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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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
JR福知山線 (宝塚線) 脱線事故
파일:external/i.huffpost.com/slide_347221_3676128_free.jpg
발생일
2005년(헤이세이 17년) 4월 25일
오전 9:18 (JST)
사고일로부터 6904일
유형
탈선
사고원인
과속 및 ATS 설치 미흡



발생 위치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쿠쿠치 3쵸메 27
(兵庫県尼崎市久々知3丁目27)
인명피해
사망
107명
부상
562명
운영기관
JR 서일본
사고열차
열차번호
도시샤마에행 쾌속 5418M
차량
207계 전동차 Z16+S18 편성
노선
후쿠치야마선
(JR 타카라즈카선)

파일:external/www.jijoweb.com/x422005050201.jpg
사고 당시 앞에 있던 차량 (Z16편성 4량) 의 사고 전의 모습
파일:attachment/0006_1.jpg
사고 당시 뒤에 있던 차량 (S18편성 3량) 사고 후의 모습[1]

1. 개요
2. 전개
3. 원인
4. 영향
5. 유사 사고
6. 영상
7. 기타



1. 개요[편집]


2005년 4월 25일에 발생한 철도사고로 토사 쿠로시오 철도 스쿠모역 충돌사고, JR 우에츠 본선 탈선사고와 함께 '2005년 일본철도 3대 참사'로 불리고 있다. 이 사고로 승객과 승무원 포함 107명이 숨졌고 562명이 부상을 당했다.[2]

외국에서는 아마가사키역 주변에서 일어났다 해서 '아마가사키 탈선 사고(Amagasaki derailment)'라 한다.

2. 전개[편집]


사고 당일 아침 9시 18분경,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서 7량 편성의 후쿠치야마선 JR 서일본 쾌속열차가 탈선해 인근 "이퓨전 아마가사키(エフュージョン尼崎 2002년 준공)"라는 아파트[3]를 들이받았다. 맨 앞 선두차량은 아예 건물 1층 주차장(필로티) 안으로 들어가서 주차된 오토바이 • 자전거 • 차들과 함께 뭉개졌고, 두 번째 차량(2호 차량)은 건물(아파트 모퉁이)에 부딪혀 뭉개지면서 연이어 탈선된 3, 4호 차량들과 나머지 차량들이 밀려들어 짓뭉개졌다. 그로인해 첫 번째와 두 번째 차량에서만 9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고 열차는 이타미역을 지날 때 정차위치를 오버런했다. 당초는 8m 오버런했다고 보고되었으나 실제로는 72m 정도인 것으로 밝혀졌다. 기관사와 차장이 불이익을 두려워해 축소 보고한 것. 더 자세히 말하자면 기관사가 열차 내 전화시스템으로 선배였던 차장에게 연락해서 이번 일을 눈감아 달라고 부탁했고, 차장은 이 말을 알아듣고는 축소보고했다. 보고를 열차 내 전화로 차장이 하기 전에 맨 뒷칸서 열차가 제대로 안 서는 바람에 늦었다며 항의한 손님이 있었다고 한다. 오버런 한 것을 제 위치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이미 1분 20초 정도 지연되어 있는 상태였고, 열차가 츠카구치역을 통과하여 아마가사키역으로 가는 동안, 우측으로 커브를 도는 구간이 있으며[4] 여기는 속도제한이 70km/h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관사는 마음이 조급해졌는지 무려 116km/h의 속도로 사고 구간에 진입하였다.[5]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급히 비상제동[6]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원심력으로 차량은 붕 떠버린 상태였다.

파일:external/i.huffpost.com/slide_347221_3676128_free.jpg
참고로 사진에서 탈선해 맨션에 제일 붙어있는 칸은 2호차다. 1호차는 아예 건물 안까지 밀려들어가 보이지도 않는데, 당시 뉴스를 접한 시청자들은 선두에 있던 찌그러진 차량이 2호차인 것을 알고 경악했다고 한다.

[ 사고 당시 2호차 내부. 충격적일 수 있으니 열람 주의. ]
파일:후쿠치야마선탈선사고_열차내사진.jpg

선로에서 불과 약 6m 떨어진 곳에는 아파트가 있었는데, 선두차량부터 아파트에 충돌하면서 정지했고, 편성된 전동차 중 2호차와 3호차가 잭나이프 현상[7]을 일으키며 아파트에 포개져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4호차와 5호차는 선로에 널브러졌으나, 6호차와 7호차는 탈선하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해당 열차가 지하철이다보니 승차권을 사면 해당 구간의 아무 보통열차나 탈 수 있어 정확한 탑승인원은 파악하기 어려우나 700명 정도가 승차하고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당시 반대편 선로에는 특급열차[8]가 진입하고 있었는데, 사고를 목격한 한 여성(47세)이 순간 기지를 발휘, 철도건널목비상버튼을 눌러 마주오던 특급열차를 정지시켰다. 자칫 발생할 뻔한 2차 참사를 방지한 공을 인정하여, 일본 정부는 이 여성에게 홍수포장(紅綬褒章 こうじゅほうしょう, Medal with Red Ribbon)을 수여하였다.

또 사고 현장인 아파트 근처에 있는 "일본 스핀들 제조(日本スピンドル製造株式会社)"[9]라는 회사 직원들이 소방관들의 구조활동에 도움을 줘서 이 회사 대표 또한 홍수포장을 받았다.

3. 원인[편집]


우선 사고 구간은 곡선반경 300m의 급곡선으로 본래에는 없었던 구간이나 1997년 JR 도자이선의 개통과 함께 직결운행 및 JR고베선 아마가사키역과의 연계를 위해[10] 부득이하게 이설되어 급곡선 구간이 만들어졌다.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었으나, 시뮬레이션 결과 사고 구간의 한계속도는 106km/h인 것으로 드러났다. 처음에는 133km/h이 넘어가면 차량이 전복된다고 발표하였으나, 이것은 승객이 아예 탑승하지 않은 빈 차일 때 기준이고 실제로 승객이 탑승한 경우는 이보다 훨씬 위험하다. 더군다나 입석까지 흔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하다. 결국 과속으로 인한 탈선사고인 것이다. 해당 구간의 ATS 장비가 구형이라 참사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JR그룹 각 사는 제한속도 초과를 막을 수 있는 ATS-P나 ATC 같은 유형의 신호시스템을 차근차근 적용 중이었으나, 후쿠치야마선은 ATS-P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된 열차의 경량화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열차는 통상적으로 일정한 충돌강도를 갖추도록 되어 있고, 물론 해당 207계 전동차는 그 조건을 만족했지만, 전면 충돌강도에 비해 측면 충돌강도가 미흡하여 사고를 키웠다는 이야기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관사의 과실, 그리고 안전장치 문제를 원인으로 단정지을 수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과도한 경쟁이 있었다.

교토(都), 오사카(大), 고베(戸)에서 각 한 글자씩 따온 이른바 케이한신(京阪神) 지역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철도회사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곳이다. 주요한 도시 구간마다 어김없이 두세 개의 철도회사가 역 짓고 선로 깔아서 열차 돌리는, 트랜스포트 타이쿤이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동네다.

이러한 경쟁은 물론 철도 서비스의 향상을 가져오기도 했다. 예컨대 JR 서일본은 고속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속달형 전철인 '신쾌속'은 통근용 전철인데도 무려 최고속도가 130km/h며 표정속도85.2km/h에 달한다. 한국의 서울-춘천 경춘선 ITX-청춘 표정속도에 맞먹는 수준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른 통근형 전철인 수도권 전철 경강선 표정속도가 약 67km/h에 지나지 않을 정도.[11] 심지어 역간 구간 최고속도인 110km/h도 여기에 못 미친다. JR그룹의 이런 고속화에 맞서 사철은 JR에 비해 더 저렴한 운임을 내세워 경쟁하고 있다. 철도 운행의 정시성도 칼날같이 지켜져서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JR 서일본이 받던 찬사의 이면에는 열차 운행시간을 초 단위로 점검하며 진행된 기관사들에 대한 압박이 있었고, 이것이 사고의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도 드러나면서 크게 비판받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고 기관사인 다카미 류지로(高見隆二郞)는 23세의 젊은이로, 경력이 11개월밖에 되지 않는 초보였다. 비용을 절감[12]하기 위해 충분히 숙련되지 않은 초보 기관사를 현업에 배치하였고, 그는 열차 조작에 미숙한 나머지 오버런을 범하고 열차를 지연시키고 말았다. JR 서일본은 이러한 경우 '일근교육(日勤教育)'을 부과하곤 했는데, 그게 교육이라기보다는 군기훈련에 가까운 형태여서 기관사들은 대단한 부담감을 느꼈다고 한다. 일근교육을 받을 때에는 근무조에서 제외되어 업무시간 내내 교육만 받는다. 그런데 그 교육이라는 게 남들 눈에 잘 띄는 곳에서 리포트 쓰기, 사규 옮겨쓰기, 제초·청소(선로에 떨어진 비둘기 똥을 솔로 닦아내는 작업), 상사 면담(말이 좋아 면담이지, 사실상 쌍욕과 폭언.)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실상 징벌적 조치다. 이미 2000년에 일근교육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 있을 정도. 결국 지연된 열차를 회복하고자 무리한 운전을 하다가 참변을 부른 것.

제대로 숙달되지 않은 사람을 기관사로 배치한 것도 회사의 잘못인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통근시간대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많이 몰리고, 연착이 발생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각하는 사고가 터지기 때문에 각 철도 회사에서 더욱 신경쓰는 시간대이다. 따라서 통근시간대의 열차 운전에는 충분히 숙련된 베테랑을 투입하며[13], 신참 기관사는 사람이 적은 새벽이나 낮 시간대에 투입하거나 아니면 애초에 어느 시간대에 투입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고강도로 숙달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황이 비슷했던 JR 동일본을 예로 들면, 이를 잘 알고서 이미 1990년대부터 안전관리와 기관사 및 차장 교육을 철저히 진행하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엔 보조기관사로 일하며 주기관사 옆에서 보고 배우는 식으로 연수를 진행하고, 승객이 많지 않은 낮 시간대에 운전실습을 시키고[14] 운전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정기관사로 승진하지도 못하고 실습기관사로 계속 배치하도록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가하였다. 그러나 JR 서일본은 고작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안전관리를 소홀히 하고 승차인원이 많아 가장 신경써야 하는 출퇴근 시간대에도 경력이 안되는 신참기관사를 단독으로 운전대를 잡도록 투입하는 등 교육도 제대로 안한 것. 이 점이 밝혀지면서 JR 서일본은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

4. 영향[편집]


대형 참사로 불리던 토사 쿠로시오 철도 스쿠모역 충돌사고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사고가 터져서 일본 사회에 몰고 온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 사고 노선은 55일간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 사고 당시 일부 JR 서일본의 직원들이 사고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음에도 볼링대회를 즐기고 낮술을 곁들인 점심을 먹었던 사실이 보도되어 큰 비난을 받았다.
  • 사고 이후 JR 서일본 2대 회장이자 초대 사장인 츠노다 다츠오(角田達郎) JR 서일본 고문이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지병인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 사고 차량인 207계 전동차는 JR 서일본의 코퍼레이트 컬러인 파란색 띠가 둘러져 있었으나(구도색 열차모습), 사고의 악몽을 연상시킨다는 여론으로 남색과 오렌지색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제작된 후속 모델인 321계 역시 남색과 오렌지색 띠를 둘렀다.(신 도색 모습)[15]
  • 일본의 철도모형 제작업체인 TOMIXKATO는 207계 모형의 생산을 중단하였다. JR 서일본 홈페이지에서 PDF로 제공하던 종이 철도모형에도 207계는 삭제되었다. 현재는 TOMIX와 KATO 모두 207계를 생산 중이나, 변경된 도색 모델로만 발매 중이다.
  • 지나치게 빡빡한 열차시각표가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받자, 이를 개정하여 후쿠치야마선 전 열차가 종전에 비해 운행소요시간이 늘어났다. 사고 구간의 제한속도는 70km/h에서 60km/h로 낮아졌다.
  • 2006년 3월 시각표 개정 때 산요신칸센 500계 노조미 소요시간이 2분 늘어나 최단 2시간 21분에서 2시간 23분으로 늘어났다.이전에는 최고속도를 304km/h로 내야 여유있게 정시운전을 할 수 있었다.
  • 충돌한 아파트는 JR 서일본에서 매입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주민들은 모두 이주하였다. 2018년에야 추모 시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위치
  • 이 사고보다 앞선 2003년에 일어난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 유족 17명이 JR 서일본 노동조합 측의 초청으로 이 사고 추모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 사고 이후 JR 서일본 홈페이지에는 이 사고에 대한 사과문이 메인에 올라가 있다. 홈페이지를 리뉴얼하면서도 사과문을 유지하고, 사고 개요와 사고 후 반응, 사고에 대한 대응에 대한 페이지를 전부 메인페이지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해 놨다. 심지어 한국어판 홈페이지에도 이 사고를 언급하는 안전 헌장을 띄워놓고 있다. # 어지간한 사고는 흑역사 처리하고 덮으려고 하는 기업들과 비교하면 반성은 확실히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16] 그러나 반성과는 별개로 JR 서일본은 사고 당시에서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직원 대접과 소홀한 차량관리 때문에 언제 비슷한 사고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블랙 기업으로 여전히 악명높다.[17]
  • 2017년 1월 3일에는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 아카하타 단독보도로 청취 조사에 응한 JR 서일본의 운전사의 증언을 기록한 필기 내용이 정보 공개를 통해 밝혀졌다.#

5. 유사 사고[편집]



  • JR 닛포 본선 탈선전복사고(JR日豊本線脱線転覆事故) : 이 사고 역시 위의 우에츠 본선 탈선사고와 비슷하다. 2006년 9월 17일, JR 큐슈 소속 특급열차 '니치린'으로 운행중이던 485계가 미나미노베오카역에 진입하던 중 전차선의 이상을 발견하고 급정지했는데 정지 직후 회오리 바람에 열차가 날아갔다. 참고로 이 회오리바람은 주위에 접근 중이었던 태풍 산산의 영향으로 발생한 적란운에 동반된 바람이었다. 해당 열차는 이미 태풍의 영향으로 발생한 강풍으로 서행하면서 약 40분 정도 지연되어 노베오카역에 도착했고 강풍이 계속되어 미나미노베오카역에서 운행종료를 할 예정이었다. 사고가 났을 때도 시속 25km로 서행운전. 이 사고로 6명이 부상당했다.




6. 영상[편집]


시뮬레이션으로 돌린 영상.(연령 인증 필요)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량 내에 수백명에 달하는 승객들이 있었다.

저는 분해서 분해서 참을 수 없습니다.

○○의 생명을 빼앗고 두 사람의 미래를 빼앗고

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JR그룹이 원망스럽고 원망스러워서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있어도 괜찮나요? 괜찮을 리가 없어요.

벌레 잡듯이 ○○을 죽이고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이 싸움에서 질 수는 없어요.

저를 지옥으로 떨어트린 JR과 싸워주세요.

-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로 사망한 남성의 연인(32)이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



사고 2개월 뒤의 사고 구간 영상
(1:05~18초 특히 주목)

안내방송 내용:

다음은, 아마가사키, 아마가사키역입니다. 이번 역에서 JR 고베선 고베 방면과 JR 도자이선으로 갈아타실 수 있습니다. JR 타카라즈카선에서의 탈선 사고로 인해 아마가사키에서 타카라즈카 구간에 대해 열차의 운행을 중지하였으나, 오늘 6월 19일부터 운전을 재개하였습니다. 이용해주시는 고객님들께 장기간에 걸쳐 큰 불편과 폐를 끼쳐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사상 최악의 참사 Runaway Train로도 만들어졌으며 전문가들과 생존자들을 섭외해서 방송을 만들어서 송출했다.

7. 기타[편집]


  • 1995년에도 같은 노선의 아이모토역에서 탈선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다. 이 때는 저속으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었으며, 인명 피해는 10명이 경상을 입은 것이 전부였다.

  • 2014학년도 EBS의 영어 과목 수능 연계 교재인 인터넷수능에 이 사고를 설명한 지문이 수록되었다.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만 언급되어 있지만 내용이 이 사고와 상당히 일치한다. 원본(32페이지 Culture 이하)

  • 사고 차량인 207계 전동차는 국철 시절 만들어져 JR 동일본에서 운영하던 207계와는 전혀 관계없는 JR 서일본의 신조 차량이다.

  • 2018년에 사고당시 열차가 충돌 했던 지점(옛 이퓨전 아마가사키 아파트)에 기념관인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현장 "추모의 집" (祈りの杜 (もり) 福知山線脱線事故現場)이 조성되었는데 열차가 직접 충돌했던 아파트에 저층부 일부를 남겨 두어 보존했다.기사[18] 기념관인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현장 "추모의 집" (祈りの杜 (もり) 福知山線脱線事故現場)의 1층은 1호차가 충돌하면서 돌입했던 내부(필로티)와 그 앞 지하 부분까지 보존되어 있다.사진 조성 도중에 유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파트 벽에 기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아사히 신문에 실렸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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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뒷쪽에 있던 차량이라 앞에 있던 차량보다 비교적 손상이 적었다. 수리를 하면 다시 운행할 수 있는 듯하나 지금도 수리하지 않고 미야하라 검차소에서 보관하고 있다. 보통 대형 사고가 나면 해당 사고를 기림과 동시에 더 이상 이런 사고를 내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사고 차량 1~2량을 그대로 보존하는 경우가 많다.[2] 사망자 가운데 재일 한국인인 전칠영(당시 35세 여성) 씨가 있었고 부상자 중에도 양창원(당시 50세 남성) 씨가 있었다. 또한, 이 참변의 장본인인 20대 초반의 기관사 역시 이 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했다.[3] 일본에서는 고층 아파트를 맨션(マンション)이라 부른다. 대한민국에서도 80년대 중반까지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아파트를 맨션이라고 불렀다.[4] 이 구간을 통과한 뒤, 고가구간에서 한 번 더 드리프트를 하게 되면 아마가사키 역에 들어올 수 있다.[5] 예전에 100m 정도 오버런해서 재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더 조급해졌을 것이다.[6] 비상제동이 아닌 일반제동이었다는 설도 있다. '회사 내에서 비상제동 사용 시 재교육이라는 정책이 있었기 때문'. 이 경우 충격으로 인해 제동간이 비상제동으로 전환되었다는 설.[7] 선두차량에 급제동이 걸렸을 때 뒤따라오는 차량들이 마치 잭나이프의 칼날처럼 꺾이는 현상.[8] 신오사카발 키노사키온센(城崎温泉)행 키타킨키 3호(北近畿3号)[9] 정밀제조기기, 집진기, 에어샤워룸 등 제조하는 업체.[10] 즉, 금정역과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11] 급행열차를 포함하면, 운행이 중단되긴 했지만 '주말쾌속급행'이라 불리던 신창-용산간 특급열차의 표정속도가 72km/h로 이보다 더 빠르긴 했다. 전역 정차하는 구간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급행운전하는 가산디지털단지-두정 구간의 표정속도는 86.7km/h로 신쾌속과 맞먹는다. 더군다나 한국은 표준궤이지만 저기는 케이프 궤간의 협궤다.[12] 기관사도 경력이나 근속년수, 직급에 따른 임금 차이가 당연히 있다. 대한민국도 경력이 많은 즉 높은 호봉의 숙련된 기관사일수록 임금이 올라간다.[13] 이때 옆에서 보고 배우라고 초보 기관사를 동승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이것도 정말 피크일 때는 운전에 방해된다고 하지 않는다.[14] 연습시킬 때도 옆에 관리하는 보조 기관사를 1~2명씩 꼭 배치한다.[15] 이후 207계는 체질개선공사로 321계에 더 가까워지도록 개조되었다.[16] 다만 이는 2017년까지 본 사건이 1심, 2심, 최고법원까지 가는 재판에 회부되면서 매년 두고두고 언론을 비롯한 다방면에서 지적되어왔기에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17] JR 동일본도 2005년부터 우에츠 본선 탈선 사고에 관한 공지가 계속 올라와 있다. 다만, 이 사고는 강풍의 의한 사고로 JR 동일본의 잘못이 아니다.[18] 탈선사고 여파로 인해 붕괴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저층부를 남기고 허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