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 지하철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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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2.2. 양택식 시장과 지하철 1호선
2.3. 구자춘 시장과 2호선 순환선
2.4. 추가 구상들
3. 구간


1. 개요[편집]


서울 지하철 운행 구간을 착공 및 개통시기 별로 이르는 말로 운영주체는 서울교통공사(구 서울지하철공사, 서울메트로)이다. 서울 지하철이 처음으로 착공된 1970년부터 3 ~ 4호선이 동시 개통된 1985년까지 건설된 지하철이 이에 해당된다.

1기 지하철이라 하면 단순히 서울 지하철 1 ~ 4호선을 묶어서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 중 일부만이 1기 지하철이고 나머지는 2기 지하철 구간이다.

1기 지하철이라는 말은 1기 지하철이 지어진 1970년~1985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1호선과 2, 3, 4호선은 사실상 별개의 계획 하에서 착공된 노선이다. 그러나 1989년에 서울시에서 기존 노선 연장 및 4개 지하철 신설 계획을 2기 지하철 계획이라고 퉁쳐 부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이전에 지어진 지하철은 '1기 지하철'로 분류되었다.


2. 역사[편집]



2.1.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편집]


1939년, 일제강점기 경춘철도회사는 동대문~성동역 지하철 건설을 계획했으나 2차 세계대전으로 무산된다.

광복 후 1960년대부터 지하철 계획이 시작됐다.
1966년 계획 [ 펼치기 · 접기]
파일:1기지하철1966.png

1966년 계획
1호선
서울역~청량리[1]
2호선
서소문-시청-을지로-동대문-신설동-성동역
3호선
갈현동-중앙청-안국동-종로2가-을지로2가-퇴계로-왕십리-천호동
4호선
길음동-성북동-혜화동-퇴계로-말죽거리
이 계획은 6개 지구[2]에 새로운 부도심을 형성하여 다핵도시로 전환하기 위해 구상되었다.

그런데 1968년, 김현옥 서울시장은 서울전차를 폐선하고 SS트램을 도입하는 계획을 세운다.

초기 구상안
순환
연희-서대문-세종로-답십리-금호동-한남동-제2한강교-망원
방사1
마포-서울대교-여의도-도림-개봉-오류-화곡-김포공항-가양-염창-양화-제2한강교-여의도
방사2
남산-제3한강교-양재-과천-안양-시흥동-구로동-노량진-국립묘지-제3한강교
방사3
행당-워커힐-망우-태릉-상계-의정부입구-도봉-쌍문-수유-미아동-고려대입구-신설/용두
방사4
연희-증산-구산-박석고개-신도면-화전-수색-신촌
이렇게 5개 노선을 구상했다.

후기 구상안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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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기지하철ss.png

초기와 후기가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자금 조달 문제, 차관 문제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2.2. 양택식 시장과 지하철 1호선[편집]


1970년 4월 양택식 서울시장은 지하철 노선들을 확정지었다.
1970년 계획 [ 펼치기 · 접기]
파일:attachment/3553829758_ac2af715.jpg

1호선
서울역 ~ 청량리 (수도권 전철 직결: 수원/인천 ~ 서울역, 청량리 ~ 성북)[3]
2호선
김포공항 ~ 답십리/말죽거리[4][5]
3호선
연신내 ~ 수유[6][7]
4호선
독산 ~ 방이(초기에는 대림동 ~ 포이동. ∩자 선형)[8][9]
5호선
가좌 ~ 성남[10][11]

그러나 개통 당일에 하필 육영수가 저격당하면서 양택식 시장이 사임하고[12] 후에 구자춘 시장(1974~1978)이 취임하면서 이미 개통된 1호선을 제외한 2 ~ 5호선 기획은 파기되었다.

2.3. 구자춘 시장과 2호선 순환선[편집]


구자춘 시장은 강남 ~ 영등포 ~ 도심 3핵도시론에 입각, 이를 연결하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장거리 순환선인 서울 지하철 2호선을 계획하고, 3호선은 불광동 ~ 서울역 ~ 사당, 4호선은 미아동 ~ 동대문 ~ 보광동 ~ 영동을 잇는 형태, 즉 지금 3호선과 4호선을 반씩 섞어놓은 듯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13] 2호선은 이 당시의 계획 거의 그대로 착공되었고, 3호선과 4호선은 1977년경 계획이 수정되어 서울을 X자로 관통하는 현재 서울 지하철 3호선, 서울 지하철 4호선의 선형이 완성된다.



그러나 당시 중앙정부든 서울시든 빈약한 재정으로 인해 원하는 만큼 지하철을 짓기는 어려웠다. 이에 서울시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서울 지하철 4호선을 민간투자사업으로 지으려고 했고, 여러 재벌들의 투자금을 끌어모아 1979년 3월에 (가칭)지하철건설주식회사를 출범시켰으며, 이 기업은 1980년 2월에 정식 사명을 서울지하철건설주식회사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 기업의 주도 하에 자금을 모아 서울 지하철 3호선과 4호선을 착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경제위기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3호선과 4호선의 공사비는 착공 당시 예상되었던 수준의 2배 이상으로 치솟았고, 서울지하철건설주식회사에 출자한 기업들은 추가 출자를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서울시는 지하철공채를 발행하여 부족한 지하철 건설 사업비를 메꾸는 대신, 민간투자사업 방식을 포기하고 서울시가 전액 출자하는 지방공기업 방식으로 지하철을 건설하고 운영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지하철건설주식회사는 해산되고, 이를 대신하는 형태로 1981년 9월 1일에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를 설립한다. 출처 이에 따라 1호선과 2호선을 서울특별시 지하철본부가 건설한 것과는 달리 3호선과 4호선은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가 직접 건설하고 운영하였다.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는 그 후 서울메트로로 사명을 개정하고,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와 통합해 서울교통공사가 된다.

2.4. 추가 구상들[편집]


1980년대 중반부터 서울 지하철은 확장을 멈추고 숨고르기에 들어간다. 이 때에도 수많은 지하철 노선 구상이 서울시에서 나왔지만 2기 지하철 계획이 1989년에 세워지기 전까지 서울에서는 지하철을 추가로 건설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지하철 건설 부채 및 운영 적자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1~4호선 모두 1980년대 중반에는 예측 대비 과소한 수요로 인해 적자에 시달렸고, 막대한 지하철 건설 부채를 상환할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14][15] 이 문제는 연일 신문과 뉴스에서 오르내렸고, 서울시 내 그 누구도 지하철을 더 건설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1984년에 2호선이 완전 개통할 때 서울시는 지하철 건설을 담당하는 지하철본부를 해체해버렸다. 그런 서울시가 다시 지하철 건설에 나선 것은 1980년대 후반으로, 기존 지하철의 이용객이 폭증하고 도로교통의 정체가 극심해진 데 따른 것이었다.[16]

1 - 5호선 연결은 구자춘 시장 취임 이후에도 계획이 존재하긴 했지만, 종로 지하에 예상못했던 지장물이 많아서 폐기시켰다는 썰이 있다.1976년도 계획[17] 이때 흔적이 신설동역 지하 3층 유령승강장이다. 그 외에 용두 ~ 신답 구간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복선터널을 만들려던 노반이 남아 있다.[18] 참고.

이후 5호선은 특이하게도 서쪽 김포공항 ~ 구로구 구간과 동쪽 천호동 ~ 잠실 ~ 성남시 구간으로 추진이 되었다가 1981년경 천호동 ~ 성남시 구간은 6호선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둘 다 우선순위에서 밀렸는지 어느 순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19] 이후 2기 지하철이 계획될 때 5호선 서쪽 구간 중 방화 - 까치산 구간은 70년대 5호선 계획과 합쳐서 현재의 5호선이 되었고, 나머지 까치산 - 신도림 구간은 2호선 신정차량사업소와 맞물려 신정지선이 되었으며, 5호선 동쪽 구간은 8호선이 되었다.

3. 구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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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역~동대문 구간은 현재와 비슷하게 가지만 동대문~청량리 구간은 청계천변 고가노선을 검토했다.[2] 영등포, 강남, 천호, 망우, 숭인, 은평[3] 유일하게 실현된 노선이며 이미 철도청구간인 수도권 전철과 직결운행을 염두에 뒀다.[4] 답십리에 분기선이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군자차량기지 때문으로 추정된다. 군자기지는 첨부터 여러 노선의 열차를 검수할 목적이였다. 공교롭게도 1호선 시청역과 환승도 동일하게 존재했다.[5] 말죽거리 ~ 여의도 구간 선형이 현재 463번 버스와 상당히 비슷하다.[6] 현재 3호선과 4호선 강북구간 직결로 생각하면 된다.[7] 연신내 역촌 구간은 현재 6호선의 응암순환 구간과 비슷하다.[8] 한강을 두 번 건너는 ∩자 형의 노선이었으나 기획중 연장변경이 생겨서 기괴한 선형으로 되었다.[9] 1호선 서울역과 환승연계가 기획되었으며, 1호선과 4호선연결선로도 원래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10] 종로구간은 1호선과 혼용할 기획이었다. 특이사항은 1~4호선은 좌측통행이었지만 5호선은 우측통행으로 기획 했었다. 신설동역 유령승강장과 통행전환 꽈배기굴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검수도 군자기지에서 검수할 기획이었다.[11] 5호선도 천호까지 기획했었는데 당시 성남시민들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성남까지 연장 떡밥(...)을 쳤던거~... 실상은 상술한 광주대단지사건에 잘 나와 있다. 현재는 서울 지하철 8호선이 성남 구간을 계승했다.[12] 기념행사 총괄 담당을 했었는데 보안취약으로 인해 터진 걸로 판단하여 책임하에 사퇴를 했고 그때 경호원 쪽도 줄줄이 사퇴했다. 그리고 기념행사 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개통식을 거행하려 했으나 대통령은 끝내 개통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국내 최초인 만큼 축제분위기여야 할 1호선 개통식은 침울한 분위기에서 조촐하게 개통식을 거행했다. 공교롭게도 개통식이 치러진 그 날 오후에 비가 내렸다고(...)[13] 이 계획에선 3호선과 4호선 환승역이 없었다. 3호선 강남구간이 4호선이었고, 4호선 강남구간이 3호선이었다. 즉, ) ( 형태의 노선이었다는 것.[14] 그도 그럴것이, 1호선을 제외한 2~4호선의 경우 당시 서울 시가지 분포에 비해서도 너무 멀리 나간 것이다. 강남지역은 이제 막 테헤란로 북쪽 지역이 주거지역으로 개발된 정도에, 테헤란로의 업무지역도 대부분 비어 있었다. 잠실 정도와 주공아파트나 올림픽 시설물로 그럭 저럭 시가지 같았던 정도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주요 업무지역이 4대문 안에 집중된 탓에 나름 인구 밀집지역인 관악구 등에서는 도심 진입시 뺑 돌아가는 2호선 보다는 25번 등 시내버스를 애용하는 바람에 특히 2호선 수요를 만들 일도 없었다. 3호선 연선인 서울 서북지역은 단독주택으로 개발이 끝난 곳이라 1980년대 후반 빌라 건설이 붐이기 전 까지는 인구밀도가 높지 않았으며, 4호선 연선인 동북지역은 수유역 북쪽으로는 농촌지역 허허벌판이 대부분이였다. 미래를 대비, 북쪽 끝까지 건설했다 해도 당시 기준으로는 나가도 너무 나간 것. 나중에 지옥철의 대명사가 된 4호선 동북지역도 개통 직후부터 80년대 말까지는 10량 승강장에 6량으로 다녀도 전혀 문제가 없던 시절이였다.[15] 이런 문제를 완벽(?)하게 해소한 것이 바로 외곽의 대규모 택지개발이였다. 허허벌판에 지하철이 뚫려서 교통이 좋아진 것을 계기로 80년대 중후반 대규모 택지개발을 진행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상계주공아파트와 창동, 노원지역 아파트군은 이 때 완성된 것이다. 군사정권 스타일의 저가 토지수용과 아파트 개발로 발생한 개발 이익금을 지하철에 투자할 수 있었고, 연선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많이 들어옴에 따라 과소한 수요가 지옥철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수요가 많아지게 된다.[16] 서울특별시 도시기반시설본부(2003), 서울지하철건설삼십년사[17] 2호선이 순환선으로 바뀌면서 4호선의 강남을 가로지르는 구간이 2호선으로 대체되었고 5호선 충정로 서쪽 구간이 기존 2호선 구간으로 대체되었으나, 한양대와 2호선 지선을 잇는 삼각선, 3호선 전 구간과 4호선의 ∩형 구간, 5호선 신설동 동쪽 구간이 그대로다.[18] 신설동 ~ 답십리를 잇는 구간 흔적이며, 현재의 본선은 차량기지 입출고선 용도였다.[19] 현재 잠실역에서 잠실나루역 방면 지상으로 나오기전에 빈 공간이 나오는데 아마도 5호선 중정비 연결선로 같은 용도로 계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2호선 신도림역의 거대한 규모는 신정기지 및 그 입출고선로(신정지선)때문만이 아니라 5호선 분기역으로 계획되었던 흔적이기도 하다.[20] 신정지선2기 지하철 계획이기에 제외