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도메 코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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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도메 코스케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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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07주니치.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7[1]

파일: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파일: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반지}}}
2006
2009


파일:1996 애틀랜타 올림픽 로고.svg
1996 애틀랜타 올림픽
{{{#8c8c8c 은메달}}}
1996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카네모토 토모아키
(한신 타이거스)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드래곤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2, 2003, 2006, 201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나인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2, 2003, 2005, 2006, 201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2, 2006년 센트럴 리그 수위타자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3, 2005, 2006년 센트럴 리그 최고 출루율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1번}}}
타네다 히토시
(1992~1997)

후쿠도메 코스케
(1999~2007)


도노우에 나오미치
(2008~2014)
시카고 컵스 등번호 1번
토니 워맥
(2006)

후쿠도메 코스케
(2008~2011)


토니 캄파나
(201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번호 1번
루이스 발부에나
(2009~2011)

후쿠도메 코스케
(2011)


브렌트 릴리브리지
(2012)
시카고 화이트삭스 등번호 1번
후안 피에르
(2010~2011)

후쿠도메 코스케
(2012)


타일러 그린
(2013)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8번
아사이 료
(2007~2012)

후쿠도메 코스케
(2013~2020)


사토 테루아키
(2021~)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9번}}}
이시카와 슌
(2015~2020)

후쿠도메 코스케
(2021~2022)


현역




후쿠도메 코스케
福留孝介 | Kosuke Fukudome

생년월일
1977년 4월 26일 (46세)
국적
[[일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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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지
가고시마현 소오군 오사키초
학력
PL학원고등학교 (오사카)
신체
182 cm, 90 kg
포지션
외야수, 3루수, 유격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95년 드래프트 1라운드 (킨테츠)[1]
1998년 드래프트 1라운드 (주니치)[역지명]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 (1999~2007)
시카고 컵스 (2008~201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11)
시카고 화이트삭스 (2012)
한신 타이거스 (2013~2020)
주니치 드래곤즈 (2021~2022)

1. 개요
2. 일본 시절 1기
3. 미국 시절
4. 일본 복귀
5. 플레이 스타일
6. 연도별 성적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본의 야구선수. 한국에서 무등아재들에겐 선동열, 이종범, 잠실아재들에겐 이상훈, 이병규, 인천아재들에겐 추신수, 대구아재들에겐 오승환 동료로 유명하다. 메이저리그 진출 이력도 있는 교타자이며, 만 45세인 2022년까지 일본 프로야구 1군 친정팀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현역으로 뛰었다.


2. 일본 시절 1기[편집]


1977년 생으로, 오사카 지역의 야구명문교인 PL학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2] 1995년도에 개최된 드래프트 회의에서 5툴 플레이어로 주목받으며 지명 순위 1순위로 무려 7개 팀[3]이 경합한 끝에 킨테츠 버팔로즈가 교섭 우선권을 따냈다. 하지만 본인은 주니치나 요미우리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라며 지명을 거부하고 사회인야구팀 일본생명에서[4] 1996~1998년 3년간 뛰다가 199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의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게 되었다.[5] 이 와중에 애틀랜타 올림픽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출전, 은메달 획득에 기여하기도 했다.[6]

1999년 데뷔 시즌부터 주전 유격수로 뛰며 신인으로서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121삼진으로 최다 삼진+1년차 선수 삼진 통산 1위[7]기록을 찍는 등 선풍기도 아낌없이 돌렸다. 흔히 이종범이 후쿠도메에게 유격수 자리를 뺏겼다고 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호시노는 이종범을 시즌 시작 전부터 외야수로 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격수 자리를 지켰던 이종범은 부상당하기 전부터 많은 실책 수로 인해 호시노 센이치 감독에게 유격수의 기본이 안 되어있는 선수라는 혹평까지 들었기에 부상을 당한 이후 3루수를 거쳐 외야수로 전향하게 되었다.[8] 즉, 1998년 후반기에 이미 이종범은 외야로 옮겼기에 후쿠도메는 이종범 자리를 뺏은 것이 아니라 무혈입성한 셈이다. 이종범의 대체자로 유격수를 보던 쿠지 테루요시골든글러브 수상 경력이 있기는 했지만 타격은 92년부터 97년까지 풀타임 기간동안 평균 .250대의 평범한 타격과 한시즌 최다 홈런은 겨우 3개, 통산 6홈런(...)을 기록할 정도로 공격력에서 아쉬움을 드러내는 선수였다. 쿠지 본인은 투수친화 구장이 홈인 팀에서만 소속되었음에도 말이었다. 92년부터 97년까지 한신에서[9], 98년부터 주니치에서 풀타임 레귤러였던 쿠지는 2000 시즌까진 준주전 유격수로 출전했으나, 2001년 이바타 히로카즈가 포텐을 터뜨리고 나서는 내야 대수비 선수로 뛰었으며, 2003년 한신으로 복귀해 은퇴 후 코치까지 했다. 반면 처음부터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처음부터 이종범을 외야수로 쓸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종범 본인도 허구연과의 유튜브 인터뷰에서 후쿠도메가 입단이 확정된 후 후쿠도메를 주니치에서 키워주기 위해 외야수로 포지션 변경을 시켰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구단의 입김 역시 어느정도 작용한 부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차세대 주니치 드래곤즈의 유격수로 생각되던 후쿠도메 역시 수비력에서 꽤나 문제를 보였다. 수비에 혹평을 받았던 이종범 못지않은 많은 에러 뿐 아니라, 세이버 매트릭스의 관점에서도 99시즌 Def -0.7 rRng 0.1 FS-3.9를 기록하며 안정성이나 범위면에서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좋지 못한 수비를 보였고, 페넌트레이스때나 일본시리즈 때나 패배로 직결되는 에러를 수도 없이 저질렀다. 후쿠도메는 99시즌부터 호시노 센이치에게 혹평을 들어가며 이종범의 테크를 그대로 밟아 00년 3루수 겸업을 거쳐 외야수로 전향한 것.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주니치 드래곤즈는 2001년 이후 이바타 히로카즈가 자리잡기 전까지 주전 유격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10]

그러나 외야수로 전향한 후, 수비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자 골든글러브급 수비와 함께 센트럴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활약하며 MVP 1회, 타격왕 2회, 베스트나인 3회, 골든글러브 4회를 수상했다. 특히 MVP와 타격왕을 차지한 2006년에는 붙박이 우익수-3번타자로 .351/.438/.653 OPS 1.091의 리그 최고 비율스탯과 31홈런 104타점 117득점을 기록하며. 홈런왕-타점왕 2관왕을 차지한 타이론 우즈와 함께 공포의 중심타선을 꾸렸다.

2006년, 2009년 두 번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하였는데, 특히 2006년 대회 준결승 한국전에서 김병현에게 결승 2점홈런을 쳐 낸 바가 있다. 이 대회 결승전에서도 9회 대타로 나와 유네스키 마야를 상대로 일본의 승리에 쐐기를 박는 2타점 적시타를 때리며 우승에 기여했다.


3. 미국 시절[편집]


2007 시즌 종료 후 FA자격을 얻으며 시카고 컵스4년간 4,800만달러의 대형 계약을 맺으며 메이저리거가 되었다.[11] 이때만 해도 마쓰이 히데키의 활약을 통해 일본의 정상급 타자들도 미국에서 통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지라 후쿠도메를 영입하기 위해 미국에서도 경쟁이 있었고, 컵스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

파일:external/mlblogsredstatebluestate.files.wordpress.com/si_fukudome1.jpg
시카고 컵스 시절
염소의 저주를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설레발이 적혀있다.


2008 시즌, 시카고 홈 리글리 필드에서 열린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시즌 개막전이자 본인 데뷔전에서 첫 타석 2루타에 이어 0대3으로 지고 있던 9회에서 사이영상 마무리 에릭 가니에를 상대로 만화같은 동점 쓰리런을 기록하며 컵스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시즌 중반까지 적절히 활약하며 내셔널리그 올스타에 뽑히는 등 성공적인 미국 데뷔를 하는 듯 했다.

그러나 후반기에 들어 대 삽질을 하며 3할을 훌쩍 넘던 타율은 온데간데없고 2할 5푼대의 최종 성적을 찍고 말았다. 신인왕 투표에서도 6위를 차지했으나 팀이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2009 시즌도 역시 시즌 초반에는 타율 3할대를 기록하며 잘 나가다가 5월 이후 또다시 삽을 푸며 역시 2할 5푼대로 시즌 종료. 특히 좌완투수 상대 타율이 1할 6푼대라는 처참한 좌상바 기질을 보이며 좌투수가 선발로 등판하는 날에는 선발 라인업에서 빠지기 일쑤였다.

2010시즌 역시 좌투수가 선발로 나올 경우 선발 라인업에서 빠지는 경우가 다반사.. 그 와중에 6월 18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인터리그 경기에서 9회말 끝내기 안타를 치며 나름대로 살아있음(!)을 과시했으나, 여전히 타율은 2할 6푼대. 8월 10일에는 팀 린스컴을 상대로 아시아선수 최초로 샌프란시스코 홈구장을 넘기는 스플래시 히트[12]를 쳤다.

2011시즌부터는 더이상 봄쿠도메가 아니었다! 다만 처음부터 평범한 성적을 냈을 뿐. 이쯤 되면 먹튀 확정. 시카고 컵스 팬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좋지 못하다고 하니 지못미

7월 29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부족한 외야진을 보충하기 위해 영입했다. 추신수그래디 사이즈모어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한 트레이드가 성립된 것. 클리블랜드에 대해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었지만 클리블랜드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쓰지 않았다고... 컵스 팬들은 드디어 꼴보기 싫은 선수 들어냈다고 환호한 반면 인디언스 팬들은 돈은 없는데 선수보강할 자신 없으니까 전력보강 시늉만 했다며 단장을 깠다. 아니나 다를까 추신수가 복귀하자마자 바로 백업으로 밀려났다.

영어로 표기,발음하기 애매한 이름(Fukudome = F*ck You Do Me)을 가지고 있어 부진할 경우 컵스 팬들로부터 이름과 비슷한 욕을 듣기도.

2012년 2월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1년 100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지만 6월에 방출되었고 7월 뉴욕 양키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한번도 콜업되지 못하고 웨이버 신세. 이적시장에서도 오퍼가 없어서 일본 복귀가 확정되었다.

여담으로 국내 팬들에게는 에만 잘한다고 봄쿠도메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본야구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한때 같은 외야수인 닉 마카키스와 더불어 추신수와 비교할만한 선수로 거론되던 시절이 있었으나, 결국은 '5월까지의 후쿠도메'와 '5월까지의 추신수' 성적만 비교되는 신세.

결과적으로 MLB에서 내리막을 탄 마지막 해를 제외하면 4년간 2할 6푼대의 애버리지에 10개 좀 넘는 홈런으로 100을 좀 넘기는 wrc+인, 나쁘지는 않지만 좋지도 않은 그럭저럭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다. 볼삼비 역시 0.76개로 선구안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수비력도 쓸만했으며 올스타도 한 번 나간 건 덤. 다만 당시에도 점차 빨라지기 시작하던 메이저리거들의 패스트볼에 마지막 해까지 적응을 못 하는 모습을 보였고, 받는 돈이 연 1000만불을 넘는 대형 계약이어서 그렇지... 5년간 fwar 4.2, 최고 커리어 하이 시즌은 2.4까지도 찍은 평균~평균 이하급 외야수 정도였다. 물론 이 선수가 2008~2012년까지 5년간 4850만불을 먹은 것을 생각하면 확실한 먹튀는 맞다. 연 평균 1000만불에 가까운 연봉을 받은 선수가 평균 WAR이 0.9도 못 되는 건 2020년대 기준으로도 전혀 돈값을 못 하는 것이다. 딘적인 예로 그보다 6년 뒤에 2000만불이 조금 안 되는 연봉을 받고 2에 조금 못 미치는 연 평균 WAR을 기록한[13]추신수가 연봉 대비 WAR을 따지면 이보다 효율적인 수준이었다.

4. 일본 복귀[편집]



2012년 12월 25일 한신 타이거스와 3년 6억엔에 계약을 맺고 국내로 복귀하였다. 타율이 2할을 밑도는 부진에 허덕이고 있다가 5월 들어서는 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왼쪽 무릎수술이 확정되면서 사실상 시즌 아웃.

게다가 2014년에는 개막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니시오카 츠요시와 수비 도중 충돌하며 니시오카가 전반기를 날려먹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본인도 타율 2할대를 밑도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한신의 대형 먹튀 계보를 이어갈 기세. 결국 6월 초순경 타율 1할대를 뚫고 들어가는 부진끝에 2군으로 강등되었다.

이처럼 정규시즌에 죽을 쑤며 한신팬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한신 타이거스가 센트럴리그 2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이후 타선에서 맹활약을 하며 한신의 2014년 일본시리즈 진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비록 MVP는 오승환이 받았지만 후쿠도메 역시 마우로 고메즈와 함께 타선에서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계약 마지막 해인 2015년에는 반등에 성공, 140경기 0.281, 20홈런, 76타점이라는 괜찮은 성적을 거두고 시즌 후에 구단과 1년 2억엔에 재계약에 성공했다. 특이사항으로 외야수로서 무실책 시즌을 보내며 주니치 시절이던 2006년 이후 9년만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2016년 6월 20일 오릭스전에서 일본통산 1500안타를 쳤고, 며칠 후인 25일 히로시마전에서는 일미통산 2000안타를 기록했다. 2016년 7월 30일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홈경기에서는 4번타자 우익수로 선발출장, 4타수 4안타 1홈런 5타점 3득점으로 맹활약하며 개인 통산 두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였다. 이날 후쿠도메는 만 39세 3개월 3일로, 1983년 4월 30일 한신전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야마모토 코지의 만 36세 6개월을 훌쩍 뛰어넘어 일본프로야구 최고령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였다. 일본어 기사

2017년에는 40세의 나이를 숨길 순 없는건지 비율스탯이 전년에 비해 다소 감소했으나, 장타는 살아있어 팀내 2위인 17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입단 초기인 2013, 2014년엔 안좋았지만 2015년부터 3시즌동안 OPS 8할 이상을 꾸준히 찍는 등 준수한 활약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전임 40대 좌익수이자 현 감독와는 달리 좌익수 수비 지표도 약간의 +를 찍고 있다. 타고난 운동능력은 아직 죽지 않은 모양.

2018년에는 41세의 나이로 5번타자, OPS 8할 후반대를 찍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최종 성적은 14홈런 72타점 .280 .389 .454

2019년에도 한신의 외야를 지켰다. 결장도 늘어나고 스탯도 많이 깎였지만, 이젠 정말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를 고려해보면 상당히 분전하고 있는 중. 특히 시즌 막판 꾸준히 안타를 쳐주며 팀의 역전 CS행에 크게 공헌했다. 9월 24일에는 10호 홈런을 치며 5년연속 2자릿수 홈런 시즌을 만들었다. 최종 기록은 103경기 출장에 10홈런 47타점, 타율 0.258 출루율 0.348 장타율 0.397.로 한신의 물타선에서 오오야마, 마르테와 함께 두 자릿수 홈런을 쳐낸 타자가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선수는 나이가 마흔 두 살이다.

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도 활약. 퍼스트 스테이지에서는 2차전에서 리드를 굳히는 적시타, 이후 다시 점수가 뒤집힌 9회에는 동점을 만드는 솔로홈런을 때려내는 등 40대의 나이가 무색하게 중심타자로 활약하였다.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도 분전하였으나 팀은 4-1로 교진에게 패하여 탈락.

2020시즌에는 43세로, NPB 전체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나이로 인해 시즌초반엔 1할대 타율로 고전중이고 좌타대타가 없는 팀 특성때문에 1군에 어쩔 수 없이 남아있었지만 7월 16일 야쿠르트전에서 동점 적시타에 결승홈런까지 때려내며 모처럼 맹활약했다. 6년만에 중견수 수비에 들어갔는데, 43세로 중견수 수비를 한 건 1956년의 이와모토 요시유키에 이어 두번째라고 한다. 16일의 활약과 기존 주전 치카모토 코지의 부진이 겹쳐 7월 20일부터는 한동안 스타팅으로 출장했었다. 43세가 중견수로 선발출장하는 정말 어메이징한 팀이다

이후 체력과 나이문제로 좌타 대타로 출장하고 있지만 성적은 예전같지 않다. 7월에는 잠깐 반등하는 듯 했으나 8월부터 다시 성적이 급락하고, 9월에는 규정을 어긴 회식으로 팀내 코로나 바이러스 집단 감염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당시 후쿠도메 외에도 주장이던 이토하라 켄토, 유망주 투수 바바 코스케 등 선수 5명에 구단 직원 2명이 집단 감염되었고 덕분에 한신은 2군 선수들을 콜업해 시즌을 치러야 했다. 나이값을 못한다며 맹비난을 받는 건 물론이고 제재금을 물게 되면서 팀내 입지도 굉장히 좁아지게 되었다. 한신과 결별하는 건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황. 결국 구단으로부터 전력외통고를 받아 이번 시즌을 끝으로 구단과는 결별이 확정되었다. 선수 본인은 현역 속행을 원한다고 하나, 나이가 43세인데다 성적이 좋지 않아 전망은 어둡다.

그러나 그의 친정팀인 주니치 드래곤즈가 영입을 발표하며 13년만에 친정팀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친정팀에서 2021 시즌을 맞게 되었고 주로 대타와 백업을 오가며 출장하고 있는데, 7월10일 5번타자로 출전하여 3안타 1홈런으로 대폭발 하여 2할5푼에 2홈런의 성적을 내고 있다. 2021년 8월 31일 한신 타이거스를 상대로 5번타순으로 선발출전해 5터수3안타 3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결정지었다. 2021년 9월 5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를 상대로 8회말 투수타석에 대타 출전하여 승리를 결정짓는 2루타를 쳐내며 팀의 2:0승리에 큰 역할을 하였고 최근 3경기 멀티히트를 기록중이다. 2021년 9월 12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상대로 7회말 원아웃 1루 상황에 투런 홈런을 때리며 팀을 역전시켰다. 이타점은 결승타가 되며 승리하였다. 2021년 9월 23일 한신 타이거스를 상대로 9회말 최강 마무리 수아레즈를 상대로 극적인 2루타를 쳐내며 패배를 면하였다.

10월 기준 백업과 선발을 오가며 시즌 200타석 정도에 2할 1푼대에 4홈런을 기록하고 있다. 출루율은 3할을 넘겨 눈은 보이는데 몸이 말을 안듣는 전형적인 노장의 스탯을 기록하는 중. 부진한 성적이지만 1할 5푼이었던 작년에 비해서는 나아진 스탯으로, 44살이 1군에서 2할을 넘게 친다는 건 어찌보면 대단하다고도 할 수 있다.[14] 이 선수는 20세기에 데뷔한 선수로 선동열이나 이종범과 같이 현역 시절을 보내기도 했고, 박용택보다 2살 많고, 한때 한신에서의 팀 동료였던 오승환 및 일본시리즈에서 맞상대했던 이대호보다도 5살이 많은 NPB 전체 최고령 선수다. 여튼 작년보다는 나아진 성적으로 선수생활 말년에 여러 물의로 무너진 자존심을 약간이나마 되찾았다. 10월 10일 경기 출장으로 NPB 통산 2000경기 출장기록을 달성, 기념행사를 가졌다.

여담으로 이날 모자를 벗어 인사를 했는데 정수리 탈모가 심하게 진행된 모양을 보여 안타까움을 샀다.

2021년 11월 20일 친정팀 주니치 드래곤즈와 연봉 총액 330만엔이 인상된 연봉으로 재계약 하여 45살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뛰게 되었다.

2022년 3월 2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과의 개막전에 3번 좌익수로 선발 출전했다. 44세 10개월의 개막 스타팅 멤버는 98년 니혼햄의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44세 4개월을 제치고 최고령 기록이 되었다. 심지어 3월 31일엔 4번 타자로 출전하기까지 했다.

이후로는 작년에도 그랬듯이 대타 롤을 수행중이다. 그러나 1달동안 안타를 하나도 치지 못하며 1개월간 13경기 17타수 무안타 타율 .000를 기록하며 천하의 후쿠도메도 이제 떠날 때가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즌 첫 안타와 타점은 5월 26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교류전 홈경기에서야 나왔다. 그리고 교류전이 끝날 때 쯤 2군으로 내려갔으나, 1군 재승격 이야기가 잊을 만 하면 나왔다. 그러다가 결국 9월 8일자로 현역 은퇴의 뜻을 밝히며 길었던 현역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기사 네이버 스포츠 기사[15]

2022년 9월 2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에서 투수 다니모토와 교체되어 9번 우익수로 출전하여 인생 마지막 수비를 마친 후 9회말 선두타자 이후 두번째 타자로 출전해서 현역 마지막 은퇴경기 타석에서 하타케를 상대로 1구 볼 2구 타격하여 짧은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되며 선수인생 마지막 타석을 끝마쳤다. 타츠나미 카즈요시 감독과 후쿠도메 모두 눈물을 보이며 후쿠도메 본인이 평생 40년가까이 해온 후쿠도메 야구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팬들도 모두 박수치며 보내주었다.

5. 플레이 스타일[편집]





최전성기였던 2006년의 타격폼.
일본 시절 1기의 후쿠도메는 그야말로 센트럴리그 최강의 타자중 한 명. 타격 능력-출루 능력-장타력 등 모든 면에서 리그 최고급 활약을 펼쳤다. 2000년대 주니치는 넓디 넓은 나고야 돔을 위시한 강력한 투수력을 바탕으로 수비 중심의 팀 컬러를 펼쳐나갔는데, 이 와중에도 붙박이 3번 타자-우익수로 자리 잡으며 4번 타순의 타이론 우즈와 함께 막강한 클린업 듀오를 만들어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타격 능력은 정평이 나있었다. 1학년 여름부터 5번 타자, 가을에는 4번 타자를 따내는 등 타격에 있어서 천재적인 감각을 보여주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후에는 파워까지 초고교급으로 성장하며 프로 구단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2001~2002년 즈음에는 그립을 얼굴 정면에 놓고 임팩트 순간 방망이 헤드가 투수를 향하는 약간의 오픈 스탠스 타격폼을 사용했는데, 이 폼으로 몸통의 회전력과 방망이의 원심력이 극대화되어 3~40개의 2루타, 2~30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장타력이 큰 폭으로 향상되었다. 2003년까지 이 폼을 유지했으나 2004년의 왼손 엄지 손가락 부상 이후 타율이 .277까지 떨어지자 입단 초기에 사용한 일반적인 스퀘어 스탠스 타격폼으로 타격폼 변화를 시도, 대성공을 거두며 2005~2007 기간 동안 엄청난 타격 스탯을 기록한다. 최전성기의 타격폼을 보면 방망이를 왼쪽 어깨 위에 세워놓고 등쪽으로 조금 눕히며 준비자세에서 손목에 드는 힘을 최소화했다. 불필요한 힘의 소모 없이 테이크백-스윙에서 모든 손목 힘을 사용하며 장타력이 자연스럽게 향상된 것. 이후 테이크백 과정에서 남은 손목 힘을 활용해 배트를 컨트롤하여 여러 코스의 공을 대처 할 수 있게 되고, 거기다가 본래 가지고 있던 천부적인 컨택 능력 + 배트 스피드가 더해지니 상대하는 투수로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타자.

한신 시절부터는 왼손 엄지의 사정이 나아지며, 다시 초기의 폼으로 돌아왔다. 복귀 시점에 이미 만 36세였던 만큼 떨어진 장타력을 보완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였는데, 극악의 부진 + 부상이 겹치며 2군으로 강등당하는 수모까지 당했다. 2군에서 스윙을 또 다시[16] 컴팩트한 스윙으로 바꾼 것이 효과를 보며 2019년까지 나이를 잊은 듯한 활약을 보였다.[17]

수비를 살펴보면 유격수 수비를 보던 시기에는 빈말로도 잘 한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딱 유격수 평균만큼 하는 수준. 3년 통산 수비율 .968[18]을 기록하며 결국에는 외야로 컨버전. 허나 외야수로서는 골든글러브 5회 수상이 증명해 주듯 리그 수위급을 다투는 수비력을 갖췄었으며 2000년대 NPB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강견의 소유자로도 유명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4년 연속으로 10개 이상의 보살을 기록했으며, 2005년에는 141경기 무실책 12보살을 기록하며 수비율 1.000을 달성하기도 했다.


6.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NPB)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19]
1999
주니치
132
526
131
25
2
16
76
52
4
50
121
.284
.359
.451
.810
3.2
2000
97
368
80
18
2
13
50
42
8
45
79
.253
.350
.446
.796
2.6
2001
120
442
94
22
2
15
51
56
8
56
90
.251
.352
.440
.792
2.5
2002
140
608
186
42
3
19
85
65
4
56
96
.343
.406
.537
.943
8.3
2003
140
617
165
30
11
34
107
96
10
78
118
.313
.401
.604
1.005
8.3
2004
92
404
97
19
7
23
61
81
8
48
93
.277
.367
.569
.936
4.1
2005
142
612
169
39
6
28
102
103
13
93
128
.328
.430
.590
1.020
8.1
2006
130
578
174
47
5
31
117
104
11
76
94
.351
.438
.653
1.091
10.5
2007
81
348
79
22
0
13
64
48
5
69
66
.294
.443
.520
.963
5.1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20]
2013
한신
63
241
42
11
0
6
18
31
0
28
43
.198
.295
.335
.630
0.7
2014
104
367
79
8
0
9
20
34
1
47
48
.253
.349
.365
.714
1.3
2015
140
569
139
24
3
20
53
76
1
65
75
.281
.361
.463
.824
4.8
2016
131
523
141
25
3
11
52
59
0
61
78
.311
.392
.453
.845
3.5
2017
127
526
116
20
3
18
68
79
1
77
92
.263
.373
.444
.817
2.7
2018
123
499
116
26
2
14
57
72
2
73
90
.280
.389
.454
.843
1.7
2019
104
403
89
16
1
10
39
47
0
49
85
.256
.347
.394
.740
-0.1
2020
43
92
12
2
0
1
3
12
0
11
31
.154
.250
.218
.468
-0.6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21
주니치
91
216
42
12
0
4
17
18
0
23
56
.218
.301
.342
.643
-0.2
NPB 통산
(17시즌)

2000
7939
1951
408
50
285
1040
1075
76
1005
1483
.287
.380
.487
.867
66.5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2008
CHC
150
590
129
25
3
10
79
58
12
81
104
.257
.359
.379
.738
1.4
2009
146
603
129
38
5
11
79
54
6
93
112
.259
.375
.421
.796
2.4
2010
130
429
94
20
1
13
45
44
7
64
67
.263
.371
.439
.809
1.2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2011
CHC/CLE
146
603
139
27
3
8
59
35
4
61
110
.262
.342
.370
.712
-0.5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2012
CHW
24
51
7
1
0
0
2
4
0
8
9
.171
.294
.195
.489
-0.2
MLB 통산
(5시즌)
596
2276
498
111
13
42
264
195
29
307
402
.258
.359
.395
.754
4.2

7. 관련 문서[편집]




[1] 입단 거부 후 사회인야구팀 일본생명 입단.[역지명] [2] 수많은 일본프로야구 선수들을 배출했다. 키요하라 카즈히로, 타츠나미 카즈요시, 쿠와타 마스미, 마쓰이 카즈오, 마에다 켄타, 이마에 토시아키[3] 킨테츠, 주니치, 닛폰햄, 요미우리, 롯데, 오릭스, 야쿠르트[4] 근데 아이러니한 건 일본생명 소유의 야구장 닛세이 구장이 과거 킨테츠 버팔로즈의 홈구장이라는 것. 참고로 닛세이 구장은 1997년 철거되었다.[5] 당시에는 역지명제도가 있어 자신이 원하지 않는 팀에 지명된 고등학교 3학년생은 대학교에 입학해 4시즌을 뛰거나, 일본 사회인야구팀에 3시즌을 뛰면 본인이 원하는 팀으로 갈 수 있었다.[6] 당시 한국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도 맹활약해 14:4 콜드게임 승을 이끌어 냈다.[7] 2021년 사토 테루아키가 갱신했다.[8] 다만 98년의 이종범의 유격수 수비는 세이버 매트릭스의 관점에서 보면 Def 5.0, RF4.57, rRng3.1, rErr-0.4, rDP-1.4, FS1.3을 기록하면서 혹평을 받은 것에 비해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는데, 이러한 세이버 스탯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당시 일본프로야구에서 에러가 많았던 이종범의 수비는 혹평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다가 호시노 본인이 우노 마사루의 예능수비에 학을 뗀 나머지 유격수 수비에서 안정성과 기본기를 상당히 중요시 여겼다는 말도 있다.[9] 이 시즌 종료 후 준주전 외야수이던 세키카와 코이치와 함께 트레이드로 한신에서 주니치로 이적했다. 주니치에서는 타이호 야스아키야노 아키히로가 한신으로 이적했다.[10] 그 이바타와 2루수 아라키 마사히로 두 명은 아라이바 콤비를 만들며 역대 최고의 키스톤 콤비가 되었고 이 둘은 주니치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바타가 요미우리로 간 2014년부터 또 한동안 유격수가 안 나타났다가 2017년 교다 요타가 나타나 신인상을 타고 그대로 주전을 굳히나 했으나, 그 교다마저 2022년 감독 눈 밖에 나며 시즌 종료 후 요코하마로 트레이드되었고, 결국 신인 츠치다 류쿠가 22시즌 중후반부터 주전이 됐다.[11] 후쿠도메는 이미 FA를 얻으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중견수를 보던 외국인 선수 알렉스 오초아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하며 주니치는 외야 공백의 대안으로 이병규를 영입한다. 하지만 이병규는 2007년 일본시리즈에서 팀내 최다타점 기록한 걸 제외하고 기대 이하의 성적을 올렸고, 결국 중심타선 + 외야 한 자리의 공백은 세이부 라이온즈의 강타자 와다 가즈히로를 FA 영입하는 것으로 메웠다.[12] 우측 담장을 넘기는 장외홈런을 말하는 것으로 오라클 파크는 우측 담장 바로 뒤에 맥코비만이 있어 오른쪽 장외홈런을 치면 공이 바다에 빠지는 진풍경을 연출하게 되는데, 이것을 스플래시 히트라고 부른다.[13] 이쪽은 수비에서 WAR을 꽤 깎아먹었다.[14] 반대로 생각을 조금 비틀어서 해 보면 이 정도의 스탯을 기록하는 노장 선수 하나를 넘는 선수가 없어서 전전긍긍하는 주니치의 코너외야 뎁스가 얼마나 한심하기 짝이 없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뭐 주니치 팀 컬러가 세대교체가 빠르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라키 마사히로야마모토 마사처럼 40이 넘어도(야마모토 마사는 50세까지도 1군에 있었다) 1군 레귤러인 선수가 많던 팀이 주니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4456555. 그나마 시즌 도중 고졸 2년차 오카바야시 유키가 스타팅으로 자주 모습을 보인 덕에 본래의 목적인 전문 대타로 다시 뛸 수 있었다.[15] 공교롭게도 1주일 뒤에 한신 시절 팀 후배였던 이토이 요시오도 은퇴 선언을 하게 된다.[16] 주니치 시절부터 부진할 때마다 팬들의 눈에 보일 정도로 큰 폭의 타격폼 변화를 가져가는 것으로 유명했다.[17] 2018년 즈음부터는 방망이를 홈플레이트 쪽으로 눕혔다. 은퇴까지 이 타격폼을 유지하는 중.[18] 197경기 24실책[19] 2013년까지는 http://blog.naver.com/ever_17의 자료, 2014년부턴 http://1point02.jp/op/gnav/leaders/pl/pbs_dashboard.aspx?sn=2015&lg=0&tm=0&ps=0&sl=1&sr=0&pn=-1 이용[20] 2013년까지는 http://blog.naver.com/ever_17의 자료, 2014년부턴 http://1point02.jp/op/gnav/leaders/pl/pbs_dashboard.aspx?sn=2015&lg=0&tm=0&ps=0&sl=1&sr=0&pn=-1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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