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하개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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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과정
4. 결과
5. 영향
6. 이후


1. 개요[편집]


북송 희녕(熙寧) 연간 재상 왕안석의 지원으로 왕소가 평융책을 제시하여 송나라가 탕, 첩, 도, 민, 하, 임의 6주를 차례로 탈환한 전투이다.

송 신종 때는 북송의 적빈 적약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북송 역사에 길이 남을 희풍변법 운동을 했다. 변법과 동시에 북송의 통치자는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희하개변은 이 시기 개변 활동의 구성부분으로, 하황을 탈환하여 서하에 복종하는 민족들을 적으로 만들어서 서하(西夏)를 멸망시키고 중국 서북지방을 통일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북송(北宋)·서하(西夏)·주목(主目) 정권의 3파전이 희하개변(熙河開邊)을 관통했다. 북송은 비록 하황지구를 점령하였지만, 이 지역의 정세 불안은 최초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지역의 형세를 불안하게 하였다. 북송의 힘을 견제했다.

희하개변은 수년 동안 운영되다가, 희녕6년(1073)에 이르러 탕, 첩, 도, 민, 하, 임의 6주를 수복하고, 2000여 리를 불순번부 199,000여 명을 거두어, 위무의 크기를 모집하였다. 번족 30여만 장.지정(至政)과 6년(1116), '氏씨의 땅은 송군현(宋郡縣)'이다.북송은 하황의 새 변지에 군현을 설치하고 보채를 건설해 하황 구역에 새로운 기상이 나타났다.

하황지구에 대한 군사행동은 북송 조정의 막대한 인적 물적 재력을 소모하였으나, 토번의 저항으로 더욱 많은 병력이 투입되어 통치를 유지하게 되었다.이는 하황 지역뿐 아니라 북송 조정에도 더 큰 영향을 끼쳤고, 북송 멸망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 배경[편집]


송신종은 서하(西夏)를 철저히 제압하고 영주를 먼저 취하여 서강을 멸하고 북벌을 도모하여 수세지치를 떨치려 하였으나, 전조(前朝)의 서하(西夏)에 대한 방어정책에서 벗어나 서하에 우세를 벗어나기 위해 서하위협을 철저히 해결하고, 서하와 토번의 연계를 차단하며, 서하를 압박하여 서하위협을 철저히 해결하여 서부의 변환을 제거하려 하였다.

희녕 원년(1068년), 왕소는 『평융책』 3편[1]을 올려 서하 공략 계책을 올렸다. 하황지구 토번세력의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는 평융책은 북송 통치자의 가장 급박한 서하문제 해결책을 제시하였는데, 그 목적이 송신종과 왕안석을 위시한 변법파의 '개경혁(改易改革)'의 정치주장과 일치하여 북송 조정의 높은 중시와 채택을 얻어 왕소는 진봉로 경략기사 이문자(宜文字·기요비서에 해당)의 직책을 맡아 희하를 개척하는 것을 주재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하황 수복의 임무를 맡았다.


3. 과정[편집]


번부의 유용가는 청당 일대에서 가장 세력이 세서 위원의 강인과 하인을 모두 절제하려 했다.장수들은 먼저 유용가를 토벌하기 위해 논의한다. 왕소는 변경을 규찰하는 일 때문에 유용가에게 장막까지 수레를 끌고 가 성패를 따져보고 그날 밤 다시 그곳에 머물렀다.이튿날 아침, 강인, 하인 모두 그들의 중요한 수령들을 왕소에게 따라 보냈다. 오래전 용령가가 부하 12만여 명을 거느리고 조정에 복속한 것이 포순(包順)이다.

송 신종은 왕소에게 토벌을 명하였다. 그러나 경략사(經略使) 이사중(李師中)이 반대하였고, 왕안석은 왕소의 의견을 지지하여 이사중을 파면하고 그를 대신하여 이약우를 파견하였다. 이약우가 도착한 후, 왕소에게 그가 말한 버려지고 경작하지 않는 논밭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왕소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약우 자세히 살펴보니 밭 한 뙈기밖에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것도 이곳의 주인이 소송을 당해 몰수됐다가 돌려준 것이다. 이약우가 송신종을 불러 왕소의 이른바 황전(黃田)을 거짓으로 보고했다고 말하자, 이에 왕안석은 이약우를 파면하고 한진(韓鎭)을 임명하였다.이에 한진은 왕소를 부회하여 그가 보고한 것은 사실이라 하여 사중·순경은 좌천되고 왕소는 태자 중윤·비각 교리로 승진하였다고 한다. 후에 장령 곽규가 상부에 왕소가 몰래 시중에서 돈을 빌렸다고 말하자, 왕안석은 그가 말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여겨 그를 징위안으로 전보시켰다.

송나라 신종이 하(河)·농(龍)을 탈환하자, 고위성을 축조하고 통원군을 조직하여 왕소(王少)로 군사를 알았다.

희녕 4년(1071년), 토번대장 무어·더슈크바 등은 말방산에 집결해 디도성에 바짝 다가섰다.

희녕 5년(1072년) 7월 위원보와 걸신평에 군대를 보내 이를 물리쳤다. 처음에는 강인들이 요충지를 지키면서 일부 장수들이 부대를 허허벌판에 배치하려 하자 왕소는 "적은 험한 곳을 떠나지 않으면 우리는 헛수고만 할 뿐이다. 이제는 험한 곳에 들어갔으니 내 소유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그러자 부대를 이끌고 직접 말방산으로 가서 강군과 맞서 누가 감히 말하랴. 퇴군하면 참수하겠다"고 말했다. 적군이 높은 곳에서 아래까지 공격하여 송군은 약간 패했다. 왕소는 이때 직접 무장하고 나가 부대를 지휘해 반격에 나섰고, 강인은 크게 패해 막사 천막을 불태우고 철수했고, 조 시는 크게 흔들렸다. 이때 남몰래 징집하여 군사를 이끌고 타오허를 건너와 구원했고, 흩어진 적들이 다시 집결하였다. 왕소계는 부하 장수들을 죽우령로로 출동시켜 적을 견제하기 위해 허세를 부리게 하고, 몰래 무승을 공격하게 하여 장님 약 등을 마구 징발하여 격전을 치렀으며, 송군은 장님 약 등을 대파하고 무승을 거두어 진조 군으로 만들었다. 왕소는 우정언, 집현전을 위해 편찬하였다. 곧이어 맹징을 쳐서 그 부락의 이만 명을 내렸더라'시주(熙州)'라는 이름은 희주(熙州)로, 화희(畵熙)·하(河)·타오(濤)·민(民)·퉁위안(通遠)을 일로로 하고, 왕소(王少)는 용도각(龍圖閣) 지희주(知熙州)에 임명된다.


4. 결과[편집]


희녕 6년(1073년) 3월, 왕소가 하주를 공격하자 희하지구의 강족수령 목징이 도망갔다. 얼마 후 강군은 수천 명의 군사를 모아 향자성에 반격하여 송나라 군 휘장을 빼앗기고, 전경이 700병을 시금하여 구원하고 우정곡(牛精谷)으로 들어갔다가 강부의 습격을 받아 병사가 패하여 피살되었다. 왕소는 선봉장 묘수 등을 급히 하주에서 보내 강부병을 대파했다.묘수와 도장에 이어 시합병이 우정곡(牛精谷) 제부를 공격하여 다시 승리하고 향자성(香子城)까지 지켰다. 3월 24일, 왕소는 또 지덕순군 경사립을 파견하여 통로를 열어 강부가 약탈한 휘장을 모두 빼앗았다. 왕소가 군사를 끌어들여 반격하고, 목경이 하주로 복귀하면서 송군은 수미(首尾)를 돌볼 수 없게 되었다. 왕소는 먼저 향자성을 쌓고 요충지를 장악하고, 파견군인 도도하(渡濤河, 지금의 감숙 녹곡, 민 현지역)를 복송하여 강락성(康樂城, 지금의 감숙)을 함락하고, 자군인 파호노성(破珂城, 후에 정강성, 지금의 감숙 광하)을 거느렸다. 4월 하순, 왕소는 희주로 돌아가 평남산지(지금의 감숙 임하 동쪽), 건강락성, 유가천보(지금의 감숙 광하 동쪽), 결하보(結河布, 지금의 감숙 임조 서북)로 군사를 돌려 급로를 뚫었고, 군을 이끌고 백성(白城, 지금의 감숙 임하 서북 서쪽)을 무너뜨리고 향자성으로 진군하였다. 6월 송 신종은 지덕순군 경사립에게 2000군을 이끌고 하주로 내려가라는 조서를 내렸다. 왕소가 군사를 거느리고 둘러보니 강부병 복남산, 송나라 군대를 기다려 타오허를 건너려다가 귀로를 끊고, 천험마종성(속칭 철성자(鐵城子, 지금의 감숙민현 동편)에 군사를 모았다.왕소는 왕군 만취의 지름길을 마종에게 습격하라고 명하였다. 8월 중순, 노골산(지금의 여름 서남쪽)에서 조주 경내로 진입하여, 길이 험하고 좁아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장수는 결표(結表)를 지어 하주를 지키며 송군의 뒤를 예리하게 따랐다. 왕소는 두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부장이 인솔하여 둘레 주로 들어가 함께 스스로 목정을 쳤다.송군은 연전연승하여 목징이 패주하고 개성문이 투항하였다.왕소는 하주를 평정하고 탕주를 다시 이겨 타오허를 뚫었다. 9월 18일 송군이 민주에 입성하자 강족의 수장 오질, 목령경 등이 항복했다. 곧 왕소는 청룡족을 패용천(青海羅川, 지금의 청해 동부와 감숙의 접경지)에 나누어 파병했고, 지이(지금의 감숙교부), 조주 강족의 수령 흠령정, 궈이돈(郭厮敦)이 차례로 성에 투항했다. 팔방각은 그 가족으로 송나라에 예속되었다.

왕소는 대군을 이끌고 54일 동안 전전하며 1천8백여 리를 걸어서 5개 주를 점령하고, 수천 명의 적을 죽이고, 소, 양, 말을 수만 필이나 노획하였다.


5. 영향[편집]


희녕 8년(1075년) 송 조정은 희주(지금의 감숙임조), 하주(지금의 감숙임하), 타오저우(지금의 감숙임담), 민주(정치소 지금의 감숙서화), 영녕자이(지금의 감숙감곡) 등에 주(州)를 설치하고 말을 사 민족무역을 함으로써 국경 각 종족의 환영을 받으며 희하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다. 조정에서는 왕소를 경략무마사로 삼았고, 토번정권은 점차 와해되었다.

이는 왕소가 예상한 대로 서하를 '복배수적지우(腹背受敵之憂)'로 만들었고, 변방의 여러 종족들을 서하의 침탈과 약탈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하였다. 서이사의 설치 및 실천 활동, 새로운 법은 새로운 경험을 창출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다. 또 서하의 약탈전쟁으로 막혔던 실크로드도 원활해졌고 질이 좋은 군마를 육성할 수 있었으며, 서하를 공격할 수 있는 방향이 추가되었다.


6. 이후[편집]


1081년 서하 공격 실패[2]로 인해 왕안석이 물러난 후 구법당이 집권하자 구법당은 하황을 다시 토번에 넘겨준다. 그러나 북송(北宋) 말기 채경(蔡京)이 권력을 장악하고 변경 개척 사업을 주도하였는데, 숭녕(崇寧) 2년(1103년) 6월 왕후(王厚)·고영(高永)이 다시 황주(黃州)를 치고, 이듬해 4월 환관 동관이 청당[3]을 취하였으며, 서쪽 너머 황두회흘까지 점령함으로써 농우도호부를 설립하게 된다.

선화 7년(1125년), 정강의 변으로 인해 북송이 남쪽으로 내려가자 하황은 금과 서하가 동시에 관할하는 지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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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용은 서하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황 일대를 정복해야 한다는 내용이다.[2] 하필이면 환관이었던 이헌이 지휘관이었고, 북송군의 명령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다.[3] 칭하이 호 일대로, 오늘날 칭하이 성 시닝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