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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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출생부터 아칸소 시절까지
3. 영부인 활동과 정계 진출
4. 200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4.1. 오바마와의 경쟁
4.2. 예상치 못한 패배
5. 국무장관 재임기
6.1. 샌더스와의 경쟁
6.2. 민주당 경선 결과


1. 개요[편집]


미합중국 제67대 국무장관을 지낸 힐러리 클린턴의 생애에 관해 서술한 문서.

2. 출생부터 아칸소 시절까지[편집]


힐러리는 1947년 10월 26일 오후 6시 45분[1] 시카고 에지워터 병원에서 출생했다. 유년 시절은 일리노이의 교외 지역인 파크리지 위즈너가 235번지에서 보냈다.

아버지 휴 로댐(Hugh Ellsworth Rodham, 1911-1993)은 직물 관련 소형 사업체를 운영하였으며, 힐러리의 집안은 웨일스,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출신으로 시카고에 꽤 오래 자리잡은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휴 로댐은 이웃과 어울리기 힘들 정도로 성격이 고집스럽고 괴팍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휴 로댐과 도로시 하웰 로댐(Dorothy Howell Rodham)은 자식들에게 끈끈한 가족애의 소중함을 가르쳤고, 힐러리에게 전통적인 여성상을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여자도 할 수 있다' 고 가르쳤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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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사우스 고등학교 졸업 사진. 1961년 메인 이스트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64년 마지막 학년일 때 이 학교로 전학갔다.

힐러리는 이 가르침을 가슴 깊이 간직했다. 1975년 빌 클린턴과 아카풀코로 신혼여행을 갈 때, 그녀는 부모와 남동생 휴이(Houghie, 휴 주니어), 토니(Tony)도 데려갔다. 힐러리는 사춘기를 거치며 아버지와는 멀어졌지만, 어머니와는 더욱 가까워졌다. "지금의 힐러리를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 도로시죠. 도로시를 보고 있으면 힐러리가 보여요."라고 린다 블러드워스 토머슨(Linda Bloodworth Thomason)이 말했다. 할리우드 제작자인 린다는 힐러리의 가장 오래된 친구 중 한 명이다.

하지만 힐러리의 기질은 그리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힐러리는 "경우에 따라서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고 벳시 에블링이 인용했을 정도이다. 어린 시절 로댐 가와 가깝게 지내며 자주 드나들었던 힐러리의 사촌 오스카 다우디 또한 "힐러리는 어머니의 치밀한 성격과 아버지의 허세를 모두 물려받았다"고 단정지어 말한 바 있다.

딸에게 "목표를 높이 두라"고 가르쳤던 어머니 도로시는, 특이하게도 "힐러리가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 대법원 판사가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힐러리는 우주 비행사가 되고 싶어해 14세 때,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 지원 서류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은 지원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게 된다. 사실 남자였더라도 나이가 너무 어렸지만. 또한 도로시는 아이들에게 평정을 유지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를 위해 그녀는 힐러리에게 목수들이 사용하는 수준기를 이용하여 그 안의 기포가 어떻게 가운데로 이동하는지를 보여줄 정도였다. "이 수준기가 네 안에 있다고 상상해보렴. 그리고 기포가 항상 중앙에 오도록 노력해 봐. 가끔은 기포가 위로 올라가기도 할 거야." 도로시는 수준기를 세워 기포가 위로 가게 해 보였다. "그럴 때면 기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야 해." 도로시는 수준기를 다시 바로 눕히며 말했다. 힐러리는 처음부터 학교에 쉽게 적응했고, 유진필드 초등학교(Eugene Field Elementary School)에서는 거의 언제나 전 과목 A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심한 근시로 9살 때부터 안경을 써야 했는데, 이는 1950-60년대에 성장기를 거친 소녀에게 결정적인 결함이었다. 힐러리의 붉거나 남색의 안경은 처음으로 콘택트 렌즈를 끼게 된 33세까지 그녀의 외모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때로 그녀는 허세를 부리며 안경을 쓰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마치 '안내견의 도움을 받는 맹인'처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고 회상한다. 졸업 몇 년 뒤 동창회에서 힐러리는 친구 벳시에게 "이 사람이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이야? 그럼 저 사람은?"이라고 계속 물어야 했고, 벳시가 친구들의 이름을 알려줄 때면 힐러리는 "저렇게 생겼는지 정말 몰랐는데…"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1965년 가을, 힐러리는 너무 많이 읽어 너덜너덜해진 배리 골드워터의 <보수주의자의 양심>[3]이 들어있는 여행 가방을 들고 웰즐리 칼리지(Wellesley College)에 도착했다. 미국 중북부인 일리노이 주의 비교적 조용한 시카고 교외에서 자랐고 공립학교를 다닌 그녀가, 별안간 만만치 않은 여학생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 것이다. 그녀들 대부분은 명문 기숙사립학교 출신으로 여름이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으며,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외국어 한 둘은 기본이고, 웰즐리 풍이라고 부를 만한 교양도 제법 갖추고 있었다. 힐러리도 나름대로 메인 사우스 고등학교에서 상위 5% 안에 들었지만, 이는 별로 내세울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힐러리는 이제 더 이상 '또래보다 똑똑한' 학생이 아니었다.

사실 동북부에 있는 7대 명문 여자대학[4]들 중에서도 특히 웰즐리 여대에 합격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남들보다 똑똑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고등학교 졸업반에서 상위 1~2% 안에 든 전적을 갖고 있었다. 힐러리가 입학하던 1965년아이비리그코넬 대학교를 제외하면 남학생만 뽑던 시절[5]이었다. 그러다보니 전국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여학생들은 웰즐리 여대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6] 이런 고상한 환경에 힐러리는 위축되었고, 두려움 속에서 첫 학기를 시작했다. "엽서로만 보아왔던 외국에 덩그러니 혼자 나와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그녀는 훗날 회고한다.

힐러리가 동부의 여자대학교로 진학하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웰즐리 여대 출신이었던 고등학교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그녀가 다른 7대 명문 여대 중에서도 웰즐리 여대를 유독 마음에 들어했던 이유는, 학풍과 학교의 주변 분위기가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한 이 학교에는 자기보다 훨씬 똑똑하고 멋진 여학생들로 가득하며, 심지어 이들 중 대부분은 앞으로의 출세길마저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 힐러리는, 이들과 경쟁한다는 것은 그녀 혼자의 생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후에 회고한다.

결국 생각을 바꾼 힐러리는 웰즐리 여대에서 국가 정세, 문화, 정치, 성 관념의 변화를 겪으며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사실 두꺼운 안경을 끼고 복잡한 정치관을 가진 여학생이, 7대 명문 여자대학의 완벽한 매너를 갖춘 여성의 구식 모델을 따를 필요는 없었다. 후에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7]가 힐러리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금발의 긴 생머리, 그리고 나팔 바지를 입은 신입생이었다. "힐러리와 나는 자칭 학생 '개혁가'였어요. 급진주의자들이 학교 건물을 점령하고 학교를 휴교시키기 몇 년 전이었죠. 우리는 인권운동 행진에 참여하고 더 많은 흑인 학생들의 입학을 요구했어요. 심지어 우리는 전국을 한 데 모을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던 거죠." 라이시의 말이다.

웰즐리 여대 시절 그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돈 존스 목사였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존스 목사는 힐러리의 상담자 역할뿐 아니라 통신원, 소크라테스식 논쟁의 대상, 그리고 정신적 조언자의 역할을 해주었다. 힐러리는 우울해질 때면 언제든 돈 존스 목사를 찾았다. 이후에도 그들은 줄곧 이러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남편의 탄핵 소동이 있던 해에도 힐러리는 그를 찾아 조언을 구했다. 존스는 힐러리에게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설교 '너는 받아들여졌다(You are Accepted)'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들려주었다. 죄와 은혜는 공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설교였는데, 틸리히는 "은혜는 우리가 엄청난 고통과 불안 속에 있을 때 찾아온다. 그리고 이런 일은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 사이 그녀는 열심히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현 상황에서 자신의 실존적 가치 설정에 따른 판단으로 이겨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후 그녀는 인생이 고통스럽고 피곤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각종 영적인 격언, 때로는 사이비적인 격언들[8]에 의지하여 구했고, 혼란스러운 문제들에 대한 참고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후에 힐러리가 자신이나 남편의 탐탁치 않은 행동이나 성격을 합리화하고자 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

힐러리는 웰즐리 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한다. 대학 초기에 잠시 공화당 청년 조직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베트남 전쟁흑인 민권 운동을 둘러싸고 조직 내 다른 이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탓에 비록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업무 보조 역을 하긴 했지만 심적으로는 민주당 쪽으로 점점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웰즐리 여대를 졸업하고 1969년 예일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했는데 이곳에서 한 학년 후배 빌 클린턴을 만나게 된다[9]. 빌과 함께 있기 위해 졸업을 1년 늦추고 빌이 대학 졸업 후 고향인 아칸소 주의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자 아칸소로 빌을 따라서 건너가게 된다.

1975년, 빌의 청혼에 두 사람은 결혼했는데, 이때 힐러리는 자신의 처녀 때 성인 로댐을 계속 유지했기에 풀 네임의 성이 로댐 클린턴으로 되었다. 빌은 이미 약관의 나이에 정계 진출을 시도했는데, 1974년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지만 1976년 리틀 록의 지방 판사에 선출되어서 빌과 힐러리는 리틀 록으로 이주했고, 힐러리는 로즈 로펌에서 일하게 된다.

어린이 보호 활동을 전개해서 아칸소 주의 어린이 보호 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고 1978년 빌이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되자 농촌 지역 건강 지원 위원회장을 맡아 아칸소 주의 가난한 지역들에 의료 시설을 확충하는 역할을 했다. 이 때의 경험은 그녀가 빌 클린턴 행정부 초창기 의료보험 개혁 작업을 주도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1980년, 빌은 아칸소 주지사 재선에 실패했지만 2년 뒤 재기에 성공했다. 힐러리는 남편의 선거 운동을 적극 지원해 유권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3. 영부인 활동과 정계 진출[편집]


1992년, 남편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힐러리는 미국 대통령 영부인이 되었다. 기존의 영부인들이 조용히 대통령을 내조하는 수준이었던 것과는 달리 힐러리는 적극적으로 정책에 관여했는데, 백악관 동관(East Wing)에 영부인 집무실을 두는 관례를 깨고 서관(웨스트윙)에 집무실을 둘 정도였다. 일각에서는 "워킹맘 영부인" 이라는 말이 있었다는 정도

1993년, 빌 클린턴은 힐러리에게 국민의료보험 개혁을 맡겼다. 이때 힐러리는 고용인이 피고용인의 의료보험을 보장하는 개혁안을 제시했지만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미국의 특성에 민간의료보험 회사들의 엄청난 로비가 더해져 의회에서 개혁안은 부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힐러리는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고 힐러리에 대한 지지율은 40%대 이하로 추락했다. 이후 힐러리는 보험회사에 유리한 법안들을 추진하면서 2016년 대선 때까지 꾸준히 매년 수억원에 달하는 기부금을 받아갔다.

이때 나온 유명한 농담이 힐러리의 옛 애인과 만난 클린턴 부부 이야기. 그 사람은 주유소 사장이 됐는데, 이걸 본 빌이 힐러리에게 "(저 사람이랑 결혼했다면) 당신은 영부인이 못 됐겠네?"라는 식으로 말하자 힐러리가 "아니, 그럼 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겠지."라고 말했다는 것.[10]

역설적이게도 힐러리를 다시 끌어올린 것은 남편 빌의 스캔들이었다. 초기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불륜설이 돌았을 때 힐러리는 이를 보수 측의 음모로 규정했지만 스캔들이 사실로 드러났음에도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2003년에 출간된 그녀의 자서전에는 "이 양반이랑 계속 살아야 해?"라고 고민했다고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11] 이 때문에 그녀가 정치적 목적에서 이혼을 하지 않은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남편을 감싸는 모습에 그녀에 대한 동정 여론이 확산되면서 그녀에 대한 지지율은 70%대를 넘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그녀가 정계로 진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만 훗날 스캔들이 터졌을 당시 남편이 밉지 않았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는 "(남편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남편의 내연녀였던 르윈스키를 가리켜 나르시시즘에 빠진 루니툰이라고 비난하기도.

1998년, 뉴욕 상원 의원 자리가 비게 되자 민주당 인사들의 권유를 받아 상원 선거에 출마했다. 당초 그녀의 강력한 경쟁 상대로는 뉴욕 시장이던 루돌프 줄리아니가 거론되었는데, 아마 줄리아니와 붙게 되었다면 승패를 장담하기 힘들었겠지만 줄리아니가 전립선암으로 출마를 포기하면서 그녀는 55%의 득표율로 상원 의원이 된다. 이후 그녀는 미국에 여성 대통령이 나온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정치인으로 주목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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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참모의장 후보자 마이크 멀린 인사 청문회 당시의 사진.

상원에서는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크 전쟁에 찬성 표를 던졌는데 아프간이야 그렇다 쳐도[12] 이라크 침공에 찬성한 사실은 후에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던 오바마와의 격돌에서 까임거리가 되기도 했다.


4. 200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편집]



4.1. 오바마와의 경쟁[편집]


2007년 이미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민주당 경선에 뛰어들었지만...민주당 대선 경선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뉴비 버락 오바마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승기를 잡은 후보가 대선후보가 되는 미국의 특성상 힐러리로서는 충격적인 결과. 물론 아이오와 법칙이 꼭 필승도 아니긴 했지만 경선 흥행을 위해 힐러리도 전략적으로 띄워주던 오바마가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것이다. 두 번째로 열린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는 승리를 거두면서 반전의 계기가 되나 싶었는데... 이게 민주당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경선의 서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뚜껑을 열기 전에는 힐러리의 대세가 점쳐졌고 그렇게 흘러가나 싶었지만 예상 밖의 결과에 힐러리도 상당히 당황했던 듯하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이후 흑인 배우이자 시인인 마야 안젤루가 힐러리 지지를 선언하면서 흑인 표에 줄 영향에 기대를 모으게 되었다. 물론 오바마는 오프라 윈프리의 지지 선언을 얻어내서 별 실효는 없었지만.


4.2. 예상치 못한 패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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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와 오바마의 지지율 추이. 보면 2월달, 경선 바로 시작 전까지도 버락 오바마가 힐러리에게 뒤지고 있었다는것을 볼 수 있다.

2008년 1월과 2월에 각각 열린 미시간 프라이머리와 플로리다 프라이머리[13]에서는 힐러리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하필이면 두 주가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규정을 어긴 채 프라이머리를 시행하는 바람에 민주당 전국위원회는 미시간과 플로리다의 프라이머리를 무효로 선언해 버렸다.[14] 힐러리는 이에 반발해 미시간과 플로리다의 프라이머리를 다시 실시할 것을 주장한 반면 오바마는 재경선 실시에 미적대는 반응을 보였다.

양측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2008년 2월 5일, 22개주에서 동시에 경선을 치루는 슈퍼 화요일에서 승부가 결판날지 관심이 집중되었다. 보통 슈퍼 화요일에서 승리를 거둔 후보가 대선 후보로 확정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오바마는 13개 주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힐러리는 8개 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두 후보의 득표율은 초박빙이었고 어느 쪽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해 승부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2008년 3월 4일 텍사스, 오하이오, 로드아일랜드, 버몬트의 4개 주에서 경선이 치뤄지는 미니 슈퍼 화요일에서는 힐러리가 텍사스, 오하이오, 로드아일랜드 3개주를 석권해 승부는 계속 이어졌다.(...) 죄다 보수 주에서 이겼네 [15]

그러나 펜실베이니아 주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하자 민주당 내에서는 이제 할 만큼 했으니 그만 사퇴하쇼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힐러리는 끝까지 가겠다라면서 경선 완주를 주장했다.

결국 사상 유례가 없는 혈전이 된 경선은 반년 만인 2008년 6월에야 마무리 되었고, 힐러리는 6월 7일 뉴욕에서 경선 패배를 인정하고 오바마를 적극 돕겠다고 선언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5. 국무장관 재임기[편집]


경선 패배 이후 민주당 내에서는 오바마 대통령-힐러리 부통령의 소위 드림티켓론이 논의되었지만 힐러리는 러닝메이트를 거절했다.[16] 거절한 사유에는 전직 대통령의 부인이 부통령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한 논란과 힐러리가 경선 과정에서 진 거액의 빚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2009년,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는 힐러리에게 국무장관 직을 제안했고 힐러리는 고심 끝에 이를 수락했다. 다만, 미국법상 국무장관이 되려면 부채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힐러리는 경선 때 진 거액의 빚을 아직도 해결 못한 상황이었다. 이 문제는 드라마 《어글리 베티》의 주연배우이자 힐러리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아메리카 페레라가 열성적으로 기부금 모금에 나서준 덕에 해결되어서 힐러리는 국무장관에 취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부지런히 강연 등을 하면서 활동한 결과 5년 만인 2013년 초에 빚도 다 갚았다.

2010년 후반, 차기 대선에 나설 거냐는 질문에 국무장관직을 마지막 공직이라고 생각한다는 답변을 했다.

하지만 2016년 대선에 나설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았다. Hillary Clinton 2016! 페이스북 페이지(물론 비공식)도 있었다.일단 2012년 대선에서 오바마가 클린턴 전 대통령의 지원사격을 받았기 때문에 재선될 경우 어떻게든 클린턴 전 대통령을 배려할 수밖에 없고 이미 대통령을 지낸 클린턴 전 대통령을 배려한다면 그 배려의 결과는 힐러리의 2016년 출마 지지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다만 문제는 힐러리의 건강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근래에 힐러리는 바이러스성 위 질환으로 쓰러지는 과정에서 뇌진탕까지 겹쳐서 2주 정도 요양한 상황이었는데 다시 혈전 증세로 입원했다고 한다. 일단 오바마 2기 행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존 케리가 힐러리의 뒤를 이어 국무장관이 되었으므로 휴식기간을 가질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힐러리의 오랜 참모그룹들이 2008년 경선이후 와해되어 힐러리가 대선에 재도전한다 해도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힐러리의 참모들은 힐러리의 경선패배에 큰 내상을 입었고 힐러리가 오바마의 국무장관 제의를 수락하자 힐러리에게 환멸을 느끼고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 힐러리가 대선에 재도전 하려면 우선 와해된 참모그룹부터 복구해야 하는 과제가 있을 것으로 보였다.

2013년 6월 10일에 트위터를 개설했다. 사실 계정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팔로 기능을 차단했다가 그것을 오픈한 것. 하루만에 26만 명이 팔로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이런 행보는 힐러리가 차기 대권 출마의 포석을 놓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았다.

6월 13일에는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의 행사에 참석해 자신이 국무장관 퇴임 후 세 가지 이슈에 관심을 집중할 것이며, 그것은 '유아발달, 경제성장, 여성의 정치참여'라고 밝혔다. 세간에는 여성의 정치참여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냐는 분석과 함께 대권 행보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국정과제를 큰 틀에서 제시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남편 빌 클린턴과 딸 첼시도 때를 맞춘 듯이 적극적인 대외활동에 나선 것도 힐러리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옴.

그후 차기 미국 대선의 예비 지지도 조사에서도 힐러리가 1위를 차지했다. 아직 힐러리는 대선 출마를 분명히 밝힌 것도 아니고 공화당에 딱히 중량감 있는 차기 주자가 부상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는지는 몰라도 미국 NBC는 힐러리를 다룬 미니시리즈 제작을 발표했고[17] CNN 계열의 CNN 필름은 2014년에 힐러리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었음. 이리 되자 공화당에서 발끈하고 나섰는데, 특정후보 밀어주기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중단하지 않으면 프라이머리 토론회에 NBC와 CNN의 참여를 막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드러냈다.

한때 공화당 차기 대선 후보이자 현 뉴저지 주지사인 크리스 크리스티에게 지지율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크리스티가 뉴저지 포트리(Fort Lee) 시의 시장에게 정치보복을 위해 뉴욕 맨해튼으로 연결되는 조지 워싱턴 다리를 의도적으로 막았다는 의혹, "브리지게이트"가 떠오르면서[18] 다시 크리스티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이렇게 대통령을 향해 거침없는 행보를 하던 힐러리에게도 대형 악재가 발생했다. 30여 년 전 변호사 시절에 여아 성폭행 범을 유죄란 걸 알면서도 감형시켜준 걸 자랑한 육성 테이프가 공개된 것. 어린이, 여성에 대한 인권 신장을 기치로 하는 힐러리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암초를 만난 셈이다. 평소 자신이 주장하던 가치관과 모순됨과 동시에,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미국에서 대단히 민감한 이슈인 소아 성폭행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그 당시 힐러리 클린턴은 12살 밖에 안된 피해자를 두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먼저 유혹했다.", "피해자가 섹스를 즐겼으므로 강간이 아니다." 라는 말로 성폭행범을 변호했다. 이러한 발언은 강간 피해자들에게 가해지는 전형적인 2차 가해 발언이라는 점을 두고 힐러리 클린턴이 여성권리에 대해 말 할 자격이 있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19]

한편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남성을 변호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판사의 요청이어서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 남성이 감형을 받은 것은 '유죄인정합의(plea agreement)'에 따른 것. 즉, 힐러리의 변론을 들은 판사가 피해자의 말이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해서 형량을 줄여준 게 아니라, 피의자가 죄를 순순히 인정했으므로 감형이 된 것이다. 링크
애초에 이 제도를 도입한 취지가 피의자가 순순히 유죄를 인정하도록 이끌어내 바로 형량을 선고하기 위함이다. 즉 유죄 입증을 하지 못해서 재판을 오랫동안 질질 끄는 일을 막기 위함인 것. 참고 자료
물론, 30년 형이 1년형으로 줄어든 건 너무 심했다고 볼 수 있기에 논란이 될 만하지만, 본 위키의 변호사 문서에 이미 설명되어 있듯이, 변호사는 자신이 맡게 된 의뢰인이 아무리 악질이라 해도 의뢰인에게 유리한 변론을 해야 할 의무가 있긴 하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썬 가치관이 보다 중요시되기에 변호사의 업무지침으로 해명하기엔 또 무리가 있긴 하다. 따라서 변호사란 직업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피의자에게 유리한 변론을 한 변호사가 정말로 피의자를 옹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20] 이걸 자기 실력에 대한 자랑으로 남긴 발언은 의문의 소지가 있긴 하다.


6. 201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편집]


2015년 4월 12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이로써 두번째 대권 도전이 시작되었다.
파일:dem2016.png
 
 
범례 번역

힐러리 클린턴

버니 샌더스

마틴 오맬리

조 바이든 [21]
 
 
2015년 1월부터 조사된 주요 후보들의 여론조사 지지율 평균.[22]

최고의 주목을 받는 대선 후보 답게, 여러 가지 논란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중이다. 특히 그녀의 기존 커리어가 양날의 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영부인으로서, 국무장관으로서 탄탄한 인지도와 지지층을 얻음과 동시에 반대파도 양산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그녀가 대선주자가 될 것으로 보는지 국무장관 시절 군사 고문으로 가깝게 지냈던 폴 셀버 공군대장을 정권 교체기에 활동할 차기 합동참모차장에 내정하는 등 밀어주는 분위기다. 사실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 부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공화당에서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젭 부시가 한 때 공화당이 세를 펴지 못했던 히스패닉 계층에게서도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되었지만, 이후 대선에 뛰어든 도널드 트럼프, 벤 카슨마코 루비오에게 치이면서 순식간에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6.1. 샌더스와의 경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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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샌더스 2016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23]

경쟁자가 등장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많았지만, 그게 버니 샌더스일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2016년 현재, 힐러리가 차기 민주당 대선주자로 각광받고 있지만 수많은 미국의 젊은 진보 층은 힐러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공화당과 마찬가지로 대기업들의 노예가 된 민주당의 이미지를 거의 대표 격으로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전에 찬성표를 던진 건 덤. 마더존스 같은 진보 언론페이지에 보면 심상찮게 "힐러리는 내 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내지는 "(공화당은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뽑겠지만, 절대 이상적인 대표가 아니다" 같은 반응을 볼 수 있다. 이런 미국 내의 다른 진보들은 사민주의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엘리자베스 워런을 드림티켓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둘은 대부분의 민주당 의원들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진보적인 정책을 주장하고 있는데다, 힐러리는 실제로 미국 내 대기업들과 길게 얽힌 역사를 가지고 있고, 현재도 언론계 대기업의 슈퍼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24]

그리고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되어,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 경선 참가를 선언하자 진보 성향의 지지자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입지가 약간 약해진 상태이긴 하지만, 힐러리의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건 변함이 없다. 아이오와에서 0.3%p 차이로 신승하여 한번 체면을 구겼고, 뉴햄프셔에서 깔끔하게 털리긴 했다. 그래도 2008년처럼 뉴햄프셔에서 패했다고 경선을 이길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힐러리 측에서도 마냥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비록 대다수의 주에서 힐러리가 유리하긴 하지만, 샌더스의 지지 세력도 늘어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연방대법원의 Citizens United에 반대한다면서 슈퍼팩을 통해 선거자금을 모으는 것을 거부하며[25], 힐러리와는 달리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애국자법에서도 일관되게 반대표를 던졌고 동성애자의 결혼을 찬성해왔다.

여기서 드러나듯 샌더스는 자주 의견을 바꾼 힐러리와는 달리 언제나 일관적이었다는 것이 장점이다.[26] 네거티브 전략을 쓰지 않고[27] 공약만을 가지고 정정당당한 캠페인을 한다고 천명하는 등 미국 정치판에서 여러모로 보기 드문 후보다.[28] 인터넷과 SNS의 일상화는 과거 기록에 대한 접근과 기록의 전파를 쉽게 하므로 입장이 자주 바뀐 힐러리에게는 악재이지만, 일관된 입장을 취한 샌더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일관된 과거 기록을 보여주며 새로운 지지자를 끌어모을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샌더스가 끌어모은 지지자 중 상당수가 SNS를 일상적으로 쓰는 대학생과 청장년층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허나, 버니 샌더스는 힐러리에 비해서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상황이다 보니 특히 히스패닉계, 아시아계, 흑인들의 지지율이 낮은 상황이다. 일단 쇼미더머니의 끝장판인 미국에서 슈퍼팩을 사용하지 않고 선거자금을 모으다 보니 액수에서 힐러리보다 딸리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는 문제. 아이오와 코커스가 끝나고 나머지 후보들이 전부 사퇴하여 둘만 남은 상황에서, 버니 샌더스의 선거운동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서 2008년처럼 엎치락뒤치락 할 수도 있고, 예상대로 싱겁게 힐러리가 대선주자로 금방 확정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미국 정치판이라고 다른 국가와 별 다를 바가 없어서 워낙 '일단 이름/얼굴 아는 놈 찍는다.'의 경우가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네임밸류만큼은 공화당과 민주당 통틀어서 부동의 원탑의 자리에 있는 힐러리가 정치에 크게 관심 없는 사람들이 참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턴 상당히 유리하다. 물론 힐러리 입장에서도 버락 후세인 오바마에게 경선에서 패배한 과거가 있고 버니의 인지도는 비슷한 시기의 오바마보다 앞서므로 경선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는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샌더스 역시 이런 경향을 잘 알고 있으므로 정치에 무관심한 계층에게도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있고[29], 해당 계층에서 서서히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바다에서 힐러리가 압승할 것이란 예상은 깨지고 4.5%p 차이(52.2 : 47.7) 밖에 내지 못하고 이기기도 했고. 그리고 3월 8일 경선에서 미시시피를 거의 독식했지만, 미시간에서 여론조사가 일제히 20%p 이상의 승리를 예견했음에도 거꾸로 샌더스에게 석패했다. 물론 처음부터 확보한 슈퍼대의원이 워낙 많아서 아직까지는 차이가 매우 크긴 한데, 그래도 후보 선출에 필요한 대의원 2383명을 최대한 빨리 확보하고 본선에 임해야 하는 힐러리 입장에서는 여전히 부담이 있다. 미니 슈퍼화요일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에 따라 경선이 생각보다 매우 많이 장기화될 수도 있다.

  • 힐러리는 여성흑인에게 인기가 아주 높지만, 반대로 남성백인들에게는 인기가 많이 떨어진다.[30]
  • 사실 2016년의 힐러리 클린턴은 2008년보다 더한 최종보스다. 힐러리로서는 벵가지 사건 청문회가 공화당 측에서 그의 지지율을 깎으려는 억지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잠재적인 경쟁자인 조 바이든도 불출마를 선언했으므로, 이메일 스캔들만 해결된다면 아주 유리한 경선을 치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 다만 제1차 민주당 대선 후보 토론 이후 버니 샌더스의 인지도가 "당신의 망할 이메일(your damn emails)" 발언으로 엄청나게 늘어난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이 덕분에 각종 온라인 여론 조사와 포커스 그룹 조사에서 샌더스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중이다. CNN이 힐러리에게 호의적인 기사를 쓴 것도 CNN이 힐러리에 기부한 전력을 보아 의심스럽게 비쳐지고 있는 중이다.
  • 그러나 많은 미국 주요, 주류 언론들은 힐러리 클린턴이 샌더스를 실력으로 앞섰다고 평가했고 이는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난다. 정치부 기자들은 결국 힐러리가 美 최초 여성 대통령이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 현재 샌더스의 인기가 25%~30%내외로 나오고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고학력, 주로 30대 이하의 지지율이 힐러리에 비해 높아서 나타난다. 샌더스의 약점이자 곧 힐러리 클린턴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의 핵심 당원, 소수인종, 여성단체에서는 클린턴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인터넷이나 커뮤니티, SNS에서는 샌더스가 우위일지 몰라도, 기성세대나 노년층, 여성에서 클린턴이 여론조사에서 매번 거의 60%이상의 지지를 얻고 있고, 이들의 경선에서의 영향력이 인터넷 여론보다 훨씬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10월 17일자 CNN여론조사의 설문항목과 표본계층의 답변 항목 수치를 보면 명약관화.
    • Income inequality 항목만 빼고 클린턴이 민주당원이 중요시 하는 거의 모든 이슈대결에서도 압도적으로 샌더스를 누른다. 2008년 민주당 경선의 영어 위키백과 항목을 보면 힐러리는 2008년 프라이머리 때도 경선 모집단 지지율은 거의 오바마와 동급이거나 오히려 아주 근소하게 앞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총기규제 문제에서도 예전 자신의 입장을 집어던지고 힐러리가 샌더스보다 훨씬 선명한 색깔을 보여주면서 진보적 선명성도 강해졌다는 평가.
    • 다만 제1차 대선 후보 토론 2일 후에 "총기 규제에 대해 양쪽이 소리치면(shouting)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는다"고 한 샌더스의 발언을 트집잡아 "여자가 말하면 소리치는 것이냐"고 네거티브를 걸었는데, 사실 샌더스는 같은 발언을 토론이 벌어지기 몇달 전부터 계속 해왔기 때문에 성차별(Sexism) 카드를 벌써 꺼내드는 것이냐며 반응이 좋지 않다.[31] 단적인 예로, MSNBC에서는 이 발언을 두고 한심하다(Pathetic)는 말을 반복했고 폭스 뉴스조차 없는 말을 지어낸다며 이성적으로 비판했다 샌더스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말꼬리를 잡은 것일 뿐이다"고 잘라말한 후 총기 관련 현안에 대해 얘기를 했다.
    • 해병대에 입대하려고 했다고 했던 주장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또 다시 거짓말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던 입장에 있었는데 해병대에 입대하려고 한 건 앞뒤가 안 맞다는 것. WP에서는 사실일 가능성이 있지만 힐러리가 말한 것처럼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서 간 것은 아닐 거라고 추측했다.#
  • 제2차 대선 후보 토론에서 샌더스와 오맬리로부터 정치 자금의 출처가 대부분 월가라는 지적을 받자, "나는 9.11 테러 당시 월가의 재건에 온 힘을 쏟았다"고 말해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해당 발언 직후 "월가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은 것을 변명하려고 9.11 테러를 써먹은 발언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고 트위터에서 곧바로 지적을 받았고, 이 지적이 방송에 곧바로 다시 올라올 정도로 파장이 컸다. 해당 지적을 한 인물은 아이오와 주립대 법학과 조교수인 앤디 그루얼이다.
  • 2015년 11월 파리 테러 이후 그녀에게 매우 긍정적인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테러 문제에 관해 힐러리가 모든 공화당 후보들보다 더 미국인들에게 신뢰받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파리 테러가 민주당에게 악영향을 가할 것이라는 우려를 어느 정도는 불식시킨다고 할 수 있겠다.


6.2. 민주당 경선 결과[편집]


슈퍼 대의원 제도 논란이 있었지만 지명되었다. 샌더스 진영과 민주당 내부의 진보 세력에서는 슈퍼 대의원 제도가 상당히 비 민주적이고 민주당을 기득권의 정당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근데 문제는 슈퍼 대의원 제도가 없다 쳐도 클린턴이 승리다. 일반 대의원 역시 힐러리가 더 많이 확보했기 때문. 슈퍼 대의원 제도가 있으나 없으나 16년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가 승리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미니 슈퍼화요일의 투표 결과, 5:0으로 모든 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날의 결과로 일반 대의원의 격차는 300명 이상으로 벌어졌고, 슈퍼대의원까지 합치면 약 1,559명으로 필요 대의원의 약 2/3가량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은 사실상 힐러리 클린턴으로 확정....이라고 생각했으나 무슨 오뚜기처럼 그 후 버니 샌더스가 연승을 거듭하며 관 뚜껑 덮길 거부하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뉴욕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함에 따라 사실상 힐러리 클린턴으로 확정된듯하다. 이후 펼쳐진 5개지역 경선에서도 4:1로 승리를 거둠에 따라 이제는 그야말로 9부능선을 넘었다. 결국 2016년 7월 12일 버니 샌더스가 경선을 포기하게 되면서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 후보로 사실상 결정되었다.

2016년 7월 26일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호명투표에서 버니 샌더스가 "전당대회 절차 규정에 관한 행사를 중단하고 힐러리 클린턴을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하자고 제안한다"고 밝혔다. 이는 대선 승리와 단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경선 패자가 승자의 대선후보 지명을 제의하는 8년 전의 형식을 재연했다. 이에 사회자가 표결 절차를 중단하고 힐러리 클린턴을 대선후보로 지명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민주당 전국위원회를 중심으로 힐러리 클린턴의 후보 추대를 위한 대대적인 경선 부정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7.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편집]


2016년 7월 26일,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DNC) 호명 투표(Roll Call Vote)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대선 후보로 지명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2016년 11월 8일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세계 언론들은 힐러리 클린턴이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될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으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도널드 트럼프는 주요 스윙 스테이트 주인 미시건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플로리다 오하이오 총 5개 주에서 승리했다. 특히 미시건,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는 민주당이 각각 28년에서 32년간 수성했던 지역이였고 미국 최초의 영부인 출신 정치인이고 민주당의 대표 여성 정치인이 민주당이 30년간 수성해온 지역을 정치 무경험자에게 뺏겨버린것인셈. 최종 선거인단 결과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232명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306명으로 선거인단 538명중 과반수인 270명 이상을 확보한 도널드 트럼프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힐러리의 전국 득표는 도널드 트럼프보다 2백 만 표 이상 더 많았다. 그러나 미국 대선은 간접 선거-승자독식제이고, 선거인단 수에서 압도적으로 밀려 낙선했다. 2000년 앨 고어 이후 16년 만에 다시 일어난 현상. 게다가 미국 역사에서도 오랜만에 민주당이 완벽한 패배[32]를 당해 충격이 더 클 수 밖에 없다.

민주당이 당연히 가져갈 것이라 예상했던 러스트 벨트 지역인 펜실베이니아, 미시건, 위스콘신 등을 너무나 소홀히 대했던 것이 패배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실제로도 저 3곳을 트럼프가 싹쓸이하여 사실상 대통령 선거를 결정지었다.

녹색당의 질 스타인은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미시건 재검표를 주장했었다. 그 결과 위스콘신은 재검표를 하였고, 위스콘신에서의 트럼프의 승리란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펜실베이니아 재검표는 포기하였다.# 또한 미시건 재검표는 법원에 의해 중단되었다.#


대선이 끝난 후 살롱 미디어에서는 왜 백인 여성 유권자들이 힐러리를 찍지 않았는지 인터뷰한 영상을 공개했다.

7.1.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재출마 여부[편집]


수십 년간의 정계 활동으로 권력이 있었고, 연예계, 언론의 압도적 지지와 거대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2016년 대선에서 매우 유리했다. 그런데도 졌으니 다음 대선에 다시 출마한다면 위세가 떨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다음에도 출마한다면, 08년, 16년에 이어서 총 3번 도전한 기록을 세우는 셈.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하자 힐러리가 정계 은퇴 선언을 할 것이란 전망도 있었으나 아직 관련 언급은 없다. 일단 재출마를 실천하려면 적어도 경선 통과까지는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2016년과 달리 많은 산을 넘어야 한다.[33]
4년 후면 더욱 나이들었을 때다. 안 그래도 16년 대선 때 건강 이슈로 지지율을 대폭 깎아먹은 적이 있다.
모든 주류 언론이 전방위적으로 트럼프를 까고 힐러리를 쉴드치고 미화했으나, 선거 결과에 제대로 데이고도 이번처럼 힐러리를 밀어줄지는 미지수다.
현직 프리미엄으로 이변이 없으면 간단히 2020년 공화당 경선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은(또는 아예 경선을 안 할 수도) 트럼프와 달리 부정경선이 밝혀진 지금 힐러리에게 2020년 민주당 경선 통과는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다.
1차 대전 이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지고 다시 도전해서 승리한 사람은 존 F. 케네디에게 간발의 차로 졌던 리처드 닉슨이 유일하다.[34] 닉슨도 JFK에게 대선 패배를 겪고 난 후 입지가 축소되어 아이젠하워 정부의 황태자 부통령에서 뒷방 늙은이로 전락했다. 그 때문에 재도전하는 데 8년이 지나야 했다. 대선에서 재수[35], 삼수해 당선되는 경우가 흔한 한국과 달리[36]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대선에서 낙선한 사람이 다시 대선후보가 되지 못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37]

물론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하자 민주당 지지자들은 멘붕에 빠지며 선거 다음 날부터 다음 대선을 논하기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선거가 끝나자마자 버니 샌더스가 2020년 민주당 경선에 출마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관련 기사 [38] 한편 다른 차기 주자로 거론되는 미셸 오바마[39]는 현 정치 상황에 크게 실망해 정계에 진출할 뜻이 없다고 밝혔다.

샌더스의 재도전과 별도로 힐러리의 재도전 여론은 매우 좋지 않았다. 샌더스가 대선이 끝나자마자 다코타 원주민 거주지 송유관 건설 반대 시위장에 가서 시위대와 함께 행동한 반면 클린턴은 케이티 페리연예인들의 시상식에 놀러 다니고 고액 기부자들을 위한 감사 파티를 열어 또다시 빈축을 샀다. 또한 파티와는 별개로 패배 승복 연설 당시 일반 지지자들은 들이지 않고 고액 기부자들과 선거 본부 관계자들만 들여보냈다고 좌파들에게 욕을 먹었다.

뉴욕 시장 출마설이 돌자 선출 공직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2017년 9월 10일 미국 CBS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힐러리가 차기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 더 이상 눈치볼 게 없어졌는지 회고록 What Happened를 출간하며 대선 패배에 대한 분노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뒤끝을 제대로 보여줬다. 코미 당시 FBI 국장이 이메일 스캔들 재조사 결정을 하는 바람에 다 망쳤다며 분노를 표했고 "내게 다가와 투표를 안 해서 미안하다고 밝히는 사람들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지난 대선을 통해 사람들이 무언가 배웠기를 바란다"며 대선 당시 유권자들을 질책하기도 했다. 국개론힐러리 "코미가 역사를 바꿨다" 회고록이 출간되자 역시나 아마존닷컴에서는 빠와 까가 출몰하며 별점테러가 일어났는데대선 회고록 낸 힐러리, 독자 리뷰서도 지난 대선 데자뷰? 아마존 측에서 '출간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도 벌써부터 리뷰가 나온다는 게 말이 안 된다'며 책 구입도 안한 채 1점 테러를 남발한 리뷰들을 모조리 삭제했다. 가디언 기사 다만 주로 1점 리뷰만 삭제했는지 이후 5점 평점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2018년 10월 23일, 뉴욕에 위치한 힐러리 클린턴의 집으로 파이프 폭탄이 배달됐다. 오바마를 비롯한 민주당 인물들도 노렸기 때문에 테러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2018년 미국 우편 폭탄 미수 사건 항목 참조.

대통령 자리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지 인터뷰에서 농담조로 대통령 해보고 싶다고 발언하기도 했지만#, 결국 2019년 3월 4일 다시 한번 2020년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 #

2019년 5월 딸 첼시 클린턴과 프로덕션 회사 설립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것은 은퇴 이후의 오바마 대통령과 비슷한 행보이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2018년부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공동 책임프로듀서로 여성 참정권 획득에 대한 책 <더 우먼스 아워> 를 드라마화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영상이나 정치콘텐츠 제작에 활발히 임할 것으로 보인다.

힐러리가 여러차례 불출마를 밝혔던 배경에는 지지자들의 열망이 높았던 탓도 있다. 2019년 11월 12일 저녁(현지시각) 영국 BBC 라디오의 생방송 토크 프로그램인 엠마 바넷 쇼에 출연해, 내년 대선 출마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분명히 말하겠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재도전을 생각해보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클린턴은 또 민주당 대선 경선 막판에 합류할 것이냐는 확인 질문에 “내가 늘 말하는 것처럼, 나는 ‘결코 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내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어떤 대통령이 되었을지, 또 트럼프 행정부와는 어떻게 다르게 일을 했었을지 항상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는 대단히 의미 심장한 발언인데, 3월에 불출마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출마 가능성을 시사한 것. 물론 ''이 스튜디오에서 당신(진행자)과 이야기 나누는 이 순간엔 자신의 대선 재출마가 나의 계획에 들어있지 않다"라고 선을 긋긴 했다. 덕분에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 재출마 여부는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연말연시까지는 미지수로 남았다.

2020년 1월 2일에 영국 북아일랜드 최고 명문 중 하나인 퀸스 유니버시티 벨파스트의 총장에 임명됐다. 역시 대선과 거리를 두는 행보.# 2020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경선 후보로 출마한 마이클 블룸버그가 한때 힐러리를 부통령 후보로 검토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블룸버그 본인의 저열한 토론회 실력으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한 뒤 조기 사퇴를 선언하면서 의미는 없어졌다.

결국 오바마 행정부 시절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이 버니 샌더스를 꺾고 민주당의 후보가 되었고, 카멀라 해리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 2020년 대선과의 인연은 물 건너감과 동시에 이제 완벽히 정계 은퇴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의 주UN 미국대사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만약 임명이 된다면 고립주의를 내세운 트럼프와 달리 정치적 거물인 힐러리를 임명함으로써 국제 협력을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성향을 가장 선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인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힐러리로서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첫 국무장관 및 당의 공식 지명을 받은 대선후보에서 몇 급 아래인 직위로 내려가는 셈이라 수전 라이스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런 보도 자체가 힐러리에게 굴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고 비판했다.

결국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전 국무부 차관보가 주UN 미국대사로 내정되면서 바이든 행정부 입각도 없던 일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20년 12월 14일, 이 선거에서 뉴욕 주 선거인단으로서 남편인 빌 클린턴과 함께 같은 당 후보인 조 바이든카멀라 해리스에게 투표를 했다. 그리고 바이든 전 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승리하면서 4년전 대선 분패의 간접적인 복수를 이뤘다.

8.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편집]


2022년 3월 22일,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이 알려졌다. 다행히 증상은 경미하다고 한다.#

2022년 7월 8일,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이 터지자 자신의 트위터에 애도의 메시지를 올렸는데 여기에 아베 전 총리를 '여성과 민주주의의 옹호자'로 묘사한 부분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재임 중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한 아베 전 총리에 대해 클린턴 전 장관의 평가가 부적합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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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시간 1947년 10월 27일 오전 9시 45분.[2] #[3] The Conscience of a Conservative[4] 일명 seven sisters라고도 불렸다.[5] 프린스턴 대학교예일 대학교1969년에, 하버드 대학교1977년에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했다.[6] 물론 똑똑한 학생들 중에서도 비싼 학비를 감당할 형편이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만큼 특출하게 공부를 잘했어야 했다.[7] 2016년 현재 UC 버클리에서 교수로, 그리고 진보 운동가로 일하고 있다[8] 개중에는 뉴에이지 식의 허튼 소리들도 있었고, 나름대로 깊이 있는 어구들도 있었다.[9] 참고로 빌 클린턴이 1살 위인데 1968년도에 조지타운 대학교 졸업 후 장학생으로 영국옥스퍼드 대학교에 유학했다.[10] 이 일화를 실화로 아는 사람이 많는데 사실이 아니다.[11] 한 예로 스캔들이 터진 직후 빌 클린턴은 가족들의 냉대 때문에 침실이 아니라 백악관 거실의 소파에서 혼자서 자야 했다고 한다.[12] 반대했다가는 매국노 소리 들으니까...[13] 당시 오바마는 표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덕분에 플로리다에서는 힐러리와 "Uncommitted"가 대결을 벌였다.[14] 슈퍼 화요일에 시행해야 된다는 전국 위원회의 말을 씹어서 위원회 측에서 대의원 투표권을 박탈해 버렸다. 나중엔 명당 0.5표씩 카운트 되게 조정이 되기는 하였다.[15] 텍사스는 프라이머리와 코커스를 둘 다 진행했다. 프라이머리에서는 힐러리가, 코커스에서는 오바마가 승리하였다.[16] 이 틈을 타 공화당의 존 매케인은 알래스카 주지사인 세라 페일린이라는 비교적 덜 알려진 여성 부통령 후보를 지명해 힐러리를 지지했던 여성층의 지지를 이끌어 내려고 했지만, 이후 페일린의 안 좋은 면들이 대거 드러나면서 결과적으로 오히려 마이너스만 되었다.[17] 그런데 주연배우가 힐러리 본인과는 달리 섹시한 이미지의 다이앤 레인이라 뒷말이 많다.[18] 조지 워싱턴 다리는 힐러리를 돕는 다리?[19] 다만 해당 보도에서 공개된 육성은 (피의자가)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통과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나는 거짓말 탐지기를 믿지 않게 됐죠뿐이다. 이 부분만 보면 어쩔 수 없이 변론을 맡은 자신이 보기에도 피의자가 너무나 파렴치해서 헛웃음이 나왔다고도 해석이 가능하다.[20] 비슷한 사례로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가 살인을 저지른 조선족을 변호한 것을 문제 삼은 트위터 글이 있는데, 애초에 이런 범죄자들은 승소 가능성이 없어서 아무도 변론을 맡으려 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이런 변론을 맡은 문재인 후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형사 재판은 변호사 없이는 성립되지도 않으니 어차피 누군가는 악역을 맡아야 한다.[21] 취소선이 그어진 이유는 본인이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22] 2015년에 지지율이 한 번이라도 10%를 찍은 후보를 주요 후보라고 정의[23] 힐러리가 자동차를 탈 때 버니가 발로 달리는 것은 슈퍼팩의 빵빵한 자금 지원을 받는 힐러리와 소액 모금만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버니의 자금력 차이를 비유한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슈퍼팩은 아니지만)버니의 분기별 모금액이 힐러리를 추월하면서 옛말이 되었다. 참고로 버니는 고등학교 때 중거리 육상 선수였다.[24] 미국 내 대기업들은 대선자금을 빌미로 정치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25] Citizens United를 뒤집겠다고 약속한 법관을 연방대법관으로 지명하겠다고 해놓고 슈퍼팩은 일단 써먹고 보는 힐러리의 행보와는 대조적이다.[26] 힐러리 측에서는 힐러리가 주요 현안에 대해 입장을 바꾸는 것을 "진화한다(evolve)"는 말로 표현하지만, 이 표현 때문에 사람이 언제까지 진화할 수 있느냐며 포켓몬(...)이냐는 비아냥을 듣는다.[27] 정책이나 공약과 관련이 없는 인신공격을 자제하는 것을 뜻한다. 버니는 그 자리에 힐러리의 정책에 대한 비판을 더 채워넣는 편이다.[28] 그것도 양당제인 미국 정치판에서, 무소속 후보로 1991년부터 하원의원~상원의원을 순수하게 시민 지지자들의 소액 기부만으로 쭉 해온 건 정말 대단하다. 또한 대선 출전 선언을 한 지 24시간 내에 샌더스가 받은 돈은 무려 150만 달러. 대선 출마를 선언한 어떤 후보도 24시간 내로 저만큼 기부 받지 못했다고 한다. 시민 지지자들의 소액 기부만으로 저만큼 모은 것이다![29] 샌더스 본인은 이런 전략을 정치 혁명(Political Revolution)이라 표현하고 있다.[30] 실제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백인 남성에게 표를 거의 받지 못했고, 백인 여성에게도 42%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나 흑인 여성에게 압도적 지지를, 흑인 남성에게도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31] 본인이 별 거 아닌 후보라고 생각하면 그냥 언급을 하지 않으면 될 것을 왜 먼저 건드렸느냐는 것이다.[32] 연방 상하원 선거판이 원래 공화당에 유리하게 짜여져 있어 공화당의 승리가 유력했다. 애초에 공화당이 이미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고[33] 2016년에도 샌더스가 선전하긴 했으나 슈퍼 대의원 제도 때문에 힐러리가 경선 자체에서 패배할 가능성은 경선 내내 아주 낮았다.[34] 대선에서 패배하고 재도전해서 당선된 경우는 의외로 꽤 있다. 토마스 제퍼슨, 앤드루 잭슨, 윌리엄 헨리 해리슨,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있다.[35] 김영삼, 문재인[36] 김대중은 무려 4수(!!!) 끝에 당선됐다.[37] 정확히는 토머스 E. 듀이애들레이 스티븐슨, 리처드 닉슨을 제외하면 전부 대선에서 낙선한뒤 재출마하지 못했다.[38] 결국 샌더스는 팔순을 앞둔 나이로 대선에 재도전해, 2020년 민주당 대선에서도 선전하지만 역시 후보로 선출되지는 못했다.[39] 오바마 대통령보다도 지지율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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