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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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AIC_logo.png

2003-04 · 2006-07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심볼.svg

2004-05 · 2011-12
파일:세리에 A 로고.svg
[[틀:세리에 A 도움왕(2000년대)|

2004-05 세리에 A 도움왕
]]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심볼.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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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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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 2007 · 2008
파일:유럽 축구 연맹 로고.svg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1868D6; font-size: 0.9em"
UEFA 올해의 팀
2006 · 2007 · 2009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카카의 기타 정보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


이름
카카
Kaká

본명
히카르두 이젝송 두스 산투스 레이치
Ricardo Izecson dos Santos Leite
출생
1982년 4월 22일 (41세)
브라질 브라질리아
국적
[[브라질|

브라질
display: none; display: 브라질"
행정구
]]
|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1]
신체
186cm / 체중 78kg
직업
축구 선수 (공격형 미드필더[2] / 은퇴)
주발
오른발 (양발)
소속
유스
상파울루 FC (1994~2000)
프로
상파울루 FC (2001~2003)
AC 밀란 (2003~2009)
레알 마드리드 CF (2009~2013)
AC 밀란 (2013~2014)
올랜도 시티 SC (2014~2017)
상파울루 FC (2014 / 임대)
국가대표
92경기 29골 (브라질 / 2002~2017)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종교
개신교
가족
남동생 디강

1. 개요
3. 포지션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출전 기록
6. 카카에 대한 헌사
7. 어록
8. 여담



1. 개요[편집]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2007년 발롱도르FIFA 올해의 선수를 거머쥐며 같은 국적외계인과 함께 의 기량이 만개하기 직전에 잠깐 축구계를 평정했던 스타 플레이어였다.[3] AC 밀란밀란 제너레이션 2기와 브라질 대표팀을 이끌었던 선수이자 발롱도르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한 마지막 브라질인이기도 하다.[4][5][6][7]


2. 선수 경력[편집]


어린 시절 카카는 많은 브라질 축구선수들과는 달리 제법 유복한 가정[8]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테니스 선수를 꿈꿨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축구는 진로라기보다는 취미 생활에 가까웠다. 실제 카카는 상파울루 정식 유스 팀이 아닌 서포터즈 유스 팀에서 공을 차기 시작했고, 교사였던 어머니의 교육열 때문에 축구보다 공부에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했다. 또한 어린 시절의 카카는 지나치게 깡마른 체구 탓에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고 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카카/선수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포지션[편집]


오늘날 축구계는 중원에 철저한 역할 분담을 요구하고 한 선수에게 전권을 맡기지 않는 추세인데, 이에 반하는 플레이메이커들 중 하나였다.[9]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에는 전성기의 폼을 보여 주지 못했다.

현재는 고전적인 플레이메이커가 거의 사라졌는데, 그 이유는 전술 변화와 축구 규칙의 개정, 경기 수의 증가 등의 이유로 전통적인 플레이메이커가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10] 카카가 공격의 전권을 쥐게 된 것은 카카의 능력과 더불어 당시 밀란의 상황이 맞아 떨어진 까닭이지, 결코 카카가 전통적인 플레이메이커 롤을 능숙하게 소화해 내서는 아니다. 카카보다는 차라리 비슷한 시절의 호나우지뉴프랑크 리베리가 비록 측면에서 뛰더라도 훨씬 더 고전적인 플레이메이커 상에 가깝고, 카카 자신도 고전적인 플레이메이킹을 훨씬 우월하게 펼칠 수 있는 후이 코스타를 주전에서 밀어낸 전력이 있다. 만약 카카가 전통적인 플레이메이커였다면 당시 밀란의 공격수를 맡고 있던 알베르토 질라르디노의 득점이 훨씬 늘어났어야 한다. 마치 바이에른 뮌헨 시절의 토니 크로스마리오 고메스처럼. 그러나 질라르디노는 충실히 카카를 위한 미끼 역할을 수행하며 카카의 스피드와 득점력을 이용할 공간을 창출해 줬다. 카카의 주력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이지만 2선에서 최전방으로의 침투와 드리블 돌파, 정확한 슈팅으로 많은 득점을 올리는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역할도 수행했다.[11]

밀란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던 카카가 현대 축구에 반하던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카카의 능력이라기보단 AC 밀란과 안첼로티 감독의 능력이다. 카카의 공격력을 최대한 쓸 수 있게 플레이메이커의 역할인 안정적인 볼 배급 및 전체적인 경기 조율은 안드레아 피를로가 맡았고 중원에서 개싸움을 펼치고 볼경합을 통해 전방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젠나로 가투소, 마시모 암브로시니, 클라렌스 세도르프가 맡았다. 이로인해 탄탄한 중원 장악이 받쳐줘 카카는 전성기인 2006-07 시즌 공격에 치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밀란에서까지의 이야기. 그는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후 전성기때의 기량을 대부분 상실하고 축구 역사의 대표적 먹튀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12][13]

레알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다시 AC 밀란으로 복귀한 카카는 중앙 미드필더로도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 아무래도 과거 전성기의 기량과 주력이 아닐 뿐더러, 현대 축구가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플레이메이커 롤은 사장되어 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확실히 경험이 많이 쌓였는지, 어느 정도의 조율 능력을 보여 주기도 했고 애초에 잘했던 킬패스 같은 능력이 돋보이면서 중앙 미드필더로도 꽤나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kakak4.gif

공격형 미드필더의 꽃[14]이라 불릴 만큼 슈팅, 드리블, 패스 삼박자를 두루 갖춘 선수였다. 세부적으로 봐도 드리블, 치달, 중거리 슛, 골 결정력, 크로스, 스루 패스, 숏 패스, 롱 패스 모두 일품이었다.[15] 퍼스트 터치와 오프더볼 움직임도 훌륭했다. 특히 아직까지도 치달 하면 카카[16]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압도적인 최대 속력[17][18]을 유지하는 동시에 공을 컨트롤하는 기술이 월등했다. 이렇게 기술과 스피드, 패스가 강점인 선수는 몸싸움이 약한 경우가 많은데, 카카는 피지컬도 탄탄하고 몸싸움마저 훌륭했다. 대표적인 예가 전성기의 맨유 수비진을 테크닉과 피지컬을 조합해 완전히 가지고 놀며 무너뜨린 06-07 UCL 4강전.

또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 부상으로 먹튀가 됐다는 오명과 달리, 팀원의 노쇠화를 홀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07-08 시즌 이전에는 매 시즌 50경기 가까이 소화할 정도로 부상이 적었다. 카카가 몰락하게 된 계기는 바로 부상을 안은채로 무리해서 월드컵에 출전한 것이었다. 수많은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마치 모닥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월드컵의 유혹을 참지못해 몸 아픈거 참고 어거지로 출전했다가 폼을 잃어버리곤 하는데, 카카도 그 중에 하나가 되고 말았다.[19]

활동량도 준수한 편이었다. 심지어 레알 시절에도 컨디션이 괜찮을 때는 생각 이상으로 좋은 활동량을 보여줬다. 동시에 06-07 시즌 당시에는 여러 이유들로 인해 카카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과다해지면서 스프린트의 빈도가 늘어났는데도 이를 잘 수행하는 체력을 보여주었다. 절정의 폼이었을 때에는 초인이나 다름없었고 이러한 모습 덕분에 신계 을 제치고 2007년 발롱도르를 거머쥐었다.[20]

선수로서 최전성기를 보냈던 AC 밀란 시절에는 치달의 임팩트가 부각되었지만 다른 능력도 뛰어났다. 2004-05 시즌의 리버풀과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패배 직전까지 몰고 갔던 건 카카의 날카로운 공격 전개와 킬러 패스였다. 특히 경기를 3:0으로 굳히는 크레스포를 향한 어시스트는 문자 그대로 대지를 가르는 킬러 패스. 또한 전성기 시절을 돌이켜 보면 득점력도 무시무시했다. UCL에서 86경기 동안 30골을 넣어서 지금도 역대 득점 기록 20위 안에 들어가고, 특히 2006-07 챔스에서는 10골을 넣어 득점왕이 됐다.[21] UCL 득점왕이 발롱도르를 타는 징크스는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졌는데,[22] 이 징크스를 시작한 선수가 바로 카카였다는 것은 유념할 만하다.

카카의 능력이 가장 빛났던 순간은 바로 역습상황인데 좌우 측면과 중앙을 가리지 않는 역대급 치달과 뛰어난 킬러 패스, 골 결정력으로 커리어 대부분의 공격 포인트를 역습상황에서 쌓았다. 세밀한 드리블 기술과 중거리 슛도 뛰어나 역습상황에서만 쓸 수 있는 반쪽짜리 선수도 아니었다.[23] 전성기 때는 완벽한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이러한 장점들 중 가장 독보적이고 또 다른 장점들을 잘 받쳐 준 건 바로 경악스러운 스피드와 바디 밸런스였다. 때문에 카카의 전성기를 지켜본 세리에 팬들은 스피드를 바탕으로 이지선다[24]의 플레이를 펼치던 정상급 선수가 스피드가 죽으니 다른 능력들마저도 어정쩡해져서 폭망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또한 부상으로 신체 균형이 깨지면서 몸싸움이 약해진 것도 한 몫 한다. 테크닉과 축구지능도 정상급이었지만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신체 능력, 특히 주력에 기반한 돌파에 실력의 바탕을 둔 선수인 탓에 그 정점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 준 선수. 한편 카카처럼 스피드가 죽으니 다른 장점까지 같이 죽어버린 케이스로는 마이클 오언, 안드리 셰브첸코, 페르난도 토레스가 있다.

레알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AC 밀란으로 돌아온 카카는 부상 여파와 노쇠화가 겹쳐 과거 전성기 시절의 주력은 유지하지 못했다. 또한 현대 축구가 발전하면서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포지션이 사라짐에 따라 카카도 조금 더 밑에 내려와서 뛰는 경기들이 많아졌다.[25] 비록 주력이 조금 줄었다고 하나, 기존에 가졌던 찬스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정교한 패스 능력은 여전했기 때문에[26] 중앙 미드필더를 완벽히 소화하는 모습이다. 오랜 경험과 어느 정도 타고난 축구지능은 이러한 전술 수행을 뒷받침해 주기에 충분했다.

카카의 이런 유니크한 플레이 스타일과 수려한 외모 때문에 많은 팬들이 제2의 카카를 기대하지만, 현재까지 이런 유형의 선수는 찾기 어렵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 상파울루 FC (2001~2003, 2014)
    • 수페르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002
    • 토르네이루 리우-상파울루: 2001





5.2.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2007
  • FIFA 올해의 선수: 2007
  • FIFPro 올해의 선수: 2007
  • FIFPro 월드 XI: 2006, 2007, 2008
  •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2006-07
  • UEFA 올해의 미드필더: 2004-05
  • UEFA 올해의 공격수: 2006-07
  • UEFA 올해의 팀: 2006, 2007, 2009
  • UEFA 올해의 궁극적인 팀: 2015 (서브)
  • FIFA 월드컵 도움왕: 2010
  •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2006-07
  • UEFA 챔피언스 리그 도움왕: 2004-05, 2011-12
  • FIFA 클럽 월드컵 골든볼: 2007
  • FIFA 클럽 월드컵 도움왕: 2007
  • FIFA 클럽 월드컵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2007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골든볼: 200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드림팀: 200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2009
  • CONCACAF 골드컵 베스트 XI: 2003
  •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2003-04, 2006-07
  • 세리에 A 올해의 외국인 선수: 2003-04, 2005-06, 2006-07
  • 세리에 A 도움왕: 2004-05
  • MLS 올스타: 2015, 2016, 2017
  • MLS 올스타전 MVP: 2015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007
  • 옹즈도르: 2007
  • 옹즈 드 옹즈: 2007
  • 팔로네 디아르젠토: 2006-07
  • IAAF 올해의 남미 운동 선수: 2007
  •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 2002
  • lFFHS 세계 최우수 플레이메이커: 2007
  • 마르카 레전드: 2009
  • 삼바도르: 2008
  • 볼라 지 오우루: 2002
  • 볼라 지 프라타: 2002
  • 타임 100: 2008, 2009
  • 마라카낭 명예의 전당: 2008
  • AC 밀란 명예의 전당: 2010


5.3. 출전 기록[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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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이름
영문이름
국적

1
군나르 노르달
Gunnar Nordahl
파일:스웨덴 국기.svg
221
2
안드리 셰브첸코
Andriy Shevchenko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175
3
잔니 리베라
Gianni Rivera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64
4
조제 알타피니
José Altafin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61
5
알도 보피
Aldo Boff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36
6
필리포 인자기
Filippo Inzagh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26
7
마르코 반 바스텐
Marco van Basten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125
8
주세페 산타고스티노
Giuseppe Santagostino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06
9
카카
Kaká
파일:브라질 국기.svg
104
10
피에리노 프라티
Pierino Prat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02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2001
상파울루 FC
세리 A
27
12
-
7
1
-
5
0
-
2002
22
9
-
9
6
-
-
-
-
2003
10
2
-
5
0
-
-
-
-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2003-04
AC 밀란
세리에 A
30
10
6
4
0
0
10
4
1
2004-05
36
7
13
1
0
0
13
2
5
2005-06
35
14
10
2
0
1
12
5
1
2006-07
31
8
7
2
0
0
15
10
3
2007-08
30
15
10
0
0
0
9[27]
2
0
2008-09
31
16
9
1
0
1
4
0
1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2009-10
레알 마드리드 CF
라리가
25
8
5
1
0
0
7
1
2
2010-11
14
7
4
3
0
0
3
0
1
2011-12
27
5
7
4
0
0
8
3
5
2012-13
19
3
4
2
1
0
6
1
1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2013-14
AC 밀란
세리에 A
30
7
4
1
0
0
6
2
1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2014
상파울루 FC
세리 A
19
2
1
0
0
0
0
0
0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 대회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2015
올랜도 시티 SC
메이저 리그 사커
28
9
7
2
1
0
-
-
-
2016
23
9
10
0
0
0
-
-
-
2017
18
6
5
0
0
0
-
-
-


6. 카카에 대한 헌사[편집]


파일:external/www.itsalreadysigned4u.com/aaa-11490.jpg

2006-07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의 카카는 1986년 월드컵에서의 마라도나보다도 뛰어났다.

주제 무리뉴


아직 시차 때문에 피곤해 보이는 소년이 필드에 들어갔다. 그리고 곧 천국의 광경이 우리의 눈 앞에 펼쳐졌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엄청난 선수를 내려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카카는 현존하는 지구상 최고의 축구 선수다. 그는 단순하면서도 효율성 있는 비범한 플레이를 펼친다. 카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결정적인 선수다. 그의 플레이 방식과 경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는 호나우지뉴를 포함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카를로 안첼로티[28]


그와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맨시티로부터의 이적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항상 흥미롭고 흥분된다. 우리는 그를 영입하고 싶다.

마크 휴즈


내가 그에게 한 발 다가가면 그는 이미 나로부터 두 발자국 넘게 앞서있었다.

네마냐 비디치


가끔 축구를 볼 때 긴장과 스트레스 없이 편한 마음으로 경기를 즐기는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많은 선수들의 좋은 플레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 중 최고의 선수는 카카였다.

지네딘 지단


현 시점에서 괴물이라는 칭호를 받을 축구 선수는 카카뿐이다. 그는 격이 다른 축구를 한다.

호나우두


내가 밀란에 갔을때 그는 이미 세계 최고였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호나우지뉴


그는 완벽한 선수다.

펠레[29]


카카가 밀란을 떠나서 아쉽다. 2~3년 동안 카카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

안드레아 피를로[30]


카카는 뛰어난 무브먼트를 필요로 하고 상대와의 치열한 경합을 펼쳐야 하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서 뛰고 있다.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그에게 의지하고 있으며 모두가 그의 플레이에 만족감을 나타내고 있다. 카카의 간결하고 빠른 플레이는 그와 다른 선수들을 구분하는 명확한 차이점이다. 그의 득점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개인이 아닌 팀을 위해 플레이하는 카카의 팀 공헌도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그와 함께 뛸 수 있어 행복하다.

안드리 셰브첸코


전에도 카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직접 지도하고 나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다. 카카를 지도해 행복하다.

카카는 플레이의 완급조절과 리듬을 바꿀 수 있는 슈퍼스타다. 그는 세계 최고의 선수다.

마누엘 펠레그리니


내가 보기에 카카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하나다. 그의 축구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가 그를 처음 봤을때 그의 기술과 속도에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분명히 세계 최고였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카의 재능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축구적인 능력뿐 아니라 팀원들의 자신감을 올려 준다.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환상적인 기술, 속도, 시야, 패스 능력, 득점력 등 많은 장점을 가진 선수이다. 미드필더로서는 언급한 능력들 중 세 가지만 있어도 행운이다. 내게 있어 그는 세계 최고의 선수이며 아마도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그를 존경해왔다. 나는 그런 선수를 보고 하나라도 배울 점이 있는 지 지켜본다.

프랭크 램파드


모든 걸 다 갖춘 엄친아 같은 선수다. 잘생기고, 공도 잘 차고 돈도 잘 번다.

차두리


그는 경기를 지배할 수 있는 선수이며 반대쪽 골문까지 달려서 골을 성공시키는데 10초면 충분한 선수다.

아르센 벵거


밀란의 공격이 80%는 카카에 의존하고 있다. 그 누구도 카카를 대신할 수 없다. 카카는 빠르고 기술적으로도 매우 훌륭하다. 그는 세계 최고의 선수이며 브라질 대표팀에서 내가 그의 교체선수라는 사실에 어떠한 불만도 없다.

주니뉴 페르남부카누


그는 차원이 다른 선수다.

파올로 로시



7. 어록[편집]


닮고 싶은 선수는 있지만 되고 싶은 선수는 없다.


강한 팀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팀이 강한 것이다.


노력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다.


절대 두렵지 않다. 나를 믿는 10명의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8. 여담[편집]


  • 디강이라는 동생이 있는데, 형과 마찬가지로 축구선수로 활동했으며 조각 미모를 자랑했지만 축구실력은 형에 비하면 아주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 AC 밀란에 입단했는데, 이는 안첼로티 감독과 구단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카카의 마음을 붙들어 놓기 위한 도구로 데려온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대다수다. AC 밀란에서 뛰기에는 너무 실력이 부족해 2011년까지 여러 구단들을 돌아다니며 임대생활을 하다가 2011년 밀란에서 방출되었고, 2012년 뉴욕 레드불스에 입단해 1시즌 동안 뛴 후 은퇴했다.

한편 디강은 형의 예명인 '카카(Kaká)'가 탄생하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 어릴 때 형의 이름 '히카르두(Ricardo)'를 발음하는 것을 어려워해 형을 '카카(Caca)'라고 불렀고, 이것이 그대로 형의 예명이 되었다.

  • 동생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카카(Caca)'는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 올 때 AC 밀란 말고도 유벤투스가 그를 영입하려 하는 한편 저런 이유를 대며 예명을 고쳐달라고 했으나, 카카는 거절했고 예명을 안 고쳐도 상관없다고 말한 AC 밀란으로 이적했다. 공교롭게도 프랑스를 제외하고 자신의 예명이 똥을 의미하는 두 나라[31]에서 선수 생활을 해 봤다.


  • 2000년, 18세 때 수영장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척추를 다쳐 축구를 접을뻔 했는데, 기적적으로 수술이 성공하여 재활에 성공한 후 향후 인생의 목표 10단계를 세웠다.

1. 다시 축구 선수가 된다.
2. 상파울루 FC에 입단한다.
3. 1군 25명 엔트리에 들어간다.
4. 거기서 다시 17명 엔트리에 들어간다.
5. 베스트 11에 뽑힌다.
6. U-20 국가대표에 선발된다.
7. 성인 국가대표에 선발된다.
8. 국가대표 주전으로 뛴다.
9. 월드컵에서 우승한다.[32]
10. 유럽 명문 구단에서 뛴다.
이렇게 거창한 목표들을 세운 것도 포부가 대단하지만, 저 목표들을 23살에 전부 달성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 이탈리아 방송 진행자가 못하는 게 뭐냐고 질문했더니 춤을 정말 지독하게 못 춘다고 답했다. 카카는 당시 브라질 대표팀 선수들 중 유일하게 삼바를 못 췄다고 하며, 동료 선수가 골을 넣고 다른 선수들과 브라질 대중들 앞에서 삼바를 춘 적이 있었는데 이때도 카카만 유독 엉성했다.

  • AC 밀란 시절 나름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오랜만에 훈련 후 뒷풀이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기자들이 선수들의 소위 X파일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추적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여러 선수들이 술집에서 놀다가 여자를 하나씩 끼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들이 포착되었고, 카카 또한 매의 눈으로 노려지고 있던 상황. 아무리 당시 사생활이 깨끗하다 해도 혈기왕성한 20대 남자가 이럴 때는 기삿거리가 될만한 행동 한두가지는 할 것이라고 생각한 기자들이 포착한 것은 동료 선수들과 헤어진 뒤 공원 벤치에서 성경을 읽는 카카, 성경 책을 접어 가방에 넣고는 공원을 산책하며 성경 구절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카카였다고 한다. 이에 소문으로만 듣던 카카의 실체를 똑똑히 목격한 기자들은 잔뜩 질려 바로 철수해 버렸고 이후 카카는 파파라치들의 관심 따위 못 받게 되었다카더라.[33]

실제로 카카는 매우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은퇴 후에는 성직자의 길을 걷고 싶다는 소망을 밝힌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매춘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적도 있다. 심지어 존경하는 사람이 한국의 정바울이라는 목사라고 한다.[34] 카카의 개신교 신앙은 다비드 루이스, 네이마르 주니오르에게도 영향을 끼쳐서 그 둘은 자기들 신앙의 롤모델은 카카라고 인터뷰에서 종종 얘기한다.[35]

  • 2006-07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AC 밀란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4강에서 만났는데 그때 카카가 경기 중 라이언 긱스의 목을 붙잡고 있는 사진이 찍혔다. 당시 박지성의 영향으로 맨유팬이 절대다수였던 한국 내 해외축구 팬들에게선 카카가 예의가 없다고 비판하는 소리가 많았는데, 그 후 몇년 뒤 알려진 긱스의 불륜사건으로 카카가 건실한 신앙인으로서 죄인을 미리 알아봐 다스리는 것이 아니었냐는 농담도 나왔다.

라이언 긱스의 목덜미를 움켜쥔 것도 있고 레알 마드리드 이후 AC 밀란에 돌아와서 경기 도중 팀 동료 혼다 케이스케에게 화를 내는 장면도 있었다. 어떤 상황이었냐면 밀란이 상대에게 코너킥을 허용한 뒤 잠깐의 문전 위기상황이 있었다 클리어 했는데 그때 혼다가 상대 공격수 마크를 놓쳤고 카카는 이에 혼다에게 역정을 부렸는데 혼다도 지지 않고 카카에게 소리를 지른 듯 했다. 이렇게 보면 신앙심이 독실하고 모범적이긴 해도 한 성깔은 있다고 볼 수 있다.


  • 2016년 6월 27일 기준 페이스북 팔로워가 당시 축구선수 중 6위 수준인 3,223만여 명이었다.

  • 두 팔을 벌려 신께 기도하는 세레모니로 유명하다.

  • 드리블만으로 상대 수비수의 십자인대를 파열시킨 경력이 있는데 그 상대가 왈테르 사무엘이었다. 그는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에서 카카의 드리블 테크닉을 무리하게 쫓아가려다 경기 도중 생방송으로 그의 몸 방향과 무릎의 방향이 다른 꽤나 소름 끼치는 장면을 연출해냈다. 십자인대 파열로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에 대한 집념으로 다시 일어나 공을 보다가 같은 팀의 수비가 공을 취득한 걸 보고 그제서야 쓰러졌다.

  • 영어 구사력이 수준급이다. 2007년 발롱도르 시상식에서도 성경 구절을 언급하며 시상 소감을 전했는데 이때 전부 영어로만 했다.[36] 이탈리아 시민권도 가지고 있어서 이탈리아어도 제법 잘 하며, 레알에서 뛰어서인지 스페인어도 유창한 편이다. 사실 카카의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는 스페인어와 제법 유사한 언어여서 포르투갈 화자는 스페인어를 어렵지 않게 습득할 수 있으며, 이탈리아어도 스페인어와 유사한 점이 많아 같은 이유로 구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알려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는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와 유사성이 다소 없는 편이며 2007년이면 AC 밀란에서 활동할 때라 영어권 국가에서 체류한 경험이 없는 상태[37]임에도 불구하고 공식 석상에서 영어로 발언했다는 점은 그의 언어 재능이 비범했음을 알 수 있다.



  • 월드클래스로 성장하는 선수들에게 하나같이 따라붙는 '제2의 OO'이라는 수식어처럼, 카카도 한 때 '제2의 지쿠', '하얀 펠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정작 브라질에서 '제2의 카카'로 불리던 유망주들인 오스카, 루카스 피아종, 루카스 시우바 등은 모두 기대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제2의 카카'라는 수식어가 붙은 루카스 파케타가 2018년 AC 밀란과 계약을 맺었다. 당시 카카가 밀란 이사진으로 있었기 때문에 특히 관심이 모였지만, 카카 본인은 파케타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며 자신과의 비교는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파케타도 큰 활약은 못하고 2020년 올랭피크 리옹으로 이적했다.

  • 2018년 브라질 대선 당시 본인의 점잖은 이미지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막말로 유명한 극우 성향의 자이르 보우소나루카푸, 호나우지뉴 등 다른 브라질 축구 선수들과 함께 지지하기도 했다. 덕분에 당시 꽤나 충격받은 팬들이 많았는데, 브라질 개신교(주로 순복음 교단) 신자들은 대안우파 성향으로 기울어 있기 때문에 알고보면 또 그렇게 의외까지는 아니란 의견도 있었다. 점잖은 이미지와 별개로 신앙 성향은 다소 위험한 은사주의 쪽이었다.[38]

  • FIFA 20에서 신규 ICON으로 출시되었고 PES 2021 시리즈에 아이코닉으로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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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7년 2월 12일 이탈리아 시민권을 취득했다. 출처[2] 템플릿:축구인에서 정한 참고 자료 트랜스퍼마크트, 영어 위키백과[3] 레알 시절의 급격한 몰락으로 인해 전성기가 짧은 선수라는 편견이 있는데, 카카의 전성기는 밀란에서 뛰던 2003-04 시즌부터 2008-09 시즌까지 6년으로 생각 외로 짧은 편은 아니다. 다만 그가 활약하던 당시 세계 축구계는 2000년대 초반은 지단호나우두, 중반은 호나우지뉴 1인자 체제가 굳건했기 때문에, 카카가 세계 축구계 1인자 소리 듣던건 메날두가 본격 활약하기 직전인 2006-07 시즌 1년 정도로 짧다보니 임팩트가 약한 것이다.[4] 호나우두 - 히바우두 - 호나우지뉴 - 카카. 이들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후반까지 축구판에서 브라질 시대를 호령했다.[5] 호마리우도 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을텐데, 1994년 FIFA 올해의 선수상엔 선정되었지만 발롱도르는 타지 못했다. 왜냐하면 발롱도르는 바로 다음 해인 1995년이 돼서야 비유럽 국적 선수의 수상이 가능해졌기 때문.[6] 그나마 네이마르 주니오르가 2015년 FIFA 발롱도르 시절 가능성이 있었지만 3위에 그치고, 2017년에도 발롱도르FIFA 올해의 선수 모두 3위에 그치고 만다. 네이마르는 브라질 역대 선수 10위 안에 못 들지도 모른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게 아니다.[7] 또한 세리에 A 소속 선수로서도 마지막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나마 2010년 인테르트레블네덜란드2010 월드컵 준우승을 이끈 웨슬리 스네이더가 가능성이 있었지만 두 상이 합쳐진 FIFA 발롱도르에서 포디움에도 입상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이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2018년과 2019년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 포디움에 들면서 수상 가능성이 있었지만 2018년은 모두 2위, 2019년은 모두 3위에 그치고, 2020년에도 FIFA 올해의 선수상 포디움에 들지만 2위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세리에 A는 인테르의 트레블 이후 챔스 우승을 10년 이상 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유럽대항전도 10년 이상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2021-22 시즌 AS 로마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초대 우승을 달성하면서 12년 만에 세리에 A 소속 클럽이 유럽대항전 우승을 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인테르트레블과 로마의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초대 우승 모두 주제 무리뉴가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달성하였다.[8] 본인 말로는 중산층이라고 하지만 상당한 부자로 알려져 있다. 부모님 인심이 넉넉하신 건지 10대 시절 카카는 돈이 없거나 집이 너무 멀어서 귀가하기 어려운 동료 선수들을 자기 집에 데려가 재워 주기도 했고, 카카가 없을 때도 동료 선수들이 찾아갔을 때 잘 대접해 줬다는 일화가 있다.[9] 유럽 주요 1부 리그에서의 이야기며, 남미의 아르헨티나 같은 경우는 여전히 플레이메이커가 판친다. 그리고 유럽 주요 1부 리그 내에서도 여전히 플레이메이커 쓰는 구단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준수한 기량의 플레이메이커가 있고 상대팀의 압박이 허술할 때, 플레이메이커에게 공격 지휘의 전권을 부여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기 때문이다.[10] 이에 대해 부연 설명을 덧붙이자면, 플레이메이커는 최전방 공격수 바로 밑에서 공격수에게 찬스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주로 수행한다. 공격수가 열심히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가고 밑에서는 수비랑 전방에 공 뿌리느라 바쁠 때, 플레이메이커 롤을 맡은 선수는 공을 받을 때까지 기다린 후에 공을 받으면 공격수가 골 넣을 수 있게 잘 찔러 주는 플레이를 주로 구사한다. 지네딘 지단, 후이 코스타, 후안 로만 리켈메 등이 플레이메이커 롤을 맡아 상술한 플레이를 보여준 대표적인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전술의 흐름이 바뀌어, 압박이 더욱 강해지고 모든 선수가 공격 및 수비에 개입하게 되자 정적인 온 더 볼 플레이를 주로 구사하는 고전적인 플레이메이커는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11] 밀란에선 카카의 포지션을 공격수로 분류했었고 레알에선 미드필더로 분류했었다.[12] 라사나 디아라가 가투소, 페르난도 가고가 세도르프 내진 암브로시니, 그리고 샤비 알론소가 피를로의 역할을 맡아줄 수 있었지만 이 선수들은 밀란 선수들과 비슷해 보여도 스타일이 상이했고 그리고 갈락티코스 2기의 공격의 중심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였다. 카카가 무릎부상 이후 무리한 월드컵 출전을 위해 재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밀란 시절만큼 파괴적인 활동은 못보여 주었다. 허나 이후에 공격을 이끌 능력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레알에서의 카카 역할은 상당히 애매했다. 현대 축구 전술에서 공격형 미드필더의 자리를 찾기 힘들어지는 것은 물론이요, 그 자리마저 메수트 외질이라는 플레이메이킹에 특화된 미드필더에게 밀려버렸다.[13] 그러나 이런 외질도 결국 현대 축구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하였다.[14] 이 별명에는 화려한 플레이 스타일과 더불어 빛나는 외모도 한몫했다.[15] 브라질 선수의 드리블 하면 화려한 개인기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지만, 카카의 드리블 스타일은 매우 간결했고, 개인기 플레이도 남발하지 않고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등, 굉장히 효율적이고 깔끔한 편이었다.[16] 치달이라는 용어가 국내 커뮤니티에 널리 퍼진 계기가 된 시초격인 선수이기도 하다.[17] 100m 기록이 10.6초이다. 그 빠르다던 전성기 시절 가레스 베일과 비슷한 기록이며 최대 속력은 비슷하지만 가속력과 순간 속도에서 카카가 우위를 점한다.(30m 기록이 호나우두에 이은 3.6초로 역대 브라질 국가대표 2위다!)[18] 드리블 하면서 자신을 막으러 오는 리오넬 메시(그 당시 메시도 32.5km/h를 찍을 정도로 알아주는 준족이었다.)를 상대로 제대로 스피드를 내지도 않고 따돌린 적도 있다. 당시 카카는 교체, 메시는 선발이였지만 기본적으로 속력 자체는 카카가 우위이다. 또 빠른 발로 유명했던 리오 퍼디난드다니 알베스를 치달만으로 압도했으며 폼이 많이 하락하고 스피드도 눈에 띄게 떨어졌던 시절에도 전성기 시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동시에 출발하여 약간 더 빠른 속도를 보여줄 정도로 엄청난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다.[19] 이게 선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게, 리그나 챔스의 경우 못나가더라도 바로 내년에 또 기회가 오지만, 월드컵은 무려 4년을 기다려야 한다. 월드컵은 일반적으로 평생에 3번 정도밖에 출전하지 못하며 롱런하는 선수들도 4~5번이 한계다. 더군다나 전성기 폼을 가지고 갈 수 있는건 딱 1~2번이 끝이다. 카카의 경우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승을 했지만 이때 카카는 아직 어린 유망주로서 선배들 따라 경험을 쌓는 이른바 버스 커리어였고, 따라서 본격적으로 본인이 국대의 주축이 되고 대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다음 대회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프로 선수로서는 실격이지만 말이다.[20] 지금이야 저 둘이 유이한 신계라고 하지만, 2007년까지만 해도 카카가 저 둘보다 확실한 우위에 있었다. 물론 호날두는 2007-08 시즌부터, 메시는 2008-09 시즌부터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되었다.[21] 카카의 06/07 시즌 챔스 퍼포먼스는 역대 최고의 퍼포먼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22] 특히 2015년에는 공동 득점왕이었던 메시/호날두/네이마르가 발롱도르 포디움에 모두 들어갔다. 이 징크스는 2018년 루카 모드리치가 수상하면서 비로소 깨졌다.[23] 이 부분이 2000년 후반대에 세리에와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정상급 공미로 활약한 웨슬리 스네이더와 확실히 대조되는 부분이다. 자세한 비교는 문서 참고.[24] 킬러 패스 혹은 직접 돌파 후 득점.[25] 물론 레알 마드리드에 있었을 때에도 부상으로 인해 주력이 줄어들기도 했고,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전술 상 카카에게 있는 찬스 메이킹 능력을 활용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는 경기도 많았다.[26] 카카의 패스 능력이 다소 과소평가 된 경향이 있는데 무시무시한 치달 능력에 가려졌지만 아주 뛰어난 패싱력을 보유했었다. 팀 동료이자 당대 최고의 패서들인 안드레아 피를로, 샤비 알론소, 메수트 외질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안 날 정도.[27] UCL 8경기+UEFA 슈퍼컵 1경기[28] 자서전에서 카카가 처음 훈련장에 출근했을 당시를 회고하며. 참고로 카카가 처음 영입될 당시 정보가 없어서 안첼로티는 그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기자회견 당시 기자들이 이번 영입에서 기대하는 점을 말해 달라고 했는데 카카가 토니뉴 세레주와 비슷한 타입의 선수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첫 훈련 날에 말로만 듣던 최고의 재능이라는 선수가, 엉성한 가르마를 타고 어울리지도 않는 뿔테 안경을 낀 이탈리아에 교환학생으로 온 범생이 스타일로 나타나자, 안첼로티는 큰 좌절과 실망감에 사로잡혔다. 당연히 실력에 대한 기대도 사라져서 "부모님께 학교 안 간다고 말씀드렸니?" 같은 시덥잖은 농담이나 던졌는데, 그가 필드로 들어가서 공을 만지기 시작하자 그 플레이 하나하나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거칠기로 유명한 가투소가 전력으로 건 몸싸움을 견뎌내고, 그대로 치고나가 당대 최고의 센터백이었던 네스타 앞에서 30m짜리 중거리 슛을 꽂아 골망을 가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투소는 벙쪄서 을 했고, 네스타의 얼굴에는 좌절이 가득했으며, 안첼로티는 이 순간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리모컨이 있다면 돌아가고싶은 단 하나의 순간이라고 언급했다.[29] 2007년 카카의 발롱도르 수상 직후.[30] 2009년 카카가 밀란을 떠난 후.[31] 이탈리아, 스페인[32] 비록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승했지만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렵다. 고작 20살 전후 신인이었던 카카가 뛴 시간이라고는 코스타리카와의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 잠깐, 그것도 브라질이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으니까 들어간 게 전부였다. 사실상 자기 이름만 올려 놓은 셈. 물론 그 당시 브라질은 세계 최강팀이었으니 그 나이에 브라질 국가대표로 월드컵에 발탁되었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일이긴 하다.[33] 박지성도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 한국인을 비롯한 여러 파파라치들이 박지성의 사생활을 털려고 계속 붙어 다녔지만 훈련 끝나고 나면 집에 들어가서 혼자서, 또 가끔씩은 절친한 동료인 파트리스 에브라카를로스 테베스를 불러서 같이 위닝 일레븐을 하는 정도가 전부이고, 바깥에 나가더라도 생활용품 쇼핑이나 차에 기름 넣는 정도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비슷한 연예인이 있으니 바로 김종국. 집, 헬스장, 스케줄 소화를 무한 반복하는 재미 없는 삶 때문에 열애설 캐보려던 파파라치들이 전부 GG 치고 나가 떨어졌다.[34] 아마 2002 월드컵 당시 조별리그를 치룰 때 간 교회로 추정된다. 당시 브라질이 조별리그 3차전 코스타리카전을 수원시에서 경기를 치루었기 때문이다.[35] 네이마르는 자신이 출석하던 교회에 자기 연봉을 가지고 십일조를 줄곧 한다고 한다.[36] 참고로 카카는 선수 생활 말년에 영어권 국가인 미국에서 잠시 뛰기 이전에 단 한 번도 영어권 국가에 체류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본 이상의 교육을 받아 어느 정도는 영어 구사가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언급된 집안이 유복하고 어머니가 교사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37] 선수 말년에 잠시 미국에서 뛰긴 했다.[38] 한국의 순복음 계열의 교회를 떠올려보면 된다. 영적 체험, 방언 등을 강조하여 보수 교단에서 이단 소리까지 듣지만 낙태, 동성애, 마약 등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하며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입장이 많다는 점에서 보수우파와도 죽이 잘 맞는다. 가톨릭이 다수인 남미에서 개신교 신자들은 이런 성향으로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2000년대 최고의 선수와 미드필더 3위에 이름을 올렸다.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시대별 최고의 선수.jpg
* 골닷컴 선정 UEFA 챔피언스 리그 시대별 최고의 선수에서 2000년대 부문 3위에 이름을 올렸다.
* 2022년 9월 25일에 열린 베를린 마라톤에 출전해서 풀코스를 완주했다. 공식 기록은 3시간 38분 06초.

8.1. 외모[편집]



파일:카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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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에고나 쇼맨십이 강한 선수가 아니었지만 큰 키와 곱상한 비주얼 덕분에 스타성이 좋은 선수로도 평가받았다. 다만 바로 윗대에는 데이비드 베컴이 있었고, 아래로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이 치고 올라오며 생각만큼 스타성을 잘 활용해먹진 못한 케이스. 그래도 축구계에서 알아주는 미남으로 브라질 축구 선수 최고 미남이라고 불린다.


8.2. WAGs[편집]


20대 시절엔 독실한 종교인 인상과 비슷하게 아내와 서로 혼전순결을 지키며 결혼했다는 일화가 유명했다. 게다가 이 아내 역시도 엄친딸 속성이라 주변에서도 부러워하는 축구선수 커플로 유명했었다. 이렇듯 이상적인 커플 + 순정파 이미지로 축복을 받으며 유명해졌지만, 결국 이혼했다가 재결합했다가 다시 이혼했다.(...)

전 부인을 약 15살 때부터 사귀어 왔다는데 서로 혼전순결[39]이었다고 한다. 카카가 AC 밀란에서 뛰고 있었고 카롤리니는 밀라노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때, 카카는 그녀에게 일이 있으니 베네치아에 가자고 했고 카롤리니는 별 생각없이 따라갔는데 레스토랑에서 반지를 꺼내 프러포즈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녀는 크리스챤 디오르 브라질 지부 부사장의 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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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루카는 아빠를, 딸 이사벨라는 엄마를 많이 닮았다.

허나 2014년 11월 5일 이혼했다.(...)# 카카가 AC 밀란 - 레알 마드리드 - AC 밀란 복귀 - MLS 올랜도 시티 계약 - 상파울루 임대라는 꽤 복잡한 커리어를 이어가는 동시에 부인 역시 브라질 내 패션 사업이나 기타 영리 단체를 운영하는 등 서로 만날 시간이 없었고 그 과정에서 관계가 틀어진 모양이다. 이혼 절대 안할 것 같은 축구선수 커플이었기에 팬들의 충격도 꽤 컸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이혼하고서도 지속적으로 만나며 SNS 등을 통해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곤 했다. 심지어 가족 모임에도 같이 참가도 했다. 그것도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올리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SNS에 사진이 올라왔다.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이어지는 연말이 압권이었는데 카카가 카롤리니의 목덜미에 입맞춤을 하는 사진까지도 있었다. 그러더니 2015년 1월 5일 재결합을 선언했다. 이혼 파문은 순간적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일어난 해프닝으로 마무리 되는 듯 했으나 2015년 8월 카롤리니가 SNS에 이혼을 알리는 글을 올렸다. 재결합 후 인스타에 올렸던 닭살 돋는 사진들도 전부 삭제한 상태였다. 이후 둘 다 각자 연애를 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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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카카가 사진 속 여인인 바네사[40]와 만나고 있다는 뉴스가 터졌다. 처음부터 카카의 첫 이혼에 불륜설이 있기는 했으나 사실확인은 되지 않았다. 사실이면 타락카카 그리고 얼마 후 카카와 바네사가 함께 찍힌 사진이 공개되었고 카롤리니와는 완전히 끝났다.

파일:카카 여자친구3.jpg

파일:카카 여자친구4.jpg

2016년 12월 또 새로운 여친이 공개되었다. 2016년부터 사귀기 시작한 12살 연하의 1994년생 브라질 배우 겸 모델 카롤리니 디아즈라고 한다.

카카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 카카는 전 부인과 낳은 두 자녀와의 사이도 원만한 듯 하다. 때때로 서로의 사진이나 아이들 사진에 좋아요를 누른다든가 양가 부모들이 카카와 전 부인 각자의 사진에 좋아요나 댓글을 남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서로 애인이랑 있는 사진엔 절대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

참고로, 전 부인 캐롤리니는 2010년대 기준 브라질 사교계 인사 에두아르도 스카파와 연애 중이다. 브라질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교 가문으로 특히 외삼촌이 안좋은 쪽으로 유명한데 자세한 건 이 글에서 확인하자. 앞선 링크에 나와있지만, 이 쪽 남자도 카카와는 다르게 철딱서니 없는 성격의 소유자인지 카카 유니폼을 입고 친구들과 가운데 손가락을 들고 비웃는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구설수에 올랐었다. 결국, 글로벌 카카팬들에게 뭇매를 맞고 한동안 인스타그램을 비공개로 돌리기도 했다.

2019년 1월 디아즈와 약혼했다. 그리고 2019년 11월 30일 가족들, 절친한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

2020년 10월 8일, 디아즈가 딸을 출산했고(딸 이름은 에스터), 이후 2023년 2월 13일에 또 다른 자녀를 출산했다. 이로써 카카는 총 4명의 자녀를 둔 아빠가 되었다.

[39] 카카의 나이 23세, 카롤리니의 나이 18세 때 결혼했다. 카카가 15살 때부터 사귀었다면 카롤리니는 10살이 되니 카롤리니가 15살, 카카는 20살 때부터 사귀었다는 말인 듯한데 역시 독실한 개신교 신자 아니랄까봐 혈기 왕성한 나이에도 무려 3년 동안이나 혼전순결 원칙을 지킨 것이다. 물론 진실은 본인들만이 알 것이나, 사실 어릴때 오히려 성적 보수성이 더 높은 케이스는 제법 흔할 뿐더러 이런 원칙을 신과 연관시키는 종교인이라면 크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40] 국내에는 올리비에라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전에 열애설이 났던 상대가 미스 브라질 올리비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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