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사와 가쓰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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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경찰 출신 정치인.
2. 상세[편집]
1945년 기후현 시라카와무라에서 태어났다. 해당 마을은 일본 내에서 특이한 전통 건축양식의 집들이 모인 마을로 유명한 곳이고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지라 그의 생가도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일로 후쿠시마현으로 이주해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후쿠시마현립 후쿠시마고등학교를 거쳐,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국가공무원채용1종시험에 합격, 졸업 후 1968년 경찰청 캐리어 관료로 입문하여 30년 가까이 근무했다. 오사카부 경찰본부, 경찰청 보안국 외사과 재외연수(1971년부터 2년간 듀크 대학교 유학), 후쿠오카현 경찰본부 경비부 외사과장, 경찰청 황궁경찰본부 호위부 호위2과장, 경찰청 보안국 공안3과장보좌 겸 외사과장보좌 등을 거쳐 주영국 대사관 일등서기관으로 근무했다. 이때까진 외사 전문이었으나 이후 방범경찰로 전문분야를 바꿔 경찰청 형사국 보안부 보안과장, 경시청 방범부장을 거쳐 오카야마현 경찰본부장, 경찰청 장관관방 심의관을 역임, 방위청 장관관방 방위심의관을 마지막으로 경찰을 그만두었다. 퇴직 당시 계급은 경시감으로, 경찰 최고위직 출신이다.
거물 경찰관료 출신인 나카소네 내각의 고토다 마사하루 내각관방장관의 비서관으로 근무하며 그에게 정치 입문 권유를 받아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소속으로 도쿄도 제17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까지 같은 선거구에서 연속으로 당선되어 현재 9선을 기록했다. 무려 경시감이라는 경찰 최고위직 출신에 연공서열도 높은데도 선수로 8선이 될때까지 아베 신조 총리 하에선 각료에 기용되지 않다가 2020년 9월, 스가 요시히데 내각에서 부흥대신을 임명되면서 75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내각에 입각했다. 2021년 치러진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너끈하게 당선되어 강한 지역 기반을 입증했다.
3. 기타[편집]
- 도쿄대학 재학 중인 1964년부터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베 신조의 가정교사로 2년간 근무했다. 다만 정계 입문은 아베가 먼저 해서 의원 선수는 아베 쪽이 더 높고, 서로 파벌도 다르다. 공교롭게도 아베가 총리일때는 8선이 되도록 대신으로 등용되지 못했는데 이를 두고 노장 기자 노가미 다다오키가 아베가 자기 어린시절을 아는 히라사와를 기피하여 그랬다는 분석을 하기도 했다. # 이후 스가 요시히데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은퇴 직전의 마지막 추억 수준으로 늦게서야 내각에 입각했고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들어서자 물러났다.
- 2011년 7월 대한항공 A380 독도 시범비행 당시 이나다 도모미, 신도 요시타카, 사토 마사히사가 항의의 뜻으로 울릉도를 방문하려고 했을 당시, 히라사와 의원도 이들과 함께 울릉도를 방문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다만, 본인의 다른 일정 때문에 원래 계획대로 합류하지 못했으며, 위의 3명이 입국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돌아 온 뒤에는 9월에 본인도 울릉도에 방문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실제로 성사되진 않았다.
-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는, 2019년 1월 야마나시현에서 열린 집회에서 “성소수자만 있어서는 나라가 무너지고 만다”라는 발언으로 비난을 사는 등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 과거 제41, 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 공명당 대표 야마구치 나쓰오와 같은 도쿄도 제17구에서 2차례 맞붙었던 적이 있다. 이때의 경험 때문인지 히라사와 의원은 자민당과 공명당 사이의 연립 정권 수립에 부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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