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덤프버전 :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European_Golden_shoe_Trophy.png
[1]
파일:옹즈도르.png

파일:발롱도르 트로피.png

파일:브론즈볼.png

1994 FIFA 월드컵 브론즈볼

파일:골든슈.png

1994 FIFA 월드컵 골든슈
[2]



베스트팀
파일:1994_fifa_world_cup_logo.png

파일:UEFA 유로 1996 심볼.svg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FFFFFF; font-size: 0.9em"
UEFA 유로 1996



1992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3위
토마스 헤슬러
1994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호마리우
2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3위
로베르토 바조
1992 Ballond'or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3위
데니스 베르캄프
1994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호마리우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로베르토 바조





불가리아의 축구인


이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Hristo Stoichkov | Христо Стоичков
출생
1966년 2월 8일 (58세) /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플로브디프
국적
[[불가리아|

불가리아
display: none; display: 불가리아"
행정구
]]

신체
178cm
직업
축구 선수 (스트라이커, 윙어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헤브로스 하르만리 (1982~1984)
PFC CSKA 소피아 (1984~1990)
FC 바르셀로나 (1990~1995)
파르마 칼초 1913 (1995~1996)
FC 바르셀로나 (1996~1998)
PFC CSKA 소피아 (1998)
알 나스르 FC (1998)
가시와 레이솔 (1998~1999)
시카고 파이어 SC (2000~2002)
DC 유나이티드 (2003)
감독
불가리아 대표팀 (2004~2007)
RC 셀타 데 비고 (2007)
마멜로디 선다운스 FC (2009~2010)
PFC 리텍스 로베치 (2012~2013)
PFC CSKA 소피아 (2013)
국가대표
83경기 37골[1] (불가리아 / 1986~1999)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성격
6. 여담



1. 개요[편집]


불가리아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 1994년 발롱도르 수상자로 펠레에 의해 FIFA 100에 선정되었다. 1991-92 시즌에 소속 클럽 FC 바르셀로나에서 에이스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안겨주는데 큰 공헌을 하고,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득점왕에 오르고 불가리아를 4강으로 이끌면서 골든슈와 브론즈볼을 받았으며 같은 해에 발롱도르도 수상했다. 불가리아 출신 축구선수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실제로도 그 위상이 대단하다. 애칭은 ‘소피아의 별’. 한 신문사에서 주관한 '20세기 최고의 불가리아 출신 축구 선수' 투표에서 2위에 오를 정도.[2] 다혈질적이고 거친 성질머리로도 유명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헤브로스 하르만리에서 데뷔 후 불가리아의 클럽인 PFC CSKA 소피아로 이적했다. 그러나 그 지랄맞은 성질머리 때문에 1984-85 시즌 불가리안 컵 결승전에서 패싸움에 휘말리게 되며 무려 영구 출전 금지라는 징계를 당하게 되었으나 이후 징계는 한달 출장 금지로 줄어들었다.

1989-90 시즌에는 30경기 38골이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하고 UEFA 컵위너스컵에서도 득점왕을 수상하였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42690889b6434c5e02d1dec1de110e3c.jpg}}}
당시 CSKA와 바르셀로나의 맞대결에서 스토이치코프를 눈여겨보고 있던 요한 크루이프 감독에 의해 FC 바르셀로나스카우트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도 첫 시즌부터 주심의 발을 즈려밟았단 이유로 2개월 출전 정지 징계를 먹는 등 그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리그 14골과 컵대회 6골을 넣으며 UEFA 컵 위너스컵 준우승을 이끈다.

스토이치코프는 1991-92 시즌 라리가에서 17골을 넣으며 우승을 이끌었고, 유러피언컵에서 4골을 득점하며 바르셀로나에게 첫 빅 이어를 안겨주면서 그 해 발롱도르 2위와 FIFA 올해의 선수 2위를 기록한다. 1992-93 시즌에도 리그 20골을 넣으며 우승을 차지한다.
파일:external/www.syrbazaar.com/Romario.jpg}}}
바르셀로나에서 황금 듀오였던 호마리우와 함께
이후 바르셀로나에 합류한 호마리우와 환상적인 공격진을 구성하여, 라리가 4연패를 이끌었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스토이치코프는 4강전에서 FC 포르투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며, 3:0 승리를 이끌어 결승 진출을 이끌었으나, 결승전에서 AC 밀란에게 4:0으로 대패했다.

이후 1995년 파르마 칼초 1913에서 1년간 뛰다가 다시 바르셀로나에 돌아왔지만 루이 판할과의 갈등으로 1998년에 PFC CSKA 소피아로 돌아갔다가 여러 팀을 거쳐서 2003년 미국DC 유나이티드에서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클럽에서의 활약상도 대단했지만 국가대표 활약상은 말 그대로 더 레전드. 불가리아는 94년 미국 월드컵 이전 까지 FIFA 월드컵 본선무대에 총 다섯번 출전했으나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전부 조별예선 탈락에 그쳤으며, 심지어 직전 대회인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아예 본선진출 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그닥 별 볼일 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스토이치코프가 이끄는 불가리아는 말 그대로 전설을 써내려갔다. 조별리그 첫 경기인 나이지리아전부터 3-0으로 완패했으나[3], 두번째 경기 상대인 그리스를 상대로 스토이치코프는 페널티킥으로 두 골을 넣으며 4대 0으로 완승을 거뒀다. 그러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상대는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있던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였는데, 스토이치코프는 멋진 선제골을 넣고 시라코프의 추가골까지 어시스트하며 아르헨티나를 2대0으로 격파하고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

토너먼트 16강에서는 멕시코를 상대로 또 한번 강력한 왼발슛으로 선제골을 넣으며 1-1에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만났는데, 로타어 마테우스의 선제골로 독일이 앞서가는 듯 했으나 스토이치코프가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넣더니 결승골까지 어시스트하는 원맨쇼로 2대1로 독일을 관광보내고 불가리아를 4강에 올려놓았다. 4강에서는 이탈리아을 만났는데, 로베르토 바조에게 2골을 허용해 뒤지는 상황에서 페널티킥으로 만회골을 넣었으나 승부를 뒤집지는 못하고 4강에서 탈락했으며, 3·4위 전에서도 스웨덴에게 4:0으로 완패해 스토이치코프의 도전은 아쉽게 4위로 마무리되었다. 대회 6골로 공동 득점왕으로 선정되었으며, 월드컵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발롱도르까지 수상하며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다.[4] 불가리아의 4강 진출은 현재까지도 불가리아 역사상 최고의 월드컵 성적으로 남아있으며, 이후로는 98년을 제외하면 20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단 한번도 본선무대에 진출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마저도 98년에는 1무 2패로 광탈당했기에, 불가리아는 94년에 기록한 본선 3승을 제외하면 월드컵에서 승리를 얻어본 적이 없다. 즉, 스토이치코프는 지금까지 불가리아가 월드컵에서 승리한 경기에서 모두 골을 넣은 유일한 선수이다.

비단 월드컵 뿐만이 아니라, UEFA 유로 1996에서도 스토이치코프는 조별리그에서 3경기 연속골을 넣으며 맹활약했지만 팀의 조별리그 탈락은 막지 못했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는 다시금 조별리그 광탈을 경험하며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을 쓸쓸하게 마무리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공격수로서 필요한 능력을 모두 갖췄던 1990년대 FC바르셀로나의 에이스이자 1994년 발롱도르 수상에서도 보이듯이 호마리우, 로베르토 바조 등과 함께 그 시대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전설이었다.

스토이치코프의 최고의 장기는 폭발적인 속력, 저돌적인 드리블 그리고 다양한 구질의 슈팅능력이었다. 왼발 프리킥이 단연 압권이었으며, 간결하고도 순간적인 침투로 수비 한두명을 무력화시키는 움직임과 한두명 정도는 제칠수 있는 개인기와 수려한 골 결정력, 이타적인 어시스트 능력을 지녔다, 그럼에도 필요할 때에는 준수한 피지컬과 악바리 근성을 앞세워 터프하게 치고 받으면서 돌파하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왼발잡이였음에도 오른발도 괜찮게 사용하는 등 공격수로서 완전체에 가까웠던 만능 선수, 전반적으로 스토이치코프의 축구적 천재성은 그 특유의 악바리 근성과 맞물려서 최고의 시너지를 냈다.

주로 중앙 및 좌측면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불가리아 리그에서는 거듭된 징계에도 불구하고 38경기 30골을 때려박는 넘사벽의 활약을 펼쳤고 이를 바탕으로 좌측 공격수를 찾던 요한 크루이프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며 호마리우와 전설적인 영혼의 듀오를 결성, 바르셀로나 드림팀의 성공을 이끌게 된다. 다만 당시 중앙 공격수는 미카엘 라우드루프였기도 하고, 스토이치코프 본인이 다재다능한 공격수였기 때문에 보다 창의적인 롤도 자주 맡았으며 주로 좌측 윙포워드로 나왔지만 높은 전술 이해도로 우측 윙포워드와 자주 스위칭을 하는 움직임을 가졌다. 굳이 오늘날의 공격수와 비교하자면 슛과 드리블 능력을 겸비한 강한 에고의 공격수라는 전반적인 이미지에서는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제일 비슷하고, 저돌적으로 치고들어와서 왼발 한방으로 어디서든 때려박는 모습은 아르연 로번과 제일 흡사하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다만 특유의 다혈질적인 성격때문에 '분노조절장애'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언제나 클럽 입장에서는 골칫거리, 팬들에게는 가십을 제공하는 스타라는 두 얼굴을 갖고 있었다. 커리어 초 CSKA 소피아 시절에는 유럽대항전 6인 난투극을 벌이는가 하면 1996년엔 마르셀 드사이에게 인종차별을 시전했고, 말년에 미국에서는 대학생 축구선수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거친 태클을 하는 바람에 고소를 당하는 등 (...) 팀 입장에서는 폭탄이었으며 남들이 안정적으로 커리어 이어나갈 때 뜬금없이 다른 리그로 이적해버리는 등 이해할 수 없는 괴짜짓을 많이 했다. 이 반골기질 때문에 온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저니맨이 되었으며, 후대의 평가에있어 다소 낮게 평가될 여지를 스스로 제공한 것은 분명한 마이너스이다.

그래도 어찌되었건 공격수로서의 기본기가 워낙에 탄탄하니 무려 8개의 클럽을 돌아다닌 저니맨이었음에도 어떤 팀에 갖다놔도 잘하는 든든한 국밥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말년에 폭발적인 스프린트 능력을 잃어버린 미국 무대에서도 대포알같은 슛과 번뜩이는 컨트롤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으니, 스토이치코프의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것이다.


4. 기록[편집]



4.1. 대회 기록[편집]







4.2.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1994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LW 7위)
  • FIFA 올해의 선수 2위: 1992, 1994
  • FIFA 월드컵 골든슈: 1994
  • FIFA 월드컵 브론즈볼: 1994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94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96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득점왕: 1988-89
  • 불가리아 파르바리가 득점왕: 1988-98, 1989-90
  •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5]: 1993-94
  • 유러피언 골든부츠: 1989-90
  • 옹즈도르: 1992
  • 옹즈 드 옹즈: 1992, 1994
  • 유니세프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 1991-92
  • 불가리아 올해의 축구 선수: 1989, 1990, 1991, 1992, 1994
  • 불가리아 올해의 운동 선수: 1994
  • IFFHS 세계 최고 득점자: 1994
  • FIFA 100: 2004
  • UEFA 주빌리 어워드: 2004
  • 골든풋: 2007


5. 성격[편집]


스토이치코프는 스타가 즐비했던 90년대에서도 단연 최고 중 하나였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선수이지만, 그와 반대로 인격적인 면에서는 큰 결함이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역 시절이나 지금이나 다혈질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파트너로 호흡을 맞추던 호마리우나 감독이었던 요한 크루이프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게으름뱅이였다 한다. 거기다 피치위에서의 다혈질 성격으로 몹시 유명했다. 주심과 상대팀에게 큰소리를 질러대기 일쑤였으며 걸핏하면 싸우고 항의를 하다가 징계를 먹곤 했다. PFC CSKA 소피아 시절에는 영구 출장 정지 징계까지 거론되었고 FC 바르셀로나 이적뒤엔 주심의 발을 밟았다가 2개월 출장정지를 먹었다. 인터뷰에서도 독설과 도발을 쏟아내는등 여러모로 화끈하고 거칠 것이 없었던 플레이어. 크루이프에게 감정이 쌓였을 때 샌드백에 그의 사진을 붙여놓고 분이 풀릴 때까지 두들겼다는 일화가 있다. 은퇴하는 그날까지도 성질은 조금도 죽지 않아서 2003년 DC 유나이티드와 미국 대학축구팀의 대결당시 한 선수에게 거친 태클을 가했다가 그 선수의 다리가 부러진 일 때문에 고소까지 당했다. 당시 그 대학축구팀의 코치로 있던 레이 허드슨이 이를 맹비난하기도 했다.

은퇴한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그 성질은 변하지 않아 독설가 기질은 여전하여 어록을 쏟아내고 있다. FC 바르셀로나의 레전드답게 레알 마드리드 CF에 대한 독설이 주를 이루며, 당연하겠지만 리오넬 메시, 펩 과르디올라 등 현세대 바르사의 황금기를 만든 팀 후배들은 몹시 아낀다. 그러나 주제프 마리아 바르토메우를 위시한 전 바르셀로나 보드진들에 대해선 상당히 비판적이다. 보드진들이 리오넬 메시와 갈등을 빚고 있다는 보도가 나가자 '축구는 내비두고 농구나 신경써라 이 축구 좆도 모르는 사무원들아' 라는 식으로 말할 정도. 리오넬 메시와 엔리케 감독의 불화설 당시 팀이 메시를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메시를 감싸면서 '바르셀로나가 외국인 선수들을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았고 외국인들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팀을 떠나기 일쑤였다' 고 증언하며 메시도 자기처럼 팀을 떠나게 될거라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스토이치코프 스스로가 감독과의 불화 덕분에 바르셀로나에서의 커리어를 끝낸 기억이 있어서 감정이입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바르셀로나 선수들 중에서도 리오넬 메시, 루이스 수아레스, 네이마르 주니오르 같은 외국인 선수들에 대해선 유난히 각별하다. 그리고 스토이치코프의 예상대로 메시와 수아레스는 좋지 못한 방식으로 바르셀로나를 떠나게 되었다. 그것도 스토이치코프보다 더 비참한 형태로...

같은 이유로 루이 판할 감독을 몹시 싫어한다. 내뱉은 독설의 반 이상이 판할이 쓰레기라는 내용이다. 거의 즐라탄펩 과르디올라 디스하는 수준으로 판할을 막 까대는데, 바르셀로나에서 행복했지만 판할과의 갈등 때문에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스토이치코프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부상당했던 당시 판할이 스토이치코프의 아내에게 '어쩌다 저렇게 나쁜 남편과 결혼했냐'고 드립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6]아직까지도 틈만 나면 판할을 대놓고 쓰레기라고 부르면서 까는걸 보면 앙금이 정말 남다른듯. 프리미어 리그로 이적의사를 밝힌 같은 팀 후배 페드로 로드리게스에겐 맨유만은 가지 말라며 예전에는 바르사를 무너뜨리더니 이젠 맨유까지 말아먹고 있다고 독설을 날렸다.

바르셀로나와 재계약 문제로 파문을 일으킨 우스만 뎀벨레에게 ‘구단 더럽히는 짓 하지 말고 떠나고 싶으면 유니폼 벗고 ‘나가겠다’ 라고 말하라’ 라고 화를 내며 강하게 질책하였다.


6. 여담[편집]


  • 바르셀로나 시절 크로스바 맞추는 내기에서 호마리우와 함께 당시 감독이었던 요한 크루이프에게 참교육을 당한 적이 있다.[7]



[1] 대표팀 역대 득점 3위.[2] 1위는 게오르기 아스파루호프로 1965년 발롱도르 8위에 오른 적이 있다.[3] 심지어 나이지리아는 94년 월드컵이 첫 출전이었다.[4] 1994년 FIFA 올해의 선수는 마찬가지로 월드컵 우승과 골든볼 수상으로 맹활약한 팀 동료 호마리우가 수상한다. 스토이치코프는 이 해 FIFA 올해의 선수에서는 2위를 기록한다.[5] 돈 발롱 어워드[6] 스토이치코프는 경기장에서 막나가는 성격과는 달리 사생활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잡음을 낸 적이 한 번도 없고, 저 아내랑 지금까지도 같이 잘 살고 있으며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 원래 경기장 안에서 미친개밖에서는 팬 서비스도 좋고 문제 안일으키는 유형들이 가끔 있다. 반대로 경기장에선 매너있게 잘하는데 경기장 밖에서 사고치고 돌아다니는 유형도 있다. [7] 멘탈로는 어디서 절대로 지지 않았고 별명이 심지어 'animal'이었던 호마리우와 서로 팀의 넘버원이라고 투닥거렸는데, 이를 보던 당시 감독이였던 요한 크루이프는 "놀고들 있네. 내가 감독이니까 내가 최고다. 그러니까 제발 말 좀 들어."라 했지만 이들이 말을 들을 리가 없으니, 서로 공을 10번 차서 크로스바 맞추는 내기를 하기로 했다. 다른 선수들도 간만에 흥을 돋울 거리가 생기니 승부에 관계없이 모두 참가했다. 결과는 스토이치코프 2번, 호마리우가 3번. 이에 호마리우가 자기가 최고라고 나대자 크루이프는 단숨에 6번을 성공시켰다. 호마리우가 주제도 모르고 겁도 없이 감히 크루이프에게 인정할 수 없다고 개기자 가만히 듣던 크루이프는 갑자기 왼발로 공을 냅다 갈기는데 그게 그대로 크로스바에 적중했고 호마리우는 바로 아닥했다고 한다. 훗날 크루이프가 이에 대한 뒷이야기를 했는데, 왼발로 공을 차서 맞춘 건 뽀록이었다고 밝혔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7 13:45:53에 나무위키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