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타 3원칙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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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1. 히로타의 대중 유화정책
2.2. 중국의 3대 원칙 제시
2.3. 히로타 3원칙의 작성
3. 내용
4. 중국의 반응
5. 결과
6. 평가
7. 참고문헌
8. 관련문서


1. 개요[편집]


1935년 10월 4일 일본 정부에서 채택한 중국을 상대로 한 3대 외교방침. 히로타 고키 외상이 주도하던 협화외교의 산물이었지만 중국에 대한 침략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국민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 배경[편집]



2.1. 히로타의 대중 유화정책[편집]


제인 사건으로 사이토 마코토 내각이 퇴진하고 1934년 7월 8일 새로이 출범한 오카다 게이스케 내각에서 전임 내각의 외상이었던 히로타 고키는 물러나지 않고 유임되었다. 히로타는 1935년 1월 22일, 제67차 제국의회에서 정우회 측이 히로타가 자주적 경륜, 적극적 정책을 저버리고 국민을 배신하여 '안심입명'의 지위를 구하고 있다고 비난하자 일중친선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제국 정부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 간의 화친을 매우 바라므로, 이들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질서 유지라는 중책을 부담하기를 바란다. 따라서 제국 정부는 중국이 조속히 안정되고, 아울러 동아시아 대세에 대해 각성하여 제국의 진지한 기대와 일치하기를 바란다. (...) 중국 측에서 이에 대해 특별한 협력을 더해주어, 제국의 진의를 이해해 줄 것을 희망한다. (...) 그러나 정래 전쟁의 우려가 있다고 해도, 적어도 내가 오늘의 신념을 가지고 말하면 <나의 재임 중에 전쟁은 결단코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측은 히로타의 의회 연설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장제스도 이에 화답하여 1935년 2월 1일 중일친선을 강조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국민정부는 왕충후이를 파견, 히로타 외상과 회담하게 했으며 3월 4일, 국민당 중앙정치회의의 결정으로 배일 금지령을 발표하였다. 이어 5월에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1]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가 기존의 공사급에서 대사급으로 격상되었다.

군부는 이러한 히로타의 협화외교에 극력 반발하여 화북분리공작에 박차를 가해 하매 협정, 진토 협정 등의 비공식 협정을 중국 측에 강요하여 화북의 비무장화를 추구하고 화북 지역의 한간과 깡패들을 매수하여 각종 폭동을 사주하는 등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2.2. 중국의 3대 원칙 제시[편집]


7월 28일, 일시 귀국한 장작빈 대사를 사천성 아미에서 접견한 장제스는 일본 정부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진정한 동맹이란 강자가 약자에 대해 배려함에 있는 것이다. 상대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 관계에서 비로소 동맹이 성립되는 것이다."


장작빈 역시 신문을 통해 "다소 불유쾌한 사건이 있었으나 중국 정부는 중일 양국의 관계개선 정책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8월 30일 도쿄로 귀환했다. 9월 7일, 히로타 외상을 방문한 장작빈은 국민정부 측에서 제시한 중일국교를 근본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3대 원칙을 제시했다.

  • 1. 중일양국은 국제법에 있어서의 완전한 독립을 존중할 것. 즉 일본은 중국에 대한 일체의 불평등조약, 예를 들면 조차지, 거류지, 영사재판권 등을 폐지한다. 군대, 군함 등은 허가 없이 상대국의 영지, 영수에 정박, 주둔 혹은 통과하지 않는다. 이 외에 독립국가가 국제법상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리 및 의무는 중일양국이 서로 향유하며, 또 준수한다.

  • 2. 중일 양국은 향후, 진정한 우호를 유지한다. 일체의 비우호 행위, 예를 들면 통일의 파괴, 치안의 교란, 상대국에 대한 중상 혹은 파괴, 그 밖의 비우호적인 성향을 일체 띤 행위를 하지 않는다.

  • 3. 중일 국교를 금후 정상 궤도로 회복한다. 앞으로 중일 양국간의 일체의 사건이나 문제는 모두 평화적인 외교 수단으로 해결을 지어, 외교기관 이외의 기관이 행동을 한다거나 혹은 임의로 압박수단을 취하거나 하는 것을 즉시 중지한다.

장작빈은 만약 일본이 3개 항목의 기본 원칙을 승낙하고 송호정전협정, 당고정전협정, 하매 협정, 진토 협정 등을 파기하며 만주를 제외한 모든 것을 만주사변 이전으로 되돌리면[2] 중국 측은 즉각 배일 및 일제 상품 보이콧 중지, 중국 측의 만주문제 제기 중단, 호혜평등, 무역균형의 원칙 하의 중일 양국 경제제휴 논의[3], 경제제휴 성공 이후 군사문제에도 협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히로타는 중국 측의 제안에 즉답하지 않았으나 9월 18일의 2차 회견에서 "중국 정부의 희망에 모두 부응하고 있다. 다만 어떻게 실행하느냐에 대해서 현재 군측과 검토 중에 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2.3. 히로타 3원칙의 작성[편집]


한편 히로타 고키는 외무성 동아국을 중심으로 중일 제휴공조를 위한 원칙을 작성하고 있었다. 7월 2일, 외무성 동아국이 초안을 작성하자 히로타는 8월 5일 내각에 이 초안을 제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중국 측은 철저히 반일언론과 행동을 단속하며 동시에 일중 양국은 상호 독립의 존중과 상호 호조의 원칙 하에 우호 합작의 관계를 위해 노력한다. 아울러 만중 관계의 진전을 도모한다.

  • 2. 이러한 관계의 진전은 마땅히 중국이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만중 3국의 새로운 관계의 협정을 체결하는 것을 최후의 목표로 한다. 현재 중국 측은 적어도 만주 지역과 인접한 화북 및 차하얼 지방에 만주국이 있다는 이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며, 아울러 사실상 만주국과 경제적 문화적 상호 협조를 진행시켜야 할 것이다.

  • 3. 차하얼 및 그 지역과 외몽과 인접한 지방, 일본과 중국 사이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배제시킨다는 견지에서 합작을 실행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9월 4일 새로 육군대신으로 임명된 가와시마 요시유키는 군부의 소장파 군인들의 의견을 종합한 <화북 자주안의 독려>을 작성, 화북 분리공작을 강화해야 한다고 딴지를 걸었다. 가와시마는 9월 28일 내각회의에 <화북 자주안의 독려>를 제출하였으며 참모본부 제2청 청장 오카무라 야스지, 관동군 참모장 니시오 도시조(西尾壽造), 관동군 부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을 회의장에 대동하여 무력시위를 하였고 결국 10월 4일의 내각회의는 화북 자주안의 독려를 가결하였다.

10월 4일의 내각회의는 히로타 3원칙 역시 승인하였으나 승인하는 과정에서 <상호 독립의 존중과 상호 협조의 원칙>이란 구절이 삭제되는 등 상당한 수정이 가해졌다. 10월 7일, 히로타는 장작빈 대사를 소환하여 수정된 히로타 3원칙을 제시하게 된다.


3. 내용[편집]


10월 7일, 히로타는 먼저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만지 삼국의 제휴공조에 의하여 동아의 안정을 확보하고, 그 발전을 꾀하는 것은 우리 대외정책의 뿌리이고, 우리의 대지정책의 목적도 또 실로 여기에 있다."고 전제한 후 3원칙을 제시했다.

  • 1. 중국은 이후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다스린다는 이이제이 정책을 반드시 철폐하여, 구미세력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는 일을 하지 않을 것, 이제까지와 같이 입으로만 친일을 외치며, 뒤쪽으로는 구미와 연락을 취해서는 중일친선의 실현이 불가능하다. → 중국의 배일정책 철저단속과 구미의존정책 포기.

  • 2. 일본, 중국, 만주 3국의 관계를 항상 원만히 유지하도록 하는 것을 일중친서의 기본전제로 삼을 것. 중국이 만주국을 정식 승인한다면, 일본은 비로소 중국에 성의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혹시 중국 측이 정식 승인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나, 여하튼 중국은 만주국의 존재 사실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만주국과 거기에 인접해 있는 화북지방 간에 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 둘째로는 만주국과 화북지방 사이의 밀접한 경제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 중국의 만주국 승인, 하다못해 묵인 후 중일만 경제합작 도모.

  • 3. 중국은 적화 방지를 위해 유효한 방법을 일본과 협의할 것. 중국을 적화하려는 운동의 원천은 아무개 국가에 있어,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것이니, 중국 북방 일대의 경계지방의 적화방지에 관해 일본과 협의할 필요가 있다. → 외몽으로 오는 적화위협 배제를 위해 일본의 제반시책에 협력.

히로타는 설명을 끝낸 후 장작빈에게 "중국 정부가 이 3원칙에 완전히 동의한다면 일본은 중국이 제출한 3대 원칙을 계속해서 협의해 나가고 싶다."라고 하였다. 이에 장작빈은 1항에 대해 "금후의 사실들을 보아주기 바란다. 의심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라고 발언한 후 2항과 3항은 본국정부와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회답을 보류하였다.


4. 중국의 반응[편집]


장작빈으로부터 히로타 3원칙을 보고받은 장제스는 쑹저위안, 옌시산과의 회담을 위해 카이펑에서 타이위안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행정원장 왕징웨이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타진했다.

"장 대사의 전보 원문은 아직 받아보지 못했으나, 만일 전해오는 바와 같이, 일본 측의 요구가 이이제이의 외교의 철폐, 위만주국의 존중, 방공동맹이라는 3개 항이라면, 형식은 비교적 가볍더라도 그 의의는 심각하고도 중대하다. 즉 일본의 요구는 중국이 국제동맹을 탈퇴하고, 위만주국을 승인하고, 동맹을 맺어 소련에 대항하자는 것으로써, 요구 실시의 제1보로 삼자는 것임에 틀림없다. 신중히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중국 측은 이에 대한 대안을 준비하여 무슨 일을 실행함에 있어서나 반드시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지 않으며, 먼저 양국 국민간의 의혹을 제거하여 감정을 누그러뜰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근본 방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먼저 일본 측이 외교의 정도에 바로 서야 할 것이며, 특히 화북의 전시 상태를 무엇보다 먼저 해체하여 양국 정부 간의 신의를 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아만 비로소 서로 이야기가 가능해지며, 대화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10월 21일, 장작빈 대사는 히로타에게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 1. 중국은 애당초 이이제이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있어, 중일 양국의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거나, 일본을 배제하고 방해하려는 생각은 결코 가지지 않고 있다.

  • 2. 앞으로도 중국은 '만주국'과의 관계에서 정부간의 교섭은 할 수 없다. 그러나 동북지방의 현상태에 대해서는 평화적 방법 이외의 수단을 사용해셔 변사를 일으키거나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관외 국민과 경제관계를 취할 방법을 강구한다.

  • 3. 중국 북방 일대의 경계지방에 있어서의 적화방지에 대해서는, 중국이 제출한 중일친선의 기본조건인 3대 원칙을 일본 측이 먼저 완전히 실행한다면, 중국의 주권과 독립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원칙 하에, 일본과 유효한 방법을 협의할 것이다. 중국 측의 주권이란 극히 간단하다. 주권과 영토의 완전한 존중에 입각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 뿐이다.

10월 28일, 회의 참석을 위해 일시 귀국하게 된 장작빈은 히로타를 방문하였다. 히로타는 중일 친선의 취지에 대한 상호 이해가 이루어졌으니 구체적 방법에 대해 협의하자고 제안했으나 히로타 3원칙의 전면적 수용에 대해서 일본이 양보하려 하지 않아 더 이상 진전은 없었다. 1936년 1월 21일, 히로타는 국회에서 히로타 3원칙을 공표하고 중국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진술했으나 중국 외교부는 즉각 성명을 발표하여 이를 부인하였다.


5. 결과[편집]


이듬해인 1936년, 2.26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오카다 내각은 퇴진하고 히로타 고키가 수상에 취임하여 히로타 내각이 출범하였다. 한동안 중일 대화는 이어졌으나 일본인 기자 살해 사건과 계속되는 화북 지역의 일본의 밀수로 인하여 중일 감정은 크게 악화되었고 결국 난징에서 행해진 최종 중일담판이 결렬되면서 협회외교는 종결, 1937년 7월 중일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6. 평가[편집]


중국 측에서는 히로타 3원칙에 대해 화북분리공작에 보조를 맞추어 그저 외교로 중국을 침략하려 한 하나의 기만행위로 평가한다.[4] 하지만 이는 일본 제국 내부의 복잡한 파벌 양상에 대해서 이해하지 않고 일본을 그저 침략세력으로 뭉뚱그려서 본 오류이며 히로타 3원칙 자체는 군부의 폭주에 대한 나름의 제어책 역할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히로타 고키는 단순히 군부의 폭주를 방관하는 정도가 아니라 중국으로 하여금 히로타 3원칙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군부의 폭주를 이용, 조장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전후 전범재판에서 이를 인정, 사형을 선고받았다. 히로타 3원칙을 단순한 침략 도구이자 기만책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시각이지만 일본이 중국을 대등한 독립주권국가로 보는 시각이 결여되어 있고 외교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관념이 결핍되어 중일외교를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한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또한 히로타 3원칙은 중국에서 영미의 영향력을 폭력적으로 배제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으므로 중국은 물론, 중국에 관여하던 영미의 입장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무리한 요구였다.


7. 참고문헌[편집]


  • 일제의 대륙침략사, 소운서, 이문영, 고려원.
  • 중일외교사연구, 구정승미, 선인.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일본근현대사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어문학사.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8. 관련문서[편집]



[1] 군부는 중일친선 정책은 시기상조이며 중국의 친일적인 태도는 기만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2] 만주국을 불승인하는 원칙은 유지하지만 만주국에 대한 클레임은 더 이상 걸지 않겠다는 뜻이었다.[3] 중국에 이익이 없고 일본에만 이익이 있더라도 논의는 지속.[4] 공산당은 이걸 좋다고 호응한 국민정부도 부르주아의 패배주의적 근성과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낙관을 버리지 못한 오류로 찌들었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