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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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불교조계종 상징.svg 대한불교조계종
흥천사
興天寺 | Heungcheonsa
설립일
1397년
소속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주지 스님
각밀
위치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59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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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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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에서 제작한 흥천사 다큐멘터리 영상

1. 개요
2. 연혁
3. 문화재
4. 여담
5. 교통
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 성북구 흥천사길 29 (돈암동 595)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의 말사이다.

2. 연혁[편집]


흥천사는 원래 한양도성 내에 있었다고 한다. 1396년(태조 5년)에 조선 태조의 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태조는 강씨의 능인 정릉을 도성 안에 만들고, 정릉 동쪽에 원찰을 지었으니 이 절이 흥천사이다. 이후 1398년(태조 7년) 7월에 열린 우란분재[2]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8월에는 직접 신덕왕후의 천도회[3]를 열면서 스님들을 몸소 만나 시주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계모 신덕왕후를 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던[4] 태종은 즉위한 뒤인 1403년(태종 3년)에 사찰에 딸린 전답과 노비의 수를 줄이고, 1408년(태종 8년)에는 절의 건물 170칸을 뜯어서 명나라 사신들의 객사인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했다. 그나마 태조의 체면 때문인지, 사찰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어서 1410년(태종 10년)에는 절을 수리하고 이듬해에는 사리각을 고쳐지었다.

1424년(세종 6년)에 선종과 교종을 통합할 당시 선종에 속하게 되었다. 1437년(세종 19년)부터 4년 간 왕명으로 사찰을 고쳐 지었고, 공사가 끝나자 5일 동안 경찬회[5]를 개최했으며, 1443년(세종 25년) 4월에는 회암사[6]의 주지스님이었던 만우를 데려다 이 절에 머무르게 했다. 또한, 1447년(세종 29년)에는 안평대군을 시켜 사리각에 부처님사리를 모시게 했다.

1462년(세조 8년)에는 구리로 만든 범종을 만들고 이곳에 달았으며, 옛 흥천사 부지에 의경세자의 부인이자 며느리인 한씨의 사저를 지어주기도 했다. 1469년(예종 1년)에는 명나라성화제와 효정순황후가 지어 보낸 표기를 여기에 걸었다.# 1480년(성종 11년) 절을 다시 고쳐 지었고,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창덕궁 안에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이 절로 옮겼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화재로 절이 전부 불 타 사리각만 남았고, 1510년(중종 5년)에는 이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이후 1569년(선조 2년)에는 절이 정릉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왕명으로 함취정(含翠亭) 옛 터로 옮겨 지었다. 어찌어찌 명맥은 질기게도 이어져 온 셈이다.

1794년(정조 18년)에 성민 스님과 경신 스님 등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 고쳤다. 그 뒤 1846년(헌종 12년)에 구봉 스님이 칠성각을 지었고, 1849년(철종 1년)에 성혜 스님이 적조암을 새로 건립했으며, 1853년(철종 4년)에는 대웅전(지금의 극락전)을, 2년 뒤에는 1855년(철종 6년) 명부전을 세웠다. 고종 즉위 직후인 1865년(고종 2년)에는 신도들이 숙식하며 수행하는 공간인 대방과 스님들의 생활 공간인 요사채를 건립하면서 이름을 창건 당시의 이름인 '흥천사(興天寺)'로 되돌렸다.


3. 문화재[편집]


역사 깊은 절이니만큼, 문화재가 많이 있는 절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존재하는 전각으로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건물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비롯하여 명부전(冥府殿)[7] · 용화전(龍華殿) · 칠성각 · 독성각(獨聖閣) · 만세루(萬歲樓) · 승방(僧房) · 대방 · 일주문(一柱門) · 종각(鐘閣) 등이 있다. 세조가 봉안했던 범종은 흥천사명 동종이라는 이름으로 1938년에 일제가 덕수궁 광명문으로 옮겨 전시하다가, 2019년에 광명문이 원 위치로 이전함에 따라 현재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6년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1460호로 지정받았다.

파일:대한불교조계종 상징.svg 흥천사 문화재 목록
분류
번호[8]
이름
수량
소재지
비고
보물
1460호
흥천사명 동종
(興天寺銘 銅鍾)
1구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경복궁)

1891호
서울 흥천사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서울 興天寺 金銅千手觀音菩薩坐像)
1구
서울특별시 성북구 흥천사길
29 (돈암동, 흥천사)


서울 흥천사 비로자나불 삼신괘불도
(서울 興天寺 毘盧遮那佛 三身掛佛圖)
괘불도 1폭
복장낭 1건 3점
괘불함 1점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583호
서울 흥천사 대방
(서울 興天寺 大房)
1동
521㎡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66호
흥천사 극락보전
(興天寺 極樂寶殿)
건물 1동
토지 344.3㎡

67호
흥천사 명부전
(興天寺 冥府殿)
건물 1동
토지 111.1㎡

367호
흥천사 아미타불도
(興天寺 阿彌陀佛圖)
1점

368호
흥천사 지장시왕도
(興天寺 地藏十王圖)
1점

379호
흥천사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판
(興天寺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板)
1건 60판

380호
흥천사 현왕도
(興天寺 現王圖)
1점

405호
흥천사 극락보전 극락구품도
(興天寺 極樂寶殿 極樂九品圖)
1점

406호
흥천사 흥천사 극락보전 도량신도
(興天寺 極樂寶殿 道場神圖)
1점

407호
흥천사 극락보전 신중도
(興天寺 極樂寶殿 神衆圖)
1점

408호
흥천사 천룡도
(興天寺 天龍圖)
1점

409호
흥천사 만세루 아미타불회도
(興天寺 萬歲樓 阿彌陀佛會圖)
1점

410호
흥천사 만세루 신중도
(興天寺 萬歲樓 神衆圖)
1점

411호
흥천사 만세루 제석천도
(興天寺 萬歲樓 帝釋天圖)
1점

412호
흥천사 도량장엄번
(興天寺 道場裝嚴幡)
16점

413호
흥천사 목조여래좌상
(興天寺 木造菩薩坐像
1구

414호
흥천사 목조보살좌상
(興天寺 木造菩薩坐像)
1구

415호
흥천사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興天寺 冥府殿 石造地藏三尊像 및 十王像 一括)
27구

415 - 1호
석조지장보살좌상
(石造地藏菩薩坐像)


415 - 2호
석조무독귀왕상
(石造道明尊者像)


415 - 3호
석조도명존자상
(石造道明尊者像)


415 - 4호
시왕상
(十王像)


415 - 5호
귀왕상
(鬼王像)


415 - 6호
판관상
(判官像)


415 - 7호
사자상
(使者像)


415 - 8호
금강역사상
(金剛力士像)


415 - 9호
동자상
(童子像)


416호
흥천사 목조관음보살삼존상 및 복장유물
(興天寺 木造觀音菩薩三尊像 및 腹藏遺物)
3구

423호
흥천사 시왕도
(興天寺 十王圖)
4점

서울특별시
문화재 자료
66호
흥천사 약사불도
(興天寺 藥師佛圖)
1점

70호
흥천사 조왕도
(興天寺 竈王圖)
1점

74호
흥천사 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興天寺 石造藥師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붕상 1구
복장유물 1건



4. 여담[편집]


  • 사찰 뒤편으로 구립 흥천어린이집과 느티나무어린이집 두 곳의 어린이집이 있다. 두 곳 모두 성북구에서 건립한 공립유치원이고 흥천사에서 어린이집 부지를 제공했으며 서울특별시에서 최초로 세워진 한옥 양식의 어린이집 건축물이기도 하다.##

  • 일제강점기의 시인 이상이 1936년에 이곳에서 수필가 김향안(본명 변동림)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결혼식을 올리고 1년 만에 이상은 사망했다. # 이후 김향안은 화가 김환기와 재혼했다.


5. 교통[편집]


서울 지하철 4호선/서울 경전철 우이신설선 성신여대역, 돈암2동주민센터입구.흥천사 정류장과 가깝다. 6번 출구로 나와서(혹은 162번, 1014번, 1162번, 2115번, 성북20번을 타고 돈암2동주민센터.흥천사 정류장에 내려서) 천천히 걸어도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고, 아니면 마을버스 22번을 타고 흥천사입구까지 가도 좋다. 다만 올라가는 길이 경사로이고 이 길이 좀 가팔라서 경사로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버거울 수도 있다. 흥천사 입구에는 350년 된 고목과 절까지 나 있는 가교가 놓여 있다.


6. 같이보기[편집]



[1] 사진 출처 - 《불교신문》.[2] 盂蘭盆齋. 영혼을 기리기 위해 스님들에게 음식을 바치는 의식.[3] 薦度會. 사망한 사람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고자 실시하는 불교 의례.[4] 정확히는 신덕왕후처럼 왕실의 권위를 등에 업고 정치를 좌지우지하려는 외척들에 대한 경계였다.[5] 慶讚會. 불전 공사를 마치고 나서 여는 일종의 기념 의식. 불상, 불탑 등을 완성하거나 불경을 펴낸 후에도 연다.[6] 태조가 한때 머무르던 곳이기도 하다.[7] 명부전의 현판은 붉은 바탕에 금자로 쓴 것으로 흥선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8] 번호가 적히지 않은 것은 2021년 11월 19일에 개정한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이후 번호없이 지정받은 유물,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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