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토바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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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일본
2.2. 타 국가들의 유사 사례
3. 관련 전설들
3.1. 마루오카 성
3.2. 마츠에 대교
3.3. 마쓰에 성
3.4. 다이묘 관련 일화들
4. 실제 사례들
4.1. 호레키 강 치수사업
4.2. 야마노이(山の井) 둑 건설
4.3. 이타쿠라 구의 인주탑(人柱塔) 인골
5.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히토바시라(人柱: 인간 기둥, 인주)란 전근대 일본에서 행해졌던 인신공양 풍습으로 댐, 다리 및 성과 같은 대규모 건물 아래 또는 근처에 살아있는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쳐 건물이 적의 공격이나 홍수 같은 자연 재해로 파괴되지 않도록 신들에게 기도하는 행위이다.

현대인들이 보기엔 순장과 마찬가지로 워낙 충격적인 풍습이었기 때문에 현대 일본에선 '히토바시라'를 '산 제물', '희생양'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2. 역사[편집]



2.1. 일본[편집]


히토바시라를 기록한 초기 문헌 중에는 일본서기가 있다. 닌토쿠 덴노 재위 11년(323년) 기타카와강과 마무타강이 범람하여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 닌토쿠 덴노는 꿈에서 신성한 계시를 받았는데 무사시 지방에 사는 '코와쿠비'라는 사람과 와치 지방에 사는 '코로모노 코'라는 사람을 두 강의 신들에게 각각 바쳐야만 범람을 막는 제방을 비로소 세울 수 있으리란 내용이었다. 이후 닌토쿠 덴노의 명으로 코와쿠비는 키타카와 강 급류에 그대로 던져졌고, 이후 사람들이 강의 신에게 곧바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렇게 사람 1명을 희생한 후 제방이 세워진 뒤 강의 범람이 신기하게도 멈추었는데 운 좋게도 코로모노 코는 희생을 피했다고 한다.

또 15세기 무로마치 시대에 작성된 강부기(康富記)[1]라는 기록물에서는 '나가라의 히토바시라'라는 유명한 인신공양 사례가 언급되었다. 나가라강을 지날 때 등에 어린 사내를 업고 있던 여인이 붙잡혀 큰 다리가 세워질 곳에 그대로 묻혔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히토바시라와 다른 인신공양 설화는 실제로 행해졌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16세기 후반까지 일본에서 매우 흔한 이야기였다고 한다. 다만 고고학적 발굴로 실제 사례임이 확인된 경우를 제외하면 이런 설화들 중 많은 경우는 고려조선의 인신공양 설화들처럼 뜬소문이거나 각 지역의 주민들 사이에서 심심풀이나 아동 교육 혹은 상업적 목적으로 지어내 떠돌아다니던 이야기로 추정되고 있다.

히토바시라 풍습 관련 설화는 전근대 일본 지역에서 교량과 같이 복잡하고 위험하며 종종 치수와 관련된 건설에 주로 관련하여 거의 항상 따라다녔다. 종종 히토바시라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자기 희생 정신'을 고무시키는 것으로 여겼다. 에도 막부의 중앙 집권 체제와 법치 체제가 완성되고 성리학이 보급된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실질적인 공양 행위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졌으며 일부 지역들에서는 좀 더 오래 지속되어 하술할 호레키강 치수 사업과 같이 18세기 중반까지 암암리에 이런 행위들이 이뤄지기도 했으나 18세기 말이 되면 일본 전역에서 히토바시라 풍습의 명맥이 끊겼다. 쿠로후네 사건메이지 유신이 있었던 19세기 중반에는 사라진 옛 풍습이 되었다.

2.2. 타 국가들의 유사 사례[편집]


물론 인신공양은 일본에만 있었던 풍습은 아니다. 원래 인신공양은 인권이란 개념이 희박하던 고대에는 지역, 종교, 인종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나타나던 풍습이었다.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도 중국이나 한국, 베트남의 고대사/중세사 유적 등에서도 히토바시라와 유사한 목적으로 인신공양이 행해진 구체적인 증거들이 출토되고 풍습이 사라진 후대에도 '왕이 건물을 지을 때 어린 아이를 기반에 파묻어 제물로 바친다'는 구전 설화로 계속 회자되었다.

다만 동아시아 문명권도 각자 차이는 있었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국토는 작고 인구 밀도는 높으며 빠르면 통일신라, 늦어도 고려부터는 통일 국가들이 법통을 이어가면서 단일 국가가 계속 이어지던 한반도에서는 꽤 일찌감치 사라졌다. 고구려중천왕 시기인 3세기 중반부터 인신공양 금지가 시행되었고 신라지증왕대인 6세기 초에 법으로 확실히 금지되었다. 물론 일본, 중국에서 인신공양 풍습을 법적으로 금지했다고 즉시 인신공양이 사라지진 아니하였듯 한국에서도 법적으로 인신공양이 금지되자마자 민간에서까지 완전히 인신공양 풍습이 뿌리뽑히진 않았다.

민간에서까지 인신공양 풍습이 확실히 사라지기 시작한 시기는 고려시대였다. 고려시대에는 이미 이런 인신공양이 사회적 지탄을 받으면서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졌지만 동시에 민간 사회에서는 지속적으로 인신공양 풍습이 소문으로 떠돌았던 모양이다. 대표적인 일화로 고려의 권신 최충헌이 집을 지을 때 어린아이들에게 오색 옷을 입혀서 네 귀퉁이에 묻어 재앙을 피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백성들이 두려워 아이들을 숨겼고, 최충헌은 놀라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방을 붙여 소문을 진정시켰다고 하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인신공양 풍습이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금기시됐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당시 민중들이 인신공양 풍습이 있었다는 기억을 이어 왔음을 뜻한다. 고려청자와 관련한 도공들의 인신공양 설화들이 전해지고 고려 시대 청자와 가마에서 인간을 비롯한 동물의 뼈에서 많이 나오는 인이 출토되면서 가마 건설 과정 등에서 인신공양이 행해졌을 가능성을 일부 제기하기도 하지만[2] 고려 도공들이 인신 공양을 행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조선 세종 25년(1443) 일본 사신 업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신숙주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자 선원들이 배에 탑승하던 임산부를 바다에 던져 제물로 바치려는 하던 차에 신숙주가 제지하여 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해당 내용은 민간에서의 잡담 및 만담을 모은 야사집인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있는 기록으로 신빙성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당대 민간에서 이런 설화가 떠돌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런 일들이 실제로 행해졌다고 하더라도 이는 전근대 국가의 통치력이 완벽히 미치지 못하는 그늘에서 이뤄지는 특수한 사례들이었을 것이다. 조선 전기에 걸쳐 괴력난신을 금하는 성리학이 민간에까지 널리 보급되고 국가의 행정력과 통치력이 민간 사회의 말단에까지 미치면서 조선 후기에는 인신공양 풍습이 그늘에서까지도 완전히 사라졌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대에 이르기까지 중원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런 종류의 인신공양이 암암리에 일어났으나 --송나라 시대를 거치며 국가 통치 체제가 정비되고 유교가 민간 사회에 퍼지며 사라졌다.[3] 대신 중원 지역 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북방 유목 민족들과 변경민들을 중심으로 비슷한 인신공양 풍습이 유지됐다. 하지만 이후 원대에 들어서며 북방인들의 영향으로 한때 폐지됐던 순장 풍습이 중원 지역에서 부활하였으나, 청나라 대에 와서 이런 풍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청나라도 초기 후금 시기에 잠깐 순장이 행해지긴 했지만, 청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에는 이를 폐지하였다. 오히려 한족 왕조였던 명나라는 16세기 초까지 순장을 그대로 유지했다. 조선 세종 7년(1425)에 조선의 재상 허조가 "허수아비로라도 순장하면[4] 후손이 끊어진다는 건 어린 아이들도 다 아는데, 명나라에서 황제의 장례식 치를 때 궁녀 15명을 순장한다니 대국 것이라도 배울 게 전혀 못 됩니다."라고 비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6세기 중반에 공식적으로 사라진 순장 풍습이 후금에 의해 잠시 부활하였으나[5] 17세기 후반이 되면서 순장을 비롯한 인신공양 풍습이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전면 금지되었다. 다만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온전히 미치지 않는 변경 지역 소수 민족들과 한족들을 중심으로 인신공양 풍습이 18세기까지 일부 남아있었으나 강건성세 기간 동안 지속된 중앙 정부의 변경 지역에 대한 통치권 확대 시도의 결과 크게 약화되어 18세기 말~19세기 초가 되면 사실상 소멸됐다. 다만 여전히 변질된 사이비 도교와 같은 토착 신앙의 형태로 인신공양이나 식인과 같은 풍습들이 19세기까지 일부 행해지곤 했다.[6] 이런 풍습이 중원과 그 변경 지역에서 완전히 소멸한 것은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걸치는 기간으로, 중화민국 시대 전반과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반 세기에 걸친 근대화와 대규모 미신 혁파 운동들의 결과였다.[7]

즉, 인신공양 풍습은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존재했으며, 중세~근세기에 중앙집권적 국가 통치 체제와 법치 체제의 완성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친 미신 타파 운동의 결과 사라진 것이다. 일본의 히토바시라 또한 동아시아 사회의 발전이라는 큰 흐름에서 보면 근세 에도시대 전기까지 민간 사회에 그 영향력이 남아있었으나, 중앙집권적 국가 통치 체제의 정비와 법치 체제의 완성 그리고 성리학의 보급으로 그 기세가 크게 약해지기 시작해 18세기 무렵에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비교적 최근인 18세기까지 일부나마 행해진 바 있고, 기담이 엄히 금지되지 않고 오히려 민간 사회에서 널리 소비되며 상당히 유행했던 중근세 일본 사회의 분위기 덕에 진위 여부를 떠나 민중 사이에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떠돌았고, 이들이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중국 각지의 인신공양 이야기들도 이와 비슷한 배경에서 오늘날까지 많이 전승되고 있다.

이런 동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고전적 토착 인신공양 풍습이 외래 종교인 대승 불교와 오랜 기간 결합하여 동아시아 대승 불교 내에서 독특한 풍습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이런 풍습들 중 하나를 소신공양이라고 한다.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광범위하게 전해지는 불가 승려들의 자기 희생 설화가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때문에 히토바시라 설화 중에도 많은 수의 불교 승려의 자기 희생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비록 소설이기는 하지만 독일의 슈토름이 쓴 <백마의 기수>에는 사람 대신 강아지를 제방에 묻으려다 주인공의 제지로 구해지지만 인부들은 영 못마땅해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방 같은 걸 세우려면 인신공양은 아니더라도 생명 하나 정도는 바쳐야 한다는 풍습의 반영으로 읽히기도 한다.

사실 토목공사 자체가 21세기에도 잊을만하면 사상자가 나오는 험한 일이라 전근대엔 성곽이든 저수지든 '공사를 한다' 는 건 '수십명씩 죽어나간다' 와 같은 의미일 정도로 사상자가 많은 살벌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크다. 실제로 20세기 초까지 대규모 토목공사에는 엄청난 수의 희생자가 나오곤 했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토목 공학 기술 강대국의 경지에 올랐던 미국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는데,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진행된 후버댐 건설 당시 사망한 노동자 수가 공식적으로만 112명이었다. 이는 투입된 총인원의 약 0.5%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이런 이유로 근대 초까지의 토목공사들에는 인신공양을 비롯해 온갖 괴담들이 붙어 있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현대에는 이런 괴담들을 우연히 일어난 사고나 현장 작업자 간의 살인 사건, 동원된 노동 인력에 대한 홀대 혹은 탄압으로 인한 노동자 사망 사건들이 살이 붙어 인신공양이 이뤄졌다는 도시전설을 낳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대영제국, 프랑스제국, 일본제국, 미국, 독일제국, 러시아제국 등 근대 식민제국들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실시한 대규모 토목건설의 경우 당시의 기술적 한계와 당국과 기업들의 무관심 및 책임 방기로 말미암아 여러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노동자 사망 사고가 잦았는데, 이것이 해당 국가의 하층민 혹은 식민지민 혹은 가난한 나라 출신의 외국인들로 구성된 노동자들 사이에서 윗사람들이 자신들을 악마에게 재물로 바쳐 건설을 진행하고 있다는 식의 루머를 낳기도 했다. 특히 아프리카, 홋카이도, 아메리카 내륙, 시베리아 등의 인적이 드문 미개척지들에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된 경우 사망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비용을 아끼거나 사망자 발생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건설현장 인근이나 혹은 아예 그 건설현장에 파묻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히 노동자들이 외국인 노동자거나 죄수라서 일반적인 노동자들에 비해 법적 신분이 취약할 경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실제로 시베리아에서 강제노역하던 죄수들이나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호주,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노역하던 죄수들과 쿨리, 현지인들이 사망했을 때 이렇게 처리되기도 했다. 일본제국에서도 1920년대까지 홋카이도에서 죄수 노동을 시키며 이런 경우들이 종종 있었는데, 인신공양 차원에서 사람을 묻은 건 아니지만 이 경우도 일본에서는 히토바시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연원과 여전히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토목공사 현장의 현실로 인해 기술이 발전하고 노동자 안전에 대한 관심이 훨씬 커져 이전 시대에 비해 사망자가 크게 줄어든 현대에도 토목공사 판에는 다양한 루머들과 미신들이 존재한다.

3. 관련 전설들[편집]



3.1. 마루오카 성[편집]


마루오카 성(丸岡城)은 일본의 오래된 옛 성인데 인간 기둥(人柱) 즉, 히토바시라 풍습으로 지어졌다는 소문이 있다.

시바타 카츠이에의 조카 시바타 카츠토요(柴田勝豊)가 1576년 마루오카에 성을 지을 때 성곽의 돌담들이 쌓인 횟수에 관계 없이 계속 무너졌다. 이런 사고가 계속되자 사람들이 누군가를 인주(人柱)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고 그렇게 히토바시라의 제물로 자녀가 2명 있고 가난한 삶을 사는 외눈박이 여자 오시즈(お静)가 선택되었다. 오시즈는 자녀 중 한 명이 사무라이가 된다는 조건 하에서 인주가 되는 데 동의하고, 결국 성의 중앙 기둥 아래에 산 채로 묻혔다. 그 직후 축성 공사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지만 카츠토요는 축성 이후 다른 지방으로 영지를 옮겼고, 오시즈의 아들 또한 결국 사무라이가 되지 못했다.

그 탓에 히토바시라로 희생된 원혼이 느끼고 해마다 4월에 봄비로 성의 해자를 넘치게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오시즈의 슬픔의 눈물로 인한 비'라고 불렀고, 원한을 달래기 위해 작은 무덤을 세웠다는 시 한 수가 전해진다고 한다. 실제 마루오카 성벽이 불안정했던 것은 성을 잘못 설계한 탓인 듯하다. 모모야마 시대(1575-1600)에 지어진 이런 디자인은 초기 요새로서의 모습을 더 잘 나타내지만, 가파른 바닥에 고르지 못한 석재 말뚝들이 있어 성벽이 불안정했던 듯하다. 그래서 히토바시라를 실제로 행한 게 아닌가 하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3.2. 마츠에 대교[편집]


시마네현 마츠에시에 있는 마츠에 대교(松江大橋)는 전설에 따르면 처음 세울 때 히토바시라를 사용했다고 한다. 인근 공원에는 교량 건설 중에 사망한 희생자들을 기리는 비석과 함께 히토바시라로 희생된 '겐스케'란 사람을 기리는 '겐스케 기념비'가 함께 있다고 한다.

1607년 이즈모 지방에서 강 입구에 다리를 놓으려고 했으나 매번 공사가 실패했다. 강바닥이 흡사 다리의 기둥이 놓일 수 있는 단단한 바닥이 없는 듯, 낮에 기둥을 만들어놓으면 밤에 휩쓸려 사라지거나 강물에 매번 삼켜졌기 때문에, 다리를 지을 큰 돌이 허다하게 의미 없이 강에 버려지는 상황에 반복되었다. 결국 다리를 전부 짓기는 했지만, 공사가 끝나자마자 기둥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홍수 때마다 그 절반이 사라졌고, 보수 공사를 할 때마다 배들이 자주 난파하고 말았다. 결국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사람들은 강을 달래기 위해 히토바시라를 행하기로 하였고, 가장 위험한 곳이자 강물의 흐름이 가장 강했던 가운데 기둥 아래의 강바닥에 사람을 산 채로 묻기로 하였다.

이 불쌍한 희생자는 사이카마치의 거리에서 살던 겐스케(源助)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희생 제물을 고를 때 하카마를 입고 마치[8] 없이 다리를 건너는 첫 번째 사람이 제물로 선택되도록 결정했다. 겐스케는 재수 없게도 하카마에 마치 없이 다리를 건너다가 그대로 희생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다리의 가장 가운데 기둥은 그의 이름을 따서 '겐스케-바시라(기둥)'이라고 불렸다.

어떤 사람들은 겐스케라는 이름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 방언에 의해 훼손된 시대의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전설은 지역 주민들에게는 상식이나 다름없었다. 1891년 새 다리를 지을 때에도 겐스케 때처럼 새로운 희생자가 필요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지역 주민 수천 명이 자기가 희생 제물이 될까봐 마을에 오기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3.3. 마쓰에 성[편집]


전설에 따르면 마쓰에 성은 성의 돌담 아래에 어느 여자가 히토바시라로 묻혔다고 한다. 기록이나 전설로도 이름은 전하지 않고, 그저 춤을 좋아하는 아름다운 젊은 처녀였다고 할 뿐이다. 단순히 '마쓰에의 처녀'라고 불린다. 성을 지은 후 오시로야마 언덕이 흔들리고 성이 '위에서 아래로' 흔들리기 때문에 마쓰에 거리에서 춤을 추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3.4. 다이묘 관련 일화들[편집]


센고쿠 시대에도 히토바시라가 행해지기는 하였으나 몇몇 다이묘들이 이를 막은 일화가 남아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카메야마성 축성 당시 제물 대신 돌로 만든 불상을 묻었고,[9] 모리 모토나리는 백만일심이라 적힌 비석을,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보검을 묻었다. 이케다 나가요시는 제물로 뽑힌 시녀의 소장품을 묻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이런 훈훈한 일화들과는 달리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미츠히데가 건립한 카메야마성을 받고 천수각을 새로 짓던 중 공사가 난항을 겪자 히토바시라를 행하였다고 하며, 이 혼령이 미츠히데가 심은 은행나무 주변을 떠돈다는 전설이 있다. 다만 히데아키가 카메야마 성주였던 당시 영지 통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가신 야마구치 무네나가가 행하였기에, 진실된 이야기라 하기는 어렵다.


4. 실제 사례들[편집]



4.1. 호레키 강 치수사업[편집]


1754년 지금 현재 기후현 와노우치 정에서, 호레키 강 치수사업 중 치수 공사가 어려워지자 지역 유지 마스야 이헤(舛屋伊兵衛)가 기초 기둥이 위에서 고정될 수 있을 때까지 기둥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히토바시라의 제물로서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당시 사람들은 마스야를 치수 공사의 성공적인 완공을 보장하고자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마스야 이헤의 무덤은 1971년 도도부현 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 #


4.2. 야마노이(山の井) 둑 건설[편집]


후쿠오카 현 야메시에 있는 야마노이 공원(山の井公園) 상류에는 1652년 야마노이 둑을 건설을 할 때 히토바시라의 제물이 된 요시다 마을의 촌장 나카시마 우치노스케(中島内蔵助)의 위업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참고로 나카시마 우치노스케 또한 스스로 자원해서 히토바시라의 제물이 된 경우이다. #, # 한편 해당 마을에서는 나카시마 우치노스케를 기념하는 추모 행사가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아직도 마을 사람들이 나카시마를 존경하고 있다고 한다. #


4.3. 이타쿠라 구의 인주탑(人柱塔) 인골[편집]


1937년에 현재의 니가타현 조에츠시 남동부에 위치한 이타쿠라 구(板倉区)에서 마을 사람들이 마을 사찰인 정정사(正浄寺)에서 객토를 채굴하던 중, 오미카를 파서 내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사람의 뼈를 발견했다. 그동안 전설로만 내려오던 마을의 '산사태 제물(히토바시라) 전설'이 이곳에서 사실임이 증명되어 전국적으로 드문 발견이 됐다.

인주당이 있는 장소는 헤이안 초기, 죠로쿠산 류쇼의 무렵 천대종정사(나중에 토치기현으로 이주)가 있던 곳이다. 데라노무라(구 이타쿠라쵸에 합병)는 고대로부터 산사태가 많은 땅으로 여러 가지 전설이 있었다. 그 중 관련 전설은 이러하다.

13세기 가마쿠라 막부 시절의 일이다. 신슈(信州: 나가노현)에서 어떤 객승이 사루쿠요지(猿供養寺) 마을에 가려고 쿠로쿠라(黒倉) 고개를 넘으려는 참인데 갑작스럽게 비바람이 몰아쳤다. 객승이 비를 피하고자 숲에 들어가 쉬는데, 가까이 있는 우바가 못(宇婆ヶ池)에 이무기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이무기들은 조로쿠산(丈六山)에 큰 산사태를 일으켜 자신들이 살 만한 커다란 못을 만들자고 하였다. 그런데 큰 이무기가 말하기를 "인간들이 이 사실을 알고 강에서 48타타키(四十八タタキ)[10]를 행하고, 사람 하나를 히토바시라로 바치면 우리가 산을 무너트릴 수가 없어. 하지만 인간들이 알 리가 없지." 하였다. 객승은 이 대화를 듣고 놀라 도망치려 하였으나 이무기들에게 들켜 붙들리고 말았다. 이무기들은 객승을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나는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이고, 장님에 벙어리라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으니[11] 결코 이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 하고 약조하여 겨우 풀려났다.

그런데 객승이 원 목적지인 사루쿠요지 마을에 도착하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잦은 산사태로 겪는 참상이 너무 심했다. 그래서 그만 이무기들과 한 약조를 깨고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승려가 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다했지만, 누가 히토바시라가 될지만큼은 며칠이 지나도록 제대로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객승은 "나는 부처님을 모시는 몸인데도 이미 이무기들과 맺은 약속을 깨고 말았으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소. 또한 무간지옥이나 다름없는 이런 광경을 어찌 승려로서 그냥 지나치리오? 중생들이 겪는 고통이 곧 내 한 몸의 고통이나 다름없소. 내가 히토바시라가 되어 이 곳의 지진을 막고 마을을 지키리라 다짐하니, 나 죽거든 7월 17일을 기일로 삼아 향화(香華) 공양이라도 올려주시오." 하였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매년 7월 17일마다 객승을 기리며 공양해왔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 자료를 보면 전설의 객승이 흙을 모아 만든 좁은 공간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자 마을 사람들이 위에 작은 바위를 얹어 봉한 뒤 흙을 덮어 묻어버린 것 같다. 1961년에 니가타대학 의학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간사이계의 40~50세 정도인 남자의 유골이었다. 다리뼈는 발달했지만 팔 뼈는 다소 얇았다고 한다. 팔로 일을 하지는 않으나 많이 걸어다닌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그 자리에 감사의 의미로 산사태 제물 공양당(人柱供養堂)을 세웠다. 1974년 8월 1일에는 지역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 # 인주공양당에는 발굴된 인골과 함께 위를 막았던 그 바위를 전시한다.


5. 창작물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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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씨의 아이에서 도쿄는 원래 바다였으며, 자연의 섭리에 따라 다시 바다가 될 운명이었지만 '날씨의 무녀'를 히토바시라로 바쳐 비를 그치게 하여 연명해온 역사가 있다. 작중 시점에서도 여주인공 아마노 히나가 날씨를 맑게 하기 위한 히토바시라가 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 블리치의 세계관은 영왕의 육체를 기둥으로 삼아 만들었다는 설정이다.

  • 탐정학원Q마야공주전설 살인사건은 이 전설이 돌고 있는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강이 범람했을 때 마야공주라는 사람이 스스로 불의 용이 되어 재가 됨으로써 히토바시라가 되었다는 전설이다[12]. 그래서 마을 이름도 人柱(히토바시라)를 음으로 읽은 '진추(じんちゅう)'였으나, 현대에는 음이 동일한 '陣中'로 표기를 바꾸었다고 소개된다.


  • 이토 준지의 단편 대들보비화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가족이 새 집을 신축해 집들이를 하는데, 가장이 없어져 찾아보니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대들보[13][14] 와 땅 사이에 깔려 있었다. 그 가장은 피를 토하며 이제 막 죽으려던 참이라 자신이 어떻게 대들보에 깔렸는지 설명하기 보단, 어차피 죽을 자신을 구하려고 집을 무너뜨리지 말고[15] 스스로 집을 지탱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이후 대들보 밑에 백골화 된 가장을 방치한 채로 위패나 향을 놓고 미니 불단처럼 만들어놓은 장면이 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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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 외기국 관인을 지낸 '나카하라 야스토미(中原康富)'의 기록물이다.[2] 출처 - 최용범,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페이퍼로드, 2007.[3] 근본적으로 유교 자체가 이런 풍습을 없애기 위해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보통 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인과 예이고 괴력난신을 피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4] 즉, 인간을 대신해 허수아비를 무덤에 넣어서 순장하더라도.[5] 청태종 홍타이지의 동생인 도르곤의 어머니 울라나라 씨가 홍타이지 일파의 강요로 누르하치가 사망했을 때 순장당했다. 사실 원래 홍타이지는 서자였고 도르곤은 적자인데 홍타이지가 훨씬 세력도 강하고 능력도 좋아서 그런 것. 한 마디로 이는 정치 싸움의 결과였지 청나라라고 해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6] 1920년대 중국을 다룬 루쉰의 단편 <납함>에 사형수의 피를 찍은 만두를 불치병을 치료하는 데 특효약이라고 팔아먹는 도시 상인이 등장한다.[7] 좋은 의미에서든 안 좋은 의미에서든 문화대혁명이 현대 중국과 중화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꼽히는 이유 중 하나로 이런 '미신 혁파'가 있다. 실제로 인신공양, 식인, 전족, 여성 학대와 같은 중원 지역에 암암리에 전해지던 풍습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에 기여한 바가 없진 않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됐다. 또한 인습이 아닌 유교/불교/도교와 여러 예법을 비롯한 중국의 전통들과 유물들과 유적들 또한 미신으로 몰려 철저히 파괴됐다. 그리고 안 좋은 의미에서 '미신 혁파'가 회고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결국 해당 구호가 마오쩌둥과 그 측근들의 정치적 도구가 되어 정적 숙청과 민중 탄압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기 때문이다. 이는 애초에 문화대혁명이란 마오쩌둥의 개인 독재 체제 보호를 위해 촉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8] 옷의 주름을 수직으로 깔끔하게 유지하기 위한 딱딱한 도구.[9] 이 불상들은 현재 코쿠분지라는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10] 정확히 무엇인지는 일본에서도 모르지만, 나무를 박아 인근 산의 골짜기를 막는 행위를 가리키는 듯하다.[11] 진짜로 장님에 벙어리란 소리가 아니라, 장님에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표현이다.[12] 여기의 히토바시라는 사람을 산 채로 땅에 묻는 것이 아니고 산 채로 사람을 기둥에 매달아서 불에 태워 재로 만들어서 땅에 뿌리는 방식이었다.[13] 원문은 다이코쿠바시라(大黒柱). 일본 전통 가옥에서 집의 하중을 지지하는 가장 굵은 중심 기둥을 말한다. 일본 건축에만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한국어에는 여기에 직접적으로 해당하는 표현이 없다.[14] 다이코쿠바시라를 '대들보'로 번역한 건 기본적으로 오역이라 할 수 있는데, 대들보는 들보들이 받은 지붕의 하중을 기둥으로 전달하는 수평 부재로, 기둥인 다이코쿠바시라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대들보와 다이코쿠바시라는 한국과 일본의 전통 건축에서 집의 하중을 견디는 데에 가장 중요한 부재로 여겨졌으며. 집을 지탱한다는 것에서 착안하여 둘 다 집안의 가장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아예 없지는 않다.[15] 이에 아내가 '그럼... 어쩌란 말예요?!'라고 하는 장면이 짤방으로 쓰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