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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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67대 내각총리대신
후쿠다 다케오
福田赳夫 | Fukuda Takeo


파일:fukuda takeo.jpg

출생
1905년 1월 14일
군마현 군마군 가네코정
(現 군마현 다카사키시 아시카도정)
사망
1995년 7월 5일 (향년 90세)
도쿄도 기타구
도쿄여자의과대학 부속 아오야마병원
재임기간
제67대 내각총리대신
1976년 12월 24일 ~ 1978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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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후쿠다 미에
자녀
후쿠다 야스오
손자
후쿠다 다쓰오
오치 다카오
친인척
동생 후쿠다 히로이치
학력
카네코마치니토코 소학교 (졸업)
타카사키 중학교 (졸업)
제1고등학교[1]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프랑스법학 / 학사)
신체
172cm[2]
정당

지역구
군마 3구
의원 선수
14 (중)
의원 대수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약력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수석합격
대장성 주계국장
중의원 의원
제27대 농림대신
제4·8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제4·10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70·73-74·78대 대장대신
제99대 외무대신
제36대 행정관리청 장관
제10대 부총리
제8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67대 내각총리대신

1. 개요
2. 생애
2.1. 출생부터 총리 임명까지
2.2. 총리 재임 시절
2.3. 총리 퇴임 이후
3. 선거 이력
4. 기타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본의 공무원 출신 정치인. 제67대 일본 총리를 지냈으며 91대 총리 후쿠다 야스오의 아버지이자 중의원 의원 후쿠다 다쓰오의 조부이다. 일본 정계사에선 라이벌 다나카 가쿠에이와 치른 각복전쟁으로 알려져있으며, 현재 자민당의 최대 파벌인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창립자이다.


2. 생애[편집]



2.1. 출생부터 총리 임명까지[편집]


1905년 군마현 군마군 카네코마정[1]에서 태어났다. 최대 정적이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것과 반대로 후쿠다는 에도 시대 마을 촌장 격인 쇼야(庄屋)를 대대로 지낸 지역 유력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후쿠다는 어릴 때부터 똑똑해서 신동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고등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당대 최고 명문인 제1고등학교를 거쳐서 역시 최고 명문 학부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이후 고등문관시험에도 수석으로 합격해서 대장성(現 재무성)에 들어가게 된다.

대장성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서 들어간지 1년도 안 된 신임 관료가 주영 일본대사관에 재무관으로 가서 3년여간 근무했을 정도였다. 이후 대장성의 핵심 부서인 주계국[2]에서 승진을 거듭해 국장의 자리에까지 올랐고[3],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왕징웨이 괴뢰정권의 재정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쇼와전공이 정부 관료들에게 뇌물을 뿌린 쇼와 전공 사건에 연루되어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되었다. 재판을 거쳐 무죄판결을 받기는 했으나, 이 일을 계기로 대장성에 사표를 내고 물러나게 된다.

대장성을 나온 뒤, 관료계의 선배인 기시 노부스케의 권유로 고향 군마현의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정치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한동안 무소속으로 지내다가, 이후 자민당에 입당했고 1958년 자민당 정조회장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인 1959년에 자민당 간사장에 임명되었고, 그해 6월에는 농림수산대신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내각에 입성하게 된다.

1960년 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 자민당 정조회장에 취임하지만, 이케다의 고도 경제 성장 정책에 "이런 식으로 가면 3년 뒤에 경제가 파탄날 것"이라고 이케다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면서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4] 이를 지켜본 기시가 자신의 파벌을 일부 떼어주어서 후쿠다는 이를 바탕으로 '당쇄신 연맹'을 결성했고 비주류의 입장에서 이케다와 대립했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는 차세대 주자로서 부각되기 시작하는데 대장대신, 당 간사장, 외무대신을 지내면서 세간에는 사토의 뒤를 이을 자는 후쿠다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2차 임기를 지낸 사토는 1968년, 차기 총재 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형인 기시의 직계 후쿠다에게 총리직을 넘기려고 했었다.

그러나 사토의 직계였던 다나카는 후쿠다에게 총리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토의 3선 도전 무드를 조성했고, 결국 사토는 총리를 한 번 더 지내게 된다. 당연히 사토의 세 번째 총리 임기는 후쿠다와 다나카의 보이지 않는 차기 총리 주자 경쟁이 벌어진 시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각복전쟁).

'일본열도 개조론'을 주창하며 대대적인 고도경제성장과 지역개발을 부르짖은 다나카와는 달리, 재무통이었던 후쿠다는 일본 경제가 안정에 들어선 만큼 균형재정과 안정적인 경제정책을 주장해 차이가 있었다. 또한 중국과의 외교관계 개선을 주장한 다나카와는 달리 후쿠다는 기시의 노선을 이어받아서 타이완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1972년, 사토가 세 번째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마침내 후쿠다와 다나카는 총리직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미 사토파 의원 대부분을 구워 삶은 다나카였던지라 결국 결선투표에서 다나카에게 패배해 총리의 꿈이 미뤄지게 된다. 그러나 후쿠다는 총재 선거 이후 "이제 곧 일본이 후쿠다를 필요로 할 때가 올것이다"라는 강경한 발언을 남겼다.

대신직에서 사임했으나, 1972년 12월 중의원 선거에서의 패배로 다나카가 초계파적인 내각구성을 하면서 행정관리청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73년, 오일쇼크와 다나카의 무리한 확장정책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다나카는 내각을 개편하면서 후쿠다를 대장대신으로 임명했고 후쿠다는 감축정책으로 인플레를 억제하고자 노력했다. 1974년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자 후쿠다는 다나카를 비판하면서 미키 다케오와 함께 장관직을 사임했다.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가 다나카의 금권정치와 록히드 사건 연루의혹을 폭로하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다나카는 결국 1974년 12월에 사임했다. 본래 다나카는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던 오히라 마사요시를 총리로 내세우려고 했으나, 시이나 에츠사부로 자민당 부총재가 "국민들이 뿔나있는 상황인데 이런식으로 나가면 앞으로 뭔일이 날지 모른다."라고 다나카를 반협박하는 바람에 결국 미키 다케오가 총리가 되게 된다.(시나 재정)

미키 내각에서 후쿠다는 다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청 장관에 임명되어 경제 안정에 주력하게 된다. 그러나 미키가 록히드 사건의 엄정 수사를 다짐하며 다나카를 압박하게 되자, 위기를 느낀 다나카는 미키를 끌어내리기 위해 자민당의 모든 계파들을 구워삶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최대 정적인 후쿠다에게도 연대를 제안했고, 총리직에 욕심이 있던 후쿠다는 이를 낼름 받아먹었다. 결국 미키파와 나카소네파를 제외한 모든 자민당 계파가 반미키로 돌아섰고 1976년 선거 패배로 미키는 결국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미키 내림)

이때 후쿠다는 재빨리 손을 쓰게 되는데, 다나카와 긴밀한 사이였던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연대를 제안했다. 오히라도 이 제안에 응해 결국 양측 사이에 밀약이 맺어지게 된다.(오후쿠 밀약사건) 밀약의 내용은 후쿠다가 2년 총리를 한뒤에 오히라에게 총리직을 넘겨준다.라는 것이었다. 오히라가 후쿠다와 연대해버리면서 다나카도 손을 쓸 방도가 없게 되어, 자민당 총재선거는 후쿠다가 단독 입후보해 투표없이 총재가 되었고 정부수반 지명투표에서 과반을 조금 웃도는 득표로 마침내 대망의 총리가 되게 된다.

2.2. 총리 재임 시절[편집]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67.jpg

1976년 12월 총리가 되기는 했지만 후쿠다 내각의 지지율은 썩 좋지는 않았다. 기시 노부스케의 직계였던지라 우익적 성향을 가진 후쿠다였던 탓에 당내는 물론 진보 성향의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힘으로라기 보다는 계파간의 밀약으로 총리가 된 탓에 신선미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었고 더군다나 당시 71세인 고령의 나이 탓에 과연 총리를 잘할수 있을까라는 의구심 어린 시각도 있었다.

이런 우려를 후쿠다는 "나는 메이지 38세"라고 말하면서 젊음을 어필했는데 후쿠다가 태어난 해가 메이지 38년이라 이런 어필을 했다. 그리고 오히라를 당 간사장에 임명하고 오히라파를 입각시켜서 당내 안정을 도모했다.

하지만 지지율이 지지부진하기는 마찬가지라서 1977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50석대 정도를 확보해서 참패하고 참의원이 여야백중에서 자민당이 소수여당으로 전락하는 여소야대로 변모해서 총리에서 조기퇴진할것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때마침 내분이 일던 사회당에서 일부계파가 탈당하며 사회시민연합이라는 정당을 따로 차리며 세력이 누수되며, 당초 예상보다는 선전하며 의석을 유지할수있었고, 이런 승리를 바탕으로 당 밖에 지원조직인 '자유국민회의'를 창설하고 우익 작곡가 이즈미 도시로를 초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파일:external/cache6.amanaimages.com/23007000601.jpg
총리 첫 해인 1976년 2월 6일 식사시간 중. 메밀국수는 후쿠다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파일:external/cache6.amanaimages.com/23007000596.jpg
총리 첫 해인 1976년 2월 6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그해 9월 28일, 적군파가 일본항공의 여객기를 납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다카 일본항공기 납치사건) 이때 적군파는 몸값 600만 달러와 적군파 6명의 죄수석방을 하지 않으면 미국인 인질부터 살해하겠다고 협박했고, 후쿠다는 "사람의 목숨은 지구보다 더 무겁다"라고 말하면서 이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 후쿠다의 이런 조치는 논란을 일으켰는데 테러리스트와 협상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뜨려서 결국 더 많은 테러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어버렸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미국인 인질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내린 결단이라는 지적도 있긴 하다.

한때 이로 인해 떨어졌던 후쿠다 내각의 지지율은 재임중에 회복되었고 후쿠다는 중국과의 외교정상화와 적극적인 동남아시아 외교를 전개했다. 이는 마닐라에서 발표한 후쿠다 독트린으로 나타나게 된다. 1978년에는 덩샤오핑이 일본을 방문해 '중일 평화우호조약'의 조인식을 가지게 된다.

당내 파벌정치의 해소를 목적으로 당원들이 참여하는 총재 예비투표제를 도입하게 되는데, 약속대로 2년이 지나 이제 밀약대로 오히라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어야 했지만 후쿠다는 "세계가 후쿠다를 원한다" 라면서 재선도전을 선언해버렸다. 이에 뿔이난 오히라는 다나카와 연대했고 후쿠다가 자신을 언제 쳐낼지 몰라 불안해하던 다나카는 오히라를 총리로 만들고자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공정한 선거를 위해서 총재 예비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당원명부는 비공개가 원칙이었으나, 다나카는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이 비공개 당원명부를 빼돌리게한 다음 자신의 조직을 풀가동해 당원들과 1:1로 접촉하면서 오히라 지지를 호소했다.

후쿠다가 오히라와의 밀약을 깬 데에는 압도적인 여론의 지지세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실제로 예비선거의 초반에는 후쿠다가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후쿠다는 당내 파벌해소라는 명분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다나카의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고 방심하는 우를 범해버렸다. 결국 여론조사와는 달리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오히라에게 큰 차이로 패배했다. 그래도 말 그대로 예비선거에 불과했던 탓에 후쿠다파의 소장파 의원들인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5]은 본선 출마를 강력하게 권유했다. 그러나 후쿠다는 이미 이전에 "예비선거에서 패배한 후보는 본선에 나가면 안되지 않나?"라고 말을 뱉어버린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결국 후쿠다는 "민심은 곧 천심이라지만 가끔 천심 중에도 이상한 천심은 있는 모양입니다. 패장은 군사를 논하지 않는 법이지요."라고 말하며 본선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후쿠다가 본선 출마를 포기한 데에는 억지를 쓰고 본선에 출마해도 결국 국회의원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본선에서는 다나카의 입김으로 패할것이 뻔하기 때문에 추한꼴이 되기 전에 깨끗이 물러난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사람들은 만약 후쿠다가 오히라와의 밀약을 깨지 않았다면 이후 다나카 천하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2.3. 총리 퇴임 이후[편집]



비록 물러나긴 했으나, 다나카의 공작으로 오히라가 총리가 된것을 잘 알고 있던 후쿠다는 비주류로서 오히라와 각을 세웠다. 사실상 오히라의 뒤에는 다나카가 있었고 세간에는 오히라 내각은 "다나카 카게(그림자) 내각"이라고까지 불리는 상황이었다. 이후 열린 선거에서 자민당이 불과 1석밖에 상실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오히라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면서 강하게 비난했고, 오히라도 지지않고 맞서서 자민당은 사상 초유의 내홍을 겪게 된다.(시토카 항쟁)

결국 국회에서 열린 국가수반 지명투표에 관례와는 달리 자민당은 극도의 내홍으로 계파별로 다른 후보에게 투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나카파 등은 오히라에게 투표했고 후쿠다도 자신의 파와 지지하는 계파(미키파, 나카소네파)들을 규합해 국가수반 지명투표에 나섰지만 결국 패배하고 만다. 이후에도 후쿠다는 계속 오히라와 대립했는데 사회당이 제출한 오히라 내각 불신임안 떡밥을 낼름 받아먹어서 자신과 지지하는 계파(후쿠다파, 미키파)들을 모두 국회 본회의에 불참시켜서 내각 불신임안을 통과시키게 해버렸다.(나카소네파는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리 되자 오히라는 사상 초유의 중참 동시선거로 이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선거 초반 여론은 자민당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으로 정권교체까지 이어질 정도의 상황이었지만, 이 와중에 오히라 총리가 돌연사하면서 여론이 급반전 되었다. 오히라가 죽은 마당에 후쿠다는 더이상 각을 세우기가 어려웠고 자민당은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게 된다.

오히라의 사망 때문에 후쿠다의 입지는 많이 약해졌고, 그 틈을 다나카가 치고 들어가 다나카는 어둠의 쇼군이라 불리며 총리를 세우고 갈아치울 정도로 뒤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다나카때문에 총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스즈키 젠코[6]가 후쿠다, 미키등과 연합하고 야당인 공명당, 민사당과도 연대해 다나카파의 2인자인 니카이도 스스무를 총재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실행했다.(니카이도 옹립구상) 결국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자민당의 원로들이 퇴장하게 되면서 후쿠다도 차세대 주자인 아베 신타로에게 자신의 파벌을 물려주고[7] 뒤로 물러나게 된다. 한편 이 니카이도 옹립구상의 여파로 다나카파에서 점점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이내 다케시타 노보루를 중심으로 다나카파가 분열되어 다나카 역시 입지가 축소되고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둘의 라이벌 관계는 마무리된다.

리크루트 사건이 터지고 다케시타 노보루가 총리에서 물러나면서 모리 등이 후쿠다를 다시 총리로 옹립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으나 아베 신타로가 반대했고, 후쿠다는 이미 늙었다면서 이를 고사했다.

1990년에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장남인 야스오에게 본인의 지역구를 물려주었다. 본래 후쿠다는 정치에 큰 뜻이 없었던 장남 야스오보다는 차남인 유키오를 후계자로 생각했다. 하지만 병으로 일찍 죽는 바람에 결국 야스오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다. 그러나 야스오가 그리 탐탁지 못했던 후쿠다는 늘 "저 녀석은 낯짝이 얇아서 정치는 못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의 예측대로 야스오는 총리직을 오래 지키지 못하고 사임해버렸다.

1995년 만성 폐기종으로 사망했다. 향년 90세.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2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군마 3구

[[무소속|
무소속
]]

46,531 (14.53%)
당선 (2위)
초선
1953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2,665 (16.46%)
당선 (4위)
재선
1955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1,090 (19.42%)
당선 (2위)
3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8,027 (27.37%)
당선 (1위)
4선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2,099 (29.27%)
당선 (1위)
5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5,378 (29.58%)
당선 (1위)
6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0,573 (29.68%)
당선 (1위)
7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9,466 (27.39%)
당선 (2위)
8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78,281 (46.20%)
당선 (1위)
9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8,736 (36.30%)
당선 (1위)
10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2,542 (30.24%)
당선 (1위)
11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8,542 (31.55%)
당선 (1위)
12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9,100 (32.93%)
당선 (1위)
13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0,500 (29.37%)
당선 (1위)
14선


4. 기타[편집]


일본 전후 정치사에서 후쿠다 다케오는 다나카 가쿠에이와 더불어 치열하게 전쟁을 치른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출신부터 성향 차이가 극명했다. 명문가 출신으로 도쿄제대 법학부, 고시 수석, 대장성의 엘리트 코스를 거친 후쿠다와는 달리 다나카는 농가의 아들로 정규 고등학교[8] 졸업장조차 없이 밑바닥부터 올라온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다나카는 자연히 집안의 배경이나 자신의 경력이 일천한 탓에 문어발식으로 인맥을 넓히고 세력을 구축해 나갔는데 이런 탓에 후쿠다는 다나카와 치열하게 다투면서도 끝내 다나카를 누르지는 못했다. 다나카는 돈과 숫자의 힘에 의존하는 정치를 했는데[9] 후쿠다는 이를 무식하다고 보면서도 결국 현실적으로는 쪽수의 힘에 당해낼 재간은 없었던 셈이다. 심지어는 후쿠다파 의원들 중에서도 다나카의 돈을 받아먹어서 X맨 짓을 한 의원들이 여러 있었을 정도였다니(...) 말 다한 셈.

명문가 출신의 거물급 정치인임에도 생각보다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여자 관계도 깨끗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은 후쿠다의 가장 큰 패착을 미키 내림에 동조한 것과 오히라와의 밀약을 깬 것에 두고 있다. 다나카를 밀어낼 결정적인 구도를 만들 기회가 있었지만 총리직에 대한 욕심이 이런 기회를 걷어차게 만들어서 결국 각복전쟁에서 다나카가 승리하게 된 것이라는 것. 물론 미키 내림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라와의 밀약을 지켰어도 다나카를 이겼을 거라는 보장도 없기는 하지만.

정책적으로는 경제통이었던 동시에 반케인스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다나카가 과도한 성장정책으로 경제혼란을 야기했던것과는 달리 균형재정과 안정적인 경제운용을 주장했다. 이에 더해 앞으로 세계경제가 자국 위주의 보호무역 정책으로 돌아설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수출 위주의 일본경제가 그런 국면이 되면 어려움에 처할수 있으니 내수 시장을 키워서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이는 예상과는 다르다. 무역장벽은 공산권 붕괴에 따른 전세계적인 시장 확대, WTO 등의 이벤트 등을 거치면서 그 이후로도 점차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꼭 그런 정책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예전과는 달리 이미 일본은 70~80년대만 해도 대규모 경제를 자랑했으므로 마냥 경상수지 흑자에만 의존하는 것에도 충분히 한계가 있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10] 이는 오늘날 중국이 보여주고 있다. 어찌보면 일본의 갈라파고스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것은 후쿠다 일지도?

동시에 기시 노부스케의 직계였던 탓에 우익적인 성향이 강했다. 비록 다나카가 추진했던 중국과의 외교 정상화를 완결짓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반중적인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성향은 자신이 중매를 서주기도 했던 기시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에게로 고스란히 계승 되었다. 또한 총리 시절에 4번에 걸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기도 했다. 당시로서야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지금이었다면 충분히 논란이 되고도 남을 문제다.[11]

포항제철의 설립자였던 박태준 총리가 모 인터뷰에서 후쿠다를 은인이라고 할 만큼 포철 설립 당시의 대장대신으로서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12] 박정희가 직접 후쿠다 부부를 초청해 1979년 6월19일부터 23일까지 방한하기도 했다. 물론 정치적으로 보자면 일본내 유력 계파 수장급 정치인을 초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많고 탈많은 통일교의 후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대장대신 재임중인 1974년에 문선명의 강연회에 참석해 문선명과 한국식으로 포옹을 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사진. 통일교는 일본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 탓에 여론이 좋지 않아 세간에서는 후쿠다와 통일교간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후쿠다는 "나는 문선명의 사상은 잘 모르지만(...) 나의 평소의 신조인 협조와 연대를 말하는 게 좋았을 뿐", "파티자리에서 무슨 말을 못하냐" 등으로 맞섰다. 어찌어찌 넘어간것 같긴 하지만, 그때 강연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후쿠다는 "문선명은 아시아 최고의 지도자"라고 하기도 했다. 흔한 정치인의 립서비스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 자민당 일부 계파와 통일교가 꽤나 친밀한 사이였던걸 감안하면 묘하기도 하다.

후쿠다 다케오: 아시아에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났다. 그 이름은 문선명이라고 한다.(アジアに 偉大なる 指導者 現る. その 名は 文鮮明と いう 事で ある) 출처
사실 일본에서 한창 교세를 확장하던 통일교의 후원자 역할을 하던게 기시 노부스케였고, 후쿠다는 기시의 후계자격인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유착 의혹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손자 후쿠다 다쓰오가 할아버지의 통일교 유착 의혹 때문에 괜히 찔렸는지 "그런 일은 추호도 없었고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뭐가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망언을 하는 바람에 국민 신뢰를 잃어, 다쓰오는 아베 암살 직후 이루어진 개각에서 당 총무회장이라는 요직에서 부간사장으로 좌천되어 3대 총리 가문 달성이라는 목표를 이루는 데에 큰 위기를 맞았다.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를 귀여워해서 그를 후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초대 명예회장으로 취임하고 세이부 라이온즈의 홈 구장 첫 경기에 시구를 하기도 하는 등 프로스포츠 쪽과도 인연이 많았다고 한다.[13]

국민영예상이 그의 재임 시기에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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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마현 타카사키시[2] 예산 편성을 담당하는 곳으로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재무성의 핵심이다. 한국 기획재정부에서 예산실이 핵심인 이유와 같다.[3] 대장성 주계국장은 거의 무조건 다음 인사에서 사무차관으로 승진하는 자리로, 대장성 관료 중 명백한 2인자다.[4] 당시 이케다 정권의 위세를 생각하면 간덩이가 단단히 부은 셈이었다.[5] 두 사람은 당시 불혹밖에 안 된 젊은 나이였다.[6] 아소 다로의 장인이자 스즈키 슌이치의 부친이다.[7] 자신이 창립한 세이와 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의 회장 자리에 아베 신타로의 아들 아베 신조가 2021년 11월 취임하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실질적인 수장은 아베였다.[8] 고등소학교(중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공업학교로 들어가서 다나카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다.[9] 참고로 한국에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쪽수 정치를 선호했던 정치인이었다. 물론 이쪽은 민주화 운동한다고 돈을 많이 뿌리긴 했지만 태생이 금수저였다는게 차이라면 차이. 그리고 묘하게 YS의 차남 김현철이 후쿠다 다케오랑 닮았다.[10] 한 마디로 외국 경제가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다.[11] 참고로 아들인 야스오는 의외로 아버지와는 달리 자민당치고 온건한 스탠스였다.[12] 박태준 총리는 후쿠다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서 도쿄까지 급히 날아간 적도 있다. 박태준 총리와 후쿠다의 인연이 상당히 깊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데 그래서 인지 박태준 총리는 후쿠다 가와 대를 이어 인연을 이어 후쿠다 야스오와도 가까운 사이였다.[13] 더불어 후쿠다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모기업인 세이부 그룹의 오너였던 쓰쓰미 가와도 가까운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