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목록/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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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민국[편집]



2.1. 한국프로농구[편집]


  • 2003-04 시즌 KBL 개인 타이틀 밀어주기: 시즌 막판 특정 선수들에게 개인 타이틀 수상을 밀어주기 위해 경기내내 양팀 선수들이 수비를 건성으로 하는 등 어이가 없는 추태를 벌였다.[1] 김주성은 블록 부문 경쟁자 R.F. 바셋을 제치기 위해 원주 TG삼보-인천 전자랜드 전에서 무려 11블록[2]과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게 되었고, 정훈도 같이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으며 같은 경기에서 문경은은 TG삼보 선수들의 지원(?)에 힘입어 3점슛 22개(66득점)의 신기록을 세우고, 앨버트 화이트전반만 뛰고 트리플 더블을 작성했다.[3] 만약 풀로 뛰었다면 NBA에서도 두번만 나온 더블 트리플 더블이 나올 뻔했다. 한편 양경민도 한 쿼터에만 3점슛 7개를 넣었다. 문경은의 경쟁자 우지원은 다른 경기에서 3점슛 21개를 성공했다.(70득점) 당연히 팬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고, 팬과 해설가들의 비난에 급기야 KBL은 그 해 타이틀 시상식을 취소하게 된다. CBA의 경기당 최다득점은 에릭 맥컬럼의 82점[4], 최다 3점슛은 리온 로저스의 15개, 최다 블록슛은 야오밍의 13개이며 밀어주기 의혹은 전혀 없다.[5]
  • 2012-13 시즌: 여러모로 악재가 많았던 시즌. 프로-아마 농구 최강전의 흥행 실패 이후 꼬이더니 여러 팀들이 신인드래프트 상위픽을 위해 일부러 져주기 논란까지 일으키며 탱킹을 하였고, 계속된 저득점화 현상의 심화[6]와 코트 내에서의 과도한 신경전, 김일두의 혼혈및 비주류 대학 출신 비하 발언, 현직 감독의 승부조작까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하지만 프로농구의 몰락은 이제 시작이었으니...
  • 2014-15 시즌과 챔피언결정전, 김영기 총재: 한국프로농구 사상 최악의 시즌이라 볼 수 있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 버프를 안고 기대 속에 시작하였으나, 총재 김영기의 막장 행보와 심판 자질 문제, 중계권 문제가 불거지면서 리그 중흥의 기회를 걷어찼다. 거기다 모비스와 동부의 챔피언결정전 2차전 경기시간을 평일 오후 5시(!!)로 변경하여 논란이 되었으며 이에 항의하는 플래카드가 1차전 도중 등장하자 KBL 관계자가 제지하려다가 팬 중 한명이 허리 쪽에 부상을 입는 등 마찰을 빚었다. 뿐만 아니라 챔피언결정전 3경기 3쿼터에서는 작전타임 및 선수 교체과정에서 실수를 범한 기록원이 경기 도중 자리를 이탈했다 돌아오며 경기가 5분간 지연되는 초유의 사태도 발생했다. 야구 눈치보는 세상 불통의 극치 이게 독재가 아니고 뭡니까? 또한 시즌이 끝난 뒤에는 대대적인 불법스포츠도박 파문까지 일어나며 또다른 흑역사 시즌의 절정을 만들어낸다.


2.1.1. 전주 KCC 이지스[편집]


  • 2006-07 시즌: 2012-13 시즌 전까지 KCC가 유일하게 최하위를 기록했던 시즌으로, 부상으로 팀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15승 39패라는 창단 이래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 서장훈 영입에 따른 이상민의 FA 보상선수 이적 파동: 2007-08 시즌을 앞두고 서장훈은 FA로 KCC로 이적하게 되었다. 서장훈이 KCC를 택한 가장 큰 이유는 팀의 레전드이자 대학교 시절 콤비로 뛰었던 이상민과 함께 뛰기 위해서. 문제는 KCC의 보호선수 설정이었는데, 당시 규정으로 보호선수는 FA 영입선수 포함 3명만 설정할 수 있다는 병맛 규정이 있었다. KCC는 임재현도 FA로 영입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설정할수 있는 보호선수는 한명. 근데 KCC에는 이상민뿐만 아니라 추승균도 있었다. 설마 나이가 많은 이상민을 데려가겠냐고 생각하며 추승균을 보호선수로 택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7] KCC는 이후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하승진을 지명하고 서장훈 등의 활약에 힘입어 전 시즌 성적인 10위에서 2위로 수직상승하는데 성공했고, 삼성 또한 전보다 성적이 크게 오른 3위로 시즌을 마무리했기에 팀 전력 떼놓고 보면 윈윈이라고 할 수 있다.[8] 그러나 자유계약으로 풀려서 온 서장훈은 시즌을 마친 후 하승진과의 공존 문제로 인해 결국 인천 전자랜드로 트레이드되고 말았다.[9]
  • 2012-13 시즌: 2006-07 시즌에 이어 두 번째로 최하위의 성적을 냈다. 시즌 전 팀의 에이스였던 추승균이 은퇴하고 하승진공익근무요원 복무[10]로 팀을 잠시 떠나게 된데다 전태풍마저 규정에 따라 고양 오리온스로 이적하게 되어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당시 KCC의 전망은 10승도 힘들다고 할 수준. 1순위로 뽑은 코트니 심스를 시작으로 안 그래도 전력이탈이 심한데 부상까지 많아서 2군에서 선수를 호출할 정도로 뛸 선수가 없었고, 시즌 중반에 김효범을 영입하고 2월 초에 강병현도 전역하여 그나마 5라운드에서 5할 이상의 승률을 거두긴 했으나 결국 13승 41패의 최하위로 시즌을 마치며 2014-15 시즌 이전까지는 최악의 시즌으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전 시즌의 삼성과 바로 다음 시즌의 동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 김민구 음주운전 사고: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민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2014-15 시즌: 2012-13 시즌보다도 더 참혹한 성적을 냈다. 덤으로 2006-07 시즌에 기록했던 10연패 타이 기록과 홈경기 12연패까지 당했다. 공익근무를 마친 하승진이 돌아오고 지난해 득점왕을 차지했던 타일러 윌커슨과의 재계약, FA 최대어였던 포인트 가드 김태술의 영입으로 강력한 다크호스로 평가받은 만큼 많은 팬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던 김민구가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시즌 아웃이 되면서부터 불길한 기운이 도사리기 시작했다. 외국인 선수 윌커슨은 기복이 심한 데다 최다 턴오버를 기록하는 등 예상과 다르게 상당히 부진했고, 야심차게 영입한 김태술과 병역을 마치고 돌아온 하승진마저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보인데다 이들을 비롯한 여러 선수들까지 부상을 당하는 악재가 겹치면서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속절없는 부진이 계속되자 급기야는 10년간 팀을 이끌어오던 허재 감독이 2015년 2월 자진사퇴하는 충격적인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허재 감독을 보좌했던 추승균 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승격시켜 잔여 시즌을 치렀지만 이렇다 할 반전을 보이지는 못하고 구단 역대 최저 승률을 2시즌만에 갈아치우며 12승 42패, 9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최하위는 팀 전력이 파탄나버린 모 구단 때문에 확실히 면할 수 있었다.
  • 2016-17 시즌: 삼성으로 이적한 김태술을 제외하고 2015-16 시즌 정규리그 우승의 주축 멤버들은 그대로 잔류했기 때문에 우승권으로 평가받았으나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특히 전태풍, 하승진의 시즌아웃이 컸으며 안드레 에밋이 초반에 부상으로 낙마한게 컸다. 물론 가까스로 합류해 여전히 득점감각을 뽐냈지만 다른 선수들과의 엇박자는 해결되지 못했다.)으로 최하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2년차를 맞이한 송교창의 성장과 트레이드를 통해 이적해온 이현민의 활약은 위안거리.
  • 전주실내체육관 우승 배너: 다섯 번의 우승 중 1997-98 시즌과 1998-99 시즌은 전신인 대전 현대 시절 우승인데 마치 KCC가 우승한 것처럼 걸어놨다. 기아 시절의 역사를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모비스조차 1997 시즌 원년 우승 배너만큼은 기아의 로고가 새겨진 것을 사용한다. 대전 팬들 입장에선 대전을 버리고 연고를 옮긴것도 모자라 우승 기록마저 빼앗아 간 셈.


2.1.2. 원주 DB 프로미[편집]


  • 양토토 사건: 김영만과 함께 농구대잔치 시절 중앙대 농구부 원투펀치를 담당했던 장신 포워드 양경민이 원주 동부에서 뛰던 2004-05 시즌 프로농구 4강 플레이오프 2차전의 토토를 자신의 팬클럽 회장에게 대리 구매하도록 했다. 당연히 선수가 자기가 출전하는 경기의 토토를 구매하는 것은 불법이며 나중에 이와 같은 사실이 밝혀져 양경민은 벌금 100만원의 유죄가 확정되었고, KBL로부터 36경기 출전정지라는 중징계를 받게 되었다. 이후 징계는 슬그머니 경감되었지만 양경민은 더 이상 제대로 뛰지 못한 가운데 쓸쓸히 은퇴를 했다. 은퇴 뒤에는 스카우트 일을 맡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고 한동안 근황이 알려지지 않다가 웨이터를 전전한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이후 찜질방을 오가며 살던 양경민은 2013년 9월 찜질방에서 절도죄로 구속되었다.
  • 강동희 전 감독: 한때 전설의 기아자동차에서 에이스로 활약했고, 감독으로서도 명성을 떨쳤으나 승부조작 때문에 한국판 피트 로즈로 전락하고 말았다(...).
  • 이충희 전 감독: 감독으로 부임한 후 첫 5경기에서 4승 1패를 기록했지만 이후 2라운드 1승(그래도 SK의 홈 연승 기록을 저지해냈다.), 4라운드 전패 포함 불과 한 시즌만에 12연패를 두 차례나 세우는 진기록을 달성하며 팀을 나락으로 꽂아넣었다. 단 한 번도 최하위를 기록해본 적이 없었던 팀을 순식간에 나락으로 밀어넣은 탓에 멍충희라는 치욕스런 별명으로 불리며 감독 취급도 못받는다. 작전타임 때의 전술도 빼어나지 못했을 뿐더러 몸이 정상이 아니었던 김주성 등을 무리하게 출전시키는 등 주전 선수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혹사로 인한 주전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 때문에 끝없는 부진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악재가 겹치며 이충희 감독은 결국 9승 31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남기고 자진사퇴하였다. 당시 코치로 있던 김영만을 감독대행으로 승격시킨 후 잔여 시즌을 치렀지만 결국 동부는 13승 41패, 창단 이래 최초로 최하위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한다. 심지어는 홈경기 때 감독을 비롯한 프런트의 퇴진을 성토하는 플래카드를 걸며 항의하는 팬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충희 감독은 오리온스 시절 같이 꼴찌로 밀려나던 모비스에게 밀려서 최하위를 기록하며 제대로 말아먹은 전적이 있었는데, 동부에서도 그대로 재현했다. 심지어 개막 후 초반 2~3경기는 승리한 것도 공통점.
  • 안재욱, 이동건: 프로 시절 불법 스포츠 도박에 참여한 행위로 리그에서 영구제명을 당했다. 신정섭 또한 모비스로 빤스런 했지만 동부 시절 전력 때문에 탄로나 안재욱, 이동건처럼 영구제명 크리.


2.1.3. 창원 LG 세이커스[편집]


  • 양희승 : 창단 멤버 중 스타 플레이어. 그러나, 구단과의 부상과 연봉문제의 불화로 인해 조성원과의 맞트레이드 이후 SBS 스타즈-KT&G 카이츠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 버나드 블런트 : 1997~1999, 1998~1999 득점왕. 1999~2000 시즌을 앞두고 야반도주하면서 LG는 몰락했고, 이충희 초대 감독은 재계약에 실패하였다. 구단에서도 금지어로 소문이 자자하다.
  • 박종천 전 감독 : 김태환 감독의 뒤를 이어 2004-05 시즌 LG를 이끌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모략으로 김태환 감독을 몰아냈다는 의혹을 받는다. 결정적인 것은 이 시즌 팀 성적. 역대 최악의 성적으로 전자랜드와 공동 최하위인 9위를 기록하며 박종천 감독은 한 시즌만에 전격 사임. 이 해의 여파로 다음 시즌인 2005-06 시즌에 신선우 감독의 부임에도 불구, 8위를 기록하면서 사실은 DTD였지만 PO 탈락.
  • 송영진 :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받으면서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외국인 선수와의 대결을 위해 체중을 불린 것이 결과적으로 악영향을 미치며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결국 2004-05 시즌이 끝난 뒤 현주엽이 FA로 영입되면서 보상 선수로 지명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다행히 새로운 소속팀 KTF에서는 부활에 성공했다. 이 당시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을 정도로 선수 본인에게도 LG 시절이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한다.
  • 현주엽 전 선수 겸 전 감독 : 2005~2009 선수, 2017~2020 감독.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농구 금메달 멤버. LG 창단 첫 선수 출신 감독사. 하지만, 역대급 흑역사였다. 2005 FA로 부산 KTF 매직윙스에서 이적으로 합류했으나 무릎 부상으로 인해 전성기에서 내리막이었고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갑작스런 은퇴 기자회견을 통해 선수 시절 챔피언의 한을 풀지 못했다. 신선우 감독이 재임할 때 출전시간 문제로 기싸움을 하면서 불화설이 나왔으며 실력이 부족했으나 사실 모교 1년 선배였던 박규현에게 연습과 경기에서 항상 혼이 나기도 했다. 강을준 감독에게도 무릎부상이 있었지만 공수에서 골밑을 피하면서 불화를 직간접적으로 인정했다. 그 동안 약팀의 에이스였는지 홀로하는 농구 속에 있었던 따가운 비판의 슈퍼스타였다. LG 이적 이전 단 1번도 4강 플레이오프 이상을 나가지 못했다. LG 이적 이후 현역 시절에 4강 1번이자 감독 시절 4강 1번을 갔지만 끝내 KBL 챔피언의 한을 풀지 못했다. 선수 은퇴 이후 모교인 고려대 감독설까지 나왔으며 8년만에 LG 7대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역대 최저성적인 9위를 두번 기록하며 팬들에게 흑역사로 불린다. 선수로서 최고 인기구단으로서 화려한 공격농구 이후에 영입된 점과 감독으로서 최고 인기구단이 얼마전에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 이후에 영입된 점이 있었지만 심각했다. 부임 이전 예능인으로 활약하지만 정작 LG 팬들은 단호하다.
  • 퍼비스 파스코: 2006-07 시즌 KTF와의 4강 플레이오프에서 심판을 가격하며 즉시 퇴출+영구제명 콤보를 먹는다. 해당 시즌 우승을 노렸던 LG는 그대로 무너지며 PO와의 악연을 이어간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장영재의 악의적 파울과 심판 편파판정이 있었다는 것은 생각해 봐야될 부분이다.[11]
  • 전형수: 2003-04 시즌 중 트레이드 입단 이후 퇴단과 함께 재복귀 했으나 고전. 2007-08 시즌 부활하는 듯하여 FA 계약을 맺었으나, 이후 주전은 커녕 식스맨 자리를 전전하게 되어 일명 먹튀로 전락해 버렸다. 오리온스로 이적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된다.
  • 서장훈: 2011-12 시즌 극도의 부진을 보였고[12] 결국 소속팀 LG 역시 극심한 부진 끝에 겨우겨우 7위를 하게 된다. LG에서 이렇게 1시즌만 보낸후 kt로 이적했고 거기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은퇴를 하였다.
  • 데이본 제퍼슨: 과거 자유계약제 시절에 뛰어도 충분히 통했을 것이라는 평을 받은 특급 외국인 선수였고 실제로 2013-14 시즌 창원 LG의 정규리그 우승을 이끈 일등 공신이자 이 시즌의 진정한 MVP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13] 그러나 불성실한 태도로 종종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14-15 시즌 울산 모비스 피버스와의 4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국민의례 도중 혼자 스트레칭을 한 것 때문에 도마 위에 올랐고 이어 사과 기자회견 직전 SNS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사진을 올린 것이 결정타가 되어 KBL에서 영구제명되었다.
  • 김영환 (LG 이적 이후 한정) : LG의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 시절 주장. 전 소속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서 LG에서 키운 선수다. 4년반을 주장으로 하면서 선수단의 단합과 팀의 승리와 함께한 영웅이었다. 그러나, 구단 최고위층 앞에서 3점슛 22개 연속 실패와 함께 데뷔했던 KT 소닉붐으로 원치 않은 트레이드를 당했다. 2017년 02월 24일에는 KT 소닉붐의 주장으로 역대급 버저비터를 터트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LG 구단 프런트에 쌓였던 게 있었는데 평소 덩크를 하지 않던 그가 골대를 잡고 흔들면서 절정의 환호를 했다. 이 과정에서 LG 팬들은 그래도 정규리그 우승팀 시절 주장이었는데 큰 상처를 받으면서 배신자라는 비판을 하게 된다. 추가로 신인지명권까지 KT에 헌납하면서 허훈과 양홍석을 모두 얻고 당초 LG 감독 후보였던 서동철 감독이 사령탑을 맡으면서 트레이드 실패라는 굴욕사까지 겪게 된다.
  • 김종규 (LG 이적 이후 한정) : LG의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 시절 신인왕. FA 협상 과정에서 LG에서 12억을 제시했으나 이를 거절함, 그러나 LG에서 사전 접촉 의혹이 제기되자, KBL 재정위원회에 회부 당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FA 자격을 얻게되었다. LG는 김종규와의 협상 과정에서 현주엽 감독과의 통화 과정에서 불법 녹취를 해 팀의 이미지가 깎이게 되었다. 현주엽과 LG 구단 관계자의 꼼수 속에 신뢰가 무너지면서 6년간 응원했던 창원 LG 팬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이별을 하게 되었다. 원주 DB 프로미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적 이후 전 소속팀이었던 LG 구단 프런트에 쌓였던 게 많았는지 덩크 횟수가 늘어나고 한 때 정희재와도 피카츄 모드로 비판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결과론으로 SK 나이츠가 서장훈을 FA로 놓치면서 암흑기가 길어졌는데 LG 세이커스로서는 KBL 우승 경력 이후 최대 악재까지 작용하고 있다.
  • 코로나 수칙 위반 음주행위 : 2020~2021 시즌 창원 시내 복판의 한 술집에서 선수단이 술자리를 가져 코로나 수칙 위반한 의혹을 받고 있으며 제재금을 부과받았다. 이 사건의 주범인 김동량은 출장시간이 급격히 감소.
  • 2020-2021 시즌 : 시범경기 격인 프로-아마 농구 최강전 때의 선전과 달리 주축 빅맨들의 부상으로 급기야는 최하위까지 떨어졌으며 주포라 할 수 있는 김시래 트레이드로 팬덤이 산산조각 나기 이르렀다. 문제는 이게 현재진행중이라는 점. 이관희를 급한대로 얻어오긴 했지만 기복과 스찌질 같은게 있는만큼 양날의 검이 되고 있다. 추가 트레이드도 실패하면 조성원은 여자농구 KB 스타즈 시절처럼 탄핵될수도.

2.1.4. 서울 SK 나이츠[편집]


  • 진로 맥카스 농구단: 창단식도 치르지 못한 채 모기업의 경영난으로 인해 SK에 매각, SK 나이츠가 1997년 9월 11일에 창단식을 가지게 되었다.
  • 서울로 연고이전한 이후 2011-12 시즌까지의 팀 성적: 2001년 청주에서 서울로 연고이전을 한 이후 2002-2003 시즌부터 끝없는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2002-2003 시즌부터 2011-2012 시즌까지의 팀 성적은 10-7-7-9-7-5-8-7-7-9(십칠칠구칠팔칠칠구). 2011-12 시즌까지 PO 진출이 단 한 번이었다. 특히 2004-05 시즌과 2010-11 시즌은 그야말로 내려가는 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다행히 2012-13 시즌은 정규리그 우승으로 시즌을 끝냈지만 아쉽게도 모비스에게 4전 전패를 당하며 통합 우승은 달성하지 못했다. 2013-14 시즌에도 그대로 잘 나갔지만 막판에 힘이 풀리면서 3위로 내려가서 시즌을 마감했다.
  • 2014-15 시즌: 시즌 초중반 1위 싸움을 하는 등 잘나가다가 2월에 당한 5연패를 기점으로 추락하더니, 정규시즌을 3위로 마감한 뒤 인천 전자랜드와의 6강 PO에서 3전 전패로 허무하게 시즌을 마감하고 말았다.[14]
  • 2015-16 시즌: 김선형의 불법도박 사건으로 인한 출장정지, 새로 영입한 선수들의 부진, 계속 터지는 부상 등으로 전년도 3위팀이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 2018-19 시즌: 2002-03, 2009-10, 2015-16 시즌이 양반으로 보일 정도의 최악의 시즌. 지난 시즌의 우승에 취해 시즌 준비를 안일하게 한 결과는 매우 참혹했다.
    • 애런 헤인즈의 2018-19 시즌: 십자인대가 박살난 30대 중반의 노장을 정 때문에 재계약한 대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이제 심판들이 대놓고 자유투 삥뜯기에 휘슬 불기를 거부하면서 완전히 공격력이 사망했다. 거기에 "같이 뛰고 싶다"는 이유로 오데리언 바셋과 계약하도록 팀에 요청했다는게 알려지면서 영구결번 후보에서 금지어로 전락해버렸다. 시즌 도중에 부상을 2번이나 당한 것은 덤이다. 심지어 후반기에 본 실력이 돌아오며 아주 제대로 팬들이 뒷목을 잡게 하고 있다.
    • 오데리언 바셋: 전 시즌 우승으로 문경은 감독이 자신감이 넘친 건지 오리온 팬들조차 손사레를 칠 정도로 망한 선수를 고쳐서 써보겠다는 소리를 하며 영입했다. (헤순실 헤인즈의 추천도 있었다.) 그리고 SK는 멸망했다. 노마크도 못 넣는 국내선수 이하의 공격력에 드리블 불안과 볼호그 기질 등 누가 농구 그딴 식으로 가르쳐 줬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의 플레이를 남발하다 결국 퇴출. 하지만 더한 놈이 있을 줄은...
    • 마커스 쏜튼: 위에 적힌 바셋 그 이상을 보여준 외국인 선수. SK 구단 역사상, 아니 KBL 전구단 역사상 최악의 외국인 선수를 꼽으라 해도 충분히 뽑힐 수 있는 선수이다. 그가 기록한 KBL 데뷔전 1쿼터 4연속 에어볼은 전설이 되었다. '지나가는 이태원 흑인을 유니폼 입혀서 데려왔냐'는 평가까지 받았을 정도. 거기에 부상을 숨기고서 계약을 했다는 건 덤. 결국 2달도 못되어 퇴출되었다.
  • 한상웅: 미국명 리차드 한. 당초 명지대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2005년 신인 드래프트에 나왔고 전체 3순위로 SK에 지명되면서 김효범과 함께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루키 시즌인 2005-06 시즌 16경기, 2006-07 시즌 6경기 출전에 그쳤고 이후 줄곧 2군에 있다가 2009-10 시즌 도중 퇴단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2013-14 시즌에 SK로 돌아왔으나 세 시즌 동안 합쳐 7경기 출전에 그친 채 2015-16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역대 최악의 로터리픽 지명자.
  • 방성윤: 2005년 드래프트에서 부산 KTF 매직윙스에 의해 1순위로 지명된 직후 3:3 트레이드로 SK로 이적했다. 당시 추일승 감독은 1순위였지만 현주엽의 LG 이적 이후 KTF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상무 시절 제자였던 신기성과 추가로 조상현으로 팀을 재건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조상현 또한 LG로 이적하면서 1 시즌을 함께못했다. 이로인해 이 트레이드 승자를 SK로 평가했으나 이외의 변수가 다가오게 된다. 하지만 잦은 부상과 프로 적응 문제로 30경기 이상 출전한 적이 없었다가 끝내 30세의 나이로 2011년 은퇴했다. 하지만 은퇴 후 폭행 사건에 휘말리면서 역대급 흑역사가 되었다. LG의 현주엽처럼 된 케이스. (폭행혐의는 2심에서 무혐의로 나오면서 누명을 품)
    • 변현수: 2009년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4순위로 지명을 받은 뒤 디펜스 5에 오를 정도로 수비에서 쏠쏠한 활약을 펼쳤으나 루키 시즌을 마친 뒤 LG로 이적했다. 그러나 나중에 완전 트레이드가 아닌 3년 임대로 밝혀졌고 2012-13 시즌 종료 후 복귀한 뒤 바로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했다. 복귀하면 팀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2015년 1월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금을 횡령한 혐의로 입건된데 이어, 3월에는 배구 승부조작 사건으로 영구제명되었던 염순호, 최귀동과 함께 함지훈에게 스포츠 도박 관련 부분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한 일로 체포, 구속 기소되어 사실상 영구제명을 당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 박승리: 문경은 감독이 귀화선수 드래프트 당시 문태종을 거르고 지명하여 화제가 되었던 선수. SK 입단 후에 수비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2016년 귀화에 실패해 KBL을 떠나게 되었다.
  • 변기훈: 군제대 이후 슈터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며 무득점 경기를 양산하고 있다. 진작에 버렸어야 하는 선수지만 2억이나 주면서 샐캡만 소진하고 있다. 10경기 말아먹고 1경기 잘하고 또 10경기 말아먹는 특유의 루틴을 성립. '변기훈이 오늘도 변기훈했다'라는 명언을 만들어냈다.
  • 2020-21시즌: 전년도 원주 DB 프로미와 1위 경쟁은 잠시뿐이고 주축 선수의 잇따른 부상과 경기 외적인 요소에서 잡음이 생기면서 SK 와이번스의 전철을 따라가고 있다.

2.1.5.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편집]


  • 1998-99 시즌: 32연패(세계기록), 1할 이하의 승률, 단일 시즌 역대 최소승(3승 42패 0.067).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잃어버린 15초: 2002-03 KBL 챔피언결정전 5차전에서 4쿼터 막판 원주 TG 데이비드 잭슨의 3점이 터질 당시 15초 동안 경기시간이 멈춰 있었던 사건.[15] 원래대로라면 대구 동양의 승리로 끝날 경기가 78:78 동점이 되고 3차 연장까지 가며 끝내 지고 말았다. 대구 동양 프런트는 KBL에 항의를 하고 재경기 승낙까지 받아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16] 결국 정태호 동양 단장이 경기 시작 직전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며 대승적 차원으로 재경기 포기와 5차전 결과를 받아들인다. 결국 그 6차전에서도 지면서 준우승. 그리고 그 악몽은 재현되어 2015-16 시즌 KCC와의 6차전에서도 경기시간이 멈추고 결국 패배하는 바람에 끝내 3위로 정규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챔피언결정전 2,3,6차전에서 KCC를 제대로 박살내버렸다.
  • 리 벤슨: 2005-06 시즌도중 안드레 브라운과 트레이드로 전자랜드에서 영입했고 시즌 후 재계약했으나 개막 전 도망갔다.
  • 심용섭 전 단장: 심 단장 부임 후 팀은 온갖 운영상의 사고를 남발하며 암흑기를 활짝 열어젖힌다. 대표적인 게 김승현 이중계약 파동(김승현 문서 참조)과 김남기 감독 계약 변경(시즌 중에 김남기 감독의 계약기간과 연봉을 일방적으로 줄여버린다. 더군다나 김남기 감독은 대표팀 전임 감독으로 재직중에 오리온스가 억지로 빼왔던 감독이다) 건. 이러한 일들로 팀 순위는 심단장 부임 이듬해부터 10-9-10-10(십구십십)을 찍었으며 마침내 고양으로의 연고지 이전으로 직격탄을 날린다. 이 일로 인해 심문어(실제로 대머리다)란 별명이 붙혀졌다. 여담이지만 모델 심소영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 연고지 이전: 2011년 6월 14일 고양으로 연고지 이전 발표. 대구광역시에서 홈 경기장 보수도 하는 등 정성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감행한 이전이라서 기존의 대구 농구팬들도 분노했을 뿐만 아니라 오리온스는 고양에서 1경기도 못 이기고 있다가 10월 28일, 7경기만에야 첫 승을 기록했고 결국 이 부진으로 인해 막판 분전에도 불구하고 2011-12 시즌을 8위로 마치게 된다.
  • 어이없는 팀명 변경: 2015년 9월 팀명이 바뀌었는데, 오리온그룹이 두번 반복되는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로 팀명을 변경했다(...). 사실 새로운 팀명을 팬들의 응모로 받겠다고 이벤트를 실시했었는데 거의 전부가 다 오리온 뒷통수쳤스라든지 오리온 배신스, 고양 오리온 야반도주, 고양 오리온 패륜스와 같은 일방적 연고 이전을 까는 이름들이었다.(...)
  • 더스틴 호그: 2017-18 시즌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 참가하여 오리온과 계약했으나 한국 입국이 힘들 것이라고 말하더니 중간에 계약을 파기하고 터키리그와 계약했다. 호그는 계약 위반으로 바이아웃 금액 10만불을 내고 KBL에 영구자격정지 징계를 받았으며, 오리온 팬들에게 "호구"라고 까였다.[17]
  • 이종현(오리온 이적 이후 한정) : 부상에 노상 시달려 경기에 많이 출장하지 못했던 모비스 시절과 달리 오리온스에서는 이승현과 조합 등을 이유로 기회를 많이 받지만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클러치 타임에서 이지슛을 터무니없이 놓치는 등 활약이 사실상 전무.


2.1.6. 안양 KGC인삼공사[편집]


  • SBS 스타즈 시절: 이 시기에는 챔프전에 진출한 적이 없었고 몇몇 시즌을 제외하면 중하위권에 머물렀으며 이런저런 사유로 관중동원도 잘 되지 않았다. 그나마 안양실내체육관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꾸준히 중박 이상의 관중몰이는 되었으며 SBS 기업명을 단 마지막 시즌에 단테 존스의 등장으로 신드롬이 일긴 했지만.[18]
    • 초창기 3시즌: 전술한대로 흥행이 제대로 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 이 시기에는 연고지인 안양에 체육관이 없어서 잠실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과 의정부를 임시 홈구장으로 삼아야 했다. 이 셋방살이는 1999-2000 시즌에 끝나게 된다.
    • 안양 대림대학교 체육관: 첫 연고지내 내집 마련이었지만 고작 1400명의 관중만 수용이 가능했다. 구리시 체육관보다는 크다 이로 인해 이 시즌에 기록한 평균 관중수는 KBL 역대 최저기록이 되었다(...). 이걸 막아보겠다고 플레이오프 기간에는 수용규모를 훨씬 넘기는 무리한 관중동원으로 통로까지 꽉꽉 들어차게 만들어 안전 문제로 언론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 KBL 초유의 몰수경기: 2003년 12월 20일 전주 KCC 이지스와의 홈경기에서 4쿼터 5분여를 남겨놓고 SBS의 외국인 선수 앤서니 글로버에게 테크니컬 파울이 선언된 것에 항의, 정덕화 감독이 선수들을 코트에 내보내지 않아 몰수패를 선언당한 것이다.[19]
  • 2001-02 시즌부터 2004년 3월까지 대구 (동양) 오리온스(현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에게 17연패를 당하였다. 그리고 대구 원정으로 한정할 경우 연패는 2005년 1월 27일까지 이어갔다.
  • KBL 역대 한 경기 최소득점 기록: 2012년 1월 11일 원주 동부 프로미와의 원정 경기에서 41:52로 패배하며 한경기 양팀 합산 최소득점 신기록까지 깨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챔피언결정전에서는 동부를 상대로 복수에 성공하며 창단 첫 우승을 거뒀다.
  • 김일두의 귀화혼혈 선수 및 비주류 대학 출신 선수(김시래) 비하 발언: 다른 때도 아니고 2012-13 시즌 도중에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한 이 발언 때문에 김일두는 좋았던 이미지가 한 순간에 추락해 버렸다.
  • 원하준: 2009-10 시즌을 앞두고 실시한 귀화 혼혈 선수 드래프트에서 뽑힌 선수로 미국 이름은 케빈 미첼.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그가 한국에 온 계기였던 어머니가 이미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의욕이 꺾여 있기까지 했었다. 결국 한 시즌만에 미국으로 돌아갔고 박태양과 마찬가지로 5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 KGC는 이로써 10개 구단 중 귀화 혼혈 선수 효과를 가장 못 본 팀이 되었다. 사실 원하준은 대학 졸업 이후로 한 시즌 정도 프로에서 뛰고 농구를 그만두었던 선수였다.


2.1.7. 부산 kt 소닉붐[편집]


  • 나골코 시절: 나골코 시절 크게 부진했다. 프로 원년, 1997-98, 2002-03의 세 시즌을 제외하고 전부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특히 골드뱅크의 이름으로는 플레이오프를 한 번도 못 밟아 봤다. 게다가 재정난도 심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는 꼴찌를 한 적은 없다.
  • 김병천 심판폭행 사건: 1998-99 시즌 막판 나산의 신인선수 김병천이 판정에 심판의 목을 주먹으로 가격해버린 사건. 영상으로 보면 뒤에서 팔로 크게 밀었음이 확인된다. 이후 약 1년의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다가 복귀했다. 그러나 이 출장정지 징계로 인해 이전까지 준주전급 기량을 보여주던 김병천은 그저 그런 벤치워머로 전락하게 된다. 참고로 이 당시 심판은 황순팔(...).
  • 코리아텐더 맥스텐: 연고지를 부산으로 옮기고 팀명을 푸르미에서 맥스텐으로 바꿨으나 모기업의 가난을 막지 못하고 끝내 KTF(현 KT)에 매각했다. 그래도 나래 해커스나 진로 맥카스에 비하면 나은게 이 이름으로 뛰는 시즌(2003-04)이 있기는 있었다는 것. 그것도 단 12경기였지만...[20][21] 그리고 나골코 시절을 마감했다
  • 2008-09 시즌: 12승 42패(승률 0.222)로, 나골코때도 안했던 구단 역사상 최초의 꼴찌를 기록. 그리고 추일승 감독의 별명은 추필승에서 추무능, 추필패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9시즌 뒤인 2017-18 시즌, 후술할 모 감독의 등장으로 이때보다 더 심한 흑역사 시즌이 완성됐다.
  • 2009-10 시즌 우주복 마스코트: 역대 마스코트 중 가장 최악인데다 오히려 매직윙스 시절보다 더 퇴보했다. 모비스의 초창기 마스코트와 못생김 분야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 디자인을 떠나서 심각한 수준이며, 모기업인 kt와 모든(야구, 축구, 농구, 배구를 합쳐도) 마스코트에겐 있어선 큰 재앙인 수준. 완벽한 흑역사가 되었다.
  • 박태양: 2009-10 시즌을 앞두고 실시한 귀화 혼혈 선수 드래프트에서 뽑힌 선수 중 1명으로 미국 이름은 크리스 밴. 나이가 어려서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고 시즌 후반에는 그런대로 중용되었으나 시즌 종료 후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후술할 원하준과 함께 5년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kt는 2013-14 시즌 도중 전태풍을 트레이드로 데려와 그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사실 이 당시에는 그야말로 한국농구라는 틀에 갇혀있던 시기라 적응을 하기 힘들었을 거라는 평가가 많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베테랑 가드로 활약했던 전태풍마저도 반 강제로 스타일을 한국식으로 뜯어 고치던 시기였기 때문.
  • 조동현 前 선수 겸 前 감독 (감독한정): kt의 첫 선수 출신 감독. 하지만, kt 창단 역대 최저 성적의 선수 겸 감독. 조동현 감독은 선수 시절에는 뛰어난 수비로 이름을 날렸으며 kt로 이적한 이후에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감독으로 와서는 선수 혹사, 이해할 수 없는 경기 운용, 전술 부재 등으로 부임한 3년 내내 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2016-17 시즌 후반기부터는 타짜 기질을 발휘하며 비판 여론이 많이 줄어드는가 싶었다. 그러나....
    • 2017-18 시즌 : 신인 드래프트에서 1~2순위를 모두 차지하여 허훈양홍석을 품에 안고도 지난 시즌 전반기보다 성적이 더 나빠지는 것도 모자라 박수교급 운용으로 팀 케미스트리를 무너뜨리며 안 그대로 비주류이자 비인기인 kt를 아예 꼴찌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등, 악평을 정점에 달하게 만들었다. 2018년 이후에도 이렇다 할 반등을 보이지 못했고, 사실상 감독 취급조차 받지 못한 채 계약 만료로 물러났다. 젊은 감독을 보좌했던 송영진 수석코치와 박상률 코치도 같이 퇴단했다. 이건 결과론으로 단장과 국장의 잘못이다. 후임인 서동철 감독이 부임 첫해 6강을 올리면서 KTF-kt 역대 한시즌 최저성적인 10승의 굴욕마저 당하면서 쉴드권 자체가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쉴드권을 준 유재학 감독으로 간 것도 놀라운데 1년뒤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의 통합우승 시절 수석코치로 지도력을 회복했다
  • 김기윤, 박철호 : 조동현 감독 시절 17-18 시즌의 멤버. 하지만, 18-19 시즌을 앞두고 음주운전 사건으로 인해 서동철 감독 부임 이후 19-20 오프시즌 기간 사이에 조용히 임의탈퇴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선수 뎊스가 얇아져 후술할 2개의 문제가 동시에 터지게 된다.
    • 변준형 거르고 박준영 : 18-19 시즌 당시 변준형이 1순위 지명이 유력했었다. 그러나 서동철 감독은 김우람 복귀만 철썩같이 믿고 변준형이 아닌 고려대 시절 애제자였었던 박준영을 지명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었고 2년차까지 박준영은 경기에도 많이 나서지도 못하면서 역대 최악의 1순위로 남게 되었다. 다만 2020-21 시즌에서는 점차 실력이 늘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지켜볼 필요성은 생겼다.
    • 김윤태 : KGC 인삼공사의 PO 우승멤버로 식스맨. 그러나, 18-19 시즌에는 그럭저럭 했지만 19-20 시즌에서는 허훈이 부상으로 나가리된 사이 주전으로서 제몫을 못하면서 욕받이가 되더니 20-21 시즌에서는 그나마 남아있던 경기력마저 박살나며 팬들의 질책을 받던 도중 낮술듀오 사건을 일으키며 팬들에게는 금지어로 굳어졌다.

2.1.8.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편집]


  • 전신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와의 관계: 연고지도 이전하고 운영주체도 현대모비스로 바뀌는 혼란기를 겪으면서 프런트진이 기아 색깔 지우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한 행보를 보이는 바람에 농구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비판 문서를 참조.
  • 박수교-최희암 감독 시절: 두 감독 모두 최하위를 한번씩 기록했다. 박수교 감독 시절에는 외국인 선수와 감독의 불화로 안 좋은 루머가 도는 등 팀 분위기가 뒤숭숭했고 최희암 감독 시절에는 선수단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기아자동차 전성기 멤버였던 강동희김영만을 트레이드 시켜버리기도 했다.
  • 오토몬스 시절 초창기 마스코트: 삼원색에 얼굴을 띈 마스코트였지만 얼굴이 너무 못생겼다. 오토몬스 초창기 시절 홈페이지 구단소개에서도 이 마스코트의 사진이 나와 있었다.
  • 역대 전반전 최다점수차 기록: 2016-17 시즌 3월 26일,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삼성전에서 전반전 64-20의 트리플 스코어로 압살당했고(2쿼터 31-4) 결국 111-70으로 패배했다.
  • 함지훈 테이프 사건: 2014년 2월 16일 안양 KGC와의 원정경기에서 작전타임 중 함지훈에게 팀원들에게 토킹을 안했다는 이유로 모비스 벤치가 그대로 방송을 타고 있음에도 유재학감독이 함지훈에게 입에 테이프를 붙일것을 명령, 함지훈이 한번 뜸들이자 “붙여, 임마”라며 다시 압박하자 결국 입에 테이프를 붙이는 모습이 생중계 되었다. 양 옆에 있던 문태영과 로드벤슨은 기막힌 상황에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까지. 이 사건으로 선수인권을 모독했다는 논란이 일어났다.


2.1.9.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편집]


  • 박수교 전 감독-단장: 명문팀 기아를 완전하게 개박살낸 전력에도 불구하고 전자랜드의 감독으로 선임된 후, 전시즌 4강에 나갔던 팀을 역시나 완전하게 개박살 내주며 2004-05 시즌 꼴찌로 떨어뜨렸다. 엽기적인 것은 이런 성적에도 되려 다음 시즌 단장으로 승진했던 것. 단장이 되더니 역대 최초의 외국인 감독인 제이 험프리스를 선임하는 파격적 행보를 보이는데, 이 감독은 선수와의 의사소통 문제로 결국 20경기 만에 짤림으로서 당시 역대 최단명 감독 타이틀을 차지한다. 이외에도 각종 퍼주기 트레이드를 남발하며 결국 2005-06 시즌 8승 46패로 역대 최다패 기록을 경신하는 바람에 박종천과 함께 감독도 아닌 시궁창 취급. 팬들은 이러한 화려한 업적으로 인해 그에게 '수교본좌', '박수괴'라는 칭호를 내렸고, 팀에게는 '개그랜드'라는 별명을 수여했다.
  • 2005-06 시즌: 빼도 박도 못하는 구단 역사상 최악의 시즌으로 감독이 두 번이나 바뀐 끝에 8승 46패로 마무리. 이는 앞서 언급한 박수교 때문이지만... 참고로 이때의 46패는 역대 한시즌 최다패 기록.
  • 박종천 전 감독: 2009-10 시즌 부임 후 1승 11패를 기록하며 단 12경기만에 사퇴, 같은 팀에서 제이 험프리스가 보유하고 있던 역대 최단명 감독 타이틀을 갱신한다.(...) 그런데 SK와 KT&G, 오리온스도 이에 밀리지 않고 삽을 푼 덕에 초반 13연패와 막판 12연패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7위와 단 1경기 차, 꼴찌와 승률이 같은 9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최하위는 대구 오리온스)
  • 구단 사상 한 경기 최소 득점 기록: 2014년 10월 26일 모비스 전, 48:72. 1쿼터를 19-12로 앞섰으나 2쿼터 12득점, 3쿼터 6득점, 4쿼터 11득점으로 처참히 무너졌다.
  • 버튼 거르고 셀비(이하 버거셀) : 이것이 전자랜드의 최악의 용병픽이었다.
  • 정병국 : 3라운드 출신 팀의 원클럽맨으로 뛰었지만, 길거리 자위행위로 인해 불명예 은퇴를 하고 말았다.


2.1.10. 서울 삼성 썬더스[편집]


  • 원년 꼴찌 기록: 21경기로 사실상 시범시즌과 다름없는 시즌이었지만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후 LG와 SK의 가세로 10개 팀 체제로 리그가 시작된다.
  • 1997-98 시즌: 1998년 2월 26일 청주 SK 나이츠와의 홈경기에서 4쿼터에만 51점을 헌납하며 119-124로 역전패를 당한다. 당시 삼성과 SK는 9, 10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꼴찌를 해서 드래프트 1순위[22]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다. 이때 삼성이 4쿼터부터는 아예 후보 선수들을 내보내는 수를 쓰며 고의적으로 탱킹을 시도하지만 그래도 이당시 SK 전력이 안습이라 접전이라 쓰고 병림픽을 펼친 끝에(...) 레지 타운젠드와 드와이트 마이베트, 이 둘에게 40점 이상을 헌납하며 패배하고 만다. 물론 경기가 끝나고 언론과 팬들에게 고의적 져주기, 승부조작이라는 비난을 들어야했다. 이 51점은 KBL 역사상 한 팀의 한 쿼터 최다 점수 기록으로 남아있다.
  • 김상준 전 감독: 2002-03 시즌부터 9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기록을 세운 팀을 단번에 꼴찌로 밀어넣으며 암흑기를 열어젖혔다. 덤으로 구단 사상 최다 연패인 14연패 및 홈경기 개막 14연패까지 기록했다. 2011-12 시즌이 시작되기 전 팀의 프랜차이즈 선수였던 강혁을 전자랜드로 트레이드 시키더니, 막상 시즌에 돌입하고서는 가드 수급을 위해 김동욱을 내주고 김승현을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그러나 부상으로 하락세였던 김승현도 제 몫을 하진 못했고 결국 첫 시즌에 13승 41패로 압도적인 꼴찌를 기록, 감독 본인도 자진사퇴한다. 구단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팬들에게 돌상준이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가루가 되도록 대차게 까이며 야구에서의 이순철처럼 감독도 아닌 금지어로 취급받는다. 다만 마지막 66을 찍을 때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팀인 건 둘째치더라도 이때 무너져버린 여파가 상당히 오래 지속되면서 2013-14 시즌 8위, 2014-15 시즌도 10위로 마감하게 되었다. 중간에 2012-13 시즌은 6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라갔지만 애초에 다른 팀들의 탱킹으로 강제로 진출당한 거나 마찬가지라. 그나마 김상준 감독은 2014년에 성균관대 감독을 맡으면서 난파 직전까지 갔던 팀을 일으키는 데에 성공해 적어도 대학 무대에서는 괜찮은 감독임을 보였다.
  • 우지원: 우지원이 뛰던 2001-02 시즌 삼성 썬더스는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8위를 기록하며 프로농구 역사상 최초로 시즌 챔피언 팀이 다음 시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리고 서장훈의 FA 영입 때 보호선수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당했으며 보상선수로 지명되자마자 모비스로 트레이드되었다.
  • 2012-13 시즌 플레이오프: 22승 32패로 역대 플레이오프 진출팀 중 최저 승률을 기록한 삼성은 전자랜드와의 6강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3전 전패로 광탈. 보너스로 플레이오프 7연패[23] 기록은 덤. 단, 취소선을 그은 이유는 그래도 탱킹이 난무했던 시즌에서 플레이오프라도 진출해서 흑역사라 하기엔 좀 묘하기 때문이다.
  • 2014-15 시즌: 2011-12 시즌보다도 더 참담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상민을 새 감독으로 선임하며 야심차게 출발했지만 시즌 전부터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최하위 후보로 점쳐졌는데, 시즌이 개막되자 예상했던대로 약한 팀 전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부진에 부진을 거듭했다. 20점차 이상으로 무기력하게 패한 경기도 많았을 뿐더러 2014년 12월 23일 전자랜드와의 원정경기에서는 무려 100-46 54점차로 참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심지어 농구팬들은 이상민 감독을 향해 극한직업 촬영중이라며 안쓰러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일부 팬들은 돌상민이라 부르며 조롱하기까지 했다.[24] 그나마 김준일을 발굴해낸 게 위안거리였지만 이동준을 비롯한 기존 선수들이 받쳐주지 못했고 고양 오리온스에 리오 라이온스를 내주고 찰스 가르시아를 데려오는 트레이드를 단행했지만 제자리걸음만 연속하여 용병 농사도 실패했다. 결국 11승 43패로 구단 역대 최저 승률을 경신하고 말았다.
    • 프로농구 역대 최다 점수차 패배: 2014년 12월 23일 전자랜드 전에서 46-100, 54점차 패배를 당했다. 전반 득점이 전자랜드의 1쿼터 26득점과 같고 3쿼터에 단 7득점을 기록했다.
  • 프로농구 역대 특정 구단 상대 최다 연패 기록: 2012년 1월 10일 홈경기에서 이긴 후 2015년 12월 17일 원정경기에서 한 점차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모비스를 상대로 23연패를 기록했다.
  • 2018-19 시즌: 외국인 선수를 모두 바꾸는 등 온갖 시도를 다 해봤지만 4년만에 또 최하위를 기록했다. 두자리 연패는 없었지만 11승 43패로 구단 역대 최저 승률 타이기록을 이루고 말았다. 특히 5, 6라운드 합계 1승 17패(8연패-1승-9연패 마감)는 덤.


2.2. 한국여자프로농구[편집]




2.2.1. 아산 우리은행 위비[편집]


  • 박명수 : 춘천 우리은행 한새 감독 재직 중 2007년 4월 미국 전지훈련 도중 소속 팀 선수 성추행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명령 200시간 판결을 받고 한국여자농구연맹에서 영구제명 조치를 당했다.

  • 김광은 : 2011년 12월 27일 부천 신세계 쿨캣과의 경기에서 패한 후 라커룸에서 박혜진 선수의 목을 조르고 밀치는 등 폭행 논란으로 자진 사퇴하며 박명수 전 감독에 이은 우리은행 흑역사 감독 2호로 등극되었다.

  • 07-08시즌부터 11-12시즌까지 56666 : 12-13시즌 위성우 감독 부임과 함께 통합 우승으로 비밀번호 등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65665가 있어서 이 기록은 2위로 밀려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2.2.2. 현대 하이페리온 -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편집]


  • 진성호 : 명지대학교 농구부 감독시절 특유의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조성원, 박상관 등을 길러내며 대학농구 중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수완을 지녔으나, 1998년 현대산업개발 레드폭스 감독 부임 이후 1999년에 소속 선수의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폭행을 저지른 바 있었고, 이어 2000년 여자프로농구 여름리그 당시 금호생명과의 경기 전반전에서 밀리는 바람에 락커룸에서 진신혜 선수를 구타해 고막을 터뜨린 사실이 발각되자 구단측이 이를 은폐하려다 팬들의 반발과 KBS의 단독보도에 힘입어 구단측에 의해 자숙차원에서 경질했으나 여름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복귀하자 결국 대한농구협회 측은 제명조치했으나 이듬해에 제명이 풀려 중국에서 감독직을 하다가 이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으로 취임했으나 고교농구 승부조작 조사 회피 등을 저지르다가 2012 런던 올림픽 본선진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 18-19시즌 그 자체 : 심지어 2018년 12월 27일 KB스타즈와 경기에선 한 경기 최소 득점인 34점에 그치는 수모까지 당했다.[25][26]
  • 정인교 : 신한은행을 단 2시즌만에 말아먹었고 04겨울리그 이후에도 최다 연패가 4에 불과했고 감독 2년차에 6연패로 팀 최다 연패 기록을 깨고 사퇴.
  • 신기성 : 정인교가 그냥 커피라면 신기성은 TOP
  • 박성훈 : 인헌고 코치 시절 폭행사건으로 3일만에 사퇴
  • 박성배 : 상술 한 박성훈 코치 선임 논란으로 7일만에 사의 표명. 사퇴가 확정될 경우 WKBL 역사상 최단명 감독이라는 흑역사를 남겼다.


2.2.3. 용인 삼성생명 블루밍스[편집]


  • 2003 겨울리그 종료 후 정은순 강제은퇴 : 정은순의 은퇴 이후 만년 준우승팀으로 전락했고 2004년 당시 코칭스태프였던 박인규, 정미라 둘 다 경질되었다. 박인규는 그 이후 프로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고 정미라는 2009-10시즌 금호생명 코치로 갔으나 1년만에 물러났는데, 2012년 여자농구가 올림픽 못 가게 한 원흉이 되었다.
  • 2011년에는 박정은, 이종애 계약 시 샐러리캡을 위반하여 드래프트 지명권이 박탈된 것.
  • 김한별을 제외한 혼혈 선수들
  • 19-20시즌 그 자체 : 개막전에서 우리은행을 꺾었으나 그 뿐이었다. 팀 역사상 최다연패인 7연패까지 기록하며 꼴찌까지 떨어졌는데, 3위 싸움이 초박빙이라 하지만 박하나의 부상 이탈 공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최하위 탈출 싸움 중이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3월 2일 국장단 회의에서 리그 종료까지 확정된다면 BNK와의 상대전적 2승 3패로 열세[27]가 될 위기에 몰렸으며, 결국 남은 3경기마저도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인해 취소되면서 구단 역사상 첫 최하위 기록이라는 수모를 당했다. 더 가관인건 사상 최초로 꼴찌를 했는데도 임근배 감독과도 재계약을 했다는거.


2.2.4. 부천 하나원큐[편집]


  • 첼시 리 : 사상 초유의 공문서 위조 사건의 주인공. 조모가 한국인이라는 주장을 하여 귀화선수로 등록하고 대표팀 승선을 위한 특별귀화 절차까지 밟으려다가 법무부에 의해 증빙서류를 위조한 정황이 발각되었다. 이미 농구계 안팎에서 첼시 리를 의심하는 시선들은 많았으나 이를 애써 무시한 WKBL 사무국과 하나외환 농구팀의 합작품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 6번 : 이 번호를 최근에 달았던 선수는 신지현인데, 15-16시즌을 앞두고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 아웃되며 16-17시즌 부터 7번으로 바꿨다. 그 이전에 팀 내에서도 6번을 부상 때문에 기피했다고 한다.

  • 우리은행 맞대결 26연패 : 2020년 10월 24일에 끊어냈다.


2.2.5. 청주 KB 스타즈[편집]


  • 정덕화 : 청주 KB 스타즈 감독 시절 김영옥에 음주를 강요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어설픈 WKBL이 은폐에만 급급했다.
  • 신한은행 맞대결 25연패 : 2006여름리그 이후 09-10시즌 2010년 2월 12일 77대76으로 승리할때까지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KDB생명이 2017년 12월 20일 경기에서 지면서 우리은행에 25연패를 기록하고 있어서 2018년 1월 22일 구리 KDB생명이 우리은행에 패하며 기록이 깨졌다.

  • 조성원 : KBL 팀과 WKBL 팀등을 연달아 말아드신 기염을 토하고 있다.

2.2.6. 인천 금호생명 팰컨스 - 구리 금호생명 레드윙스 - 구리 KDB생명 위너스 - OK저축은행 읏샷 - 부산 BNK 썸[편집]


  • 13-14시즌 부터 시작된 65565 : 여자농구 최장기간 암흑기 타이기록. 1시즌 만 더 플레이오프 가지 못하면 비밀번호 등재 확정이다. 여담이지만 이는 KBO 리그 SK 와이번스의 2013~2017 성적과 동일하다.
  • 이옥자, 안세환 : 비밀번호 시작의 두 원흉 감독들.
  • 아산 우리은행 위비 맞대결 32연패 : 13-14시즌 7라운드 65-60 승리 이후 연패가 진행되고 있다. 팀 이름 바뀌고도 연패는 현재 진행형. 18-19시즌 우리은행이 외국인 선수 부상 이탈있었음에도 1쿼터 리드 못 지킨 것도 모저라 4쿼터 60:63 상황에서 진안의 턴오버도 모자라 U파울을 저지르며 그 기회를 걷어찼다. 4라운드로 박빙 승부로 몰아갔지만 리바운드 싸움에서도 밀리며 32연패에 빠졌다. 하지만 2019년 1월 18일 연패를 끊는데 성공했다.
  • 17-18시즌 : KDB생명의 시즌 후 운영포기로 시작해서, 4승 31패로 끝난 시즌.
  • 20-21시즌 : 5승 25패로 꼴찌도 모자라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29점으로 한 경기 최저득점 기록까지 갈이 치우는 수모까지 당했다.

2.3. 기타[편집]


  • 1996 애틀랜타 올림픽 한국 농구 대표팀 : 역대 최악의 올림픽 농구대표팀. 모든 경기에서 패하여 본선 참가국들 중 최하위(12위)를 기록. 내용 자체도 최악이어서 첫 경기인 호주전에서 22-44로 리바운드 수에서 2배 차이로 밀리는 등 대회 내내 제공권에서 압도당했다. 이 때문에 대회 전부터 '드림팀'으로 불렸고 실제로 전승으로 우승한 당시 미국 대표팀에 빗대어 '나이트메어' 팀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화룡점정은 바로 선수들의 음주파문으로 대회 기간 중 정재근 생일파티를 하면서 일어났다. 8월 7일 대한농구협회최인선 감독과 허재에게 6개월 선수자격정지 처분을 내렸고[28], 김남기 코치와 정재근은 3개월 자격정지, 이상민과 현주엽은 근신처분, 그리고 기타 8명에게는 주의환기처분을 내렸다. 이후 올림픽에 단 한번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듬해 프로 출범과 맥을 함께한다.

  • 연세대학교 vs 삼성전자 농구단의 1994~95년 농구대잔치 준결승 경기 : 삼성전자의 문경은, 이창수, 박상관 등은 팀의 선배인 김현준의 은퇴를 명예롭게 장식한다는 이유로 당시 서장훈이라는 강력한 센터로 중무장한 연세대학교를 농구대잔치 8강전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후배인 서장훈을 상대로 K-1수준의 더티한 반칙을 일삼았으며 특히 박상관은 리바운드하고 내려오는 서장훈의 뒷목에 강타를 먹여서 서장훈이 그자리에서 목 골절상을 당하고 실려나가고 만다. 결국 이 사건 덕에 삼성전자가 연세대학교를 이기고 결승에 진출하지만 기아자동차에게 말 그대로 개발살이 난다.[29] 서장훈은 이후 삼성에 안 좋은 감정이 생겼으나 공교롭게도 첫 번째 FA 자격을 얻었을 때(2002~2003 시즌을 앞두고) 제 발로 삼성으로 갔다. 그 여파로 이창수와 박상관은 삼성을 떠나야 했다.

  • 정상헌 : 재능은 뛰어났지만 불성실한 태도로 커리어를 망친 선수. 경복고 시절 방성윤의 라이벌로 꼽혔지만 고려대 진학 후 잦은 무단 이탈로 말썽을 일으켰다.[30] 그래도 재능을 높이 산 오리온스가 드래프트에서 그를 지명했으나 또 무단 이탈하면서 임의탈퇴 처리되었다. 이후 모비스로 트레이드되어 유재학 감독 밑에서 개과천선하나 했지만 상무 전역 후 훈련에 무단불참하면서 다시 임의탈퇴 공시되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면 그냥 흔해빠진 몰락한 선수 취급을 받는 정도겠지만... 2013년 처형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2014년에 징역 20년이 확정되었고 2033년까지 사회 복귀가 절대 불가능해짐으로써 농구인으로서의 생명은 물론이거니와 인생까지 완전히 영구제명되었다.

  • 정재근 : 2014년 연세대학교 감독 시절 제1회 아시아 퍼시픽 대학농구 고려대학교와의 결승전에서 심판에게 박치기를 하는 바람에 5년간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프로 선수 시절에도 폭행 등 소소한 흑역사가 다수 있었다.

  • WKBL 쫄쫄이 유니폼 : 1997-98 시즌 당시 여자 실업농구 일부 구단에 시범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여 한국여자프로농구 초창기에 5개 프로 구단과 국가대표팀에 공식 채택된 유니폼 유형으로 수영복처럼 몸에 딱 달라붙는 원피스형으로 선수들의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만들어진 유니폼이었다. 선정성 논란과 선수들의 불편 호소로 인하여 2001년 겨울리그부터 폐지.


3. 미국[편집]



3.1. NBA[편집]


  • 1986년 NBA 드래프트: NBA 드래프트 역사상 최악의 드래프트. 선수들의 재능만 따지면 전설급인 84년과 노다지였던 85년에 미치지 못 했을 뿐이지 브래드 도허티, 마크 프라이스같은 거물급과 론 하퍼, 제프 호너섹같은 준척급 선수들이 다수 지명된, 충분히 괜찮은 드래프트였으나 1라운더 중 몇 명이 약물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취급이 좋지 않은 것. 1라운드 3,6,7픽으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피닉스 선즈댈러스 매버릭스에 각각 지명된 크리스 워시번 (NC 스테잇), 윌리엄 베드포드 (멤피스 주립대(현 멤피스대)), 로이 타플리 (미시건대)는 하나같이 약물 문제에 시달렸고, 1라운드 2픽으로 보스턴 셀틱스에 지명된 렌 바이어스(메릴랜드대)는 아예 약물중독으로 사망했다.
  • ABA: NBA에서 대놓고 흑역사로 묻고 싶어하는 리그. 1967년에 NBA와 경쟁하기 위해 만든 리그로 3점 슛, 선수들의 별명, 치어리더, 덩크 콘테스트, 얼리 엔트리등 현대 농구판에 기여한 것이 많은 단체이고 1960년대까지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져간 수많은 독립 리그중 가장 현재의 단일리그와 치열하게 경쟁을 했던 리그다. 하지만 ABA는 결정적으로 구단이 가난했기 때문에 NBA의 돈과 언론공세를 이겨낼수 없었고 결국 1976년도에 NBA에 합병당한다. 합병 과정에서 덴버 너기츠, 뉴저지 네츠, 인디애나 페이서스, 샌안토니오 스퍼스가 편입되었지만, 합병 이후 NBA 인사들의 ABA에 대한 대접은 박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ABA출신인 샌안토니오가 5회 우승을 이루고 조용한 강팀을 유지하고 있다.
  • 팀 도너히: 1994년부터 2007년까지 재직했던 심판. 개인적으로 진 도박 빚을 갚으려고 자기가 심판을 담당한 경기에 돈을 걸고 승부조작을 했다. 그동안 선수나 감독이 자신이 결부된 경기에 돈을 걸고 승부조작을 한 경우는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경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가장 공정해야할 심판이 자신이 나서는 경기에 돈을 걸고 승부조작에 나섰다가 적발된건 초유의 사태로 리그 전체의 신용과도 결부될 수 있는 큰 사건이었다. 결국 유죄를 선고받고 수감되었으며 당연히 리그에서는 영구제명. 나중에 2002년 LA 레이커스와 새크라멘토 킹스 간의 서부 결승 6차전 때 승부조작이 있었음도 인정하면서 엄청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 2000년 드래프트: 드래프티들의 실력으로만 따지면 2000년 드래프트 클래스가 단연 최악이다. 보통 드래프트가 망했다고 하면 1순위가 기대보다 못하거나 아니면 상위픽들이 부진했던 정도인데, 이 드래프트 출신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별 볼 일이 없었다. 루키 시즌부터 단체로 말아먹는 바람에 마이크 밀러는 꼴랑 11.9점 4리바운드를 기록하고도 신인왕을 타갔다. 이러다보니 MVP나 올 NBA 퍼스트팀은 언감생심이고 이 클래스를 통틀어 올스타 출전 횟수가 딱 3회 뿐이다.[31] 유일한 올NBA팀 선정은 마이클 레드로 써드팀 1회. 2001 드래프트만 해도 수준이 낮은 편이라고 평가받지만 그래도 파우 가솔이나 조 존슨, 토니 파커, 잭 랜돌프 등 슈퍼스타급이 여럿에 가솔과 파커는 명예의 전당 헌액 가능성이 높은데 2000년 클래스는 어림도 없다. 실제로 Sports Illustrated는 현대 시기에 드래프트 Bust[32]였던 선수 20명을 뽑으면서 이례적으로 6위에 2000년 드래프트 클래스 전체를 올려놨다. 한 마디로 드래프트 자체가 흑역사... 또한 EPSN의 데이브 스콘필드가 드래프트 로터리 제도가 도입된 이래 역대 드래프트 클래스 랭킹을 매겼는데 이 중 당연히 꼴찌고 유일하게 F점수를 받았다.[33] 또한 2차 스탯 중 WARPS[34]의 측면에서 보면 드래프트 평균이 -17.3인데, 드래프트 평균이 -수치를 기록한 클래스도 역대 유일하다. 여담이지만 상위권만큼 하위권 순위에서 좋은 선수들이 나오기도 했는데, 1순위 마틴은 그나마 괜찮은 커리어였지만 2위 스트로마일 스위퍼트, 3위 대리우스 마일즈는 지극히 평범한 롤플레이어였고 4위 마커스 파이저는 완전히 망했다. 그러나 히도 터콜루(16위), 위에 언급된 매글로어(19순위), 레드(43순위) 등은 괜찮은 커리어를 보냈다.[35] 2017년 기준 가장 최근까지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는 선수는 자말 크로포드라고 할 수 있는데 16년차 노장이었던 2016년에 올해의 식스맨 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뒀다.[36]


3.1.1.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편집]


  • 1994/95시즌부터 2005/06시즌까지 12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 2010년 중반 현재 골든스테이트를 보면 상상할수 없겠지만 크리스 웨버의 이적 이후 부터 팀이 엉망이 되었고, 현재 동부 강호인 클리블랜드 역시 비슷한 시기 숀 켐프의 이적 첫 시즌을 제외한 시즌과 르브론 데뷔 전 까지는 대표적인 비 인기팀 이었다.
  • 라트렐 스프리웰 : 1997년 12월 당시 감독인 PJ 칼리시모가 자신을 꾸짖는 것에 반발해 목을 조르는 사고를 치면서 구단은 남은 계약을 해지했다. NBA는 스프리웰의 선수 자격을 1년동안 정지시켰으나 선수협의 반발과 적극적인 중재로 징계가 경감되었다.
  • 2015/16 시즌 NBA 정규시즌 최다승 기록인 73승 9패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우고 NBA 역사상 최초의 만장일치 정규시즌 MVP 스테판 커리를 선두로 파이널까지 진출했지만... 상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역사상 최초로 파이널에서 3-1 리드를 뒤엎고 내리 3연승으로 7차전 접전끝에 우승을 차지하게 되면서 팀 역사에 최악의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37]


3.1.2. 뉴올리언스 펠리컨스[편집]


  • 샬럿 시절 : 프로스포츠에서 유례 없는 호적 파기를 감행했다. 호적 파기 이후 연고 이전 이전의 역사를 펠리컨스 역사로 치부하는 걸 금기시한다.

  • 허리케인 카트리나 : 홈구장을 완전히 박살내버렸다. 농구팬이 아니더라도 당시 뉴올리언스에 살다가 생존한 사람들에게도 흑역사.


3.1.3. 뉴욕 닉스[편집]


  • 돈 넬슨 前 감독 - 재임 기간 동안의 성적은 34승 25패로 그다지 나쁘지 않았으나, 패트릭 유잉-샤킬 오닐 트레이드 요구로 결국 구단 내에서 반발이 심해져 시즌 도중에 해임당했다.


3.1.4. 디트로이트 피스톤즈[편집]


  • 역대 최소 득점 경기 참사 : 1950년 11월 22일, 당대 최강의 팀이던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와 조지 마이칸을 상대하던 포트웨인 피스톤즈는, 어떻게 보면 기발하면서도 기가 막힌 작전을 펼친다. 무조건 시간 끌기. 6-10의 장신에 기술도 훌륭한 마이칸이 공을 오래 잡을수록 승산이 없다고 여긴 피스톤즈는 공격권을 얻을때마다 무조건 시간을 끌었고, 결국 이 경기는 관중들의 야유 속에 19:18이라는 어처구니없이 낮은 점수를 내고 피스톤즈의 승리로 끝난다. (시간을 계속 끌다 막판에 기습적으로 결승점을 득점) 양팀 모두 단 네 골을 넣었고(나머지 득점은 모두 자유투) 농구라고 보기도 힘든 최악의 졸전에 경악한 NBA 관계자들은[38]결국 1953-54시즌부터 "한 팀이 공격을 개시하고 24초안에 슛을 하도록"하는 샷클락을 도입하게 된다. 이 제도는 nba 뿐 아니라 농구 자체에 이식되어 현재 제도화된 모든 농구경기에서 이용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잘 되긴 했지만 경기 자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야하는 프로스포츠의 원래 목적은 개나 줘 버린 쓰레기 경기.
  • 조 듀마스 단장의 삽질[39]


3.1.5. 마이애미 히트[편집]


  • 2011 NBA 파이널 : 이미 시즌 전부터 르브론 제임스의 The Decision 파문으로 생긴 잡음으로 시끄러웠고, 리그 탑플레이어 3 힘으로 결승까지 오르긴 했지만 전문가들이나 팬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에이스가 시리즈 내내 침묵하는 등 후반 경기운영이 흔들린 반면 상대팀더크 노비츠키를 필두로 중요할 때마다 클러치샷을 성공시키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결국 히트는 우승에 실패한다. 단순히 여기서 그쳤으면 흔히있는 패배에 불과했겠지만 시리즈 도중 웨이드제임스가 독감에 걸린 노비츠키를 카메라 앞에서 조롱하는 Mocking Dirk 사건이 터지고 시리즈 패배 후 기자회견에서 제임스가 팬들을 향해 "니들이 뭐라 떠들어도 난 잘먹고 잘사니 찌질대지 말고 현실로 돌아가라"라는 식의 Real World 발언으로 초대형 어그로를 끌면서 실력에서도 매너에서도 진 최악의 시리즈가 되었다.
  • 2014 NBA 파이널 : 시리즈 평균 14점 차, 합계 70점 차로 파이널 역사상 최다 점수차 패배라는 굴욕을 당할 정도로 일방적인 경기 끝에 우승에 실패했다. 그것도 2차전에서 2점차로 아슬아슬하게 승리해서 수치가 저렇게 나온 것이지 그 외 경기에서는 평균 15~20점차 정도였고 경기 도중 30점 정도 뒤진 적도 있었으며 가비지 타임이 이미 후반 시작할 때 나오기도 했다. 시즌 후 르브론 제임스친정팀으로 돌아가면서 빅3는 해체되었다.


3.1.6. 미네소타 팀버울브스[편집]


  • 조 스미스 이면계약 파동 : 샐러리 캡 관련, 결국 계약은 모두 무효가 되고(래리 버드 조항 불인정) 미네소타는 3년동안(원래 5년간 1라운드 박탈이었는데 경감되었다.)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박탈당하고 350만 달러의 벌금을 물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3.1.7. 보스턴 셀틱스[편집]


  • 렌 바이어스 : 보스턴이 1986년 드래프트에서 2픽으로 지명했으나,드래프트 며칠 후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까지의 암흑기
  • 레지 루이스 : 셀틱스의 빅3(래리 버드-케빈 맥헤일-로버트 패리시)를 대체할 만한 차세대 스타였지만, 1993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 샬럿전에서 심장발작으로 쓰러졌다가 회복되었지만, 그해 7월 27일에 연습 도중 또다시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사망. 이것은 셀틱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 카이리 어빙


3.1.8. 브루클린 네츠[편집]


  • 뉴욕/뉴저지 네츠 시절
    • ABA 시절의 잦은 경기장 이전 : 첫해 네츠의 홈구장은 뉴저지주 티넥에 위치한 티넥 무기고(진짜 무기고 맞다!)였다. 그러나 ABA 플레이오프 기간에 뉴저지주에서 서커스단이 먼저 구장 사용허가를 따내는 바람에 플레이오프를 열 구장이 없어서 플레이오프 출전이 금지된 흑역사까지 있을 정도.(...) 그래서 아메리칸스는 뉴저지에선 못해먹겠다고 GG치고 다른 곳을 물색하던중 뉴욕 주 카맥에 위치한 롱 아일랜드 아레나로 옮긴다. 이 연고이전을 통해 뉴욕 주에 들어온 아메리칸스는 팀명도 '뉴욕 네츠'로 변경했다. 아메리칸스 시절과 뉴욕 초창기에는 여느팀이나 그렇듯 고전을 면치 못했고, 뉴저지로 돌아가길 원했지만 여러 문제로 뉴저지 재이전조차 실패하고 중간에 홈구장을 한번 더 옮겨야 했던 안습의 네츠는 로이 보 구단주가 1972년 NHL 뉴욕 아일런더스까지 창단하면서 낫소 베테랑스 메모리얼 콜로세움으로 홈구장을 같이 쓰게 되어 방랑팀 상황은 해결한다.
    • 1976년부터 2001년까지의 암흑기 : 통칭 어빙의 저주.
    • 에디 그리핀 - 시튼홀대 출신으로 2001년 드래프트 1라운드 7픽으로 지명되었지만, 휴스턴 로켓츠에 지명된 리차드 제퍼슨(1라운드 13픽, 애리조나대), 제이슨 콜린스(1라운드 18픽, 스탠포드대), 브랜든 암스트롱(1라운드 23픽, 페퍼다인대)와 맞바꾸어지면서 명암이 갈리기 시작한다. 드래프트되었던 3명은 쏠쏠히 활약했지만, 그리핀은 프로생활 내내 술과 마약으로 갖은 말썽을 일으키다가 2007년 8월 27일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 보스턴 셀틱스 대니 에인지 단장에게 당한 역대급 농락. (폴 피어스&케빈 가넷 트레이드 대첩)


3.1.9. 샬럿 호네츠[편집]


  • 前 구단주 조지 쉰 : 1999년부터 구단 여직원과 관련된 성추문이 불거졌고, 결국 팀이 2002년에 뉴올리언스로 이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 이후의 역사는 뉴올리언스 펠리컨스 항목을 참조.
  • 2011~2012 시즌 : NBA 사상 최악의 성적을 냈는데 한 시즌동안 꼴랑 7승 59패 승률 0.106을 기록하며 한 시즌 사상 최저 승률을 기록했다.


3.1.10. 샌안토니오 스퍼스[편집]


  • 제리 타캐니언 前 감독 : 1990년에 UNLV(네바다 대학교 라스베가스 캠퍼스)를 전국대회 챔피언에 올려놓은 명장이었고 1992년에 스퍼스 감독으로 NBA에 진출하면서 선수들과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팀워크를 망칠 악동도 없었으나, 자신의 지도 방식과 프로에서의 방식이 안 맞아서 1992/93 시즌 초반에 9승 11패라는 불명예를 안고 경질되었다.


3.1.11. 시애틀 슈퍼소닉스[편집]




3.1.12. 시카고 불스[편집]


  • 1998~2004년까지의 암흑기


3.1.13. 올랜도 매직[편집]




3.1.14. LA 레이커스[편집]


  • 디트로이트 젬스 : 창단 당시의 팀명. 4승 44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남기고 1시즌만에 미니애폴리스로 연고이전했다.
  • 2014~2015시즌 : 겨우 시즌 한달만 지났음에도 구단 최악의 흑역사 확정. 무엇보다 현재진행형에 내년까지는 피할 수가 없다.
  • 2015~2016시즌 : 위의 시즌보다 더 최악. 한 시즌이 전부 코비 브라이언트의 은퇴 행사로 소모되었다.


3.1.15. LA 클리퍼스[편집]


  • 창단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의 암흑기 : 단 한번도 50승을 넘은 적이 없었다.....
  • 前 구단주 도널드 스털링 : 인종차별 발언으로 구단주 자격이 정지되었다. 이후 스티브 발머가 구단을 새로 인수한다.


3.1.16. 애틀랜타 호크스[편집]


  • 대주주 브루스 레벤슨의 인종차별 발언 : 인종차별 사건 시즌 2.


3.1.17. 워싱턴 위저즈[편집]


  • 길버트 아레나스 : 2010년도에 총기 반입으로 큰 사고를 치고 만다. 시즌아웃.
  • 이전 명칭들
    • 시카고 패커스(Packers), 지퍼스(Zephyres) - 각각 포장업자, 산들바람이라는 뜻인데, 농구팀 이름치고는 나약한 이름이었다. 그린베이 패커스는 강팀인데?
    • 워싱턴 불리츠 : 이름 그대로 총알처럼 빠른 농구를 하자는 의미이지만, 팀 명칭이 총기 사고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1997/98시즌부터 팀명이 위저즈로 바뀌었다.


3.1.18. 인디애나 페이서스[편집]


  • 앤 메이어스 - NBA에 처음으로 입단을 시도한 여자 농구선수. UCLA 출신인 그녀는 1979년에 페이서스에 입단하여 1년간의 계약을 맺었으나, 사흘 간의 루키 캠프에서 통과를 못해 입단 7일만에 퇴출되어 이후 여자농구에 몸담았다. 흑역사인가..?

  • 오번 힐의 난투극 : 2004년 12월 20일 디트로이트와의 경기 중 론 아티스트벤 월러스와 몸싸움을 벌였고 관중석에서 맥주컵이 날아오자 관중석으로 난입, 난투극으로 확산되면서 45초를 남겨두고 버저가 울리지 못한 채 97대 82로 인디애나가 승리했으나 아티스트는 잔여경기 출장정지의 중징계를 피하지 못했다. [40] 그리고 레지 밀러는 커리어 마지막 우승기회를 이 사건으로 놓치고 말았다.


3.1.19.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편집]


  • 르브론 제임스The Decision : 르브론 제임스 커리어 최악의 실수.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이건 팬들도 쉴드를 포기했다. 한편 르브론은 2014년에 친정팀으로 돌아온 뒤 2016년 NBA 파이널 우승으로 팀에 트로피를 선물했다. 다만 16-17시즌 이후로 홈콜 논란이 있었다.


3.1.20.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편집]


  • 샘 보위(Sam Bowie) : 1984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2순위로 지명된 유망주였으나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은퇴했다. 드래프트 때 상위지명 심지어는 1라운드 전체 1순위 지명을 받고도 기대를 저버리고 소리소문 없이 은퇴한 선수들도 많은데 이 사람이 유독 흑역사로 치부되는 이유는 이 사람 바로 다음에 지명된 1라운드 전체 3순위 선수 때문이다. 그러면 왜 1라운드 전체 1순위 지명자는 흑역사 취급을 안 받냐고? 그 이유는... 그 선수마저 흑역사로 간주한다면 그보다 못한 선수도 수두룩한 NBA 명예의 전당은 흑역사의 전당으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41]
  • Jail Blazers 시절 : 이 팀의 스타급 선수 몇몇이 팀원들끼리 싸우기, 심판과 싸워서 테크니컬 파울 먹기, 마리화나 피우기, 술먹고 운전하다 경찰에 체포되기...상상할 수 있는 모든 구설수를 치자, 포틀랜드 팬들은 그들을 교도소 블레이저스(Jail Blazers)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을 붙였다.
  • 그렉 오든 : 위 84년 드래프트에서 저질렀던 짓을 똑같이 저질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3.1.21.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편집]


  • 1972~73시즌 : 9승 73패, 승률 0.109. 이는 NBA 역대 최소 성적(82경기 정규시즌 기록상에서만)이다.[42] 73패 역시 NBA 최다패 기록이다.
  • 2014~15시즌 : 2014년 12월 2일까지 17연패를 기록했다.
  • 2015~2016시즌 : 개막 18연패 최다 타이, 전 시즌에 이어 28연패로 미국 프로 스포츠 최다 연패. 신인 자릴 오카포는 길거리에서 루저라고 조롱받자 주먹다짐까지 벌였다.
  • 샘 힌키 전 단장 : 2013~2016시즌 당시 선수 단장. 극단적인 탱킹으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데 힌키 단장을 상당히 좋아하는 팬과 선수들도 많다. 이유는 힌키의 극단적인 탱킹이 없었으면 조엘 엠비드벤 시몬스와 같은 초특급 유망주들을 못 얻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 무엇보다 2017년 드래프트 1순위를 가져간 것은 힌키 전 단장이 모아둔 유산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마켈 펄츠까지 터지면 이 명단에서 지워야 하는게 맞다또한, 힌키 단장 시절 필라델피아의 선택을 받은 크리스티안 우드제라미 그랜트 2명이 2020-2021시즌 기량발전상 후보로 꼽히고 있어 안목이 재조명되고 있다. 단장 재임 당시 성적 때문에 금지어 목록에는 있으나, 그것 치고는 평가가 꽤 좋은 편에 속한다.


3.1.22. 휴스턴 로켓츠[편집]


  • 1995/96시즌부터 2002/03 시즌까지 착용했던 유니폼과 엠블럼 : 당시 트렌드에 맞추어 만들어졌으나, 찰스 바클리에 의해 유치하다고 대차게 까였다.
  • 스카티 피펜 : 항목 참조.
  • 찰스 바클리 : 팀 내의 모두까기 인형.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3.2. 국가대표[편집]



  • 1988년 올림픽 - 위에 언급된 뮌헨 올림픽 결승전에서 미국이 굴욕적인 패배를 겪긴 했지만 누가봐도 어처구니없는 편파판정으로 금메달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실력으로 진 건 아니다"라는 아주 합당한 변명거리가 있었다. 실제로 훗날 NBA 스타가 되는 에이드리안 댄틀리, 월터 데이비스 등이 이끌던 1976년 미국대표팀은 유고슬라비아를 결승전에서 95대74로 꺾으며 전승 올림픽 우승을 이뤄냈다. 이후 80년은 소련과의 관계 때문에 미국이 보이콧을 했지만, 소련이 보이콧을 한 1984년에서도 마이클 조던, 패트릭 유잉 등이 이끄는 대표팀은 결승전에서 스페인을 31점차로 꺾으며 금메달을 따냈다. 실제로 1988년 대회 전까지 이들은 올림픽에서 단 1패만 했고, 이 1패도 제대로 진 것이라고 하기 무리란 걸 생각하면 미국대표팀의 위용은 여전했다. 그러나 1976년 대회에서 푸에르토 리코에서 1점차로 진땀승을 거두는 등 미국과 세계의 격차는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고, 이들의 최대 라이벌인 소련이 돌아온 1988년에 결국 일이 터지고 만다. 사실 NBA를 주름잡는 미국선수들이 단연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서 한계가 있었던 이유는 당시 프로들은 올림픽에서 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미국 다음으로 규모가 큰 유럽리그와 남아메리카의 프로리그 선수들은 뛸 수가 있었고, 사실상 프로였던 다른 국가들의 실업리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미국의 대학 선수들은 경험많고 몸도 더 완성된 프로들과 경쟁을 해야했다.

그럼에도 워낙 미국과 비미국의 격차가 커서 압도할 순 있었지만 문제는 1988년, 소련 팀을 이끌던 아비다스 사보니스는 미소간의 갈등 때문에 1985년에 드래프트에서 지명되고도 NBA에 진출하진 못했지만 세계적인 센터 중 하나였다. 사보니스는 맨발 221cm의 장신임에도 엄청난 운동능력과 더불어 수비력, 슈팅력, 패스, 드리블 능력을 겸비한 만능센터였다. 결국 1995년에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합류하지만 이미 만 31세에 가까웠고 큰 부상을 당한 이후였기 때문에 전성기보다 현저히 못한 모습을 보였다. 농구 기자 빌 시몬스는 사보니스가 "마치 콘크리트 농구화를 신고 움직이는 듯 했다"고 묘사했으며, ESPN의 데이빗 쏘프는 만약 사보니스가 젊었을 때 NBA에 왔다면 역사상 가장 패스를 잘하는 빅맨으로 기록되는 것은 물론이고 역대 센터랭킹 톱4에 들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쏘프가 구체적으로 누구보다 위라고 하진 않았지만 보통 가장 위대한 센터 톱3로 꼽히는 선수들은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 카림 압둘자바이며(참고로 이들의 MVP수상 횟수는 각각 5회, 4회, 6회이며 우승횟수는 11회, 2회, 6회. 체임벌린은 우승은 좀 딸리지만 개인기록은...항목 참조) 이 평대로라면 하킴 올라주원, 샤킬 오닐이나 3연속 MVP를 수상한 모제스 말론같은 괴물들보다 사보니스가 더 잘했을 것이라 봤다는 것. 90년대 블레이저스의 리더였던 클라이드 드렉슬러는 사보니스가 합류했다면 포틀랜드가 "장담컨데 4,5개, 심지어 6개의 반지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고 평했다. 여담이지만 드렉슬러가 트래이드된 이후 사보니스가 팀에 합류해서 둘이 같이 뛴 적은 없다. 부상에서 회복 중이었음에도 팀에 합류한 사보니스는 훗날 NBA에서 슈퍼스타가 되는 데이비드 로빈슨과의 매치업에서 우세를 점하며 미국을 준결승에서 82대76으로 꺾고, 결승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꺾으며 우승을 거둔다.

뮌헨 참사와 달리 실력에서 철저히 밀리며 패배해 결승에도 못 오른 미국 대표팀의 충격은 엄청났고, 이는 미국이 자국의 프로들을 올림픽에 합류시킬 수 있도록 로비하는 계기가 된다. 결국 1989년에 모든 프로선수들의 올림픽 농구 참가가 허용되며 드림팀이 출범하게 되고, NBA 최고이자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이끌던 이 팀은 92년 올림픽에서 전설을 쓰게 된다.[43] 여담이지만 88년 대회에서 쓴맛을 봤던 로빈슨은 드림팀의 멤버로 당당히 합류, 4년 전 자신에게 굴욕을 줬던 사보니스의 리투아니아 팀(소련 해체 후였으므로)과 4강에서 만나 127대 76으로 박살내며 복수를 하게 된다.[44]

  • 2004 아테네 올림픽 - 뮌헨은 억울하게 진거고 88년은 대학선수들을 보냈다는 핑계라도 있지 이쪽은 드림팀으로 3등했다. 물론 팀 던컨을 제외하면 NBA최정상급을 총출동시킨 건 아니었지만...


3.3. 대학농구[편집]


  • Fab 5 : 1990년대 초반 강팀이었던 미시건 대학교의 뛰어난 주전 5명(크리스 웨버, 주완 하워드, 제일런 로즈, 지미 킹, 레이 잭슨)을 일컫는 호칭이었으나, 2002년 들어 이들과 관련된 금품수수 등 온갖 비리가 드러나면서 1991/92 시즌부터 1998/99 시즌(1992, 93년 전국 토너먼트 준우승 포함)까지의 모든 기록이 삭제되었다.

  • 존 칼리파리 감독의 부정행위들

  • 2015년 시라큐스 대학교 스캔들 : 2014-15시즌 도중에 2001년부터 10여년간 발생했던 학업 미수행, 추가 부수입, 약물 검사 정책 미이행 등 여러 가지 규정 위반 사항이 발각되면서 인해 108승 기록 말소, 향후 4년간 3명씩 총 12명의 장학생 발탁 금지라는 중징계를 받았고, 짐 베이하임 감독도 9경기 동안 벤치에 앉지 못하는 징계를 당했다.

  • 그 외 수많은 부정행위 사건들

[1] 이미 이전날 우지원이 팀동료들의 몰아주기로 3점슛을 두자리수로 넣으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예고했다.[2] 정상적으로 한게 아니다. 상대팀 전자랜드 선수들이 레이업등 건성으로 슛을 날려 블록하기 쉽게 협조했다.[3] 앞에서 언급한 김주성, 정훈과 함께 한경기서 3명이 동시에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유일한 경기가 되었다.[4] 포틀랜드 C.J.맥컬럼의 형이다. 동생과 반대로 NBA 문턱도 못갔다.[5] 당연하다. 야오밍은 CBA와 비교도 안되는 NBA에서도 한 경기 8개 블록을 기록한 경기가 있으며 CBA에서 마지막 시즌 평균 기록이 32.4점 19리바운드 필드골 성공률 72.1%였으며 포스트시즌 기록은 38.9점 20.2리바운드 76.6%였다. 한 마디로 CBA는 당시 야오밍의 놀이터였으며 본인의 실력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6] 경기시간을 12분으로 늘리려고 했으나 감독 및 여론의 반발로 보류하였다. NBA도 경기당 6~70점대 득점이 나올 정도니까.[7] 사실 삼성 입장에서도 이상민을 보상선수로 데려가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달라고 했으나 KCC에서 거절했다. 결과적으로 KCC에게는 잘 된 일이었지만.[8] 물론 이상민같은 프랜차이즈 스타도 보호 못하는 KCC과 KBL의 거지같은 행정이 최악의 형태로 드러난 점에서 흑역사인 것은 맞다.[9] 서장훈이 트레이드된 배경에는 당시 "팀내 불화"라는 루머가 크게 퍼져 있었다. 2008년 신인드래프트에서 KCC는 드래프트에서 최대어 하승진을 지명했는데, 처음에는 서장훈과 하승진 모두 국내에서 손꼽히는 선수들이었기에 둘다 보유하려 했다. 그러나 KBL에서 가장 크고, 가장 느린 두 선수가 동시에 뛰는건 불가능했다. 당연히 팀은 당연히 더 젊고 신체조건이 월등한 하승진을 택했고, 서장훈을 트레이드하는 결과가 나온 것. 이 트레이드에 대해 감독인 허재가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당시에 입을 열었는데, 불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며 서장훈이 먼저 조용히 감독실에 찾아와 자신이 더 많은 기회를 받을 수 있는 팀으로 먼저 이적 요청을 해서 트레이드가 이뤄진 것이였다고 한다. 트레이드 요청을 한 이유는 서장훈 본인이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하승진의 자리를 뺏고 싶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하며 허재 감독이 서장훈의 이 의견을 받아들인 거였다고. 여담으로 이 트레이드를 통해 KCC가 뎨려온 선수가 바로 강병현이었으며, 결국 이 트레이드의 결과는 우승이었다.[10]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여 병역 특례를 받지 못했다. 사실 하승진의 키는 1990년대 중반까지였다면 당연히 면제였지만 병역 기준이 점점 강화되면서...[11] 그래도 상대팀 선수+심판을 코트에서 가격한 것은 어떻게 봐도 용납될 만한 일은 아니다. 사건의 정확한 순서는 장영재의 파울에 흥분하며 장영재의 목을 밀쳐 쓰러뜨림→팀 동료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심판에게 다가가 심판마저 밀쳐 넘어뜨림. 이후 코칭스탭 및 선수들이 말려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더 큰 난동을 부렸을 상황.[12]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에 오정연과의 이혼 소송까지 있었다.[13] 이 당시 외국인 선수상이 폐지된 상태였고 정규리그 MVP는 오로지 국내선수들에게만 준다는 것이 기자들의 불문율이었다. 그 결과 2013-14 시즌 정규리그 MVP는 문태종이 수상하였다.[14] 이는 KBL 사상 최초로 6위 팀이 6강 PO에서 3위 팀을 3전 전승으로 이긴 첫 기록이다.[15] 샷클락 24초 기계만 돌아가고 경기시간은 멈춰 있었다.[16] 파이널 6차전이 불과 몇시간 뒤였다. 그리고 재경기에서 동양은 5차전 결과 무효, 지금 6차전으로 예정된 경기를 그대로 5차전으로 치러야 한다는 의견이었지만 TG에서는 5차전 무효는 받아들이되, 곧 벌어질 6차전도 취소시킨뒤 5차전 도중 갈비뼈 부상을 당한 허재가 다 완쾌되고나서 원주에서 5차전을 다시해야 한다는 무리수 주장 때문에 여기서 전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17] KGC의 키퍼 사익스도 재계약을 거부하고 터키 2부리그 팀과 계약하면서 5년 자격정지 징계를 받긴 했지만 2016-17 시즌 맹활약했고 시즌 중에도 한국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아쉽다는 반응이 컸을 뿐, 비난까지 받지는 않았다. KGC가 시즌 도중 사익스 교체 이야기를 꺼내며 간보기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팬들은 구단을 비난하고 사익스에게는 다른 리그로 가서 잘하라고 격려를 보냈다. 결정적으로, 키퍼 사익스는 KGC가 터키 구단으로부터 바이아웃 금액 10만불을 다 받고 보냈다.[18] 이 시기에는 후술한 대로 임시 홈구장 살이를 하면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연고지 이름만 안양일 뿐 실질적으로는 여기와 같은 신세였기 때문이다. 관중몰이가 될래야 될 수가 없었던 것.[19] 표면적으로는 정덕화 감독이 선언을 했지만 실질적으로 선수단 철수를 주도한 것은 당시 코치였던 이상범. 시즌 종료 후 징계가 완화가 되었지만 이상범이 당시 정덕화보다 징계를 더 무겁게 먹었던 것이 이 때문이었다.[20] 코리아텐더 전체로 따지면 단 120경기 만에 KTF에 매각되었다.[21]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와의 2차전을 끝으로 KTF의 이름을 달게 되었다.[22] 당시 나오는 선수 중 최대어가 무려 현주엽이었다.[23] 이는 2015-16시즌 KGC와의 6강 2차전까지 9연패로 이어졌다.[24] 아닌게 아니라 당시 삼성이 한창 부진했을 때 네이버 검색창에 돌상민을 치면 아예 자동검색어로 뜨기까지 했다.[25] 이는 며칠 전인 12월 23일 창원 LG 세이커스3쿼터에만 낸 39점보다도 적다.[26] 이 34점고 20-21시즌 BNK썸이 29점을 기록하며 한 경기 최저득점 기록을 갈아 치우게 된다.[27] 19-20시즌 2, 3, 5라운드 패배[28] 허재는 몇 개월 후 술로 인해 사고를 치게 되는데, 음주운전이 적발되어 체포 후 포승줄에 묶이는 망신을 당한다.[29] 참고로 '목장훈 사건' 즉, 서장훈이 목에 보호대를 차게 된 계기는 이날 부상이 아니라 김주성 항목에 나와있는 주성타 때문이다.[30] 단 재능하나는 무시무시해서 무단이탈뒤 복귀할때 연습량 부족에도 상관없이 경기때마다 엄청난 활약을 한다.[31] 1순위 케년 마틴, 19순위 자말 매글로어, 43순위 마이클 레드인데 재밌게도 다 2004년에 유일하게 출장했다. 그나마 마틴은 당시 주가를 한창 올리고 있었으며 이후 맥시멈 계약도 따냈고(그러나 계약 이후 성장이 딱 멈췄다;;), 레드도 이후 평균 26점까지 올리는 등 레이 알렌에 이은 차세대 고득점 고감도 슈터로 성장하고 있다가 부상으로 커리어가 점점 무너진 케이스지만 매글로어는 진짜 평범 그 자체였다. 최고기록이 13.6점, 10.3리바운드에다 수비능력도 지극히 평범하고 커리어 절반 이상을 후보선수로 뛴 애초에 올스타급과는 거리가 멀었던 선수. 그가 선발된 건 순전히 그의 포지션이 센터였다는 점 때문이다. 당시는 센터기근의 시대였고, 그나마도 샤킬 오닐야오밍이 서부에 있는지라 동부에서는 후보 센터로 선발할만한 센터가 벤 월러스를 제외하곤 정말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매글로어가 선발된 것. 여담이지만 2004년 올스타전에는 이때만 유일하게 올스타에 선발된 선수들이 유독 많았는데, 이들 대부분이 이때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어서 뽑혔다가 이후 성장세가 멈췄다는 걸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위에 언급된 셋 외에도 메타 월드 피스(...), 안드레이 키릴렌코가 있다. 다만 샘 카셀의 경우 이때가 커리어 말년이었지만, 그동안 좋은 커리어에도 올스타가 한번도 없었던 것에 대한 공로상+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엄청난 상승세 덕분에 선정.[32] 당시엔 높이 평가받았으나 까놓고 보니 실제 실력이 형편없었던 케이스.[33] 역대 1위는 1985년이었는데, 이게 2009년 랭킹이기 때문에 이때 이미 A를 받은 2003년 클래스들의 활약이 더해진 현재 랭킹을 메긴다면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참고로 왜 역대 최고 드래프트라고 널리 알려진 1984년이 없냐면 이건 드래프트 로터리 제도 시행 이전이기 때문이다.[34] wins above replacement player. 대체 선수가 있다고 가정했을때, 그 선수보다 얼마나 더 많은 승수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 보는 수치. 이게 마이너스면 심각한 거다...[35] 물론 여기서 괜찮다는 건 이 클래스 기준으로 괜찮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터콜루는 올랜도 매직에서 준수한 활약을 해줘서 토론토와 거액계약을 맺었지만 이후 망했고(계약 이후 11.4점이 최고 기록), 매글로어는 위에 언급된 대로 평범 그 자체였으며, 레드는 실력은 나무랄데 없는 올스타급 이상이었지만 안타깝게 부상 때문에 고생하다가 만32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36] 여담으로 크로포드는 NBA 데뷔한지 10년이 지난 이후에야 처음으로 슛연습을 했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타고난 재능에만 의존하고, 노력을 안하는 게으른 천재로 악명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슛거리와 슈팅력, 드리블 실력으로 활약했으나 기복도 심해 "자멸" 크로포드란 멸칭이 한국 팬들 사이서 돌 정도. 그러나 노장이 되면서 연습도 하기 시작하고(...) 베테랑 득점원의 역할을 톡톧히 해주면서 의외로 롱런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말년에 식스맨 상을 수상했는데 그가 전성기 때도 주전급~식스맨급 정도의 기량이었단 걸 생각하면 그 정도 실력을 만 36세가 되어서 보였단 건 정말 놀라운 일.[37] 이게 만약 정규시즌 우승도 우승으로 치는 KBL같은 리그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영광이겠지만 NBA는 정규시즌 1위는 시상도, 호칭도 없는 리그다. 심지어 동서부 챔피언이라는 칭호도 플레이오프 성과로 얻는다. 즉, 겨우 플레이오프에 턱걸이 진출해도 기적적으로 파이널에 오르면 각 컨퍼런스 챔피언으로 기록되고 트로피를 받는다. 반면 82승 0패를 해도 1라운드 탈락하면 그 팀은 아무것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디비전 챔피언"이인 하지만, 한 시즌에 6개 디비전 1위한 팀이 전부 받는 칭호인데다 주요 이력으로 치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기존 기록은 72승을 세우고 우승한 시카고 불스는 신기록을 기념하는 우승기 (banner)를 커다랗게 제작해 당당히 경기장 천장에 걸어놨지만, 워리어즈는 깃발을 제작하지 않고 기념 판데기 하나 제작해 연습시설에 걸어놨다.물론 이 팀은 파이널에 올랐기 때문에 2016년 서부 챔피언이긴 하다.[38] 당시는 생긴지 얼마 안되던 NBA가 인기를 얻기 위해 발버둥치고 그 성과가 조금씩 나오던 시기였는데 이 사건이 찬물을 확 끼얹는다. 이 경기의 임팩트는 고작 한 경기 때문에 농구 본연의 규칙을 고쳐야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39] 2003년 NBA 올해의 경영자에 선정될 정도로 배드보이즈 시즌 2의 구축까지는 성공적이었으나, 해체 후 팀 재건 과정에서 실책을 연발했다. 2014년에 사장에서 사임했다.[40] 스티븐 잭슨 30경기, 저메인 오닐은 25경기 출장정지. 맥주컵을 던진 관중은 영구 출입 금지 조치.[41] 물론 이 클래스 최고의 선수는 조던이고 역사를 아는 상태라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조던을 뽑을 것이다. 그러나 역대최고보다 못하다고 흑역사로 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42] 2011~12 시즌에 샬럿 밥캣츠가 7승 59패 승률 0.106을 갱신했지만, 이는 파업으로 인한 단축시즌이라서 그런 것이다.[43] 팀의 공동주장이었던 래리 버드는 드림팀이 아메리카 지역 예선에서 손쉽게 우승을 거두고 난 뒤 "이는 바르셀로나로 가서, 금메달을 따고 그 합당한 자리로 돌려놓는 여정을 향한 작은 발걸음일 뿐입니다.("This is just a small step toward going to Barcelona, winning the gold medal and bringing it back where it's supposed to be.")라고 말했다. "합당한 자리"라는 워딩에서 미국인들이 자신이 종주국인 농구에 대해 갖는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44] 또 다른 88팀 멤버인 미치 리치몬드는 역대 최강의 센터진 (오닐, 로빈슨, 올라주원)을 자랑하는 1996년 드림팀에 합류해 역시 손쉽게 금메달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예선전서 리투아니아를 만나 104대 82로 손쉽게 승리를 거둔다. 다만 안타깝게 1988년 팀의 다른 멤버들은 설욕의 기회를 갖지 못했는데, 이는 1990년대 미국 대표팀이 왠만한 올스타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엄청난 로스터를 자랑했기 때문이다. 올스타까지 된 대니 매닝, 댄 멀리도 합류하지 못했으니... 2000년대 들어 대표팀의 네임밸류가 확 떨어지긴 했지만 이때 이들은 이미 엄청난 노장이 된 이후였으며 결정적으로 저 팀들은 우승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