 있다. 코무로 케이 본인과 가족 모두 여러 의혹이 있었고, 애초에 이런 논란은 '케이가 결국 뉴욕 변호사 자격을 땄다'만으로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2022년 11월, 후미히토 일가에 대해 갑자기 시작된 언론들의 과잉 옹호 보도들과 더불어 11월 30일 본인의 생일 인터뷰에서 코무로 마코 부부에 대한 질문을 거부하고 우회적으로 언론 통제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등의 와중에 12월 3일 토요일에 열린 도내 모 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행사를 굳이 해당 학교와는 하등 관련 없는 후미히토 부부가 참석하고 이걸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48] 하면서 가뜩이나 부정적인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평가가 더욱 안 좋게 바뀌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어서 그동안 후미히토를 호의적으로 보던 극우들조차도 그냥 공무를 최대한 자제하는 게 안정적인 황위 계승에 도움이 될 거라는 투의 발언들이 나오고 있다.

5월 6일 열리는 영국 찰스 3세 국왕 대관식에 나루히토 덴노 부부가 불참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부인 키코 비와 함께 일본 황실 대표로 영국을 방문한다.

5. 후미히토에 대한 평가[편집]



5.1. 일본 황실[편집]


일본 사회 내부뿐만 아니라 과거 일제의 피해국이었던 한국중국에서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애처가 형 나루히토 천황[49]과 달리, 후미히토는 평이 많이 안좋은 편이다.

우선, 일본극우주의자 및 국수주의자와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인물로 상당기간 알려졌다. 게다가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났기 때문에 황태자 부부의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의 여성 천황 즉위가 사실상 물건너가면서, 더더욱 평이 나빠졌다. 게다가 마사코 황태자비의 안타까운 삶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아이코 공주는 황태자 부부가 천신만고 끝에 낳은 친딸이라는 점이 더욱 부각되기 때문에, 당연히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그런 이유로도 자연스럽게 그의 아버지인 후미히토 친왕을 나쁘게 생각한다.

공식적으로는 가쿠슈인 대학에서 키코 비를 만나 교제하다가 결혼한 과정이 아름답게 선전되어 왔지만, 사실 키코 비와 함께 활동했다는 동아리는 후미히토 친왕의 하렘이었다는(…) 루머까지 떠돌 정도. 후미히토 친왕은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보면 친구 등 주변인을 시켜 그 여학생을 동아리에 가입하게 했는데, 그런 데리고 놀던 여러 여학생들 중 끝까지 후미히토 친왕의 곁에 남은 사람이 가와시마 키코였다는 것이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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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히토 친왕의 장인어른인 가와시마 타츠히코 교수. 시집가기 전의 딸 가와시마 키코와 함께. 타츠히코 교수는 미국유럽에서 오랜 기간 유학을 해서인지 성격이 매우 괄괄하고 꼿꼿하다고. 1996년 무렵 사위 후미히토 친왕이 어느 태국인 여성과 스캔들이 터졌을 때, 황거로 찾아가서 사돈 아키히토 덴노와 협상 담판을 지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들 하나 잘못 키운 죄로 사돈 앞에서 여러 번 면목이 없어진다.

심지어 이미 고등학생 시절에 키코를 알았다는 말도 있다. 가쿠슈인 고등과 시절 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후미히토 친왕은 인근 명문 여고 몇 군데에 "예쁜 여학생들의 사진을 달라"고 요구했고, 다른 학교들은 모두 거절했으나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만은 그 요구에 응하여 몇몇 여학생들의 사진을 제출했는데, 그 중에 가와시마 키코의 사진도 있었다는 것.

2003년 키코 비, 마코 공주, 카코 공주와 함께 간 태국 순방[51]에서까지 그 태국인 여성을 만났다고도 한다. 키코 비는 그것을 알면서도, 순방 내내 참으며 공식 석상에서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야 했다고. 일본에서는 부정적인 황실 관련 보도를 금기시하여 화제가 잘 되지 않지만,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심심치 않게 얘기가 돈다. 그래서 우익 세력 말고는 엄청나게 씹어대는 인물이었다.[52]

그리고 젊은 시절(1990년대 초), 황실 가족 모임에서 술에 취해 시녀를 희롱하다가 형 나루히토 황태자로부터 질책을 듣자, 지가 잘났다며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다. 그때 새댁에 아기(마코 공주) 엄마였던 키코 비는 남편의 포악한 행동을 보고만 있었으며, 결국 여동생 사야코 공주가 달려와 중재하면서 두 오빠의 격한 다툼을 말렸다고 한다.

딸들과는 사이가 좋은 듯도 하지만, 두 딸 모두 만 20세 생일의 성년 기자회견에서 아버지의 성격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큰딸 마코 공주는 '아버지께서 예전에는 화를 잘 내셨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고 말했다. 사실 2006년 9월에 고명아들 히사히토가 태어나면서 후미히토의 난폭한 성정이 좀 누그러졌다는 설이 있었는데, 마코 공주가 확인시켜 준 셈. 작은딸 카코 공주도 자신의 단점에 대해 말할 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도화선이 짧은 면이 있어서, 사소한 문제로 말다툼을 하기도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는 하다하다 2016년 일본 내에서 키코 비를 폭행한다는 소문과 쇼윈도 부부라는 소문이 돌다. 다만 소문들이 진짜라기보다는, 후미히토에 대한 일본인들의 생각 또는 이미지라고 보는 게 맞는 듯하다. 후미히토가 정말 키코 비를 사랑해서 결혼했을까? 후미히토는 여자들을 막 대할 것 같다! 하는 식으로.

2016년 들어서는, 알코올 중독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사실 일본 남성 황족들은 유전적으로 술을 잘 먹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이라는 소문을 받은 건 극히 일부인데, 이상하게도 이런 소문을 듣는 황족들은 토모히토 친왕이나 후미히토처럼 다소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라는 게 특징.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딸들에 비해 아들 히사히토를 굉장히 오냐오냐 떠받들고 있다고 한다. 같은 잘못을 하더라도 딸들이 했을 때는 꾸짖었던 행동을, 히사히토가 했을 때는 그냥 넘어간다고. 그러다 보니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는 아버지에게 히사히토를 더 야단치라고 눈치를 주며 아버지처럼 눈치없이 자기 할 말을 하는 카코 공주는 대놓고 그거에 대해서 항의하기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3남매의 입학식과 졸업식만 봐도, 후미히토 친왕은 2004년 3월 마코 공주의 가쿠슈인 초등과 졸업식 이후로 딸들의 입학식과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있다. 키코 비 혼자서 두 딸의 입학식과 졸업식에 참석했다. 반면 아들 히사히토 친왕의 유치원 및 초등학교 입학식과 졸업식, 중학교 입학식에는 꼬박꼬박 참석했다.

두 공주 모두 불만이 많지만, 특히 작은딸 카코 공주의 불만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아무리 10살 넘게 차이나는 늦둥이 동생이라 해도, 상황이 이렇다보니 누나들과 남동생의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놓고 편애하는 거 보면, 후미히토에게는 제대로 된 양육관 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실제로 2019년 6월 이후에 이러한 교육을 받고 자란 히사히토의 인성 자체의 문제가 발각되어버렸다.

과거 작은딸 카코 공주가 성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한테 맞은 적이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주기적으로 손버릇이 안 좋다는 보도도 나온 바 있었다. 2019년 10월, 친형 나루히토 덴노의 덴노 즉위식 의식 중 하나를 치르기 위하여 빗속에 황궁 내 제사 공간에 도착했을 때, 후미히토는 쓰고 있던 우산을 접어 바로 옆에 있던 경찰청에서 파견된 남성 궁무관[53] B에게 우산을 무심하게 던지는 장면이 당시 해당 공간에 있던 언론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이를 감안할 때 후미히토 일가에 배치되는 시종들이 모조리 도망치는 것에 대해서 그동안 '키코 비의 신경질적인 태도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았으나, 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이러한 것에 키코 비뿐만 아니라 후미히토도 어느 정도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B는 2020년 1월경에 8개월 간의 파견근무를 끝내고 경찰청에 돌아왔고, 경찰청은 B(캐리어 경관)의 후임으로 준캐리어 경관을 보내는 동시에 궁내청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이는 일본 특유의 고도로 경직된 관료사회 특성상 매우 이례적인 점이다.

사실 지금 아키시노노미야에 대한 문제들의 대부분이 후미히토의 망나니 기질에서 출발하는 것을 보면, 어찌 보면 지금 후미히토는 그동안의 업보를 제대로 치루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


5.2. 정치적 행보 관련[편집]


그런데 이것만 갖고는 그가 정말 우익 세력에 동조하는지의 여부는 확신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나루히토 천황이 황실이 개혁하기를 바라는 것에 비해 후미히토 친왕은 여지껏 해온 대로 황실을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생각일 뿐, 일본의 우경화는 탐탁치 않게 바라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아키히토 천황도 수차례에 걸쳐 일본의 우경화를 반대하는 발언을 직설에 가깝게 했으나, 아들 출산 문제를 놓고 황태자 부부와 갈등을 빚는 등, 황실 내부 문제에는 꽤나 보수적이다. 前 천황인 아키히토 천황도 황실 현안에는 보수적으로, 대외 정책에는 진보적으로 성향을 달리한다는 말. 따라서 후미히토 친왕 역시 아버지처럼 이러한 상황별로 두 갈래의 성향일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후미히토 친왕이 진심으로 우익 세력을 가까이 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입지를 위해 우익 세력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의심이 가는 정황은 많지만, 후미히토가 극우에 속한다는 명확한 증거는 아직까지 없는 셈이다.

실제로 2015년 11월 30일, 본인의 50세 생일 기념 인터뷰에선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여# 아베 신조 내각의 우경화에 대해 우회적으로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 해 1월 아키히토 덴노의 신년사와 2월 나루히토 황태자의 55세 생일 기념 기자회견 때도 연달아서 우경화에 대한 우려의 메시지가 있었고, 10월 20일 미치코 황후의 81세 생일 기념 서면 회견에 이어서 또 다시 후미히토가 비슷한 소리를 반복함으로서, 사실상 일본 황실이 정치권의 우경화에 매우 우려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54]

그리고 2018년 9월 3일자 기사에 따르면, 여성 미야케(황족 방계 가문) 창설 문제를 놓고 아베 신조 총리와 견원지간이라고 한다. 후미히토는 여성 미야케에 찬성하는 모양인데,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장녀 마코 공주와 차녀 카코 공주가 시집가서 평민이 되면 미래의 공무는 전부 고명아들인 히사히토에게 몰리게 될 테니, 업무 분담을 위해서라도 여성 미야케는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아베가 반대하고 있으니[55] 궁중 행사에선 총리와 만나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이 기사엔 또다른 재밌는 내용도 나왔는데, 마코 공주와 코무로 케이의 약혼 연기가 정해졌을 때 아베 신조 총리가 "제멋대로 군다."(…)고 말했고, 이에 후미히토가 분노했다고 한다. 물론 찌라시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여론은 후미히토 가문에 영 좋지 않다는 게 문제.

2018년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이후 아이코 공주에 대한 여성 천황 등극 여론이 강화되기 시작하자, 언론을 통해서 사실 아베 총리와 친한 건 나루히토 덴노이며 역으로 아키히토 상황과 성향이 맞는 후미히토와의 사이가 안 좋다(!)는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고 있다. 사실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터지지 전까지는 일본에서 오히려 "후미히토와 아베 총리가 제법 친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걸 보면 웃픈 부분. 물론 아베가 나루히토 덴노 즉위 이후 그에게 유별나게 접근하는 건 있는데, 아키히토 상황과 마찬가지로 나루히토 덴노 또한 아베 자신이 추진하는 '전쟁가능한 보통국가'를 위한 헌법 개정에 반대 의견을 제시해서 자신의 숙명인 평화헌법 개정 의도를[56] 천황이 여론을 이용해 막아버리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해, 이를 막기 위해서 사전 접근하는 것에 가깝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염치없게 아이코 공주의 천황 즉위는 반대한다.

한마디로, 2010년대 후반 기준 일본인들이 후미히토 일가에서 천황이 나오는 것을 대놓고 반대하는 형국이 된 것. 2000년대만 해도 당시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았던 것을 생각하면,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대한 여론은 아들 히사히토가 탄생한 2006년 9월 정점을 찍었다가 10여년이 지난 2010년대 후반 들어선 부정적인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게 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게 되었다. 애시당초 과거 마사코 황후에 대한 패싱은 당시 남아선호사상의 여파로 좀 억울한 감이 있는 패싱이었다면, 현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향하는 패싱은 마코 공주 등이 관련된 온갖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 해결은커녕 남자친구는[57] 도피유학으로 미국에 가서 수 억엔씩 세금 낭비하며 시간 끌기만 하니, 살림살이가 갑갑한 일본 서민들 입장에서는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을 곱지 않게 보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5.3.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편집]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그야말로 실격이다. 우선 남편으로서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후미히토가 아내 키코 비를 폭행한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만큼 일본 내 여론이 바닥을 긴다.[58] 그리고 후미히토가 난봉꾼에 자녀교육도 아내에게만 맡겨 놓고 무관심하다는 소문 역시 진지하게 떠돌고 있다. 권력욕도 자신에 맞먹는 키코 비가 두 딸에게는 엄격한 통제와 히사히토만 애지중지하게 대하는 걸로 인해 마코/카코공주는 서로간의 우애는 돈독해지고 부모에 대한 반감이 심해졌으며 오죽하면 두 딸이 후미히토 부부에게 막내동생 히사히토의 육아를 맡기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할 정도로 관계는 최악에 가깝다. 사실상 형 나루히토의 완벽한 안티테제로 보일 수준.

이에 대해 키코 비는 '술 마시지 말라'는 게 아니라, '히사히토가 공부하는데 방해되니 나가서 술을 조용히 마시라.'고 소리를 지른다고 한다. 심지어 해당 기사에 시종들과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후미히토가 앉았던 소파를 '더러워졌으니 버려라!' 맨날 이러니까 돈이 없지 라고 했다는 말도 있었다. 애당초 닮은 구석이라고는 남편이나 아내나 권력욕이 대단하다는 것뿐이었고, 후미히토부터 아내를 진심으로 존중한다는 시늉도 별로 하지 않으니,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이상할게 없다. 태국에 공무로 갔을 때는 당시 아내와 두 딸이 함께 있는데도 태연히 태국인 여성을 숙소로 불러 들였다는 말도 있었으니, 행동거지 자체가 전혀 남편답지도 아버지답지도 않다. 사실 키코 비야 대학 시절부터 그런 줄 대충 알고 결혼했을 테니


5.3.1. 2019년[편집]


현재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후미히토는 결국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실시간으로 되돌려받고 있다. 2018년 4월 21일자 기사에 따르면, 요즘 후미히토는 술이 늘고 항우울제를 복용한다고 한다.

아들 히사히토가 태어난 뒤 형을 밀어내고 자기가 천황이 되기 위해 10년 넘게 궁내청 & 주간지 & 우익을 동원해 난리를 피운 결과는 '아버지의 생전 퇴위와 형의 즉위'라는 빅엿으로 돌아왔으며, 자녀들의 육아에 참여하지 않고 방임형으로 내버려둔 결과는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으로 인한 집안 이미지의 실추와 아들 히사히토의 황위 승계 위기였다.

거기다 2018년 카코 공주가 언니의 결혼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어, 더욱 더 궁지에 몰린 상황이다. 요즘 어머니 미치코 황후는 후미히토를 만날 때마다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에 대해 묻는다는데, 이게 후미히토에게는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더 큰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고 한다.

불과 며칠 전(?)에 올라온 기사를 보면 아키시노 일가는 내부적으로 상상 이상으로 분열된 듯 보인다. 당장 2019년 4월 히사히토의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중학교 입학 사진을 보면, 후미히토는 아내, 아들과 거리를 두고 서서 사진을 찍었다. 기사에는 마코 공주는 결혼 소동 후 부모와 아예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 있고, 카코 공주도 부모와 어느 정도 대화를 하면서도 사적이라는 전제조건을 두고서 언니 마코 공주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등, 부모와 두 딸이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다.

카코 공주는 원래부터 히사히토만 대놓고 편애하는 아버지 후미히토에게 반감이 커서 거리가 있었다.[59] 카코 공주는 후미히토에게 체벌까지 당하고 자랐지만 후미히토는 히사히토를 아들이라서 오냐오냐했다. 히사히토가 태어났을 때, 카코 공주의 나이는 사춘기가 막 시작되는 12살이었다. 거기다 자유분방하게 자랐던 만큼, 그런 부모의 차별에 오래전부터 반감을 드러냈다.

이런 차별로 인한 불만은 어머니인 키코 비에게도 매한가지인지라, 카코 공주는 키코 비가 카코 공주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하면 "말하지 마!"라며 소리를 지른다고 한다. 자유방임으로 키운 부부의 교육 방식도 영향이 컸겠지만, 두 공주가 유독 부모에게 반항하는 이유는 부모의 차별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지금은 고명아들 히사히토만 바라보고 사는 키코 비와의 사이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

지금 일가에게 벌어지는 일을 보면, 사실상 후미히토 본인의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다. 후미히토가 왜 낙제점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었는지는 납득이 안 가는 건 아니다. 아버지인 아키히토는 후미히토를 차기 천황 후보가 아니라는 이유 등으로 후미히토를 아들로서 제대로 대하지 않았고 그런 상황 속에서 후미히토를 돌봐야 할 미치코 황후조차도 후미히토보다는 형인 나루히토나 5살 아래의 사야코 공주에게 신경을 쓰면서 사실상 후미히토를 방임해버렸다.[60]

거기다가 궁내청 & 주간지 & 우익이 별다른 잘못도 없었던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 일가를 일방적으로 비방하며 두들겨패던[61] 10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미치코 황후와 아키히토는 그 배후에 있었을 후미히토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아무리 궁가의 일에 대해서는 황족이 개입하지 않음이 법도라 해도, 저 정도로 황실 질서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었다.

덧붙여 아키히토 부부가 후미히토 등의 도를 넘는 행위에 제지를 않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당시 기준으로도 물 밑에서 일본 국민의 불만을 많이 사기도 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수상한 행동 때문에 '천황 부부가 딸 하나만 낳은 나루히토 황태자 일가를 사실상 황태자 자리에서 내쫓을 것'이라는 뜬소문이 돌기도 했고, 이러한 소문에 후미히토 일가 등이 더욱 더 날뛰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되어버렸다.[62]

아키히토가 생전 퇴위를 통해 나루히토의 손을 들어준 것은 신의 한 수이자 후미히토의 뒤통수를 거세게 친 사건이다. 사실 대놓고 천황 자리 달라고 떼를 쓰던 차남에게 큰 착각을 하게 만들고 그러한 착각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 이러한 것을 대놓고 무산시켜 버리는 식으로 공개적으로 철저하게 망신을 줬다. 그렇게 아키히토 덴노는 그동안 엉망이었던 황실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그 동안 후미히토 일가가 황태자 일가에 가한 상상을 초월한 각종 행태들은 이후 발생한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과 한데 합쳐져 천황제 근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라는 이름의 거센 부메랑으로 황실에 돌아왔다.

후미히토가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의 시종에게 부탁을 해서 구한 항우울제까지 복용한다는 말로 보아 스트레스가 포화 상태가 된 모양이다. 이럴 때 제일 필요한 것은 '가족의 사랑과 지지'지만 아내도 두 딸도 후미히토를 생각해 주는 기미가 안 보인다. 그런데 이게 자업자득이라, 어디에다가 억울하단 말도 못 할 것이다.

아무리 새 천황 즉위 이후 자신이 황사(皇嗣)라는 애매한 위치[63]에 오르고 아들이 잠정적인 후계자인 상황이긴 하지만 정적 관계인 형이 천황으로 있고, 본인 집안 자체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나쁜 이상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불안한 자리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당한 것을 생각하면 나루히토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가만 있지 않을 정도로 어그로를 끌었고 나루히토처럼 집념, 인내, 지략을 제대로 가진 사람이 제대로 권력을 잡으면 정말로 무섭다.[64] 현재 궁내청은 나루히토가 즉위하게 되자 제발 살려달라면서 스스로 빌고있는 처지라고 한다. 지금까지 후미히토를 이용하다 여론이 안 좋은 것을 알자 바로 내버리고 나루히토에게 빌고 기어가는 상황이니 히사히토 지지까지는 몰라도 후미히토를 도와줄 일은 없다고 볼 수 있다.[65]

결국 후미히토는 그동안 자신이 한 짓으로 인하여 궁지에 제대로 몰렸고, 위로받을 곳도 마땅치 않은 상태로 정신적으로 매우 고립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양반이 지금까지 지내온 역사를 보면,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5.3.2. 건강 문제[편집]


2019년에 들어와서 항우울제를 복용한다는 기사로 보아,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기 직전이거나 또는 이미 켜진 것 같다. 신체적으로는 아직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했다는 말부터 이미 정신적으로는 적신호라는 의미이다. 황족도 보통내기 아님 못해먹는다.

실제로 4월 말에 뜬 기사에 따르면, 큰딸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등으로 불안을 느끼고 있으며 잠도 잘 못 이룬다고 한다. 이외에도 지금 후미히토 주변에는 스트레스를 줄 만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항우울제를 복용할 정도면 불안이 무시 못할 수준임을 의미하며, 수면장애가 온 것도 확실해 보이니 이미 문제는 발생했다. 이를 보면 아직 아무 말이 없지만 이미 상당한 수준의 우울증 증상이 온 것으로 보인다. 이게 진짜 병으로 발전할지는 좀 더 두고봐야 알 듯. 하지만 2019년 5월 21일자 보도에 의하면, 후미히토가 궁내청 병원에 요청해서 먹는 약은 항불안제가 아니라 수면유도제와 함께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라는 항우울제를 섞어서 사용한다고 한다. 보도에 등장한 의사의 말에 의하면, 항불안제와 달리 해당 조치는 항불안제를 복용한 것과 효과는 비슷하나, 부작용 발생빈도를 낮출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예전부터 좋아하던 을 더 마신다니, 아무래도 2016년부터 잇달아 벌어진 악재로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이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다. 원래부터 이성적인 면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에 술에 더 의존하게 된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 항우울제 섭취에 따른 육체적, 정신적인 데미지가 들어갈 것이다.[66]

이러한 상황에서 정서 안정 등에 있어서 가장 큰 도움이 되어야 할 존재인 가족들은, 아무도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형 나루히토 천황, 형수 마사코 황후, 조카 아이코 공주의 경우는 정치적인 문제로 원수지간이 되었고, 큰딸 마코 공주와 작은딸 카코 공주는 반항하며 막나가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믿고 의지가 되는 사람이어야 할 아내 키코 비와는 예전부터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었고, 아들 히사히토는 아직 너무 어려서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아버지 아키히토 상황과 어머니 미치코 상황후는 못난 자식이라 무시하는 지경이며, 여동생 구로다 사야코는 이미 오래 전에 결혼해서 평민이 되었다. 즉, 아무도 도움이 안 된다. 그동안 충돌만 일으킨 형 나루히토가 천황이 되는데다, 오래 전부터 형 나루히토의 야망이었던 아이코 공주의 후계자 선정도 국민들은 물론 궁내청과 극우들조차 아이코 공주 파벌로 돌아서고 있다.

이대로 제대로 건강 관리를 하지 않고 놔두면 틀림없이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기사에 따르면 후미히토는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과 황태제로서 담당해야 하는 직무에 대한 부담 등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자유분방하고 황족관에 진지한 사람도 아니니, 급증하는 직무에 대한 부담감이 상상 이상으로 강할 수밖에 없다. 과거부터 황족의 막중한 공무에 부정적이었던 사람이고, 히사히토의 출생 이후 기자들에게 농담조로 "나는 우울증"이라고 하고 종종 '황족의 공무량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음을 보면 이러한 짐작이 맞을 것이다.

여기다 아버지인 아키히토 덴노가 그동안 자기네들이 어떤 짓거리를 해도 그저 침묵만 고수하다가 충격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천황 후계에서 내쳐버린 사실이 가장 큰 정신적인 타격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거의 억지로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로 히사히토를 편애했던 만큼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코 공주를 후계자로 밀고 있는 나루히토에게 양위하는 것은 물론, 나루히토 즉위 이후에는 아이코 공주를 후계자로 선정하더라도 자신들은 관여하지 않겠다고 암시하고 있으니, 속았다는 생각이 매우 컸을 듯.

후미히토가 아버지에 대한 충격이 해소되기도 전에 바로 큰딸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에 따른 가뜩이나 안 좋은 집안 내부 분열의 강화, 국민들의 강한 비난 여론, 그리고 자기네들 편이라고 믿고 있던 부류들의 배신 등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2016년 8월에 양위 발표가 있었고, 2017년 5월에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터져 논란이 커지는데 불과 3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2018년에도 논란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2019년이 되자 사람들이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걸던 기대를 완전히 접고 모두 황태자 편으로 돌아섰다. 극우들도 그동안 공격하던 나루히토 황태자 편으로 돌아섰고, 궁내청은 자기 생존을 위해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을 상당부분 버리기까지 했다.

사실 지금 후미히토가 정신적이나 육체적인 문제가 생겨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황에서도 버티는 걸 보면 나름대로 뭔가 기대는 구석이 있는 걸로 보이는데, 과연 그게 얼마나 오래 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황실전범이 변경되어 아이코 공주의 승계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지 않는 한, 현 황실전범에 근거하여 생전퇴위 관련 황실회의에서 정해진대로 나루히토-후미히토-히사히토의 계승라인은 정해졌고, '계승후보가 부족한 이상 나와 내 아들은 내쳐지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버티는 듯 하다. 거기에다가 아직까지 언론들은 자기네 편을 들고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보는 모양.[67]

하지만 5월 17일~18일 황사가 되고 첫 지방 공무 영상을 보면 뭔가 무기력함이 전면으로 드러나 보였다. 이후 5월 21일 산토리홀에서 열린 헝가리와의 수교 150주년 기념 오케스트라 관람 사진, 5월 2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국빈 방문 기념 연회장에서도 바로 옆에 국빈인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가 있는데도 딱 봐도 무기력한 표정으로 엉뚱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일본 일각에서는 "후미히토의 정신적 문제에 의한 신체의 한계가 온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5.3.3. 후미히토에 대한 또 다른 관점[편집]


이제 후미히토는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다. 형 나루히토가 천황 재임 기간에 급사하거나 심각한 병에 걸려 생전퇴위를 하는 일이 벌이지지 않는 한, 권력의 논리에서 후미히토가 뭘 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이제는 일본 국민들 모두가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퇴위 선언 이후 궁내청과 후미히토 일가의 실상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처럼 헛수작을 부리려 해도 믿기보단 불신하고 비난할 확률이 높다.[68] 신뢰를 쌓는 것은 어렵지만, 한 번 잃은 신뢰를 다시 되찾는 것은 몇 배로 어렵다. 하물며 이 집안처럼 그동안의 행동이 지나치면 더더욱 그렇다.

후미히토에 대한 일본 내부에서의 여론은 부정적인 관점이 압도적이다. 히사히토 탄생 전에는 우익과 친했기 때문에 그쪽으로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고, 히사히토 탄생 뒤로는 일반인들까지 인기를 포섭했지만, 장녀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으로 시작된 각종 사건사고로 지금은 긍정적인 여론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극우들조차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 히사히토를 교육하는 방식조차 과거 정치계에서 '늦었지만 황태자(나루히토) 일가로 보내서 최대한 교정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논의가 있을 만큼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후미히토도 일본 황실가부장적인 서열에 피해를 입은 케이스일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그 선봉장에는 다름 아닌 아버지 아키히토가 있었으며, 어머니 미치코 황후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형 나루히토는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가 결혼 1년만에 얻은 귀하디 귀한 첫아이이자 차기 천황 후계자였다. 특히 후계 생산의 중책을 담당하고 있었던 데다 고된 시집살이까지 당하고 있던 미치코 황후에게는,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해준 귀한 아들이었을 것이다. 마사코 황태자비와 달리 미치코 황후에게 이혼설이 안 나왔던 이유가, 후계자의 어머니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일본 황실을 이을 책임이 있었던 아키히토 황태자에게도 장남 나루히토는 그 존재가 각별했을 것이다.

반면에 5살 아래인 후미히토는 많은 축복을 받긴 했지만, 장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자랐고, 여기에 가장 중요한 시기인 4살 때 여동생인 사야코 공주가 태어나버리면서 후미히토에 대한 천황 부부의 관심이 흩어져버렸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 고착화되면서 사실상 방임이 되고 말았다. 남녀의 역할이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는 일본 황실에서 3남매의 육아를 전담했을 미치코 황후가, 황실 내부에서 자행된 엄청난 수준의 고된 시집살이를 당하는 과정에서 온 정신을 3남매에게 다 쏟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69]

미치코 황후의 시집살이는 쇼와 덴노가 사망하고 미치코 황태자비가 황후로 즉위한 뒤에도 이어졌기 때문에, 나루히토가 마사코 황태자비와 결혼한 다음 해에 실어증 사건을 겪었고, 시어머니 나가코 태후가 죽는 2000년까지 미치코 황후의 시집살이는 지속되었다.[70]

나루히토는 장남이었기에 미치코 황후가 못하는 부분은 아키히토가 제왕학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최대한으로 커버할 수 있었고, 막내인 사야코 공주는 같은 여자라서 황실 내부에서 심한 성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늘 미치코 황후의 곁에 붙으면서 힘이 되어주었다. 또 언젠가 평민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평민 출신으로서 이것저것 교육에 신경을 써준 것을 2005년 사야코 공주의 결혼식 때 미치코 황후가 했던 말로 알 수 있다.

그러나 후미히토는 어머니인 미치코 황후와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가 방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셋 다 챙길 수 없는 상황에서 어차피 방계 황족으로 황실에 남아 요구하는 것만 하며 살면 되기에 내버려둔 것일 수도 있다. 정말 큰 문제는 의미 있는 상호작용의 부재로 후미히토가 뭐가 옳고 그른지에 대해 판단을 못하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망나니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황족의 자세조차 천황 내외가 교육 제대로 안 시켰다는 것[71]이 후미히토의 행동으로 고스란히 파악할 수 있다.

후미히토가 권력욕이 심했고 그것이 안 그래도 막장인 사고방식과 겹쳐 지난 10년 간 천황 앞에서 차기 천황을 두고 황실 암투가 벌어지게 되었고 지금은 자녀교육 문제로 후계자인 아들인 히사히토까지 천황 자격을 놓고 찬반 논란이 벌어졌다. 역사상 차남 이하의 왕자들 중에 권력욕이 셌던 인물들이 많긴 했지만, 그 인물들은 최소한 주변 상황을 보며 행동했다.[72] 그러나 후미히토는 주변을 보지 않고 마구잡이로 행동하다가 아버지 아키히토가 대놓고 망신을 당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바람에 큰 창피를 당했다.

사실 명백히 말해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 퇴위 발표는, 장남은 감쌌지만 차남은 공개적으로 내친 것과 다름없는 처분이다. 만세일계를 이을 혈통인 히사히토가 있었고, 이 3명 이외에는 황실 인원이 부족했던 덕에 후미히토 일가를 쫓아내지만 않았을 뿐, 징벌의 강도는 대놓고 내쳤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73]

일본인들은 히사히토 탄생 후 10년 넘게 형 나루히토 황태자와 형수 마사코 황태자비, 조카 아이코 공주 등 황태자 일가에게 허위사실 등을 만들어서 상상 이상의 공격을 가하면서까지 천황에 대한 강한 야심을 드러내는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아키히토 덴노는 때가 될 때를 기다렸다가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계책인 생전 퇴위 발표로 모든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워낙 변명도 못하는 상황이라 후미히토 & 키코 비 & 궁내청은 국내외적으로 큰 망신을 당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궁극적으로 천황이 되려고 했던 후미히토는 황태자나 황태제가 아니라 황사라는 이름의 상당히 애매한 직책을 부여받아서 현재보다 더 많은 공무를 떠안아야만 했다.

애초에 일본 황실의 왕위계승 특성상 천황이 죽으면 황태자에게 승계되도록 명시되어 있다. 천황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고, 황태자가 없으면 황태손을 삼는다. 따라서 황사와 별개로 천황이 황태자를 따로 책봉하더라도 별 다른 문제가 없으며 이 경우에 나루히토가 죽어도 황실전범상 황사를 놔두고 황태자가 즉위하게 된다. 그 때문에 궁내청은 황사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그동안 자신에게 호의적이였던 여론의 지지기반을 상당히 잃고 말았다. 차세대 천황 후계자인 히사히토가 생긴 후 10년 넘게 주변 사람들로부터 형님인 나루히토를 대신하여 천황이 될 수 있다고 떠받들어지고, 자신도 그런 착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 아키히토의 공개 생전 양위 선언으로 후계에서 대놓고 내쳐졌다.

이쯤되면 말이 좋아 천황의 남동생이고 황사지, 사실상 목숨을 대가로 황실의 종신 공무노예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상황이 그렇게 밀어 내려고 안간힘 쓰던 형인 나루히토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자신은 자녀교육 문제로 비난에 시달리는 이 역전된 상황을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019년 즈음부터 시종들로부터 구해온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런 상황 변화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사실, 후미히토가 이렇게 막장이 된 것에는 부모인 아키히토와 미치코 황후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후미히토가 말을 안 들어먹을 것처럼 보였다 해도 부모님인 아키히토와 미치코 황후는 나루히토와의 권력다툼이 발생할 때 단 한 번이라도 후미히토를 강하게 타일렀어야 했고, 그럴 기회 역시 있었다. 후계자가 있어도 장남은 형이니, 형을 존중하고 절대 천황 자리를 넘보지 말라고 했어야 했다. 이렇게 가장 기초적인 조치조차 취하지 않고 있다가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면서 다른 한 쪽을 확인사살하듯이 내치는 것은 부모로서 할 짓이 아니다.[74][75]

사실상 생전 양위 선언 자체가 후미히토를 후계에서 완전히 내치고 장남인 나루히토와 손자이자 후미히토에게는 친아들인 히사히토만 천황 후계로 인정한 것이다. 후미히토는 아들 덕분에 그 사이의 징검다리로 끼어들어갔고(…).

상술하였으나 나루히토가 재임 기간에 급사하지 않는 한 후미히토가 천황이 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된다고 해도 고령에 진입하는 나이인지라 오래 재임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미 위키의 일본 황실 관련 여러 문서에 아키히토 내외가 첫째 나루히토나 셋째 구로다 사야코와 달리, 둘째 후미히토를 아들로서 제대로 대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부모와 자녀 간의 상호작용이 성인 이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아는 사람이면, 떠오르는 바가 있을 것이다. 사실 현실에서 성인이 되어 행동적인 문제와 더불어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 중 대다수가, 어릴 적에 부모와의 사이에서 문제가 있었던 경우가 많다. 어떤 의미로 후미히토는 일본 황실 내의 가해자가 된 피해자이자 피해자가 된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76]


6. 여담[편집]


말을 잘 하는 형과는 달리 본인은 말을 잘 못하는 것 같다.[77] 인터뷰를 들어보면 상당히 답답하고 중간중간에 군말이 굉장히 많다. 결혼식 때도 아버지 아키히토에게 인사할 때 웅얼거리는 투였다. 이는 모국어인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말할 때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2019년 7월 국제 지도학 학회에서 영어 연설을 할 때[78] 영상을 보면 발음은 나름 괜찮지만 말투 등 문제 때문에 영어를 못하는 것처럼 들린다.

어렸을 때부터 자유분방하게 자란 탓인지 몰라도 누군가가 자기에게 간섭하거나 제한하려고 하는 행위 자체를 상당히 싫어했다. 결혼 초창기 시녀를 희롱하다가 형의 만류에 발끈해서 싸운 것도 이러한 성격의 영향이며, 2019년 5월 1일 황태자에 준하는 황사라는 자격이 부여되면서 황태자에 준하는 경호를 받게 되는데, 그것에 대해 대놓고 불만을 표현하면서 '황사가 되기 이전 친왕으로서의 경호 수준을 유지해달라.'고 궁내청에 이야기했다는 말이 대놓고 나오고 있다.

타인에 의한 간섭 등을 상당히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가르침 받는 것도 상당히 싫어하는 걸로도 유명하다. 학창 시절에도 궁내청이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후미히토에게 간단하게나마 황족으로서의 교육을 하려고 해도, 후미히토가 그걸 상당히 싫어하여서 궁내청이 금방 포기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성인이 된 이후 공무 차원에서 방문하게 되는 지역이나 행사에 대한 사전 교육 등을 실시하려고 할 때도, 궁내청은 강의하러 온 전문가에게 부탁해서 최대한 배려하여, 이해하기 쉽게 해주려고 했다. 그런데도 후미히토는 그냥 듣는 척만 하다가, 순방 직전에서야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것으로 해결하는 일이 많았고 공무 과정에서 엉뚱한 발언을 하기 일쑤였다고 한다.[79] 또한 큰딸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이후에는 여기에서 한 술 더 떠서, 아예 그 전까지 하던 듣는 척도 하지 않고 그저 멍 때리다가, 교육 후 질의응답 시간에 교육내용과 하등 상관없는 발언을 해서 참석자와 시종들을 당황케 한 적도 있다.

쇼와 덴노가 생전 "아야노미야[80]에게 황통을 옮기지 마라, 히로노미야[81] 다음은 히로노미야의 자녀다"라는 발언을 했다면서 후미히토로의 황통 이전 금지 및 도시노미야 아이코 내친왕의 여성 덴노를 주창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후미히토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해당 발언은 진실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출처가 불분명한 소문인 걸로 알려지고 있다. 다만 정황상 후미히토가 과거 자신은 제왕학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발언과 대학생 시절 후미히토에 관련된 온갖 추잡한 소문들 중에서 그나마 신빙성 높은 소문들조차도 상상 이상의 것들임을 감안하면 말년의 쇼와 덴노가 이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은 높으나 덴노의 발언 하나하나가 무겁게 받아들여지는 시대 특성상[82] 쇼와 덴노는 만일 차기 덴노인 히로노미야가 결혼을 못하거나 아니면 결혼했어도 동생들처럼 자녀를 못낳을 경우[83] 등을 대비하여 사실상 예비격인 후미히토를 승계권에서 완전히 없애는 발언보다는 행동, 분위기 등으로 우회적으로 표출하는 식으로 처리해 확실한 증거로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황실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

관용차는 1세대 미쓰비시 디그니티였다.[84] 현재는 렉서스 LS 460L이다.


6.1. 외모[편집]



파일:attachment/2_46.jpg


일본박대기라고 알려진 이 짤방의 주인공이다. 부제는 '왕자의 굴욕'.(…)

황족들 중에서는 잘생긴 편인 듯하다. 물론 젊을 적에만 여동생보다는 비교적 외가를 닮았는지[85] 동글동글한 눈매에 피부도 비교적 흰 편인데다 키도 크고 비율도 좋아서, 젊을 적엔 현지인들에게 이케멘 소리도 들었다. 성년식 때의 수염 없는 모습. 청소년 시절과 신혼 시절의 사진들을 보면, 미남까진 아니더라도 제법 호감형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86]

그런데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늘 백발인지라 실제 나이보다 10년은 넘게 늙어 보이고, 아무리 그래도 5살이나 위인 형 나루히토보다도 나이가 더 많아 보이다니 가끔 검게 염색을 해도 얼마 못 가 다시 백발로 돌아간다. 참고로 30대에 이미 머리가 백발이었는데, 콧수염은 또 검어서 엄청난 괴리감을 보이기도. 소문에 따르면 백발로 온 노안을 감추려고 콧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파일:/image/001/2013/07/03/AKR20130703001100005_01_i_59_20130703130803.jpg


그런데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얼굴 자체가 노안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애매하다.(…) 웃는 표정일 땐 별로 티가 안 나지만, 무표정일 때 팔자주름이 깊게 패인 것을 볼 수 있다. 알코올 중독으로 얼굴이 일찍 삭은 것도 있고, 늙으면서 수염도 색이 빠져서 팔자주름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87] 현재 시점에선 그렇게 노안은 아니지만 아내인 키코 비가 (1살 차이지만) 나이에 비해 동안이기도 해서 더욱 비교된다.

참고로 위 사진은 2013 도쿄국제도서전 개최 첫날인 7월 3일에 찍었는데, 예고도 없이 한국관에 들러서 박경리토지 일본어판을 읽는 모습이다.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2014-04-12_15%3B55%3B23.jpg


왼쪽부터 여동생 구로다 사야코, 아내 키코 비, 후미히토 친왕, 형수 마사코 황후, 형 나루히토 천황.

일본 황실에서는 최장신. 178cm라서 꽤나 특출나(…) 보일 정도. 여기에 머리도 작은 편이라[88] 키가 더욱 커보인다. 180cm에 조금 못 미치니 아주 큰 편은 아니지만, 일본 남자 황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큰 키이다. 황실에서 그 다음으로 키가 큰 사람이 형인 나루히토 천황도 아닌 형수인 마사코 황후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89] 형보다 키도 한참 큰 데다가 형하고 닮은 곳도 없어서, "아키히토 덴노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는 루머가 한때 계속 돌았다.[90][91] 여담이지만, 일본 황실에서는 마사코 황후가 나루히토 덴노보다 키가 큰 것을 가지고도 험담을 해댔다. 이러니까 남자들 키가 계속 작지.


파일:/image/091/2013/06/24/PYH2013062406080034000_P2_59_20130624140102.jpg


하지만 나이 41살 먹고 낳은 외아들 히사히토 친왕을 의식했는지, 이땐 염색을 해서 최대한 검은 머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옆의 커트머리를 한 여성은 부인 키코 비.


6.2. 한국에 대한 생각?[편집]


위의 항목에서도 한 번 서술되어 있지만 2013년, 도쿄국제도서전 개최 첫날인 7월 3일, 예고도 없이 한국관에 들러서 박경리토지 일본어판을 읽는 모습이 사진에 찍힌 적이 있다. 후미히토 친왕이 도서전에 자주 왔어도 특정 국가 부스의 방문은 이번이 처음인데다, 한국관에 느닷없이 오더니만 조선통신사 행렬도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는 여러 책들 가운데 토지를 직접 집어서 안경까지 써가며 유심히 훑어봤다고.

게다가 이렇게 머무른 시간이 총 20여 분으로 상대적으로 길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후미히토 친왕이 한국에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92] 어디까지나 일본 내 풍문이지만, 가쿠슈인 대학 시절에 친하게 지낸 한국인 여자친구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런데 만약 그런 그가 극우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면…

하지만 개별적인 한국인 한두 명이나 한국 문화에 호감이 있는 것과 전반적으로 한국에 호감이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예를 들어 그 이토 히로부미도 당시 한복 차림으로 가족사진을 찍기도 했고[93] 요즘 시대에도 일본 정치인들이나 우익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일본 문화나 개별적인 일본인(또는 연예인)들은 좋아하는 한국인들도 있듯이, 일본에도 한국 정치인들이나 진보 세력들은 싫어하지만 한국 문화나 개별적인 한국인들은 좋아하는 일본인들도 많다. 즉, 일본도 우익이라고 해서 한국에 대한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적대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아베 신조조차 한국 의원들이 방일했을 시 "혐한 시위하는 애들은 같은 일본인으로서 부끄럽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94]

일반인들도 공과 사는 구분을 하듯이 후미히토 개인이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외교적인 관점에서 전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공식석상에서 한국에 대해 어떤 발언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개인적으로 호감이 있느냐 없으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6.3. 큰딸 코무로 마코의 결혼 스캔들[편집]


2017년 5월, 큰딸 마코 공주의 결혼 이야기가 처음 보도되었다. 사윗감으로 거론된 남자는, 마코 공주의 국제기독교대학 동기인 코무로 케이(小室圭)이다. 두 사람은 9월에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고, 2018년 11월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2018년 2월, 돌연 결혼식을 2020년으로 미룬다는 보도가 나왔다. '충분히 준비할 시간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으나, 이에 대해 여러 말들이 많았다. 그리고 케이와 코무로 집안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들도 나왔다. 아버지를 잃고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자살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얼마 후에 죽었는데 그 배경이 수상쩍다, 어머니 코무로 카요(小室佳代)의 남자관계와 돈 문제, 코무로 집안이 사이비종교를 믿는다는 이야기 등등. 또한 케이의 직업이 아직 불안정하고[95] 코무로 일가도 부유한 편이 아니라, 그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다.

정식 약혼인 노사이(納采) 의식[96]도 치루어지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다가, 2018년 6월 코무로 케이가 미국로스쿨유학간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미국 변호사 자격 취득을 목표로 하며, 3년간(2021년까지) 공부할 것이라고 한다. 이로 인하여 마코 공주의 결혼이 더 미루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기자회견에서 결혼식이 미뤄졌다고 말했다.

카요의 남자관계와 돈 문제는 대략 이런 것이다. 케이의 아버지와 일찍이 사별한 카요는, 홀로 케이를 기르던 중 한 남성(이하 A)을 만나 깊이 교제하게 되었다. 교제하는 중에 카요는 A로부터 돈을 받았고, 생활비 및 아들 케이의 학비 등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카요와 A가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자 A는 '그 돈은 빌려준 돈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카요는 'A가 나에게 그냥 준 돈이니 돌려줄 이유가 없다.'고 반박했다고 한다.[97]

일련의 결혼 소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침체될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각종 문제들이 발생[98]해서 소동이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여기에 2019년 5월 1일 형 나루히토가 덴노에 등극하는 이후에도 해당 사건이 지속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서, 이걸 핑계로 향후 후미히토의 천황 승계 및 아들인 히사히토의 천황 승계 역시도 불투명해지고 있다. 그와 반대로, 그동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루히토의 자녀임에도 덴노 승계권이 없던 아이코 공주가 천황을 승계해야 한다는 여론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거기에 이러한 걸 막을 수 있는 최종보스격인 부모 아키히토 덴노 내외조차도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인하여 후미히토 가문으로의 천황 승계 자체에 점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상황과 상황후가 되어 황실 내 영향력을 최소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들은 차기 천황을 노리는 후미히토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반가울 리 없는 소식이다.

일단 그가 황사가 되어 첫 해외 공무 전 기자회견이 2019년 6월 21일에 예정되어 있기에, 이때 어떻게든 결혼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발언없이는 6월부터 시작해서 8월까지 후미히토 일가 전체의 해외 일정에 대한 국민 반발[99]이 현 상황 이상으로 커질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6월 21일 기자회견에서 후미히토는 기자들로부터 "작년 11월의 기자 회견에서 마코 공주의 결혼에 대해 상응하는 대응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후 그 건에 대해 반 년이 지난 동안 코무로 씨나 마코 공주로부터 무언가 이야기나 연락이 있었는가?"라고 질문을 받았지만, "그 건에 대한 것, 구체적인 것 등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라는 발언을 해 과연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있긴 한 건지 의구심을 자아내 일본에서 꽤 논란이 되었다. 해당 기사 링크.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세금 낭비하지 말고 황적 이탈해라", "천황제 폐지하자"란 의견도 나오는 등,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대한 문제로 인해서 일본 황실 자체에 반감을 가지는 일본인들도 전보다 늘어났다.

2019년 7월 9일 기준, 후미히토는 큰딸 문제 등으로 인해 집안 전체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민심 이탈이 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를 말끔히 타개할 어떤 방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마코 공주와 코무로 케이 간의 결혼을 어떻게 해서라도 허용하려고 하는 의사가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덕분에 또 민심에 기름을 부어버리고 말았다.

2020년 11월 30일, 본인의 55번째 생일 기자회견에서 결혼을 인정해버렸다.#

2021년 10월 26일, 마코 공주는 코무로 케이와 혼인신고를 하여 황적을 이탈, 평민 코무로 마코가 되었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시집가는 공주에게 주어지는 지참금도 받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 황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코무로 부부는 도쿄에 임시로 거주하다가, 11월 14일 미국으로 떠나 뉴욕 맨해튼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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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포우토아 울루칼라라
현재 재위 중인 독립국 군주



[1] 황태제가 아닌 황사인 이유는 일본의 황실전범에 황태제라는 직위가 없기도 하거니와, 황사라는 보통명사를 사용한 이유는 후미히토의 왕위계승권이 당연상속인이 아니라 추정상속인이기 때문이다. 즉, 만에 하나 나루히토에게 늦둥이 아들이 생긴다면, 그가 황태자로 책봉되고 다음 천황이 되는 것이지 후미히토가 천황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황태제 칭호를 쓸 수 없는 것이다[2]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3] 키코 비, 마코 공주, 카코 공주나 히사히토처럼 휘를 부르지 않고 '아키시노노미야'라고만 부른다면 후미히토를 부르는 것이다.[4] 일본어 발음기호로는 Kōshi Denka, 영어 번역은 ‘His Imperial Highness the Crown Prince.[5] 현행 황실전범 8조는 "황사(皇嗣)인 황자(皇子)를 황태자(皇太子)라 한다. 황태자가 없을 때는 황사인 황손을 황태손(皇太孫)이라 한다."라고 규정했다. 후미히토를 황태제(皇太弟)라고 호칭해야 옳겠지만, 황실의 가법인 황실전범에 규정된 호칭이 아니라서 쓸 수 없다. 그리하여 전문가회의에서는 조문에 있는 '황사(皇嗣)'라는 단어를 호칭으로 끌어 쓰기로 했다. 이러한 이유로 후미히토는 황태자에 준하는 인물이지만 또 황태자가 아니라는 애매한 위치에 있다. 추정 상속인으로서 나루히토에게 아들이 생기면 상속인 지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황태제는 그런 의미에서 나루히토에게 아들이 있어도 동생이 계승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쓸 수가 없다. 그래서 현 시점에서 일본에는 황태자가 없고, 후미히토가 황태자 업무를 대행하고 있는 것이다.[6] '황사'라는 말은 단순히 '황위를 잇는 자'라는 말이고 고유명사는 아닌데, 이 '황사'를 황태자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은 690년 측천무후가 황제로 즉위하고 주(周)를 선포한 뒤에 전임 황제였던 자신의 아들 이단에게 무씨 성을 주고 '황사(皇嗣)'로 임명하면서 나온 것을 제외하고는 정식 용어로 쓰인 사례를 찾기 어렵다. 현재 대한제국 황실 수장을 맡고 있는 이원의 칭호 역시 황사손(皇嗣孫)인데, 그 의미는 황제(황실)의 대를 잇는 후손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7] 덤으로 나루히토 천황 이후 즉위한다면, 역대 최고령 천황이 될 가능성이 있다.[8] 후미히토와 그의 처자식에 대해 워낙 논란이 많다 보니, 저택 개보수 비용 및 임시거처 건축 비용을 두고 일본 국민들이 '세금 낭비'라고 투덜거린다. 사실 황거 개보수 비용이나, 아키히토 내외가 퇴위 후 임시 거처로 사용할 구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저택에 대한 개보수 비용, 그리고 아카사카 어소 개보수 비용도 제법 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별 다른 말이 없다. 후미히토 일가가 지금 일본 국민들에게 얼마나 미운 털이 박혔는지 짐작 가능한 부분.[9] 미치코 상황후는 황실에서 엄청난 시집살이를 당했는데, 이때도 황족들로부터 호된 비난을 들었다. 심신 모두 병들어, 궁을 떠나 하야마(葉山)의 황실 별장에서 한동안 요양했다고 한다.[10] 미치코 황태자비가 읽고 공부했다는 사실이 일본에 널리 알려져, 이 책은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그리고 미치코 황태자비는 세이신여자대학 영어영문학과 출신의 재원이자 수재이었기 때문에 영어 원서 하나 읽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도 아니고, 가볍게 수학문제 푸는 것처럼 쉬웠을 것이다.)[11] 장남인 나루히토 친왕의 이름에서 딴 것.[12] 파일:ECC9F6F3-3360-46C4-A48D-8EB7FF0447BA.jpg[13] 할아버지의 형/남동생을 '종조부'라 하고, 그 부인을 '종조모'라고도 한다. 즉 아버지의 큰아버지/큰어머니 또는 작은아버지/작은어머니가 되시는 분들.[14] 후미히토의 부친인 아키히토 덴노의 숙모[15] 키쿠코 비의 외가인 방계 황족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서예 기법. 마지막 당주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의 자녀들 중 차녀 미에코(實枝子) 여왕만이 유일하게 생존하여 이를 배웠고, 미에코는 훗날 자신의 딸 키쿠코에게 이를 전수했다.[16] '아야'는 후미히토가 결혼 전까지 사용하던 칭호인 '아야노미야'의 줄임말이다. 참고로 '아키시노노미야'라는 미야고는 결혼하여 가장이 되면서 새로 부여받은 것이다.[17] 형인 나루히토 황태자가 사학과로 진학한 게 상당히 독특하다고 할 정도로, 일본 황실에서는 생물학자연과학 전공이 주류다. 참고로 나루히토 황태자가 사학과에 진학하도록 권유한 사람은 작은할아버지인 다카히토 친왕인데, 그 역시 사학과 출신으로 역사학자였다. 또한 두뇌가 명석하고, 침착하고, 인내심 깊은 성격으로 그야말로 전형적인 학자였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나루히토 친왕은, 다카히토 친왕의 권유로 가쿠슈인대학 사학과에 진학하였다.[18] 장녀 마코 공주가 20세 기념 기자회견(2011.10.23)에서 "아버지는 내 나이 때 결혼을 생각하신 것 같다." 하며 이 에피소드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다.[19] 일본 황실의 적장자 계승 체제와 서열은 매우 굳건하다. 후미히토는 원래 가쿠슈인대학보다 훨씬 더 좋은 대학으로 부정입학하려 했다. 그러나 형인 나루히토 황태자가 가쿠슈인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가쿠슈인대학에 부정입학했다. 감히 일개 황자가 적장자인 황태자보다 좋은 대학에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과 출산 또한 황태자가 먼저 하는 것이 황실 내 서열에 따르는 행동이다. 후미히토 부부가 1994년 둘째 카코 공주를 임신했을 때, 히사코 비에게 "황태자 부부가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계속 아이를 낳다니, 황실 내 서열을 알고 행동하길 바랍니다!"라고 욕을 먹은 이유도, 이런 서열 문제와 관련 있다.[20] 대표적인 게 후미히토의 첫째 고모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시아버지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황적 이탈 이후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가 되었다.[21] 후미히토는 이상하게도 언론계 및 예능계에 지인들이 상당히 많은 걸로도 유명하다. 이는 큰딸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이후 일본 국민들이 후미히토 가문에 조금이라도 옹호적인 여론이 나오면 바로 "후미히토의 지시를 받았느냐"라거나 아니면 "후미히토 일가의 눈치를 보는 것이냐"라고 따지는 것도, 전부 이것 때문.[22] 마사코 황태자비는 하버드대도쿄대 출신의 진취적인 초엘리트 커리어우먼이었다.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내 자유분방하고 주관이 뚜렷하게 자랐는데, 반강제로 황실에 끌려온 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이유로 아이 가지는 데에만 최선을 다하라며 애 낳는 기계 취급을 당하니, 심적으로 병이 올 수밖에 없었다.[23] 후미히토의 형에 대한 적개심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자기보다 여러가지 방면에서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절대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며 부모의 애정을 받는 친형 나루히토에 대한 질투에서 시작된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올 정도다.[24] 형인 나루히토는 1960년생, 동생인 후미히토는 1965년생이다.[25] 일본 황족은 가문이나 정치 관련으로 언론에 상당히 입조심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러니 이 말은 상당히 이례적으로 후미히토 친왕의 궁내 입김, 권력이 얼마나 커졌나를 알 수 있다. 예전부터 후미히토 친왕은 효자라는 평을 받았고, 그의 발언 대부분이 부모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큰 문제가 아닌 편이다. 하지만 사실 그는 극우주의자들과 가깝다는 등 부정적인 이야기도 있어서, 일본에서는 딱히 나루히토 황태자의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이 상황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듯하다.[26] 공개된 아이코 공주의 성적인 편차치 72는 일본 전체에서도 상위 1%에 해당되는 엄청난 성적이다. 그 이후에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도 아이코 공주는 단 한 번도 이 성적을 떨어뜨리지 않았고, 고2 말에는 편차치 80 수준으로 올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7] 후미히토 친왕이 가쿠슈인 대학에 입학하던 그 해에는 후미히토 친왕의 성적이 합격 커트라인이 되어 다른 해보다 입학생 수가 많았다던가(...) 가쿠슈인 대학 재학 시절 공부 못하는 후미히토 친왕이 듣는 수업은 아무리 수업을 대충 들어도 최하점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학생들이 후미히토 친왕이 듣는 수업을 알아내려고 눈에 불을 켰다던가(...) 등등 전설적인 일화와 소문들이 많다.[28] 키코 비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박사 논문을 절대 공개하지 않고 있어 황실의 돈과 권력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 영구 봉인된 금단의 박사논문[29]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는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에 입학할 때, 서류와 면접으로 합격 여부가 정해지는 'AO 입시'라는 전형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만약 두 공주가 서류나 면접 없이 시험성적으로만 대학입시에 도전했어도 합격할 수 있었을지 의문.[30] 당연히 그런게 일본 황실이 전근대적인 사고로 인해 일국의 공주는 민간인과 결혼 뒤 출가하여 황족신분을 벗는다. 그러나 보통 궁내청을 비롯한 기관들이 사람을 고용해 조사 후 판단하는 과정이 있는데 이런 관습을 아키히토 상황 부부가 자리를 비웠을때 코무로 케이에 대한 조사내용도 없는데 손녀가 기습적으로 발표한 것이기에 황실에 망신을 준 것과 다름없었다.[31] 지금 일본 여론은 후미히토 일가의 부정입학과 마코 공주의 연인 코무로 케이가 국민의 반발에도 딸 마코는 아버지 후미히토를 무시한채 결혼을 강행하였으며 코무로 케이가 궁내청의 지원을 받으면서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모습 등 여러가지 논란이 나오면서 '후미히토 일가에 천황이 넘어가는 일 자체를 바라지 않는다.'는 게 대세다. 일각에서는 후미히토 일가에 황위가 넘어가지 못하게 아이코 공주의 여성 천황 즉위까지 말하고 있다.[32] 원래는 아카사카 어소로 옮겨야 하나, 퇴위하는 아키히토 내외가 아카사카 어소로 갈 예정인지라 후미히토 일가는 살던 저택에서 계속 살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와 함께, 만들어진 지 오래되어서 노후화된 저택에 대한 리모델링 필요가 있어서 리모델링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결정 즈음에 언론에 의하여 밝혀진 정보에 의하면, 분명히 후미히토 저택이 구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저택을 개조해서 사용한 만큼 낡긴 낡았지만, 원래부터 황족을 위한 시설이기에 당대 최고 자재 등을 투입한 까닭에, 낡았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심하게 노후화된 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굳이 리모델링을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비용은 필요없다고 한다. 이후 2019년 4월부터 저택 공사에 들어간다고 2월 7일 발표되었으며 저택 개조에 투입되는 비용은 저택 개조 33억엔 내외, 임시 거처 10억엔 내외 총 43억엔.[33] 여기에서 직원이 언급하지 않은 게 있는데, 그건 바로 황태자에 가까운 신분으로 격상되면서 자연스럽게 미야케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황태자 수준으로 추가적으로 확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즉, 직원 증가에 따라 여러가지 비용이 더 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황실 직원들은 업계 최고들만을 뽑기에, 이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상당하다. 그런데 특히 후미히토 일가에 직원으로 가는 경우에는 막장스러운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얼마 못 가서 그만두는 도망가는 걸로 악명이 높다 보니, 원활한 직원 충원을 위해서는 다른 황족들보다는 조금 더 비용을 줘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잦은 직원 교대에 따르는 부과적인 지출 등을 감안하면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이 직원비용으로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34] 아무리 생전 퇴위 및 양위 결정 전 황실 회의에서 아키히토-나루히토-후미히토-히사히토로 승계를 정했다고 해도, 결국에는 천황이 될 나루히토 황태자와 황후가 될 마사코 황태자비의 협조가 없으면 승계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나루히토가 천황이 된 후 외동딸 아이코 공주를 천황으로 올리겠다 선언하고 절차를 밟으면, 일본 역사상 여성 천황의 전례(여계 천황은 아직 전무하지만)가 없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후미히토 측에서는 이를 저지하거나 무산시킬 방법이 전무하다. 이번 생전 퇴위/양위를 통해 황실전범에 위배되거나 조항이 없다 하더라도 천황이 하겠다고 하면, 일본 정부는 천황의 의사를 저지할 수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물론 생전퇴위/양위 역시도 황실전범이 생기기 전까지는 제법 존재했었기에 전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였다.[35] 2020년 현재, 아베 신조가 부계 승계를 고집하는 것도 아직 나루히토 덴노가 차기 후계자에 대해 별말을 안하고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이다.[36] 일본어식 발음은 다이조사이(だいじょうさい). 여기서 상(嘗)이란 한자는 본디 '먹는다, 맛본다'는 뜻이지만, 가을에 거둔 햇곡식을 신령에게 바치는 제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도 쓰인다. 원래 일본 천황가는 음력 11월에 신상제(新嘗祭)라 하여 일종의 추수감사제사를 올렸고, 현대에는 양력 11월에 신상제를 거행한다. 그런데 새 천황이 즉위한 후 처음으로 거행하는 신상제는 따로 대상제(大嘗祭)라 하여 더욱 성대하게, 별개의 예법을 따라 진행한다. 대상제는 새 천황이 황조신 아마테라스와 함께 음식을 먹으며 천황으로서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는 의례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37] 사실 히사히토가 태어난 이후 기자들 앞에서 진담 반 농담 반 "난 우울증 같다."라는 말을 하긴 했는데, 아마 제대로 된 황족관 같은 게 없이 자유분방을 좋아하는 후미히토 입장에서는 히사히토의 탄생으로 차세대 천황이 될 가능성이 높은 히사히토에 대한 양육 등 그동안 본인에게 없었던 심적 중압감이 더해진 것 같다. 물론 후미히토야 자녀 양육의 대부분을 아내 키코 비에게만 떠맡기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 나름대로 그에 대한 부담감이 있기 때문에 술을 더 마신 걸로 보인다. 그러한 상태로 있던 중 큰딸 마코 공주와 코무로 케이의 결혼 문제, 친했던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퇴위 선언으로 친형의 손을 들어주는 등으로 인해, 약을 복용해야 할 정도로 증세가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38]나루히토는 술을 좋아하고 술도 잘 마시는 걸로도 유명하지만 지속적인 운동과 자기관리를 통해서 비슷한 나이 대에 비해서 상당히 건강한 편이기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름 30년 정도 이내로 장기간 천황직을 수행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39] 나름 표정이 밝은 나루히토 덴노, 마사코 황후 부부와는 다르게 얼굴이 일그러진 채 나루히토의 뒷통수를 쏘아보는 후미히토 친왕과 애써 미소짓긴 하지만 절망이 묻어나는 표정의 키코 비가 아주 적절한 대조를 이룬다. 전에는 히사히토 태어났다고 당시 황태자였던 형 나루히토에게 개기다가 뭇매를 맞고 상황역전[40] 평정심을 유지하는 마코 공주와는 반대로 후미히토뿐만 아니라 아내인 키코 비는 5월 1일 즉위식보다도 둘 다 표정이 더 좋지 않아 보인다. 사실 마코 공주나 카코 공주는 애초부터 황족의 위치에 그리 미련이 없는 상황이며 큰아버지 부부 및 사촌동생과 원만한 사이고 무엇보다 사이가 나쁜 부모가 덴노 직을 승계하던 말건 관심이 없기에(…) 안 좋은 표정을 지을 이유가 없긴 하지만.[41] 특히 마사코 황후는 이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의 국빈방문 때, 그동안 궁내청 때문에 강제봉인된 외국어 실력과 외교관 출신다운 세련된 매너로 일본 국내외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더군다나 마사코 황후는 일정 내내 생기 넘치던 모습을 보였는데, 이런 모습은 일본 국민들에게도 놀라웠던 모양인지 연일 기사가 나왔고 댓글도 많이 달렸다. '궁내청의 죄가 크다'는 등의 댓글도 눈에 띈다. 일본 국민들이 마사코 황후의 마음의 병이 누구 때문에 생긴 건지,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42] 이때 아내 키코 비 역시도 남편처럼 국빈 옆에 앉아서는 저런 짓거리를 보여주었다. 남편과 달리 키코 비는 그동안 언론들로부터 영어를 잘 한다는 평을 받았다.(귀국자녀 출신이라서인데 자세한 것은 키코 비/결혼 전 참조.) 그러나 "사실은 알려진 것만큼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하고, 그래서 공식 행사에서 부족한 영어 실력이 들통나는 것이 두려웠던 듯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43] 궁내청 공식 발표에 따르면 "천황 승계 서열 1위와 2위가 같은 비행기에 탔다가 사고가 난다면 큰일이기에, 이를 감안해서 따로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이다"라고 밝혔다.[44] KBSMBC 중계진은 왕위 계승 서열을 고려해 그를 왕세제라고 소개했다.[45] 이것도 나루히토 덴노의 요청으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이루어졌고 남은 금액은 전액 국고로 환수시켰다.[46] 2022년 11월 저택 공사 완료 후 언론 보도에는 리모델링 및 정원 개량을 포함하여 40억엔이라고 했으나 2회의 이사비용,임시거처 비용 등이 의도적으로 빠져있는 비용들이 있어서 사실상 50억엔 이상의 비용이 들어갔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이다.참고로 주간지와 인터뷰를 한 건축 전문가 주장에 따르면 이 정도 금액이면 도쿄도내에 고급 빌라 여러채를 지을 수 있는 비용이라고 한다.[47] 여기에다가 최근 방위비 증액이 추가적으로 확정됨에 따라서 자민당 내부에서는 세수 확보를 위해 차량 소지자들에게 주행세를 추가하려고 하는 등의 여러가지 말들이 나오고 있어서 인플레이션과 엔저 현상 등으로 이미 국민들의 부담이 커진 상태에서의 무차별적 세금 인상 및 추가는 눈살을 지뿌리게 하고 있다.[48] 행사를 위해서 학생들을 굳이 주말에 데리고 왔고 부부에게 화환을 주는 행사가 포함되는 등 딱 봐도 뒤에서 어린 학생들을 고생시켰을 내용들을 보여주고서는 보도에서는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에 대해서 한 네티즌은 2022년 일본에서 북조선 김씨 일가 우상화 선전을 볼 줄 몰랐다고 혀를 찰 정도.[49] 2015년 2월 23일, 55세 생일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쟁의 참상을 겪은 세대가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역사를 잘 전달하여야 한다.'는 요지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평소에도 평화주의자 아버지 아키히토의 노선을 그대로 이어받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때문에 한국과 중국 등 일제의 피해국가에서도 긍정적인 평가가 많은 편.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가 공무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과, 아이코 공주가 이지메와 같은 문제로 비난여론이 빗발치자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등, 애처가이자 가정적인 남자의 모습까지 보여주는 모습 등 여러모로 후미히토와 대비된다.[50] 가와시마 키코는 후미히토 친왕을 만나 그가 황자임을 안 후, 이전까지 쓰던 보통 말씨를 일본 황실 특유의 말씨로 싹 바꾸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면, 그때부터 황실에 시집 가겠다고 단단히 마음 먹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황실에 시집 가기를 스스로 자처했다는 점에서는, 영국의 왕세자비 캐서린 미들턴과 닮았다고도 할 수 있다. 시기상으로 보면 엄연히 캐서린 미들턴이 키코 비의 후배(?).[51] 당시 마코 공주는 가쿠슈인 초등과 6학년, 카코 공주는 3학년이었다. 어린 두 공주에게는 첫 해외순방이었다.[52] 히사히토 탄생과 형수 마사코 황태자비의 요양으로 상대적 이미지가 엄청 좋아졌다.[53] 아키시노노미야 가문 배속 시종/시녀를 통합해서 부르는 명칭[54] 2차대전으로 인해 일가 친족들이 죄다 평민으로 강등되고(신적강하) 남은 황족들은 후미히토 말고 단 한 명도 아들을 낳지 못해 이대로 가다간 황가의 손이 절손되게 생겼으니...[55] 아베 신조의 남성우월주의적 사고관은 상당해서, 여성 천황에 대해서도 명확히 반대 입장을 밝혔을뿐더러, 일본에서 결혼시 주로 남편 성을 따라가는 부부동성 문제에 대해서도 2019년 여야 대표 토론회에서 다른 야당 대표들이 전부 "본인이 성을 바꿀지 말지 알아서 선택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한 반면, 아베는 여전히 반대했다. 이것도 여론에 밀려 예전보다 두루뭉실해진 측면이 있는 것으로,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부부동성을 반대하는 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내세워 가족 해체를 바라는 공산주의자들이다"라는 무지막지한 인식을 보이기도 했을 정도였다. 덕분에 지금도 안티들에게 까이는 주요 소재 중 하나다.[56] 실제로 2019년 7월 21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가장 논의가 되는 3개 화제 중 하나가 바로 헌법 개정인데, 자민당에서는 일본 헌법에 자위대에 대한 항목을 추가하는 등 일각에서 지적되는 2015년 안보법 등의 헌법 위반 현상, 더 나아가서는 자위대 자체가 위헌 조직이라는 현상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고 야당들은 각 정당별 성향에 따라 다른 편이나 대체적으로는 이러한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다.[57] 코무로 케이는 마코 공주의 정식 약혼자가 아니었다. 약혼 의식조차도 제대로 치루지 않았기에, '약혼할 예정인 교제 상대'에 불과했다.[58] 물론 일본 언론에서 대놓고 비판하는 보도를 남발하진 않는다. 하지만 언론에서만 함부로 다루지 않을 뿐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황실 관련 스캔들에 대한 소문이 많다.[59] 더군다나 비록 아들은 아니어도 첫 자식이라 그나마 아버지에게 예쁨 받고 자라 본인 입으로도 '아버지와의 사이가 각별하다'고 말한 언니 마코 공주와는 달리, 카코 공주는 태어나는 과정부터가 눈칫밥 먹고 태어난 것도 모자라 낳고 보니 딸이라(…)[60] 당시 미치코 황후는 시어머니 고준 황후에게 악독한 시집살이를 당하며 몸도 마음도 상당히 약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뿐인 딸 사야코 공주에게만 더욱 의지한 것. 실제로 미치코 황후가 함묵증에서 벗어날 때 처음으로 한 말이 "사야코."였다.[61] 나루히토 황태자 시절과 마사코 황태자비 시절의 행보를 쭉 살펴보면, 마사코 황태자비의 임신 실패와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 악화로 인한 공무 소홀 외엔, 흠잡힐 행보들을 삼가며 조심스럽게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공무 소홀에 대해 일본 여론에서 비판이 매우 강했지만, 외국 언론들의 평은 다르다. 이와 관련된 책으로 <일본 황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가 있다.[62] 일본 여론이 워낙 거세게 날뛰며 찌라시를 흩뿌려대서 그렇지,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딱히 큰 잘못을 범하지도 않았고, 태어난 순간부터 차기 천황으로서 철저히 제왕학 교육을 받고 자란 장남을 내치고 제왕학을 일절 받지 않은 동생이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정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다. 형에게 큰 문제가 있고 동생이 반듯하다면 모르지만, 동생은 행실 논란도 극심한 인물이 아닌가.[63] '황사'라는 직위는 어디까지나 황태자에 준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을 부르는 호칭이지 진짜 황태자는 아니다. 그렇기에 나루히토 덴노가 후미히토를 황사로 둔 상태에서 후미히토를 제외한 황실의 누군가를 황태자로 임명해도 별 다른 문제가 없다. 그래서 생전 퇴위에 따른 황족들의 지위 관련 회의 결과 후미히토를 황태제로 하려고 했을 때, 후미히토 일파가 강하게 반발했을 정도.[64] 나루히토의 생애를 살펴보면, 궁중 암투물 주인공의 클리셰에 부합하는 부분이 제법 된다. 이런 사람이 권력을 잡고 내부 정리에 본격적으로 나서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65] 후미히토가 형 나루히토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뱉은 발언에 궁내청이 곧바로 딴지를 건 것, 마코 공주가 사고를 치자 후미히토 내외에게 보고하는 거의 비슷한 시점에 아키히토와 미치코 황후에게 보고한 것, 황후가 되는 마사코 황태자비의 몸 상태가 안 좋으니까 한동안 편의를 봐주겠다면서 스스로가 굽신거리는 걸 보면 알 수 있다.[66] 항우울제 같은 부류의 약은 항진균제와 더불어 독하기로 유명한 약이며, 술을 안 먹어도 정신적, 육체적 타격이 심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술까지 늘었다는 것은, 이러한 문제가 많은 약에 의한 부작용이 더욱 빨리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의미한다.[67] 실제로 코무로 케이의 모친인 코무로 카요의 금전 문제 이외의 문제나 코무로 본인의 문제 등과 같은 보도들의 과반수는 인터넷에서만 나오고 TV에서는 일절 나오지 않고 있으며, 2019년 반 코무로 세력들이 인터넷 상에서 주로 내세우는 코무로 케이의 이지메 가해자 보도도 어디까지나 인터넷상에서만 나온다. 이게 인터넷 전체에 퍼진 현재 2019년 5월 이후 각 TV에 등장하는 코무로 특집을 하는 방송국 어디에서도 코무로 케이에 의한 이지메 가해나 코무로 카요의 수상한 연쇄 사망 및 유산을 둘러싼 폭력단(야쿠자) 관여설 등을 일절 다루지 않고, 5월 이후 언론인들이나 연예인들이 의도적으로 코무로 케이 옹호론을 내세운다.[68] 실제로 2019년 4월 히사히토를 두고 살인미수 사건이 터졌을 때, 조금 이상한 내용의 기사들이 2~3개 정도 나오자, 많은 일본 대중들이 후미히토 일가가 또 정보 통제를 건다며 음모론을 떠들었을 정도였다. 사건 이후 5월 11일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중학교 학부모회의에 참석한 키코 비에 대해선 '학부모들의 항의를 막으러 간다.'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이미 일본에서 후미히토 일가가 신망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2010년대 말 기준이라 향후 변화할 여지도 있지만 쉽진 않을듯.[69] 다만 미치코 황후의 시집살이 에피소드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처음부터 놓으려고 놓은 게 아니라, 일단 태클부터 걸고 보는 황실 사람들이 후미히토에 대한 훈육에도 필요없이 참견한 부분이 있기는 했다. 장난치고 말썽을 피워서 그에 대해 훈육하려 하면 "어딜 평민이 황자께 손을 대느냐"고 한소리 하는 식.[70] 지금은 종영된 SBS 프로그램인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봐도, 이런 일은 주변에 아주 비일비재하다.[71] '황실의 망나니'라고 불리우면서 온갖 구설수에 올랐던 토모히토 친왕조차도 자신의 두 딸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를 제대로 교육시킨 것과 비교하면, 후미히토는 부모로부터 황족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조차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토모히토의 두 딸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등 한국인 관점에서는 우익-극우적으로 껄끄럽게 보이는 행동을 하지만, 그를 제외하고는 딱히 정치적으로 모난 발언을 한 적은 없으며 후미히토 일가처럼 대놓고 국민적 소동을 일으킨 적도 없다.[72] 대표적으로 조선의 세조. 아버지 세종과 형 문종이 살아있을 적에는 권력욕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으며, 형이 죽고 조카 단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 시점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종이 오래 살았으면 수양대군도 야심을 접었으리라는 게 중론이다.[73] 하지만 아키히토 덴노가 그정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가 쫒겨났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만큼 후미히토와 궁내청이 막나가면서 나루히토를 견제했던 것.[74] 성장과정에서야 정신없고 바빠서 그랬다 쳐도, 성인이 된 이후까지도 황실 질서가 개판 5분 전이 되도록 후미히토의 행위를 방관만 한 것은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다만 아키히토가 일본의 우경화에 부정적인 입장이고 그동안 후미히토의 뒤를 봐준 것이 궁내청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키히토는 후미히토를 씨앗으로 삼아 궁내청 극우세력의 폭주가 충분히 무르익기를 기다려 나루히토에게 대숙청과 함께 궁내청을 일거에 갈아엎을 기회를 물려주려 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 되었건 결국 아키히토에게 후미히토는 자식으로서 큰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 되니, 뭔가 짠할 지경이다.[75] 영국의 경우 엘리자베스 2세는 자신의 손으로 양육한 앤드루 왕자에드워드 왕자를 매우 총애했으나 맏형인 찰스 3세에게 맞서서 선을 넘는 행동은 절대 하지 못하게 조처했었다.[76] 물론 후자는 앞에서도 꾸준히 지적했듯이 자업자득의 성격이 강하다.[77] 말 자체를 못한다기보단 공석에서의(인터뷰나 결혼식에서 아버지께 인사하는 상황 등) 언변이 떨어진다. 사석에서나 비교적 분위기가 밝고 가벼운 공무/인터뷰에서는 더듬는 일 없이 잘만 말한다. 이때는 형처럼 괜찮은 톤에 자연스러운 말투를 들을 수 있다.[78] 이에 대해서 일본 국민들은 "형 나루히토 덴노와 형수 마사코 황후가 천황/황후로 즉위한 이후 국빈 영접과정에서 능숙한 영어로 언론들의 찬사를 받은 것에 대한 견제 차원이 아닌가"라는 평가가 대체적이다. 참고로 후미히토는 연설 내내 시선을 참석자들이 아니라 연설 대본이 놓여진 단상을 바라보고 있어서, 일본인들이 이를 디스하기도 했다.[79] 물론 이러한 정보는 황족들에 대해서 최대한 미화하려고 하는 궁내청의 노력인지 몰라도, 언론을 통해서 나오지 않고 그저 입소문으로 퍼져나갔다.[80] 후미히토의 어칭호[81] 나루히토 덴노의 어칭호[82] 더더욱 쇼와 시절 초창기는 절대군주에 가까웠기에 나름 이런 경향이 컸고, 패전 이후에도 이때 시종들이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쇼와가 붕어한 이후에도 쇼와 때의 관습 등을 두고 한동안 아키히토 당시 덴노 내외를 괴롭히게 만들었다.[83] 실제로 쇼와의 세 동생들 중에서 막내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을 제외한 두 사람은 자녀 없이 사망했다.[84] 현대 에쿠스 리무진 일본형 모델이다.[85] 형 나루히토와 여동생 사야코는 아버지 아키히토와 판박이 수준으로 닮았다. 특히 나루히토는 그냥 아키히토의 젊은 버전이다.[86] 큰딸 마코 공주가 후미히토를 많이 닮았는데, 어릴 적부터 미소녀라 칭해지며 황실 마스코트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아내 키코 비의 유전자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87] 사실 40대까지만해도 비교적 괜찮은 외모였는데, 술의 영향인지 50세 쯤부터 얼굴이 굉장히 망가졌다.[88] 결혼식 사진 기준으로 8등신쯤 된다.[89] 나루히토 덴노의 키는 165cm 인데 마사코 황후는 167cm, 키코 비는 166cm 정도다.[90] 게다가 모범생인 나루히토와 달리 후미히토는 학업에도 소질이 없었고 난봉꾼 기질이 다분했는데도 미치코 상황후는 저런 후미히토를 이상하리만치 제재하지 않았는데, 이 역시 루머를 부추겼다. 물론 장남 혈통을 우선하는 황실이다 보니, 상대적으로는 차남인 후미히토에게 소홀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91] 사실 어린시절이나 젊은시절을 기준으로 보면 어머니인 미치코 황후와 닮았다. 형과 여동생에 비해 키가 이상하리만치 크면서 외모도 다른 것은 모계 유전자를 많이 물려받은 탓으로 보인다.[92] 여담으로 큰딸인 마코 공주는 과거 졸업 작문에서 '한국에 인연을 느꼈다.'는 글을 쓴 적도 있었다. 이건 할아버지가 먼저 한 말인 게 함정[93] 단, 이토 히로부미 자체는 오늘날 말하는 '혐한'론자는 아니었다. 당시 조선을 문명개화하지 못한 미개국으로 보는 시선은 다른 일본인들 모두 똑같았으며, 개인적으로 한국을 증오했다기보다는 병합과 중국 대륙 침략의 가교, 즉 하나의 전리품으로 생각했다.[94] 사실 일본의 전통적인 우익들은 어디까지나 역사와 영토문제로 한국과의 갈등을 빚을 뿐이지, 그들도 인간인 이상 재특회 같은 혐한단체에서 하는 증오발언이나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사족으로 아베 신조의 부인 아베 아키에는 유명한 한류 팬으로, 과거 혐한 댓글러들에게 SNS 테러를 당한 적도 있었다.[95] 코무로 케이는 도쿄의 한 법률사무소에 사무직으로 근무하며, 히토츠바시대학 대학원에 다니면서 경영법무 공부도 하고 있었다. 정식 직원이 아니라, 1주일에 2~3일 정도 근무하는 일이라고 한다.[96] 신랑 측에서 신부의 집에 사람을 보내, 예물을 전달하는 의식. 이 의식을 거쳐야 정식으로 약혼 관계가 성립된다.[97] 일각에서는 카요의 행동을 보고 원조교제라고도 말한다.[98] 코무로 케이가 사전 동의없이 마코 공주와 상의해서 발표문을 공개해서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은 것이라든지, 코무로 케이의 친가와 관련된 유산 상속을 둘러싼 여러가지 트러블, 카코 공주가 2019년 3월 국제기독교대학 졸업식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 마코 공주를 옹호한 발언 등.[99] 문제 해결없이 후미히토 일가 전체가 1달 단위로 해외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 '이쪽은 빨리 결혼 문제 해결하기나 하고, 해외 공무는 천황 내외에게 맡겨라.'는 식의 의견이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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