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다 야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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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군마 4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5대
후쿠다 야스오


제46~49대
후쿠다 다쓰오



일본국 제91대 내각총리대신
후쿠다 야스오
福田康夫 | Fukuda Yasuo

파일:fukuda_yasuo.png
출생
1936년 7월 16일 (87세)
도쿄부 도쿄시 세타가야구
(現 도쿄도 세타가야구)
재임기간
제91대 내각총리대신
2007년 9월 26일 ~ 2008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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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친 후쿠다 다케오
모친 후쿠다 미에
배우자
후쿠다 기요코
자녀
장남 후쿠다 다쓰오
친인척
조카 오치 다카오
학력
도쿄제1사범학교 남자부 부속초등학교[1] (졸업)
아자부 중학교 (졸업)
아자부 고등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경제학 / 학사)
신장
171cm
정당

파벌
세이와 정책연구회
지역구
(구) 군마 3구군마 4구
의원 선수
7 (중)
의원 대수
39[A], 40[A], 41 ,42, 43, 44, 45
약력
마루젠 석유 수입과장
후쿠다 다케오 비서관[2]
중의원 의원
제41대 오키나와개발청 장관
제67-69대 내각관방장관
제1-2대 남녀공동참가담당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남녀공동참가)[3]
제22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91대 내각총리대신
보아오포럼 이사장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기타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기자: "원주율은 '3.14'로 하는 것이 좋을까요? '약 3'이 좋을까요?"

"원주율이 3이면 외울 수 있어도 3.14면 외울 수 없다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나는 더 길게 말할 수 있어요. 3.14159265358…."

일본의 유토리 교육[1]

을 반대한다는 취지의 문답.


일본의 정치인. 일본 제91대 총리.


2. 생애[편집]


도쿄도에서 태어나 본적지인 군마현 타카사키시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일본의 제67대 총리를 지낸 후쿠다 다케오. 일본 헌정사상 최초의 부자 총리 기록을 세웠다. 아자부 중학교, 아자부 고등학교[2]를 거쳐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젊은 시절 석유 회사에서 샐러리맨으로서 근무하였으며, 원래는 아예 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아내인 미네 기요코와 결혼할 때 정치인의 아내는 시키지 않겠다고 서약까지 할 정도. 대학 졸업 후 마루젠 석유에 취직해 수입과장까지 승진했으나, 아버지가 후계자로 점찍은 동생 유키오가 병사하면서 1976년 회사를 그만두고 1977년부터 아버지 다케오의 비서로 근무하였으며, 1990년 아버지의 지역구이던 (구) 군마 3구[3]를 물려받아 제39회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래 7선 의원을 지냈다. 세습 정치인치고는 너무 늦은 나이인 53세에 국회에 입성했지만[4], 남들같으면 겨우 국무대신이나 맡을 6선에 총리대신에 취임한 이례적으로 빠른 출세를 경험했다.

외교가 전문이었던 아버지처럼 해당 분야에 진력하며 외무정무차관과 자민당 외교부회장을 거친 외교통이자 중국통이며, 2000년 제2차 모리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맡았다.(부장관은 아베 신조) 이후 제2차 고이즈미 내각까지 내각관방장관에 유임되어 2004년 5월 국민연금 미납파문으로 사임할때까지 3년 반(1289일)여를 재직해 최장 재임 관방장관 기록을 세웠다. 후임은 호소다 히로유키. 이 기록은 후일 2,3,4차 아베 신조 내각의 관방장관인 스가 요시히데가 경신한다.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91.jpg
제91대 총리 취임
이후 2007년 9월 26일, 아베 총리가 사임하고 열린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아소 다로 간사장을 제치고 총재에 당선되어 일본 제91대 총리가 되었다. 이는 당시 자민당 최대파벌의 사실상 오너였던 모리 요시로의 후쿠다 야스오를 밀어주기 위한 배후 조정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다. 짧은 정치경력에도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의 제자들이 가득한 정계 인맥의 힘, 그리고 권력자의 줄을 잘 타 빠르게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총리대신이 되기까지 그의 중의원 경력은 17년에 지나지 않았다.[5] 그렇게 총재가 되고 나서도 총리대신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했는데 당시 국회는 참의원은 민주당이 다수당이고, 중의원은 자민당이 다수당으로 일명 '네지레[6] 국회' 였다. 양원의 총리 지명이 불일치하면 중의원의 의결을 따른다는 헌법 조문에 따라 총리가 되었다.[7]

임기 초 모리야 다케마사 전 방위성 사무차관의 골프접대 파문, 자위대의 인도양 파견 연장 등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이때 민주당과의 대연정이 대두되어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대표와 비밀 영수회담을 가졌으나 연정은 불발되고 오자와는 대표직을 사임한다.

총리로서 후쿠다는 공무원 제도를 개혁하고 행정경비 절감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 시절의 참의원 선거 참패로 일본은행 총재 임명동의안이 번번히 민주당이 장악한 참의원에서 매번 부결되었으며, 지지율 또한 30%대에 머물렀다. 심지어 2008년 6월 11일에는 전후 헌법으로 첫번째 참의원 문책 결의안이 발동되어 자민당이 장악한 중의원에서 신임표결까지 해서 살아남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결국 2008년 9월 24일 사임을 선언하여 임기 종료. 취임일이 2007년 9월 26일이라 재임기간이 정확히 365일이었다. 아베 신조보다는 온건한 이미지로 총리가 되었지만 자민당의 몰락 크리를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후임은 아소 다로(...).

사실 후쿠다는 신중거사(慎重居士)라는 별명처럼 재임기간 중에 별다른 업적도 없고, 거꾸로 큰 실책도 없는, 그냥 묻어가는 총리가 될 뻔 했으나, 밑의 일로 나름 강한 임팩트를 주고 퇴임했다. 바로 총리 사퇴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의 질문 때문이었다.

기자: "총리의 회견이 국민들에게는 보통 남의 일처럼 들린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오늘 사임 기자회견 자리에서도, 솔직히 그런 인상을 갖게 되는군요."

(一般に、総理の会見が国民には他人事の様に聞こえるという風な話が良く聞かれておりました。今日の退陣会見を聞いても、やはり率直にその様に印象を持つのです。)


후쿠다: "기자님은 남의 일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도 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는 있습니다. 당신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그런 점도 같이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他人事の様にという風にあなたは仰ったけれども、私は自分自身を客観的に見る事は出来るんです。あなたと違うんです。そういう事も併せ考えて頂きたい。)


이 미묘한 어감으로 유명세를 탄 "당신과는 다릅니다"는 2008년 하반기 신조어/유행어 대상에 입상하기도 했고, 인터넷 유행어 대상을 타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물론 저 말이 나왔을 당시에는 당연히 국민들에게 죽어라 까였다. 애초에 사임 당시 '총리가 또 무책임하게 도망간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8] 여론이 좋을 수가 없었는데 거기서 대놓고 상대를 멕이는(?) 듯한 뉘앙스의 인터뷰까지 나왔으니... 다테마에를 중시하는 일본인의 성향을 고려하면 이 정도도 꽤 강도 높은 발언이 맞긴 하다. 참고로 해당 질문은 사임 기자회견에서 나온 마지막 질문이었다.

사실 전임후임에 비하면 대외적으로나 국내에서나 온건한 축에 속했지만[9] 실제로는 제법 냉소적인 성격이었다고 하며,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 바로 "당신과는 다릅니다" 발언. 뿐만 아니라 외국 정상과의 회담을 비롯한 공적인 자리에서도 그다지 웃는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10]

이후 2009년 중의원 선거까지는 출마하여 7선까지는 지냈지만, 2012년 선거에서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지역구를 아들인 후쿠다 다쓰오에게 물려주면서 정치 일선에서는 은퇴했다. 이후 아버지 때부터의 전문분야인 외교 부문에서 다른 나라로의 특사로 파견되거나[11] 정부의 외교 정책 자문을 해주고 있다.[12]

파일:후쿠다 야스오.jpg
총리대신 퇴임 후. 한덕수?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군마 3구


88,445 (20.32%)
당선 (1위)
초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3,501 (21.23%)
당선 (2위)
재선[13]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군마 4구
73,674 (45.99%)
당선 (1위)
3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4,517 (57.68%)
4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8,903 (62.15%)
5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8,517 (62.81%)
6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3,852 (51.91%)
7선


4. 기타[편집]


  • 한국에서도 약간 인지도가 있는데 바로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가 2008년 7월에 나온 이야기다. 그의 재임기간에 한국은 2008년, 기존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정권교체가 있었다. 또한 이명박의 취임식에도 참석했는데, 현재까지 일본의 현직 총리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마지막 사례이다.
  • 우연이지만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가 71세로 총리에 취임했고 본인도 같은 나이에 총리가 되었다.
  • 수트를 가장 잘 입는 총리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로 고이즈미 총리 때도 "노 넥타이는 꼴불견"이라고 주장하며 각료 가운데 홀로 노타이를 거부했지만, 총리 재임 이후 책임감을 느꼈는지 이후 타이 없이 컬러셔츠만 입고 나타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에 일본 측 조문 사절로 참석했다. 2012년에는 박태준 전 국무총리의 묘소에 참배.
  • 2012년에 정계를 은퇴한 이후에는 그의 아들인 후쿠다 다쓰오가 지역구를 안정적으로 물려받아 46~48대 중의원에 내리 당선되었다.
  • 클래식과 와인 애호가이며 헝가리 음악을 좋아한다. 학창시절부터 집에 당시로는 보기 드문 대형 스테레오를 들여놓고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였다고 한다. 예술 분야에 대해서도 박식해서 만남을 가진 예술인들도 감탄할 정도라고 한다. 명문 정치가 집안이라 전체적으로 매우 품위있고 귀족적인 기품을 가지고 있다. 똑같은 명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골프 정도를 제외하면 서민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고 쉽게 욱하는 성격의 아베 신조와는 정반대 스타일이다. 정치성향까지 포함해서[14]...
  • 상술한 온건한 행보 때문인지 자민당, 그것도 보수방류 출신[15]임에도 불구하고 넷 우익들이 매우 싫어하는 총리 중 한 명이다. 거의 민주당 출신 총리들과 동급 취급당할 정도.
  • 일본 국내에서는 얼굴이 침팬지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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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의력을 강조하고 교과 내용을 줄인 한국의 7차 교육과정의 모티브가 되었다.[2] 도쿄도 미나토구에 위치한 사립 남자 중고일관교로 카이세이 중학교 · 고등학교와 더불어 일본 톱클래스 명문중고교이다. 하시모토 류타로, 요사노 가오루, 다니가키 사다카즈, 히라누마 다케오, 스즈키 슌이치, 야마다 다로, 쓰무라 게이스케 의 출신 고교.[3] 소선거구제 개편 이후 지역구는 군마현 제4구[4] 아버지의 급서로 20대에 세습하는 경우도 왕왕 있고, 보통은 30대 후반-40대 초반에 세습한다.[5] 물론 이전 총리대신인 아베 신조는 더욱 짧은 경력에다 젊은 나이, 이례적으로 겨우 5선에 관방장관과 총리가 되었으나 그 역시 조부 세대의 친족에만도 두 명의 총리대신(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작은외조부 사토 에이사쿠)이 있는 명문 가문의 힘, 그리고 북한 납북자 문제라는 토픽을 잘 물어서 여론의 지지를 잡아챈 것, 마지막으로 총재선거 직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불어닥친 북풍이 승기의 요인이었다.[6] 네지레(ねじれ)에는 뒤틀림, 비틀어짐 등의 뜻이 있다.[7] 참의원, 중의원이 각각 총리지명선거를 실시하는데 참의원 1위는 오자와 이치로였다.[8] 전임 총리인 아베가 건강을 이유로 물러난지 고작 1년밖에 안됐을 때였다.[9] 일례로 2007년 9월 총리 취임 당시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놓고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무리하게 할 필요가 없다."면서 나름대로 한중 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였다.[10] 당장 위의 사진이 평상시의 모습과 같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11] 시진핑과의 비밀 회담을 하기도 했다.[12] 심지어 민주당 정권에서도 자문을 먼저 요청하기도 했다.[13]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14] 후쿠다는 중도우파, 아베는 강경 우파. 독특하게도 그 선대는 반대여서 아베 신타로가 상대적으로 중도, 후쿠다 다케오는 우파 성향이었다. 다만 이들은 모두가 기시 노부스케에서 이어지는 계파 소속이었기 때문에 이 중에서 중도라고 해도 일본 정계 전체로서는 오른쪽에 선다.[15] 아베 신조같은 파벌이다. 아버지 후쿠다 다케오가 이 파벌의 창립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