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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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녹음 방식
2.1. 후시녹음
2.2. 선녹음
2.3. 동시녹음
2.3.1. ADR
2.4. 다중녹음
3.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녹음. 에두와르 레옹 스콧의 발명품 Phonautograph로 녹음한 'Au Clair de la Lune'라는 프랑스 동요이다. 1860년에 녹음. 음질이 좋지 않아 듣는 사람에 따라 무서울 수도 있으니 주의. 원래는 이런 노래다.
/ Recording

음향기록하거나, 그렇게 기록한 음향을 일컫는 말. 녹음기로 녹음할 수 있다.


2. 녹음 방식[편집]



2.1. 후시녹음[편집]


영화가 탄생한 이래로, 1927년에 워너브라더스 사가 제작해 알 졸슨이 흑인 분장을 하고 나온 <재즈 싱어>를 통해 유성영화가 탄생하자 영화계에는 혁명이 일어났다.

후시녹음은 일단 찍기부터 해서 나중에 배우들이 녹음하고, 음향을 합성했기에 소리가 서로 안 맞거나 입모양과 소리가 안 맞는 게 많았다. 그 당시는 화질도 별로 안 좋았으니... 사실, 후시녹음이 일반적이던 시기에도 동시녹음할 기술은 있었다. 네오 리얼리즘 영화도 동시녹음할 수 있는 시절에 후시녹음을 썼으니까.

한국도 옛날에는 후시녹음을 썼는데, 그래서 1990년대 이전 영화와 TV 드라마는 음성과 영상의 갭이 상당히 미묘했다. TV광고 역시 후시녹음이 압도적이다. 특히 영화의 경우 후시녹음은 꽤 오랫동안 쓰였는데, 원인은 녹음기술의 열악함과 배우들의 역량 부족 등이 주로 꼽힌다. 특히 한국 영화가 한창 제작되던 1950~60년대에는 비주얼과 발성능력을 동시에 지닌 배우의 수급이 안 될 정도로 인프라가 나빠서 발성이 뛰어난 성우와 비주얼이 좋은 배우가 협업을 해야 했고, 당시에는 제작편수가 1개월 당 몇십 편을 찍은 터에 겹치기 출연을 하는 터라 스케줄상 문제로 성우에게 맡기기도 했다. 후시녹음의 주 특징은 화면을 보면서 순발력과 정확성을 요하는 명확한 대사 구사와 배우의 외모에 맞는 미성, 느린 템포, 적절한 호흡과 감정의 강조 등이다.(참고 자료)
현대에도 게임 광고에 쓰면 효과 만점이라 한다

김태연 성우의 증언에 따르면, 성우 공채제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평양 대극장과 서울 동양극장 출신 배우들이 주로 후시녹음을 한 탓에 신파조나 이북식 억양이 기본 화술이 된 바 있으며, 민영방송이 생긴 이후 대학극 등지에서 온 연기자들이 오다 보니 화술이 바뀌기도 했다고도 전했다. 1960년대에 신성일 등 남자 주인공 목소리는 이창환이, 엄앵란 등 여자 주인공 목소리는 고은정 성우가 주로 각각 맡았다. 그 외에 남성우, 신원균, 염석주, 김순원, 남해연, 유병희, 장서일, 윤미림 등도 대역 성우로 활동했다.[1]

1970년대 들어 남주 목소리는 김수일김현직, 양택조, 김형진, 민태식 등이, 여주 목소리는 고은정 외에 옥경희, 이장순, 최수민, 이승옥 등 5~6명 내외의 성우들이 주로 맡았다. 반면 그 시절 본인 목소리를 고수한 배우는 김승호허장강, 최은희, 윤일봉, 김희갑, 복혜숙 등 일부가 손에 꼽을 정도며, 1976년 6월에 한국영화인협회 감독분과위원회 측이 자기녹음이 불가한 배우들을 빼기로 결의했으나 이마저도 무산됐다.

유성영화가 등장하기 전에는 변사가 이러쿵 저러쿵 설명해줬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성에 과장이 줄어들었으며, 1980년대 중반에는 대종상 영화제에서 배우 본인의 목소리가 하나라도 안 담기면 상을 주지 않겠다고 하자 배우들이 발성연기 실력을 점차 단련하면서 점차 쇠퇴했고,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동시녹음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까지 후시녹음은 남아 있어서 그 당시 최진실을 전담한 사람이 권희덕이었다. 2008년 영화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에서도 배우 황보라 목소리 대역은 성우 이용신이 맡기도 했다. 지금도 완구 광고에서 종종 후시녹음을 들을 수 있다. 최근에는 국산 특촬인 엑스가리온 정도만 적용된 모양이다.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객원연구원 배수경의 2015년 구술 칼럼(고은정 성우 편)에 의하면 1960~70년대 후시녹음 시대를 빛냈던 성우들은 온갖 고생을 해가며 인구에 회자됐음에도 크레딧상으로도, 영화사적으로도 존재감이 없었다고 견해를 제시했다.

그래도 후시녹음은 온갖 잡음이 섞여드는 동시녹음보다 훨씬 음질이 깨끗하다. 헐리우드에서는 아직도 배우들을 양성할 때 후시녹음을 대비해서 입모양과 음성을 맞추는 훈련도 한다. 이 때문에 동시녹음만 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 배우들은 애니메이션 성우로 투입했을때 결과물이 좋다. 후시녹음이 쓰이는 장면의 경우 카메라 앵글 외곽에서는 스탭들이 아무 일이나 한다. 나중에 다시 녹음하면 되니까. 하지만 나중이 바빠지는 것은 좀 감안해야 된다.

영구와 땡칠이를 보면, 다들 소리와 입모양이 맞는데 심형래 혼자만 입모양이 안 맞는다. 남기남 감독은 빠른 촬영을 위해 무조건 후시녹음만 선호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금도 후시녹음이 쓰인다.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북한에서는 후시녹음이 일반적이어서 더빙이 사용되었다고.

현재의 한국 실사영상물은 미국처럼 동시녹음을 기본으로 경우에 따라 후시녹음을 섞는 경우가 많은데[2], 동시녹음의 사실성과 후시녹음의 깔끔한 음질을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점은 좋으나, 후시녹음에 익숙한 배우가 많지 않아서 후시녹음 분량의 연기의 질이 낮아질때가 종종 있다. 지구용사 벡터맨이나 다찌마와 리는 동시녹음이 대세이던 시기의 한국 작품임에도 100% 후시녹음.

중국 드라마의 경우에도 후시녹음이 주류이며 특히 사극과 같은 작품에서 그런 경우가 많다. 이는 각 지역별로 다양한 방언과 언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출신 지역 방언과 언어의 억양이 묻은 채로 연기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보니 그런것이다. 그래서 외국인 배우가 중국 드라마나 중국 영화를 촬영했을 때 편한 점이 있기도 하다.

홍콩 영화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시 녹음을 많이 사용했으나 1970~80년대에는 대부분이 후시 녹음이다. 1990년대부터는 다시 동시 녹음의 비중이 늘어났으나[3], 광동어가 주 언어인 홍콩 영화에서 북경어를 사용하는 중국 배우와 대만 배우 등이 출연하는 경우 언어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인지 현재까지도 후시 녹음이 진행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비슷하게 유럽권 영화에서도 배우끼리 쓰는 언어가 다른 경우에 주 언어로 더빙 처리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국제 수출을 지향한 이탈리아 영화, 피아니스트(미카엘 하네케 영화)레토(영화)가 있다. 레토 같은 경우 러시아 배우 위주에 유태오만 러시아어를 못하는 상황이라 유태오가 입을 최대한 맞춘 뒤 더빙처리했지만, 피아니스트는 독일어 원어 연기를 프랑스어로 더빙처리해서 입모양과 대사가 따로 노는 경우가 자주 나온다. 절정은 이탈리아 영화인데 지알로를 위시한 이탈리아 공포 영화 후시 더빙은 그 질이 처참했던 걸로 유명하다.

1960~70년대 후시녹음의 전성기 당시 내로라하는 배우들은 대종상 등의 영화상을 받기 위해 무조건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을 해야 했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스페인이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후시녹음으로 유명했다. 1970년대 후반~80년대 초 민주화가 막 이루어졌을 당시 rtve의 광고나 드라마 등을 유튜브로 검색해 보면 한국 못지 않게 뭔가 어색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영화 등의 실사 영상물에서는 거의 동시녹음으로 대체되었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지금도 활발하게 사용되며,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은 시간과 예산의 문제로 대부분 아후레코(アフレコ)[4]로 통칭하는 후시녹음을 한다. 일본에서 각 분기에 TV로 정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 대부분은 노래를 부르는 장면 등의 일부 장면을 제외하면 후시녹음이다.

가끔 후시녹음을 이용해 음향 연출을 하는 감독도 있었다.

2.2. 선녹음[편집]


프리스코어링(pre-scoring) 또는 프리레코딩(pre-recording). 두 어휘를 굳이 구분할때는 프리스코어링은 사운드트랙 제작, 프리레코딩은 음향 작업에 쓰이지만, 실제로는 잘 구분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쓴다.

애니메이션에선 선녹음이 퀄리티는 더 높아진다. 영상을 먼저 제작하고 성우가 목소리를 나중에 녹음하게 될 경우 입모양과 보이스가 일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보이스가 먼저 녹음됐을 경우 배우들의 녹음된 목소리 연기를 들으면서 애니메이터들이 거기에 어울리게 애니메이션 동작 등을 바꿀 수가 있기에 퀄리티가 전반적으로 높아진다. 이 때문에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프리스코어링으로 제작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1960~70년대에는 클래식 뮤직비디오(정확히 하자면 음악영화)에서도 자주 쓰였다. 플레이백 방식이라고 하는데, 실제 공연처럼 연출하고 찍기 때문에 마이크 등의 녹음 장비들이 촬영 때 노출되면 영상의 미적 감각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이 때문에 먼저 촬영장에서 녹음 장비를 세팅해 연주를 녹음한 뒤, 다시 녹음 장비를 치워버리고 그 연주를 가능한한 그대로 반복하는 장면을 녹화하고 소리+영상의 싱크를 맞추는 다소 번거로운 편집 작업이 필요했다. 오페라발레의 경우에는 아예 녹음 스튜디오에서 먼저 연주를 녹음한 뒤 별도의 영화 세트장에서 성악가들은 립싱크를, 발레리나/발레리노들은 녹음한 소리를 BGM으로 들어가며 춤을 추는 것을 녹화하는 식으로 제작되었다.

굳이 왜 먼저 녹음을 했다가 또 찍는건가에 대한 이유는 후시녹음 음원이 너무 깔끔하거나 현장감이 없어 영상에서 보이는 현장과의 괴리감을 없애기 위함이다. 요즘 유튜브 등지의 악기 연주 영상 같은데서 사전에 여러번의 테이크와 펀칭을 거쳐 실수를 보정하여 깔끔한 음원을 확보하고 거기에 맞는 연주를 녹화해 따로 붙이는 것과는 다르며, 핸드싱크 또는 후시녹화에 가까우며, 이 선녹음 방식이 진짜 Playback 인 셈.

이렇게 복수의 작업 과정이 요구되고, 또 이 과정에서 소리와 영상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에 종종 영상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등의 고육지책을 취하는 등 지금 관점에서는 좀 어색한 대목도 눈에 띈다.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그냥 소리와 영상을 동시에 수록하는 동시녹음, 실제 공연의 경우 실황녹음 방식이 일반화 되었다.


2.3. 동시녹음[편집]


오늘날 대부분의 영상물에서 쓰이는 방식. 영상과 현장 음성을 동시에 녹화/녹음하는 것이다. 1927년 미국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한 <재즈 싱어>에서 최초로 동시녹음을 시도했고, 한국에선 일제강점기 시절이던 1935년에 이명우 감독이 <춘향전>을 촬영할 당시 국내 최초로 스튜디오 동시녹음을 시도했다. 1936년 <미몽>(감독 양주남)과 <홍길동전 후편>(감독 이명우)에서 최초로 야외 동시녹음을 시도했고, 1940년 최인규 감독이 <수업료>를 만들 때 야외 동시녹음을 진행했다.

후시녹음이 주류이던 1955년에 김기영 감독이 미첼 카메라로 <죽엄의 상자>를 동시녹음으로 만들었지만, 이마저도 5% 분량에 그칠 뿐더러 한동안 필름을 못 찾다가 2010년 한국영상자료원의 김한상 연구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발견했으나 사운드는 소실 상태이다. 1968년에는 신상옥 감독이 영화 <대원군>을 만들 당시 야외 동시녹음을 시도한 바 있다. 본격적인 동시녹음 시대를 연 장본인은 정진우 감독인데, 1977년에 토드 OA형 동시녹음카메라와 같은 당대 최첨단 동시녹음용 장비들을 들여와 1978년작 <율곡이이와 신사임당>에 처음 시도했고, 1979년 <심봤다>와 <가시를 삼킨 장미>, 1981년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등지의 동시녹음 수작들이 점차 나왔다. 그럼에도 1980년대만 해도 비싼 장비값 때문에 제작편수가 10편도 못되다가 1990년대 들어 점차 활성화됐다. TV 드라마의 경우 스튜디오에서만 동시녹음이 주로 쓰이다가 1975년 MBC가 ENG카메라를 처음 도입했고, 1982년 MBC <전원일기> 송추 야외촬영부터 처음으로 동시녹음을 시도했다. 이는 1985년작 KBS <TV문학관> '전사에서' 편의 100% 동시녹음, 1988년 MBC <천둥소리>의 첫 16mm 필름 동시녹음 시도 등으로 점차 발전을 보았다.

굉장히 생생한 주변 실제 사운드와 음성과 입모양이 맞는 사실성이 장점이나, 소음에 민감[5]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주위를 무조건 조용히 해야 했다. 옛날 해방 전의 동시녹음 영화는 방음을 위해서 물에 젖은 망석을 주위에 둘러 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그래도 잡음이 섞여 들어 갔다.[6] 현대시대라도 해도 잡음 문제는 다를 바가 없는데, 예상치도 못한 소리는 어디에서건 발생할 수 있다.[7]

디지털 4K 시대로 넘어 가며 레드의 고해상도 카메라가 크게 히트쳤으나, 소음 문제로 경쟁사에게 다시 시장을 내주어야 했다. 고해상도 장비 특성상 장비에서 발생하는 발열이 어마어마했다.[8] 이를 식히기 위해서 쿨링 팬을 돌려야 했는데, 그 팬 소음이 촬영을 방해할만큼 커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팬 소음을 감수하고 녹음한 뒤 나중에 후처리를 해주던가, 촬영을 중단하고 카메라를 식힌다음 재개하던가 해야 했다. 소리도 지극히 중요한 포르노 촬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에 일정 화질 이상의 고해상도 포르노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점도 있다.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는 레드 원보다 소음이 훨씬 커서, 조용한 실내에서의 대화 장면은 동시녹음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아이맥스 촬영을 고집하기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실내 대화 장면은 거의 다 일반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고, 아이맥스 카메라는 주로 풍경이나 액션씬을 찍을 때 사용했다.

2.3.1. ADR[편집]


ADR(Automated Dialogue Replacement)은 간단하게 설명하면 동시녹음 후 음향 소스에서 후시녹음으로 대체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부분들을 대체하는 과정이며, ADR은 동시녹음의 '하위 분류로 이런 방법도 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 동시녹음 후 반드시 동반된다고 봐도 거의 무방한 과정이다. 위에 서술된 영화드라마에서의 후시녹음, 동시녹음에 관한 설명은 기본적으로 '전면 후시녹음'과 '전면 동시녹음'을 전제로 한 설명이다. 기본적으로 붐마이크의 적정 수음 거리는 1미터 정도로 그 이상을 넘어가면 붐마이크로 수음한 동시녹음 소스를 쓰기 어렵다.[9] 이는 후시녹음 기간을 따로 잡기 어려운 TV드라마일수록 오히려 위아래 레터박스를 넣은 화면을 선호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데, 즉 '영화 같은 드라마 화면'은 부차적인 노림수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붐마이크를 편집해내기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선호되는 방식인 셈이다.

이런 조건 하에서 동시녹음을 방해하는 현장의 상황까지 겹치면, 흔히 하는 오해와 다르게 동시녹음 소스를 그대로 전부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은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10] 때문에 '전면 후시녹음' 시기나 '전면 동시녹음' 시기 같은 시기적 구분을 제외하면, '동시녹음' 촬영에는 반드시 '후시녹음' 작업이 필수 동반 된다. 그래서 ADR 작업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음향 소스로 편집하는게 가능해진다. 동시녹음 소스의 경우 트랙 분리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붐마이크 사용시 촬영 중 멀리 잡힌 소리는 이후 편집본에서 멀리 잡힌 소리로 사용 가능하고 촬영 중 가까이 잡힌 소리는 이후 편집본에서 가까이 잡힌 소리로 사용한다 같은 식은 불가능하다. 카메라 렌즈도 마찬가지지만 음향 수음 장비는 사람이 실제로 본인이 귀로 듣는다고 느끼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수음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많은 대사나 현장음처럼 들리는 효과음은 대부분 편집 과정의 일부인 후시녹음 작업에서 더해지는 소리들이다. 특히 붐마이크가 들어가는게 가능한 바스트숏 정도가 아닌 그 이상의 거리에서 찍은 숏이라면 무조건 후시녹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2.4. 다중녹음[편집]


여러 차례 녹음을 해서 덧씌우는 녹음 기술로, 오버더빙(overdubbing)이라고 한다. 다만 녹음 현장에서는 더 줄여서 오버덥(overdub)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는 더블링이라고 칭하기도. 흔히 가요와 대중음악의 스튜디오 녹음을 이런 식으로 하며, 한 사람이 모든 파트를 연주하는 원맨 밴드의 녹음도 이렇게 만든다. 먼저 기반이 되는 녹음을 만들고 그걸 들어가며 다른 연주나 노래를 녹음해 덧씌우는데, 대개 박자를 맞춰주는 리듬 섹션의 연주를 먼저 녹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무래도 더빙이 매우 쉬운 매체인 오픈릴 테이프가 개발되기 전에는 좀처럼 시도되지 않았는데, 다만 재즈 색소포니스트/클라리네티스트 시드니 베셰가 1941년에 The Sheik of Araby와 Blues of Bechet 두 곡을 이런 방식으로 시험 녹음한 적이 있다.

클래식 등 다른 장르에서도 심심찮게 쓰이는데, 유명 성악가들의 독창곡 앨범 제작 때도 스케줄이 맞지 않을 때 우선 오케스트라의 반주를 녹음해 두고 그걸 나중에 다른 스튜디오에서 들어가며 노래한 것을 녹음해 오버덥하는 식으로 제작하기도 한다. 워낙에 덩치가 큰 붙박이 악기인 파이프오르간도 이런식으로 녹음되는 경우가 많다. 다니엘 바렌보임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생상의 교향곡 3번을 녹음했을 때 각각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오케스트라 연주만 먼저 녹음한 뒤, 프랑스의 거장 오르가니스트 가스통 리테즈와 피에르 코슈로가 샤르트르 대성당과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간을 거기에 맞춰 연주한 것을 오버덥해 제작했다. 카라얀과 빈 필이 데카에서 녹음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오르간파트도 나중에 녹음되어 덧붙여졌는데, 빈 필의 높은 피치에 맞는 파이프오르간을 찾기가 어려워 제작진이 고생했다는 후문이다. 또 같은 악기가 두세 개 필요한 협주곡이나 소나타 등의 녹음을 할 때도 특정 연주자가 다른 연주자를 구하지 않고 혼자서 모든 파트를 차례로 연주해 덧씌우는 경우도 있다.

팝에서 오버더빙은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를 효시로, 비틀즈비치 보이스에서 활짝 꽃피웠다. 1960년대 이후로는 다중녹음이 일상화되어 가끔 다중녹음 트랙으로 리믹스/리마스터링한 뒤 5.1채널화 하는 경우도 많다.


2.5. 실황녹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실황녹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같이 보기[편집]



[1] 이 중 남성우는 배우로 전업했다.[2] 실외 장면은 동시녹음으로 하면 소음 때문에 잘 안 들릴 때가 있다. 특히 도심 장면은... 이럴 땐 방음을 하고 현장에서 따로 녹음하거나 (현장음을 반영해야 할 필요가 있을때 주로 선택하는 방식이다.) 후시녹음으로 믹싱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영화 <신세계>의 이중구가 등장하는 아파트 공사장 장면이 있는데, 공사 소음 때문에 나중에 따로 녹음을 했다고 한다.[3] 대표적으로 1990년대 왕가위 작품들은 모두 동시 녹음이다.[4] 재플리시 아후타레코딩구(アフター・レコーディング, after-recording)의 축약어.[5] 현장 녹음에 사용하는 마이크들은 작은 숨소리도 수음될정도로 매우 민감한 마이크라 작은 잡음도 들어오게 된다.[6] 사랑은 비를 타고가 초창기 유성 영화의 고충을 잘 보여주고 있다.[7] 이러한 이유로, 촬영장 주변을 지나갈땐 웬만하면 조용히 지나가 주는 것이 예의이다. 때때로, 제대로 공지하거나 통제하지도 않는 상태로 촬영하는 곳을 지나려다 스탭이 제재를 가하는 경우도 있다.[8] 이는 고성능 그래픽 카드일수록 거대한 쿨러가 달려 있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9] 박중훈 같은 예전 주연급 배우들 중 일부가 약간 소리치듯 연기하는 습관이 있는 원인이라 분석하기도 한다.[10] 동시녹음만 하는 작품이 있다면 그건 비용 문제다. ADR 후시녹음을 위해 배우 스케줄을 따로 빼는게 버겁거나, ADR을 할 능력이 없는 아무 경험 없는 배우만을 써서 촬영한 경우에는 동시녹음만으로 작품을 완성하기도 한다. 주로 저예산 드라마나 저예산 영화를 비롯한 독립영화들이 그런 선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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